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묘한 부분이긴 하지만 글의 의도가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훈,조양교 형제님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눠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2012-02-07 20:36:30 | 이청원
[나누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유익하지 않나 하는 결심으로] 동감합니다.....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2012-02-07 20:29:57 | 이청원
아래에 적은 글은 성도컬럼 123번에 실린 조양교 형제님의 글 "옳은 것처럼 보이는 길"을 읽고 느낀 소감을 적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댓글로 달려고 하였으나, 양이 너무 많아 독립된 글로 올립니다. 조양교 형제님께서 쓰신 글이 분명 좋은 의도로 쓴 글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데, 글을 읽으면서 (아마도) 본래 의도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오해의 소지도 다분히 있다는 아쉬움이 들었고, 결국 깊은 생각과 고민 끝에 그래도 이렇게 글을 써서라도 저의 생각을 같이 나누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유익하지 않나 하는 결심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1. “나의 어떤 성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오,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필요한 자리에 나를 앉히실 수도 있으시고, 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나의 어떤 성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하게 해결될 문제라는 지적도 일견 타당한 말이긴 하지만, 앞에서 말한 ‘어떤 성과’와 맞물려서 같이 생각해 보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근본적으로 다시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이 말씀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으로서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와 같이 일 하기를 원하십니다 (고전 3:9).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그 분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어 우리에게 면류관과 상까지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빌 3:14; 고전 9:24-27; 히 10:35).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아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 앞에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는 것 이지요 (히 12:1). 다만 이 모든 명령 받은 일을 행한 후에 그저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겸손히 고백해야 하겠지요 (눅 17:10).
이러한 하나님의 같이 일하심과 맡김의 원리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마 25:14-30). 여행을 떠난 주인이 5 달란트와 2 달란트 받은 종에게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남김에 대하여 칭찬을 하시되, 1 달란트를 받고 그저 땅에 묻어둔 종은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때 1 달란트 받은 종이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뿌리지 않은데서 거두고 흩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라고 말하였는데 (마 25:24), 가만히 음미해 보면 이 말은 자신의 주인 즉, 하나님의 능력을 칭송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만 믿고 오히려 자신의 일을 다 하지 않은 종이 되었기에 주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됨을 봅니다.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요지도 이것입니다. 형제님의 글에도 가만히 보면 한편 하나님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심과 못하심이 없는 능력을 칭송하면서, 동시에 나의 성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기에, 마치 1 달란트 받은 종의 말처럼 들리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는 데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자칫 놓치기 쉬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능력이 많으시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맘먹을 때 하면 되지 하고 그저 멀리서 팔짱끼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완수하게 격려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뤄낸 성과들로 인하여 같이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상까지 주시며 세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탁월함을 들어내는 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권장해야 하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지 그것이 단지 ‘사람이 보기에 옳은 일’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윗을, 모세를, 바울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도 모두 탁월함을 일군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성공을 하고 나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세상 유혹만을 쫒아갈 때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아울러 형제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적으셨는데, 무엇을 말씀 하시려고 하시는지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사실 존재야말로 어떻게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존재를 따지기로 하면,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이뤄진 것이며 (롬 5:8), 성화를 위해 싸워 가는 과정에서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내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여전히 버거워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롬 7:13-25). 그런 ‘존재’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하면서 오히려 죄의 법을 이기는 힘을 얻기도 하며, 그 크신 능력을 갖고 계신 하나님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성과를 낸’ 우리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그 일을 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상을 주시며 칭찬하시겠다는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은혜인 것입니다.
2.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긍정적 사고의 힘, 웃으면 복이와요, 등과 같이 그럴듯한 말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너무 고지식하게 살면 안된다, 세상은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등과 같이 타협을 제의해 오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상대적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문화나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능동적으로 적응해 나가야 한다. 등과 같이 다원주의, 상황윤리와 같이 교묘한 말로 현혹을 시키기도 합니다.”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긍정적 사고의 힘", "웃으면 복이 와요", "너무 고지식하게 살면 안 된다", "세상은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종류의 말들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틀린 말들이 아닙니다. 칭찬은 정말로 고래도 뛰게 할 만큼 탁월한 교육 효과가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는 좌절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있음을 누가 부인할까요? 웃음은 복까지는 몰라도 확실히 신체 및 정신 건강에도 유익할 뿐만 아니라 주변도 환하게 해주어 좋습니다. 고지식하게 살면 분명히 많은 경우 사회생활에서 주변에 덕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 것 또한 결코 나쁜 일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즐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만 ‘무엇을 즐기냐’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그런데, 이런 말들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의 중심이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내용을 다룬 시중의 베스트셀러 책들이 대부분 인본주의 내지는 진화론 혹은 뉴에이지적 접근으로 이런 주제를 확대 해석하거나, 하나님 없이 이룰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유토피아적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형제님도 문장 말미에 “어쨌든 사람에게 기원을 둔 말이나 이론들은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고 무언가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라고 적어 놓으신 것을 보면 이런 점을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이지 앞에 제시한 예들 (예, 칭찬은 고래를..) 그것들 자체가 문제는 아님을 좀 더 강조할 필요가 있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 열거한 예들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충실히 따라가면 그렇게 남을 칭찬하고, 세워주며, 자주 웃고, 긍정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술 같은 것을 안하여 더러는 고지식해 보일 수도 있으나, 다른 면에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봉사와 성실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얻게 되는 총명함으로 고지식하기는 커녕 인정 받으며 리더가 더 잘 될 수도 있습니다. 향락적 세상 문화를 즐기지는 않지만, 건실한 교제와 봉사와 전도의 삶으로 더욱 풍요롭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가치관들을 분명히 분별은 하되, ‘그럴듯한 말’이나 ‘타협’ 혹은 ‘현혹’으로만 치부하여 그런 모습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결론적으로 외적인 것, 환경적 요인을 바꾼다고 마음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는다고 해서 마음이 즐거울 수는 없으며,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긍정적 결과를 야기할 수 없습니다. 칭찬과 위로를 한다고 해서 헌신과 봉사를 유도할 수 없습니다. 칭찬과 위로가 소홀해지는 순간 그 헌신의 열의는 사그러들고 말 것입니다.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높이고 존중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 물론 외적 요인을 바꾸는 것은 근본적인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 보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외적 요인을 바꾸려는 노력과 태도가 필요하고 실제로 마음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깨끗이 청소된 집이나 아늑한 커피숍을 연상 해 보십시오. 바람이 거세고 눈보라가 치는 날과 쾌청하게 맑은 날을 비교해 보십시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자녀가 건실하거나 교회가 비좁아도 성도들 간에 사랑이 넘쳐남을 상상해 보십시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우선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주변 환경적 요인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환경을 바꿔 주면 마음도 어느 정도는 좀 더 쉽게 따라와 줍니다. 웃는 것, 긍정적인 말과 사고, 칭찬과 위로, 이 모든 것들은 결코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지향해 나가야 할 덕목입니다. 은혜로 복음을 받은 자들이 교회에 와서 조차도 무뚝뚝하기 그지없이 앉아 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보기 안 좋습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원하기에 우리는 좀 더 기뻐해야 하고, 의도적으로라도 긍정적일 수밖에 없게 되며, 칭찬과 위로로 서로 세워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동을 하다 보면 마음도 변합니다. 마음이 변하면 다시 그 행동이 습관이 되면서 쉬워지기 시작 합니다. 마음의 상태를 온전히 한 후에 일을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바울도 죄의 법과 씨름할 만큼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은 진정으로 의를 행할 만큼 온전하여 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2-02-07 19:07:33 | 김정훈
이 댓글을 쓸까 말까 무척이나 망설였습니다. 조양교 형제님께서 분명 좋은 의도로 쓴 글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데, 글을 읽으면서 (아마도) 본래 의도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오해의 소지도 다분히 있다는 아쉬움이 들었고, 결국 깊은 생각과 고민 끝에 그래도 이렇게 댓글을 써서라도 저의 생각을 같이 나누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유익하지 않나 하는 결심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까 댓글로 올리기에는 생각보다 양이 너무 많아져서 성도컬럼 124번에 독립된 글로 올립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02-07 19:02:00 | 김정훈
형제님의 주간 5분 묵상의 글..
관용과 포용,감상과 감동으로 신앙과 믿음을 착각하게 하는 요즈음
사랑침례교회는 진리안에서의 사랑을 자꾸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있어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조용한 음악과 함께 읽으니 더욱 마음이 움직이네요...
2012-02-07 14:52:09 | 오혜미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2012-02-07 12:14:23 | 관리자
아멘.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 갈1:10
2012-02-07 11:54:12 | 이청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심지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그 희락의 끝은 근심이니라. (잠14:12-13절)
사람이 보기에 옳은 것처럼 보이는 길이 있습니다. 옳은 길에 대한 바른 분별은 그 종말/끝을 보라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긍정적 사고의 힘, 웃으면 복이와요, 등과 같이 그럴듯한 말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너무 고지식하게 살면 안된다, 세상은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등과 같이 타협을 제의해 오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상대적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문화나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능동적으로 적응해 나가야 한다. 등과 같이 다원주의, 상황윤리와 같이 교묘한 말로 현혹을 시키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람에게 기원을 둔 말이나 이론들은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고 무언가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영역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계에서, 정치계에서, 문화계에서 탁월한 성공을 이루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 효율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은 사람이 보기에 옳은 것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분명 그리스도인들이 빈궁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부지런히 맡은 바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의 어떤 성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오,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필요한 자리에 나를 앉히실 수도 있으시고, 또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잠언서의 글을 읽다보면 의로운 자에 대한 언급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의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이고,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이 나오며, 바른 열매를 맺게 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은 사악한 말과 사악한 행동이 나오고, 사악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재앙가운데 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외적인 것, 환경적 요인을 바꾼다고 마음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는다고 해서 마음이 즐거울 수는 없으며,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긍정적 결과를 야기할 수 없습니다. 칭찬과 위로를 한다고 해서 헌신과 봉사를 유도할 수 없습니다. 칭찬과 위로가 소홀해지는 순간 그 헌신의 열의는 사그러들고 말 것입니다.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높이고 존중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2012-02-07 10:49:37 | 조양교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샬롬
2012-02-03 00:53:10 | 관리자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귀를 크게 열어야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2-02-03 00:50:39 | 관리자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샬롬.
패스터
2012-02-03 00:49:05 | 관리자
절대공감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글 내공(?) 이 없으면 절대로 쓸 수 없는 글이지요 귀한 글 감사합니다. *^^*
2012-02-01 20:06:48 | 송재근
조형제님의 글이 저도 매번 기다려져요.
똑같은 마음으로 아멘이 되거든요.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전하고 진실하게 믿음생활을 하되
꾸준함이 없으면-
꾸준함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형제님이 가장으로서
가정을 잘 이끄는 결과가 두 자녀를 통해
눈에 보였는데 그 비결이 형제님의 꾸준함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네요.
뛰어난 강점은 겸손이 결여되기가 쉽지요.
강점이 있는 성도는
늘 주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성도들을 대하면
절로 겸손해 질 것 같아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고요.
단체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뛰어난 리더 한 사람보다는
성실하고 꾸준한 긍정적인 성도들인 것 같아요.
작은 것에도 힘을 더할 줄 아는.
2012-02-01 16:04:24 | 이수영
드러내서 훌륭하다고 말씀드리면 쑥스러워 하실 줄 알지만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옵니다.
정말로 우리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짚어 주신 것 같아 감탄도 되고요.
언제라도 필요한 생각이지만 놓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성도가 많아지고 바빠지고 뭔가 이루어질 때 꼭 생기는 문제의 열쇠라고 봅니다..진실함,겸손함,배려,리더십!!!!
감사하게도 이번 여행에서 저와 제 남편은 많이 배우고 은혜를 받았고 소득이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도님들의 꾸준한 기도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2012-02-01 14:23:18 | 오혜미
형제님의 글을 대할때마다 마음에 부드럽게 잘 다가옵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형제님의 꾸준함의 강점이 매번 성도칼럼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가정예배도 드리시는 모습 또한 본받고 싶네요...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저도 제 자신을 비춰보는 시간을 갖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2-01 12:49:01 | 주경선
벌써 2월의 시작이군요.
교회 삶의 가운데 오늘의 말씀 역시 꼭 필요한 지침서 역할을 하는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형제님, 생뚱맞은 표현일까요?? 형제님 참 멋있습니다!! ^^
2012-02-01 12:46:09 | 이청원
1월의 마지막 날을 눈으로 장식을 했습니다. 요즘 저는 가능한 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을 하고 있는데 일거삼득을 얻고 있습니다. 어제는 세찬 눈바람으로 고생은 되었지만 그나마 혼잡구간이 아니라서 여유로운 귀가길을 가졌습니다. 2월의 첫날, 엘피지 가격의 인상소식과 영업장내 눈치우는 부산한 소리와 함께 저녁시간 가정예배때 읽을 잠언서를 묵상하였습니다. 저는 강점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굳이 하나 꼽으라면 꾸준함(?)... 진정한 강자는 다른 사람의 강점을 잘 활용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특히 사랑교회에는 전문가도 많고 강점을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그 강점들이 예수님안에서 잘 다듬어지고 합력되어지면 해야할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강점들을 교합시키는데는 진실함, 겸손함, 배려, 리더십 등이 있겠지요,이런 것들을 잘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0절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걷는 자는 지혜로우려니와 어리석은 자들과 사귀는 자는 멸망을 당하리라.21절 재앙은 죄인들의 뒤를 따르거니와 의로운 자들은 좋은 것으로 보답을 받으리라.22절 선한 사람은 자기 자손의 자손에게 상속 재산을 남기거니와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잠언13장)
잠언서에서는 지혜로운 자, 의로운 자, 선한 자, 부지런한 자가 한 부류의 사람이고, 어리석은 자, 불의한 자, 사악한 자, 게으른 자가 또다른 한 부류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나 홀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걸으라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함께 하는 것으로 더 지혜롭게 됩니다. 재앙은 죄인들의 몫입니다. "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일어나지 아니하려니와 사악한 자에게는 해악이 가득하리라." (잠12:21절) 하나님은 공평하시므로 죄인에게는 재앙을 주시지만 의인에게는 고난을 주심으로 허물을 교정하시고 더 성숙되게 하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그 선이 자손대대로 상속재산으로 물려집니다. 재물보다 더 귀한 것이 선을 물려 주는 일일 것입니다. 죄인들이 재물을 쌓는 목적은 자신의 정욕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정작 쌓여진 그 재물이 의인을 위해 쌓인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악인이 정욕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쌓은 재물을 의인은 그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지혜에 지혜를, 선에 선을 쌓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012-02-01 11:08:35 | 조양교
들을 귀가 있어 오늘 우리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용인에서 1시간 걸려서 오셨고kjv 성경을 사서 본지1주일 되었다고 하고여러 형제님들과여러가지를 질문도 하고 점심 시간에 교제하고 나서방문하길 잘 했다는 말씀하고돌아가셨어요.keepbible 은 아직 모르고 계셨고요.이런 들을 귀가 있는 영혼들이 있어매주가 즐겁고 기대가 되지요.오늘 김 **형제님 오전 말씀을 통해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고 돌아가셨어요.주님이 때 맞추어 보내신 것 같아요.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진리임을 또 느끼게한 하루였지요.
2012-01-29 20:46:25 | 이수영
오래 전에 한국에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TV 프로그램 가운데, “특수 공작원 소머즈” 라는 프로가 있었다. 사고로 잃게 된 오른 팔과 두 다리 그리고 한쪽 귀를 인공전자기관으로 대체하여 정상인과는 다른 초능력을 갖게 된 한 여성 특수공작원의 이야기였다. “소머즈”에 있어서 특히 인기 있었던 것은 초능력적인 전자 인공 귀였는데, 멀리서 들려 오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귀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아직 소머즈 같은 초능력은 아니지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사람의 귀에 인공 달팽이관을 이식하여 청력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으니 이런 식으로 기술이 계속 발전해 간다면 실제로 공상과학 속에나 나오던 ‘소머즈의 귀’를 보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귓속을 들여다보면 그 세밀한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귀에 부딪힌 소리는 먼저 외이도-우리가 귀지를 팔 때, 귀 후비개로 지나면서 건드리게 되는 부분으로 대략 2.5 cm 길이에 7 mm의 직경을 갖는다-라고 부르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그 통로의 끝에 연결된 마치 펼쳐진 우산 모양으로 생긴 얇은 고막을 진동 시킨다. 이때 만들어진 진동은 고막에 연결된 세 개의 작은 이소골을 차례로 통과 하면서 그 귀에 들어온 소리의 강도를 증폭시키는데, 이소골이 들어 있는 이 부분을 중이라고 하며, 대략 우리가 보통 커피에 넣어 먹는 각설탕만한 크기의 공간에 해당한다. 중이 속의 이소골은 그 구조와 배치가 소리를 증폭시키기에 매우 적절하게 놓여 있어 우리의 귀에 들어온 소리를 거의 잃어버림 없이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이소골을 통과한 소리는 마지막으로 대략 완두콩만한 크기의 달팽이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달팽이관 속에는 약 눈물 한 방울에 해당하는 부피의 액체가 들어 있어, 고막에서부터 이소골을 통해 전해져온 소리의 진동은 이제 이 달팽이관 속 액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이 액체 위에는 얇은 막이 하나 떠 있는데,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이 막이 같이 움직이면서 거기에 붙어 있는 미세한 머리카락 모양의 신경세포들이 이 막을 통해 전해지는 물결의 높낮이를 감지하게 되고, 그것을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뇌에 전달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 방울의 적은 액체 속에서 생겨나는 물결의 파고를 가지고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소리의 신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람의 귀는 보통 20에서 20,000 Hz 사이의 주파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참고로 이야기 하면, 피아노의 소리는 27.5에서 4,186 Hz의 소리를 내며, TV를 켜고 소리를 가장 낮게 줄여 놓았을 때 나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는 16,000 Hz에 해당 한다), 그 중에서도 약 2,500 Hz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외이도의 구조가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증폭해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는 자그마치 우리의 고막이 불과 1억 분의 1cm 즉, 수소 원자의 두께에 해당하는 길이만큼만 움직임으로도 소리를 전달 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수소 원자의 직경에 해당하는 길이만큼의 고막의 미세한 움직임이 달팽이관 속의 눈물 한 방울만한 액체에 파고를 일으키고, 그 물결의 높낮이를 머리털 같은 신경세포가 감지하여 전기 신호를 일으키고 그것을 뇌에 전달하여 마침내 소리를 듣게 하는 과정을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설계를 통하지 않고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겠는가?
우리들은 아주 어릴 적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 주변의 소리에 익숙해 와서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고 살고 있다. 그래서 청각을 잃어버린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쉽지 않은데, 마치 TV의 벙어리 화면을 보는 답답한 기분은 아닐까? 사실 소리는 우리에게 많은 신비감을 주며, 또 상상을 자극한다.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을 떠 올려 보라. 소리의 세계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우리를 또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인도한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삼중고의 유명한 헬렌켈러는 만약에 한 가지를 골라서 회복할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삼중고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소리를 듣고 싶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과연 듣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새롭게 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몇 번이나,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청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었던가?
성경에서는 소리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요한복음은 처음에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 1:1).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말씀으로 ‘이르심으로’ 천지를 지으시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길을 예비한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마 3:3). 예수님이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으며 성령이 임하셨다 (마 3:16-17). 마가의 다락방에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으며 (행 2:2),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때에도 하늘에서는 음성이 있었다 (행 9:3-4). 이제 요한계시록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 질 때에도 하늘에는 큰 음성이 있어 축제의 소리가 하늘에 자자하게 될 것이다 (계 19:1-8). 이와 같이 성경은 매우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소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청각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소리가 있어 저마다 자기 소리를 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 그것도 아주 고요한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왕상 19:12) 그 분의 음성에 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원하신다. 그야말로 우리의 고막을 수소 원자 두께 만큼, 눈꼽의 눈꼽만큼 움직이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를 열어 그 분의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싶은 것이다. 태초부터 계시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며,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렘 7:23)라고 말씀 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로부터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니 (딤후 4:4), 주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교회에 거듭하여 말씀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3:9),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계 2-3장). 아멘.
2012-01-29 19:24:18 | 김정훈
네, 이제 시작이니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야지요..!
2012-01-26 23:07:43 |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