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과 현빈이, 은탁이 데리고 왕산해수욕장에 바람 쇄러 왔어요. 요즘 선거철이라 일이 적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왕 쉬는거 가족과 함께 의미있는 시간 만들어 볼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사실 형제님의 글이 너무 중요하고 알릴수 있도록 퍼나르기해야할 글인데 다른 이야기로 글의 가치가 좀 가려진 모양세가 되었네요! 지송!!!! 이 글 퍼스팅해서. 여러곳에 뿌릴께요^^ 이렇게 표현하는것이 바람직 한지 모르겠는데 정말 훌륭해요! 스크랩합니다 ^^
2012-04-09 15:54:07 | 노영기
ㅎㅎ.. 저는 우리 교회 홈피의 이런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좋습니다. 올려진 글이 계기가 되어 홈피를 방문하셨다가 자연스런 느낌을 주고 받는 동안 안부도 묻고 새로나온 핸드폰 얘기도 하고, 서로 이 자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미처 오프라인에서 다 못하는 '교제'를 나누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더욱 홈피를 활성화 하려고 했던거니까요~^^
2012-04-09 11:21:56 | 김정훈
ㅋㅋ... 아마도 이렇게 좋은 도구가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열심을 내어 바른 지식을 배우고 익히자라는
의미로 이번 게시 글이 많이 읽혀지길 바라는 마음을 토로한 것 같네요.
형제님의 이번 게시 글이 백번 옳고 지당한 말씀이기 때문이니까요...
2012-04-09 10:47:27 | 오혜미
졸지에 이 자리가 '핸드폰'의 유용성과 위험성을 논하는 자리가 되었네요~^^
2012-04-09 10:24:46 | 김정훈
이 글을 읽고 혹시라도 '변증(apologetics)'의 필요성에 대하여 좀 더 생각을 나누기 원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추가로 몇 자 더 적습니다.
1. 오직 진리의 탐구에 철저히 목말라 본 사람만이 적절한 '변증'을 만났을 때 얻게 되는 해갈의 기쁨과 함께 그 소중한 가치를 충분히 느낄 것입니다.
2. 굳이 '변증'의 도움 없이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전도의 길목에서 만나게되는 수 많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앞에서 '변증'의 유효성을 느낄 것이며, 본인 자신도 성경을 혹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는 과정에 '변증'을 통해 통찰력과 식견이 증대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무엇 보다도 '성경'이 스스로 내적 '변증'을 하고 있습니다.
4.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성경을 더 바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2012-04-09 10:21:00 | 김정훈
저는 눈치가 없는 편이라 항상 조심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성도수가 늘어나면서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다다음주 청소당번인데 여유있게 하려면 토요일로 잡아야 겠습니다.
2012-04-09 10:17:53 | 조양교
"진화" 참 매력적인 말처럼 다가옵니다. 과학문명 시대에 무언가 사람들의 힘으로 편리해지고 성능이 향상되고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더 나은 것이 기다리지 않을까 기대를 갖게 만들어 줍니다. 저는 아직 구형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신상품이 하루가 멀게 새롭게 나오는 것을 바꾸기가 선뜻 내켜지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 구세대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경험한 일이지만 결국 고민해서 신상을 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제품 출시 광고를 보면 이것보다 더 짜증나는 일도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매력을 택할 것이냐? 진리를 택할 것이냐? 이런 선택의 고민을 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2012-04-09 10:00:16 | 조양교
변증의 무용론을 주장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변증을 통해 당사자는 평행선을 긋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 만나 주시는 것은 큰 신비입니다. 변증이란 확실한 증거를 통해 믿음이 더 강화되는 경우도 있고, 전하는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12-04-09 09:37:21 | 조양교
저도 햅틱2 에서 옵티머스 뷰로 바꿨습니다. 2년 반동안 참 많이 발전했더라구요!!! 제가 처음 접하고 인상 깊었던 것은 카톡의 기능과 킵바이블, 사랑침례교회 홈피, 블로그에 들어가 글을 읽고 댓글도 달 수 있는것이 었습니다. 별 것 아닐수 있겠지만 저에게는 스마트폰의 위력이 실감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이왕 말 나온김에 걱정되는 것은 음란물들이 모든 남녀노소의 손에서 실행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속도도 가속화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2012-04-09 01:04:37 | 노영기
이수영 자매님과 김정훈 형제님의 위로에 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저는 무신론이 넘치는 많은 그림들을 보고 있습니다. 만드는 사람들도 창조주를 알지 못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부패한 거래가 만연한 방송실태를 많이 접하게 되다보니 제 자신도 어느때는 동조하고 있는 모습에 답답하기도 합니다. 전에는 천장만 보고 일하고 벽보고 일하고 했는데(전기공사는 무생명체를 다룬다는 의미^^)는 요즘은 핸드폰에 만나는 사람마다 저장하고 인맥쌓기하는 것이 일이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안정적으로 가지고 가려해서 열심을 내는데 열심을 내는 만큼 신앙과 관련된 열심은 줄어 들게 되어 답답함으로 다가옵니다.
저의 성적표를 보면 부적응자로 도장이 꽝 찍힐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평가는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많은 것을 그들 앞에서 감추고 있습니다. 부끄럽거나 밥 줄 끊어질까봐 그런 것은 아니고 필요없는 갈등을 만들어서 도리어 제가 계획하는 일들에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 였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말씀중에 공통의 관심사에 대한 언급을 하셨잖아요! 그것 때문입니다. 제 관심사와 그들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힘들기도 하고요! 시간과 비례해서 친해지는 사람들이 생기면 좀더 진지한 주제들을 이야기해 볼 수 있겠지요!
또한 한편으로는 저도 저속한 대화들과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대화들에 끼어 멍멍해 질때가 있습니다. 멍멍멍^^(그림이 그려지시나요 ㅎㅎㅎ)
잘 극복하고 이겨내고 절제 할 수 있도록 생각날때 기도도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김정훈 형제님의 열정이 제자신에게 도전도 되고 자극도 되고 갈등???(제 정체성에 대한 부분)도 됩니다. 그래서 감사를 드립니다.
2012-04-09 00:45:50 | 노영기
청소가 질서 있고 재미있게 이루어 지는 것 같네요..
자매님 청소후기 칼럼 읽는 재미도 솔솔치 않고요.
정말 이번 주 부터는 식사를 빨리하고 자리를 비켜주는 센스쟁이 들이 많아지셨음해요 .
교제하며 여유롭게 식사하면 좋을텐데 몇 주만 인내해야 할 것 같지요..
오늘도 어김없이 식사하고 얼른 설거지하러 오신 형제님들께 박수를 보냅니다...짝짝짝!!!
2012-04-08 23:58:35 | 오혜미
스마트폰이 있으니 누워서도 차안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볼수 있어 정말 좋습니다
컴푸터 앞에 오래 앉으면 아플 허리 통증도 안생기고요.
또 쓸데없는 생각도 줄이고 유익한 정보와 지식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게 되니
갱년기 증후군도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을 것 같아요..
자칫하면 약화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소지가 있는 중요한 이슈들을 철저하게
짚어주고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풍부한 말씀과 묵상의 글과 교제가 있어서 아무 직업없는 주부인 저도
일주일의 과제가 많지요..콩나물처럼 혹은 전에 올려졌던 글제목 "wicker basket" 처럼
자꾸 읽고 듣고 생각하다보면 콩나물처럼 자라고 석탄을 나른 바스켓이 어느 새
깨끗해져 있겠지요.. 교회에 교사들이 많아 너무 행복한 부담감으로 홈페이지를 들어옵니다..
젊은이들 특히 청년들이 좀더 홈피를 통해 많이 배웠음 좋겠습니다.
2012-04-08 23:49:00 | 오혜미
노영기 형제님, 힘 내시기 바라고요~, 늘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 가운데 점점 더 가까이 하나님께로 나아 가실 줄 믿습니다!
2012-04-08 23:25:52 | 김정훈
노형제님의 솔직한 말씀이 마음이 끌립니다.
회피하고자 하는 속마음을 발견하셨기에 변화하실 수 있지요.
형제님의 성장을 응원하고 싶어요.
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어요.
가장 가까운 이웃을 섬기라는 오늘 말씀 저도 아멘이 되었어요.
2012-04-08 22:51:49 | 이수영
지난주에는 김성수 형제님과 청년들이 교회 청소를 하였습니다.
김성수 형제님이 열심히 땀 흘리며 씩씩하게 깨끗하게 모범을 보이셨지요.
아마도 집에서 많이 해보신 듯...
많은 청년들이 참여한 덕분에 청소 도구들이 마구마구 모자랐지요.
어떤 면에선 모두가 다 참여하는 건 비효율적 인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덕분에 유리문들도 깨끗해지고 청소가 끝난 후에 모처럼
청년부가 아침 모임에, 김밥 파티도 했지요.
일찍 와서 아침을 못 먹었을 것을 예견하고 준비한 한 형제님의 센스덕분이죠.
이번 주에는 홍 승대 형제님과 허광무 형제님가정이 토요일에 오셔서
3층은 허 형제님가정이 4층은 홍 형제님 가정이 수고해 주셨어요.
동화와 성화, 태민이, 지훈이, 성민이가 함께 놀러왔다가 청소에 합류해
협동심을 보여 준 기특한 아이들에게 삼겹살을 대접했는데
씨름선수들같이 너무 너무 잘 먹었다는 이야기-
집이 가까우신 성도들이라 가능한 일이지만 토요일 청소하면 주일 아침이
덜 번거로운 좋은 점이 있더라고요.
자기 순서를 기억하고 성실하게 청소해 내는 성도들을 볼 때 참 자랑스럽습니다.
직접 교회를 청소하면서 느낀 소감도 올려 주시면 어떨지요?
요즘 청년들도 많아지고 있고 성도들이 부쩍 늘어 식당에서 자리가 부족해서 새로 오신 분들이 서서 먹는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식사를 먼저 하신성도는 교제는 3층에 내려가서 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사 갈 때 까지만 서로 조금씩 불편을 나누면서 새로 오시는 분들을 배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된 성도들이 4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3층 예배실 자리를 비워두어도 꽉 채우는 요즘
정말 모르는 얼굴들이 많아졌어요.
우리가 먼저 다가가 친절히 대해 주시면 마음이 더 열릴 것 같아요.
참 새로 오신 분들이 사진을 찍어주시면 알아보기가 쉬울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살짝 드네요.
2012-04-08 22:44:33 | 이수영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형제님의 글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정신이 번적 드는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요즘은 제자신을 보면서 고칠것이 많은 허술한 집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특히나 요즘 목사님이 시리즈로 설교하시는 결혼 주제가 신앙생활과 매치되어 성경적 조명을 비추니 신앙과 크게 연관지어 받아들이지 않았던 주제가 신앙의 본질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할때마다 제 믿음과 실제 삶이 조화롭지 못했음을 발견했고 회피하고자 하는 제 속마음을 또 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정을 해야하는데 힘이 듭니다. 형제님글이 참으로 유익한 글이 되었습니다 .
2012-04-08 21:08:11 | 노영기
맞습니다. 참고로 제 경험에 의하면 둘 다 필요합니다. 증거를 제시함으로 믿음을 갖게 될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아도 믿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둘 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제님도 말씀 하신 것처럼 가능한 한 우리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귀한 댓글에 감사합니다.
2012-04-08 19:12:39 | 김정훈
진화론은 도대체 성경과 조화가 될 수 있는 이론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동시에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어쩌면 진화론 사상의 정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윈은 한때 신학도로서 본래 목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을 믿게 되면서 그는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은 그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였는데, 유명한 진화론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나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같은 사람은 모두 진화론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결국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과 진화론을 같이 혼합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지켜야 마땅할 신학교에서 조차도 진화론과 타협한 신학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령,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으나 진화론적인 방법으로 창조를 하셨다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든지, 이를 조금 변형하여 하나님께서 진화과정의 중간 중간에 필요에 따라 개입하여 창조를 하셨다는 ‘점진적인 창조론’, 그리고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지질학적 연대로 해석하는 소위 ‘날-시대 이론’ 등이 모두 진화론과 타협하여 나온 이론들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조 사실의 기록에 대하여 매우 엄격히 말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진화론과는 혼합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에 진화론의 본질은 반-성경적이다.
우선 먼저 진화론이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열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에 안식을 취하심으로 (창 2:2-3; 히 4:3, 10) 지질학적 연대와 생물의 점진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심으로, 수억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진화의 가능성을 부정케 하셨다. 넷째, 예수님 자신께서 직접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로 취급하셨다 (마 19:4-6; 막 10:6).
그럼 이제 진화론이 왜 반-성경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의 조상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약 200 만 년 전으로서, 그 전에 이미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나타나기 까지 수 없이 많은 죽음과 생존을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진화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을 지으셨다면,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수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모순이 된다. 성경은 잘 아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과 사람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창세기 1장), 이 말은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죽음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진화론적 개념과는 같이 어울려 생각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창조가 있은 후에,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죽음이 들어 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더 분명하게 명시되어 나타나는데,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롬 5:12) 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 한사람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전 15:22).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창조물들도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 기록 (롬 8:22) 함으로써, 결국 생물계에 나타나는 죽음이 사람의 존재 이후에 생겨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 혹은 이것의 변형인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에 빠지는 일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기원과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활은 한마디로 죽음을 이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부활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죽음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음으로 부활을 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요 (고전 15:12-19), 그래서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진화론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의 죄악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죽음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으로 죽음은 우리의 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 가셨다가 부활을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고 만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동시에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결국은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진화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관계를 띠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화론이 갖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반-성경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매우 열심이면서도 정작 그 복음의 기초를 두고 있는 부활의 사실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진화론에 대해서는 많은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혹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진화니 창조니 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고도 부활의 사실만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엡 4:13) 성경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경험해본 이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 옆에 같이 있던 한 범죄자는 그냥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 낙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 있었겠지만 (눅 23:40-43),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아직 이 땅에 살면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엡 4:13), 믿음 안에 거하되 터를 다지고 정착해서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않아야 (골 1:23) 할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오직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기록된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성경과 진화론을 혼합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이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다윈의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이론들이 그 당시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졌었다. 즉,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를 하셨으며, 따라서 창세기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지구 진화의 역사에 걸맞게 재해석 되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신학적 접근 방식의 모순을 아주 예리하게 웅변적으로 잘 지적했던 사람이 바로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본주의자로 소문이 나있었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이었다. 그는 아주 열렬한 진화론의 신봉자로서 ‘다윈의 불독’ 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다윈 자신보다도 더 진화론을 전파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진화론을 가지고 성경 기록의 진실을 파괴하길 원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을 믿지 않으려 할 때 이를 즐거워하였다. 반면에 진화론을 성경과 혼합하여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공격을 통하여 그들이 취하는 자세의 부당성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여러 성경 구절을 직접 펼쳐 보이면서, ‘성경의 창조 기록에 진화론을 합치는 일은 결국은 믿음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며, 결국 창세기를 진화론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교리를 진리로 붙들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고 조롱하고 다녔다. 물론, 그의 말의 요점은, 결국 더 이상 그와 같이 어리석은 타협을 그만두고 진화론을 제대로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성경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진화론은 잘못된 사상이다. 진화론은 우리의 신앙을 노략질하는 철학이요 헛된 속임수이다 (골 2:8). 그러나 헉슬리의 지적은 옳았다. 비록 그 자신은 성경을 불신하였었지만, 무엇이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인 줄을 잘 알고 그것을 정확히 공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는데 공헌 할 수가 있었다. 진화론자였던 헉슬리가 오히려 더 잘 파악하고 있던 것처럼, 기독교의 교리는 절대로 진화론과는 양립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하여 오직 한 가지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죽은 지 백년이 더 지난 지금은 어떤가? 도대체 언제까지, 교회는 그야말로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며, 교회가 지켜내야 할 성도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을 참인가?
2012-04-08 18:15:33 | 김정훈
귀한글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믿음의 문제인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실을 알려주어도 논리적으로 사실적 근거나 증거물을 보여주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나 부활사건은 안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황당한 거짓말 이야기일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고 돌이킬 혹시 모를 그 누군가를 위해 진리를 알리고 전해야겠지요 샬롬!
2012-04-07 18:26:03 | 송재근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선포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5:14, 17).
또한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성경이 기록한 인간의 기원과 타락,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속하심의 역사, 이 모든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지면서 이야기의 정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고 묻는 것은, 바로 기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고 묻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본주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심들을 제기해 왔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하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과, 둘째, 예수님께서 죽기는 하셨으나 실제로 부활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정말로 죽으셨다는 사실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정말로 숨을 거두셨는지에 대하여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받으신 고통은 어느 정도쯤 이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동안, 로마 병정들로부터 수 없이 많은 채찍질을 받으셨다. 이 채찍은 플래그럼(flagrum)이라고 불렸는데, 가죽 끝에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뼈와 납 조각을 붙여 만들어,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을 뜯어냄으로, 여러 번 내리치게 되면 피부 밑에 근육까지 뜯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피부 조직을 망가뜨리면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무게는 대략 50kg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무게로 인하여 고통은 가중되고, 마침내 언덕에 다다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가 있었을 것이다. 의사인 트루만 데이비스(Truman Davis)는 그의 저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인간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해 잘 기술하고 있다. 먼저 온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양 팔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점차 가슴의 근육이 마비되고, 결국은 숨을 못 쉬게 됨으로, 십자가상에서 질식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위로 밀어 올려 주면 막힌 숨을 내뿜어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이때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리를 꺾어 주게 되면, 그들의 죽음을 재촉할 수가 있는데, 성경 (요 19:31-34)에 보면, 바로 이와 같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 곁에 같이 매달렸던 강도의 다리를 꺾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그가 이미 죽은 관계로 꺾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죽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 19:33-34). 상처가 난 곳에서 많은 물과 피가 흘러내리는 경우는 십자가상에서 심장파열로 죽은 경우에 나타난다고,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은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증언(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에서, 더블린 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사무엘 호우톤(Samuel Houghton)의 말을 인용하여 적고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조금이라도 살아 계셨다면 피만 나왔을 것이나, 피와 물이 같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신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로마 병사는 그의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고 4 복음서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마 27:50; 막 15:37; 눅 23:46; 요 19:30). 또한,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까지 하였으므로 (막 15: 44-46),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의 의심은 없어도 될 것 같다.
자,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은 갖추어 졌다. 하지만, 부활이 문자 그대로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로 남아 있어야 한다. 과연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
조쉬 맥도웰은 그의 저서 <부활의 요인(The Resurrection factor)>에서, 우리가 고려해야만 될 일곱 가지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돌무덤의 봉인 (마 27:66)이 끊어진 사실이다. 이 일로 붙잡히게 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야 되는 두려운 일을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모두 자기 몸이 잡힐까 두려워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피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척에 둔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거 하였는데, 만약에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의 주장은 누군가에 의해 금방 탄로가 났을 것이다.
셋째, 당시에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의 무게는 대략 1,400~1,800 kg 이라고 한다.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다고 가정했을 때,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로마 병정들의 눈과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렇게 큰 돌을 그들에게 전혀 들킴 없이 옮기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넷째, 로마 병정들이 도망 쳤다는 사실이다. 만약,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섯째,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을 때, 예수님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쌓던 수건 또한 딴 곳에 개켜 있었는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해갔다면, 그렇게 옷을 벗기고 또한 가지런히 정돈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여섯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 너무나도 많고 또한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고전 15:1-8). 단순히 눈으로만 목격된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상처까지 확인되고 (요 20:24-29), 같이 식사도 하였으며 (눅 24:13-35; 요 21:1-14), 다양한 시각에 여러 계층의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그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까지 나타나셨다 (행 9:1-9). 그러므로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자들에게서 있을 법한 무슨 집단 환각 증세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하다.
일곱째,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이 되지 않을 만큼 무시 되었다. 따라서 만일 부활의 사건이 날조되어진 것이라면, 여자들의 목격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사실 이외에도,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 이후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또한 무엇보다 잘 증거하고 있다. 만약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증거 하려고 하였겠는가?
증거의 신빙성을 다루는데 있어 최고의 전문가로서, 하버드 대학의 법학 교수를 지냈으며, 이 분야의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증거의 법칙에 관한 논문>을 남긴 바 있는 싸이먼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을 조사해 본 끝에,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의 그 어느 사건보다도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이 확실한 증거들 앞에 더 이상 어찌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모두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크게 외치자.
할렐루야, 우리 주님 부활 하셨으니,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다 같이 소리 높여 부활하신 우리 주를 찬양 할 찌어다! 아멘.
2012-04-07 17:19:54 |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