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님 감사합니다~
한 발자욱씩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것을 응원합니다^^
2020-12-20 14:13:36 | 이수영
내가 유튜브를 처음 접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안동역에서' 라는 노래가 좋다고 하시며 테이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가수 이름을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셔서 나는 어떤 노래인지 들어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려했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이 유튜브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유튜브'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 노래를 찾은 뒤 유튜브는 바로 나에게 잊혀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지인이 웃기는 동영상이라고 보내줘서 다시 유튜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유튜브는 노래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락이나 쇼도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잊혀졌다.
한참이 지난 뒤 성경을 보다가 문득 유튜브에서 설교도 나올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혹시 하면서 다시 유튜브에 갔는데 세상에!
수많은 설교에 찬양에 간증에...
그때는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고 극동방송만 듣고 있었던 참이라 유튜브는 나에게 또다른 세상이었다.
난 이제 또다른 세상에 배를 띄웠다.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던 배를 만들기까지 오래 걸렸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배를 띄우고 나니 참 기쁘다.
누군가
누군가가...
이 배를 발견하고 한 가닥 빛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또다른 세상인가? / 이정자
1
캄캄한 알 속
눈을 뜰 수 없지만 뜨고 싶지 않아.
알이 흔들
무언지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지 않아.
알이 쿡!
놀란 마음 추스리고 누가 그랬지?
갑자기
금 사이로 새어오는 빛줄기
빼꼼이 내밀어보니
또다른 세상인가?
2
세상에 나왔다.
보인다.
들린다.
보이는 데로 가보자
들리는 데로 가보자
가도가도 끝없는 모래바위
가도가도 수많은 돌바위
갑자기
발이 축축해진다.
몸이 잠긴다.
또다른 세상인가?
3
바다다.
나를 낳아준
아직은 작고
아직은 약하지만
언젠가 커질거야
언젠가 강해질거야.
갑자기
물밀 듯 용기가 생긴다.
기쁨이 번진다.
또다른 세상인가?
* 추신 : 거북이가 알에서 깨어 바다로 가는 과정을 생각하며 시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저는 2012년부터 성경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을 세번 째 쓰고 있어요.
성경을 처음 쓸 때 아픈 오빠를 위해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썼었는데 레위기 17:11 에서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말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참을 울었지요.
그리고 이사야 53장을 쓰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너무 모르고 믿어왔던 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감사하며...
그리고나서 제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해 전하자!
나처럼 모르고 믿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전해주자.
해보지 않은 일이라 남들에게 전하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날마다 쓰는 말씀을 공부해 문자로 주변에 보내주고, 밴드와 블로그에 올리고 이제 유튜브까지 왔습니다.
유튜브는 <매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한 장>으로 창세기 1장부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서툴고 미약하지만 시편 23장의 말씀을 품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렵니다.
시편 23:4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2020-12-20 08:06:19 | 이정자
일상생활에서의 평범한 주제들도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재능이 있으시네요^^
천둥소리가 주의 대적자들에게 심판하는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네요!!
꾸준히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2020-12-07 11:22:43 | 김세라
저도 그다지 천둥소리에 대해 무감하였으나
자매님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았습니다.
'북쪽 먼 곳 호령소리' 라는 문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2020-12-07 09:08:05 | 조성재
<오늘 묵상 말씀>
욥기 37장
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음성으로 놀랍게 천둥소리를 내시며 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큰일들을 행하시나니
<천둥소리>
오늘은 천둥소리를 보며 <{주}의 음성은 권능이 있고 {주}의 음성은 위엄이 가득하도다(시29:4)>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10
{주}의 대적들은 산산조각 나리로다. 그분께서 하늘에서부터 천둥으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주}께서 땅의 끝들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도다, 하니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스치는 바람끝이 차갑네요.
오늘 아침에는 천둥소리에 대한 말씀을 보다가 번개와 천둥이 칠 때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며,
어디서 어떻게 왜? 라고 궁금해 하며 그저 자연 현상의 하나려니.. 라고 생각했던 적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천둥소리에 대해 생각하며 사무엘상 말씀을 봤어요.
사무엘상 2:10
사무엘이 번제 헌물을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왔으나 그 날에 {주}께서 큰 천둥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천둥소리를 내사 그들을 무찌르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므로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께서 또한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생각하고 시를 지었습니다.
사랑침례교회 모든 성도님 감기 조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합니다.
천둥소리/이정자
빛이 번쩍!
번개다.
우르르 꽝!
천둥소리다.
놀란 마음
두려운 소리
어디서 나오는걸까?
어디서 들려오는걸까?
북쪽 먼 곳 호령소리
땅이 떨고
땅이 흔들리고
산산조각 나리로다.
산산조각 나리로다.
{주}의 대적들은.
2020-12-05 10:23:55 | 이정자
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되생각하곤 하는데 같은 생각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불러 주실지 모르지만 우리 성도들은 오늘을 살아내야지요.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찬양하며, 자연을 통해 주님을 기뻐하며.
2020-11-16 12:55:50 | 이수영
말씀에 기록된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정체성과 삶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금 짚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형제님의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샬롬~
2020-11-16 10:24:49 | 서선숙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무엇인지
되돌아 보는 글이네요~
가끔씩 좋은 글 부탁합니다^^
2020-11-16 09:13:48 | 김세라
성큼 다가 온 인생의 황혼 시기에 발 디디며,
계절의 끝자락에서, 많이 생각하던 것을 올려주시니 더 공감이 됩니다. 같은것을 생각하는 지체가 있다는 것이 위로와 힘이 됩니다.
2020-11-15 21:22:05 | 김혜순
글을 읽고 다시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형제님.
2020-11-15 02:51:36 | 이청원
낙엽이 쉼없이 떨어져 쌓여가고 마침내 앙상한 가지만 남아도 나무는 생명을 잠재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시처럼 낙엽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녹화해 둔 영상처럼 일시정지를 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은 거침없이 앞으로만 달려갑니다. 그 달음질하는 시간에 따라 순간순간 우리의 위치는 계속 변하며 바뀌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현재라고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는 있을까요? 문자적 현재 말고 실질적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언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가 영(spirit)을 가진 영적 존재로 태어났듯이, 오직 영원 속에 계신 그분의 숨(breath)이, 우리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의 의미는 항상 우리 신앙의 순간마다 기초가 됩니다.
히 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위에서 잠깐 언급드렸다시피 현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진행되며 영원 속에 포함된 실체와 증거는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나타난 행위,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듯이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습니다(시 119:89).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라는 의미를 함께 깊이 묵상해 보며 우리들 신앙에 적용하면 좋을거 같습니다.
현재라는 그리스어 ‘에니스테미(가까이 두다)‘는 ’엔(위치)‘이라는 기본전치사와 ’히스테미(서다, 멈추게 하다)‘라는 기본 동사에서 유래된 단어로 과거와 미래 속에서 순간순간 멈추어 서 있는 위치를 말합니다. 과거와 미래속에서 내 위치와 가까이 있는 것이 현재라는 말이 되지요. 그럼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모두 알고 계시듯이 영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의 일부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원(eternity)에 대한 확신과,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가지고 있는 평안은, 곧 다가올 육체의 죽음을 초월하며 두려움에 떨게 만드려는 마귀의 거짓된 계략을 무력화시킵니다.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님들이 소천 되신 이후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위안 삼을 수 있는 큰 도피처가 되기도 합니다.
영원은,
’현재를 포함한 과거와 미래‘에 같이 사용되며, '계속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아에이‘, 그리고 '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이온’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 1:1.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generation)에 대한 책이라.
시대는 ‘역사적으로 어떤 표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을 말하고 있지만, 위 구절을 통해서 보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한 세대에 속한다면, 시대 또한 한 시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영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따라 ‘항상 계속되는 시대의 한 세대’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살던 그 시대나 지금이나 주님 안에서는 한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이 그 시대에 살지 않았고, 앞으로 태어날 어떤 사람들과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적 지식을 쌓을 땐 시대를 구분해서 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는 첫 사람 아담까지 모두가 영원히 살아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시대를 한 시대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낮과 밤과 날을 주시며 시간으로 경계(境界)를 두신 것처럼, 모든 창조물에도 경계를 두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면 비로소 시간의 경계를 벗고 모두 영원으로 들어가겠지만, 시간이 남아있는 아직까지는, 우리는 모두 육신의 경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두 가지 불변하시는(히 6:18)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약속’에 따라, 지금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 안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요일 2:25.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이 땅에 주신 말씀들을 통해, 또 우리가 항상 실감하고 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통해, 영원에 계신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진대 지금의 이 순간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지금 이 세상은 거짓과 위선. 불법이 더욱더 자라나 마귀의 계략에 부합하며, 시간이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점점 더 무질서의 끝을 향해 가고 있고, 가나안 땅의 불법이 충만해졌었던 그 시대의 정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관을 가진 성도로서 거짓과 불법들에 타협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항거(抗拒)는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주님의 계획 속에는 이 세상이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고 봐야 성경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는 없겠죠. 옳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저들과 마찬가지로 거짓과 위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성도의 신분은, 옳은 것을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자들보다 더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클수록 그날에 받는 영광은 더 빛난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나 읽고 계시는 여러분이나, 우리는 현재가 없는 영원 속에 계속 진행하고 있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옷을 벗고 있느냐 입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사나 죽으나 주님과 항상 함께 있다고 인지(認知)한다면 이 육신의 옷을 벗는 그 날이 설렘으로 기다려지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그 아름다움의 거룩함 속으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 그 하나의 특권으로 누리는 이 은혜의 시대가 이제 종점(終點)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런 즈음에, 시간의 끝을 바라보는 성도의 시각이,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거룩함의 아름다움 속에 계신 그분의 영광에 나침판처럼 고정되어 있다면, 세상에 보이는 악한 것들로 인해 슬픔이 있을지라도 항상 기뻐하는 자요, 또한 그분을 보고 싶어 하는 애절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순간들을 이기는 자로 살 거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포기하고 싶도록 낙담이 되거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할지라도 모두 이겨 내시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며 마침내 도달할 그곳을 항상 사모하며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존귀에 이르도록 긍휼을 베푸신 우리 주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엡 5:16 시간을 되찾으라. 날들이 악하니라.
2020-11-14 17:06:43 | 이명석
마음에 깊게 새겨지네요.
나는 두본성 어디쯤 와있는지, 노력은 하고있는지, 다시 한번 저를 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
2020-11-11 21:59:06 | 이청원
안녕하세요?
달려가는 그림이 멋 있네요.
성화 과정이 이해가 되고요.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0-11-10 11:33:40 | 관리자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했을까? 그에 답은 로마서 7장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서 7장 14절부터 25절까지를 보면, ‘내가’ 라는 단어가 24회 나온다. 나의 경험으로는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지나갔고, 두 번째 읽을 때는 혼란스러웠고, 세 번째 밑줄 그어가면서 정독을 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7장 19절)는 구절에 보듯이, ‘내가’라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번갈아 나온다.
사울 바울은 7장 24절에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하는데, 이 비참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옛 사람이다. 18절에 ‘내 육신 안에’ 있는 나가 바로 비참한 사람인 것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서 잘 정리된 책이 『두 본성』이다. 지난 주, 교회에서 『두 본성』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보고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성도의 두 본성을 이해하고, 또 두 본성과 관련해서 혼란스럽지 않으려면 성도의 신분과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본성과 성도의 신분과 상태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두 본성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두 본성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자연적 출생으로 받은 전적으로 악한 본성과 새로운 출생으로 받게 된 새로운 본성 즉 전적으로 선하고 올바른 본성이 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첫째 본성은 흔히 ‘옛 사람’으로 불린다. 옛 사람은 모태로부터 태어났을 때, 자연적 출생으로 받게 된 본성이다. 옛 본성을 예레미야는 인간의 극도로 사악한 마음이라고 한다. 옛 본성은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려는 내재적인 경향이다. 옛 사람은 본성에 속한 사람으로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아주 악하고 나쁜 것이다. 첫째 본성의 이름은 옛 사람, 겉 사람, 육신, 비참한 사람으로 불린다. 옛 사람의 원수는 새 사람이다. 서로가 끊임없이 다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둘째 본성은 ‘새 사람’으로 불린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신뢰할 때 이 본성이 주어진다. 새 사람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다시 태어날 때, 값없는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둘째 본성의 이름은 새 사람, 성령, 마음에 숨겨진 사람, 속사람,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본성으로 불린다. 새 사람의 원수는 옛 사람이다. 서로가 끊임없이 다투기 때문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원수 관계이다. 끊임없이 싸운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매우 싫어하고, 옛 사람은 새 사람을 멸시한다. 성경은 구원 받은 성도가 옛 사람과 그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처방으로 1)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라. 2)자신을 하나님께 내 드리라. 3)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4)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다. 옛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들라고 한다.
2. 성도의 신분과 상태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 위치한 것,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의 용서를 받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았고, 거룩해졌고, 하나님의 의로 옷을 입은 절대적으로 완벽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실제적인 영적 상태를 말한다. 성도의 행함과 살고 행동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완전하지 못하고, 더 나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아래 그림은 위에서 말한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구원을 받으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 둘은 끊임없이 다투며 함께 간다. 태어나서 오른쪽 상단으로 성장해 과정이 성화이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오른쪽 상단) 도달하면 옛 사람은 없고 새 사람만 있게 된다.
믿는 자의 신분과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어떤 구절은 매우 혼란스럽고 또 심지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도의 상태는 무시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만을 강조하는 경우, 죄를 지어도 회개를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양심이 무감각해질 수 있다. 또 신분을 무시하고, 상태만을 강조하는 경우, 구원에 확신이 없고, 비참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8장으로 옮기라고 강조한다.
2020-11-09 14:38:29 | 이규환
형제님!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잘 추수르시고 굳건하게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힘내십시오.
2020-11-09 10:28:23 | 이규환
형제님. 항상 주님안에서 평강을 누리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잠깐이라도 뵐 수 있어서 좋았어요.
2020-10-22 22:35:14 | 김어진
얼마나 많은시간이 흘러야 가슴에서 먼저가신 분의 그리움을 지울 수 있을까요.
살면서 그 고통이 아물수있도록 우리하나님께서 망각이라는 지혜도 주셨으니 마음의 상처 어루만져주시며 치유해 주실것을 믿습니다. 예쁜 자녀들과 힘내세요 형제님.
2020-10-21 03:44:23 | 이청원
힘든시간을 보내시고 다시 교회에서 뵈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가족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어떻게 위로해야 모르지만,이 세상 살아갈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지체가 되길 바랍니다. 아이들도 믿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힘내세요.
2020-10-20 08:44:15 | 김세라
자매님, 시 잘 읽었습니다.
아침에 자매님의 시를 읽으며 부활과 휴거의 소망으로 읽는 내내 가슴이 설렜습니다.
시 구절처럼 온 우주가 덩실덩실 춤추는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감사함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2020-10-20 08:23:30 | 심경아
저는 최정래 자매님을 데리고 가신 하나님의 뜻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최정래 자매님께서 고통스럽고 남루했던 육신의 장막을 벗고 지금은 하나님 곁에서 안식하고 있으리란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고통이지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평강이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2020-10-20 08:09:21 | 심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