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에서 오시는 김상진 형제님이 드디어 글을 올리셨네요.
앞으로 자매님, 아이들과 함께 좋은 교제를 나누기 원합니다.
30대의 부부들이 더 많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좋겟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3-09-23 12:06:42 | 관리자
너무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성도들을 위해 더 많이 써 주세요.
샬롬
패스터
2013-09-23 12:02:10 | 관리자
우리가 늘 보아왔던 모습들을 잔잔한 필체로 아름답게 쓰셧습니다.
자기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듭니다.
오늘 아침 형제님의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나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3-09-23 11:16:41 | 문영석
예수님께 내어드리면 드릴수록 생활이 점점 더 open되어짐을 느끼며, 성령님께 맡겨지니 전보다 더 성실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두 딸내미~ 예수님과 동행하는- 진실되고 안식된 삶을 어렸을때부터 맛보게 해주신 하나님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013-09-23 09:39:30 | 목영주
이 아침에 자신을 솔직히 내어 놓은 진실한 글을 세상을 한껏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젊은 형제님으로 부터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교회를 바른 교회로 인도하고 있는 모토라 생각합니다.
소심과 위선...사이에서 고민하고 점검하시며 마침내 글을 올리는 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어제 설교중에 저는 우리 성도들이 가장 인간적이어야 하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는데
앞으로 이 30대가 바로 그런 분들이 되어 교회를 잘 이어갔음 좋겠습니다.
감사해요.
2013-09-23 08:23:33 | 오혜미
몇 년 전에 고스도치 한 마리를 잠깐 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고슴도치는 귀여웠지만 무척이나 경계심이 많았습니다. 만져보려고 하면 가시를 세우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다가오지 못하도록 경계 했습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도치야' 라고 부르며 사료를 주다보니 가시를 세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여 정도 지나고 나니 고슴도치는 저의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더 이상 가시를 세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목소리만 듣고도 자신의 집밖으로 나와 저의 손바닥 위로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고슴도치라는 작은 동물이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 저에게는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저는 그런 고슴도치를 보면서 '짜식 이제야 철이 들었네~~' 라며 녀석의 기특함을 칭찬했던 적이 생각이 납니다.
그 고슴도치를 생각하자니,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이 혹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말입니다. 돈으로도 명성으로도 아닌. 오직 하나. 그분을 주인으로 섬겨드리고 인정해드리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닐까? 라며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어봤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내 신앙생활을 뒤 돌아 보게 되었는데, 참으로 교만한 한 사람[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느 이교도들처럼 돈으로, 명예로, 봉사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인 가짜 하나님 앞에 기꺼히 노예가 되는 것을 스스로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오면서 동시에 타인과 비교해가며 정죄하는 교만한 인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남들은 십계명을 중시했지만, 그 사람은 한 가지를 더 보태서 십 일 계명을 만들어 놓고 그 중에서 십 일 계명을 최고의 덕으로 삼고 살아왔음을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십 일 계명은 바로 ‘들키지 말아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분을 주인으로 섬겨드리고 인정해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는 구원이 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그런데, 이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것은 정말로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혜를 묵상하니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나만 믿어. 그래야 살아. 너희가 살아야 내가 기뻐.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고 영광이야. 내가 문을 열어놨잖아<계 3:8>. 그러니까 너희는 들어오기만 하면 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잖니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살꺼야<계 3:20>. 아들아! 우리 영원히 함께 살자..,”
나 같은 것이 뭐라고.., 우리 인간이 뭐라고..,
새삼, 그런 은혜를 이미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묵상한 순간 스스로에게 던져진 한 가지 질문으로 부터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며 철든 자녀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최근에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제목과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기도들을 떠올리기 위해서 잠시 눈을 감아봤지만(솔직히 눈을 감기도 전에 답은 떠올랐습니다.), 여전히 내 유익을 위한 기도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필요할 때만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셨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필요에 의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믿음 좋다는 말도 나름 들었고, 또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자부해왔는데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그런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니 스스로를 평가하는 네 글자가 떠올랐습니다.
‘바·리·새·인’
그런 저의 모습을 보니 저는 마치 ‘고슴도치형 인간’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고슴도치보다도 철이 덜든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다가도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나 삶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인에게 가시를 세우며 따지고 드는 그런 철없는 고슴도치형 인간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그런 철없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저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롬 8:38-39>. 그 은혜는 십자가 사건 만큼이나 신비 중에 신비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롬 8:27>
그 감사에 내 혼의 주인이 되어주신 주님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리며 마땅히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고개도 쳐들지 못한 채 몇 마디 말씀을 드려봅니다.
(주님. 저는 아둔하여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내 힘으로 주님께 뭔가를 해드리려고 하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생각만으로 주님을 섬길 뿐, 몸과 마음은 여전히 과거의 습관을 쫒아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못하고 있네요. 그러나 주님. 정말로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래서 저에게는 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안계시면 어찌 할 뻔 했는지 아찔함을 느낍니다. 가끔은 가시로 주님의 마음을 찌르는 못된 짓을 하지만 여전히 참으시고 지켜주시는 주님께 그저 고개를 숙일 뿐 무엇을 해드릴 수도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끝 날까지 버리지 않고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힙니다. 드릴 것은 여기 눈물만 있으니 눈물이라도 받아 주실련지요~~)
쑥스러운 묵상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글을 올렸지만, 소심하여 삭제했다가 다시 올립니다. 이 교회와 여러 지체들 그리고 귀한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합니다.
샬롬.
2013-09-23 00:55:35 | 김상진
한 편의 멎진 시를 읽었습니다.
꽃 보다 사람이 아름답지 못하는 이유.
크게 공감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09-23 00:54:47 | 김상진
이 글을 읽고 나니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 좋아 했는데 달리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소개 하신것 처럼 어쩜 글을 이렇게 아름답게 쓰시는지....
형제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좋습니다.
2013-09-22 21:55:32 | 김혜순
잔잔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또 주마등처럼 과거가 생각나게 합니다.
좋은글 감사하고 저도 늘 배움을 갈망하는 학생처럼 열심히 신앙을 해보렵니다...
감사합니다
2013-09-21 23:49:29 | 문영석
#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지루하게 길었습니다.
장마가 7월 한 달 동안이나 오락가락 이어지더니 장마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무더위가 8월 한 달을 무섭게 달구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의 바뀜이야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8월의 달력을 떼어내자 벌써 아침저녁 바람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비도 왔고 너무 더워서 하지 못했던 운동을 하리라 마음먹고
가벼운 복장으로 동네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우리 동네 뒷산 길은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 계속 올라 다닌 길입니다.
이제는 낯이 익을 대로 익어서 오름세며 내림세가 한 눈에 환합니다.
길목마다 서 있는 나무들의 크기며, 심지어 풀 한 포기의 모습까지도 눈에 익어
이름이라도 지어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동안 못 보았다고 여간 새롭게 반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길가의 이름 모를 잡풀들은 또 그것들 나름대로
모두가 반갑다고 손짓하고 어찌 그리 오랫동안 뜸하였느냐며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나 풀들도 모두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하긴 꽃과 나무와 풀들이 거기서거기지 무슨 특별나게 다를 게 있으랴 만은
자연이 아름답다 함은 꽃과 나무와 풀들과 바위덩이까지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기에,
이제 막 긴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내고 가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산 전체가
한 덩어리의 꽃밭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걸으며 뜻밖에 문득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니, 오랫동안 한 마디 말로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한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과는 달리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 답은 이미 내 속에서 정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 속에 없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얄궂게도 내 속에 있는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한 마디 말로 속 시원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연인 이었던 아내가 “왜 나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건~그건~ 하였듯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한마디 말로 정리하여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이런저런 단편적인 답들을 끄집어 내 보기는 하였지만 만족한 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장 만족한 답을 오늘 오랜만에 뒷산에 오르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보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떠오르듯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문학은 나의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문학이란 참으로 희망사항이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온 문학이란, 남의 글을 통해서 읽은 많은 문학작품들과
그리고 마침내 내 손으로 쓴 이런저런 글들의 모든 내용들이
한마디로 나의 희망사항들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쓴 글들은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들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겠지만 나는 결코 내가 쓴 글 속에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글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은 현실의 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 희망사항 속의 나 일 뿐이었습니다.
현실은 이러한데 그런 현실의 내가 아닌 희망사항속의 저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나의 모든 글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오, 오, 참으로 그랬었구나!
나의 현실이 이렇다는 것은 무엇이며 글 속에서 바라는 바 희망사항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한 마디로 현실의 나는 결코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오, 맞았어.
바로 그것이었던 거야!
지금 두어 달 만에 산에 오르며
바라보고 있는 꽃동산 같은 저 자연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나는 결코 저 아름다운 꽃동산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내가 꽃 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구체적인 예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먹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하고 배설하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성질도 아름답지 못하고 버릇과 습관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도 아름답지 못하고 태도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한 번도 만물 앞에서 저 나무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 본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시도 내 겉과 속을 가리지 않고는 만물 앞에 나설 수 없을 만큼
추하고 더러운 모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 목사님의 말대로 한다면
나는 배설물과 같은 모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 같은 사실을 아마 젊은 날부터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노랫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지어 부른 시였습니다.
즉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문학작품에서나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다 죄 많은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누가 꽃을 가리켜 죄 많은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도저히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노랫말로 희망사항을 노래하고 시를 지어 희망사항을 낭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문학을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해서였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글도 쓰고 다른 사람의 문학작품도 읽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다면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셨다는
예수님의 기독교구속의 논리는 성립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무엇 때문에 대속의 죽음까지 죽어야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도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식 문화의 단어로 말하면 문학은 나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이런저런 글들도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이었으며 하나님께 올리는
나의 간절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2013년 9월21일(토)
유 용수
2013-09-21 21:04:04 | 유용수
자매님^^
깊은 뜻을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전하는 재능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항상 배움에 성실히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공감하며 저 부터 노력해야할 부분인것 같아요.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09-21 16:31:51 | 김상희
어젯밤에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들어보았습니다.
참 좋네요.
http://www.youtube.com/watch?v=JWvaZRfaYNQ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2013-09-20 13:48:01 | 관리자
어르신 글을 읽으니,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나옵니다. 요즘에는 여러지체들의 생각과 나눔이 정말로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어르신 글속에서는 믿는자가 그 동안 걸어온 길의 모습이 잘 표현된 것 같습니다.
2013-09-11 22:44:35 | 김정호
형제님, 글을 읽으니, 성령님께서 구령의 교리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 지하철에서 오산에서 방배역까지 신학교 다니면서 미친듯이 전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닥치는대로 전도 했습니다. 거의 1년을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전철안에서 별욕은 다 먹었지요. 그런데 예상했던 것 만큼 많이 먹은 건 아니였어요.
가끔 주위 신학생들보면, 전철안에서 위로해주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것 없어요. 그냥 조용히 지냅니다.
직업이 영어 과외 선생인데,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가끔 수업안하고 전도만 1시간 정도 합니다. 아이들이 동의 하는 아이도 있고, 그냥 흘려보내는 아이도 있고, 약간 비웃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믿겠다는 아이는 없더라고요... 좀 지나봐야 겠어요. 그리고 또 기회가 되면, 계속 전해야겠어요.
구령자가 가져야 할 말씀을 몇몇 적어 볼께요.
(잠 11:30, 킹흠정)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winneth souls)는 지혜로우니라.』
(시편 126:5,6, 킹흠정)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귀중한 씨를 가지고 나아가 우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성경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 할때 많이 쓰입니다. 그리고 곡식 단들은 구령되어 그리스도께 인도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면 한국에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 대한민국을 위해 이룬 것보다 훨씬 큰일 한 것이라 생각 됩니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2013-09-11 14:12:38 | 김정호
김정호형제님 처럼 마음에 복음 때문에 부담감을 갖고 사시는 모습을 보면 참 기쁩니다.
지난주 설교말씀에 예레미야나 침례자 요한의 신실함(Faithfulness)의 끝에 보상이 목이 잘리는 것이었고, 옥에 갖히고 매질을 당하는 것이었기에 위로를 받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구령하면서 때로 낙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영혼구혼(구령)해 보겠다고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에 잔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몇명이 종종 라이크를 달아주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달리 않습니다.
"에휴~"라는 한 단어에 수십명이 댓글이 달리는 대학생 조카와 완전 비교됩니다.
옛날 세상에서 장로교에서 종교생활 할때는 참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했었는데 바른 성경을 찾고, 바른 교회를 찾았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더니 주변에 사람이 다 떠나버렸습니다. ㅎㅎ
어린아이 전용 약처럼 잔뜩 설탕시럽을 넣어서 맛있게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참 오랜 참으며 기회를 얻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온갖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진지하게 어느날 예수님을 전하면 아무리 오랜 시간의 관계도 한 순간에 단절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목사님들도 킹제임스 성경을 전하면 이단에 빠졌다고 소문을 퍼트리며 관계가 단절됩니다. 대체신학에 눈이 가려서 세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니깐요.
이런 구령의 아픔과 낙심을 나누면 어떤 분은 제가 뭔가 잘못 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합니다. 노아도, 예레미야도, 침례자 요한도, 스데반도 다 뭔가 방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구령의 방법에 무엇이 최상의 길이 될까요? 어떤이는 울면서 어떤이는 화를 내면서 전하겠지요.
북치고 꾕과리치는 전에 다녔던 교회 목사와 크리스마스와 이스터(부활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애 처음으로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 나름대로 파헤칠수록 이교도 풍습이라는 증거들은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는 흔적도 없으니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에게 물어 볼수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속으로 2주를 저주를 퍼붓더군요. 지금은 그렇게 저주를 받고서 4개월여를 광야 길을 온가족이 눈물로 헤매이다가 찾은 사랑침례교회를 만나게 된것에 감사를 합니다.
왜 사냐고 묻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사랑침례교회를 출석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명확한 답을 찾았습니다. 왜 사는지, 왜 사랑침례교회를 출석하는지.
그런데, 세상은 킹제임스흠정역 성경과 보배같은 교회와 진리 가운데 서신 신실하신 목사님을 전하면 다 교제를 단절합니다.
저를 저주했던 목사의 말이 많은 사람들과 교제가 풍성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증거랍니다. 교제가 단절되어가는 저는 구원을 받지 못한 증거라는 얘기겠지요. ㅎㅎ
골리앗을 봅니다. 다윗과 같이 일어서는 많은 용맹한 용사들이 사랑침례교회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3-09-11 12:49:58 | 최호준
자매님~ 글을 참 잘쓰시고 정리도 잘하시네요. 저는 말도 잘 못하고 글재주도 없어 정리는 커녕 글쓰는게 무서운데 자매님은 제 부러움의 대상이예요.
저는 요즘 기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봅니다.
예전에 뭐하나 아는것도, 잘하는것도 없는데 주일학교 교사가 맡겨져서 아이들을위해 시간,노력,열정 다 쏟아 말씀 가르치고 준비하고 매일 아이들을 위해 눈물쏟으며 기도하며 주님께 의지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헌데 지금은 그런 낮아진 마음도, 주님앞에 간절히 구함도 없는 제 모습에 참 마음이 아팠네요.
그래서 제 삶을 다시금 돌아볼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오늘도 주님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주셨기에 감사드리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갑니다
^^ 자매님~ 저 동문서답했지요? ㅎㅎ 제가 이렇다니까요?
자매님^^ 샬롬~!
2013-09-10 23:31:05 | 주경선
잔잔한 생각이 흘러가는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교육이 힘들다. 교육이 문제다.라는 이 나라에서
묵묵히 제자들을 섬기며 헌신하는 구별된 선생님들께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냅니다.
2013-09-09 12:35:59 | 김대용
대용형제님...
여기서 만나뵈니 더 반갑네요. 글이 좋아요.
최호준 형제님. 앞으로 많은 교제 나눠요...
제가 아직 좀 어려도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형제님처럼 간절합니다.
근데 아직 실행을 못하고 있지요...
이제 용기를 한번 내보고 싶습니다.
여하튼 좋습니다. 함께 잘 해보고 싶습니다.
2013-09-09 10:58:46 | 김정호
끝까지 신실하게...오늘 설교제목처럼 ..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그런 평가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2013-09-08 21:16:44 | 오광일
오늘아침에 운동을하면서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났는데...
이글을 읽으니 또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 생각도 나고 시골 풍경도 그려지고 아름다운 여정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 자신만 봐도 무언가에 흥미가 있을 땐 눈이 동그레지고 반짝반짝합니다.
그런 관심있는 아이들 눈빛을 보면 무언가를 더 알려주고싶은데 무기력한 눈빛을 대하면 답답해 지면서 저도 같이 관심이 없어지지요.
주님이 주신 세상, 하루하루 순간순간 아름답게 살면서 또한 항상 배워야겠다는 열정과 그리고 그래도 나에게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베풀며 살고 싶다는 바램을 저도 이아침에 가져봅니다.~^^
2013-09-08 08:52:19 | 박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