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좋은 글을 올려주시니 읽는 즐거움이 많습니다.
글의 내용을 봐서 형제님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걸 신학적 용어로 성화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비록 삶에 성화의 굴곡이 나타나겠지만 형제님처럼 늦은 나이에
구원받으신 분 치고는 나날이 변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이번 주일 간증도 아주 진솔하셨어요~!
반면에 저는 어제도 제 아내에게서 그리스도인이 왜 맨날 그러느냐고 한소리 들었습니다.ㅜㅜ
2021-06-16 18:42:14 | 이남규
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요한복음 8장 31절~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에 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로서 결코 누구에게도 속박된 적이 없거늘 어찌 네가 이르기를,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며 항변하는 내용이 나온다.
위 내용에서 자유의 반대 개념이 속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좋아하고 인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자유롭다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속박은 어떤 행위나 권리의 행사를 자유로이 하지 못하도록 강압적으로 얽어매거나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속박은 무엇으로부터, 어딘가로부터 얽매인다는 것을 말한다. 좀 창피한 일이지만, 나를 지독하게 오랫동안 얽매였던 2가지 사례를 자백한다.
1. 나를 속박하고 있었던 거슬림
나는 식당에 가면 습관적으로 종업원들이 어떻게 서비스를 하는지를 본다. 손님이 식당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손님이 떠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본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식탁에 음식 그릇을 놓을 때, 던지는 듯이 놓는 종업원도 있고,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면서 놓는 종업원도 있다.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뭐라고 한마디씩을 해야만 속이 시원하다. 그럴 때마다 아내나 아이들은 식당에 싸우러 왔느냐고 말리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종업원들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지금은 식당에 가면 종업원들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2. 나의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하는 아내의 코골이
아내는 잠잘 때 코를 곤다. 아내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코를 골면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전에 정말 견디기 힘들다며 코골이 수술을 권유했었다. 수술하고 나서는 코를 골지 않아 너무 좋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니 다시 코를 골기 시작한다. 아내가 코를 골면 그때마다 정말 힘들었다. 아내가 코를 골 때마다 깨워서 옆으로 누워 자도록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코 고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왜 이렇게 변했는지 참 신기하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지금은 위 두 가지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무관심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요한복음 8장을 읽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야! 이거구나! 그런데, 어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거지? 그래서 곰곰이 묵상해보니 바로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4절까지와 12절이었다.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무슨 판단으로 판단하든 그것대로 판단을 받고 너희가 무슨 척도로 재든 그것대로 너희가 다시 평가를 받으리라.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 혹은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네가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려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리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너희도 그들에게 그대로 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들이니라.(마태복음 7장 1절~4절, 12절)
3.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자유함의 기쁨
바로 이거구나! 위 성경 구절이 진리였구나! 진리가 너희(나) 안에 거하면 그 진리가 너희(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동안 별 생각없이 읽었던 성경 구절이, 어느 날 내 안에 진리로 자리 잡아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성경은 부지런히 읽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요즘 너무 기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2021-06-16 17:09:48 | 이규환
자매님 글을 읽다보니,베드로전서 3장 15절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선한 양심을 가지라"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6-09 18:53:34 | 이규환
자매님 동의가 되는 주제네요^^
감사해요~
2021-06-09 12:35:13 | 이수영
요사이 주일설교 말씀주제인 성화 시리즈 말씀을 들으며 생각해 본다.
말하는 것의 중요성!!! 성화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주제인것 같다.
말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잘 해야한다.
어떤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있는 그대로 앞에서 이야기 해요. 에둘러서 이야기 못해요" 라고
당연히 사실을 말하는 것이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직면해서 들어야 하는 상대방은 그 말이 상처가 될때가 있다.
때로는 사실이지만 말하는 것 보다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때가 있는것 같다.
스스로 깨달아 고칠수 있도록 기회를 주면 어떨까?
성경 말씀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본다.
구약에서 주의 천사가 기드온을 찾아가서 한 첫마디가 "너 강한 용사여" 였다. 그당시 기드온은 강한 용사가 아니었고
미디안 족속을 피해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 겁쟁이 였다. 그러나 앞으로 강한 용사가 될 것을 바라보며 그렇게 인정해 주었다.
또 한가지 예는 다윗왕이 밧세바 일로 범죄했을 때에 나단대언자가 다윗을 찾아가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비유를 통해 다윗왕이 스스로 깨달아 회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을 만났을 때에도 그여인의 모든것을 알고 계셨지만 직선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으신다.
여인이 스스로 알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다.
또 한가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예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났을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세번 부인했냐고 먼저
묻지 않으신다. 제일 먼저 먹이신다. 살아계실때 늘 그랬던 것 처럼.... 그 익숙한 장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마음속에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마음에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번부인을 질문하는 대신 "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번 질문하신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이야기 하는것 보다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
성도와의 교제에서 성화의 과정에서 말을 잘 하려고 하지말고 잘 말하려고 노력하자.
때로는 좀 덮어주고 때로는 좀 감싸주고 때로는 에둘러서 이야기 하기도 해보면 어떨까?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롭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마땅히 대답해야 할지 알게 되리라.
(골로새서 4:6)
2021-06-09 09:40:21 | 최지나
하나님을 어찌 다 알수가 있겠어요?
주님께서 조명해 주시는만큼만 알아가는 것 아닐지요.
늘 새롭고 늘 신선한 항상 놀라운 ' 앎' 인 것이지요.
성경은 광산과 같아서 때마다 깨닫는 부분이 다른 놀라운 책이잖아요.
주님께 가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겠지만
하나씩 깨닫게 해주시는 기쁨도 이세상에서 누리는 축복이지요.
자매님, 일상에서 생각하는 바를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2021-06-01 06:23:50 | 이수영
아는만큼 사랑하고 자랑한다는 말이 참 와 닿네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갈 때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이 땅 가운데 허락하신 지체들을 진심으로 알고 교제할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글 감사해요!!
2021-05-31 17:09:54 | 김세라
하나님을 한방?에 다 안다면 사람은 아마 기절 내지는 쇼크로 살수 없을 것 같아요.
너~~~무 큰 물질이나 소리를 보거나 들을 수 없고
(예를 들어 지구를 맨눈으로 볼수 없고)
너~~~무 작은 물질이나 소리를 보거나 들을 수 없듯이
(예를 들어 세균이나 바이러스등)
하물며 하나님을 한방?에 어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 삶을 통해 살아가며 하나님을 하나씩 천천히 알아가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기 위해 사천년이라는 시간을 사용하신 것을 보면요!!!
형제님 제가 예능을 너무 다큐로 받았지요.^^
교회에서 늘 마주치게 되는 형제님의 친근함이 참 좋습니다.
2021-05-31 13:21:42 | 최지나
"창조" 제 개인적으로도 이 주제에 클릭이 되어
하나님께서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답니다.
눈의 결정체와 모기의 얼굴을 대면하며 우리가 보는
세상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네요.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자기가 보는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듣는것이 세상 다인줄 알고 있으니 하나님
께서 보시면 참 웃으실 일입니다.
2021-05-31 11:40:23 | 최지나
요즘 설교 주제와 딱 맞는 글이네요.
하나님을 한 방에 다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2021-05-31 10:36:56 | 이규환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알고 내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지난주일 예배 중 김필제형제의 "은혜" 라는 찬양을 들으며 문득 생각해 보았다.
한 청년의 진심어린 찬양에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더욱 은혜가 되는 것은 그 형제가 나를 알고 내가 그 형제를 안다는 것이였다.
가족처럼 깊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얼굴로 알고 이름으로도 안다.
그 정도로도 그 형제의 찬양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찬양보다 더욱 깊은 은혜가 되었다.
나만 은혜받는 것이 아쉬워서 아는 분들에게 공유하며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자랑하고 있는가?
찬양이란 말 자체가 자랑이라는 말과 통한다고 한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아는 만큼 사랑하고 또한 자랑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것이 그 흔하게 사용하는 전도가 아닌가? 내안에 넘쳐나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없는데 무엇이 나오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앎이 넘쳐 흘러넘쳐서 삶에 묻어 날 때 그것이 전도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나의 머리털 까지도 세고 알고 계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 만물을 “창조” 하신 분이시다.
와!!!
이보다 든든한 “백”이 있을까?
하니님께서는 처음부터 나를 아신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자랑하고 있는가? 인 것이다.
성경을 읽는 이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모든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려드리는 것이 아닐까?
“모르면 잡초 알면 약초”
요새 들나물과 산나물을 뜯으러 다닌다.
그동안 무심코 풀로만 보아오던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름을 알아가며 먹는 것임을 알아가고 있다. 또한 약효까지 있다니 참 놀라울 따름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은 널려져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누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앎에 대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고 아는 만큼 닮아가고 아는 만큼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
2021-05-29 14:05:49 | 최지나
사람마다 주님께서 눈을 여시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하신지요!
찾으면 찾게되고 만나게 되는 것이 맞습니다^^
2021-05-27 13:12:53 | 이수영
말씀을 믿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이 느껴지네요.
형제님의 귀한 재능이 성도들의 배움에 큰 도움이 되길 소망합니다!!
2021-05-27 08:16:35 | 김세라
독특하면서도 은혜로운 간증이십니다.
이렇게도 믿음을 갖게 되다니 하나님의 섭리가 참 경이롭습니다.
2021-05-26 19:34:14 | 이남규
성공하신거네요. 응원합니다.
2021-05-26 07:21:47 | 이규환
창조가 잘 안 믿어져요!
요즘 형제, 자매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 작년 3월 1일에 간증하기로 일정이 잡혔었는데, 요놈의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연기되었었고, 그 후로 기회가 없었다. 그때 준비했던 내용 일부를 공유하고자 한다.
1. 창조를 믿기까지의 과정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쳤던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6일 창조였다. 한 마디로 황당 그 자체였다. 말씀으로 창조를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성경 창세기를 아무리 읽어도 풀리지 않았다. 혹시 4대 복음서를 읽으면 도움이 될까 하고 복음서를 읽었지만,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어떻게 물고기 2개와 빵 5개로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가? 어떻게 죽은 지 3일이 지난 사람을 살릴 수 있는가?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풀리지 않은 숙제를 해결하려고 약 1년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안 믿어질까? 미칠 지경이었다. 엄청 고민하던 중에 창조과학회를 알게 되었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창조과학회에 올라온 동영상이 50개는 되는 것 같았다. 1개당 분량이 2시간 정도였다. 하루에 1편을 보면 50일이 걸리는 분량이었다. 인내하면서 한 편씩 보기 시작했다. 처음 본 동영상은 과학의 원리, 법칙과 이론의 차이점, 열역학 제1 법칙, 제2 법칙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처음 몇 편을 보면서 “이것들이 창조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괜히 시간만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창조가 믿어져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데…
창조과학회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만 두려고 하다가, 이왕 보기 시작했으니까 몇 편만 더 보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보던 중에, 아래와 같은 눈의 모습을 확대한 사진과 모기의 얼굴이 나오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두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머리를 쇠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빨려 들어가기 가기 시작했다.
<무생물 : 겨울에 내리는 눈의 모습>
<생물 : 모기의 얼굴과 머리깃 모습>
무생물인 눈의 모습은 너무나 찬란했다. 생물인 모기의 얼굴 모습은 너무나 정교했다. 이것들이 저절로 생겼을까? 어느 누가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건 필시 누군가가 개입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진 두 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지적 설계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2. 창조가 믿어지니까 풀리는 것들
창조가 믿어지니까 4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들이 바로 이해가 되고, 이것을 행하는 일이 너무 쉬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부활이 거부감 없이 믿어지고, 휴거가 소망이 되었다. 또한 자연세계가 위대하게 보였고, 해와 달은 물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창조가 믿어지니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은 신비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창조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데 필수라는 것이 그 당시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요한복음 1장 3절)
2021-05-25 18:23:05 | 이규환
신약시대라 감사한 것은 오직 말씀 외에 바라볼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인성은 죄성이 가득한지라 주님을 믿고도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지요!
어떤 행위이든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 타버리지 않을지!
주님 앞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겠어요.
2021-05-24 09:00:16 | 이수영
공감 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과 오버랩 됩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오직 크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2021-05-24 07:28:13 | 이수영
가족 특히 자녀의 구원을 위해 애타는 부모의 심정이 느껴지네요.
신앙의 선배인 엄마의 행동을 먹고 자란 아이는 반드시 언젠가는 열매로 나타나게 될거에요.
그날를 다함께 기다려요.
2021-05-24 07:17:13 | 이수영
그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자매님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심을 보고계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셨던 하나님
따님들이 엄마의 간절한 소원도 아시고
계실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때에 따님들의 마음도 열어주시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이루어 가실것을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결혼을 앞둔 큰따님께서
엄마의 마음을 잘 아시고 이해하시리라 여깁니다.
아름다운 고백의 시
감사합니다.
2021-05-23 20:04:32 | 김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