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글을 읽으니 그동안 제가 살아온 방식들이 들킨 거 같아 부끄러워집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제가 편한대로 합리화한 거 같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직 못 읽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2013-08-25 20:35:09 | 박순호
요즘 공감가는 글이 많이 올라와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같이 교제하면서 권면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실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가야하기에 조심스럽게 권면하게 되면
상처받지 말고 잘 돌아보아 옳을 길을 택해야 하는것이 바른 믿음 가운데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주님앞에 설때까지 쭉~ 같이 가고 싶어요.
2013-08-25 10:37:52 | 김혜순
정말 심히 불편한 진실이네요. ㅎㅎ
뼈를 튼튼하게 하고 성장기 아이들에게 필수인줄만 알았는데...
2013-08-25 10:30:47 | 김혜순
다음은 제럴드 싯처 <사랑의 짐>중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을 몇 가지 요약 발췌한 글입니다. 우리 사랑교회 성도들과도 함께 깊이 생각하며 고민 해 볼 내용인 것 같아 올려봅니다.
교회가 변하려면 슬픔의 골짜기를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변화는 반드시 상실로 상실은 슬픔으로 슬픔은 고뇌로 고뇌는 불안으로
불안은 마침내 적대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슬픔을 인정해야합니다.
슬픔을 이해하고 나란히 걷기로 작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진리를 높이 받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실에 자리 잡고 앉은 정착민이 아니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순례자들입니다.
돌아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눌 때마다 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교인들조차도
두려움으로 반응하곤 했습니다. 어느 목사의 고백...
<중략>
권면하기를 망설이는 여러 가지 이유
1. 스스로 훈계할 자격이 없으며 그럴 만큼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는 자의식의 문제.
2.비슷한 약점을 가진 이들에게 안도감과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
3.융통성.
인간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상대에게 적응하고 거슬리는 행동을 참아주며
설령 최악의 상태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냥 받아 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보통은 사랑하기에 참는 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권면의 대가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상한 감정 오해와 분노를 해결하기보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저 잠자코 견디는 편을
선택한다.
무책임하고 무례하며 이기적인 남편을 마냥 받아주는 아내 .
제대로 사역하지 않는 목회자를 끝까지 끼고 도는 교회.
이웃의 불쾌한 행동을 묵과하고 한 술 떠서 얼렁뚱땅 웃어 넘기는 친구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면하기를 주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 특히 불편한 관계에 있는 교인들의 약점을 찾아내서
친구들과 쑥덕거리는 것을 즐긴다. 권면하기보다는 뒷말하기를 좋아하는 꼴이다.
이른바 신앙이 좋다는 이들 일수록 경건한 언어로 험담하는데 능숙한 법인지라
그리스도인 사회에서는 이런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옮겨서는 안 될 말들을 잔뜩 늘어놓고 나서 "그 분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라고
덧붙이는 식이다.
권면은 잘못된 길에 들어섰지만 아직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초기에 바람직하다.
다들 궁금해 하고 유쾌한 가십거리로 삼고 싶어 할 만큼 크고 흥미롭고 자극적인
죄에 대해서는 훈계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교제하다 여성이 임신을 했는데 온 교인 앞에 끌어내어서
간음죄를 고백하게 했다는 끔찍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죄를 지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망신을 주어서 얻을 게 무어란 말인가?
권면하기에 적합한 시점은 여성이 임신하기전이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태가 진전된
뒤가 아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렀다면 낄낄거리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가며 거기 앉아 있던
교회식구 전체가 도리어 권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폭로해야할 죄는 이제
간음이 아니라 위선과 정죄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생략>
2013-08-24 23:52:42 | 김경민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치와 경제 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산업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동영상을 예전에 한번 소개 했는데 이번에는 우유에도 그러한 불편한 진실들이 있음을 발견해서 참고 하시라고 올립니다. 그렇다고 자연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휴머니티가 되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이런 불편한 진실 뒤에는 다 그만한 원인과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고 이러한 유제품도 지혜롭게 먹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과학은 나날이 발전해 가는데 병원과 약국은 더 늘어나고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며 암은 마치 과거에도 그랬던거 같이 발병율이 많아졌습니다. 당료, 암은 현대병입니다.
사실 이러한 사실들 뒤에도 병주고 약주는 제약회사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조금 큰 틀에서 들여다 보면 왜 이런 마이너 리포트가 진실인지 그 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깊게 집어서 말하자면 사탄과 사탄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도 사탄의 왕국을 만들어 가고있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들의 근원은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여든 오늘은 우유의 불편한 진실을 다루어 봅니다.
(참고 사항 아래의 모든 내용은 스크랩한 자료이며 편집만 시도한 것입니다.)
현대 산업사회가 내놓은 우유에 대한 광고
<<우유의 좋은점>>
1.어린이에겐 필수 영양소
우유는 비타민A,B,E,K,칼슘,미네랄.단백질 등 면역력 강화시키고,단백질성분이 어린이들의 두뇌발달과 성장기에 매우 좋다.
우유에 든 지방(중선지방과 포화지방)과 성장호르몬(rBGH)는 아이들의 살을 찌우며 빨리 크게 한다.
2.불면증을 없애준다.
우유에 함유된 비타민 B1,칼슘, 칼륨등이 신경을 안정시키고 멜라토닌이 숙면을 도와 불면증을 없애준다.
3.콜레스테롤 수치와 성인병
우유에 애한 락터페린 단백질 및 영양소가 항바이러스,항염작용 효과가 있어 자방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 효과를 준다한다.
그리고 성인병과 암 에방에도 좋다.
4.치매예방
비타민 B12가 대뇌신경조직의 손상을 줄여서 치매를 억제하고 예방할수가 있다.
5.다이어트에 효과
웬디 찬 쉬핑 델포스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과체중인 사람이 저지방 우유 등 유제품을 매일 5번씩 먹으면 체중 감량과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6.피부보습
그리세린에 지방산이 붙어있는 형태여서 피부보습에는 탁월한 효과를 보여준다.
우유를 피부에 바르면 촉촉해진다.노화방지에도 탁월하다.
우유에 대한 불편한 진실
2013-08-24 22:45:15 | 노영기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 집니다.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08-23 16:03:53 | 노영기
유 형제님!
주옥같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제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와 노래가 가슴을 찡하게 만드네요.
샬롬
패스터
2013-08-21 10:44:52 | 관리자
형제님^^ 그동안 바쁘셨군요,
'긍정적인 변화의 물결속에서 필요가 맞물렸을 때 좋은 것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 공감이 가네요.
늘 그래왔지만 때에 맞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필요에 따라 때마침 11층을 모두 사용하게 되니 무엇보다 교육공간의 부족함이
해소가 되게 되어 좋은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어 많이 손보지 않아도 활용할 수 있으니
공사 시간과 확장 경비가 절감이 될테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전 성도가 한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13-08-20 21:18:31 | 김상희
다시 한 번 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주는 글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08-20 21:05:04 | 김상희
자매님^^ 마음을 잡아끄는 글귀들을 잘 뽑아서 올려주셨네요.
자매님 말씀처럼
세상 서점이 아닌 기독교 서점에만 가도 정말 많은 책들이 있지만
무엇을 읽어야 할지 어떤 책이 참된 믿음 성장에 도움을 줄지 고민하지 않고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인것 같아요.
그리스도인은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산다는 목사님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는 우리가
행운아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자매님의 글을 보며 특히 올 가을엔 책을 많이 읽어야지.. 하는 맘이 절로 드네요.
감사합니다.
2013-08-20 21:00:12 | 김상희
좋은 글귀들을 올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위의 다섯 문구를 저장해 둡니다.
올라오는 글귀들을 쭉 저장할거예요.
저희는 서적들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
자매님의 수고가 너무 감사해요.
2013-08-20 16:17:08 | 이춘옥
저도 글을 읽어 내려 가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 공감을 느낌니다~~
아름답고 생각하게 만드는 글을 잘 읽고 갑니다^^
2013-08-20 13:54:38 | 이명숙
이쯤되면 정말 형제님께서 쓰신글 모아 책으로 내도 손색이.... 수줍으실란가요? ^^
너무도 고운글 잘 보았습니다.
2013-08-20 11:31:00 | 이청원
찔림이 있는 고운 시 한편 읽은 느낌입니다.
2013-08-20 11:03:42 | 김혜순
하나님을 위해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공감을
했을것 같아요. 저도 읽으면서 좋은 글은 적어 놓았어요.
희미해 지면 다시 한번봐야지 했는데 다시 봐도 좋아요.
걸음 걸음 믿음으로 내 딛으면 하나님 함께 해 주신다니 든든한 마음입니다.
2013-08-20 10:47:43 | 김혜순
이렇게 추출?해 주니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어집니다.
쏜살같이 읽어버려서 다시한번 음미 하고픈 마음이 생겨요.
자매님 감사해요.
2013-08-20 09:41:02 | 이수영
참으로 공감해요.
수줍음이란 단어가 시어로만 간혹 볼 수 있게된
요즘은 뻔뻔함이 온세상에 난무합니다.
특히 요즘에 옷차림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입었는지 안입었는지 모르는 바지를 입고 유행패션이라고..
다 비치고 드러낸 몸에 한조각 걸치고는 유행패션이라고....
온 세상에 눈 둘곳이 없게 민망한 것이 단지 옷차림만은 아니지요.
이러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에 더 아담하고 단정함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냈음 싶습니다.
2013-08-20 09:31:09 | 이수영
수줍다는 단어를 읽을 땐 내 얼굴에 홍조가 띄고 뻔뻔하다라는 단어를 읽을 땐 내 얼굴이 뻔뻔하게 누구를 향하여 대드는 듯이 치켜올라집니다. 그 만큼 이 글이 매력있다는 거겠죠.
그런데... 사랑을 하면 뻔뻔해지기도 하던데... 그것은 용기 이겠죠! ~ ^^
2013-08-20 00:32:52 | 박순호
^^ 공동체의 교회학교에 자녀가 출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자녀 교육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교회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더 막중한 책임과 무게가 실어지는것 같습니다
오늘 여러권의 책을 샀는데 저도 읽으면서 좋은 부분은 발췌해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매님~ 이제 서서히 시원한 바람이 부네요. 이제 독서의 계절이 기다리고 있는거겠죠? 샬롬~
2013-08-20 00:25:27 | 주경선
# 수줍음과 뻔뻔스러움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와 수줍은 얼굴을 하고 수줍게 다가와 수줍은 손길을 내밀고
수줍음에 떨리는 입술을 열어 수줍게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수줍은 모습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만이 사랑할 때 수줍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꽃의 수줍음을 알고 짐승들까지도 서로 사랑할 때는
수줍어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나봅니다.
꽃이 사람들의 눈에 안 띠는 사이에 봉오리를 터뜨리는 까닭은
꽃들이 수줍어하기 때문이라고 시인들은 노래했으니까요.
소월은 어느 누구보다도 진달래꽃의 수줍음을 잘 아는 시인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님이 떠나시는 길 위에 진달래꽃 색깔보다 더 짙은 수줍음으로
진달래꽃을 따다가 뿌려 드리겠노라고 노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들은 이렇게 꽃의 수줍음만 알아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들은 나뭇잎 하나에도 수줍음이 있음을 알아보고 노래하곤 했습니다.
시인 박인환은 그는 누구보다도 나뭇잎의 수줍음을 아프도록 겪은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는 우리들 가슴을 아프도록 젖게 하더니
어느 여가수는 수줍은 목소리로 수줍게 노래했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시인들은 또 한 마리의 새와 철없는 짐승들에게도 수줍음이 있음을 노래합니다.
서정주는 가을의 찬 국화꽃 한 송이의 수줍음과 함께
한 마리 소쩍새에게도 수줍음이 있음을 알아챈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렇게 노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상 만물에는 다 수줍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흐르는 물에도, 들에도, 산에도, 볼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에도,
우주 삼라만상에는 어디에든지 무엇에든지 다 수줍음이 있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수줍음이란 부끄러움입니다.
꽃이 수줍어한다는 것은 꽃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이요,
나뭇잎이 수줍어한다는 것은 나뭇잎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며,
새 한 마리가 수줍어한다는 것은 새 한 마리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어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꽃과 나뭇잎과 새 한 마리는 무엇을 어려워하였을까?
당연히 그들은 하늘을 어려워했던 것입니다.
꽃 한 송이도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하는 하늘!
잎 새에 이는 한 점 바람조차도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하는 하늘!
새 한 마리마저도 어려워 할 줄 아는 하늘을
어찌 사람 아담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늘을 어려워 할 줄 모를 수 있었겠습니까?
참된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옵니다.
소녀가 까닭 없이 수줍어하고 소년이 또한 까닭 없이 부끄러워한다면
이로써 우리들은 그네들이 사랑에 빠진 줄을 알아차립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노래도 수줍은 노래를 부릅니다.
비록 대중가요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래는 수줍습니다.
수줍은 사랑노래가 많이 불리는 시대일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뻔뻔스러운 것은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꽃 한 송이를 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나뭇잎을 본 일도 없습니다.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새 한 마리의 얼굴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본 일도 전혀 없습니다.
뻔뻔스럽다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며,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도 모르고 감사도 모른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뻔뻔스러운 얼굴에서는 결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얼굴들을 날마다 TV 화면에서 컴퓨터 모니터에서
잡지나 영화에서 어디서든지 보고 듣고 길거리에서 바람 스쳐 지나가듯
같이 섞여 보고 듣고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줍음이 없는 뻔뻔한 TV 화면과 수줍음이 없는 뻔뻔한 컴퓨터모니터와
수줍음이 없는 신문 보도와 수줍음이 없는 노래들과 광고들과
라디오방송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들 자신들도 어느 듯 수줍음을 모르는
지존파나 막가파들로 훈련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수줍은 얼굴이 맞습니다.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오는 게 맞습니다.
수줍어 할 줄 모르는 데서는 참된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수줍음은 하늘 두려운 줄 아는 것이며 그래서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합니다.
뻔뻔한 얼굴에서는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돌이라도 수줍은 얼굴에서라야 사랑이 나옵니다.
인류는 지금이라도 역사의 방향을 하늘 두려운 줄 아는 시대로 되 돌려야만 합니다.
거기에 이 시대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아들들과 딸들의 얼굴에 시급히 수줍음을 회복 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혼선언문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무슨 훈장 치켜들듯 하고 있는
이 시대의 소위 현대인들이라는 그들의 얼굴에 수줍음을 회복 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신문들은 수줍은 기사들로 가득 채워져야 하고 TV 화면들도 그렇게
수줍어 할 줄 알게 되어야 하며 거리의 좌판에 범람하고 있는 벌거숭이 잡지들과
비디오들과 라디오 방송들도 수줍음이 가득 찬 내용과 프로들로 꾸며져야 하며
패션도 수줍은 패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현대인은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에게 다가가 수줍음을 배우고
철없는 산짐승 한 마리에게 다가가 그들의 수줍음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꽃들과 나뭇잎들과 새 한 마리와 짐승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어주신 그 지음 받은 그대로 지금도 하늘 어려운 줄을 알아
수줍은 얼굴로 살아들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잠이 오지 않아 어제 설교하신 말씀을 다시 들었습니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예레미아 대언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또한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손가락이 뻣뻣해지기 시작하는군요.
손가락도 글쓰기에 수줍음을 타는 가 봅니다.
2013년 8월 19일(월)
유 용수
2013-08-20 00:24:11 | 유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