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님의 글 덕분에 그저 무심코 읽었던 구절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새일지라도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취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미물에게도 적용하시는 하나님.....
만약에 어미만 취하면 어미를 잃은 그의 새끼도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취하게 될 경우엔 어미를 놓아주고 새끼만 취하라는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로움....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생명윤리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2022-07-13 11:04:48 | 김영익
형제님, 말씀을 상고하고 나눠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자연물을 통해 창조주이신 주님의 지혜의 신비하심과 오묘하심에 감사하게 되지요.
지구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말씀 하나도 허투로 말씀하신 것이 없음에 감탄합니다.
2022-07-12 11:44:06 | 이수영
형제님!
산행을 하면서도 통찰을 얻는 놀라움에 감동입니다.자주 좋은 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2-07-12 10:55:58 | 이규환
아하~! 하나님의 질서,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었군요.
역시...오 형제님! ^^
주님 은총 충만한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
2022-07-12 10:49:49 | 최영오
형제님, 일상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그 의미를
상고해보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저도 신명기 22장6-7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윤리의 법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길을 가다가 우연히 새둥지에 새끼들이나
알이 있고 어미가 함께 있는것을 발견하게 되었을때 어미는 반드시 놓아주고 새끼들을 취하라는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계를 주관하고 다스릴 권리를 주셨지만(창1:28) 그것을 남용하거나
착취하는 형태(어미, 새끼, 알들 까지 모두 취하는 행위는 남용과 착취이겠죠)로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발휘하여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창조질서 가운데 새들에게도 형성되어 있는 어미와 자식간의 관계를 존중하면서
꼭 취해야 하는 경우라면 알이나 새끼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를
볼수 있는 구절인것 같습니다.
2022-07-12 00:10:13 | 오광일
주말이면 어김없이 동네 산을 찾아갑니다. 생기 넘쳐 흐르는 신록 속을 걷노라면,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영과 혼과 몸으로, 그야말로 리얼하게(^^) 느끼게 됩니다. 숲속 여기 저기, 온 땅에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뜻, 성경 말씀의 뜻을 되새겨 보는 순간들도 더러 있답니다.
어느 해 여름 주말산행 중의 경험담에 관한 글을 가리늦게 이제서야 올려 봅니다. 그다지 때를 가리지 않는 내용...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
우선. 이 글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성경 말씀인즉, 신 22:6-7 '길을 가다가 네 앞의 나무나 땅바닥에 있는 새 둥지에 새끼들이나 알들이 있고 어미가 새끼들이나 알들을 품은 것을 우연히 보거든, 너는 그 어미와 새끼들을 함께 취하지 말며 어미는 반드시 놓아주고 새끼들을 취할지니라. 그러면 네 일이 잘되고 네가 네 날들을 길게 하리라'입니다. 말씀에 따르면, 새끼들 품은 어미 새 보거든 어미 새는 놔두고 새끼들만 잡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고깃살로 치면 아무래도 새끼보다 어미 새가 더 많을 텐데 말입니다. 설마, 새끼 육질이 더 쫄깃쫄깃, 맛있으니까 이왕이면 새끼 잡아먹어라, 이런 뜻의 말씀은 아닐 것 아닙니까. (이 문장은 어디까지나 농담입니다. ^^)
대략 1 년이 넘도록, 산행 중 새소리 들려올 때면, 거의 어김없이 그 말씀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이상하다, 하나님께서는 왜...도대체 왜 어미 새는 놔두고 새끼들을 취하라고 하셨을까...?...라는 궁금증 또한 어김없이 이어지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산행 중 어디선가 새소리 들려오매 다시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답니다. 왜 어미 새는 놔두고...세상 구경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불쌍한 새끼들만 취하라고, 잡아먹어라고 하셨을까...를 생각 또 생각하며, 떠오르는 성경 구절들을 되새겨 보던 중...번쩍!...한 생각이 일더군요. 그래...!...아버지 없는 자...!...바로 그것 때문 아닐까....?!...어미 새를 잡아가 버리면, 불쌍한 새끼들은 졸지에 아버지(어머니일 수도 ^^) 없는 자들, 말하자면, 곱배기로 불쌍한 새끼 새들이 되어 버릴 것 아닌가, 절대로 그렇게는 만들지 말라...는 그런 말씀이었구나 라는 생각 말입니다.
바보 도 터지는 때에 준하는 희열, 영적 희열을 느끼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성경 앱을 켠 다음 '아버지 없는'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해 보았습니다. 해당 구절들이 좌~악 뜨는데, 참 많더군요. 출 22:22 '너희는 과부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괴롭히지 말지나라', 신 10:18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를 위해 판단의 공의를 집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나니' 등을 비롯하여, 무려 40여 곳에 '아버지 없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이 드러나 있더군요.
아버지 없는 자, 즉 사람과 새는 다르지...않은가...?...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으나, 아니다, 까마귀에게도 먹이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어미 잃은 새들, 그것도, 갓난 새끼 새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리오...! 라는 생각으로 바로 바뀌더군요.
그와 동시에, 앞서 말씀 드린 출 22:22 성경 말씀을 비롯한 40여 개의 해당 구절들을 하나씩 차례로 읽어 보았습니다. 찌리~ㅅ하게 전해져 오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말입니다.
2022-07-11 15:06:31 | 최영오
흐미~...!...@@...@...... (<- 무엇인가로 얻어맞은 느낌)
참으로 의미심~~~장한 좋은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 ~ ^^
2022-07-11 12:02:43 | 최영오
바둑 사랑과 하나님 사랑
나의 유일한 취미라면 바둑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바둑을 배우기 위해서 일간신문을 구독했다. 신문을 구독한 것은 신문에 나오는 바둑기보를 보기 위해서였다. 신문이 도착하면 제일 먼저 바둑기보를 보는 기쁨이 있었다. 성인이 돼서는 월간 바둑 잡지를 구해서 기보대로 바둑판에 놓아 보기도 하고, 사활문제집도 가끔 사서 보기도 했다.
그렇게 취미로 시작한 바둑이 지금은 아마추어 5단 정도된다. 통계적으로 아마추어 5단은 5천 명 중에 1명 정도된다고 한다. 요즘은 바둑 앱이 잘 개발되어 있어서 다운받아서 가입하면 곧바로 원격으로 바둑을 둘 수 있다. 전혀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도 언제든지 둘 수 있는 좋은 시대다.
출퇴근을 할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집에서 직장까지는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핸드폰으로 바둑을 두면 한 판 정도 둘 수 있는 시간이다.
며칠 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강적을 만나서 대마가 심하게 몰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수읽기를 잘해야 한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겨우 타개를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려야 할 역을 2개나 지나고 있었다. 순간 어찌된 일인지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둑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있는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면서까지 하나님 생각에 몰두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그게 우상이라는 말씀이 떠오르면서 머리를 무엇인가로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바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안 것 같다. 건너 편으로 가서 다시 되돌아 오는 가운데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2022-06-30 14:02:36 | 이규환
사람은 급할때는 하나님을 자기도모르게 찾으면서 그 일이 해결되면 " 내가 언제?" 하지요...
세상이 마음에 가득 들어있어서요.
들을 귀를 주시기를~
2022-06-27 07:37:03 | 이수영
몇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는군요.
1. 대책 없는 친구 분...아닌가 싶군요. ^^ 죽기는 겁나고 체질에는 안 맞고...체질에 맞아서 죽는감? ㅋㅋ (농담입니다 ^^)
2. 어떤 점이 체질에 안 맞는지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풀어 주심이 어떨런지...싶습니다만. ^^3.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라는 배드로전서 말씀 중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두려움으로...두려움으로, 그 구절이 무겁게(두렵게?) 느껴지는군요.
좀 아는 척 껍적거리다가 하나님 말씀 잘못 퍼뜨리는 죄 짓지 말라...는, 그런 뜻의 말씀으로 이해되기에 말입니다.
(그런 뜻 아니라면(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면) 나증에 제대로 갈챠주세요 ~ ^^)
2022-06-27 00:21:41 | 최영오
귀한 책에 대한 소중한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매님 ~ ^^
2022-06-26 23:59:44 | 최영오
양심을 인두로 지진 사람들...진짜로 무~서운 거시기들이죠.
아참!
경기도 동탄에 있는 북경반점이란 곳에서 멸공짜장면이란 메뉴를 내놨는데엄~청시리 잘 팔린데요. 고객들이 줄을 서는 바람에 그 집에선 배달 안한답니다.
중국집에서 배달 안한다? 그건 완전 맛집이죠. 완전 대~~~박나고 있답니다.
어쨌든, 공산주의자들, 빨거시기들은 싸그리 없애는 것이...! ^^
2022-06-26 23:45:14 | 최영오
정혼과 결혼 사이에 있는 교회...라는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나 할까요. ^^
그러니까, 휴거 그리고 정식(^^) 혼인 잔치에 제대로 이를 때까지
순결한 한 처녀, 즉 교회의 멤버로서 똑바로(^^) 살아라는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이랍니다.
좋은 말씀에 감사 드립니다, 형제님 ~ ^^
약간 다른 얘깁니다만,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야고보서 4장 4절의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가
한글판 NIV 성경에서는 '간음하는 여인들아' 로 되어 있더군요.
그들 영어원문에는 '너희 간음하는 사람들아(You adulterous people)' 라고 되어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니까...우리나라 사람 어느 누군가가 그렇게 바꿔 버렸다는 뚯이겠죠...?
엄청 찔리는 게 많은 '남자'의 소행 아니었을까...싶더군요.
기가 찼다고나 할까요... ^^
감히 성경 지식 어쩌고 하려는 것이 아니오라
그냥
웃자고 해 본 말이었습니다 ~ ^^
2022-06-26 23:14:33 | 최영오
결론 또는 핵심 내용으로 보여지는 마지막 문단...차~암 의미심장한 말씀이로군요.
잘 읽었습니다 형제님 ~~ ^^
2022-06-26 23:01:45 | 최영오
죄인인 우리들을 직접 찾아와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슴 찡~하게 울려오는 뜨거운 느낌이 있군요.
좋~은 말씀에 감사 드립니다, 형제님 ~ ^^
2022-06-26 22:50:50 | 최영오
공감이 갑니다. 그래도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낙심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서 친구를 지옥불에서 구해내는 큰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꾸준하게 글을 올려서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분들에게 기쁨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2022-06-25 10:01:27 | 이남규
구원이후 성화가 시작되는데 거듭난 사람이면 누구나 육신과의 갈등을 겪고있지요.,
구원에 목말라 하는 일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화에 대한 갈망없이 성화를 알지 못하지요..
2022-06-24 15:36:34 | 이수영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구원에 이를까?
지난 주에는 친구를 잃을 뻔한 일이 있었다. 친구가 뇌졸중으로 119구급차에 실려갔다는 문자를 받았다. 다행히 응급조치를 잘해서 하루 만에 별일 없이 퇴원했다. 퇴원한지 이틀 후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좀 만나자는 것이다.
만나자는 장소에 갔다. 그 친구는 피곤해 보였다. 만나자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친구는 “너는 평소에 죽음을 초월했다.”고 말하는데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병원에 하루 입원해 있는 동안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 보게 되었고,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두렵다고 했다. 이 친구는 이번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몰랐느냐?”며 말 문을 열었다. 인간은 사고가 나거나 병이 들어 죽게 된다. 죽음은 남녀노소, 장소, 시간에 구애없이 찾아온다. 죽음은 인간이 체험하는 것 중에 마지막 코스다. 인간의 죽음은 공포다. 이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공포 극복 문제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래 걸리기도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영원히 산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거나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 인간은 영혼육이 있는데, 죽음은 영과 혼이 육에서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은 육이다. 영과 혼이 잠시 사용해 온 장막이다. 이때 영과 혼은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을 나는 믿는다. 천국과 지옥을 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성경은 인간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준다. 또 사람이 왜 죽는지 가르쳐 준다. 죄 때문에 사망이 온다. 죄 문제를 해결하면 사망의 문제도 해결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희생했다. 그리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다. 야구에서 구원투수가 있듯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믿으면 된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내가 평소에 죽음을 초월했다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사후대책은 지금 당장 마련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나는 지금 네가 사후대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하는 말,
“그거 교회 얘기잖아! 전에 교회 몇 번 다녔었지, 그런데 체질에 안 맞아서~~~”
며칠 전에 생사를 넘나들던 친구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구원에 이를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베드로전서 3장 15절)
2022-06-23 15:10:01 | 이규환
제목 : 구원 그 이후
지은이 : 박영선
'하나님께 열심' 이라는 구호에 몸부림치던 시절, 박영선 목사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주제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에 천착해 왔다. 그가 믿음의 주체와 원동력을 신자가 아닌 하나님으로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만을 끈질기게 붙들어 온 결과이다.
젊은 시절, 울법 준수와 명분 강조가 전부였던 당시 설교 단상에서 그는 믿음과 성화와 은혜를 성경이 말하는 자리까지 파헤치기 시작했다. 초기 설교부터 지금까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을 거침없이 추적하여 하나님의 열심과 일하심의 신비를 풀어내며, 이를 아는 신자의 명예와 자랑을 역설하고 있다.
현재 그는 30년간 몸담아 온 남포교회에서 설교 사역을 계속해 오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하나님의 열심>, <박영선의 다시 보는 로마서>, <박영선의 욥기 설교>, <주의 말씀에 둘러싸여>, <박영선의 기도>, <인생> 등이 있다.
<독후감상>
나는 이 책을 온라인으로 구매했다가 그동안 바빠서 보질 못하고 최근에 읽게 되었다. 책장에 꽂힌 책 제목을 볼 때마다 책의 내용이 몹시 궁금했는데 책장을 펼치니 지은이의 삶과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먼저 깨달은 자가 토해내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 엿보였다.
이 책은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의 '수준 확인'을 시작으로 해서 '신자의 질그릇', '영적 싸움', '신자의 적극성', 신'자의 훈련', '신자의 성숙' 등등
그리고 각 장은 성경의 귀절이 먼저 나오고 이 성경 말씀을 들어올려 지은이는 쪽집게 같이 신자들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고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열변을 토하듯이 신앙이 성장하는 문장으로 풀어놓았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쓰여져 있는데 목사인 지은이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 같다.
" 이 책에서는 많은 신자가 고민하는 신앙의 '성장'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이 문제는 예수를 믿고 난 후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큰 숙제거리입니다. "
1장에서는 우리의 출발선에 대하여 <상한 갈대는 꺾지 아니하며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사42:3)>를 보고 성경은 인간은 상한 갈대요 연기나는 심지로 묘사하고 있음과 <온 누리를 비춰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니라> 으로 전개하는 것이 얼른 와닿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시고 선언하신 목적지와 그것을 이룰 수 없는 나의 상태가 너무도 이율배반적이고 도저히 연결될 수 없어서 느끼는 황당함으로 고민하는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갈등이 없는 자에게는 신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를 보며 <내가 꺼져 가는 등불이며 상한 갈대임에도 불구하고 하늘 나라에 갈 것이라는 약속이 이해되지 않으니까 의문도 버리고 갈등도 버리는 이상한 지점에서 대강 눈 감고 외면하고 살기로 결심해 버립니다.>를 보고나니 막연했던 그 갭의 차이가 명확해 진 것 같았다. 이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출발 지점을 고백하고 <하나님, 저는 이렇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며 그 길은 하나님이 이끄실 것이고 이것은 신자에게 요구되는 배짱이라고 하는 지은이가 참 멋있다.
2장은 '자의식'인데 표현이 정말 리얼하다.
"우리는 믿는 사람답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 때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니까 '척'이라도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기도 많이 하는 척, 고민 없는 척, 믿음 생활을 정당하게 하는 척을 합니다. 믿음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서로 곤란해 집니다. 서로 아픈 곳은 건드리지 말자는 묵계입니다"
아마도 지은이는 목회를 하면서 신자들의 상태를 보고도 말로 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나보다.
<누군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한다면 "그래, 그래서 예수 믿는다"하고 뻔뻔하게 대꾸하는 것만큼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배짱입니다> 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그동안 도덕적 차원을 따지는 믿지않는 자들에게 점잖게 일갈을 날릴 수 있는 좋은 대답을 발견한 것 같다.
지은이에 대한 솔직한 고백도 있다.
"설교를 마치고 나면 늘 교양 없고 거친 제 말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람이 덜 되어 빨리 고치지 못하고 그다음 주에도 동일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럼에도 계속 그 자리에 섭니다. 바로 설교하는 맛 때문입니다."
감격을 맛으로 비유하며 '"나는 하나님의 졸병이다"라고 고백하는 담대함이 신앙을 성숙하는 데에 필수적인 도약지점이며 하나님 편에 서는 이 감격, 이 맛, 이 자랑이 아무리 나쁜 지적에도, 또 스스로 갖는 좌절감에도 자폭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는 말에 그 마음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자의 질그릇'에서는 늘 기억하며 늘 새기고 싶은 귀한 글이 있었다.
"죄의 유혹에 직면할 때 인간의 시각과 촉각이 얼마나 나약한지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이놈의 질그릇이 아직도 이러는가'하고 놀라지만 성경은 그 문제가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고쳐져서 신앙이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상태를 아는 만큼 자기의 주권을 하나님에게 이양할 때 신앙이 성숙합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시;62:8)> 말씀이 생각났다. 생각할수록 하나님은 너무 좋으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매일 확인해야 한다는 부분을 보았을 때 나는 정신차려서 글을 읽었다. 그리고 찔림도 있었다.
" 모든 책임을 집어던지고 갑자기 주의 일만을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많은 부분을 놓치고 세상을 위하여 할애하고 사는 것에 대한 성경의 지적을 아프게 받자는 말입니다. 돌이키십시오. 자녀가 대학교에 못 가면 어떻습니까, 똑똑한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똑똑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녀를 기르지는 마십시오."
지금은 우리 아이 둘 다 결혼했지만 읽어볼수록 마음이 참 찔린다.
또, 내가 이 책을 보면서 감명깊게 본 부분은 바로 여기이다.
"어제 하나님이 도와주신 은혜로 승리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제의 일입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 놀아도 괜찮다는 안심으로 이어지지 않기 바랍니다. 어제까지 받은 도움으로 오늘과 내일의 승리를 위한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훨씬 뒷 장에 나오는 얘기이지만 나는 이 부분과 연결하여 읽었다.
"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후의 생애가 이전과 다르기 때문에 결단하고 문턱을 넘어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문턱에 앉아 있습니다. 모두 철로 변에 앉아서 하나님이 6.25때 나를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자갈로 공기놀이나 하고 있습니다. 넘어선 그 다음 생애가 없습니다. 자랑이라고는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내가 그때 얼마나 몹쓸 죄인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어떻게 은총을 베푸셨는가 하는 이야기뿐입니다."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하여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부분 같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마지막을 장식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요구에 순종해야 하는 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 성장에 있어서 출발점입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의 갇힌 자가 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을 때에 얻은 소명에 합당하게 걷고>
생각만 하지 말고 행하십시오. 행하기 위해서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길에 들어온 것은 마음에 감동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놓아 주신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 행해야 합니다."
이 책을 덮고나니 18편의 설교를 들은 것 같다.
구원 그 이후.....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럼 나는? 이라는 질문을 내게 던져보게 한 귀한 책이었다.
2022-06-23 00:00:40 | 이정자
공산주의의 통일전선 전술
한민호 국장의 강의를 들으면서 예전에 공산주의 이론을 강의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미 싹이 잘리고 사라졌어야 할 낡은 이념이 아직도 버젓이 스멀스멀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강의 중에 언급된 공산주의 통일전선 전술에 대해서 좀 더 추가하고자 한다.
공산당의 혁명 목적은 정권 타도다. 공산당은 혁명에서 강자인 정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서 당연히 남의 힘을 이용하게 된다. 남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전술, 이것이 곧 동맹 전술(통일전선 전술)이다. 여기에 대하여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훨씬 힘이 센 적을 이기는 일은 설사 아무리 작은 가능성일지라도, 일시적인, 동요적인, 위약한, 믿음직스럽지 못한, 조건적인 동맹자라도 좋으니까, 대중적 동맹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반드시 가장 면밀하게, 주의 깊게, 조심스럽게, 솜씨 있게 이용하여 비로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좌익소아병』 중에서
공산당이 자신들보다 훨씬 힘이 센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끌어들여서 이들을 제 편으로 삼아 이용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이 아무리 작은 세력도 이용해야 하며, 또 일시적이든, 확고하지 못한 것이든, 위약한 것이든,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이든, 조건이 달린 것이든 간에 어쨌든 이용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이용하되, 가장 면밀하게, 주의 깊게, 조심스럽게, 솜씨 있게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술의 중요성에 대하여 레닌은 또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마르그스주의를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자이다. 꽤 오랜 기간 그리고 가지각색의 정치 정세 속에서 이 진리를 실제에 적용하는 능력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자는 혁명계급을 돕는 길을 아직 배우지 못한 자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잡기 전에도, 잡은 뒤에도 다 같이 적용된다.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좌익소아병』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아무리 잘 아는 체하더라도, 만일, 이 동맹 전술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모르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것 없다는 얘기다. 또 만일 말이나 글로는 이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혁명 운동의 실제 투쟁을 통해서 이 전술을 현실에 적용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여러모로, 꽤 오랫동안 실천적으로 증명하지 않은 자는 아직도 공산주의 혁명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이 전술의 중요성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기 전이나 잡은 후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인은 이 전술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가지의 활동 영역에서 비공산주의자와 동맹을 맺지 않고서는 공산주의 건설에서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관하여』 중에서
이렇게도 공산주의자들은 동맹전술을 중요시하고 있다. 모든 순간에 있어서 사람을 볼 때는 언제나 이용물로서만 보고 이용 가치로써만 평가하여 상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당이 이 전술을 사용할 때, 그 이용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레닌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설사 아무리 작을 가능성일지라도 동맹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사람, 즉 모든 사람이 이용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의 모든 계층-학생, 청년, 일반 지식층, 여성, 군대, 농민, 노동조합, 각종 예술단체, 과학기술단체, 언론 기관, 관리는 물론 심지어는 보수 정당과 자본가까지도 이 전술의 이용 대상이 된다.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은 강력한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이질적인 세력과도 가능하다면 서슴없이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또 실제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이용 대상과 동맹을 맺을 때도 다른 계급이나 다른 그룹들을 공산당과 혼동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이 동맹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조건적이란 것을 레닌은 말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자와 여러 반정부적 그룹과의 연대성을 갖지만 언제나 노동자를 타자로부터 구별하고 이 연대성이 일시적이며 조건적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중에서
마르크스는 한 술 더 떠서, 공산당이 다른 세력들과 동맹을 맺고 싸운 덕택으로 적과의 투쟁에서 이기게 되면 승리한 다음 순간부터 그 동맹자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투쟁 중에도, 투쟁 후에도, 노동자는 모든 기회에 부르조아 민주주의자의 요구와 함께 자기 자신의 요구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승리한 최초의 순간부터 불신은 자기의 이제까지의 맹우를 향하여, 공동의 승리를 독점하려고 하는 당파를 향하여 가져야 한다. 『소셜 데모크라트』 중에서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은 일시적으로나마 동맹자가 될 수 있지만 이 싸움이 일단 승리로 끝나게 되면 그 첫 순간부터 이제까지의 맹우(장래나 그 밖의 일에 대하여 서고 굳게 맹세한 친구)를 불신의 눈초리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의 전과를 그 동맹자가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동맹 전술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력한 적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이질적인 세력과도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것을 이용하되, 어떤 경우에서도 이론, 강령, 기치 상의 타협이나 양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승리한 첫 순간부터 이제까지의 맹우를 믿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전술은 철저한 불신 위에서의 철저한 이용의 전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 『공산주의 본질』, 윤원구 지음, 건국이념보급회 출판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산주의 통일전선 전술에 휘말리면, 알면서, 모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그들에게 제공하게 된다. 이렇게 정보를 제공하게 되면 이미 포섭된 것이고, 나중에 반드시 간첩 혐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이 전술에서 보듯이,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들은 부모도 버리고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라는 사상무장을 받기 때문에, 이들에게 선한 양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양심을 인두로 지진 사람들이다.
2022-06-16 13:23:54 | 이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