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세워 주시고 지켜주신 나라
잘돼 나가리라 굳게 믿습니다! ^^
2025-06-25 22:26:29 | 최영오
개방과 피드백...가끔씩이라도 되새겨 보겠습니다 ^^
2025-06-25 22:24:01 | 최영오
주의 만찬 때면 반드시 듣게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언약(new testament)의 피니라”, 마26:28 그 말씀 말입니다. 그때마다 ‘이 포도즙이 새 상속언약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면...옛 상속언약 또는 첫 상속언약은 뭐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답니다. 그럴 때면, 언약(covenant) 그리고 상속언약(testament)에 대한 스스로의 부실한 개념 정립 상태로 인해 부끄러웠다고나 할까요.
그러던 중에 접한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새 언약의 위대한 예언과 성취’라는 제목의 목사님 설교 영상을 거듭 듣는 한편으로 관련 성경 구절들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름 깨달은 점들 그리고 일었던 여러 생각들을 정리해 봅니다.
1) 시내산에서의 ‘첫 언약’, 즉 구약이 바로 ‘첫 상속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하 ‘이스라엘’이라 함)과 첫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출24). 제시하신 율법을 그들이 지키면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이 땅에 속한 모든 복을 주시겠다는 내용의 조건부 언약이었죠. 일방적인 성격의 언약이지만, 이스라엘의 조건 수락에 의거하여 언약이 성립된 것입니다.
히9:18, 히9:20 말씀에서는 이 ‘첫 언약’, 즉 구약을 ‘첫 상속언약’이라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첫 언약’은 옛것이 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이 ‘첫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애끓는(렘31:20) 심정으로 징계는 하시되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려는(렘31:36-37) 하나님께서는 둘째 언약을 구하셨죠(히8:7). 그러니까, ‘첫 언약’은 백성들의 흠(히8:8)으로 인해 사라질(히8:13)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피 흘려 죽으심(이하 '십자가 수난'이라 함)을 통해 ‘첫 언약’에 따른 율법을 완전 성취(마5:17)하사 그 언약을 쇠하고 낡은 것(히8:13)으로 만드심으로써 ‘첫 언약’을 대체할 둘째 언약의 성립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3) ‘첫 언약’에 대한 대체 개념으로서의 둘째 언약이 ‘새 언약’이다
시내산에서의 그 ‘첫 언약’ 맺은 이스라엘에게서 흠을 발견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죠. “보라 날들이 오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 및 유다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31:31)”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 언약’을 대체할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거죠.
그런데, 그 언약 내용이 참으로 놀랍게도,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이스라엘 집, 그들의 속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기록하여 --- 다시는 각각 자기 이웃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31:33-34)”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날들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은혜...너무나도 큰 은혜의 언약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 날들은 언제일까요? 예수님 재림하신 후 펼쳐질 천년왕국의 때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어떤 때인 거죠.
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첫 언약'과 '새 상속언약'의 동시 성취라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다른 측면에서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바, ‘첫 언약’, 즉 ‘첫 상속언약’ 아래 있던 범법들이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히9:15)된 결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믿는 이스라엘 포함, 롬 8:28)에게 영원한 상속유업(inheritance)의 약속(히9:15)이 주어지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또 하나의 언약, 즉 ‘새 상속언약’(마26:28)의 성립 및 효력 발생으로 바로 이어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으로 인해 '첫 언약'은 제거(히10:9)된 반면 '새 상속언약'은 세워져(히10:9) 효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5) ‘새 상속언약’과 ‘새 언약’은 명백히 서로 다른 언약이다
마26:28 말씀의 그날 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니, 선언하신 ‘새 상속언약’, 그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속죄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로 죄들의 사면(롬3:25)을 비롯한 영원한 상속유업의 약속(히9:15)을 주시겠다는 내용의 은혜...역시 너무나도 큰 은혜의 언약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 ‘새 상속언약’은 바로 효력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그분을 믿는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인정받았음은 물론입니다. 그분의 그 일을 기리는 의미에서 ‘주의 만찬’을 시행하고 있죠.
이처럼, ‘새 상속언약’은 ‘첫 언약’에 대한 대체 개념으로서의 ‘새 언약’과는 언약의 적용 대상자들과 그 내용, 그리고 효력 발생의 때 측면에서 명백히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6) 언약하는 자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상속언약'이다
역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첫 언약'의 성취 행위로서, 그 언약 자체를 제거(히10:9)하는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언약하는 자가 죽은 뒤에라야 효력 있는 언약은 ‘상속언약’이라는(히9:17) 성경 말씀에 따르면, ‘첫 언약’은 본질적으로 ‘상속언약’의 성격을 지닌 것입니다. 시내산에서의 그 ‘첫 언약’을 ‘첫 상속언약’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 상속언약’(마26:28)의 경우 애당초 ‘상속언약’으로 선언된 동시에 언약하는 자의 죽음이라는 효력 발생 조건 또한 정확히 충족하기에 논의의 대상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7) '새 언약', '새 상속언약' 등은 하나님 구속 사역의 일환이라
'첫 언약', ‘새 언약’ 그리고 ‘새 상속언약’이 왜 생겨났을까, 어떤 일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결국...이들 언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과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더군요.
그러니까, 아무리 갇을리(godly)하게 살아봤자 도저히 구제 불능의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창조물, 즉 인간을 차마 버리지 못해 살려주시기 위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그것도...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몸을 화해 헌물(롬3:25)로 삼아 행하시는 가히 초월적 차원의 구속 사역, 그 진행 과정에서 ‘첫 언약’, '새 언약' 그리고 ‘새 상속언약’이 차례로 드러나 보인 결과...아니겠는가 싶더라는 거죠.
8) '새 상속언약'의 피, 그 은혜의 거룩함을 지워 버린 성경들 바라보매
비교 목적으로 옆에 두고 있는 NIV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마26:28 말씀의 경우 ‘언약의 피’(KJV : 새 상속언약의 피)로, 히9:15 말씀의 경우 ‘새 언약의 중보자’(KJV : 새 상속언약의 중재자)로 각각 기재되어 있더군요. 게다가, 히9:16-17 말씀의 경우 어처구니 없게도 ‘유언(will)’(KJV : 상속언약(testament))으로 기재되어 있더군요. 그러니까, NIV 성경을 비롯한 현대역본 성경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거한 ‘새 상속언약’은 아예 사라져 버리고 없는 거죠.
별 의미 없는 뭔 '언약' 또는 '유언' 정도로 알고 넘어가자는 건지...아니면, 천년왕국 때에 이스라엘을 적용 대상으로 성취될 ‘새 언약’을 미리 앞당겨 기리며 ‘주의 만찬’ 어쩌고 하자는 건지...
갈1:8 말씀, 즉 “하지만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다른 어떤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그 말씀 떠오르매 착잡~한 심정에 잠겨 보았습니다. ( 끝 )
2025-06-25 21:58:32 | 최영오
좋은 글 뿐만 아니라, 목영주 자매님과 이수영 자매님의 댓글 역시 주옥같아서 두세번 읽게 됩니다^^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2025-06-22 22:30:12 | 김지훈
개방영역을 넓히고, 맹점과 은폐영역을 줄이고 미지영역을 탐색해 가는 과정=자기성장 과정이다.
내가 나를 열고, 타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라.
좋은 관점이에요.
결국은 하나님 눈 앞에 살아가는 것이지요.
2025-06-20 19:19:37 | 이수영
제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가는게 꿈이라 저부터 제것이 되게 하려하는데 쉽지가 않아요.피드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면 <도움받는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있어야하고 선하게 이끌어주실 하나님을 믿고 평소에는 열심히 살아야 그런 건강한 생각이 들수 있다고 가르치고는 있습니다.제경우 은폐영역 줄이는 방법은 하나님 귀가 따갑도록 고하는 거구요~^^오늘도 전능자 하나님께 순종하며 낙심않고 남은 하루 잘 살아내겠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더라-창세기 1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6-20 15:38:01 | 목영주
조하리 창 & 개방과 피드백
우리는 친밀함의 7단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7단계에 다다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더 깊은 친밀함을 원한다. 상대를 더 잘 알고, 나 자신도 더 진실하게 드러내며, 관계 속에서 더 따뜻한 연결을 이루기 위해서다. 오늘, 그 깊은 친밀함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조하리 창(Johari Window)’을 소개한다.
조하리 창은 인간의 자기인식과 대인관계를 설명하는 직관적인 심리학 모델이다. 이 모델은 1955년 미국의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 고안했다. 두 사람은 인간관계 훈련과 집단 역학 연구를 하던 중,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 인식이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구조를 만들고자 하였다. ‘조하리(Johari)’라는 명칭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Joseph+Harry =Johari).
조하리 창은 내가 나를 알고 있는가? 타인이 나를 알고 있는가? 라는 두 축을 기준으로 4개의 창으로 나뉜다. 각각은 아래 그림처럼 열린영역, 맹점영역, 은폐영역, 미지영역으로 구성된다.
1. 열린 영역
나도 알고 있고, 타인도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내가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타인도 알고 있다면 그것은 개방영역에 해당한다. 이 영역은 조하리 창에서 가장 건강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넓을수록 대인관계가 원활하고 신뢰 형성이 쉽다. 개방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자기개방이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할 때, 타인은 나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타인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피드백에 대해 방어하지 않고 열린 자세로 수용하면, 개방영역은 점차 확장된다.
2. 맹점 영역
타인은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르는 나의 모습이다. 나는 괜찮은 말투라고 생각하지만, 타인에게는 날카롭게 들릴 수 있다. 혹은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심코 자주 끊는 습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영역은 피드백 없이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피드백을 얼마나 잘 듣느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맹점영역을 줄이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나 자신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요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가 말할 때 혹시 불편한 점이 있었어?” 같은 질문이 그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드백을 들을 때 방어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3, 은폐 영역
나만 알고 있고, 타인은 모르는 나의 내면이다. 누구나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나 상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실패 경험, 불안감, 열등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은폐영역은 심리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수록 더 커진다. 타인에게 나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관계의 깊이는 완벽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보여주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은폐영역을 줄이는 방법은 자기개방이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조금씩 열어볼 때, 공감과 수용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은폐영역은 작아지고, 개방영역은 넓어진다.
4. 미지 영역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다. 즉,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 가능성, 무의식적인 감정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조용한 사람이 위기상황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극한 상황에서 뜻밖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경험도 이 영역의 예이다. 미지영역은 새로운 경험이나 도전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낯선 환경에서 내 안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도 하고, 코칭이나 상담, 심리검사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특성을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 이 영역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기성찰, 새로운 역할에의 도전, 그리고 타인의 진심 어린 질문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나는 더 입체적이고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조하리 창은 단순한 심리 모델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실제적인 도구이다. 개방영역을 넓히고, 맹점과 은폐영역을 줄이며, 미지영역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은 곧 자기성장의 여정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는 개방과 피드백이다. 내가 나를 열고, 타인의 말을 진심으로 들을 때, 진짜 나와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2025-06-20 06:43:58 | 이규환
아멘.
2025-06-05 13:23:08 | 김지훈
형제님~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겸손해지면서 확실히 분명히 제 맘속에 박힌게 있어요.주변사람들 특히 가족을 더 사랑하다 가야겠구나..다짐했습니다.개인적으로는-믿음없이 눈앞의 불의를 보고 살아갈 애국자 국민들이 안쓰러운..이 슬픔만이라도 거둬가셨으면 좋겠어요..
-오,내 혼아,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그분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해 내가 여전히 그분을 찬양하리로다-시편 42편 5절
-주께서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는도다.그가 넘어질지라도 완전히 쓰러지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자신의 손으로 그를 떠받치시는도다-시편37편 23,2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6-05 07:17:29 | 목영주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할 곳에는 불의가 없다는 것이 큰 위안입니다.
2025-06-05 06:03:54 | 이수영
성도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로 인해 많은 분들이 당혹감과 실망, 분노, 좌절을 겪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바랐던 방향과는 다른 결과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며, 그 감정 속에는 이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뜻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역사의 주권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주의 뜻, 그것이 서리라.”(잠언 19장 21절) 또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일은 순찰자들의 칙령에 따른 것이요, 그 요구는 거룩한 자들의 말에 따른 것이니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고 또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그것 위에 세우신다는 것을 살아 있는 자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다니엘 4장 17절)
이 말씀은 지금의 현실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 더 분명히 깨닫고, 공의와 진리를 향한 기도를 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자처럼 행동하지 말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담대히 진리 위에 서기를 원합니다. 상황이 우리를 낙심케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이러한 시기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때이며, 우리 모두가 진리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이 나라 위에 늘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장 35절)
2025-06-04 16:46:20 | 이규환
예전에 자궁적훌 수술할 때 생각이 나네요.
죽으면 주님 품안이고 깨어나면 이땅에서 사는거라는 생각에 맘 편히 수술에 임했거든요.
오늘도 여러 자매님과 얘기 나누게 된 것이 죽음은 겁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일이다. 다만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 일 없이 주님께 가기를 기도 한다는 이야기였지요.
주께서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아요.
2025-06-01 14:24:15 | 이수영
가끔 죽는 순간("ㅇㅇ아~ㅇㅇ아~엄마 먼저 가 있을게 엄마는 너무 지금 좋다..")상상하면 오늘 하루 더 열심히 살게돼요. 매번 오늘까지만 나라걱정한다는 것이 6월3일까지 할 것 같아 부끄럽지만..사전투표 참관인으로 가는 기독교인 댓글(-저는 아무 힘이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 이 민족을 살려주세요-)보며 눈물로 함께 합니다..아버지! 창세기22장처럼 저도 아버지께 믿음의 고백을 한 그날을 기억해주시고 지금 제 마음도 깊숙이 보아주세요.. 고운꽃 한송이를 보더라도 나라걱정 안하고 만끽하고 싶어요..
-오 내 의의 하나님이여,내가 부를 때에 내 말을 들으소서.내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 주께서 나를 넓혀 주셨으니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내 기도를 들으소서-시편4편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5-30 15:55:01 | 목영주
형제님 덕분에 믿음과 행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5-05-30 15:23:44 | 김지훈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해 주시고, 아름다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2025-05-30 15:12:06 | 김지훈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답을 얻으셨군요.
2025-05-30 08:09:36 | 이규환
수면 내시경과 부활
며칠 전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다녀왔다. 위와 대장을 함께 검사하는 수면 내시경을 하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와 회복까지 대략 5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편하게 주무시면 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마취제가 들어왔다. 이내 나는 모든 감각을 잃었고, 시간도 공간도 의식도 모두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흔들었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상이 다시 느껴졌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내가 겪은 것이… 부활과 비슷하지 않을까?’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 시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모든 것이 멈춘 듯했지만, 누군가의 손에 내 생명을 맡긴 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예정된 시간에 다시 깨어났다. 잠시이긴 하지만 내 몸이 무력하게 의식 없이 있었던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누군가의 손안에 있었다.
갑자기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마취의 시간 동안, 마치 죽음을 지나는 듯한 고요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된 듯, 다시 일어났다. 이것이야말로 부활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은혜의 경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짜 죽음을 통과하셨다. 무덤 속에 머무르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부활은 단지 그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진 약속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기록대로 셋째 날 다시 일어나시고”
우리는 그저 숨을 쉬며 살아가지만,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렇기에 부활은 막연한 종교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진실이 된다. 부활은 소망이고, 다시 일어나는 힘이다. 오늘 내가 깨어났듯이, 언젠가 주님의 손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
나는 50분 동안 세상을 잊고 잠들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고, 그분 스스로 다시 살아나셨다. 내게는 의사가, 간호사가, 장비가 있었지만, 그분께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신 그분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 말씀이 오늘 나를 다시 숨 쉬게 한다.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도, 나는 다시 살아나리라는 확신을 품게 한다. 부활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2025-05-30 07:57:23 | 이규환
발람...이름도 발람이 뭐야...라는 생각 하곤 하죠. ^^
불 속에서 고생하고 있겠죠.
무려 3,500년을 불 속에서...흐미~ @@
2025-05-28 17:23:01 | 최영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던 제 잘못된 생각 하나를 우선 밝혀볼까 합니다. 이 글은 그 잘못된 생각에 대한 자백,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의 자백인 동시에 바로잡아 주심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엡2:8 말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믿음(faith)은 마음(heart)의 상태 또는 그것을 채우고(가득 또는 덜) 있는 어떤 비물질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애당초 추상명사로서, 마땅히 일(work), 즉 행위가 아닌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다(believe), 그러니까, 믿는 것은 분명히 행위다. 믿는 행위,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행위임에 틀림 없다는 생각 견지하고 있었답니다.
어떤 생각 또는 묵상 말미에 반드시 되새겨보는 고전8: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자기가 알아야만 할 것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그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믿는 것(believe)은 일(work), 즉 행위임에 틀림없다...라는 생각은 하등의 문제가 없어 보였죠. 믿는 것은 정신적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 하고’ 어쩌고 할 그런 대상 자체가 아니다...라며 나름대로 확신까지 하곤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몇 번은(성경 전체를 그만큼 읽었다는 뜻은 아님. ^^) 지나쳐 다닌 것 같은 요6:29 말씀, 바로 거기서 저는 멈춰 섰답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너희가 믿는 것(believe),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work)이니라”...라는 그 말씀에서.
한참 생각에 잠겨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여기도 있잖아, 믿는 것은 일이라고’...라는 생각으로 평소의 그 확신을 재확인하매 일종의 영적 희열...비슷한 그 어떤 악한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만, 이내 다른 한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일하지 않더라도(work not),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believe)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라는 롬4:5 말씀 말입니다.
이어서 저는 평소의 그 생각, 그러니까, ‘믿는 것(believe)은 행위, 즉 일(work)이다’라는 그 확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틀렸다가 아니라 틀렸을지도 모른다 함은 위 요6:29 말씀과 롬4:5 말씀이 서로 상반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앞(요6:29)에서는 믿는 것이 일이라고 하신 반면 뒤(롬4:5)에서는 믿는 것은 일 아니라고 하셨으니까요.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런 경우 저는 챗GPT의 자문을 받곤 한답니다. 한참 동안 토론을 이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죠.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믿는 것(believe)과 일(work), 즉 행위 관련하여 질문 및 토론을 좀 했답니다. 요6:29 말씀 중의 ‘하나님의 일’에 관한 두 종류의 주장들 그리고 어떤 논리적 모순 등등을...파헤쳐 보았다고나 할까요. (엄청 딸리는 실력으로 짜드라 얼마나 파헤쳐 봤겠습니까만. ^^)
한참 동안의 파헤치는 작업 끝에...저는 제 확신이 틀렸음을...역시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자면, 믿는 것(believe)은 일(work)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잘난(^^) 정신적 행위가 아니더라는 거죠.
구체적으로, 요6:29 말씀의 의미인즉, 믿는 것(believe), 그것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생명을, 빛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임에 따른 마음의 상태 변화 과정일 뿐이고, 말씀을, 생명을, 빛을 집어 넣으시는 일(work),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잖아...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요6:29 “너희가 믿는 것(believe),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work)이니라”, 그 말씀이 어찌 그리도 심오하게 느껴지던지요.
말씀을 받아들일 자, 죽어도(^^) 안 받아들일 자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았다는 거냐구요? 그런 뜻 절~~~대로 아니랍니다. 모든 인간을 그런 구조로, 그러니까, 일(work) 하나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말씀이 그대로 그들 마음에 들어가 안착되는 구조로 만들어 놓으셨지 않은가...싶더라는 거죠.
생각이 이에 이르자, 다소 생뚱맞은(^^) 듯한 다른 한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믿는 것(believe)은 일(work), 즉 행위가 아니다. 그동안의 내 생각이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믿는 게 행위가 아니니까 안 믿는 건 당연히 행위가 아니겠지...?’ 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 듦과 동시에 바로 답이, 놀라운 답이 떠오르더군요. 안 믿는 것(believe not), 그것이야말로 행위, 즉 일(work)이라고. 그 이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일(work), 그 일 하지 않았는가,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막는 일, 그 일보다 더 큰 일(work), 악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믿지 않음이 명백한 정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치가 바로 그것 아닐까 싶습니다만.
불현듯 마음(heart)의 커튼 생각이 났습니다. 빛이요 생명이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커녕 삼중 커튼 확실히 치고 살았던 지난날의 어떤 인간 생각도 났답니다.
교회 앞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서 다녔던 중죄인을 교회로, 그것도, 바른 하나님 말씀 함께하시는 우리 교회, 사랑침례교회로 불러주사 빛 또는 이상한 빛을 가려 커튼 제대로 여닫을 수 있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는...듯한 인간으로 키워주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감사합니다. 할렐루야! ( 끝 )
2025-05-28 17:19:41 | 최영오
<우리 마음 깊은 동기>라는 말에 생각나는 걸 몇자 적을게요~^^평소 제 마음동기를 살펴보면서 은근 찔린것이--상대를 긍휼웃음여유로 바라보는 횟수보다 납득하려는 마음으로 바라본게 더 많은것 같아 회개했습니다. 요즘 감기로 끙끙앓아서 그런지-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무지 감사하고 사랑침례교회가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며..무엇보다 거짓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해주시는 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긍휼의 마음으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 들어주는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나라도 저도 다시 세워주셔서..(댓글이 댓글답게 짧게 써지길(^^)=국민들이 나라걱정하며 살지 않게 해주세요)
-내가 끈기있게 주를 기다렸더니,그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편40편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5-24 20:44:31 | 목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