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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는 바에서 경쟁력이 있는가?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지금 나는 결코 세상의 경쟁력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른 열심으로 매진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다음은 사도 바울의 열정을 보여 준다.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9:24-27).   교회에는 바른 열심과 진정성이 넘쳐야 한다. 믿음의 성도들은 모두 위와 같은 바음 자세로 살았다. 목사든 성도든 바르게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과 교회 생활에 정진하지 않으면 나중에 주님 앞에서 꾸증을 들을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일반 신문의 사설이다. 일반 사람들도 바르게 생각하고 살진대 믿는 사람들이 더 바르게 열심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사하는 바가 큰 글이라 소개한다.   금메달과 평준화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새삼 확인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금메달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금메달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나 국민이 없겠지만 유독 우리는 금메달에 올인하며 금메달만이 메달인 양 대접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 스포츠 관계자는 텔레비전에 나와 '은메달을 딴 선수가 마치 죄인인 양 고개 숙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올림픽의 정신은 참여에 있다고들 하고 패자(敗者)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금메달은 일등을 말한다. 올림픽의 금메달은 세계 최고를 의미한다. '세계 최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금메달의 뒤에는 그 선수의 땀과 눈물, 역경을 이겨내는 인내, 그리고 관계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다. 무엇보다 같은 종목에 참가하는 수십, 수백명과의 경쟁에서 이겨낸다는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상당부분을 투자한 긴 여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있으며 어떤 인생훈련을 치르고 있으며 어떤 사회적 제도적 틀에 묶여 있는가? 우리의 어린 세대, 젊은 세대는 평준화에 길들여지고 있다. 그들의 교육을 가로지르는 중심축은 평준화이고 그들을 지배하는 교육적 덕목은 평등이다. 경쟁은 못하는 사람을 밟고 넘어서는 '나쁜 것'이고, 돈 있는 계층에게만 유리할 수 있는, 반(反)인간적 장치라는 것이 평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인생이, 인간의 삶이 언제까지나 평등하게 가고 너 나의 차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좋다. 경쟁은 힘들고 평준화는 편하다. 경쟁은 때로 각박하고 남을 밟고 넘어서는 작업이다. 비인간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경쟁 없이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은 그야말로 낙원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평준화에 익숙해진 우리의 청소년들은 곧 경쟁이 판치는 엄혹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지게 된다. 경쟁이 아닌 배정(配定)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학교를 나오자마자 금메달만을 숭상하는 세상의 인심에 직면하게 된다. 경쟁을 나쁜 것으로 여기는 전교조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은 우리의 차세대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평준화가 통하지 않는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때로는 '너 죽고 나 사는' 투쟁에 아무런 훈련이나 준비 없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경쟁도 훈련해야 한다. 경쟁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젊은이들을 비무장인 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죄악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가르쳐야 한다. 경쟁 없는 세상을 끝까지 보장할 수 없다면 아이들을 덮어놓고 무장 해제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평준화를 신봉할 것이면 금메달에 목숨 걸듯이 매달리는 세상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왜냐하면 메달은 바로 경쟁이고 금메달은 최고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평준화로는 금메달을 딸 수 없다. 전쟁의 폐허 위에 오늘의 경제를 만들어낸 전후(戰後)세대들은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만 배웠다. 형제끼리도 경쟁했고 친한 친구끼리도 경쟁했다.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비열하기까지 했던 경쟁 속의 삶이었다. 오늘의 세계는 여전히 경쟁체제로 가고 있다. 경쟁을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하고 평준·평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전교조식(式) 교육으로는 세계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의 의식구조에 있다. 지금 우리는 모순되는 의식의 단면들을 여기저기서 목도한다. 교육제도는 평준화에 머물면서 경쟁의 최고치인 금메달에 환호하는 이중구조가 대표적이다. 입으로는 반미(反美)를 부르짖으면서 자녀들은 미국에 못 보내 안달인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본다. 자유와 인권을 얘기하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에는 눈을 돌리는 이율배반의 현상이 버젓이 존재한다. 명색이 법치국가라면서 준법정신은 땅에 떨어진 세태가 판을 친다. 너무나 위선적이다. 경쟁이 사람을 잘못 인도하는 경우가 없을 수 없다. 경쟁에는 여러 부작용이 있다. 그러나 부작용은 그것대로 극복해야지 교각살우(矯角殺牛)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올림픽에도 3·4위전이 있고 패자부활전도 있다. 금메달이 안 되면 3·4위전으로 가야 하고 패자부활전에도 나설 수 있다. 거기에도 경쟁은 있다. 앞서 가는 사람, 뒤처지는 사람이 각각 분수에 맞게 윈-윈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지, 앞선 사람을 끌어내려 뒤처진 사람에 맞추는 것은 양쪽 다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2008년 8월 25일, 조선일보 사설)
2009-05-01 16:08:16 | 관리자
제가 힘들어 할 때에 저를 사랑하는 분이 보낸 토저의 글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 주는 글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식   1.첫째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지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2.일시적으로 수치를 당하거나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진작되는 것을 원한다.   3.자기십자가를 지려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환난이나 역경을 당하면 한숨을 쉬며 그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러한 환난과 역경이 성도에게나 죄인에게나 동일하게 임하는 것을 망각한다.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한 데 따른 결과로서 우리에게 임하는 특별한 역경이다.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짐으로서 나타날 결과들을 충분히 알고서 자원하여 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을 선택하며 순종함으로서 십자가 지기를 선택한다.)   4.모든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 (모든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재며 모든 것의 가치판단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하는 능력이 성령충만한 생활의 표식이다. 하나님은 바라보시면서 동시에 꿰뚫어보신다. 하나님의 시선은 사물의 표면에만 머물지 않고 그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 참된 의미를 바라보신다. 세속적인 기독교인은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한다....영적인 사람은 모든 사물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바라보겠다고 고집한다.
2009-05-01 16:06:58 | 관리자
아침에 아주 인상 깊은 기고문을 읽었습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의 글이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새겨 들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혹시 게으른 생활,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내 것과 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괜히 자만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요즘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목사들로 인한 성도들의 비명소리에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와 목사 모두 열심을 내야 하지만 특히 목사들이 성경에 입각해서 바른 것을 바르게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른 것을 지키고 가꾸고 남겨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음은 황주홍 전남 강진군수의 글입니다.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다. 이틀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니 그럴 만하다. 물리학상은 3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화학상은 일본과 미국의 학자들이 휩쓸었다. 그 바람에 우리 한반도도 떠들썩했다. 내용은 좀 달라서, 왜 우리는 일본처럼 될 수 없느냐는 주제로 요란했다. 일본은 되는데 한국은 왜 안 될까? 결론은 하나다.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성과는 노동시간에 비례한다. 일본인이 특별히 우수해서가 아니라면 연구한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휩쓰는 거다. 그뿐이다. 한국인은 선진국 사람보다 훨씬 덜 연구하고 공부한다. 한국 성인 1인당 독서량이 192개국 중 166위라는 UN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한국인들은 이 부족분을 인맥과 로비와 '배째라'라는 저돌성으로 충당하며 사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소모임의 박람회장'이다. 한국인의 모임 성격은 딱 두 가지다. 친목모임 아니면 접대모임이다. 친목모임은 과거지향적이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향우회, 같은 해 태어난 이들끼리의 (동)갑계, 교문을 같이 드나든 사람들의 동문회, 미국 같이 다녀온 직장인들의 찬미회, 시청 총무과를 거친 공무원들의 총우회, 배낭여행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배사랑회…등등 우리들의 소모임은 과거 어느 한때의 인연을 매개로 한다. 당연히 주된 활동과 이야기도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접대모임은 안면 터서 청탁하는 것이다. 고위험 사회에서의 '보험'들기다. 공식적으론 안 되는 일을 사사롭게 해결하는 모임이다. 거의 매일 저녁 접대하고 접대받는 분들도 부지기수다. 밥 먹고 술 먹고, 1차 가고 2차 가고, 노래방 가고 찜질방 가고, 폭탄주 마시고 건배하고… 공무원이건, 직장인이건, 사업가건, 교수건, 법조인이건, 예술인이건 예외가 없다. 찾아다녀야 할 모임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진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문제는, 다른 선진국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퇴근해서 집으로 직행하는 한국인 드물고, 퇴근해서 1차 2차로 직행하는 선진국 사람 드물다. 발렌타인 한번 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한국인 반면, 발렌타인 한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일본이고 미국이다. 그 차이에서 승부가 크게 갈린다. 낮 시간에 일하는 것은 한국이나 선진국이나 별 차이 없다. 결정적 승부처는 오후 6시 이후의 '자유시간'에서다. 긴긴 자유시간을 우리는 과거를 위해, 편법을 위해 소비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마치 낮 시간의 연장처럼 저녁과 밤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생활은 밋밋하고 심심하고 외롭다. 재외동포들은 한국을 '즐거운 지옥'이라 한다. 야간생활이 어쩌면 이리도 위태위태 박진감 있고 육감적인지 힘들지만 재밌어 죽겠다는 거다. 노벨상은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장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내 단언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한국에선 노벨상이 나올 수 없다. 공부하지 않고 공부할 수 없는 나라에서 무슨 용빼는 재주로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의 6시 이후가 '선진화'되지 않는 한 노벨상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일이 될 것이다. 노벨상뿐이랴. 한국과 한국인이 6시 이후의 긴 시간을 이렇듯 철저히 과거 찾기, 인연 만들기에 사용하는 한 조국에 더 큰 희망은 솔직히 어렵다. 한국의 선진국 반열 진입은 6시 이후의 과거몰입적, 인맥제일주의적 행태의 변경 없인 불가능하다.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이 인식이 일본의 노벨상 독식에 따른 우리들의 요란한 반성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2009-05-01 15:53:30 | 관리자
저는 요즘 큰 목표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야망과 목표가 점점 없어지게 됨을 느낍니다. 교회를 하면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성도가 늘어도, 안 늘어도 감사합니다. 내 한계 내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을 하시리라 믿고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은 오히려 성도들이 느는 것으로 인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양식과 보살핌을 제대로 주지 못한다면 느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될 것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인도에 따라 인생 여정을 반듯하게 마치고 주님께 간다는 것 외에는 다른 목표가 없습니다. 다만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점점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점점 더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변화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볼 때에 변화가 생겨야 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변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변화 말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슥4:6)."   오늘 아침에 읽게 된 송길원 교수(목사)의 글입니다. 무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라 올립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추구합시다. 주님께서 독자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송길원 교수의 아름다운 기도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을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형이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형이다.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 다 날아가고.뭐 땜에 비싼 돈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gift)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제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 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2009-05-01 15:31:31 | 관리자
감독님은 개역성경을 싫어하시고 잘못번역 되어있다고 그래서 성도들이 눈이 가리워져 있다고 하십니다.그리고 자신은 독일어성경을 무려 11번이나 읽으셨다고 합니다. 위의내용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고 강변하시던데요 단지 짤막하게 글을 옮겨서 그렇지 사실 뒤에 무지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어제는 1시간 동안 성경이야기만 하시던결요^^;
2009-05-01 09:08:04 | 송재근
왜냐하면 김형훈형제님이 미국에 목사안수를 받으러 다녀오십니다. 그래서 요일을 앞당겨 수요일 2시에 모이는데 그 다음 주에는 아무래도 좀 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토요일은 어떨 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좋은 공부와 교제시간이라 요청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연락드리지요.
2009-05-01 08:51:15 | 정혜미
어제 은사주의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말씀보다도 체험을 더욱 중요시 하는 현상에 대해 성경은 무어라 하나 상고했지요. 몇사람되지 않은 인원이 모였지만 성의있고 심도 있는 강의에 우리만 듣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부후에 있었던 나눔의 시간도 아주 값진 시간이었지요. 더욱 홍형제님이 그 모임을 빛내주셨습니다. 미래를 볼 수 있고 과거를 파악하며 현재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나 하는 방대한 시각도 가져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이 오셨음 좋겠는데...
2009-05-01 08:46:44 | 정혜미
역시....지영자매군요.늘 함께 기뻐하고 걱정해 주는 자매라 다른 교회에 있다해도 왠지 우리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어요.그곳 에서도 열심히 믿음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언제든 한번 방문하세요.^^
2009-05-01 08:00:48 | 정혜미
나름대로 이 기회에 나도 위에 언급한 단어들을 정의해 보려고 했는데 백화자 자매님의 덧글을 읽고 생각이 바뀌네요. 최지휘자님이 저에게 답을 해 보라고 한다면 서로 신뢰하는 관계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제목이지요. 신앙은 개인적인 혼의 자유가 있기에 신뢰와 사랑이 받쳐주고 있지 않으면 갈등의 소지가 된다는 것을 익히 아는 터라 참 조심스럽지요. 최지휘자님도 말씀을 열~심히 탐구하는 분이셨음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우리가 믿어야할 내용을 제시하고 있으니까.... 덕분에 히브리서 11장을 다시 읽었어요.^^
2009-05-01 07:54:11 | 정혜미
난 아직 맡은 요리가 없네요. 점심 식사에 빠지다보니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네요. 그 날 가서 열심히 할께요. 분담해야 할 재료가 있으면 분담할거고요.그 날 쓸 에너지 충전 시켜 놓아야겠네요.이번 행사가 잘 되어가길 기도합니다.
2009-04-30 23:14:53 | 백화자
나름대로 자신이 느끼는 정의인가 봐요.신앙이란 것이 글로도 말로도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어떤 사람과 열심히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다보면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표현으로 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하거던요.그 분이 그러하다 하면 그런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 분이 느끼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그러하니까 그런 정의도 나오는 것 아닐까요? 아마 세월이 지나면 그 분 스스로도 정의가 바뀔지도 몰라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느끼는건 정말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 만큼 깨닫는 것 같아서 표현도 그만큼밖에 안 나오는 것 같아요..그래서, 결론은 그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것..진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는 자세만으로도 좋은데요....단지 그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요..
2009-04-30 23:10:42 | 백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