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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깨뜨림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바른 진리와 말씀을 통해서 저도 배움에 게을리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12 11:03:16 | 김상진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게 되지만, 형제님의 글을 통해 마음을 열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글에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파(破: 깨뜨리다)'의 과정은 너무 어려운 일 같습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을 통해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2013-11-12 10:50:55 | 김지훈
무도(武道)를 익히는 데는 ‘수(臹: 익히다)’, ‘파(破: 깨뜨리다)’, ‘위(爲: 이루다)’라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여러 스승에게 고루 익혀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분별하여 깨뜨릴 것은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 비로소 자신만의(체형에 맞는) 무도를 이루어 내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단계까지 도통한 사람을 우리는 소위 ‘고수(高手)’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고수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파(破)’ 즉, 깨뜨리는 작업입니다. 그래야 진짜 옳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자신만의 것을 쌓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破)의 과정을 잘못 거치면 자신이 배운 것이 최고인양 거만하고 교만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엉뚱한 무(武)를 만들어 내거나 말도 안 되는 프레임(frame)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파(破)의 단계. 즉, 깨뜨리는 단계는 매우 중요하고 신중한 일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돌이켜 한 번 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단에 미혹되거나,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으로 가득한 현대 교회의 물질우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안타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한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 건축헌금하면 축복 받는다. 십일조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교회일 많이 하면 축복받는다. 만사형통하게 된다. 라는 등의 수많은 간증에 맥없이 현혹되고 맙니다. 과연 축복이라는 것이 자유 없이 행위적인 조건만으로 받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일까요? 또 하나님께서 인간과 그러한 거래를 기뻐하시는 분일까요? 그렇다면 봉사, 헌금, 충성 다 했는데도 왜? 여전히 마음이 곤고하고 힘들어하면서 자유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요? 또, 축복받는다는데 은행빛에 허덕이는 충성파 교인들은 왜 그렇게 많을까요? 축복을 받지 못해도 감사하다고 하면 믿음 좋다는 평가를 얻게 되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러한 관점에서 성도들은 한 번쯤 자신의 신앙상태를 심각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면 깨뜨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에 ‘學而不思則罔하고 思而不學則殆니라’ 라는 말이 있는데,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사리가 어두워지고,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파(破)의 과정은 배우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배우는 과정을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작업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말씀을 배우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배워서 분명하게 사리를 판단함으로써 위태로워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교리로 말씀이 선포되고 선포하는 교회와 목회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제공해주신 진정한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요?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그것들을 시험하라. 이는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나와서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라.“<요일 4:1>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7, 20>
2013-11-12 10:25:24 | 김상진
얼마 전 저희 형제가 저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을 혹시 읽어 봤냐고 하길래 그런 무시무시한 책을 왜 읽으려고 하느냐고 농담을 던진 적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멋모르고 도전 했다가 결국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책은 같은 책이라도 언제, 어떻게 봤느냐에 따라 이해하는 정도가 다른 것 같아요. 아직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인생을 좀 더 산 후에 다시 미완성이던 그 책(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기에 도전 해 보려구요. 누군가는 온 삶을 불태워 명작을 만들었는데 적어도 읽고 이해는 해야겠지요.^^ 그리고 은 소설이지만 희극적 요소가 매우 뛰어난, 다시말해 인물의 치밀한 성격과 관계 묘사, 사건의 전개가 워낙 뛰어나 연애소설로만 폄하하면 안될 것 같아요. 제인오스틴을 '영국의 여자 세익스피어'라 칭한데는 나름 그에 걸맞는 작품성을 인정받았기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영화도 너무 재미있게 잘 만들어져서 소설보다는 머리 식힐겸 영화로 한 번 보시길 강추합니다.
2013-11-09 22:16:02 | 김경민
그저 애정소설일 것이라는 편견(!)으로 책은 읽어 보지 않았었는데, 영화는 나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자매님 말씀처럼, 다양한 관계 속에 대입해 보면 또 다른 시사점을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샬롬.
2013-11-09 21:34:50 | 김지훈
스토리가 흥미롭네요. 재미있는 사랑이야기 정도로만 볼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안광으로 거기에 내포되여 있는 교훈과 가치를 파악해내여 삶의 지혜로 삶는 것이 바람직 하겠지요. 어떠한 작품을 보든지 우리는 정면적인 교훈과 반면적인 교훈을 포착해 건설적으로 또한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좋은것 같아요. 좋은 내용과 취지를 올려주셔서 고마워요. 샬롬.
2013-11-09 09:19:52 | 이춘옥
저는 이 책을 25년전쯤 대학교 도서관에서 읽었습니다. 남자는 (도대체) 알기 힘든 여성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감명(?)깊었던 기억이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책 제목이 Pride and Prejudice인데, Pride가 "오만"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Pride가 자동차 이름으로만 알고있었는데, 오만이라고 번역된 책 제목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을 했던적이 있었습니다. 프라이드-자존심-오만-교만... 인간의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교만.... 고개를 꼿꼿히 쳐들고 하나님께 대드는 교만.... 창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감히 따지려드는 교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한도 끝도 없는 교만.... 학교에서 선생님께 대드는 학생의 시건방진 교만... 교회에서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교회의 질서를 헤치려는 교만.... 제가 그랬습니다. 교만했지요. 교만이 철철 넘쳐흘렸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누군데 내 허락도 없이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 죄를 대신 갚아주시는가? 라고 생각했던 교만의 대마왕, 교만의 끝판왕이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죄인이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한도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위대하심 또한 감히 헤아려 알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13장1~2 모든 혼들은 더 높은 권력들에 복종할지니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거역하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아멘.
2013-11-09 05:30:20 | 김형욱
 다음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이라는 코너에 “신데렐라 구두를 차버린 여인”이라는 제목의 칼럼 내용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관한 서평입니다. 소설 속 이야기의 줄거리를 파악하시라는 의미에서 잘 요약 된 서평을 올린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잠시 고전을 감상하시면서 사색을 즐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미 2006년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기회가 되신다면 영화로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가 제인오스틴은 과연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려 했는지 직접 들어 알 수는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단순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소극적 해석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이해와 관계적 측면에서 이 작품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특히 결혼 안한 싱글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연애소설로만 바라볼게 아니라 부부의 관계, 혹은 교회 안에서의 관계로도 대입해서 본다면 더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수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청혼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고려하셔야지요. 당신의 지참금이 너무 적어서 아마도 당신의 장점과 많은 사랑스러운 자질의 효과를 상쇄할 테니까요.”(첫 번째 구혼자 콜린스 목사가 엘리자베스의 거절을 믿을 수 없어 하며 한 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우리가 처음 서양 문물을 접했을 때, 서구의 ‘숙녀’는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던가. 그러나 많은 ‘숙녀’의 삶은 치욕적인 곡예였다. 여성이 자력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없던 사회에서, 숙녀는 필사적으로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런데 결혼 시장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모두 적령기 여성의 배우자 찾기가 주제이다. 오스틴의 여섯 권 소설 중에서 제일 활기 넘치고 아기자기한 ‘오만과 편견’(1813년 출간)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닛은 지주 계층이기는 하지만 부친의 생존 기간 내에 결혼을 하지 못하면 생계가 막막해질 처지다.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남자 후손에게만 토지를 상속하는 ‘한정상속’ 제도에 의해 부친 사망 후에는 전 재산이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무일푼의 여자라도 데려가겠다는 신랑만 나서면 감지덕지 매달릴 의사가 추호도 없다.   인구도 적고 미혼 남성이 별로 없어서 결혼시장이 지극히 좁은 이 시골마을에 다시라는 남성이 등장하는데 처음 대면하는 날, 엘리자베스와 춤을 추라는 친구의 권유에 엘리자베스의 외모가 “봐 줄만은 해도 내 마음을 동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대꾸하는 것을 엘리자베스가 들었다. 다시는 헌칠하고 당당한 외모에 무려 연 1만 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대지주여서 최고 조건의 신랑감이지만 비사교적이고 거만해서 곧 마을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와 다시가 함께 있을 기회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자기를 관찰하는 듯 한 다시의 시선을 가끔씩 느끼게 되는 엘리자베스는 무슨 흠을 찾아내려는 것인가 하고 느낄 정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는 좀 가식적이고 얌전빼는 당시의 숙녀들과는 전혀 다른, 쾌활하고 재기발랄하고 비판적 지성이 예리한 엘리자베스에게 점점 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 집안의 지체가 자기 집안보다 현격히 낮고 엘리자베스의 부모, 여동생들이 모두 몰상식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와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이별을 하게 될 때 다시는 청혼을 하고 만다. 엘리자베스는 그동안에 다시가 자기 언니와 그의 친구의 결혼을 방해했고, 위컴이라는 싹싹한 청년의 장래를 잔인하고 비열하게 망쳤다고 오해해 지극히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청혼을 받고 엘리자베스는 순간적으로 다시가 거절당하고 상심할 것을 안쓰러워한다. 그러나 다시가 자기 이성이 만류하는 청혼을 열정에 떠밀려 한다고 고백하자 분노가 치밀어서, 분연히 거절하면서 다시를 자기 언니의 행복을 가로막고 악의로 한 청년의 일생을 망친 비인격자라고 맹비난한다.   다시는 비인격자는 아니었고 무식하고 속된 무리들에 대해 우월감은 느꼈지만 매우 관대하고 공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엘리자베스의 처지에서 자기의 청혼을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단호한 거부와 함께 자신의 인격에까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모욕감에 떨면서 엘리자베스에게 자기 친구가 몰상식한 가족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위컴의 일생을 망쳤다는 것은 완전히 오해였음을 해명하는 편지를 써서 건네고 떠난다.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치욕이었으나 차츰 자신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예의와 인격적인 존중이 미흡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역시 다시의 편지를 읽고 자기의 다시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 자신의 판단력 과신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수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영영 서로에 대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엘리자베스의 철없는 막냇동생으로 인해 집안이 치욕의 나락에 떨어지게 될 위기에서 몰래 전방위로 힘을 써서 그 일을 해결해 준다. 그것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의 다시에 대한 감정은 감사와 존경과 애정으로 변하고, 다시가 다시 구혼할 용기를 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마침내 한 쌍의 이상적인 부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오스틴은 불리한 조건의 젊은 여성 한 명이, 현실적인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기의 가치에 충실했기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모든 것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단지 인물 좋고 재산 많은 남편이 아니라 한층 향상된 인격자 남편의 애정과 존중까지 얻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다시를 혐오하고 인격을 불신하면서도 그의 뛰어난 조건 때문에 첫 번째 청혼에서 승낙했다면 다시의 부인이 된다는 사실은 같다 해도 그 결혼생활의 내용이나 행복의 질은 결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의 청혼 과정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기제일 뿐 아니라 오스틴이 강조하는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련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바탕이 주변의 속악한 인물들보다 지적이나 도덕적으로 단연 우월한 인물이다. 그러나 서로의 오해와 비난을 소화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결점을 깨닫고 한 차원 높은 도덕성과 포용력, 그리고 겸허함을 터득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이상적인 결합은 또한 철저한 계급사회이던 영국에서 많은 서민을 보듬는 모범적인 지주와 마님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들은 내적으로 타락해 가던 영국적 가치를 정화하고 다시 확립할―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주역이 되고 영국적 가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2세를 길러 낼 부모가 될 것이다.   이렇게 준엄하고 통렬한 교훈과 꾸지람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소설 속에 담아 놓은 오스틴에 대한 평가는 그녀의 사후 2세기 동안 계속 상승했다.<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영화<오만과 편견>, 2006년작  
2013-11-09 04:36:29 | 김경민
하나님이 주시는 힘에 의지하여 날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 반성하며 미흡하나마 그 분을 닮으려고 더욱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요즘 뭐가 그리도 빠쁜지...책읽을 엄두도 못내고 있는 가운데 반성하는 글을 대하니 숙연해 지면서도 흐뭇합니다.~^-^
2013-11-08 00:02:51 | 박순호
좋은 글 올리셨네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낍니다. 구원 받음과 동시에 우리의 악한 습관들이 자취를 감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다 한번씩은 인내하고 가끔은 섬기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함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시죠. "이것과 더불어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겅건을, 경건에 형제의 친절을, 형제의 친절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1:5~7) 아멘.
2013-11-07 19:02:19 | 이춘옥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우리는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회심 이전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지옥으로 가까이 가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을 체험한 후에 우리는 천국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변화로 모든 문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출발에 불과합니다. 구원 이후에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거부합니다. 현재에 누리는 것들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지요. 혹시 지금의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고 안도하는 자들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을 참되게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겸손한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자로 변화 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슬픈 모습들이 있습니다. 회심 전에도 통제하지 못하던 이들이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참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구원 전과 똑같은 삶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늘 사람을 변화시키며 그 변화는 반드시 지속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피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분께 속한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의 반응은 자신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모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요구들에 진실된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 반응했음을 증명했습니다.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진보하고 변화하려는 불타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을 지속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과 영역은 신조가 아니라 인격 되신 주님 이었습니다. 빌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 이니라 주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분의 일을 수행하도록 명령을 내리실 모든 권위를 갖고 계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순종케 하실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바울은 엄청난 시련들을 기꺼이 감내 했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어려움들을 그는 주님과 함께 나누었고 그분과 교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 되었던 사실을 인정했고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에 자신이 전혀 참여하지 못한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핍박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으려 했습니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그러한 핍박은 당연히 찾아옵니다. 날마다 그는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님을 더욱 더 닮아가고자 했습니다.
2013-11-07 15:19:55 | 이수영
WCC 역사의 뿌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알수 있도록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도바울이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라고 권면의 말씀을 한 것 같이 우리의 소중한 영혼이 사탄에게 노략질 당하지 않도록 잘 분별 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wcc에 가입한 교단이나 지교회에 wcc나 에큐메니컬운동 등의 실체를 알려드려 다 정죄받지 않도록 여러모로 노력해야겠습니다.
2013-11-06 15:17:55 | 이우상
오늘 아침에 페북의 김병삼 목사 "화평케 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에 화가 나서 글을 몇개 달았습니다. 퇴근시간이 되어서 김동호 목사가 WCC와 국정원사건을 함께 비교하면서 자신을 색맹에 비유하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모르겠다면서 글이 올라와서 그냥 퇴근하지 못하고 글을 또 날렸습니다. 정치목사라고 해야 할까요? 바른 성경에 대한 관심도 연구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몰이를 하고는 있지만 설교라는 것을 들어보면 성경말씀은 없고 자신이 읽은 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식입니다. 회색분자를 자처하는 김병삼 목사는 자신의 본의와 상관없이 WCC관련자로 자신이 감리교단이라서 자동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인데 자신은 WCC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식이고, 김동호 목사는 WCC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답니다. 색맹에 비유하면서요. 참담한 현실을 아주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정도로 심각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랑침례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교회인지 다시금 소름끼치도록 절감했습니다.
2013-11-06 00:05:53 | 최호준
노아의 시대와 같은 이 시대에.. 사랑침례교회가 노아의 방주와 같은 역할을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곳곳마다 상한 영혼들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오네요! 오늘 천안에서 어떤 형제님이 오셔서 (성경 구입하시려고 인천 소래까지 오셨네요.) 짧게 나마 교제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 말씀하시길... "매주 아주 죽을 맛입니다. 짜증나 죽겠습니다... 그런데 온 가족이 몇십년동안 섬기는 교회다 보니 쉽지가 않네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위로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를 주셔서 선한 방법으로 교회를 옮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길 기도합니다."뿐이었어요. 주님의 긍휼 하심이 우리 민족을 덮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2013-11-05 00:01:55 | 오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