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축하 합니다~
준비하는 모든 과정과 일정위에 주님 함께 하셔서
평안과 축복 가운데 결혼식 잘 마치고
행복한 가정 꾸리시길 소먕합니다.
2026-05-22 16:21:08 | 김혜순
형제님 자매님
반갑습니다~
바른 말씀과 교제가 두 분 일상에 큰 힘이 되시길
소망하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026-05-22 16:18:17 | 김혜순
아이들 자라는 속도는 초 스피드 수준이네요
태빈이가 벌써 이리 커서 가족 사진을 찍었군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세 식구 알콩달콩
이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2026-05-22 16:16:22 | 김혜순
모든 경우가 저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믿음이 약한 저를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6-05-22 09:45:17 | 김지훈
형제님글을 코팅해 마음속에 붙이고 다니고 싶어요~^^감사드립니다! 천성기질 자체가 염세적이라 불안 염려가 기본값인데다가 역량부족에서 오는 두려움까지 가진 저는 4,5번을 넘어 7,8,9번으로 가서-아버지와 마음으로 멀어질까봐..제가 말씀에 순종하려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저의 변화를 보고 위 천사들은 놀라 자빠질지경이겠지만,하나님께서 6번같은 상황안에 저를 오랫동안 있게 하시는 이유가-단련할게 무지많다는걸 증명하고 있어요. 예수님..나라 살려주세요.오늘도 거룩한 일상을 위해 예수님께 무릎꿇고 기도하는 하루 보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live/BCc_IbVx3rg?si=ukZWTE4AYlkhrLGr
2026-05-21 08:40:43 | 목영주
바른 믿음생활 제대로 이어가기 힘들어지는 시대 살아가매, 오래전 언젠가, 믿음이 적은 사람들의 공통적 심리 상태, 그것을 대표할 만한 단어로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불안, 실망, 두려움이 그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믿음이 적은 사람의 경우, 도래하지 않은 어떤 큰일이 발생하기 전에는 많이 불안해하고, 그 일이 발생한 후에는 많이 실망 또는 두려워할 것...이라는 결론 내려지더라는 뜻입니다.
그런 단어들을 찾아 나선 목적인즉 제 믿음생활의 충실도를 체크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만약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큰일에 대해 많이 불안하다면(스스로 판단하기에), 그 불안을 물리쳐줄 믿음의 분량을 대폭 늘리기 위해 더욱 빠른 속도로 하나님 향해 나아가겠다는 거죠.
어떻게? 성경말씀 더욱 열심히 읽고 기도 또한 더욱더 진지한 태도로 하고, 그렇게 말입니다. (성경말씀 엄청 열심히 읽는 사람으로 오해하시는 분 안 계시기를... ^^)
그러던 중, 최근에는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성경말씀 속 사람들의 수많은 행위들 대부분이 ‘믿음’의 분량 측면에서 이해 또는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다소 황당 또는 엉뚱한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주요 현상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1. 두려워함 :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큰 폭풍으로 인한 파도에 배가 덮이게 되자 예수님을 깨우며 호들갑(^^) 떤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마8:26)
2. 불안해함 / 염려함 : 형 에서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여 크게 불안해한 야곱의 경우. “네 조상들의 땅으로, 네 친족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창31:3)라는 주 하나님 약속의 말씀 미리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3. 조급해함 :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자기 손으로 번제 헌물을 드린 사울 왕의 경우.(삼상15) 또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때를 못 기다리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 태어나게 한 아브람과 사래의 경우.(창16)
4. 의심함 / 미심쩍어함 : “오라”는 예수님 말씀 따라 물 위를 걸어가다 사나운 바람 만나매 결국 물에 빠진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 너 믿음이 적은 자야, 네가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마14:31)
5. 실망함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계셨음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이라고 믿었노라”(눅24:21)라며 실망감만 드러내던 엠마오행 두 제자의 경우.
6. 답답해함 / 신경질적으로 변함 : 광야 생활 속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모세의 표현에 따르면 ‘반역자들’)의 원망과 압박에 시달리던 모세는 결국 불신+분심(憤心)에 반석을 두 번 쳐 버렸습니다. "이 반석에서 반드시 물을 내야만 하랴?"라면서 말입니다. “너희는 그들의 눈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러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민20:8), 주 하나님의 그 말씀 잠시 잊어 버렸을까요...?
7. 낙심함 :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말, 즉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가 메뚜기 같았으니...”(민13:33), 그 말에 완전 낙심해 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8. 절망함 : 갈멜산에서의 위대한 승리 후, 독오른(^^) 이세벨의 위협에 놀라 멀리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음을 구한 엘리야의 경우. 그는 말했죠. “오 주여 족하오니 이제 제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4)
9. 원망함 : 오빠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찾아오신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다”(요11:32)라고 말한 마리아의 경우.
10. 불평함 : 저녁에는 고기로 아침에는 빵으로 족히 배부르게 해주셨음에도 계속 불평 늘어놓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모세는 그들에게 말했죠. “너희가 불평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주께 하는 것이니라”(출16:8)
11. 분노함 :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선 니느웨 백성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일에 대하여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한 요나의 경우.(욘4:1)
12. 마음속에 응어리(?) 형성됨 :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의 원로들이 어두운 곳에서 저마다 자기 형상을 둔 방들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그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겔8:12), 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바의 그 이스라엘 원로들의 경우.
본인의 불순종, 반역 등에 대한 회개는 없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만이 쌓이고 쌓인 그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무엇, 그러니까, 성경 말씀 속 bitterness...비슷한(^^) 것...들의 결정체 같은 그 무엇을 ‘응어리’라고 표현해 봤습니다. 정확한 용어 선택인지는... ^^
어쨌든, 믿음 부족(아예 없음?)이 그 정도 상황까지 이르면 ‘주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그 땅을 버리셨다’, 저런 말을 대놓고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응어리 관련하여 좀 더 말씀드리면, 마음속 응어리는 그 사람 본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듦으로써 삶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어쩌면 생각 없이 내뱉는 그런 말 듣는 다른 사람의 믿음까지도 헤치는, 말하자면, 더럽히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히12:15 말씀 중의 ‘쓴 뿌리가 돋아나 많은 사람을 더럽히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13. 무감각해짐 : 밧모섬의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으로부터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계3:15)는 지적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
14.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이 사라짐 : ‘그의 발에 병이 생겨 마침내 심히 중하게 되었으나 주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사들에게 구했던’(대하16:12) 아사 왕의 경우.
15. 마음이 강퍅해짐 :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어쩌고는커녕 아예 말씀 자체를 외면하고 멸시하기까지 한 여호야김 왕의 경우. 말씀 두루마리를 펜 칼로 찢어 화롯불에 태워 버리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니(렘36:23-24)...그 마음의 강퍅함이 거의 차돌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16. 흘려들음 :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던(창24:38-39) 홍수 이전 시대 사람들의 경우.
17. 영적으로 눈멀게 됨 :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에서 시작하였으나 시간 지나가매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꾐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경우.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 육체로 완전하게 되었느냐?”(갈3:3)
18. 육신적으로 행동함 : 산에 올라간 모세가 오래 내려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금송아지를 신으로 모신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이어서 그들은 육체적 만족과 감각적 종교를 즐기며 먹고 마시고 뛰놀았죠.(출32)
19. 부인함 : 결국은 저주하여 맹세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경우.(마26:74)
20. 거부함 : “너를 위해 주 네 하나님께 한 표적을 구하라”(사7:11)라는 거룩하신 주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저는 구하지 아니하겠고 주를 시험하지도 아니하겠나이다”(사7:12)라고 답한 아하스 왕의 경우. 제 하나님 아닌데요? 라는 것도 아니고...대책 없다는 생각 듭니다만.
다소 본론을 벗어난 말씀입니다만, 아하스 왕에 대한 심층분석(?) 한번 해볼까 싶은 생각 가끔 하곤 합니다. 왜냐? “그는 고난당할 때에 주께 더욱더 범법하였는데 이 사람은 그 아하스 왕이니라”(대하28:22), 바로 이 말씀 구절 때문입니다. 대~~~단한 인물 아닌가요...? ^^
21. 냉소적으로 반응함 : 주의 궤가 다윗의 도시로 들어올 때 그 앞에서 뛰며 춤췄던 다윗 왕에게 냉소로 업신여겼던 미갈의 경우.(삼하6)
22. 흔들리고 불안정함 : 예레미야로부터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 하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라. 그러나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열상18:21)라는 질타 받았던 아합 왕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생각을 품은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길에 안정이 없느니라” (약1:8)
23. 사람을 의식함 : 백성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음성에 순종함으로써 주 하나님을 거역한 사울 왕의 경우. 사무엘이 남긴 말씀 일부, 그 의미가 참으로 뜻깊은 것 같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24. 물러서고 멀어짐 : 한때 바울과 함께 사역했으나 결국 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버리고 떠난 데마의 경우.(딤후4:10)
글을 끝내면서, 믿음의 표본 정도로 알고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 말씀 구절 하나를 옮겨 적어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앞에 선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한 말입니다.
오 왕이여, 일이 그리될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으며 그분께서 왕의 손에서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으리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께서 세우신 금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께서는 아시옵소서, 하니라.(단3:17-18)
( 끝 )
2026-05-20 23:00:17 | 최영오
아버님을 떠나 보내신 형제님께 위로를 전합니다. 지금은 인간적인 슬픔이 크시겠지만, 다가올 그날에 우리 모두 다시 반갑게 만나리라 믿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이 형제님과 가정에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2026-05-20 09:34:03 | 김지훈
안녕하세요?
서울 강서구에서 출석하시는 이태곤형제님(김경주자매님)의 부친 이영길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 빈소: 이대서울병원(발산역)장례식장 12호
* 주소: 서울 강서구 공항대로 260
* 발인: 2026년 5월 20일 (수요일) 14시 30분
* 장지: 서울 시립승화원
【부의금】
국민은행 85670104043177 이태곤
성도님들께서는 기억해두셨다가 위로의 마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을 당한 가정에 우리 주 예수님의 큰 평안을 기원하며 로마서 12장 10, 15절 말씀을 드립니다.
(롬12: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친절하게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
(롬12:15)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
샬롬.
애경사 위원회 기형섭 형제 (010-3712-4046)
2026-05-19 10:51:11 | 관리자
안녕하세요?
<레위기: 하나님의 예언의 달력> 책을 무료 PDF로 올립니다.
다운받아 읽으시고 공유하셔도 됩니다.
네이버 쿠팡, 생명의 말씀사 등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하나님의 예언의 달력
이 책은 많은 성도들이 어렵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멀리해 온 레위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저자는 이 책이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규례를 모아 놓은 문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어떻게 자신 앞으로 부르시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예배의 책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명료하다. 레위기는 율법의 부담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미리 보여 주는 예표의 책이다. 그래서 레위기를 모르고서는 히브리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십자가의 깊이 또한 충분히 헤아릴 수 없다. 저자는 헌물과 희생물, 제사장 직무, 일곱 명절 하나하나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고 또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흐름 속에서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특히 이 책은 ‘은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레위기를 가볍게 여겨 온 오늘날의 풍토에 분명한 도전을 던진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다. 그 ‘모든 말씀’ 속에는 흥미로운 부분뿐 아니라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레위기 또한 결코 빠질 수 없는 영적 양식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레위기 전체의 개요와 다섯 가지 헌물, 그리고 제사장 제도를 다룬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결코 무분별하게 열려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길이 오직 피 흘림을 통해서만 마련된다는 진리를 차근차근 풀어 준다.
제2부에서는 레위기 23장에 기록된 ‘주님의 일곱 명절’을 한 장씩 깊이 살핀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이미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으며,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은 장차 재림 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일정표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저자는 이 일곱 명절이 곧 ‘하나님의 예언의 달력’임을 분명히 밝힌다.
제3부에 해당하는 부록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상 천년 왕국, 유대인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된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레위기가 전망하는 종말론적 비전을 보다 폭넓게 조망한다.
이 책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레위기를 단지 과거의 종교 문서로 가두어 두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레위기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시간 속에 배열해 놓은 책이며, 거룩함과 긍휼이 함께 흐르는 책임을 강조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되 결코 그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단번 속죄를 통해 영원한 자녀로 삼으시는 그 깊은 사랑이 레위기 전체에 흐르고 있다.
오늘날 신약의 은혜만을 강조한 나머지 구약의 경륜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계획이 흐려져 가는 현실 속에서, 이 책은 매우 시의적절한 안내가 된다. 신구약 성경이 한 분 하나님의 일관된 경륜 속에서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그리고 그 중심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서 계신지를 또렷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한 권의 강해서이면서 동시에 예배에 대한 초대장이다. 레위기는 성도에게 부담을 지우는 율법책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 앞에 서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라는 점을 깊이 있게 설득한다.
이 책은 레위기를 어렵게 느껴 온 일반 성도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통일된 흐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하는 모든 성경 신자가 곁에 두어야 할 필독서이다.
목차
서문
레위기를 읽고 공부해야 할 이유
서론
제1장 레위기 개요
제2장 레위기의 헌물들
제3장 제사장 제도
제4장 하나님의 일곱 명절
제5장 첫째 명절: 유월절
제6장 둘째 명절: 무교절
제7장 셋째 명절: 초실절
제8장 넷째 명절: 오순절
제9장 다섯째 명절: 나팔절
제10장 여섯째 명절: 속죄일
제11장 일곱째 명절: 장막절
제12장 하나님의 예언의 달력
부록
1. 그리스도의 지상 천년 왕국
2. 유대인은 누구인가?
3. 하나님의 약속된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
2026-05-19 10:12:06 | 관리자
온유한 사람에 대한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잘 안되요.. 다시 한번 간구하면서 갑니다.
2026-05-18 09:12:51 | 김영익
전현주자매님의 아드님 이승규군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는 행복한 결혼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주 하나님의 은혜와 화평이 새로 출발하는 가정에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샬롬
2026-05-17 21:43:12 | 김지훈
2026년 5월 17일 (주일 오전) 성경말씀: 시편 33편 12절
https://youtu.be/wIrB-ibfpPE
2026-05-17 17:36:13 | 관리자
안녕하세요?
6월 6일(토) 오후 1시 20분에
안산에서 출석하시는 전현주자매님의 아드님 이승규군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세워지는 귀한 가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일시: 2026년 6월 6일(토) 오후 1시 20분
* 장소: 광명무역센터 컨벤션 3층 단독홀
경기 광명시 일직로 72
[모바일 청첩장]
https://bojagicard.com/i/home.php?uid=gop8t1gx&inflow_suid=1&kakaotalk_inapp=0
2026-05-17 14:45:16 | 관리자
2026년 5월 15일 (금요일 저녁)
https://youtube.com/live/qrLuUVs2GOU
2026-05-17 14:04:24 | 관리자
내용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026-05-16 13:12:45 | 박형욱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도록 모든 삶에서 온유함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2026-05-16 10:06:54 | 김지훈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눈물이 나는건 아직도 온유함이 힘들어 애를 써야 하기 때문인것 같아요..여기서의 삶은 섬길대상일뿐이지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서 내맘을 흔들수 없다하며 씩씩한 날도 있는반면,억울해도 견디는 것밖에 할 수없는 상황일때 긍휼히 보는것만으로는 안되어서- 이상황을 허락하신 나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시다로 겨우 되는 저의 육신입니다.다행히 성화(온유)를 육신이 죽는날까지만 해도 되고 제가 휴거를 간절히 소망하는 큰이유에요~^^
https://youtu.be/DMUKuhnxWDE?si=3ubgS8eCJK1gYKhM
2026-05-16 07:18:35 | 목영주
정말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온유”라는 말을 들으면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떠올린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힘이 없고, 자기 주장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성경의 온유는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힘이 하나님께 통제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장 29절)
예수님은 온유하셨지만 결코 약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으며, 위선자들의 죄를 담대하게 책망하셨다.
또한 원하셨다면 수많은 천사들을 부르실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다.
그런데도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유이다.
온유를 이해하려면 야생마를 떠올려 보면 좋다.
야생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넓은 들판을 자유롭게 달리며 아무도 쉽게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그 힘은 통제되지 않는다.
반면 잘 훈련된 말은 어떠한가?
그 말 역시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주인의 손길에 반응한다.
주인이 멈추라 하면 멈추고,
가라 하면 간다.
짐도 나르며,
사람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힘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힘이 통제된 것이다.
성경적 온유도 바로 이와 같다.
온유한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화를 낼 수 있어도 하나님 때문에 절제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 맡기며,
자신의 힘과 감정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은 본래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한다.
자기 감정대로 말하고,
자기 자존심대로 행동하며,
자기 욕심대로 달려간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훈련시키신다.
말씀으로 다듬으시고,
고난으로 연단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어 가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들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온유는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매이다.
또한 성경은 다른 사람을 바로잡을 때에도 온유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아 주고 너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라디아서 6장 1절)
진리를 말하더라도 거칠고 교만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강한 사람이 온유할 수 있다
세상은 자기 힘을 드러내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을 귀하게 보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요,”(마태복음 5장 5절)
또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하며 넘치는 화평 속에서 기뻐하리로다.”(시편 37편 11절)
온유는 약함이 아니다.
하나님께 다스려지는 참된 강함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모습을 다듬으셔서, 주인의 손에 쓰임받는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고집만 붙들고 버티기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내 감정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가 되어야 하고,
내 자존심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맡기고,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사람을 이기려 하기보다 자신을 다스리려 해야 한다.
야생마가 주인의 손에 길들여질 때 비로소 귀하게 쓰임받듯이, 성도도 하나님께 순종할 때 비로소 주님의 일에 귀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래서 온유는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믿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다. 특히, 눈에서 힘을, 목에서 힘을, 어깨에서 힘을 빼야 하지 않을까? 내면에는 강함을 간직한 채. 정말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쉽지 않다. -끝-
2026-05-15 19:34:16 | 이규환
안녕하세요?
이번에 <재창조는 없다: 간극 이론의 오류와 교리적 위험>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창세기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이해의 근본이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운받아 읽고 공유하셔도 됩니다.
샬롬
목차
서문
1부: 간극 이론의 역사적 기원과 한계
2부: 간극 이론의 열한 가지 성경적 오류
문제 1: 창세기 1장 2절의 was는 became이 아니다
문제 2: 창세기 1장의 ‘그리고’(And)는 간격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문제 3: 창세기 1장 2절의 ‘어둠’은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문제 4: ‘창조하다’, ‘만들다’, ‘짓다 혹은 형성하다’는 동의어이다
문제 5: 창세기 1장 28절의 replenish는 ‘다시 채우라’가 아니다
문제 6: 이사야서 24장 1절과 45장 18절은 재창조와 아무 관련 없다
문제 7: 예레미야서 4장, 이사야서 34장은 추측 해석의 전형이다
문제 8: 시편 82편과 욥기 본문들은 간극의 증거가 아니다
문제 9: 에스겔서 28장의 에덴은 에덴동산이 아니다
문제 10: 베드로후서 3장은 루시퍼 홍수가 아니라 노아의 홍수이다
문제 11: 세 구절에 의해 간극 이론은 무너진다
3부: 간극 이론이 무너뜨리는 복음의 기초
첫 번째 모순: 창조에 대한 성경의 최초 서술 비중 약화
두 번째 모순: 노아의 홍수의 역사적·신학적 의미 훼손
세 번째 모순: 천사론과 인간론의 충돌
네 번째 모순: 죄와 사망의 기원 교리 훼손
결론
참고 문헌
서문
이 글은 논쟁을 즐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서 쓴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교회 도서관 서가에는 재창조 간극 이론을 지지하는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책의 종류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이론이 성경 해석 전체의 전제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성경 어디를 펴더라도 이 이론이 등장한다. 창세기는 물론이고, 욥기, 이사야서, 에스겔서, 예레미야서, 베드로후서, 심지어 요한계시록을 펴도, 이 이론의 렌즈가 먼저 적용된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 없이는 성경 해석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린다.
더 나아가 이 이론은 단순한 해석 방법이 아니라 신앙의 척도로 격상되기에 이르렀다. “재창조는 팩트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진정한 성경 신자이다”, “이 내용을 부정하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말들이 성도들 사이에서 퍼져 있다.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 “성경을 모른다”, “혹시 구원받지 못한 것 아니냐”라는 말까지 듣는 경우도 있다. 하나의 성경 해석 가설이 사람을 심판하는 도구가 된 셈이다.
이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뿌리는 미국에 있으며, 미국에서도 수십 년째 동일한 상처가 반복되어 왔다. 그 진원지에는 피터 럭크만(Peter Ruckman, 1921-2016)이 있다. 그와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처음부터 간극 이론을 ‘이론’(theory)이 아니라 ‘갭 팩트’(Gap Fact)라고 부르며 가르쳤다. 그 결과 창세기 해석 문제를 넘어, 창조 기사 전체는 물론 종말론, 심지어 성경 전체를 읽는 기본 틀로 재창조 간극 이론을 전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재창조 간극을 부정하는 견해는 “성경을 곡해하는 행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 태도” 등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근본주의 침례교 목사들 역시 ‘성경 불신자’, ‘배교자’라는 정죄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결정적인 사실이 있다. 럭크만 자신이 이 이론을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교리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유추한 내용이라고 직접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말을 따르면, 이는 확립된 팩트가 아니라 한 해석자의 추론이다. 그런데 그 추론이 “재창조는 팩트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 신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으로 변질되었다. 원래 제안한 사람조차 유추라고 했던 내용이,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에서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굳어졌다.
럭크만이 세운 펜사콜라 성경 학교와 그의 출판 사역은 이 가르침을 조직적으로 전파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훈련받은 졸업생들이 미국 각지의 독립침례교회 목사가 되어 동일한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전했고,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것’과 ‘럭크만식 재창조 간극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상 한 묶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킹제임스 성경을 동일하게 지지하면서도 간극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목사와 성도들은 모호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성경 신자냐 아니냐”라는 불필요한 의심과 공격을 감내해야 했으며, 교리 토론은 ‘신학적 논의’가 아니라 ‘진짜 신자 대 가짜 신자’의 전쟁으로 번져 갔다.
실제 지역 교회 안에서 빚어진 상처는 깊었다. 간극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교역자나 교사가 “성경을 제대로 믿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되거나 사임 압박을 받는 일들이 미국에서 확인되었다. 재창조 간극 이론에 관한 논쟁이 교회 안에서 장기화되면서 공동체가 둘로 갈라지는 일이 빈번해졌고, 성도들이 럭크만의 가르침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사를 ‘성경을 모르는 자’라고 공격하여 공동체 전체가 흔들린 사례들도 보고되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은 목사들과 사역자들 가운데는, 재창조 간극 이론 자체보다도 ‘이 문제를 둘러싼 분열의 영’을 더 큰 상처로 회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럭크만파 교회’ 혹은 ‘럭크만 추종자’라는 말만 들어도, 강한 분열성과 타 교회와의 단절, 그리고 내부적으로도 끝없는 논쟁이 반복되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 가르침이 번역과 출판을 통해 30여 년 전에 한국으로 흘러들어 왔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는 선한 마음을 가진 한국의 성도들이, 번역과 출판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창조 간극 이론 안으로 깊이 끌려 들어갔다. 그 결과 미국에서 이미 반복된 분열과 상처의 역사가, 시간차를 두고 한국 교회 안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목회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실로 가슴 아프다. 함께 성경을 읽고 예배드리던 성도들이 이 문제 하나로 서로를 의심하고 갈라서게 된다. 함께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고 싸워 온 형제들이, 재창조 간극 이론 때문에 서로를 ‘성경 신자’와 ‘성경 불신자’로 나누게 된다. 어떤 이들은 미국의 사례처럼, 목회 현장에서 간극 이론 문제 때문에 교회를 잃기도 하고, 가족처럼 지내던 동역자와 등을 돌리기도 한다.
이 글은 그 성도들을 정죄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진심으로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자 하는 분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인간적 가설’에 묶여 고통받고 또 다른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글이다. 미국에서 이미 수십 년 전에 겪은 그 분열과 상처의 역사, 그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제 한국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어, 적어도 같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재창조 간극 이론을 받아들였던 많은 분들의 출발점이 “성경을 더 잘 믿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라는 선한 열심이었음을 안다. 그래서 더욱 간곡히 부탁드린다. 성경을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한 사람의 추론, 한 학파의 체계, 한 학교의 노선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
성경은 재창조 간극 이론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고 완전하다.
아니, 그 이론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창조의 장엄함과 복음의 단순함이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뒤 그것을 보시고 “그것이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신 그 말씀이, 어떤 이론의 도움 없이도 우리 마음에 그대로 들어온다. 그 단순하고 위대한 진리를 함께 회복하기를 바란다. 미국에서 반복되었던 상처와 분열의 길을 한국 교회가 다시 밟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으로 이 글을 쓴다.
2026년 5월 인천에서
2026-05-13 21:00:18 | 관리자
사진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2026-05-12 16:38:05 | 김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