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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죠. 유튜브가 우리 교회엔 복음 전파의 통로가 되니 참 하나님의 일하심의 한계를 우리 기준으로 정하는 건 무의미한 거란 생각도 드네요. 주일에 몇몇 형제님들과 이 뉴미디어 누룩에 대한 고민을 얘기했었는데 형제님의 귀한 나눔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5-04-15 09:13:50 | 정진철
이런 생각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인터넷, 유튜브 그리고 AI의 등장 및 그 맹활약으로 인해 단12:4 말씀 중의 ‘지식이 증가하는 마지막 때’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들 가운데 특히 유튜브는 인간 삶의 동반자 급 자리 차지한 지 이미 오래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바로 그 유튜브 때문에 힘써 쌓아가던 말씀 체계 망가뜨릴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더군요. 그러니까, 누룩(?) 들고 다니는 유튜브를 신실한 청지기(^^) 쯤으로 알고 그것과의 화평 분위기 즐기다 보면 칭의, 성화, 영화는커녕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다니기 딱 좋은 세상...아닌가 싶더라는 거죠.   완전(^^) 본의 아니게, 서울의 어떤 교회 예배 현장을 담은 1분짜리 유튜브 쇼츠 영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럴듯한 가운 차림의 목사님이 갈2:20 말씀을 외며 외치더군요.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세계적 규모의 드넓은 예배당(그 교회 표현에 따르면 ‘성전’) 안에 화답의 우렁찬 함성 “아멘!”이 울려 퍼졌음은 물론입니다.   그 장면을 접하는 순간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을...보고 싶지 않은 이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구나, 유튜브 너 때문에’라는 서글픈 생각 말입니다. 우리 성경, 즉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는 분명히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이들은 달라도 보통 다른 정도가 아니잖은가...!...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리신’과 ‘자신을 주신’, 그 차이는 논외로 함) 그러니까, 유튜브가 감추고 있던 ‘믿음의 누룩’ 같은 게 감지되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모든 자들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이는 그 의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라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롬3:22 말씀에 의거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원리를 명쾌히 설파한 위 롬3:22 말씀에 따르면, 1)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님), 바로 그것이며, 2) 그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재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님)에 적용된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자들에게(로 넘어와) 임한다, 즉 전가(轉嫁)된다...라고 규명되어 있습니다.   위 롬3:22 말씀 내용을 달리 표현하면, ‘칭의’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믿음(애당초 믿을 게 아닌...?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칭의’의 본질을 살펴봄에 이어 ‘믿음’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믿음의 근원...그 의미가 다소 애매한 측면 있습니다만...어쨌든...^^...제가 생각하는 ‘믿음의 근원’에 관한 주요 말씀 구절들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the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면에서 큰 담대함을 획득하느니라...라는 딤전3:13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한 구원(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에 이를 수 있느니라...라는 딤후3:15 말씀이 그 예들로서, 그것들에 따르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 근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위 갈2:20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라고 선언, 즉 신앙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칭의’의 본질과 ‘믿음’의 근원에 관하여 롬3:22, 딤전3:13 그리고 딤후3:15 말씀들을 설파했던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만나 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까지 충성했던 사도 바울이, 차원이 다른 기독교 교리 담은 복음을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노라(갈1:11~12 참조) 했던 사도 바울이 과연...‘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노라...라고 했을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절대로 그렇게 말했을 리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한편, 오히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그 말씀을 숙연함 또는 비장함 가운데 했으리라...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 이들 둘의 차이가 어쩌면 인간 중심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 중심, 즉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의 차이, 바로 그것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바른 성경, 즉 참된 하나님 말씀으로 믿음 생활 영위할 수 있음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 한편, 유튜브 등이 뿌려대는 누룩들에 주의하여 항상 그것들을 털어내며 믿음 생활 계속할 책임, 그리고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는 누룩들을 더 빠른 속도로 제거해 나갈 책임, 그러니까, 바른 성경 가진 자로서의 의무...같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그 내용이며 분위기가 너무나 가슴으로, 마음(heart)으로 와닿기에 갈2:20 말씀 중 해당 부분을 원문 그대로 옮겨 적어 봅니다.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이어서 그 내용 그대로, 그 분위기 그대로 정확히 번역한 우리 성경, 즉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중 해당 부분 또한 옮겨 적어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그리고...조용히 화답해 봅니다. 아멘...!...이라고 말입니다. ( 끝 )           
2025-04-14 23:33:52 | 최영오
저는 소규모 자매모임을 통해 제가 보지못한 저의 부족함을 알게되어 점점더 겸손해지고 좋더라구요. 무엇보다 모든 대화의 끝이 하나님,예수님으로 귀결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구요! 가끔 제 부족함 드러나지는 것에 이불킥할때도 있지만 묵묵히 지켜봐주며 힘내~하시는 자매님들께 무한감사입니다. 믿지않는 지인들과의 관계는 말그대로 성화의 바다 한복판에 놓여있는것 같아요- 복음을 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의식적 각오만으로는 안되더라구요..여러모로  허접해서 그런지 저는 (제가 죽고)말씀으로 무장해야지만 핍박을 평강으로 끝낼수가 있었습니다..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진심으로 휴거의 소망이 뭔지 알게되어 감사드려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니리라.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4장16,17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5-04-11 07:55:28 | 목영주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는가?』을 읽고(E) : 친밀함   이 책 4장에서 한 개인이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변화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5장에서는 변화의 과정이 단순히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소그룹에서 교제를 나누던 한 여인의 가족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성장하고자 한다면 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우리는 “안 될 게 뭐 있어? 어쨌든 사람들과 엮이는 건 복잡하고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하지? 성경 묵상도 기도도 혼자 하는 거잖아!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라고 생각한다. 이웃과 함께하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고, 복잡하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은혜 안에서 성숙을 격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디 공동체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타락으로 인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절실한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관계가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 주는 동안에만 그것을 추구한다. 즉 우리는 관계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저자들은 변화는 공동체가 함께하며 이루어가야 할 목적이며 지속적인 변화에 있어 교제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강조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 공동체로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와 사랑 그리고 일치 가운데 함께하신다. 우리는 관계에 대한 스스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관계 맺기는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 되는 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은 그 존재와 행함의 모든 면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위격과 일치되신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기에 친밀한 관계에 대한 깊은 갈망이 우리 본성에 심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그렇게 창조되었기에 관계를 갈망한다.   혹여 다른 성도를 꺼리는 마음이 들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나뉘심으로써 우리가 연합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누군가가 죄를 짓거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지을 때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나뉘심으로써 자신이 화목하게 될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부디 이 점을 명심하고서 그리스도의 몸 된 관계에 접근한다면,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한다.    실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성도들과 깊은 관계를 기뻐하는 일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여정의 첫걸음이다. 그분을 닮는 것이 곧 변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고자 구속적 공동체에 속하게 하셨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때 그것을 더 충만하게 이해하게 된다. 구속의 역사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와 더불어 다른 이들과의 관계 역시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밀함이 변화의 핵심이다. 친해지면서 배우고 느끼고 공감하면서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음미하며 이 책의 독후감을 마친다.
2025-04-10 11:14:44 | 이규환
대한민국 땅의 모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통회하고 회개하며 주 하나님께로 진실되게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의 계획을 기다리며 ,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길 간구합니다.
2025-04-07 17:35:00 | 김지훈
작년하반기부터 헌물과 무익한 종이라는 단어를 품은 이유도,하루하루 이사야서 53장 5절 예수님을 생각하며 쪼임버티며 평강유지하려 애쓴 이유도 나라해주세요..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낙심 안한것이 너무 억울해 주저앉아버릴수가 없어요..저희 큰애가 엄마가 나라위해 흘린 눈물 하나님이 다 모아놓고 있다고 위로해 주었습니다...창세기 1장1,2절과 출애굽기14장,누가복음 18장 1~8절 하나님말씀으로 반나절만 하나님께 섭섭함 눈물 쏟아내고 살아나왔어요.. 나라를 사랑하는,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눈물이 모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세요! 아버지 저는 내일도 모레도  아버지계심으로 감사하며 살다가 뵙겠습니다. -내가 끈기있게 주를 기다렸더니 그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편40편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힘내세요 형제님 자매님..아직도 순간순간 울컥울컥하지만 저보다 더 나라를 사랑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힘내겠습니다..
2025-04-05 22:35:40 | 목영주
거룩하신 하나님을 분노케한 일들 우리가 만들어놓은 거짓신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허물로 인해 우리가 노예의 길로 들어설까  심히 두렵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여겨  주시기만을 간구드립니다.  
2025-04-05 19:23:28 | 김경애
<오늘 묵상 말씀> 제목 :  눈물의 회개 시편137편 1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거기에 앉아 참으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울었도다> 오늘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며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켜 너희 자신을 해쳤느니라(렘25:7)>를 기억하고   <{주}께서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가까이 계시며 통회하는 영을 가진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시34:18)>를 생각하며 눈물의 회개를 묵상하였습니다. 시편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   울었도다.... 울었도다.... 울었도다....   2025년 4월 4일 대통령의 탄핵 결과가 당연히 긍정적으로 나오리라 생각을 했는데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아니 한참 있다가 다시 또 보아도 <파면>이라는 단어가 믿기지 않았다.  "전원일치 파면 ㅋㅋㅋㅋ"가 올라온 어느 한 모임의 단체카톡방 문자를 보며 당장 나가기 버튼을 눌러버릴까하는 욱한 마음을 가다듬고 손에 일이 잡히지 않은 채 말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그 날 아침 묵상했던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거기에 앉아 참으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를 떠올리며 '울었도다'에 대해 생각했다.   바빌론으로 끌려와 시온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들,,,, 그리고 유다의 온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거주민들을 향하여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에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았다.   예레미야서 25장 4 또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보내시되 일찍 일어나 보내셨는데도 너희가 귀담아 듣지 아니하였으며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도다.  5 그들이 이르기를, 이제 너희는 각각 자기의 악한 길과 너희의 악한 행위들을 버리고 다시 돌아와 {주}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무궁토록 주신 땅에 거하고 6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그들을 섬기거나 그들에게 경배하지 말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키지 말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주}가 말하노라. 그럼에도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켜 너희 자신을 해쳤느니라.   8 ¶ 그러므로 군대들의 {주}가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말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9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북쪽의 모든 가족들과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을 취한 뒤 그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 땅과 그곳의 거주민들과 사방의 이 모든 민족들을 대적하게 하며 그들을 진멸하고 그들을 놀랄 일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너희 손으로 만든 것들!!!!!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것!!!!   출애굽기20장 3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4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그리고 대한민국을 생각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모이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했는데....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지금의 <너희 손으로 만든 것들>은 무엇일까?   너희 손으로 만든 것들!!!!!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것!!!!   이 주제를 바라보며 회개를 생각하고 결단에 대해 묵상하였습니다.   신명기 4장 39 그러므로 이 날 너는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 위에서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 외에 다른 자가 없는 줄을 알고 그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며  40 그런 까닭으로 너는 내가 이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법규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라. 그러면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자손들의 일이 잘되고 {주} 네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가 네 날들을 길게 하리라. 
2025-04-05 11:12:17 | 이정자
  주일 아침이면 마음 판에 새긴 추천서(고후3:1-3 참조) 같은 형제 자매님들 함께 정담 나누는 곳, 즉 채리티 홀이 있어 참 좋습니다. 나날이 활기를 더해간다 싶더니 요즈음은 아예 와글와글(^^)할 정도로 변한 만남의 장소, 이름까지 채리티 홀...그럴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바로 거기 말입니다.   그런데...채리티 홀 드나들 때면, 영어인 러브(love)와 채리티(charity) 그리고 헬라어인 필레오(phileo)와 아가페(agape), 이들 네 개 단어들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한편, 킹제임스 성경 그리고 우리 성경, 즉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대한 자긍심 새삼 느끼곤 한답니다.   우리말로는 똑같이 ‘사랑’으로 번역되는 위 네 개 단어들의 의미를 우선 짚어보면, 러브 : 일반적 감정의 사랑, 채리티 : 나눔의 실천적 사랑, 필레오 : 친밀한 감정적 사랑, 아가페 : 조건 없는 희생적 사랑...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AI한테 물어본 결과에 따름)   일반적 감정의 사랑이나 친밀한 감정적 사랑이나 그게 그것 아닌가...?...그러면 일반적으로 친밀한 감정적 사랑은 뭔데...?...등등의 애매한 측면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일단 그렇게 알고(^^),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상의 필레오와 아가페를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어떻게, 즉 어떤 단어로 번역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NIV 성경의 경우를 먼저 말씀드리면, 해당 성경에서는 필레오와 아가페를 공히 러브(lov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상에 있던 아가페(agape), 즉 조건 없는 희생적 사랑을 의미하는 그 단어는 사라져 버린 거죠, 엄밀히 말하자면.   킹제임스 성경의 경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상에 나오는 116개(AI가 그렇다고 그랬음 ^^)의 아가페...들 중 27개(25개 절)를 채리티로 번역하고 있더군요. 어떤 아가페(agape)는 러브(love)로, 또 어떤 아가페는 채리티(charity)로, 그러니까,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 해당 구절 상의 아가페가 갖는 의미를 일일이 따져 러브 또는 채리티로 구분하여 번역했더라는 거죠. (필레오는 모두 러브로 번역함)   위와 같은 번역 실태를 확인하는 순간, 성경, 즉 하나님 말씀을 정확히 번역하여 영원한 바른 성경으로 보전하기 위한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 분들의 헌신에, 하나님 향한 그 신실함(faithfulness)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지더군요.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자긍심...느낌이 마땅하지 않은가요...? ^^   그러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즉 우리 성경은 어떨까요? 우리말의 경우 러브와 채리티를 공히 ‘사랑’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있어서는, 킹제임스 성경 상의 러브(love)는 ‘사랑’으로, 채리티(charity)는 ‘사랑’으로, 즉 굵은 글씨로 표기하고 있답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상의 아가페(agape)...들을 필레오(phileo)와 동일시하여 싸그리(^^) 러브로 번역하지 않고, 그 의미를 일일이 따져 러브(love) 또는 채리티(charity)로 구분하여 번역했던 410여년 전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 분들의 그 신실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대한 자긍심 또한 느낌이...마땅하지 않은가요...? ^^   킹제임스 성경 상에 채리티(charity)로 표기된 곳들, 그러니까,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상에 ‘사랑’으로 표기된 25개 절들을, 혹시 참고 자료로서의 가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덧붙여 적어 봅니다.     로마서 14:15, 고린도전서 8:1, 고린도전서 13:1, 고린도전서 13:2, 고린도전서 13:3, 고린도전서 13:4, 고린도전서 13:8, 고린도전서 13:13, 고린도전서 14:1, 고린도전서 16:14, 골로새서 3:14, 데살로니가전서 3:6, 데살로니가후서 1:3, 디모데전서 1:5, 디모데전서 2:15, 디모데전서 4:12, 디모데후서 2:22, 디모데후서 3:10, 디도서 2:2, 베드로전서 4:8, 베드로전서 5:14, 베드로후서 1:7, 요한삼서 1:6, 유다서 1:12, 요한계시록 2:19     ( 끝 )      
2025-03-18 21:53:13 | 최영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인권침해   최근에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대통령에 대한 불법 수사, 불법 체포 영장, 불법 구속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권침해라고 할 수 있다. 2천년 전에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떤 인권침해를 당하셨을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인권침해 차원에서 알아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와 상당히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신학적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해석되지만, 역사적·법적 관점에서 보면 극심한 인권침해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무죄한 자에 대한 부당한 재판, 고문, 공개 처형이라는 점에서 현대 인권 기준과 비교할 때 명백한 불법적 행위들이 포함된다. 1. 불공정한 재판 및 법 절차 위반 비공식적이고 야간에 진행된 재판 (비공개 절차) 마태복음 26:57-68 (Matthew 26:57-68) 예수님은 체포된 후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이 과정은 야간에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당시 유대법에 따르면 야간 재판은 금지되었고, 공개 재판이 원칙이었다. 누가복음 22:66 (Luke 22:66) 아침이 되어서야 공식적인 공회(Sanhedrin) 회의가 열렸지만, 이미 유죄 판결은 정해져 있었다. 위증을 통한 죄의 조작 마태복음 26:59-60 (Matthew 26:59-60) "Now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and all the council, sought false witness against Jesus, to put him to death; But found none: yea, though many false witnesses came, yet found they none." 즉,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예수를 고발하려 했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자기 변호권 박탈 마가복음 14:61-62 (Mark 14:61-62) 예수님은 재판 중 오랫동안 침묵하셨으나, 대제사장이 강요하는 질문에 대답한 후 신성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피고인의 자기 변호권이 제한된 사례다. 2. 심각한 신체적 학대 및 고문 체포 이후 곤경 마태복음 26:67 (Matthew 26:67) "Then did they spit in his face, and buffeted him; and others smote him with the palms of their hands," 예수님은 재판 도중 얼굴을 맞고, 조롱당하며 학대를 당했다. 채찍질 및 로마 병사들의 고문 마태복음 27:26-30 (Matthew 27:26-30)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으로 채찍질을 당했고, 로마 병사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채찍(플라그룸, Flagrum)은 금속이나 뼈 조각이 부착된 가죽 채찍으로, 이는 피부를 찢는 극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도구였다. 가시 면류관과 조롱 마태복음 27:29 (Matthew 27:29) "And when they had platted a crown of thorns, they put it upon his head, and a reed in his right hand: and they bowed the knee before him, and mocked him, saying, Hail, King of the Jews!" 군사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조롱하며 가시 면류관을 씌웠고, 이는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유발했을 것이다. 3. 비인간적인 사형 방식: 십자가형 극도의 신체적 고통을 동반한 처형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에서 노예나 반역자들에게 적용되던 가장 잔인한 사형 방식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질식, 극심한 탈수, 심장마비, 신경 손상 등으로 인해 서서히 죽음을 맞았다. 마태복음 27:35 (Matthew 27:35) "And they crucified him, and parted his garments, casting lots: 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They parted my garments among them, and upon my vesture did they cast lots." 예수님의 옷은 병사들에게 빼앗겼고, 이는 비인도적인 처사였다. 대중 앞에서의 공개 처형: 수치심 유발 당시 십자가형은 나체로 매달아 공개 처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수님 역시 이런 방식으로 처형되었으며, 이는 사람을 완전히 모욕하고 인간 존엄성을 말살하는 행위였다. 4. 최후의 순간까지의 조롱과 방치 조롱과 모욕 마태복음 27:39-40 (Matthew 27:39-40)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도 비웃으며 예수님을 능멸했다. 최소한의 인도적 배려조차 없음 요한복음 19:28 (John 19:28) "After this, Jesus knowing that all things were now accomplished,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 saith, I thirst." 예수님은 갈증을 호소했으나, 군사들은 식초를 주어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는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조차 하지 않은 비인도적 행위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은 인권침해 덩어리였다. 법적 절차 위반: 불공정한 재판과 거짓 증거 조작 신체적 학대: 채찍질과 가혹한 고문 비인간적인 처형 방식: 십자가형의 잔인함 인간 존엄성의 말살: 조롱과 공개 수치심 유발 오늘날 국제법과 인권 개념(예: UN 세계인권선언)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재판과 처형 과정은 명백한 사법적 살해(Judicial Murder)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부당한 인권침해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해방의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 속박의 멍에에 얽매이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
2025-03-14 08:09:13 | 이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