이런 생각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인터넷, 유튜브 그리고 AI의 등장 및 그 맹활약으로 인해 단12:4 말씀 중의 ‘지식이 증가하는 마지막 때’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들 가운데 특히 유튜브는 인간 삶의 동반자 급 자리 차지한 지 이미 오래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바로 그 유튜브 때문에 힘써 쌓아가던 말씀 체계 망가뜨릴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더군요. 그러니까, 누룩(?) 들고 다니는 유튜브를 신실한 청지기(^^) 쯤으로 알고 그것과의 화평 분위기 즐기다 보면 칭의, 성화, 영화는커녕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다니기 딱 좋은 세상...아닌가 싶더라는 거죠.
완전(^^) 본의 아니게, 서울의 어떤 교회 예배 현장을 담은 1분짜리 유튜브 쇼츠 영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럴듯한 가운 차림의 목사님이 갈2:20 말씀을 외며 외치더군요.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세계적 규모의 드넓은 예배당(그 교회 표현에 따르면 ‘성전’) 안에 화답의 우렁찬 함성 “아멘!”이 울려 퍼졌음은 물론입니다.
그 장면을 접하는 순간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을...보고 싶지 않은 이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구나, 유튜브 너 때문에’라는 서글픈 생각 말입니다. 우리 성경, 즉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는 분명히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이들은 달라도 보통 다른 정도가 아니잖은가...!...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리신’과 ‘자신을 주신’, 그 차이는 논외로 함) 그러니까, 유튜브가 감추고 있던 ‘믿음의 누룩’ 같은 게 감지되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모든 자들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이는 그 의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라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롬3:22 말씀에 의거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원리를 명쾌히 설파한 위 롬3:22 말씀에 따르면, 1)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님), 바로 그것이며, 2) 그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재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님)에 적용된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자들에게(로 넘어와) 임한다, 즉 전가(轉嫁)된다...라고 규명되어 있습니다.
위 롬3:22 말씀 내용을 달리 표현하면, ‘칭의’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믿음(애당초 믿을 게 아닌...?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칭의’의 본질을 살펴봄에 이어 ‘믿음’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믿음의 근원...그 의미가 다소 애매한 측면 있습니다만...어쨌든...^^...제가 생각하는 ‘믿음의 근원’에 관한 주요 말씀 구절들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the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면에서 큰 담대함을 획득하느니라...라는 딤전3:13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한 구원(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에 이를 수 있느니라...라는 딤후3:15 말씀이 그 예들로서, 그것들에 따르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 근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위 갈2:20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라고 선언, 즉 신앙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칭의’의 본질과 ‘믿음’의 근원에 관하여 롬3:22, 딤전3:13 그리고 딤후3:15 말씀들을 설파했던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만나 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까지 충성했던 사도 바울이, 차원이 다른 기독교 교리 담은 복음을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노라(갈1:11~12 참조) 했던 사도 바울이 과연...‘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노라...라고 했을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절대로 그렇게 말했을 리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한편, 오히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그 말씀을 숙연함 또는 비장함 가운데 했으리라...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 이들 둘의 차이가 어쩌면 인간 중심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 중심, 즉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의 차이, 바로 그것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바른 성경, 즉 참된 하나님 말씀으로 믿음 생활 영위할 수 있음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 한편, 유튜브 등이 뿌려대는 누룩들에 주의하여 항상 그것들을 털어내며 믿음 생활 계속할 책임, 그리고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는 누룩들을 더 빠른 속도로 제거해 나갈 책임, 그러니까, 바른 성경 가진 자로서의 의무...같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그 내용이며 분위기가 너무나 가슴으로, 마음(heart)으로 와닿기에 갈2:20 말씀 중 해당 부분을 원문 그대로 옮겨 적어 봅니다.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이어서 그 내용 그대로, 그 분위기 그대로 정확히 번역한 우리 성경, 즉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중 해당 부분 또한 옮겨 적어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그리고...조용히 화답해 봅니다. 아멘...!...이라고 말입니다. ( 끝 )
2025-04-14 23:33:52 | 최영오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건강은 잘 챙기고 계신지요? 벚꽃이 만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금세 추워지는 날씨에 매년 놀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 목사님께서 미국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를 방문하시고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재 자매모임에서 함께 나누고 있는 『예배』라는 책은, 미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며 수많은 죄인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게 하는 데 헌신하신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님께서 집필하신 책입니다. 맥아더 목사님은 연로하시고 암 투병 중이셔서 이제는 강단에 서지 못하시지만, 평생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오신 그분의 삶과 글은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각성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는 5,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함께 공예배를 드리는 지역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교회라도, 하나님과 예배를 삶의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쉽게 다른 것들이 차지하게 되고, 그 예배는 더 이상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교회로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랑침례교회도 하나님 은혜로 많은 성장을 이뤄왔습니다. 저부터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의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나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변치 않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자매모임에서 함께 나눈 내용을 성도님들과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115p 거룩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기 전에는 명철한 자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모든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역겨운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
:‘역겨운 우상숭배’라는 표현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상숭배에 대해 다룰 예정이라 하여, 더욱 집중하며 읽게 됩니다.
118p 하나님을 알아가는 어려움: 아무도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아무리 탁월한 인간의 지성이라도 하나님은 그 안에 국한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가장 기초적인 것들이다.
:요즘과 같은 시국 속에서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들도 하나님을 알아가려 애쓰고 있는데, 왜 일부 목회자들은 그렇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라면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고 공부할 텐데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어떻게 인도해 가실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섭리하고 계실지 아직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뜻이 이 안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염려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23p 하나님의 불변성은 축복이다: 하나님이 변치 않으신다는 사실은 믿은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용서도 영원하다. 하나님의 구원도 영원하고, 하나님의 약속도 영원하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날마다 변덕스럽고 흔들리는 저에게도 참 큰 위로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30대 중반에 구원을 받은 이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가장 감격하게 만든 것은, 그 긴 시간 동안 나 같은 사람을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부 장로교나 교단에 따라, 우리의 행위로 인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곳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가르침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위를 반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텐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기에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경 말씀의 변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그 자체, 즉 텍스트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성경을 왜곡합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두 번째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25p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하셨을까?" 하고 질문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것은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충분한 대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분을 마치 그분의 창조물 중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치 저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바라보며, 공의가 무너지고 의를 따르려는 이들이 오히려 고난을 겪고, 악이 거리낌 없이 활개치는 현실을 눈앞에서 보다 보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질문이 자주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상황이 긍정적일 때만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자신이 아들이라 부르셨던 이스라엘도 책망하시고 심판하신 분이십니다(물론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시죠). 저 역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었을 당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자유대한민국을 정말 버리신 것일까?”라는 깊은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그 절망의 뿌리는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이 나라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으로 가득하고 썩어 있었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결정을 허락하셨을까…”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서 애통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미 이 세상이 점점 악을 향해 달려갈 것임을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을 기억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나아가게 됩니다. 말씀 앞에 설 때, 오히려 평안해졌습니다.
127p 하나님이 일곱째 날 쉬셨을 때 우리를 위한 육체적 영적 패턴을 확립하셨고, 그것은 안식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구원 계획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우리에게는 육체적 안식과 예배와 영적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창조물을 보호해주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공적 예배와 주일의 쉼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 시간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한 주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의 근원입니다
129p 에베소서 3장 20절은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 준다.
:2014년 새해 첫날의 설교 본문은 에베소서 3장 20절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저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합니다. 너무도 은혜로운 말씀이었고,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에 그대로 비추어 보아도 여전히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현실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일부 국민들은 공산주의나 중공군에 우호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지만, 우리의 소망은 결코 사람이나 체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박국 대언자가 그 참담한 시대에도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설령 우리가 어떤 정치 지도자 아래에 있든, 심지어 중국의 속국이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131p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축소하고, 인간의 위선으로 조종하거나 속일 수 있는 분으로 여기는가? 이것도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같은 실용적인 존재로 여기는가? 하나님에 대한 그런 관점은 모두 이교도적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다시금 다짐하게 됩니다. 체제가 어떻게 바뀌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예배하는 삶’을 반드시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초월한, 영원한 소명입니다.
2025-04-14 18:56:48 | 박수현
2025년 4월 13일 (주일 오전)
https://youtu.be/oYdoLjNh8Go
2025-04-13 20:05:09 | 관리자
2025년 4월 11일 (금요일 저녁)
https://youtube.com/live/Myt5w8oMwf4
2025-04-13 14:06:47 | 관리자
안녕하세요?
4월 2주차 성경읽기 퀴즈 정답을 올립니다.
샬롬~
1.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마루의 안팎은 무엇으로 입혀졌나? (왕상 6장)
금(30절)
2. 히람은 어디에서 빛나는 놋을 부어 성전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나? (7장)
요르단 평야 숙곳과 사르단 사이의 진흙땅(46절)
3. 주의 언약궤 안에 있는 것은? (8장)
두 개의 돌판(9절)
4. 솔로몬이 모든 건축이 끝난 후 히람에게 몇 개의 도시를 주었나? (9장)
스무 개(11절)
5. 솔로몬 왕이 두들긴 금으로 만든 방패는 모두 몇 개인가? (10장)
큰 방패 이백 개, 작은 방패 삼백 개(16-17절)
6. 주께서 솔로몬의 대적들로 누구와 누구를 일으키셨나? (11장)
에돔 족속 하닷(14절), 르손(23절)
7. 르호보암 왕이 유다의 도시들에 거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사람은? (12장)
아도람(18절)
8. 여로보암 시대에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결국 어떤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는가? (13장)
사자(24절)
9.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언제 아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했나? (14장)
그녀의 발을 도시에 들여놓을 때(12절)
10. 아사가 유다를 통치한 기간은? (15장)
사십일 년 동안(10절)
11.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누가 그를 대적하였나? (16장)
시므리(9절)
12.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포하고 주의 말씀에 따라 어디로 가서 숨었나? (17장)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3절)
13. 이세벨이 주의 대언자들을 끊어 버릴 때에 누가 대언자 백 명을 데려다가 숨기고 먹을 것을 공급하였나? (18장)
오바댜(4절)
14. 주께서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이후에 무엇으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나? (19장)
고요한 작은 음성(12절)
15. 벤하닷 군대가 이스라엘과 이레 동안 싸우다가 패배하자 남은 자들이 도망간 곳은? (20장)
아벡(30절)
16. 이세벨은 누구의 이름으로 나봇의 도시에 거하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나? (21장)
아합(8절)
17. 대언자 사백 명가량 외에 아합 왕이 미워한 대언자는? (22장)
미가야(8절)
18. 아하시야 왕은 엘리야에게 오십인 대장과 부하 오십 명씩 몇 번을 보냈나? (왕하 1장)
세 번(13절)
19. 엘리사가 소금으로 물들의 근원을 고쳐 준 도시는? (2장)
여리고(21절)
20. 엘리사의 종 이름은? (4장)
게하시(12절)
2025-04-13 13:53:57 | 관리자
2025년 3월 9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xFbO2svjTUI
2025-04-13 10:46:09 | 관리자
2025년 4월 6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mbXganvBAWE
2025-04-13 10:12:20 | 관리자
저는 소규모 자매모임을 통해 제가 보지못한 저의 부족함을 알게되어 점점더 겸손해지고 좋더라구요. 무엇보다 모든 대화의 끝이 하나님,예수님으로 귀결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구요! 가끔 제 부족함 드러나지는 것에 이불킥할때도 있지만 묵묵히 지켜봐주며 힘내~하시는 자매님들께 무한감사입니다. 믿지않는 지인들과의 관계는 말그대로 성화의 바다 한복판에 놓여있는것 같아요- 복음을 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의식적 각오만으로는 안되더라구요..여러모로 허접해서 그런지 저는 (제가 죽고)말씀으로 무장해야지만 핍박을 평강으로 끝낼수가 있었습니다..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진심으로 휴거의 소망이 뭔지 알게되어 감사드려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니리라.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4장16,17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4-11 07:55:28 | 목영주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는가?』을 읽고(E) : 친밀함
이 책 4장에서 한 개인이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변화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5장에서는 변화의 과정이 단순히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소그룹에서 교제를 나누던 한 여인의 가족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성장하고자 한다면 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우리는 “안 될 게 뭐 있어? 어쨌든 사람들과 엮이는 건 복잡하고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하지? 성경 묵상도 기도도 혼자 하는 거잖아!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라고 생각한다. 이웃과 함께하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고, 복잡하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은혜 안에서 성숙을 격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디 공동체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타락으로 인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절실한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관계가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 주는 동안에만 그것을 추구한다. 즉 우리는 관계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저자들은 변화는 공동체가 함께하며 이루어가야 할 목적이며 지속적인 변화에 있어 교제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강조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 공동체로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와 사랑 그리고 일치 가운데 함께하신다. 우리는 관계에 대한 스스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관계 맺기는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 되는 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은 그 존재와 행함의 모든 면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위격과 일치되신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기에 친밀한 관계에 대한 깊은 갈망이 우리 본성에 심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그렇게 창조되었기에 관계를 갈망한다.
혹여 다른 성도를 꺼리는 마음이 들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나뉘심으로써 우리가 연합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누군가가 죄를 짓거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지을 때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나뉘심으로써 자신이 화목하게 될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부디 이 점을 명심하고서 그리스도의 몸 된 관계에 접근한다면,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한다.
실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성도들과 깊은 관계를 기뻐하는 일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여정의 첫걸음이다. 그분을 닮는 것이 곧 변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고자 구속적 공동체에 속하게 하셨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때 그것을 더 충만하게 이해하게 된다. 구속의 역사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와 더불어 다른 이들과의 관계 역시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밀함이 변화의 핵심이다. 친해지면서 배우고 느끼고 공감하면서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음미하며 이 책의 독후감을 마친다.
2025-04-10 11:14:44 | 이규환
주께서는 온유한 자들을 들어 올리시며 사악한 자들을 땅바닥에 던지시는도다.(시편 147편 6절)
이 구절이 자꾸만 되뇌어집니다.
2025-04-10 09:59:48 | 이규환
그래서 성경 번역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올바른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2025-04-10 09:52:24 | 이규환
지친 하루를 위로해 주는 좋은 시 감사합니다^^
2025-04-10 09:43:25 | 김지훈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하나님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는 말씀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전 삶을 모두 그분께 드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2025-04-10 09:42:00 | 김지훈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새로운 가정에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2025-04-10 09:36:19 | 김지훈
잘 읽었습니다~
2025-04-09 20:57:03 | 김혜순
두 분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하나님 마음에 흡족한 아름다운 가정 꾸리시길 소망합니다.
2025-04-09 20:51:46 | 김혜순
교회를 다녀도 올바른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작금의 세태가 통탄스럽습니다.
나라의 근간도 혼란 속에 의인이 악인의 조롱을 받는 사태에 처해 있고요.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고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감사하며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예배는 실제생활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2025-04-09 19:33:46 | 이수영
육신이 아직 죽지않았으니 가야하고 여지껏 믿음으로 걸어왔으니 죽기직전까지 믿음으로 가야겠구나..나라걱정에 헌물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품어졌습니다. 죽는순간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은 개인적인 바램을 가지고 있는 저는-믿음,말씀에 순종해서 곧 뵐 하나님께 덜 죄송하고 또 남겨질 이 세대를 섬기다(예수님 드러내기) 가야지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히려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너희에게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선한 양심을 가지라-베드로전서 3장15-16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4-09 08:36:16 | 목영주
말씀만이 위로가 되는 하루 하루입니다..마지막때라 저절로 휴거의 소망이 커지는듯 합니다.
-보라,내가 너희에게 한 신비를 보이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고린도전서 15장5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4-09 08:19:55 | 목영주
자유게시판이 너무 오래 비어 있는 것 같아서 함 올려봤습니다. ^^
2025-04-08 18:53:20 | 최영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