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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더욱 느끼게 하는 글이네요..! 사실 훌륭한 과학적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학적 결과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정한 의미를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도 그못지않게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신앙과 관련된 일일 때는 더더욱 그렇구요..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2011-12-19 19:01:03 | 김정훈
의심없이 믿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니 참 기쁘네요 이 사실을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귀한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
2011-12-19 17:44:39 | 송재근
저는 전문분야에 오랜 연륜을 가지신 분들을 존경합니다. 느끼는 바의 정도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인 내용들을 쉽게 이해시키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저희 두 딸도 아주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들을 고치실 때 한마디 말씀만으로 고치실 수 있지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그 과정을 보여주심으로 병이 나았다고 하는 사실을 친히 일깨워 주시려는 주님의 세심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교수님께서 과학의 시각으로 인식한 것들을 잘 전달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2011-12-19 11:04:50 | 조양교
예전에 그 부분을 보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넘어 갔었는데 몰랐던 사실을 배움으로 깨닫고 아는 것보다 더한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2011-12-19 10:49:45 | 유준호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병 고침의 이적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전체 이적 가운데 3 분의 2에 해당되며,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까지 합치면 전체 이적의 80 퍼센트가 육신의 질병에 관한 것이다. 그만큼 그 분은 우리가 죄악 가운데에서 영혼이 죽어 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또한 육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사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많이 행하신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이적이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3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을 제한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셨던 예수님에게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병을 낫겠다고 찾아오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병 고침이 어떤 눈속임이었거나 혹은 일시적 착각으로 병이 나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밝혀졌다면, 그 소문이 또한 쉽게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 것이고, 또한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트집을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 같은 사실이 하나라도 발견이 되었다면, 결코 예수님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으로만 보더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불신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에 잘 출석하며 신앙이 있는 일부 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이적들을 하나의 허구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남아 있어 안타깝다. 그들은 이적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하는데, 이 말은 결국 자연계에 초자연적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과학은 당연히 자연 현상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초자연 현상은 설명할 수가 없다. 문제는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해서 그와 같은 사실이 존재치 않느냐 하며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병 고침의 이적들에 대해서 그 병 고침의 기전(mechanism)을 우리는 잘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만약에 당시에는 불가능 했지만 오직 오늘날의 발달된 과학 지식을 통해 알고 있는 어떤 병 고침 이후에 나타나는 특이한 호전 증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으로 미루어 병 고침의 역사가 사실이었음을 강력히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와 같은 사실은 성경 기자가 성경의 내용을 자신의 상상이나 허위로 거짓 증언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목격한 것을 기록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8장(22-26절)에 보면, 한 가지 매우 흥미 있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벳새다라는 한 지방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록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경이 눈을 뜨고 나서 무엇이 보이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매우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대답인즉, “사람들이 나무처럼 생긴 채 걷는 것을 내가 보나이다.” (24절) 하였는데, 이 말은 쉽게 말하면, 나무와 사람이 같이 하나로 섞여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과 나무가 각각 부분적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나무가 사람처럼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도대체 왜 중요할까? 그것은 바로 이 구절이야말로 이 소경이 정말로 장님이었는데 이제는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아주 어려서나 혹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사람이 어른이 된 후에,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의학적인 방법에 의하여 시력을 회복하게 되면,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상적인 시각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눈을 회복했다고 해서 전에는 보지 못하던 사람이 금방 사물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인데, 이것은 오늘날 현대 신경과학의 발달로 밝혀진 소위 ‘본다는 것 (seeing)'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지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 들어온 새로운 정보가 뇌에 전달되었을 때, 이미 기억을 통하여 미리 저장되어 있던 기존의 정보와 새로운 정보와의 연관을 통하여 뇌에서 새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함으로써 비로소 그 새로운 정보에 대한 해석을 내림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본다는 것 (seeing)'도 비록 눈이라는 감각 기관에 의존하여 정보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정보를 처리하여 그것이 ’무엇이다‘라는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뇌가 같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엄밀히 말해서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게 된다. 시각이 정상인 사람은 처음 눈을 뜬 갓난아기 시절부터 시각이 완전히 형성될 때까지의 일정 기간을 지나오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시각 정보를 뇌에 저장하면서 발달해 왔기 때문에 눈을 잠시 감았다 뜰 때 한 눈에 여러 가지 사물을 인지할 수가 있게 된다. 하지만, 어릴 적 시각 발달에 매우 중요한 시기를 눈의 장애로 놓치게 된 경우에는, 그에 따른 뇌의 시각피질의 미발달로 말미암아 비록 나중에 눈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뇌에서 그 정보를 올바르게 처리할 수가 없게 되어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된다. 미국의 신경학자 Oliver Sacks는 그의 저서 <화성의 인류학자>에서 Virgil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는 세 살 때 소아마비와 뇌막염을 같이 앓으면서 망막에 손상을 갖게 되었는데, 또 여섯 살 때부터 두 눈에 두꺼운 백내장까지 생겨 단순히 밝고 어두운 정도만 어렴풋이 구별하는 정도로 시력을 거의 잃게 된 채로 약 45년을 소경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백내장 수술로 다시 시력을 갖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고, 비록 망막이 손상은 되었지만 그래도 사물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는 정도로 시력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은 잠깐이고 그는 ‘본다고 하는’ 새로운 고통을 갖게 되었는데, 눈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시각 정보들이 그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도 많은 불편을 주게 되었다. 오랫동안 소경으로서 발달된 남다른 촉각과 청각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고 있던 그에게 시각이라는 새로운 정보는 그야말로 커다란 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그 후에 폐렴을 앓게 되면서 일시적으로 뇌에 산소 결핍 증세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게 원인이 되었었는지 그나마 남아 있던 망막의 시각세포들이 모두 손상되면서, 다시 한번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잠시나마 시력을 회복하였을 동안에 그에 대한 많은 관찰이 이루어졌는데, 그가 사물을 보는 것은 마치 조각 단편들을 어떻게 맞춰야 될지 모르는 사람과도 같이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예로 고양이를 본다면, 얼굴과 발과 몸, 그리고 꼬리가 모두 따로 따로 연결이 안 되고 흩어져 보인다든지, 혹은 나무를 보는데 그 잎사귀와 밑둥이 따로 떨어져 보인다고 말하는 식이다. 바로 이것이다.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님께서 벳새다의 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후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 소경이 대답한 말과 동일한 현상이 아닌가? 어려서부터 소경이었다가 실제로 눈을 떠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을 벳새다의 소경은 말한 것이다. 이것은 마가가 상상으로 지어낼 수 있는 성질의 말이 아니다. 여러분 같으면 앞에서 기술한 현대 신경과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소경의 눈 뜬 후의 반응을 마가가 기록한 것처럼 기록 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눈이 밝아져 사물을 전혀 어려움 없이 보았다고 기술하지 않았겠는가?    벳새다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한 번 더 안수하심으로 완전히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는데(25절), 첫 번 안수 때에 눈을 회복하였다면, 이때에는 뇌까지도 회복하여 만물을 밝게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 가야 할 중요한 사항은,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에 눈과 뇌를 고치실 수도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의 다른 기사에는 소경이 눈을 뜨는데 마가와 같은 임상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였다고 기록된 요한복음 9장의 소경도 마가와 같은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왜 유독 마가복음에는 두 번에 걸쳐 치료를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현대 과학이 이 기록을 발견하고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거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경이 정말로 눈을 떴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바로 그 메시야임을 증거 한다는 것이다(사 35:5-6; 마 11:2-5). 할렐루야!!!
2011-12-19 10:08:29 | 김정훈
형제님의 가장 역할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창조 질서에 따른,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아름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선한 고민이 가족의 영적인 성장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2011-12-10 21:58:04 | 김상희
등잔 밑이 어두운것처럼.. 많은 문제의 해결점이 나에게 있으며 내가 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도 변화시킬수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모르고 사는게 우리들인것 같아요. 나에겐 관대하여 내 눈의 들보는 티로, 남의 눈의 티는 들보로 보이는게 우리들이죠. 자아를 돌아보고 깨닫게 하는 좋은 글 들을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1-12-10 21:50:13 | 김상희
찔림이 되는 글이네요. 특히 이말 "만일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이수영자매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1-12-06 12:49:35 | 윤범용
제가 그 자리에 눕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하게될까 생각해보니 머리가 멍해지네요. 그렇게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행동보다는 생각만 많이 하는것이 요즘 저의 모습이네요.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해 더 기도하고 노력해야겠네요.
2011-12-06 12:06:42 | 김혜순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아무도 변화 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께 구하면서 변화하려는 의지는 성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요.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2011-12-05 23:27:29 | 이수영
  내가 젊고 자유로워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약간 좁혀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 지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있는        한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 적혀 있는 글>  
2011-12-05 13:00:39 | 조양교
제가 어릴적 명절이면 저의 아버님은 늘 제사상앞에서 제사지내는 법과 음식놓는 례법을 손수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시절은 아직도 저의 뇌리에 남아 있답니다. 주의 만찬에서 목사님의 가르침이 어린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도 항상 가슴속에 뿌리 깊이 남아 있을것을 생각하니 아이들의 훈육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네요. 자라나는 어린싹에게 이렇게 세심한 교육까지 고민하시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감사합니다
2011-11-29 11:13:38 | 김영익
여기서도 뵈니 참 반갑습니다. 여러가지 걸리는 것이 많아 우리집도 가정예배를 못드리고 있는데 이 글을 보니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창조과학 강의를 같이 들으며 알게되었고 교회까지 같이 다니게 되어 반갑고 너무 좋습니다.
2011-11-28 20:04:40 | 허광무
정 목사님은 동갑인 형제님을 보고 이모저모로 느끼시는 바가 많은가 봅니다. 다복한 가정에 준수한 외모에 믿음 안에서의 신중함을 가지신 중년의 나이에 순수성을 잃지 않고 이렇게 교회와 함께 연합하기를 즐거워하심에 우리 또한 힘이 납니다. 딸들이 이번 청년모임에 이왕이면 함께 하면 좋겠어요...잘 데 없으면 저희 집을 제공할께요.^^
2011-11-28 18:49:00 | 정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