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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매님의 말씀처럼, 이 시대에서조차도 사람의 말을 믿고 무작정 따르며 성경기록을 기준 삼지 않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항상 좋은 의견 나눠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2026-04-05 22:19:34 | 김지훈
자매님들이 많이 참석하고 계시네요. 근심 걱정 많은 세상에 자매들과의 교제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지요. 교회가 권력을 갖게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국가교회화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들과  같지 않으면 다 이단이라고 하는 것도....
2026-04-04 22:56:37 | 이수영
신약교회사와 안어울리는 댓글 하나 쓸게요.~^^큰애와 사는얘기하다 큰거 건졌어요..목영주가 튀어나오지않고 참아내는것,절제는 내 의를 세우지않는것의 극히 일부분이다.그정도로는 기쁨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내가 주도적으로 하나님생각으로 살아야 기쁨으로 살아진다.하나님의 생각이란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것을 바라보려 하는것과 하나님만으로 기쁘다는 것을 포함,모든것을 선하게 이끌어주실거라는 그 확고한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보여지는게 다가 아닌것은 물론이고 모든것들 가지고 하나님뜻으로 이끄시기 때문에 결국 기뻐하는것 그것밖에는 우리가 이세상에서 할 수 있는게 없다.결국 하나님이 그걸 그토록 보고 싶어하시는게 아닐까싶고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수 있다-는 큰애고백입니다.저는 제자식이라 그런건지 말씀이 실체가 되어 제가 업그레이드되어진 느낌이에요..여러모양으로 성화되어지는 우리지만,저와같은 경우 겪는 성도분들에게 위로도움될까 그대로 적어봤습니다아~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베드로후서3장8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4-04 17:55:37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평안히 보내셨나요? 지난 4월 1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종교단체 해산법' 반대집회에 여러 형제. 자매들이 참여를 하였습니다. 다음날 자매모임을 나누기전에 이번 이슈로 대화를 나누며 한국교회 성도들의 무관심이 씁쓸하고 영적인 눈이 잠긴것같아 다들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우리가 깨어서 분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도우실까요? 마음의 부담을 지고 그럼에도 우리는 신약교회의 정체성과 올바른 성경, 킹제임스흠정역을 알리는것이 본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번주 자매모임은 챕터5 '중세 종교재판소' 이며 , 이 장에서는 어거스틴의 "강제로라도 데려오라"는 원칙이 어떻게 중세 종교재판소 라는 거대한 폭력시스템으로 제도화 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양심의 자유가 어떻게 파괴 되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 중세 종교재판소- 교회의 무력사용과 이단 탄압 (AD 1184 - 1600) -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위해 어느 정도의 강제는 필요하며 국가의 힘을 빌려 도덕과 신앙을 지키는것이 왜 나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중세 역사를 보면 알수있다. 성경의 권위와 복음은 사라지고 은혜는 행위로 대체되며, 회심은 유아세례속에 묻히고 연옥, 면죄부, 강제개종과 같은 제도들이 삶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신약교회 본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부분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붙잡아야 하는지 알아보자. ● 어거스틴에서 종교 재판소까지 - 황제 하인리히4세의 카노사의 굴욕, 성경을 번역하고 카톨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얀 후스,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은 갈릴레이 등 이 세 사건은 교회가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굴복 시켰다는 것이다. 이 모든것에 신학적 뿌리는 4세기 어거스틴이 만들었다. 강제 무력 사용이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며 이 사상이 중세에 이르러 종교 재판소로 실행이 되었다. (자매: 어거스틴은 '누가복음14:23' 절에서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여'를 적용하며 이것을 강제로라도 데려오게 하는 근거로 삼았는데 이것은 강하게 권유하란 뜻이지 물리적 행사를 하라는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편의적으로 해석하는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줍니다) ● 종교재판소 - 국가 정책이 된 이단심판 - 12세기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운동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왈도파와 알비파였다. 1184년 교황 루키우스3세 때에 국가와 교회가 공동으로 조사하고 처벌하는 제도를 확립한 이단 심판제도의 출발점이었다. 특히, 어거스틴이 제시한 원리 즉, 교회가 국가의 칼을 빌려 이단을 억압할수 있다는것이 공식 정책으로 제도화 되었음을 보여준다. (자매: 베로나칙령의 내용 중 관할 구역을 순회하며 이단 여부를 조사할것, 이단으로 판정된 자는 국가의 형벌과 재산이 몰수 된다는 내용을 보며 이번에 통과 시키려고 하는 '종교단체 해산법'과 겹쳐 보이는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 1231년 교황 그레고리9세는 교황청이 직접 통제하는 종교재판소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교황은 통일된 기준으로 일관되게 작동하는 전문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주요특징은 첫째, 교황의 직접 통제이다. 둘째, 이단색출에 매우 적극적인 도미니크회 중심의 운영이다. 셋째, 고문의 공식화이다. 넷째, 고발자는 익명으로 보호되는 피고인의 권리 제한이다. 다섯째, 재산 몰수의 제도화이다. 이 제도는 종교재판소의 부패를 구조적으로 심화시킨 핵심요인이었다. ● 공포 시스템 - 종교재판의 절차 - 1단계, 조사와 고발로 이루어진다. 고발 동기는 종교적 이유 뿐만아니라 원한, 경제적 이익, 시기심등 다양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2단계, 이단 혐의가 제기되면 고발자나 혐의내용도 모른채 종교재판소 감옥에 갇혀 불확실성과 공포 속에서 지내야했다. 3단계, 심문의 핵심 목표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기에 모호한 질문과 고문이 자행되었다. 4단계, 판결과 형벌이 주어졌다. (자매: 요즘은 공무원이나 군인의 진급 등에서도 정치적인 성향을 조사한후 승진을 할수도 강제 퇴사를 할수도 있다는걸 들었습니다. 미디어의 선동으로 서로가 고발하는 시스템(예:벌금파파라치)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참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 공식적으로 교회는 직접 죽이지않고 국가가 처형했지만 이는 교묘한 위선이었다. 교회는 형식적으로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세속 권력자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했다. 이것은 "국가가 이단을 억압하는것이 정당하다"는 어거스틴이 확립한 원칙의 실제 적용이었다.   ● 어거스틴의 논리가 제도가 되다 -  신학적 정당성 - 어거스틴의 논리는 "이단은 영혼의 살인자 이므로 육체의 살인자를 처형하듯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카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로 왜곡되었다. 이단은 사람들을 교회와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므로 국가는 이단을 억압할 의무가 있었다. - 종교재판소는 단순히 권력욕이나 잔인함의 산물이 아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단자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확히 어거스틴의 '국가가 이단을 강제로 교화하는 것은 사랑의 행동' 이라는 신학적 논리에 정당한 행동이었다.  (자매: 종교 재판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는것을 읽으며 성경말씀이 기준이 아니고 사람의 말을 믿는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게 되는거 같아요!)   ● 종교 재판소의 희생자들 - 종교 재판소는 누구를 공격했는가? 공식적으로는 '이단자'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알비파는 카톨릭의 성례체계, 사도제도, 교회조직을 거부했다. 교황은 알비파의 영향이 강한 남프랑스를 공격하여 수만명을 죽였으며, 교황특사 아르노아모리는 "모두 죽여라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아실것이다" 라는 악명높은 말을 남겼다. - 종교 재판소의 또 다른 표적은 왈도파였는데 그들은 성경중심, 일반성도 설교, 단순한 교회, 교황권 비판을 특징으로 했다. 그들은 침례교의 많은 원리들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반복된 박해, 특히 피에몬테지역의 학살을 견디고 살아남은 공동체로서 종교의 자유와 신앙고백의 역사적 증인으로 평가된다. (자매: 신약교회의 원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것으로 인해 많은 박해를 받은 왈비파는 알프스의 깊은 골짜기 춥고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침례교의 원리를 지키며 오늘날까지 전달한 그들의 믿음에 감동이 됩니다) - 성경을 번역하며 소유하거나 읽는 것으로도 종교재판소의 처벌을 받거나 심지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기독교 내부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고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영역을 뛰어넘어 마녀사냥과, 지식, 과학, 사상을 통제하는 기구로 변질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자매: 성경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종교재판소에서 처벌되던 때를 보며 오늘날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자유가 있음에도 오히려 쌓아만 두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 스페인 종교재판소 - 공포의 절정 (AD1478 - 1834) - 종교재판소의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것은 '스페인 종교재판소'였다. 특히 '신앙의 행위' 라고 불리는 공개의식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고 대중을 위협하였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이 강한 형태로 실제 운영은 교황이 아니라 왕실의 손에 있는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결합한 형태였다. 1483년부터 1498년까지 15년 동안 대종교 재판관으로 활동했던 토르케마다의 이름은 종교적 광신과 잔혹함의 상징이었다. (자매: 공개재판인 신앙의 행위를 군중들은 구경거리로 때론 축제처럼 하였다는것을 보며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은 일로 여기기에 악한일로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동조하는 모습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과 다를바 없는것 같습니다.) ● 종교재판소의 결과 - 진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수십만명을 죽였으며, 교회가 승인한것 말고는 과학적 탐구도, 철학적 사색도, 신학적 논의도  위험했다. 또한 종교재판소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완전히 부정했다. 외적 복종만을 요구했고 내적 확신은 무시했으며 결과는 위선의 문화였다. - 복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종교재판소는 결국 복음에 대한 증오를 낳았다.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는자가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역사는 교회가 권력을 가질때 얼마나 타락하는지 보여주는 끔찍한 증거이다. ● 결론 - 어거스틴에서 종교재판소까지, 그리고 침례교의 부름 - 침례교는 어거스틴과 종교재판소의 역사로 부터 깊은 교훈을 얻었다. 침례교의 선조들과 왈도파와 재침례교인들은 종교재판소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의 피는 침례교인 들에게 외친다. "다시는 그 길을 가지 말라. 다시는 교회가 칼을 들지 말라. 다시는 신앙을 강제하지 말라" 종교재판소라는 제도는 사라졌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원리, 즉 교회가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신앙을 강제 할수 있다는 원리는 여전히 위험하다. 이 원리를 거부하고 정교분리와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것이 침례교의 사명이다.                  
2026-04-04 15:14:33 | 최성미
중세 암흑기에서도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지켜온 믿음의 선조들 덕분에, 자유롭고 편안한 환경에서 믿음 생활을 하는 감사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이 소중한 가치를 신약 교회 성도들이 많이 깨우치길 소망합니다!
2026-03-30 17:10:24 | 김지훈
(잘할 수 있는게 거의 없음에도,절망적인 상황에 많이 빠져도)믿음의 가치를 확실히 깨닫지 못했던,인간인 저의 본성을 알게 되는 요즘입니다. 회개하고,믿음이 곧 순종임을 고백하며,하루를 말씀읽기 기도하는 마음으로 훈련! 저의 자유의지를 아버지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하시니라.-요한복음4장2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하시니라.-누가복음15장10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3-29 10:22:04 | 목영주
진리는 좁은 길이라  사람들이 추구하지 않지요. 소수만이 올바르게 믿음을 지켜왔고, 진리 반대편에 선 자들은 수가 많음으로 자기들이 옳다하며  소수를 미워하고 축출하려 했어요. 역사는 반복이라 했던가요~ 교회사를 통해 역사의 이면을 보게 되네요.
2026-03-29 06:33:34 | 이수영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주간도 주님안에서 평안하게 지내셨나요? 지난 목요자매 모임후 몇몇 자매들과 수고와 열매에 대해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매님들이 목요모임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교회사책을 읽고 함께모여 토론을 하기도하며, 교제시간을 통해 서로에게 힘이 되기도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위해 땀흘리며 수고하지만 가장 먼저 열매를 먹는다는 설교를 듣고 자매모임도 이런 작은 수고와 과정을 통해 기쁨을 누리게 하시니 이것이 저는 열매를 얻는것이라고 여기며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주 자매모임은 챕터 4, 중세 카톨릭 교회의 등장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 중세 카톨릭교회의 등장 :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다 - 중세 천년동안 교회는 신약교회 본래의 모습에서 가장 멀리 사라진 영적 암흑기였다.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연옥의 기간을 줄일수 있는가?"를 묻는 시대가 되었다. 침례교가 회복하려 한것은 잃어버린 신약교회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알아야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자매: 어거스틴이 이론화한 국가와 결합한 교회체제가 서로마의 멸망후 그 자리를 대체 했을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천주교와 칼빈주의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걸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교회의 부상 - 476년, 게르만족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폐위시키며 약 천년동안 서구문명의 중심이었던 서로마 제국이 마침내 멸망했다. 이는 단순한  한 왕조의 종말이 아니며 거대한 정치 시스템의 붕괴와 법과 제도가 기능을 잃거나 소멸되며, 서유럽은 사실상 무법천지가 되었다. - 중앙정부가 사라지면서 로마제국의 가장 큰  업적인 도로망이 파괴되며, 한때 전차가 달리던 로마의 대로는 진흙탕 오솔길로 전락했다. 또한 깨끗한 물을 공급하던 상하수도 시스템이 붕괴되고 화폐경제는 자급자족 체제로 퇴보했다. (자매: 무엇보다 놀란것은 나라가 무너지는 것에 정부가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구나 하는것과 어떻게 한 세대만에 그토록 발전했던 사회시스템이 무너질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매: 저는 무너져버린 로마의 모든 조직에 어떻게 교회가 그렇게 빨리 장악할 수 있었는지 놀랐고 이미 모든 교회구조가 조직적으로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구나를 생각했습니다) - 로마시대의 공립학교 시스템이 붕괴되며 학교는 문을 닫았고  문맹률이 급증하여 일반백성중 글을 읽고 쓸수 있는 사람은 1%도 채되지 않았다. 귀족조차 글을 못 읽는 경우가 많아지며 로마시대에 발전했던 학문과, 예술, 문학, 과학지식도 사라지며 지적암흑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교회는 이 혼란속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첫째,정치적 중앙정부는 무너졌지만 교회의 정교한 조직망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둘째,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회는 당대 유능한 지식인 집단으로 모든 문서업무는 사제들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했다. 셋째,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것을 진리로 받아 들였다. 넷째,교회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자매: 이승만대통령께서 나라를 건국하실때도 우리나라의 문맹률을 걱정하시며 먼저 교육기관들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참된 기독교가 들어가야 나라도 바뀔수 있는것 같습니다.) ● 교회가 국가를 대체하다 - 교황 그레고리1세는 교회를 실질적 정부로 변모시켰다. 식량분배, 군대조직, 외교사절 파견등 유럽 전역에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로마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개인의 회심과 거듭남을 중심에 둔 '영혼구원'이라는 신약성경의 개념보다는 로마교황권에 종속된 기독교 세계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 모든 면에서 교회는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태어날때 세례를 받았고, 교육을 받을때 교회학교를 갔으며, 결혼할때 교회에서 했고, 병들면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에 갔으며, 죽을때는 장례도 치러주었다. 교회가 정부를 대체하며 교회가 곧 국가가 되었다. (자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국가교회법의 잔재가 남아있으며 장례를 위해 시신 냉동 보관소를 운영하는곳도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늘 생각하고 분별해야 바른 신앙을 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 로마서13장은 정부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정부와 교회는 서로 다른 역활을 가진다. 정부는 칼의 권세를 가지고 외적질서를 유지하며 교회는 영적 권세를 가지고 내적 변화를 추구한다. 둘의 목적과 수단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이 구분을 허물어 버렸다. ● 교황권의 절정 - 교회가 왕을 지배하다 - 교황 그레고리7세 때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은 세속권력의 정점에 있던 황제 하인리히4세가 교황 앞에 사흘간 맨발로 눈속에서 용서를 구했던 사건이다. 이것은 중세 교황권의 상징으로 남아 교황이 세상을 지배할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자매: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것이 어렴풋 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네요. 이 교황 때에 만들어진 칙령들을 보며 이때가 앞쪽에서 읽었던 신약교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영적암흑기가 아닐까 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들 처럼 권력을 추구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겸손을 가르쳤지만 교황들은 오히려 왕이 되려 하였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 명확히 가르쳤으나, 교황 구조는 성경에 근거가 없는 권력욕에서 태어난 구조이며, 복음을 왜곡한 비 성경적 체계이다. ● 사제 계급과 성례전 체계 - 중세 카톨릭교회의 또다른 핵심적 특징은 강력한 사제계급 제도였다. 이 구조 안에서 성직자들은 일반 성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여겨졌다. 두 개의 분리된 계급 이었고 성직자는 거룩한 존재로 일반성도는 세속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사제들의 권한은 영적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세속 권력도 강력하게 행사하였다. (자매: 현대 교회안에서도 볼수있는 니골라당과 같은 계급이 그때로 부터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네요) - 구원에 필요한 일곱가지 성사는 반드시 사제가필요하도록 만든 구조였는데 이 모든 제도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모순된다. 신약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다. ● 유아세례와 시민권의 결합 - 유아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아기에게 동시에 여러 신분을 부여한 제도였다. 첫째, 교회의 일원. 둘째, 국가의 시민. 셋째, 법적 권리를 갖음. 넷째, 세금 납부자 다섯째, 사회적 신분을 확증함, 결과적으로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것은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 되는것을 의미했다. (자매: 저희 아이도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그때는 그 일이 믿음안에서 아이를 양육 하겠다는 선언식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침례의 본래 의미를 알고 나서야 유아세례는 천주교 전통에서 비롯된 잘못된 것이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 유아세례의 가장 심각한 영적결과는 바로 회심 개념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명백히 신자들 만의 침례를가르친다. ● 구원론의 완전한 왜곡 -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결론을 내리노라'(롬3:28) 구원은 은혜이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구원을 복잡한 체계로 만들어 버렸다. 구원은 더 이상 단순한 선물이 아니 었다. 구원은 성례전, 선행, 고행, 기부, 순례, 면죄부등의 복잡한 조합이 되었다. ● 중세 교회의 성경금지 - 양심의 자유 박탈 - 교회는 성경을 번역하거나 소유하는것을 죄로 간주했다. 표면적으로는 성경을 잘못 해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과 다르다는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경을 숨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둠속에 가두는 범죄이고, 영적 학대이며 영혼에 대한 폭력이었다. - 중세 카톨릭체제의 또 다른 근본적 문제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완전히 부정한 것이다. 중세 사회에서 신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였다. 한 사람이 무엇을 믿을지는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종교재판 혹은 이단 심문은 이 체제를 유지 강화하는 무서운 도구였다. 정확한 통계는 알수 없지만 역사가들은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이 종교재판소의 이단 심문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 결론 - 잃어버린 천년 - 성경을 빼앗고 전통이 말씀을 대체하며 양심의 자유도 부정되며 이단자들은 화형 당했다. 이 모든것이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그러나 천년동안 소수의 사람들은 참된 복음을 지키며 신약교회의 원리를 실천하려 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도 침례교 선조들은 천년동안 잃어버린 신약교회의 원칙들을 되찾으려 했다. (자매: 교회사책을 공부하며 느낀점은 이런 중세의 암흑기에도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지켜온 사람들이 소수의 침례교인들이 었다는것과, 믿음이 진리가 될때 오히려 큰 권력에게 박해의 빌미가 되지만 오늘날에도 우리교회 성도들이 진리를 지키고 전해야 되는 이유가 되는것 같습니다)                  
2026-03-28 19:29:36 | 최성미
새로운 얼굴도 보여서 좋네요^^ 아무리 좋게 시작했어도 한결같지 않은 끝을 보면서 오직 의지해야할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보는 것이 위험한 것이죠.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므로.
2026-03-24 15:28:03 | 이수영
나이가 들수록 신실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고 바른마음,바른생활 또한 하나님말씀 그 하나만을 최고로 생각하면 되니깐 (세상역량이 부족한 저는)너무 좋아요.믿기전 기본성향이 염세적이었던 제가 2026년에는 기쁨이라는 단어를 품고자 합니다. 제것이 되게 하나님말씀으로 가득 채우려고요~^^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기록된 바,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였느니라,하시더라.-마태복음4장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3-22 18:40:21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목사님의 부재로 인해 지난 금요일과 주일오전,오후시간에는 아직 학생인 형제부터 젊은 형제 세분이 설교강단을 지켜주었습니다. 예배를 마칠때 마다 형제 자매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다음세대로 이어질 교회의 미래를  보며 감사한 마음이었으리라 봅니다. 이번주 자매모임은 챕터3, 어거스틴과 국가교회-천주교신학의 완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 어거스틴과 국가교회- 천주교 신학의 완성 - 국가와 결합한 교회체제가 자리 잡은뒤, 이 새로운 천주교 구조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이론화한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중세 카톨릭의 핵심사상 상당부문이 그의 신학에서 나왔으며 그의 영향력은 천년이상 서방교회를 지배했다. (자매: 이번 교재를 통해서 어거스틴의 생애를 알게 되고 특히 그도 기독교로 개종한 초기에는 자유의지를 주장했으나 결국엔 현실과 타협한 모습을 보며, 올바른 신앙은 끝까지 잘 지키는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침례교가 거부한것은 바로 어거스틴이 정당화한 국가교회 체제이며, 침례교회가 회복하려 한것은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 즉, 다시 태어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신약교회였다. ● 어거스틴의 생애 - 어거스틴은 물질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영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철저한 이원론에 기초한 마니교에서 9년동안 깊이 헌신했다. - 그는 386년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회심이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신학이 성경보다 철학에 더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매: 어거스틴은 명석한 두뇌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성경이 아닌 이성과 철학을 통해 많은 부분을 자의적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한것 같습니다. 과도한 지식이 오히려 교만에 빠지게 한건 아닐까요? ) ●  교회가 칼을 든 날- 도나투스파  박해 -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박해가 끝났을때 교회는 즉시 깊고도 민감한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박해동안 변절한 성직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교회전체를 흔들었다. 그들이 다시 성직자로 활동할수 있는가? 그들이 박해시절 집례한 침례등은 유효한가? 이러한 문제들이 교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키기 시작했다. - 도나투스파에게 교회는 무엇보다 거룩한 자들로만 이루어진 순수한 공동체여야 했다. 박해시대에 믿음을 저버린자들 , 국가권력과 타협한 자들은 결코 참된 교회가 될수 없다고 보았다 - 카톨릭교회는 교회가 거룩한자들 만으로 구성된 폐쇄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도 함께하며 마지막날에 하나님이 친히 구별하신다는 주장으로 이 갈등은 두 진영의 신학적.영적충돌로 확대 되었다. (자매: 도나투스파가 주장하는것과 카톨릭이 주장하는것들이 모두 일정부분 맞는것도 있지않나 고민했습니다. 도나투스파의 처음의 의도는 좋았으나 결국 폭력적으로 변하며 자멸하는데 이는 의도와 방법 모두 옳아야 한다는걸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 초기 어거스틴의 입장은 신앙의 본질이 자유의지에 있음을 강조하며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교분리와 가까웠으나, 극단적 도나투스파인 서큐리들의 폭력적 행동으로 교회와 국가에 혼란을 가져오자 국가의 강제력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 어거스틴의 논리는 신약성경의 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의 논리는 신앙의 본질을 왜곡한다. 참된 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반응이다. 외적압박에 의한 강제된 신앙은 오히려 복음에 대한 반감을 심는 결과를 만든다. (자매: 억압이나 강제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게 되고 이제는 믿음과 복음안에서 살아가기에 그때의 기억들이 오히려 감사한 마음입니다.) - 성경은 목적이 아무리 선해도 악한 수단을 정당화 할수 없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차라리, 선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악을 행하자 하고 말해야 하지 아니 하겠느냐?.. 그들이 정죄받는것이 옳으니라"(롬3:8)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적만이 아니라 선한 방법도 요구 하신다. (자매: 도나투스파에서 억지로 카톨릭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다시 침례를 받기를 강요한 모습을 보며 재침례를 받는다는 이유로 수장된 펠릭스만쯔가 생각납니다.) ● 어거스틴의 교리 - ( 연옥, 마리아신학, 극단적예정론) - 연옥은 카톨릭이 가르치는 교리로 죽은후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죄를 정화하는 중간상태를 의미한다. 어거스틴이 외경을 인용하거나 성경을 왜곡하여 만든 비성경적 개념이다. 이 교리의 결과는 면제부 판매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결국 이것이 종교개혁을 촉발한 핵심이유가 되었다. (자매: 천주교에 출석하는 친척중에도 믿지도 않고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위해 매번 헌금(면제부)과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변화되기를 바라며 복음을 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어거스틴의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존경은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그의 신학은 후대 카톨릭의 비성경적 마리아론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다. - 극단적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후 완전히 파괴되어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없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며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 무관하여, 구원받을자와 지옥에 갈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왜곡하고 인간의 책임을 부인하며, 전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위험한 교리이다. (자매: 오랜시간 장로교회를 다니며 예정론을 믿었으나 이제는 여러 성경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시길 원하신다는걸 믿습니다. 선택적으로 취한 말씀을 통해 성도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많은 교회들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도시- 국가교회 신학의 완성 - '하나님의 도시'는 카톨릭 국가교회 체제의 신학적 기초였다. 이 책은 무천년설을 체계화 했고 교회가 곧 왕국이라는 거짓교리를 만들었으며, 교회가 세상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했다. - 그는 창세기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을 경건한 집단과 불경건한 집단의 혼합으로 인한 도덕적 타락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성경자체는 창조질서 자체를 훼손한 초자연적 반역으로 제시하며 노아의 홍수가 전면적이고 예외적인 심판임을 설명해준다. - 어거스틴의 주장과 달리 교회는 왕국이 아니며 교회가 세상을 다스릴 권리도 없다.왕국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때 지상에 세워질 문자 그대로의 천년왕국이다. (자매: 무천년설이나 요한계시록을 설교하지 않는 이유가 계시록은 미래의 일을 기록한 것이기에 현재의 우리는 알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황당했던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문자 그대로의 천년왕국과 읽을수록 복이되는 계시록을 공부하게 되니 감사해요) ● 개신교는 왜 어거스틴을 숭배하는가? - 첫째, 칼빈과 루터의 영향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어거스틴을 높이 평가했기에 개신교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둘째, 국가 교회 체제를 유지하려는 욕구때문이다. 루터.칼빈.츠빙글리 모두 국가교회 체제를 유지했다. 셋째, 교부신학에 대한 과도한 존경 때문이다. - 침례교는 어거스틴을 거부한다. 그의 신학이 성경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학은. 아무리 뛰어나도 성경으로 판단 받아야 한다. 우리의 최종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거스틴의 비성경적인 신학을 거부하고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2026-03-21 22:35:36 | 최성미
오늘도 저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아버지 계심 기뻐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하루 보내겠습니다~ 제 인생마칠때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신실함을 잘 매듭질 수 있게 아버지 손 꼬옥~잡고 가겠습니다~^^
2026-03-16 08:39:52 | 목영주
자매 모임 스케치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목사님 설교를 복습하게 되고, 자매님들의 소감을 통해 공감하게 되니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아울러 참된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작은 부분이라도 생각날 때마다 노력하고, 새로 더해지시는 분들과도 함께 나누며 좋은 교제를 이어가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2026-03-15 22:19:46 | 김지훈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연일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소식들이 전쟁으로 인한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아서 인지 우리가 매일 누리는 이 평범한 일상이 참 감사한 마음이 드는 요즘 입니다. 지난주는 신약교회의 정체성과 역사적 뿌리를 찾아가며 그 원리를 이어받은 침례교회까지 알아보았습니다. 시작부터 박해받고 고난받았으나 박해시대의 교회는 놀랄만큼 순수하고 신실한 공동체였습니다. 오늘은 챕터2. 기독교가 합법화 된 이후의 교회의 모습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 밀라노칙령과 기독교 공인(p36-37) - 이 장은 AD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콘스탄티누스와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제국의 정치구조 안 으로 끌려 들어가며 마침내 AD380년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기 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 초대교회 즉 박해받고 순수하고 신실했던 교회가 국가권력과 결합할때 그것이 과연 복이었는지 오늘 우리교회가 무엇을 경계 해야 하는지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 콘스탄티누스의 등장-역사의 전환점  (p37-39) -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제국(영국,프랑스주변,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로마정복을 위해 이탈리아로 진군후, 로마제국 역사와 기독교 역사 전체를 뒤바꾼, 밀비우스다리 전투에서 십자가 환상을 본후, 전쟁에 승리하여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 그는 이 전쟁의 승리가 기독교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믿었고, 기독교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그가 기독교인으로 회심 했는지는 여러 의문이 많았다. 그의 신앙은 불완전 하였으나 그의 정책은 교회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자매: 313년이라는 숫자가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것을 알려주며 그동안 희미하게  알던 밀라노칙령을 새롭고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오히려 순수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경험 을 통해 늘 경각심을 가져야겠습니다.) ● 밀라노칙령 - 박해의 종식(p39-42) - 313년2월 역사적 전환점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밀라노 칙령이었다. 모든이가 원하는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는 종교의자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특별보호, 교회재산의 회복등, 기독교는 로마법 아래서 보호받는 합법종교가 되었다. - 밀라노 칙령이후 황제의 호의는 계속 커졌다. 1)성직자특권:세금면제,상속권리 2)화려한 교회건축 3)주교들의 정치화 4)주일제정 등, 역사는 이것이 복이 아니라 시험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험 앞에서 교회는 타협의 길을 걷고 순수하고 신실했던 교회는 사라지고 부유하고 권력과 결합된 '국가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자매: 현대교회도 좁은길이 아닌 넓은길로 가게 되면서 교회안에 여러가지 문제들이 성경대로가 아닌, 전통이라는 것으로 진행되며, 때로는 직분을 받는것도 물질이 동반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 니케아 공의회(AD325)- 불신자가 교회를 주도하다 (p42-49) - 325년 교회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건이 일어 났다. 바로 니케아 공의회다. 이것은 첫번째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즉 보편 공의 회였다. 둘째, 침례받지 않은 황제가 회의를 소집하고 주도를 하였다. 세째, 황제가 교회 문제에 결정을 집행하며 최고권위를 가진다 는 선례를 남기며 국가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자매: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논쟁이 핵심인데, 예수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인가?에 대해 성경에서 확인해 보고 함께 나누고 싶어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빌2:6)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 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라'(요5:18) ● 침례교회의 인식(p49-56) -공의회의 권위, 왜 침례교회만 다른길을 가는가? 대부분 개신교 교회들은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그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사오며'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초대교회 공의회들이 내린 결정을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 그러나 침례교회는 다르다. 침례교가 니케아 신조의 신학을 거부하는것은 아니다. 삼위일체를 믿고,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믿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믿는 근거는 오직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만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최종권위를 가진다. (자매: 기존교회를 다니며, 늘 암송한 사도신경이 잘못 되었다는것을 사랑침례교회 에 출석하면서 배우고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예배드리는 모습이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이 다녔던 과거가, 어리석지만 이제는 공교회 또는 공의회의 문제점을 알고 왜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하는지도 배웁니다.) ● 보이지 않은 위험 - 교회의 본질 변화  (p56-60) -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것은 모든것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교회가 황제의 후원과 국가권력에 의지하는 순간 진정한 회심없이 교회로 몰려드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회는 급속도로 규모가 커졌지만 동시에 세속화 되기 시작했다. - 유아세례가 퍼지기 시작했다. 침례가 죄를 씻어 준다는 잘못된 가르침과, 기독교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유아 세례는 보편적 관습이 되었다. ● AD380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다 (p60-66) - 역사상 가장 중요한 칙령 중 하나인 데살로니가 칙령은 "우리는 우리 통치 아래 있는 모든 민족이, 사도 베드로가 로마인들 에게 전한 그 종교를 따르기를 원한다" 이 율법에 순종하는자들은 카톨릭그리스도인, 그러나 나머지는 이단자로 규정하며, 국가가 집행하는 형벌을 받게 될것이라 선언하였다. -문제는 즉시 시작되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강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회심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고 신앙은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국가의 명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교회의 외형은 거대해졌으나 복음의 본질이 희미해지고 세속화되므로 영적능력을 잃어갔다. 이후 천년동안 교회는 부패하며 교황권의 등장, 성상숭배의 확산, 면제부판매, 십자군전쟁, 이단 심문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비극의 씨앗은 AD313년과 380년에 뿌려졌던 것이다. (자매: 기독교가 국가교회가 되니 오히려 종교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을 봅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방식을 올바르게 실행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박해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 침례교 관점에서 왜 이 역사가 중요한가?   -  초대교회는 회심한 신자들만의 공동체 였다. 침례교가 신자 침례를 고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아세례는 교회를 인구집단 으로 만들어 버린 핵심요인 이었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교회 안에 포함 시키는 통로였다. 침례교는 이 구조를  철저히 거부했다.  - 권력은 복음을 흐리게 하고 정치적목적은 진리를 왜곡했다. 침례교는 이 역사를 바라 보며 '교회는 국가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 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한 정치철학이 아니라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필연이었다. - 침례교는 새로운 교회를 창설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 역사속에서 상실된 교회의 본 모습을 재건 하려했다. (자매: 한국에서는 여전히 침례교가 작은교단 또는 독립침례교회를 합니다. 많은 다른 교단 성도들이 은연중 침례교는 이단이라는 인식 을 가지고 있는데 기득권을 누리는 대형교단 에서는 성경대로 믿는것, 올바르게 보존된 성경을 믿는다는 이유로 소수의 교회를 핍박 하는 현실에서도 처음의 신약교회 그 모습을 추구하는 우리교회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2026-03-15 16:22:56 | 최성미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도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이겨 내신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 덕분에 편안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음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신약 교회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제 자신부터 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첫 시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03-08 20:52:39 | 김지훈
안녕하세요? 최성미자매님 고맙습니다!!! 신약교회성도로서 말씀읽기 좋아하고 하루를 기도하며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잘 살다가겠습니다..사랑침례교회 성도임이 자랑스럽습니다~~
2026-03-08 16:14:06 | 목영주
안녕하세요,성도님들.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자매모임 개학을 하였습니다. 26년 상반기에는 목사님께서 지으신 신약교회역사(침례교회와 신앙의자유)로 책나눔을 하게 되었습니다.  25년10월 유럽종교개혁지 투어중 스위스 취리히(리마트강) 방문시 재침례성도 펠릭스만쯔의 순교(1527년)지로 시작된 마음이 책을 출판하시게 된 계기가 되어 저를 비롯한 모든 성도님들께 신약교회 역사부터 정교분리까지 어떻게 이어져오고 만들어 졌는지를 읽고 배우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신약교회 회복을 위한 교회사의 이해(p6-9) - 성도들이 신약교회의 정체성과 그 역사적 뿌리를 충분히 알지 못할때 신앙은 쉽게 흔들리고 교회는 전통과 분위기에 휩쓸려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침례교 역사는 반복된 선택과 희생을 통해 신약교회의 원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의 긴 영적투쟁의 기록입니다. (자매: 저는 영혼의 자유, 성경이 최종권위, 침례, 교회안에는 계급이 없는것등, 이렇게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것들이 우리교회가 추구하는 신약교회 라는것을 이번 책을 읽으며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 신약교회의 참된모습(p12-19) - 오순절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오늘날의 화려한 교회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모인 작은 공동체였다. - 그들은 사도들의 교리, 즉 사도들이 예수님 께 직접 배운것, 성령님께서 사도들에게 계시한것을 가르쳤다. - 초대교회에는 복잡한 위계질서가 없었다. 교회의 중요한 결정은 회중이 함께 결정했다. -유아세례는 없었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초대교회부터 국가와 분리되고 있을뿐 만 아니라 대립했다. 이것이 훗날 침례교회가 강력히 주장한 정교분리 원칙의 성경적근거가 되었다. (자매: 신약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이해할때, 영혼의자유로 교회안에서 질서있는 신앙생활과 성도간에 좋은 관계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주위를 힘들게하는 모습을 볼때 안타깝습니다.) ● 초대교회의 예배와 실천(p19-22) - 초대교회의 예배는 단순했다. 1)성경읽기 와 가르침 2)찬송 3)기도 4)빵을 뗌 5)헌금 이것이 전부이다. 예배는 단순하고 영적이고 성경적인 예배였다, 이것이 침례교 예배의 모델이 되었다. (자매: 가끔은 우리교회의 문화를 잘 알고 있다고 여길만 한 분들 중에도 기존교단이나 본인이 예전에 가졌던 전통이나 교리를 가져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 래서 저는 항상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 박해 속에서 정결해진 교회(p22-24) -초대교회는 태어나면서 부터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에게 순종하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느니라'(행 5:29)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정신을 완벽하게 요약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을 위해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것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행5:41) 그들은 기뻐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아이러니 하게도 박해가 복음을 확산시켰다. ● 로마제국의 박해 역사 - 250년의 고난 (p24-31) -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것을 시민의 의무로 종교의식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다" 라는 것이 초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사회의 여러관습 즉 신전에서 행하는 우상숭배, 각종 공공행사, 이교신을 위한 모임등 이런것과 연결된 직업도 가질수 없었고 재산의 보호도 받을수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대박해가 거의 10년동안 지속되며 온갖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AD313년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칙령을 반포해 기독교를 합법화 함으로써 약250년에 걸친 박해시대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자매: 이 책을 읽으며 우리에게도 이런 고난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은혜의 시대를 사는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바른 교리와 믿음 안에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감당 할수 있고 현재 우리교회가 대형교단에 의해 이단 이라고 받는 핍박 역시 고난의 한가지 모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 박해가 교회에 미친 영향과 침례교와의 연결(p31-35) -박해시대의 교회는 놀라울 만큼 사도행전의모범을 그대로 유지했다. 작고 순수한 공동체,자발적 가입, 신자침례, 단순한조직, 성경중심,국가로 부터 독립 등 이 모든 신약교회의 특징은 박해 속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고 강화되었다. -침례교회는 바로 이 신약의 패턴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것이 침례교 운동의 중심이자 전체 목적이었다. 또한 모든 시대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다. (자매:처음에 사랑침례교회에 출석할때는 너무 심플한 예배모습, 박수도, 주보도,축도도없는 모습에 당황했던 경험이 있지만 이제는 이런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약교회를 우리가 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매:저는 예배드리기전 주일아침 일찍 함께 모여 일주일간의 삶을 성도들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보는 교제의 시간이 너무 감사합니다.)                    
2026-03-08 10:45:16 | 최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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