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Talent)과 은사(Gift)
1. 재능(Talent)
재능을 일반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이나 소질’ 이라고 정의한다. 갤럽은 『강점혁명』에서 강점을 구축하는 한 가지 요소로서 재능의 정의는 더욱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내려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재능이란 생산적으로 쓰일 수 있는 사고, 감정, 행동의 반복되는 패턴이라고 정의한다.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강하다면 그것은 재능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이것 역시 재능이다. 인내심이 강하다면, 그것 역시 재능이다. 책임감이 강하다면, 그것은 재능이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고, 감정, 행동 패턴이 생산적으로 쓰일 수 있다면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하면 재능은 누구나 있는 것이며, 흔하디 흔한 것이 재능이다.
2. 재능의 단서
1) 무의식적인 반응
내가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맨 처음에 나타낸 무의식적인 반응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머리 속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 감정, 행동이야말로 재능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실마리다.
2) 과거 특정 사례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난 과거에 있었던 특정한 사례를 떠올려 본다. 예전에 경험했던 사례를 선택해서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과제를,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결과를 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혼자서 하루종일 집에서 무엇을 하면서 보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루하고 따분했을 수도, 너무나 편안해서 행복감을 느겼을 수도 있다.
3) 동경
동경(Yearning)은 무엇인가를 늘 마음 속에 두고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동경은 재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어렸을 때 어떤 활동에는 끌리고 어떤 활동은 이상하게 싫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동경하던 일을 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는 이유는 사회적 또는 재정적 압박 때문이다. 누구나 오랫동안 동경의 대상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재능을 발견하기 원한다면, 동경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4) 학습 속도
학습속도를 보고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재능의 존재와 정도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속도다. 신속한 배움은 한 사람의 재능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이다. 재능을 알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일을 빨리 배우게 되었는지, 어떤 행위가 금방 쉽게 익숙해지는지 살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들은 매우 어려워하는 것을 나는 너무 쉽게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재능이 있는 것이다.
5) 만족
내가 무엇에서 만족감을 느끼는지 본다. 재능을 발휘할 때는 기분이 좋아진다. 따라서 어떤 활동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진다면, 재능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을 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3. 은사(Gift)
위와 같은 재능이 교회로 넘어오면 은사(Gift)가 된다. 앞에서 재능은 흔하디 흔한 것이라고 했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은사를 선물로 받는다. 굳이 재능과 은사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재능은 개인을 위해서 사용하지만, 은사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은사가 없는데도 은사가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하려고 의욕을 앞세우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하지만, 은사가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한다. 요즘 사역(섬김)에 대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어떤 은사를 선물로 받았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2022-10-20 11:41:09 | 이규환
이론으로만 알고있던 매슬로우 주장이 확실히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이든지 공과는 양측면이 다 논의 되어야 하지만 한가지 목적으로 과오를 크게 부각시키고 그렇게 교육받았었지요.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이 언제나 바로 잡힐지~
식민사관으로 점철되어 온 우리의 역사도 바로 알려지기를 .....
2022-10-13 11:00:08 | 이수영
『박정희의 위대한 5.16 혁명』을 듣고
전에 ‘고기 먹으로 교회에 간다’ 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기는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말한다. 개인마다 어려운 부분은 다를 수 있겠지만,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있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는 이사야서, 요한계시록이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다. 처음에는 도대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어려운 부분이 우리 사랑침례교회에 와서 해소되었다. 너무 감사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우유를 먹는다. 조금 성장하면 이유식을 먹는다. 좀더 성장하면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다. 많이 성장하면 드디어 고기를 먹는다. 고기는 부드러운 고기도 있고 딱딱한 고기도 있다.
구원을 받으면 다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게 된다.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된다(베드로전서 2장 2절). 구원을 받으면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 설교를 듣게 되는데, 처음에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읽다보면 하나 둘씩 이해가 되고, 점점 더 깊게 이해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나 성도들이나 다 일정한 단계를 밟으면서 성장한다는 점이다.
김용삼 기자의 강연 내용 중에,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려면 1인당 국민소득이 4천~7천달러는 돼야 한다는 연구결과(로버트 달)와 당시 대한민국은 하루 세끼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이슈인데,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민주주의를 주장했다는 대목에서 매슬로우(Maslow) 욕구 5단계 이론(needs hierarchy theory)이 떠올랐다. 아래 그림을 보자.
이 이론에 따르면 욕구는 하위욕구(부족해서 생기는 욕구)와 상위욕구(더 성장하고 싶어서 생기는 욕구)로 나뉘고, 인간의 욕구는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배열돼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다음 단계로 욕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에게 민주시민의 자질을 갖추라고 요구하면 설득력이 있을까? 하루 세끼가 걱정인 사람에게 민주주의가 눈에 들어올까? 우리나라의 발전단계는 바로 이 이론이 잘 설명해 준다. 박정희 대통령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게 되면 깔끔한데, 독재 운운하며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이들에게 매슬로우 욕구 5단계를 한 번만 들여다 보라고 권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목사님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기록할 당시의 배경(상황)과 수신자를 알고 읽으면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접근이 어떤 사안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정도(正道)가 아닌가!
2022-10-12 15:43:38 | 이규환
감정은행계좌
삶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계좌로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2022-10-09 03:05:53 | 최영오
샬~롬
이 아침 홈피에 들어와 읽은 이 글이 너무도 마음에 와닿아 가족톡방에 올렸습니다.
매번 좋은 글로 나눠주셔서 감사 합니다.^^
2022-10-05 08:36:43 | 이명숙
일반은행 계좌와 비교해서 설명해 주시니 쏙쏙 이해가 되네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화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2-10-04 17:23:57 | 김세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이해도가 깊어 지는 것 같아요.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야 가장 후회하는 것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고 한대요.
언행의 일치는 감정계좌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가치도 높여 주구요.
오래 같이 한 성도들이 귀해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2022-10-04 15:39:36 | 이수영
감정은행계좌란 무엇인가?
감정은행계좌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에 나오는 개념이다. 우리는 은행계좌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은행에 계좌를 만들고 이를 통해 예입을 하며 필요할 때 인출할 수 있도록 잔고를 남긴다. 감정은행계좌란 인간관계에서 구축하는 신뢰의 정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공손하고 친절하며, 정직하고 약속을 지킨다면 우리는 감정을 저축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신뢰가 높아지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그러한 신뢰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고, 무례하고, 말을 막고, 과민반응하고, 무시하고, 독단적이며, 위협하고, 나아가 실력 없이 뽐낸다면 우리의 감정은행계좌는 잔고가 바닥이 나거나 적자가 된다.
1. 일반은행계좌와 감정은행계좌의 차이점
1) 일반은행계좌는 은행에 가면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어 준다. 감정은행계좌는 인간관계가 시작되면 상대방이
계좌를 만든다.
2) 일반은행계좌는 돈을 예입하고 돈을 인출한다. 감정은행계좌는 감정이 예입되고 감정이 인출된다.
3) 일반은행계좌의 잔고는 돈이다. 감정은행계좌의 잔고는 신뢰다.
4) 일반은행계좌는 내가 관리한다. 감정은행계좌는 상대방이 관리한다.
5) 일반은행계좌는 내가 예입하고 내가 인출한다. 감정은행계좌는 상대방이 예입하고 상대방이 인출한다.
6) 일반은행계좌는 인출을 하지 않으면 잔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감정은행계좌는 인출을 하지 않아도 잔고가
빠져 나간다.
7) 일반은행계좌는 예입하는 만큼 잔고 쌓인다. 감정은행계좌는 내가 예입한 만큼 잔고가 쌓이지 않으며,
상대방이 예입의 값을 결정한다.
8) 일반은행계좌의 잔고는 내가 알 수 있다. 감정은행계좌의 잔고는 내가 알 수 없고, 상대방만 알고 있다.
2. 감정은행계좌 예입 수단
1) 상대방에 대한 이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예입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모든 다른 예입 수단의 핵심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해야 예입이 될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 있다. 예입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중요한 만큼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2) 사소한 일에 관심
약간의 친절과 공손함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반대로 작은 불손, 작은 불친절, 하찮은 무례 등은 막대한 인출을 가져 온다. 인간관계에서의 커다란 손실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비록 외적을 대단히 거칠고 냉담하게 보이는 사람도 내적으로는 민감한 느낌과 감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소한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의 감정은행계좌는 금새 인출되고 만다.
3) 약속의 이행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감정 예입 행위이며 약속을 어기는 것은 중대한 인출 행위다. 사실 어떤 사람에게 대단히 중요한 약속을 해 놓고 어기는 일보다 더 큰 인출 행위는 없다. 그런 인출 행위가 발생하고 나면 다음에 약속을 해도 상대가 믿지 않는다.
4) 기대의 명확화
목표에 대한 불분명한 기대 역시 의사소통과 신뢰를 손상시킨다. 거의 모든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은 역할과 목표에 대한 갈등과 애매한 기대 때문에 발생한다. 누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룰 때, 기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에서 어긋난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우리는 그에 대해 실망하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잔고를 감소시킨다.
5) 언행일치
개인의 언행일치는 신뢰를 가져오고 감정은행계좌에 많은 종류의 예입을 가능케 하는 기초가 된다. 언행불일치는 높은 수준의 신뢰 계좌를 만들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크게 손상시킨다.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소한 것에 관심을 보이며, 약속을 지키고, 기대를 명확하게 했다하더라도 이중적인 인격을 가졌다면 결코 신뢰를 저축할 수 없다.
6) 진지한 사과
때로 우리는 감정은행계좌에서 인출을 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기 그에게 진지하게 사과하게 되면 인출이 오히려 예입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진지할지라도, 반복되는 사과는 여지없이 즉시 인출된다.
감정은행계좌와 관련하여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특히, 나를 포함한 남편들은 평소에 아내에게 엄청난 인출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비싼 선물을 해주면 한 방에 만회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다. 남편은 ‘100’을 예입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내는 ‘5~10’정도 예입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신뢰는 쌓기는 힘들지만 잃는 것은 한순간이다. 꾸준한 예입만이 답이다.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너희도 그들에게 그대로 하라.(마태복음 7장 12절)
2022-10-04 11:55:12 | 이규환
최악의 상실을 겪은 후,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고 한층 차원 높은 심리적 상태를 이루게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에 틀림없지 않은가...결국은, 상실=위장된 은혜...아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a Grace Disguised', 즉 '위장된 은혜'라는 원제를 붙인 것 같습니다만...글쎄요...형제님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 의아하게 만들 만한 문제의(^^) 책 제목...아닌가 싶군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상실 안겨주신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욥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신이 겪었던 모든 고통들을 '위장된 은혜'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하나님 또한 그런 의미로 그토록 큰 고통들을 그에게 허용하신 것 아니지 않느냐...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 그러니까, '위장된 은혜' 라면서 '상실'의 고통을 안겨주시는 분...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너무나도 큰 상실 겪은 사람이 상실 이후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실, 즉 고통 자체(하나님과는 무관함)를 하나님과 결부, 특히 은혜와 결부시키는 일...그런 일은 크리스천으로서의 경계할 일...아닐까...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하나님 말씀 아는 지식 일천한 사람이 감~히 밝히는 지극히 짧은 생각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제목 갖다붙인 번역자 분의 생각 또한 그런 것...아니었을까...라는 생각 듭니다만.
워낙 의미심장한 독후감 올려주셨다보니 책 제목부터 시작하여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군요. 책 읽으시는 동안 형제님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들...에 담긴 깊은 뜻 또한 거듭 음미해 보게 되는군요. 성경은 확실히 인생 매뉴얼이다...그 말씀 멋지군요. ^^
올려주신 독후감 자~~~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2022-10-01 22:44:56 | 최영오
아직 책을 읽어 보지 않았는데, 꼭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09-28 13:14:57 | 김세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9-27 11:44:35 | 이남규
일곱 아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과 부활을 말하며 차례로 죽어가고 그 모든 것을 본 어머니도 주님을 바라며 순교한 얘기를 읽으면서 누구나 다 그렇게할 수 없다는 생각- - 큰 충격이었다면 ,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도 있을 일들이기에 주님만을 내맘속에 가득 채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어려움 겪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함께 해주는 것 밖에는 말은 힘이 없어요.
2022-09-27 11:06:28 | 이수영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이 책의 원제는 a Grace Disguised다. 위장된 은혜다. 하나님이 은혜를 가장하여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의미라고 이해되는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맞는 말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일단 책 속으로 들어갔다.
이 책은 상실이라는 비극적인 경험과 그 때문에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본인이 겪은 상실을 회고하면서 상실이라는 것이 비록 개인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책 초반에 상실의 내용이 나온다. 어느 날, 한 집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어머니, 아내, 딸 등 3대를 동시에 잃은 사건이 그 상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고 그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 즉, 죽음으로 인해 배우자, 가족 그리고 지인들을 잃는 경험을 한다.
사고 당시의 처참한 모습, 사고를 수습하는 모습, 장례식을 치루는 과정, 수많은 사람의 위로와 격려 등을 소개하면서 약 3년 동안의 심경을 15개의 장(주제)으로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상실이라는 경험은 우리가 최후로 경험하는 상실, 곧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우리 삶을 주장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다. 보다 결정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상실에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다. 상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그 수준과 방향과 영향력이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상실을 부인(상실을 피함)하거나 타협(조금 늦게 출발했더라면)하거나 몰입(틈만 나면 TV, 술, 폭식 등)하거나 분노(복수를 벼르는)를 하는 것은 영혼의 피폐만 가져 올 뿐이라는 것이다. 고통을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방도도 없다. 부인과 타협과 몰입과 분노는 결국 우리를 덮쳐올 것을 억지로 막아보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고통은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난다. 상실이라는 자체가 부인할 수 없는 아주 끔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반응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런 반응이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 아님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는 고통을 선물이라고 한다. 고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표다.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오랫동안 사랑과 선함과 슬픔을 거부하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숨이 붙어 있을지는 몰라도 죽은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다. 고통이 선물인 이유는 그것이 신체적인 고통이든 아니면 마음의 고통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통 속에서 은혜를 말한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부터 크리스천으로 살아왔지만, 그날 사고 이후로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 실체로 내게 다가오셨다고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거나 하나님께 나 자신을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부담에서 거의 벗어났다. 그러면서도 전심전력으로 그분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럽다. 은혜가 나를 변화시켰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내 마음을 열어 내 삶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였고, 그분이 다스리시는 영역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부활을 언급한다. 나는 과연 부활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이 부분에서 읽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의 괴로움이 우리만 겪는 게 아님을 스스로에게 깨우친다. 고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다. 세상이 이곳에 끝나고 더 이상의 세상이 없다면, 죽음이야말로 최후의 승리이며 우리는 슬픈 운영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여러 세대에 걸쳐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을 지났고, 앞으로도 다음 세대들이 또 이 길을 밟고 갈 것이다. 그들 모두 지금 우리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담고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중심에 계신다. 그분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다시 한 번 밝은 빛이 동터올 것이다. 소망도 돌아올 것이다. 거기서 나는 다시 살아갈 이유와 믿음을 버리지 않을 용기를 얻는다. 다시 한 번 나의 영혼은 슬픔뿐 아니라 소망으로도 가득 찬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큰 믿음과 전에 가져보지 못한 기쁨을 얻는다. 여전히 내 안에 슬픔을 담고 있으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저자처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래 내용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들이었다.
첫째, 상실을 예상하고 살아야 하겠다. ‘나는 아닐 것이다’ 보다는 상실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Plan B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둘째, 있을 때 잘 해야겠다. 관계를 잃어버린 경우라면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도 그 관계 자체가 사려져버렸기 때문에 후회가 막급하다. 관계가 안 좋은 상태에서 상실을 겪을 경우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집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난 직후에 배우자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셋째, 상실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은 신중히 해야겠다. 저자는 어설픈 위로의 말보다는 그냥 옆에 있어만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감기 환자가 암 환자에게 “별거 아니니 잘 견뎌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암 환자가 감기 환자에게 “별거 아니니 잘 견뎌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위로가 될까?
넷째. 성경을 자주, 잘 읽어야 겠다. 저자는 욥과 요셉의 고난과 고통을 언급한다. 또 히브리서에 나오는 큰 구름같은 증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언급한다. 성경에서 힌트를 얻고 용기를 얻었다. 성경은 확실히 인생 매뉴얼이다.
Gerald L. Sittser, 그는 wounded healer!
2022-09-27 10:35:27 | 이규환
역시 놀라움 속에서 읽으셨군요.
그토록 놀라운 진리의 말씀 너무나도 늦게 접했...었음을 지금도 후회하곤 한답니다.
주님 은총 늘 함께하는 복된 날들 보내세요 ~ ^^
2022-09-26 20:37:42 | 최영오
약속을 얼마나 어겨가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로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2022-09-26 20:28:37 | 최영오
저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책은 하나도 보질 못하다가 성경책을 보고 놀라고! 사람의 기원이 있는 것을 보고 또 놀라고!
성경을 얼마나 빠르게 읽어나갔는지요!
2022-09-25 06:23:22 | 이수영
"언제 우리 집에 와서 식사 합시다."
남편이 만나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
성도들과 헤어지고 오면서
"왜 내게 의논도 안하고 그렇게 말하느냐?"
고 말다툼 했었네요.
"그게 그냥 인사라고 ,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다"
고 변명해서 왜 빈껍데기 말을 하냐고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고
다툰 적이 있어요.
사회생활 하면서 다들 그런데 왜 별일도 아닌데 말꼬리 잡고 그러냐고...
결론은 맘에도 없는 말은 하지말라 로 마무리 지었었고 이후로
내가 듣는데서는 조심하는지 그 날 이후로는 그 일로 다툰 기억은 없어요^^
요즘은 밖에서 만나 식사하니 우리 집에서 식사하자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해야겠지요..
2022-09-25 06:13:27 | 이수영
인간은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
지금은 그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결혼할 때는 아내될 사람에게 “나에게 시집오면 절대로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킨 사람은 거의 없다. 또 상대방과 헤어질 때, “조만간 식사 한번 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조만간이 언제인지 소식이 없다. 인간은 과연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 성경은 무어라 하는지 보자.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굳은 맹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 총대장 비골을 데리고 아브라함을 찾아와 서로 거짓을 행하지 말자며 화친을 요구한다. 이때 아브라함은 화친의 조건으로 내가 판 우물에 더 이상 손대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런 즉 이제 너와 내 아들과 내 아들의 아들에게 거짓을 행하지 않겠다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두고 네게 맹세하라. 오직 내가 네게 베푼 친절에 따라 너도 나와 네가 머물러 온 땅에 베풀 것이니라, 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 하고, 아브라함이 양들과 소들을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그 두 사람이 언약을 맺으니라. 아브라함이 양 떼에서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너 놓으니 네가 내 손에서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받을 것이요, 이로써 그것들이 내가 이 우물을 판 것에 대하여 내게 증거라 되리라. 하고 그 두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그가 그곳을 브엘세바라 하였더라.(창세기 21장 23, 27, 28, 31절)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이 약속은 대대손손(아들의 아들까지) 유효한 것이었다. 그러나 창제기 26장에 오면 이삭이 등장하는데,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막고 흙으로 메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너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한즉 우리에게서 떠나가라.‘고 한다. 굳게 맹세한 약속을 한 세대를 못 넘기고 어기고 만다.
우리는 약속을 너무 쉽게 한다. 그리고 그 약속을 대수롭게 여기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묻지도 않았는데도 “내가 이 약속을 안 지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강하게 말하기도 한다. 확인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확인하면 대한민국에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약속은 하지 않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내일 오전 11시에 만나자고 하는 그런 약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22-09-22 12:45:09 | 이규환
말씀 묵상에 이어 시작(詩作)까지 하시는 모습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2022-09-21 22:08:47 | 최영오
철 들고나서부터 대략 50 년 세월 동안, 그러니까, 엄청나게 긴 세월 동안 교회 앞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서 다니거나, 또는 부득이하게 교회 앞 지날 때면 십자가 안 보려 고개 돌리고 지나가는 반면, 보이지도 않는 불상들 쪽 바라보며 양손 모아 고개 숙인 다음 갈길 가곤 했던...참으로 가증한 죄인이었던 한 인간을 완전 180 도 돌려세워 버리신 하나님 말씀에 관한 글,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성경 구절들에 관한 글입니다.
그 하나는 홀로 세상을 주관하시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스스로 유일하신 참신이심을 선언하시는 말씀...에 관한 아래 구절들이었습니다.
이사야서 41 장 21 ~ 24 절 (요약)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며 이전 일들이 어떠했는지 보일지니라
너희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줌으로써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게 하라
보라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고 너희 일은 헛것이며 너희를 택하는 자는 가증한 자니라
보라
그들은 다 헛것이며 그들의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니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혼돈이니라
위 말씀 앞에서 우상 숭배로 점철된(?) 삶, 그 헛되고 가증한 제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록 위엄 있는 표현 담고 있는 경전이...성경 이외에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세상 잡신들을 찍소리 못하도록 단숨에 제압해 버리시는 압도적 선언의 말씀 앞에...우상 숭배자는 그저 참담함 느낄 뿐이었답니다.
다른 하나는 홀로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이야말로 유일하신 참신이심을 입증하시는 말씀...에 관한 아래 구절들이었습니다.
이사야서 45 장 1 ~ 13 절 (요약)
주께서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내가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해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내가 의 안에서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의 모든 길을 지도하리니
그가 나의 도시를 건축하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보상도 없이 놓아주리라
군대들의 주가 말하노라
우상 숭배로 인한 유다의 멸망, 정확히 70 년 바빌론 포로생활, 그리고 고향 땅으로의 귀환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그것도, 수십 년이나 앞당겨 미리 말씀으로 알려주신 그대로 이루어졌으니(렘 25:7~12) ... 게다가 ... 위 고레스의 경우,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그 이름을 불러 명령하고 계시다니...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확실히...소름끼치도록 확실히 보여주고 계시더군요. 솔까말...세상 잡신들이여, 보았느냐?!...라시는 호령 들리는 듯했습니다. 어느 분의 고백처럼...계셨었군요...!...라는 독백이 무겁게 흘러 나왔습니다.
참고로, 위 구절들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에 수~~~없이 기록된 예언 및 그 성취에 관한 말씀들 중 한 예에 불과하지만, 처음으로 성경 읽어 내려가던 제게는 무척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답니다.
결국...거의 인생 막바지에 이르도록 잡신, 즉 헛것을 구원자로 택하여 수많은 우상들에 머리 조아리며 살아가던 죄인...창조주로서의 지극히 높으신 분, 유일하신 참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아가던 가증한 죄인은...무너져 내렸습니다. 눈물...또 눈물 흘리면서 말입니다. 그리고는...완전 180 도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일단 여기서 끝내고...약간 다른 차원의 말씀을 덧붙여 봅니다. 위 구절들을 언급할 때면 꼭 함께 거론하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거든요. ^^
성경 구절들 중에서 가장 멋진 표현 하나를 들라면 저는 주저 없이 아래 구절을 들 것입니다.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네가 알게 하리라
thou mayest know that
I, the LORD, which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위 구절을 타이핑하는 지금 이 순간, 다시...지난 날의 그때처럼 전율이 느껴지는군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막강 확실한 절대적 권능과 신실하심이 짜릿하게 느껴지는 대~~~~~단한 표현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얼마나 멋진 시적 표현입니까.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네가 알게 하리라...!...라는 말씀 말입니다.
자신의 출생보다 100 년 훨씬 앞서 기록된 말씀...두루마리(?)를 펼쳤더니(누구로부터 전달 받아서 보았든 어쨌든, 고레스가 보긴 보았을 것...아닌가...싶습니...다만)...!...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그 말씀을 접한 고레스...그는 얼마나 두려웠을까...?...를 생각하매, 역시 the HOLY BIBLE...!...정녕 거룩하신 말씀의 책...!..이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 나오더군요. 할렐루야!
2022-09-21 21:44:32 | 최영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