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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주일 아침 예배 시작에 앞선 채리티홀에서의 교제 모임에서 어느 형제님 시범이 있었답니다   우리 교회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 활성화에 야~~~ㄱ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나름 괜찮은 내용, 그러니까 알아둬서 나쁘잖은(좋으면 좋았지 ^^) 내용...아닌가 싶어서   올려봅니다        ( 누구~게~용~ ? ^^ )     https://www.youtube.com/shorts/mYG9jQ2ZZxw        
2023-10-30 08:23:58 | 최영오
"슬픈 리뷰" 얼마전 교회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목사님과 교회를 괴롭히고 복음 사역을 대적하고 있는 어느 부부의 악행을 보면서 수 년전 이전 교회에서 제가 겪었던 너무나 아프고 슬픈 기억이 다시 소환되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부부와 저희들은 같은 교단에(교회는 달랐지만)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교단이 분열이 되어서 전국적으로 두 쪽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부부와 저희는 서로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저희가 속해있던 교회도 양쪽으로 나뉘었는데 당시 담임 목사님이 저희들과 함께 하셨는데  이 부부가 속해있던 반대편 사람들이 목사님을 고발하고 끊임없이 목사님에게 폭언과 협박을 했으며 온갖 거짓으로 저희쪽에 있던 성도들에게 전화해서 회유하고 목사님을 음해하는 등 저희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으며 이 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식밖의 일들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소름돋는 사실은 그 모든 악행을 주도했던 사람이 교회 회계 담당이었습니다)   그런 아픈 기억으로 인하여  저희는 이 부부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우리 목사님 말씀을 듣고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서 저희도 마음의 빗장을 열고 넘치는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이 부부의 미소 뒤에 감춰진. 음습한 내면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부부는 이전에 저희들을 힘들게 했던 그 악한자들과 판박이처럼 동류인 것을 이번 일들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또한, 이 부부가 제게 전했던 목사님 관련 부분도 확인해보니 대부분 거짓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악한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영적인)  하나의 컨트롤 타워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교제를 돌이켜보면 그 많은 세월을 사랑침례교회와 함께 했음에도 이 부부에계는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교회에 대한, 목사님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엔 다윗 선진의 기도가 저의 (어쩌면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으로.인하여 그들이 내 대적이 되었사오나 나는 스스로 기도할 뿐이니이다. 그들이 내게 선을 악으로 갚으며 증오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주께서 사악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옵소서"             신안에서            이 윤정 자매 드림
2023-09-24 14:01:09 | 보배
한여름 날만 더워도 이렇게 힘든데 지옥불에서 영원히 사는건 어떨지..육신의 연약함을 느낄때마다 감사함을 하나님이 왜 명령으로 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살 길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2023-08-09 08:12:07 | 목영주
    입추단상(立秋斷想)     엄청시리도 더웠습니다 때로는 숨 막혀 죽을 지경의 날들이었죠   그러나 영 죽으란 법은 없는가봅니다 입추더군요, 오늘이   그럼 그렇지 더위도 이제 갈 때 됐다, 이 말이겠죠   하늘 아래 모든 것 창조주 정해 놓으신 때를 따라 왔다가 때를 따라 가는 것이 섭리이거늘 한참이나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을 그 옛날 그 사람 생각이 났습니다       -----------------------------------------------------------------------------------       너무나도 더운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토록 더울까라는 생각으로 달력 바라보았더니 입추더군요 얼마나 반갑던지... ^^   한 때가 가고 다른 때가 올 때쯤이면 언제나 느끼는 점입니다만   벌레...또는 먼지 같은 인간 그리고 정녕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 함께 생각하면서 졸시 한 편 긁적거려 보았습니다 ^^    
2023-08-09 00:24:42 | 최영오
성도님들의 글을 읽다보면 문해력이 저절로 키워질 것 같아요~^^ 하나님 이야기로 귀결되어지고 특히 마지막부분에 말씀으로 끝을 맺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도 좋으신 하나님 생각으로 생활하겠습니다.
2023-08-03 18:48:45 | 목영주
-이신론(deism)이냐 공리주의(utilitarianism)냐 -안녕하세요?지난번엔 세속적(무신론적)실존주의에 대해 간략히알아봤고 이번엔 말씀드린대로 종교적(유신론적)실존주의에 관해나눠보고자 합니다.먼저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쇠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에 대해 지면을 잠시 할애하자면 그의 이름은 덴마크 말로 '공동묘지'를 뜻합니다.그는 1813년 7남매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습니다.쇠얀의 부친 미카엘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의 성공한 상인이었으므로 쇠얀은 유복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습니다.그러나 그의 집안분위기는 엄격하고 음울했습니다.자신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으나 두 가지의 과오로 인해 평생을 죄책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는 쇠얀의 어머니와 결혼한 일입니다. 당시 교회법은 재혼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 결혼은 아버지에게는 두 번째였습니다.그는 첫째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병으로 죽자, 자기 집 어린 하녀와 재혼했습니다. 그 하녀가 바로 쇠얀의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결혼한 뒤 두 달 만에 첫아이를 낳았습니다.교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결혼했던 상황, 그리고 두 달 만에 낳은 아기(혼전임신)는 쇠얀의 아버지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남겼습니다.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목동을 할 때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하늘에다 대고 하나님을 저주했던 일입니다. 그는 이 사건이 자신의 삶을 재앙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그는 무려 82세까지 살았는데 그는 긴 생애 동안 두 명의 부인이 죽고 8남매 중 6명이 죽는 것을 차례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코펜하겐 대학 신학과 학생이던 스물두 살의 쇠얀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의 비밀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방탕과 절망의 길로 빠져 들었습니다.쇠얀은 이 일을 '대지진'이라고 회상했습니다.쇠얀도 자신의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자신의 집안과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이런 환경과 경험들이 그의 사상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훗날 그는 국가 기구가 된 기성교회와 관리가 된 사제들을 이를 갈며 미워했고, 고난 속의 생활과 신앙을 지지하고 순수했던 초대 기독교와 교회를 갈망했고 평생에 걸쳐 '가능성'을 찾아 사색하고, 이윽고 20세기의 사상과 신학에 큰불을 지핀 거대한 폭탄이 된 사람, 맏형을 제외한 다섯 형과 누이들이 서른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목격하며 자신도 아주 젊어서 죽으리라는 예감 속에서 살다가 이윽고 마흔 두살에 요절한 인물입니다.그럼 쇠얀이 전개한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자면그는 그의 저서 [Fear and Trembling]에서 실존에는 세 범주가 있다고 했습니다.첫째로 심미적 실존인데 여기서 직접적 심미주의는 감각적 쾌락,관능,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선천적으로 타고난 외모,매너,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돈 후안)이 여기에 속한다고 합니다.또 하나는 반성적 심미주의로서타고난 매력은 없지만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부류(요하네스)입니다.둘째로 윤리적 실존인데 이것은 심미적 실존보다 한차원 높은 실존입니다.윤리적이며 법을 잘 준수하고 사회적 명망이 있는 부류(빌헬름 판사)가 여기에 속합니다.셋째는 종교적 실존으로서 가장 고차원의 실존입니다.윤리적 실존보다 더 상위에 속한 자들로서 종교가 가르치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입니다.법이 종교적 이념을 실행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듯이 말이죠.쇠얀은"신앙은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신념,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라고 정의합니다."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역설이며,이는 개별자가 처음에 보편적인 것 안에 있다가 이후에는 보편적인 것보다 높은 곳에 있는 개별자로 고립된다고 하는 역설.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보다 높고, 보편적인 것에 거스를 권리가 부여되어 있고, 그 밑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한다는 역설(윤리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능가하는 개별자).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는 역설이다(신 앞에 선 단독자)."...여기서 쇠얀이 말한 "신앙은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신념,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계기는 각각 개별적으로 다 다를수 있습니다만 '구원'을 받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성육신 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오실 유일하신 나의 구원자 라는것을 믿는 것입니다."신앙은 객관적(특별계시-성경)이며 성경적인 신념, 성경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라 해야 맞는 말입니다.물론 쇠얀이 살던 시대 덴마크는 국가 교회(state church)가 지배했었고 어김없이 계급화된 사제들의 부패상이 만연했습니다.그의 저서 및 사상은 이것을 비난하고 반박하는것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것이 사실입니다.그가 위에서 말한 '보편적인 것'이란 타락한 국가교회를 지칭한것으로 보입니다.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실존주의 철학의 사탕발림에 현혹되는 이유가 현재 우리나라 교회의 실태가 칼빈주의를 내세우는 교단신학과 성경의 권위를 넘보는 교회와 목사의 행태가 로만 카톨릭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고찰해 볼 사항입니다.글이 너무 길어지는 양상을 띄기에 속도를 내보겠습니다.쇠얀의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몇몇 부분에선 정통 기독교 신앙과 유사한 점도 존재합니다만,그의 저서 [Fear and Trembling]을 보면 그가 말하는 신앙이 명백히 비성경적 이란것을 알 수 있습니다.쉐퍼는 신앙에 두가지 개념이 있다고 말합니다.하나는 성경이 명령하고 요구하는 즉 정당하고 적절한 이유에 근거를 두고서 그것을 따르는것. 즉 성경에 근거한 신앙, 성경적 신앙에 의한 순종이며,또 하나는 어둠 속에서 뛰어오르는 맹목적 도약 즉,이성 없이(혹은 충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믿는 것이 신앙의 도약(a blind leap of faith) 입니다.결국 쇠얀의 신앙은 '맹목적 도약'이며 목적은 '공리주의'의 실현입니다.쇠얀이 [Fear and Trembling]에서 말하는 결론이자 신앙의 목적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번거롭지만 쇠얀의 저서 [Fear and Trembling]를 대충이나마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반박을 해보고자 합니다.-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행위는 우리가 가진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가 가진것이라곤 오로지 자기 혼자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뿐이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비밀스럽게 모리아 산으로 데려갔고,칼을 들어 결박 당한 이삭을 죽이려 할 때 비로소 자신의 비밀을 폭로했다. 아브라함을 신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신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결코 체계화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중략) 그가 그렇게 두려운 일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시간적인 삶 전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희망과 정체성을 영원에 두었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그가 이삭을, 이삭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집착을 버릴수 있었던 핵심동기다.(...중략) 아브라함은 그 이전까지 이삭은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라는 희망, 이삭을 통해 자신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왔다.하지만 하나님이 그 이삭을 죽이라고 명하시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시자 자신이 따라야 할 분이라고 그는 믿는다.이러한 기사는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한다고 할 수 있다.(...중략) 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만, 하나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윤리적인것의 목적론적 정지)할 것이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동했을 때 그는, 홀로, 하나님만 보았다(신앞에 선 단독자).쇠얀은 아브라함이 살인미수죄를 모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그것은 윤리적 의무를 무한히 체념하고(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모순을 극복하는 방식)이라 주장한다.아브라함의 이러한 영웅적인 도약은 너무나 드높은 경지여서 이 도약앞에서 뭇 사람들은 한없는 두려움으로 전율한다.인간이 자신 안에 하나님을 잃고 혹은 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영혼의 죽음>이자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혹시 쇠얀의 말에 수긍하는분 계십니까?저는 쇠얀의 의견에 전혀 동의 하지 않습니다.그 이유는 아브라함 당시에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였습니다만,그러나 창세기 대홍수 사건, 바벨탑 사건 같은 전 지구적인 사건을 겪거나 혹은 겪은 직후 세대들이 데라와 아브라함이 살았을 당시에 여전히 생존(노아,셈,아르박삿,에벨,살라)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얼 뜻하느냐?이 당시에 아브라함이 우리처럼 완전한 성경 말씀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그에 필적하는 '산 증인'들의 신뢰할만한 '증언'을 전해듣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증인'들의 수명을 길게 보전하신 것은 온 땅에 편만한 우상숭배(다신론,범신론)로 부터 인류를 지켜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창세기 대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겪은 세대들인 노아(950세),노아의 아들인 셈(600세),셈의 아들인 아르박삿(438세),아르박삿의 아들인 에벨(464세),살라(433세) 이후 자손들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드는것을 보면 말이죠.다시 말하면 그는 창세기 12장 1절의 하나님과의 동행 이전부터조직신학의 신론(theism)의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했음이 분명합니다.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은 쉐퍼가 말한 첫번째에 속하는 체계화 된 신앙입니다.하나님의 은혜로 백세에 얻은 이삭을 모리아 땅의 산에서 번제헌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것도 그의 신앙의 맹목적 도약때문이 아니었습니다.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떠나왔던 우르땅의 우상신들과 달리유일하고 전지전능하시며 공의롭고 좋으신분 이란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고 또한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자신과 함께 하던 청년들과 모리아 땅에 동행한것입니다. 쇠얀의 말처럼 의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맹목적 신양의 도약을 한 아브라함이라는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절대 아니었습니다.이것은 창 22장 5절 ; 8절을 보면 확연히 알수 있습니다.의인 욥의 고백(욥 1:21)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만하면 쇠얀 키르케고르와 그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의에 대해 간략히 알아봄과 동시에 왜 그것이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지 나눠본것 같습니다.이어서 제임스 사이어가 요약한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왜 이신론(deism)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지 간단히 적어보고 마치겠습니다.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유신론의 명제를 다소 받아들인다.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가장 특징적 요소는 우주와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및 우주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1.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소외된 우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다.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의식을 가졌을 때 자신을 발견하는 그 위치를 강조함.자기 자신의 존재, 자기 자신의 의식, 자기 자신의 자기 결정력 등에 대한 각 개인의 확신을 출발점으로 삼음.2.인격적인 것은 가치 있다.세속적(무신론적) 실존주의 처럼 유신론적 실존주의도 주관 세계와객관 세계의 구분을 강조함.인격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함. 유대인 실존주의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나-너(I-Thou), '나-그것(I-It)이란 용어를 사용함. '나-그것'의 관계에서 인간은 객체가 되게 하는 자(the objectifier)다."세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신을 발견할 수 없다. 세계 밖으로 나가도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온 존재를 기울여 자신의 너를 만나기 위해 나아가고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너에게 가져가는 사람만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신은 '완전한 타자'다.그러나 그는 또한 완전한 자기 동일자이며 완전한 현존자이다.확실히 그는 나타나서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의 나(my I)보다도 나에게 가까이 있는 자명한 신비이기도 하다."3. 지식은 주관적이다.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다.1835년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아는 일이 모든 행동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중요한 일은 내가 무엇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가, 또 신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요점은 나를 위한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살아야 할 이상을 찾는 것이다. 비록 내가 철학자들의 체계를 애써 파고들려 하고, 필요하다면 그 체계를 검토할 수 있게 된다 할지라도, 소위 말하는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란 말인가?"4.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그러나 현재화되고 생활화 될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전통적 기독유신론에서 두 단계 퇴보 했다.첫 단계는 기록된 역사의 정확성을 불신하기 시작한 것.19세기 중반의 스트라우스(D.F. Strauss), 어니스트 르낭(Ernest Renan) 같은 고등 비평가들은 기적과 다른 기록들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자연주의의 전제 위에서 이론을 세워 나갔다.기적에 대한 기록은 원시적 사고 형태를 지닌 미신적 인간들이 주장한 것이고 따라서 거짓이 틀림이 없다고 주장했다.이러한 주장은 성경 기사의 권위를, 심지어 기적을 언급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손상시킴.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으로 대표되는 일단의 고등 비평가들은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수세기에 걸쳐 여러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 했다.이것은 성경의 자중을 손상시켰으며 모든 성경 내용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게 했다.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송두리째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신 둘째 단계로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선한 생활에 대한 성경의 모범들과 도덕에 대한 강조점이 중요하다고 왜곡 했다.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와 육체의 부활은 헌신적인 인간애으로서의 모범과 영적 교훈을 위한 신화로 격하 되었다.둘째 단계는 사실성에 대한 관심을 잃은 대신 종교적 뜻이나 의미를 강조한 것.성경의 권위와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한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서 신정통주의를 주창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 1976),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 - 1965)  등이 있다. 혹시나 많이 부족하고 엉성한 이 글을 다 읽으신 분이 있다면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아는 것에 있어서 아주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우리가 이런 현대사상들에 대해 공부하고 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이런것들이 '칼빈주의'에 경도되고 또 교단이 대형화 됨에 따라 국가 교회적인 권위주의 양상을 띄는 우리나라에서 거기 속한 구성원들한테 복음적인것 마냥 자칫 매혹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모쪼록 부족한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많으셨고 다들 무더위에 늘 주 안에서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딤후 4: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이 글을 작성하며 부산대 철학과 정진우 교수의 영상과 프랜시스 쉐퍼, 제임스 사이어의 책을 참조하고 인용하였습니다.
2023-08-02 22:47:36 | 박세원
실존주의를 잘 이해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인간의 존재목적,창조주를 빼고서는 그 어떤 관점,철학도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뉴스에 나오는 모든 사회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성경말씀으로 다 설명되어지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계심이 느껴져요. 능력없고 겁많은 제가 순종하나로 (예수님을 드러낼수 있을 정도의)아이들 세워놓고 맘편히 하나님아버지께 갈 그날을 고대하며 하루 시작하겠습니다~ 
2023-07-25 09:15:23 | 목영주
근본주의 성도들이 반지성주의자들 이라구요?-7(절망에서 절망으로)-세속적(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정의와 개요-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실존주의는 배워서 아는것이아니라 이미 우리 삶의 풍토로 자리 잡은 철학인 실존주의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파악하는것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실존주의의 반대는 본질주의이며,서양 철학의 역사는 본질을 탐구하려는 역사였고,형이상학이란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고 본질은 모든 존재하는것들의 원인과 목적을 탐구하는것 존재론 입니다.이것이 철학의 원래 목적이기도 합니다.   •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첫째, 실존주의(extentialism)는 개인의 자유,책임, 주체성(subjectivity)를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문학적 흐름이다.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자기 삶의 주체다. 실존주의 사상은 공통적으로'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는 것, 인간은 자기 삶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둘째,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과 대비되는 개념이다.'실존'은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 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사물에 있어서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하지만 인간에 있어서는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다(Entwurf:기획투사).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삶에서 탈출하는 것이다.셋째, 타인은 지옥이다.희곡 '출구 없는 방(1944)의 대사를 통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고 처음 말한 사르트르는 "이 말이 늘 오해되어 왔다"고 했다."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해가 되고 지옥처럼 된다는 뜻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한건 좀 다르다"고 했다.이 연극에 대한 1965년 강연에서 그가 한 말이다."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중략)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넷째, 실존의 본질은 자유, 자유가 없는 삶은 '불완전한 삶'이다.실존에 의해 그 본질을 결정해 가는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실존철학은 모든 교리의 절대화에 반항하고 인간실존의 진실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휴머니즘 철학으로 인정받고 있다."신은 인간을 개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었는데, 획일적으로 살아가면그것이 타락이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불완전한 삶'이다.그러한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온전한 삶을 위한 결단을 강조하는 철학이다."산에는 길이 없다.당신이 가는 곳이 길이다."- M.하이데거,<이정표>중에서.   세속적(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세 흐름프랑스의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첫째로,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주는 합리적으로 볼 때 부조리(absurd)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의지(will)의 행동으로 자신을 자신답게 함(=실존적 체험)으로써 가능한데어려운 문제는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데는 아무런 합리적 혹은 논리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 현대인을 위하여 울 수 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또 카뮈는 1950년에 발표한 어느 기고문에서 "절망의 문학(a literature of despair)이란 말은 용어상 모순이 된다.···허무주의라는 매우 어둡고 깊은 현대의 구렁텅이 속에서 나는 오로지 그것을 초월할 방법만을 추구해 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둘째로, 독일의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본래 심리학자로 "한계 체험(final experience)"을 말했습니다.이 한계 체험은 어떤 체험이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실성과 존재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줍니다.하지만 합리적으로는 인간이 이러한 희망을 도저히 가질 수 없으며,이 "한계 체험"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이 체험이 합리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체험의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전달할 길이 없다는 점이 없다는 겁니다.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운전 중 교통사고가 났고 가까스로 참사를 모면했는데 마침내 그는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체험을 되풀이 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조차 전달을 할 수 없는 체험을 의지하여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절망적인가요.한계 체험을 스스로 얻는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찾아올 뿐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독일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가 말하는 소위 불안(Angst)을 가지고 있습니다.불안이 바로 두려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불안은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 즉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나옴직한 흉가에 들어설 때 느끼는, 그와 같은 불편한 느낌입니다.하이데거는 만사를 이러한 류의 근본적인 불안에 결부시켰고 이러한 사상은 결국 도약에 근거하고 있는것입니다.과학이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것이라는 과학 낙관주의라는 환상은 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대량 살상무기 개발과 확산, 참혹한 인명 살상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이것은 자연주의는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는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인생은 부조리하고 인간은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이러한 좌절과 문화적 불만의 토양속에서 세속적 실존주의는 문화적 뿌리를 내렸고 1950년에 이르러서는 주요 철학으로 만개했습니다.세속적 실존주의는 유물론 곧 무신론이라는 자연주의의 주요 명제를 긍정합니다.제임스 사이어는 세속적 실존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1. 우주는 단지 물질로만 구성됨.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가지 형태로 발현됨.2.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음.3.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움.4.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된 객관 세계는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임.5. 객관 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진정한 인간이 반기를 들고 가치를 창출함. 실존주의는 허무주의의 심연에 빠진 현대인들이 붙잡도록 만들어진 썩은 동앗줄이라고 하면 좀 더 와닿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현대사회는 불확실성과 위기로 점철 되어있습니다. 다음 두 사례를 한번 보겠습니다.   ex 1)중견기업을 다니는 김부장(48)은 회사 경영실적의 악화로 인해 얼마전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통보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에겐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이 십년이상 남아있고 슬하에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자녀들이 둘이 나 있다. 그는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해왔고 회사에 자신의 젊음을 오롯이 바친 그였다.그러나 이 막막한 현실앞에서 그는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았고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ex 2)최군(19)은 어려서부터 전문직에 종사하시는 부모님의 성화로 명문대 진학을 강요 받았다. 초등학교부터 대입수능을 위해 현재까지 많은시간과 거액을 들여 사교육을 받았지만 시험결과는 야속하기만 했다.유년기를 거쳐 청소년기를 온전히 입시에 바친 최군에게 대입수능실패는 곧 자기자신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허물어 뜨렸으며그는 이 모든일에 염증과 허무를 느꼈다...   위 두 사례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인해 위로받았다고 하는 실사례를 각색한 것입니다. 세속적 실존주의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시도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을 초월하는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는데는 실패했으며 인간 가치의 근거를 주관에 둠으로써 실재와 유리된 영역에 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도약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결과인 '죽음'을 극복할 순 없었고 '죽음'과 함께 그 모든 의미들은 퇴색되고 종식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백번 양보해서 '도약' 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현재 자신이 처한 위기와 문제들이 그들의 바램처럼 해결 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도피와 외면은 할수 있을지언정 말이죠.   또 한가지 재밌는점은 어떤 사람들이 이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옹호할때 대표적으로 무법적이고 퇴폐적인 히피문화의 발생 및 확산과 연관짓지 말라고 당부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를 예를 들면 OECD 국가중 자살율 1위라는 것은 허무주의 탓으로 돌린다 쳐도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한 도덕의 붕괴와 무법적이고 무질서적인 행태, 퇴폐적이고 변태적인 성적 문란, 마약을 비롯 향정신성 약물의 광범위한 중독과 남용을 바라보면 구차한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지금처럼 사람들이 혼돈과 절망에서 도무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일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것을 알릴 호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에게 양 백마리가 있는데 그것들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그가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산으로 들어가 길 잃은 그 양을 찾지 아니하느냐?마 18:13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만일 그것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양으로 인하여 더 기뻐하리라.※ 이 글을 작성하며 부산대 철학과 정진우 교수의 영상과 프랜시스 쉐퍼,제임스 사이어의 책을 참조하고 인용하였습니다.      
2023-07-23 03:06:18 | 박세원
샬롬 ~~   전철역 입구에서 ‘신천지’ 홍보지 나눠 주시는 할머니에게  목사님 설교(특히 요한계시록)를 알려 드리고 싶어서 정동수 목사님 강해 목록을 작성하였습니다. 다른 교회 섬기시는 분들께 출력 또는 파일로 전달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공유합니다.   강해 동영상 수 기준은 유튜브에 등록된 기준을 따랐습니다. 교회 홈피에 등록된 강해 수와 유튜브에 등록된 강해 수가 일치 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그중에 일부는 의도적으로 설교 후 유튜브에서 삭제한 것도 있고 일부는 유튜브에 동영상이 있는데, 유튜브 재생 목록에 미등록 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등록 된 것과, 재생 목록 구성이 필요한 것을 표시하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 [강해 시리즈]에는 없는데,  최근 ‘킹제임스 성경 전래’ 강연하신 김재근 목사님의 강연 내용이 좋아서 추가했고,  홍승대 형제님 특강하신 내용이 저에게 신선한 강의로 인식되어 [작성자 추천]이란 항목으로 추가하였습니다.
2023-07-17 15:15:48 | 박충영
잘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세상사람들은 사리분별하기가 더 애매모호해지고 가해자의 편에 서는 의견을 접해도 이젠 놀랍지도 않을정도로 사회가 혼탁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하나만 쫒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살아가기는 힘들어도 오히려 세상가치관과 확연히 달라 (내 생각 표현만 해도)쉽게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되요..
2023-07-17 07:55:20 | 목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