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송재근 형제님(인천 대공원)
2009-06-01 18:19:55 | 관리자
인천 대공원에서 자매님들
2009-06-01 18:18:47 | 관리자
우리 교회의 막내들
2009-06-01 18:17:53 | 관리자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첫번째 발표입니다.
2009-06-01 18:16:40 | 관리자
희원이가 와서 우리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2009-06-01 18:15:26 | 관리자
불쌍하다...이 원글 쓰신 자매님. 피자 실컷 먹고 그 다음에 뱃살 빼는 건 어때요? 이렇게 묻고 싶네요.
2009-06-01 18:03:30 | 백화자
조지 위필드 목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키기로 주님과 약속하고 매일 이것을 점검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글은 특히 목사들에게 꼭 필요한 글입니다. 내 자신을 쳐서 낮추는 작업이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끝없이 성화의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한 번 이런 약속들을 지켜봅시다. 책상에 붙여 놓고 매일 보기 바랍니다.
첫째, 개인 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 놓은 기도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거나 행동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 심사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서 순수했는가,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 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 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서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 번째,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 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열네 번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열다섯 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2009-06-01 18:03:15 | 관리자
다음은 김남준 목사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다음 세기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더더욱 기독교신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을 일고자하는 자들일수록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가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필자는 조국교회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하며 죤 길리즈(John Gillies)와 함께 다음과 같은 회고에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맺는다.
그들의 설교에는 장엄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생각에는 타오르는 불과 힘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설교자들이 힘의 사람들이었음을 느낍니다. 그들의 증언은 나팔이 되었고 그 나팔은 성자에게나 죄인에게나 교회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결코 희미하거나 애매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증언함에 있어 주춤거림이나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이나 겉치레의 말로 대언을 대신하는 것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멸하신 십자가 위에서 죄의 종지부를 찍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게 된 큰 기쁨의 소식을 선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형벌들은 선포하는 데 더욱더 탁월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들을 십자가에서 완성된 바로 그 구속의 성취로 곧장 이끌어 내어 복음을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보다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이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를 심어 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는 또한 구주가 누구신지를 완전히 드러내 주었으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청중들에게 던져진 가장 용맹스럽고 담대한 종류의 선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격렬하지도 않았고 사납지도 않았으며 시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경건하여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경박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무게도 있었고 날카로웠으며 사람의 심령을 깨뜨리는 힘이 있었으며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였습니다. 그들이 휘둘렀던 말씀의 무기들은 잘 담금질되어 있었고,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었으며,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들은 결코 빈약하거나 훈련되지 않은 무기를 휘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2009-06-01 18:00:54 | 관리자
늦둥이라고 해서 조그만 아이를 데리고 성경공부를 하시나...했죠..하하하. 성경공부 하는 것 . 재미있죠? 저도 작년부터인가해서 인터넷으로 엄~청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 성경공부에도 참석하고요. 이제껏 우리 교회에서 배운 공부를 복습을 해야하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있지요. 이번 여름엔 복습을 해야, 가을부터 하는 공부를 다시 따라가는데...말입니다. 참 ,어느 자매님이신지 모르겠지만, 잘 성장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09-06-01 17:57:51 | 백화자
요즘 목사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한 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평생을 설교하면서 일생을 보낸 목사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내하며 목사의 길을 가는 많은 형제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한 성도가 적은 한국 교회의 칠거지악이란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잘못된 목사에 대해 지적을 많이 했습니다만 나는 거기서 중간에 있는 한 부분에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런 목사가 되기를 갈구하면서 전체의 글을 올립니다. 오늘도 양들에게 바른 꼴을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목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목사의 타락
영적 지도자로서의 고결한 신앙 인격이 말씀과 함께 외쳐질 때 목회자로서의 진정한 권위가 저절로 드러날 터임에도 “더러운 이를 취하며(벧전5:2)”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딤전6:5)” “군림(주장)하는 자세(벧전5:3)”가 되어 버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1,2)”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고귀한 직분을 밝혔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혼잡케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은 마치 포도주에 물을 타서 포도주를 변질시킨다는 의미를 뜻한다. 또한 그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고 곧 순전함을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서 혼잡이란 뜻은 값싼 물품이나 위조품 등을 교묘한 꾀와 속임수로 진짜처럼 팔러 다니는 엉터리 잡상인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서 자신의 이권을 취하기 위해 진리의 복음과 인간의 영혼을 담보 잡아 사사로운 잇속과 명예를 챙기는 불의한자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절망하나 순종의 걸음을 통해서는 소망의 출구를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음을 성도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외로운 씨름을 하며 그분의 말씀과 대면하며 처절해져야 한다. 그래야 목사는 강단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듯한 고독과의 싸움이 싫어질수록 강대상에서는 분칠한 설교가 나오게 마련이며 사람들의 구미에나 맞추는 백화점 식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 만나기를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일(행6:4)보다 더 선호할 때 타락은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는지, 바빠야 할 이유와 순위가 문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강조하는 만큼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근사한 식당에서 대접받는 것이나 심방 가서 만나주는 것으로 표현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 것”을 강조하셨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나 마음과 물질 모두로부터의 가난과 그 가난을 기쁨으로 감내하겠다는 실천의지는 너무나 약하다.
목사는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격려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부득이한 (벧전5:2) 의무로 변질시켜 버릴 위험성도 다분히 있다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고귀한 의무감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 먼저 떠오를 때 목사는 타락의 길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목사의 영적 타락이 윤리적 타락보다 더 심각하며 영적 책무의 망각이 자신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상준 교수 (Concordia University)
2009-06-01 17:56:50 | 관리자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리더가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어떤 단체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평촌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를 가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담임 목사님은 아프셔서 못 나오시고 부목사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부목사는 마치 TV에 나오는 젊은 코미디언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적어도 500명은 거기 앉아 있었는데 1시간 설교를 했으니 500시간을 빼앗은 것입니다. 목사의 수준이 저 정도니 성도들은 어떨까, 담임 목사가 그렇게 유명한데 그 밑의 부목사 수준이 어째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목사가 잘 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청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허공 대고 이야기하는 목사나 아무 열정이 없이 설교하는 목사를 보면 우리의 현실이 암담합니다. 목사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듭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설교자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목사들이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설교자의 소명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매였기 때문에 교회에 매인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성도들과 만난 사람입니다.
예배 중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사랑을 알고 그 부르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예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거역할 수 없는 소명에 붙잡힌 사람, 의와 공평을 따라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이러한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호명에 충실한 생애를 살다가 겪은 고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공평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뜻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신령한 예배에 관한 다른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양떼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릴 날들을 꿈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러한 직무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직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상담, 심방, 교육, 구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설교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목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이야 말로 목사의 우선적인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잘하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섬기는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것을 행해도 거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서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없는 교회가 다른 요인들로써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신령한 설교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2009-06-01 17:47:46 | 관리자
다음은 어느 독자가 보내 준 송인규 교수님의 글입니다.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읽고 많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송인규 교수의 한국교회 신앙진단).
질문이란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푸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질문은 질문하는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돕는가 하면, 또 자신의 질문 내용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자극하고, 때로 질문자의 숨은 의도를 여지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이렇게 당사자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질문은 그 대상인 답변자에게 궁극적인 자극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질문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논의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빠르게 타진하게 되며 만약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청중들을 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청중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어려운 교회
이토록 질문의 유익이 많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은 그다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독교 안팎에서 찾아보면, 우선, 교회 외적으로 한국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교육 분위기는 질문(및 답변)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습 태도가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수직 구조에서 수행되는 강의, 필기, 암기의 반복일 뿐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 간 상호 교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교육이라면 마땅히 질의와 응답이라는 교육적 수단을 포함해야 함에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 과밀한 학생 수, 그에 비해 열악한 교사 수 등의 현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둘째, 학습장을 감싸고 있는 심리적 압박이 질문과 대답을 편안하게 유도하기 못합니다. 많은 교사들은(특히 나이가 든 옛 세대일수록) 학생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것을 상급자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 편에서 “짜식! 혼자 되게 잘난 척하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물론 질문자중에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시건방진 태도로 질문하는 이도 있고, 자기 과시를 위해 질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 환경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 내적 요인 또한 자유로운 질문의 풍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강조점 믿음에의 독려와 권면은 자연히 질문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연히 질문(및 답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의문점의 제기는 곧 불신, 불순종, 반역 등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나라의 교회 모임은 질의 및 응답이라는 교육 방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소그룹 활성화가 목회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일까......그 전까지는 모든 모임이 주로 예배와 같은 대그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예배나 기도회에서는―그것이 크든 작든―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주도하는 소그룹 제자 모임도 아직은 모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과 응답의 학습 방식이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질의와 응답에 대한 성경의 예시
성경은 질문(및 답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질문과 관련하여 무슨 명령을 내린다든지(“너희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을 하라.”), 아니면 무슨 약속을 제시한다든지(“질문을 하면 주께서 깨닫게 하시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전례와 모범은 질문(및 답변)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해서건(창 3: 9, 11), 하와에 대해서건(창 3: 13), 아니면 가인에 대해서건(창 4: 6, 7, 9, 10)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질문의 형태를 빌려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전할 때든지(사 40: 12~14),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경고할 때든지(렘 23: 33~34), 에스겔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호소할 때든지(겔 18: 2, 10-13, 19, 24, 25, 29, 31) 한결같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많은 경우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12세에 지혜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에 바로 질의와 답변을 사용하였습니다(눅 2: 46~47). 공생애 내내 질문의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이나 듣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6: 15; 막 10: 9; 눅 10: 36; 요 8: 46). 또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마 11: 2~6; 19: 16~22; 21: 23~27; 22: 15~22; 23~33; 막 2: 16~28; 8: 27~38; 9: 10~13; 10: 1~12; 13: 3~37; 눅 10: 25~36; 12: 41~48; 요 3: 4~15; 4: 10~15; 6: 28~65; 8: 1~11; 9: 1~7; 13: 36~14: 7).
사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질의와 응답의 형식으로 사명―복음 전도, 변증, 양육, 교육 등―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비신자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벧전 3: 15)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과거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을 때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행 4: 7~1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도 재판 과정 중 자신이 기소 당한 이유를 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2: 1; 26: 1). 특히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진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롬 2: 4~5, 21~23, 26~27; 3: 1, 3, 5, 6, 7~8, 9; 6: 1, 2, 3, 15, 16, 21; 8: 24, 31, 32, 33, 34, 35; 11: 34, 35).
질문 풍토 개선의 길
이처럼 중요한 ‘질문(및 답변)’이 한국 교회 내에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먼저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질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우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질문을 던지고 교우들로부터 답변을 유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교육과 훈련 과정 중에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품을 때 정죄하거나 냉소로 반응하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때로 질문자의 태도나 내용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정성껏 답해야 합니다. 질문이 어려워 당장 답변하기 힘들 때에는 그렇다고 시인해야 하며, 후에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꼭 지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살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해당 주제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과 답변이 필요하고 가능한 형태의 모임들은 공동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미 각종 리더 모임과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일방적인 강의만 하지 말고, 질의․응답 시간을 의도적으로 두십시오. 또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세미나, 강좌 등―을 만들어 내십시오.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시켜 질의와 응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그리스도인 각자와 공동체에 귀중한 자원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체질 개선의 의지가 깨어난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09-06-01 17:44:41 | 관리자
예배에서 내가 감격하면 좋은 예배를 드린 것일까요? 요즘 교제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감격하고 모인 사람들이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 그 예배가 바른 예배일까요? 예배는 worship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낮추어 그분의 뜻대로 따른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예배에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무능함,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없으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 중심의 예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헛다리를 집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예배에 대한 세미나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합시다.
가정 같은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힘을 합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전 교우들이 헌신적으로 힘을 합쳐서 예배 처소까지 분양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개척해서 6년간 목회하는 동안 날마다 교회 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개척교회를 세울 뜻이 없는 제 친구들이 저를 보고 개척을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과 별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당에서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를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 치고 배구도 하다가 저녁때는 씻고 같이 모여서 저녁 먹고 예배도 드리는, 가정 같은(?) 교회를 꾸려가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라고 자부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련을 ‘불꽃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목회자가 변화를 받으면서 설교다운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그 돈독했던 교우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재미있는 교회프로그램, 심지어는 친구, 친척,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예배 중심에 회심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2009-06-01 17:33:21 | 관리자
너무 예쁜 아이들의 찬양 이예요.... 특히 조그마한 도이의 진지함이 더욱 !!!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있기를 기도하게 되네요.
2009-06-01 16:30:15 | 정혜미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6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심한 적이 없다.
단지 그 분의 뜻을 행했다.
자신의 생각이 곧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롬 12:1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빌2:13
온전히 우리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은 그 분의 책임이다
기대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그 분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그분의 뜻이 당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의 뜻일리가 없어요! 완전히 틀렸다고요 ! 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행했다가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라
로마제국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그곳에 가기로 결심했는데
그만 배가 좌초되어 말타섬에 머물다가 독사에게 물린 바울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마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신실하게 행했다가 밧모섬에 유배되고 말았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하나님 뜻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 때 조차
실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믿음으로 행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의심하지 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기 "은혜가 다스리는 삶" - 책 중에서
2009-06-01 15:36:32 | 정혜미
음악 다운로드를 원하면 www.KeepBible.com의 음악 자료를 이용하기 바랍니다.
2009-06-01 15:34:47 | 관리자
어제 처음으로 주일학교 아이들이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작은 시작이지만 이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 주님의 대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수고해 주신 교육 목사님 부부와 성도님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2009-06-01 15:25:32 | 관리자
두분의 아름다운 미소가 사랑침례교회 모습같아요 ..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환~~한^^
2009-06-01 15:15:56 | 장영희
2009년 5월 31일 (주일 오후)
● 첨부하는 설교 노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유튜브동영상 바로보기 => http://youtu.be/ZbfcBSJwxQ8
2009-06-01 15:14:55 | 관리자
뱃살과의 전쟁을 선포한 후 가끔 즐겨 먹던 피자도 아예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
피자의 열량이 얼마나 높은지 아는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다.
그래서 난 피자금식에 들어갔다.
절대로 안돼, 단 한 조각도 안돼!
그러나 결심을 지키는 데는 한가지 장애가 있었다.
우리 집 아이 중 세명이 피자가게에서 일했던 것이다 보통 피자가 아니라 화덕 피자가게에서말이다.
화덕 피자는 정말 맛있다.아들은 이 가게에서 주방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주문만 하면 특별한 피자를 먹을 수 있었다
아들은 피자위에 치즈를 깔고 페퍼로니를 듬뿍 친다음 빵 가장자리가 도톰하게 올라오도록 굽는다 (생각만 해도 당장 먹고 싶다)
이제는 피자를 먹지 않을거야!
난 한달에 보통 두어번 먹었지만 더는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덕 피자를 먹고 싶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왔다.
매일 생각났다
다음 끼니를 고민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피자! 하고 절규했다
피자와 조금이라도 닮은 물건을 볼 때면 피자가 더 그리웠다.
하루는 아이오와주에 있는 농경지를 따라 운전을 하고 있는데 피자 냄새가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지나갔던 곳은 돼지 농장이었다
나는 오히려 피자를 먹지 않겠다는 율법때문에 피자를 먹고 싶은 욕구가 불같이 일어났다
율법이 우리의 영적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이와같다.
2009-06-01 14:59:53 | 정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