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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은 그리운 얼굴   나에게는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아무래도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났던 그리운 얼굴들을 다시 한 번 만나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얼굴들과 다시는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소원은 아무래도 이 땅 위에서는 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얼굴을 너무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온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사람의 얼굴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흔히들 꽃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의 대표로 생각 하시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꽃은 아무리 고와도 결국은 차갑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은 따뜻합니다. 언제나 따뜻합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따뜻합니다. 뽀송뽀송 하거나, 해말갛거나, 혹은 불그스레하거나 이렇듯 사람의 얼굴은 따뜻한 것이 곧 그 얼굴의 빛깔이 됩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입술은 얼마나 더 따뜻합니까? 특별히 여인의 입술은 가만히 다물고만 있어도 많은 따뜻한 말들을 속삭여 주는 듯합니다. 그런데 입술 보다 더 따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빛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특별히 공을 들여 빚으신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사람의 눈빛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눈빛 보다 더 따뜻한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눈빛에는 따뜻함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꿈이 있습니다. 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꿈이란 온갖 그리움들이고 그 그리움은 영원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 영원한 그리움을 통하여 세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은 무엇보다도 높습니다. 무엇 보다 넓고 무엇보다도 깊습니다. 산이 높다 하지만 사람의 눈만큼 높지는 못하고, 하늘이 넓다 하지만 사람의 눈만큼은 넓지 못하며, 바다가 아무리 깊어도 사람의 눈만큼 깊지는 못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높은 산 앞에 가서 한번 서 보면 압니다. 우뚝 선 높은 산을 한번 바라보고 곧 뒤돌아 서보세요. 방금 눈앞을 우뚝 서 있던 그 높은 산은 순식간에 어디로 사라지고 한순간에 나의 작은 눈 속으로 모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바다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고 세상 만물 그 어떠한 것이라도 나의 작은 눈 속에 담지 못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이렇게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깊고 넓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얼굴이 좋아서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긴 모양입니다. 어제는 TV를 보다가 탈북여성들의 얼굴과 그 눈빛과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며 나 역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체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 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마침 한가위 특별프로그램이라 한복들도 곱게 차려 입고 나와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운 탈북여성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출연자들의 얼굴에도 산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정말로 그 사람들의 얼굴에는 산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금강산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백두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묘향산도 있었고 귀가 따갑게 말로만 듣던 칠보산도 있었습니다.   나도 깜짝 놀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의 얼굴에는 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얼굴에는 강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두만강이 또 다른 사람의 얼굴에는 대동강이 제각기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산이 있고 강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던 그 순간, 그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얼굴마다에 그려져 있는 그 산들과 강들은 다름 아닌 사람들마다의 그리운 고향 산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북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리운 이북 땅의 고향 산천이 그려져 있었고, 저 남쪽땅 끝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떠나온 푸른 남해 바닷가의 정든 고향마을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풀지 못 했던 하나의 숙제를 비로소 풀게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TV화면에 비춰진 한 사람 한사람의 얼굴마다에 그려져 있는 고향 산천을 발견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숙제의 답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네들의 얼굴에는 저마다의 작은 고향 산천들의 모습이 그 체취까지 풍기며 오밀조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아, 이렇게 되고 보니 사람들의 얼굴마다 가득 불타고 있는 저 그리움의 불꽃들은 다름 아닌 온갖 그리운 고향사람들의 얼굴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동생들과 형님누이들!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들이 그리워 그렇게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립다고 말 할 때 상대방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그립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 사람의 얼굴부터 눈앞에 떠 올립니다.   꽃이 아름답기는 하나 그 빛깔이 차가운 까닭은 꽃에게는 그리운 얼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이 따뜻한 까닭은 아마도 온갖 그리운 얼굴들로 그 속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리움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이글거리는 영혼의 불꽃이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의 얼굴에서 가득 불타고 있는 저 그리움의 불꽃은 다름 아닌 그리운 본향사람들의 얼굴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가보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보고 싶은 그리운 얼굴들! 언제나 만나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   1912년 10월 1일(월) 유 용수
2012-10-01 19:19:49 | 유용수
군대를 안갔다 오신 자매님이 빨간 모자쓴 조교를 어찌 아시죠? 조교의 권한을 남용해서 훈련병들을 혹사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의 목적과는 사뭇 다르게 운용되는 사례죠, 군과 조교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있는 분들께는 긍정적으로 보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2012-09-28 14:54:58 | 조양교
조교로 비유하시니 참 새로운 시각입니다. 일반적으로 조교 특히 군대 조교하면 빨간 모자쓰고 빡쎄게 훈련시킨다는 의미가 팍- 전달이 되거든요. '부정과 긍정이 같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난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측면-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긍정적인 것 같아요^^
2012-09-28 13:10:19 | 이수영
우리가 시범조교로서 훈련을 받고 본이 되야 한다는 비유를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 살면서 좀 더 책임감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과 믿음에 대한 나의 확신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뭇사람들과 거리와 경계를 줄 뿐이었는데 말입니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이해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에 말도 못 건네는 때가 많이 있었고요. 함께 하는 성도들이 많아 지니 우리 울타리 안에서 너무 안이하게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요..
2012-09-27 21:20:31 | 오혜미
남자들에게 군생활 이야기는 대화의 단골메뉴로 등장하지만 듣는 사람은 아주 고역이죠, 저희 장인께서도 찾아뵙기만 하면 625전쟁 참전용사로서 매번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하십니다. 장모께서는 그 얘기 또 하냐고 핀잔을 주시지만 변함없이 또 하시고, 이번에 찾아 뵈어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같은 얘기를 하실 것입니다. 사실 그 얘기를 빼버리면 딱히 할말도 없으실 것도 같고, 나이가 들어 가면서 과거를 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저의 군생활도 드러내어 할 말은 못되지만 3년의 군복무를 신병교육기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나름 사단의 기초군기를 잡는 그런 곳이었는데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군대는 계급이 ??다 보니 직책이 사람을 만들곤 합니다. 군사교육은 이론보다는 실기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시범조교의 활용입니다. 대부분의 조교는 숙달된 시범을 보이기도 하지만 간혹 어설픈 조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범조교는 우수자원을 심사숙고해서 선발을 합니다. 군사강의의 수준은 시범조교의 수준과 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어떤 시범조교를 만나느냐에 따라 6주간 신병교육의 향배가 결정되어 집니다. 만약 시범조교가 잘못을 했을 경우 그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강력한 제재가 가해집니다. 일반 신병이나 기간병의 잘못보다는 더 심한 처벌이 가해지게 됩니다. 사안에 따라서 아예 시범조교의 직무를 박탈 당할 수도 있겠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시범조교로 삼으셨고, 신약시대에는 교회를 시범조교로 삼으셨습니다. 믿음의 숙련자로 삼으시기 위해 혹독한 훈련이 가해지는 것을 성경기록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민족으로 삼으신 것처럼 신약교회를 왕가의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보존하게 하신 것처럼, 신약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을 통해 기초를 세우셨고, 신약교회를 통해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나 역사를 통해서 시범조교로서의 역할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강력히 제재하셨던 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유없이 삶이 큰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사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을까? 불신자들은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면서도 평안하게 잘 사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의 이유가 되는 것으로서 성경대로 사는 신자는 시범조교로 부르신 분의 뜻을 따라 때로는 강력한 훈련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심한 노여움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 시범조교와 같은 삶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한 천사들과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주목하기 때문에 신자의 삶은 더 더욱이 조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추석 명절이 낀 주간이어서 인지 특별한 일은 없어도 마음이 분주한 것 같습니다. 차량들도 예전만큼이나 아직까지는 분주하지도 않은 것 같네요, 명절이라 반가운 사람도 있겠지만 명절이 없었으면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각박한 중에서도 많은 것들을 허락해 주시고, 때를 따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2-09-27 09:53:03 | 조양교
주님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한형제 한자매가 되어감을 느낍니다. 그 연령에 안들어갔지만 자매님의 꼼꼼함 보고서를 보니 꼭 그 자리에 함께 한 것 같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제가 쭉~ 이어갔으면 좋겠네요^^
2012-09-26 23:30:49 | 이주옥
먼저 축하드립니다. 자녀출생도 놀라운 일이지만 거듭나기까지는 부모님들의 몸으로 보여주는 주님의 제자의 삶이 있어야 함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부모와 조부모와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하겠지요. 기쁨과 동시에 책임감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순산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012-09-26 16:13:37 | 이수영
우선 손주보신 것 축하드립니다. 무엇보다 이제 태어난 손주가 그리스도인이 꼭 되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 질것을 함께 기원드립니다. 글속에서 깊은 신앙심이 느껴집니다.
2012-09-26 13:10:14 | 조양교
#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은 “예수”   시집간 딸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가 되신 소감이 어떠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니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내 집안에서 얻게 되는 첫 손자라서 매우 기쁜 중에 대뜸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이름을 무엇이라 짓나? 이러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내 귀여운 손자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혹은 사회생활에서 가는 곳마다 봄볕처럼 따뜻하고 여름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가며 가을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그리고 불의에는 겨울에 부는 칼바람같이 냉정한, 그러나 생명력이 넘치는 그러한 아이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에 알맞은 이름이 뭐 없을까?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이름 중에 참 좋은 이름이 꼭 하나 있습니다. 그 이름은 어느 한 사람을 위한 이름이 아니고 세상 만민을 위한 이름입니다. 바로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높은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신다면 이 세상은 온통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는 모든 일들은 어느 것 하나라도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길게 꼬리를 물고 살겠다고 바글바글 기어가고 있는 개미들의 행렬하고 꼭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영원토록 살게 해 주신다는 뜻의 이름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라는 이름에는 금강석 보다 더 굳은 약속까지 들어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지금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신용카드가 희망사항이 아니고 지금이라도 은행에 있는 돈 기계에 들여 밀기만 하면 현찰이 쏟아져 나오는 이름이듯이 “예수”라는 이름도 확실히 세상 모든 사람들을 영원토록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보증이 들어 있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결정적으로 내가 이 이름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맛있어 뵈는 떡이라도 그게 식탁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벽에 걸려있는 액자 속의 그림일 뿐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침만 꿀떡 더 넘어가 배만 더 고플 뿐이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개인 앞으로 달아 주신 이름이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와 밤이 새도록 강가 모래밭에서 씨름을 하여 이겼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발뒤꿈치라는 뜻을 가진 야곱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이 그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시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다름 아닌 나 개인 앞으로 달아 주신 “예수”라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란 말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이름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장12절). 곧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왔다가 이름을 남기고 가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에 남기고 갈 자기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왔다가 새로운 이름을 얻어 가지고 갑니다. 곧 “예수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새로 태어날 내 외손자도 내가지어준 이름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고놈 어떻게 생겼을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2012년 9월 26일(수) 유 용수
2012-09-26 11:45:22 | 유용수
모친과 함께 오시는 자매님들은 서로 헤어져서 우리 방에는 모두 열 여섯 분이 참여 했는데 신기하게도 대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의 자매님들과 꽃보다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시는 자매님들께서 자리해 주시고 통성명을 시작했지요. 서로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지 5학년1반은 나란히 앉아 있더라고^^ 우리 교회에 와서 시간이 가면서 구원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 졌다고, 교회 오는 길에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먼 거리를 가깝게 느끼며 다닌다고 고백하고, 본인이 확실하게 바뀌니까 식구들도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고, 개역성경을 보면서는 아귀가 맞지 않았던 것들이 흠정역을 보면서 서서히 풀려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고백하고, 교회 와서 건너편 아파트들을 보면서 먼 지방에서 이사 오길 희망하는 마음들도 나누고, 솔로로 다니는 분들은 온 식구들이 함께 교회 나오는 것이 소원이라고, 먼저 있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당한 일들도, 마음 아팠던 일들도 털어놓으며 서로 공감하고 감사를 함께 나누게 되었어요. 잘못 된 교회를 선택해 가족들과 어려움을 겪고 있음도 나누고, 아주 강한 남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고 있다는 간증도 있었고 특히 고정순 자매님께선 흠정역을 보면서 한글이 깨달아져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계시다는 놀라운 간증과 너무 평안하고 감사하다는 간증, "그저 감사한 것 밖에 없어요." 또 다른 자매님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들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는 딸이 전하는 말을 경청 하시고 “세상에 그런 교회도 있냐”고 “니네 교회에 가고싶다”고 하신다는 얘기도, 개인의 문제들을 얘기하면서 기도해 주길 청하기도 하고 율법에 꽁꽁 묶여있는 믿는 식구들이 오히려 믿음의 거침돌이 되는 상황들도 나누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으로 좋은 간증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실제생활에서의 경험도 나누고, 눈물로 간증이 잠시 끊기기도 하면서 믿음안에서 한 지체임을 실감하는 시간들 이었어요. 공통적으로는 우리교회 와서 참 평안과 감사가 넘친다는 간증들이었지요.   서로가 너무나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게됨을 자축하고 감사하는 시간이었어요^^  
2012-09-24 17:17:30 | 이수영
형제님! 형제님의 글속에서 형제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품은 마음들이 제 마음에도 있는 것들이라 저도 몇자 댓글을 달아 봅니다. 저도 처음 사랑침례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때는 매주 울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 모습이 사랑이 식어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바른 진리안에서 많이 배웠고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가짐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고 또한 형제님이 예리하게 지적한 것들에 제 자신도 노출 되어 있다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슬픈자입니다.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 자신도 다시금 돌아 봅니다. 제게도 유익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2012-09-24 11:48:47 | 노영기
가끔 사랑침례교회 사이트를 방문하는 지체입니다. 유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에 부담이 되어 부족하나마 글을 올려봅니다. 저역시 항상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기에 …. 개인적으로 아무리 올바른 성경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 한들 잃어버린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속에 없으면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고전 13:2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듯이 율법의 가장 핵심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이시며 고전 2:2 나는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느니라. 주님의 십자가는 죄덩어리인 저를 은혜로 구원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생각됩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 같이 사랑 안에서 걸으라. 올바른 킹제임스흠정역을 전할 때에 형제자매님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전하는 것이 올바른 주님의 뜻이라 생각해 봅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죄속에서 육신의 삶을 사는 제가 열매로 맺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여전히 매일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수많은 죄들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덩어리 상태의 제 자신(스스로의 생각, 감정, 육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여기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듯이...)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 갈 때만이 주님의 사랑이 열매로 맺히리라 묵상해 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심지어 매 순간까지도 '절박한 기도'와 '올바른 말씀'의 묵상을 통한 ‘주님과의 교제’가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는 소속교회뿐 아니라 이단을 제외한 모든 교회의 머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로 거듭난 모든 형제자매님들을 사랑해야 함은 당연한 것일 겁니다. 요일 2:9 자기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느니라. 요일 2: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그 속에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 전혀 없으나 요일 2:11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 걸으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 13: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명령들을 지키라. 주님을 믿고 거듭나면 그 영혼에 성령님께서 영원히 내주해 계심을 잊지말아야 할 듯 합니다. 이단을 제외한 다른 교파에 속한 그 어떤 작은 지체라도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면 그 형제님과 자매님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스테반 형제님께서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죽음직전까지도 보여주셨던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을 깊이 묵상해 봅니다.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 사랑하는 유형제님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기운을 차리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형제님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샬롬~
2012-09-21 20:27:23 | 우영운
형제님...내공이 깃든 글에.다시한번 감동합니다. 교회몰락의 이유중 하나는 우리교회의 경우라면 성경공부가 부족하고 교리가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에 동의합니다.정말로 중요하고 소중한 교회의 사역이 사소한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정체되고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우리모두 항상 하나님을 추구하고 지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에 힘써야겠습니다. 청년들과 가까이 교제하지 못했는데 언제 우리 함께 즐거운 모임가져요...께임도 하고...ㅋㅋ
2012-09-20 22:17:46 | 오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