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지루하게 길었습니다.
장마가 7월 한 달 동안이나 오락가락 이어지더니 장마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무더위가 8월 한 달을 무섭게 달구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의 바뀜이야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8월의 달력을 떼어내자 벌써 아침저녁 바람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비도 왔고 너무 더워서 하지 못했던 운동을 하리라 마음먹고
가벼운 복장으로 동네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우리 동네 뒷산 길은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 계속 올라 다닌 길입니다.
이제는 낯이 익을 대로 익어서 오름세며 내림세가 한 눈에 환합니다.
길목마다 서 있는 나무들의 크기며, 심지어 풀 한 포기의 모습까지도 눈에 익어
이름이라도 지어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동안 못 보았다고 여간 새롭게 반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길가의 이름 모를 잡풀들은 또 그것들 나름대로
모두가 반갑다고 손짓하고 어찌 그리 오랫동안 뜸하였느냐며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나 풀들도 모두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하긴 꽃과 나무와 풀들이 거기서거기지 무슨 특별나게 다를 게 있으랴 만은
자연이 아름답다 함은 꽃과 나무와 풀들과 바위덩이까지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기에,
이제 막 긴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내고 가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산 전체가
한 덩어리의 꽃밭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걸으며 뜻밖에 문득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니, 오랫동안 한 마디 말로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한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과는 달리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 답은 이미 내 속에서 정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 속에 없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얄궂게도 내 속에 있는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한 마디 말로 속 시원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연인 이었던 아내가 “왜 나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건~그건~ 하였듯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한마디 말로 정리하여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이런저런 단편적인 답들을 끄집어 내 보기는 하였지만 만족한 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장 만족한 답을 오늘 오랜만에 뒷산에 오르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보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떠오르듯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문학은 나의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문학이란 참으로 희망사항이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온 문학이란, 남의 글을 통해서 읽은 많은 문학작품들과
그리고 마침내 내 손으로 쓴 이런저런 글들의 모든 내용들이
한마디로 나의 희망사항들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쓴 글들은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들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겠지만 나는 결코 내가 쓴 글 속에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글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은 현실의 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 희망사항 속의 나 일 뿐이었습니다.
현실은 이러한데 그런 현실의 내가 아닌 희망사항속의 저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나의 모든 글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오, 오, 참으로 그랬었구나!
나의 현실이 이렇다는 것은 무엇이며 글 속에서 바라는 바 희망사항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한 마디로 현실의 나는 결코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오, 맞았어.
바로 그것이었던 거야!
지금 두어 달 만에 산에 오르며
바라보고 있는 꽃동산 같은 저 자연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나는 결코 저 아름다운 꽃동산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내가 꽃 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구체적인 예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먹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하고 배설하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성질도 아름답지 못하고 버릇과 습관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도 아름답지 못하고 태도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한 번도 만물 앞에서 저 나무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 본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시도 내 겉과 속을 가리지 않고는 만물 앞에 나설 수 없을 만큼
추하고 더러운 모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 목사님의 말대로 한다면
나는 배설물과 같은 모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 같은 사실을 아마 젊은 날부터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노랫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지어 부른 시였습니다.
즉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문학작품에서나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다 죄 많은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누가 꽃을 가리켜 죄 많은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도저히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노랫말로 희망사항을 노래하고 시를 지어 희망사항을 낭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문학을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해서였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글도 쓰고 다른 사람의 문학작품도 읽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다면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셨다는
예수님의 기독교구속의 논리는 성립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무엇 때문에 대속의 죽음까지 죽어야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도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식 문화의 단어로 말하면 문학은 나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이런저런 글들도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이었으며 하나님께 올리는
나의 간절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2013년 9월21일(토)
유 용수
2013-09-21 21:04:04 | 유용수
자매님^^
깊은 뜻을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전하는 재능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항상 배움에 성실히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공감하며 저 부터 노력해야할 부분인것 같아요.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09-21 16:31:51 | 김상희
어젯밤에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들어보았습니다.
참 좋네요.
http://www.youtube.com/watch?v=JWvaZRfaYNQ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2013-09-20 13:48:01 | 관리자
어르신 글을 읽으니,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나옵니다. 요즘에는 여러지체들의 생각과 나눔이 정말로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어르신 글속에서는 믿는자가 그 동안 걸어온 길의 모습이 잘 표현된 것 같습니다.
2013-09-11 22:44:35 | 김정호
형제님, 글을 읽으니, 성령님께서 구령의 교리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 지하철에서 오산에서 방배역까지 신학교 다니면서 미친듯이 전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닥치는대로 전도 했습니다. 거의 1년을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전철안에서 별욕은 다 먹었지요. 그런데 예상했던 것 만큼 많이 먹은 건 아니였어요.
가끔 주위 신학생들보면, 전철안에서 위로해주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것 없어요. 그냥 조용히 지냅니다.
직업이 영어 과외 선생인데,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가끔 수업안하고 전도만 1시간 정도 합니다. 아이들이 동의 하는 아이도 있고, 그냥 흘려보내는 아이도 있고, 약간 비웃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믿겠다는 아이는 없더라고요... 좀 지나봐야 겠어요. 그리고 또 기회가 되면, 계속 전해야겠어요.
구령자가 가져야 할 말씀을 몇몇 적어 볼께요.
(잠 11:30, 킹흠정)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winneth souls)는 지혜로우니라.』
(시편 126:5,6, 킹흠정)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귀중한 씨를 가지고 나아가 우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성경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 할때 많이 쓰입니다. 그리고 곡식 단들은 구령되어 그리스도께 인도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면 한국에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 대한민국을 위해 이룬 것보다 훨씬 큰일 한 것이라 생각 됩니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2013-09-11 14:12:38 | 김정호
김정호형제님 처럼 마음에 복음 때문에 부담감을 갖고 사시는 모습을 보면 참 기쁩니다.
지난주 설교말씀에 예레미야나 침례자 요한의 신실함(Faithfulness)의 끝에 보상이 목이 잘리는 것이었고, 옥에 갖히고 매질을 당하는 것이었기에 위로를 받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구령하면서 때로 낙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영혼구혼(구령)해 보겠다고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에 잔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몇명이 종종 라이크를 달아주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달리 않습니다.
"에휴~"라는 한 단어에 수십명이 댓글이 달리는 대학생 조카와 완전 비교됩니다.
옛날 세상에서 장로교에서 종교생활 할때는 참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했었는데 바른 성경을 찾고, 바른 교회를 찾았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더니 주변에 사람이 다 떠나버렸습니다. ㅎㅎ
어린아이 전용 약처럼 잔뜩 설탕시럽을 넣어서 맛있게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참 오랜 참으며 기회를 얻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온갖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진지하게 어느날 예수님을 전하면 아무리 오랜 시간의 관계도 한 순간에 단절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목사님들도 킹제임스 성경을 전하면 이단에 빠졌다고 소문을 퍼트리며 관계가 단절됩니다. 대체신학에 눈이 가려서 세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니깐요.
이런 구령의 아픔과 낙심을 나누면 어떤 분은 제가 뭔가 잘못 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합니다. 노아도, 예레미야도, 침례자 요한도, 스데반도 다 뭔가 방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구령의 방법에 무엇이 최상의 길이 될까요? 어떤이는 울면서 어떤이는 화를 내면서 전하겠지요.
북치고 꾕과리치는 전에 다녔던 교회 목사와 크리스마스와 이스터(부활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애 처음으로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 나름대로 파헤칠수록 이교도 풍습이라는 증거들은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는 흔적도 없으니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에게 물어 볼수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속으로 2주를 저주를 퍼붓더군요. 지금은 그렇게 저주를 받고서 4개월여를 광야 길을 온가족이 눈물로 헤매이다가 찾은 사랑침례교회를 만나게 된것에 감사를 합니다.
왜 사냐고 묻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사랑침례교회를 출석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명확한 답을 찾았습니다. 왜 사는지, 왜 사랑침례교회를 출석하는지.
그런데, 세상은 킹제임스흠정역 성경과 보배같은 교회와 진리 가운데 서신 신실하신 목사님을 전하면 다 교제를 단절합니다.
저를 저주했던 목사의 말이 많은 사람들과 교제가 풍성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증거랍니다. 교제가 단절되어가는 저는 구원을 받지 못한 증거라는 얘기겠지요. ㅎㅎ
골리앗을 봅니다. 다윗과 같이 일어서는 많은 용맹한 용사들이 사랑침례교회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3-09-11 12:49:58 | 최호준
자매님~ 글을 참 잘쓰시고 정리도 잘하시네요. 저는 말도 잘 못하고 글재주도 없어 정리는 커녕 글쓰는게 무서운데 자매님은 제 부러움의 대상이예요.
저는 요즘 기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봅니다.
예전에 뭐하나 아는것도, 잘하는것도 없는데 주일학교 교사가 맡겨져서 아이들을위해 시간,노력,열정 다 쏟아 말씀 가르치고 준비하고 매일 아이들을 위해 눈물쏟으며 기도하며 주님께 의지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헌데 지금은 그런 낮아진 마음도, 주님앞에 간절히 구함도 없는 제 모습에 참 마음이 아팠네요.
그래서 제 삶을 다시금 돌아볼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오늘도 주님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주셨기에 감사드리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갑니다
^^ 자매님~ 저 동문서답했지요? ㅎㅎ 제가 이렇다니까요?
자매님^^ 샬롬~!
2013-09-10 23:31:05 | 주경선
잔잔한 생각이 흘러가는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교육이 힘들다. 교육이 문제다.라는 이 나라에서
묵묵히 제자들을 섬기며 헌신하는 구별된 선생님들께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냅니다.
2013-09-09 12:35:59 | 김대용
대용형제님...
여기서 만나뵈니 더 반갑네요. 글이 좋아요.
최호준 형제님. 앞으로 많은 교제 나눠요...
제가 아직 좀 어려도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형제님처럼 간절합니다.
근데 아직 실행을 못하고 있지요...
이제 용기를 한번 내보고 싶습니다.
여하튼 좋습니다. 함께 잘 해보고 싶습니다.
2013-09-09 10:58:46 | 김정호
끝까지 신실하게...오늘 설교제목처럼 ..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그런 평가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2013-09-08 21:16:44 | 오광일
오늘아침에 운동을하면서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났는데...
이글을 읽으니 또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 생각도 나고 시골 풍경도 그려지고 아름다운 여정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 자신만 봐도 무언가에 흥미가 있을 땐 눈이 동그레지고 반짝반짝합니다.
그런 관심있는 아이들 눈빛을 보면 무언가를 더 알려주고싶은데 무기력한 눈빛을 대하면 답답해 지면서 저도 같이 관심이 없어지지요.
주님이 주신 세상, 하루하루 순간순간 아름답게 살면서 또한 항상 배워야겠다는 열정과 그리고 그래도 나에게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베풀며 살고 싶다는 바램을 저도 이아침에 가져봅니다.~^^
2013-09-08 08:52:19 | 박순호
맞습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 화이팅!!!
2013-09-08 01:21:58 | 이청원
오늘은 절기상으로 아침저녁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입니다. 그래서 인지 여름 내 열어두고 자던 창문을 굳게 닫고 자야 할 만큼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이제는 정말 가을로 들어선 듯 합니다.
어제 오늘은 친정아버지의 생신을 축하 해 드리려고 아이 둘을 데리고 바쁜 남편을 대신해 KTX에 몸을 싣고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개구장이 두 아들녀석도 저도 모처럼의 기차여행이 신이 나기는 마찬가지 인가 봅니다. 차창 밖의 시골 들녁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과 마음이 저절로 정화 되는 듯, 상쾌하기 이를데 없고 이것 저것 가차 안에서의 군것질도 꿀맛입니다. 기차에서 내릴 쯤 되고 보니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느리게 가는 무궁화호를 탈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기차역으로 손주들 마중을 나오신 친정아버지의 환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제가 나고 자란 시골은 대둔산 자락에 자리잡은 논산평야입니다. 대둔산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인내천을 따라 탑정저수지에 머물러 일년 내내 농사에 풍성한 수량을 제공하는 비옥한 땅입니다. 얼마 전 <한국기행>이라는 프로에도 제 고향이 소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그 곳이 늘 제 마음의 모토입니다.
멀리 대둔산을 품고 유유히 흐르는 인내천의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 빛이 그리워......' 정지용의 시 <향수>를 연상케 하는 그곳이 바로 제 고향인 것 같습니다.
유난히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소문난 인내천의 푸른 물빛을 보고 있노라면 쪽빛깔이 연상됩니다. 파랗게도 보이고 초록빛깔 아니 옥빛으로도 보이는 푸른 빛깔, 그 속에는 오염되지 않은 수많은 생명체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여름방학에 아이들과 그 곳에서 신나게 고기도 잡고 뗏목도 타고, 물놀이하던 기억도 다시 떠오릅니다.
지난 여름의 추억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문득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단어가 생각나 사전을 찾아보니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더군요. 저도 쪽이라는 염료를 사용해 본 적이 있어 알지만 정말 풀에서 뽑아낸 염료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파랗습니다. 그냥 파란 물감과는 또다른 묘한 매력을 지닌 빛깔입니다.
사람도 이와같이 자기 자식이나 제자가 나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 똑같으리라 여겨집니다.
저도 아이 둘을 키우고 있지만 늘 저의 부족함 보다는 좋은 모습만을 닮기를 바라며 나보다 더 낫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습니다. 또 비록 저는 목회자는 아니지만 만약 제가 목회자라면 우리 성도들이 그러기를 바랄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 해 보니 예전에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기억을 거슬러 봐도 그렇고 제 아이를 키워봐도 그렇고 될 녀석은 정말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학습이나 공과공부에 임하는 태도부터가 다릅니다.
정말 무언가 뛰어난 녀석들은 우선 눈빛부터가 다릅니다. 대부분 수업시간에 졸고 있는 녀석들은 제 경험상 수업에 관심이 없거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녀석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반대로 수업태도가 좋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녀석들은 눈빛이 반짝반짝 하겠지요. 저역시 만약 제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수업을 들을 때에는 선생님의 말씀을 눈과 귀로 부지런히 따라가게 되고 손도 자연 열심히 메모를 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그 날 설교말씀이 은혜가 되고 관심이 집중이 될 때에는 말씀하신 내용 중 어느 책에서 인용하셨다거나 어디를 가 보셨다거나 하는 하나하나 까지 기억하거나 메모 해 두었다가 꼭 사서 보거나 가 보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심화과정은 관련된 다른 정보를 스스로 찾아보고 나름 정리 해 보는 것이겠지요.
조금은 우스운 이야기 이지만 청년시절에 한창 기도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 새벽기도회에 거의 날마다 참석해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기도하거나 금요철야예배에 끝까지 남아 기도하다보면 어느 때에는 목사님 보다도 더 늦게 남아 예배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질 때의 묘한 쾌감을 느끼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는 노동이고 기도 시간은 믿음과 비례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시절, 비록 방법은 잘 못되었지만 어찌되었거나 그런 열심과 열정이 가끔은 그립기도 합니다.
훌륭한 학생은 선생님이 제시하는 과제나 질문에 흥미를 가지고 즉각적이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사고의 폭과 교양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스승의 한계를 초월 할 수도 있겠지요.
요즘 고3 입시지도에 몸도 맘도 바빠진 남편에게 제가 "아니 이렇게 고생하고 바쁘게 일하는데 수당이라도 더 받고 일하는 거에요?"라고 물어보자 그런 말을 하더군요. "아니, 이건 스승으로서의 자부심이지. 제자가 잘 되는게 보람이자 상급이지." 그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두서없이 여러 말을 하긴 했지만 말씀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자세가 늘 배움에 성실히 임하는 제자들로서 매 순간 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의 연속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2013-09-08 01:08:59 | 김경민
전공했던 연극은 그만둔 지 한참 되었고 제 음성이나 모든 것은 그저 평범 이하쯤 될 뿐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열정이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믿는 대로 단순하게 행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말만 하는 부질없는 말쟁이가 아닌가?'라고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여러모로 한참 선배님이신데 앞으로 교회생활에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8-27 20:56:16 | 김대용
연극을 하신다던 목소리 크고 좋으신 김대용형제님께서 가슴을 적시는 길고 진솔한 덧글을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온 마음과 혼과 영을 다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깊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교회 어디 출석하고 계세요? 오늘도 기회만 닿으면 말했습니다. 내일도 그럴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를 분명히 미쳤다고,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줄 저 자신 모를까요?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리가 없지요. 하지만, 저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어서 묻고 전합니다. 어쩌면 작은 손망치로는 잘 깨질 것 같지 않은 두꺼운 돌 무덤을 두드리는 것 처럼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방금전에도 사촌동생이 다녀갔습니다. 담대하게 강하게 전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두번째 만남이라서 2탄을 역시나 용감하게 전했습니다. 이제 다시 만날 날이 어쩌면 없을 수도 있기에 잘 전하고 싶었습니다. 또, 예전 교회에 함께 출석했던 지인과 딸에게도 저는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패이스북 친구에게 오늘은 쪽지를 보냈습니다. 축도받는 시간에 예배당 나와서 눈총받으며 고생하지 말고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매달 만나기로 해서 자주 만났던 감자바우 8인방 친구들 모임이 요즘에는 1년에 2~3번만 만납니다. 늘 친구들이 기대하는 저의 복음 선포의 시간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과 세계사와 철학의 지식으로 무엇은 인정, 무엇은 너의 생각이고....자자자... 상대방의 종교에 대한 존중을 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듣기 싫은 소리를 잔뜩 듣다가 일어서서 떠나가는 사람들의 뒷 모습을 보면 눈물이 핑 돌기도 합니다. 마음 속으로 부디 죽기전에 꼭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별을 합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미친 사람이고 싶고, 이상한 사람이고 싶은 이유가 나름 있습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들도 부활하는 둘째 부활의 때에 저들이 저를 알아볼지도 모릅니다. 그때 왜 자신들에게 안 전해줬냐고 울면서 탄식하며 저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난감할까요? 그래서 그들이 그때에 제가 그렇게 귀찮게 괴롭게 지독하게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인 줄을 기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다른 소리 못하게요.
제 패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미친 놈이라고 단박에 알아봅니다. 저는 예수님으로 미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링크를 걸어둔 설교 말씀처럼 부담감을 함께 감당하게 하시려고 사랑침례교회에 모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형제님과 멋진 동역을 함께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2013-08-27 18:29:11 | 최호준
“교회가 변하려면 슬픔의 골짜기를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구절이 어떤 문맥에서 나오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어서 목사가 결국 최후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결과로 생기는 슬픔이라면
이런 슬픔이 우리 교회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우리의 연약함과 이기심 등으로 온 교회가 애통하고 자복하면서 겪어야 할 슬픔이라면
지금이라도 저부터 먼저 이 골짜기를 지나가고 싶습니다.
모세가 젊었을 때에는 자기 힘으로 백성을 인도하려 하였으나
그의 백성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40년 광야에서의 세월이 지난 뒤
그가 슬픔의 골짜기를 지난 뒤에는
그 동일한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슬픔의 골짜기라면, 주님이 인도하신다면 어서 통과하고 싶습니다.
좋은 교회, 양보다 질이 좋은 모임을 이루고 싶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3-08-27 17:28:24 | 관리자
지난번 형제님의 간증을 들을 때 깊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진솔한 고백이 제 마음을 촉촉이 적시었는데
오늘 만난 글로 인해 역시나 제 마음이 촉촉해집니다.
세상에는 '나만 잘 믿으면 되지 직장에서 유난떨 필요까지야 있나?'라며 원만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바라기는 치과 직원들이 거부감을 감수하고라도 지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유난스러운 원장님을 만난 것이
그 어떤 행운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속히 깨닫게 되길 기대합니다.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축사에 담긴 허망한 본질을 간파하는 글을 접하며 어린 시절 읽었던 세계명작동화가 떠오릅니다.
항상 마지막에는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마무리가 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자신의 힘으로 가질 수 없음에도 그것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여기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꼭 잔혹동화라는 기괴한 각색을 거치지 않아도 우리는 이 동화의 실제적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결혼하고 왕과 왕비가 되어 세월이 흘러 왕은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 후 다시 만날 수 없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사무치는 고독의 눈물을 삼키던 왕비도 몇 년 뒤 사망이
자신의 권능으로 호령할 때 제국이 부여한 모든 권력과 존귀함을 뒤로하고 덧없이 사망의 서늘한 품에 안기었다.'
구원받은 성도가 개별적으로 불신자를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을 흔히 가벼운 장도리로 돌(사람의 마음)을 깨는
행위라면 불신자를 집회로 인도하여 설교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 속에서 직접 듣게 하는 것은 최소한
육중한 해머로 돌(사람의 마음)을 내려쳐 부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후자는 또한 동시에 다수의 혼에
강한 권능으로 임할 수 있다는 것에서 다른 경우와 구별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외적으로 후자보다 전자를 통해
더 큰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후자에서 더욱 강력한 말씀의 권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전자를 통해 단단한 마음에 미세한 균열이 여러 차례 생긴 후에 후자를 통해 일거에 회심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원리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침례교회에서 설교 말씀을 녹음한 CD 보급에 힘쓰며 그를 통해 값진 열매를 거두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절대 개별적인 성도들의 전도가 무익하다는 것이 결코 아님을 헤아려 주십시오. 이는 언제나 절실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다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권능이 어떤 것이고 공적 예배나 집회를 통해 선포되는
대언의 말씀이 개별적인 복음 선포나 성경공부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성도들이 잘 이해할 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잃어버린 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지혜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수년에서 수십 년 복음을 전해도
꿈적도 안던 사람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느 날 한 번 혹은 몇 번의 집회 참석을 통해 회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사람의 혼이 고독하게 홀로 영적 광야에서 말씀과
대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 못할지라도 설교가 녹음된 CD를 자신의 골방에서 듣는 행위는
이와 유사와 영적 과정을 거치기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권능이 발휘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생을 걸고 말씀과 씨름하는 바른 설교자가 있어야 하고 그를 돕는 성도들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성령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전부터 품고 있던 제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침례교회의 모든 일이 덕스럽게 안정화되고 귀한 도움의
손길들이 규모 있게 배치되어 지금보다 목사님의 부담이 많이 줄어든 어느 시점에 성도들이 가슴에 사무치게
품고 있던 구원받지 못한 가족, 친지, 친구들을 소래예배당으로 이끌어 몇 날 며칠이고 집중적으로
바른 구원에 대한 말씀 선포를 듣게 하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어 바위 덩이 같던 그 마음들이 깨어지고 회심하는
감격스러운 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평소에 품고 있는 저의 작은 바람일 뿐입니다.
전에는 떠오르는 생각을 싹둑 잘라 댓글을 간소화하려 애썼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당분간
마음에 들어오는 감동대로 댓글을 더하려 합니다. 왜 이 사람은 이리 장문의 댓글만 올리나
느껴지시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며 다만 제 댓글이 본문을 올리신
성도님이나 다른 성도님들께 작은 유익이라도 끼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귀한 글을 접하게 해 주신 최호준 형제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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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가정의 평안은 당연히 모든 성도의 관심사이고 바람입니다.
저 또한 아직 정식 회원은 아니지만, 한쪽 구석에서
항상 목사님과 가족분들의 평안과 영과 혼과 몸의 강건함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3-08-27 13:10:08 | 김대용
감사합니다! 사람은 큰 바위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답니다. 아주 작은 돌뿌리에 걸려서 넘어진답니다. 잃어버린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냥 살아서 돌아와 주기만 바라는데 자꾸 저도 뭔가 아버지께 드릴 것을 무엇이라도 준비해서 가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집에 가서 종으로 살겠다 가장 낮은 자로 살더라도 내가 아버지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늘 겸손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2013-08-27 11:38:21 | 최호준
형제님을 글을 통해서 많이 느끼고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글도 잘쓰시는 것도 부럽구요~ 모니터링을 해주시는 아내분까지 계시니 첨상첨화네요
오늘 일어나자마자 형제님의 글을 읽고 생각이 많아 졌습니다. ㅎㅎ
오늘도 제안에 계속되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면서 형제님도 힘내세요...
2013-08-27 11:31:21 | 주경선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나 교회게시판에 올려지는 모든 제 글을 모니터링 해주는 아내가 늘 글 좀 올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리는데도 제가 또 글을 올렸습니다. ㅋㅋ
글을 쓰고 나면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무척 큽니다. 제가 감히 성경말씀을 한줄 옮겨 적는 것이 너무 주제 넘는 것 같아서 힘듭니다. 그런데, 자꾸 글을 쓰게 됩니다.
문법도 문맥도 엉망이지만 이렇게 함께 한 영 안에서 글로 교제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합니다.
2013-08-27 10:59:33 | 최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