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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닮아가기-1 을 읽으시고 오해하시는 분이 계셔서 다시 이해를 돕기위해서 첨언을 했습니다. 문제시 하셨던 부분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제 글의 요지는 성경 지식만 자랑하는 잘못된 거룩함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참 거룩함을 본을 받자는 것 입니다. 부디 오해가 풀리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 29 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이에 그들이 도시에서 나와 그분께로 오더라. 부정한 땅, 사마리아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통과하지 않는 부정한 땅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갖고서 들어가십니다. 고작 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주시려고 예수님께서 한 낮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으셨습니다. 사마리아 부정한 땅으로 반드시 가셔야 하겠다고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선생님이라고 했다가, 대언자라고 했다가, 메시아 그리스도로 나중에 깨닫을 때까지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개념치 않으시고 우물에 앉으셔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여자는 마침내 깨닫고서 자신의 물 항아리도 팽개쳐 놓고서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외칩니다. “와서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번개가 우르릉 거리고 땅의 지축이 흔들거립니다. 깊은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로 보이는 끝이 없이 깊은 심연을 바라보다보면 그 깊음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지구표면 어디엔가 발을 붙이고 서 있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무섭게 느껴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벌레와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지으신 하나님의 권능을 상상해 봅니다. 작은 무 씨앗에서 커다란 무가 자라나게 하시는 권능을 봅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의로우라. 라고 요구하셨지만 우리 가운데 누가 얼마나 거룩할 수 있으며, 누가 얼마나 의로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 공로에 의지하여 의롭고, 거룩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을 은 삼십에 팔아버릴 것을 다 아시면서도 제자의 발을 씻어 주셨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옆구리 창자국에 손을 넣게 하셨습니다.(실제로 넣지는 못했을 겁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선 난 물고기나 잡으러 간다고 예수님을 떠나버린 제자들. 밤새도록 고기를 잡겠다고 난리였는데, 물고기는 그날따라 무슨 특수훈련을 받은 고기들처럼 한 마리도 그물에 안 걸려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베드로를 다시 또 찾아가셔서 아침 밥상도 차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구라고 부르시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저는 쉽게 교만해집니다. 저 정도로 1대1로 양육을 받았다면 나는 더 잘 믿었을 거라고요. 저렇게 깨닫는 것이 어려울까? 참으로 깨닫는 것이 느리고 답답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모세도 많이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정도 보여주었고, 그 정도 가르쳤으면 이제 좀 알아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꾸지람하실 법도 한데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내 옆구리 창자국에 넣어보아 구원을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A: 목사님 제가 장남에 장손인데요. 제사 지내도 될까요? B: 제사 지내셔도 됩니다. A: 네? @@ 천주교에서는 되도, 기독교에서는 안 되잖아요? B: 예수님 믿으세요? A: 네~ ? @@ 잘 모르겠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 따라서 가급적 나오려고요. B: 그러니깐 제사 지내셔도 됩니다. A: @@ A: 목사님 제가 장남에 장손인데요. 제사 지내도 될까요? B: 제사 지내시면 안 됩니다. A: 네? @@ 천주교에서는 된다는데 왜 기독교에서는 안 되는 거죠? B: 그럼 천주교로 가세요. A: 네~ ? @@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 따라서 가급적 나오려고 했는데 아내랑 천주교로 가야겠군요. B: 그러니깐 제사 지내지 마시라고요. 제사 지내시면서 교회를 나오시게 하는 것이 답일까요? 제사 지낼꺼라면 천주교로 가라고 하는 것이 답일까요? 예수님은 거룩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 예수님을 닮아간다고 하면서 믿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거룩함과 예수님의 의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신학대학을 장학금 받으면서 다녔고, 신학 박사학위가 있고, 내가 성경 통독 300번 넘게 했고, 나처럼 성경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지, 히브리어, 헬라어도 내가 알만큼은 알고, 내가 모태신앙이고, 나는 예수님을 아주 일찍 중학교 때 만났지, 이런 것을 거룩함이라고 생각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연약한 지체들에게 너는 아직 교회 다니면서 담배를 피냐? 너는 아직 교회 다니면서 술을 마시냐? 쯔쯔쯔 한심한 놈. 아직도 성경 통독을 한 번도 못했다고, 아직도 한번구원 영원구원도 못 믿어? 칼빈의 5대 강령을 믿고 있단 말이야? 쯔쯔쯔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도대체 뭐한 거냐? 구원을 받기는 받은 거야? 다 늙어서 이제 교회 나와서 뭘 어떻게 배워서 어느 세월에 구원을 얻겠어.(제 아버지 어머니, 제 장인, 장모께서 이제 교회 나가십니다.) 젊어서 도대체 뭘 하고 산거야? 매일 술이나 퍼 마셨겠지. 설교시간에 아주 퍼질러서 엎드려서 잠을 자면서 교회는 도대체 왜 나오는 거야? 헌금도 안하면서 교회 와서 밥만 축내면서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먼저 구원받은 성도라고 연약한 지체들을 이렇게 생각하시거나 이렇게 말씀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언제부터 예수님 믿으셨나요? 교회를 나가서 첫날에 믿으셨나요? 몇 일만에 예수님을 믿으셨는지요? 몇 달 만에 믿으셨는지요? 몇 년 만에 믿게 되셨는지요? 그동안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를 다녔던 그때 우리자신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린 우리들의 영적 교만이 거룩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사람들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람들의 지금의 겉모습을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 거룩함이 아닐는지요?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가운데 나의 자녀가 많다. 라고 섬기라고 하시지 않으실까요? [마태복음 18:10]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느니라. [사도행전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공격하여 해치지 못하리니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라, 하시더라. [로마서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자기 형제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기회를 두는 사람이 없는지 판단할지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와서 예수님을 보라! 라고 외치며, 모인 사람들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잘 섬겨서 훗날 예수님 두 번째 나타나실 그 때에 수고했다. 라고 모두 칭찬받는 성도님들 다 되셨으면 합니다.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2013-11-29 14:50:57 | 최호준
우리 가정과 교회와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뿐 입니다.
2013-11-29 14:30:25 | 허광무
매일 뉴스나 신문을 보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휘둘리고 그나마 북한과 대치까지 하고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다 정치권은 항상 다투고만 있는 암담한 현실에 저도 모르게 그런 기사나 뉴스가 나오면 눈을감게되고 리모컨을 돌리게 됩니다. 그때마다 제마음에 들어지는 생각은 이런 악하고 두려운 세상에서 우리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감사입니다.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리는 마음이 잔잔하고 평안해지는 것을 느끼고 이런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과 내가 뭐라고 이 큰 은혜를 입었을까 다시금 감격하게 됩니다. 지금 시대를 보면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에 홀려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가고 있는 아이들처럼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내 영혼이 어디로 갈지 전혀 사고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당장 저희 부모님도 예수님 이야기를 꺼내면 화부터 내셔서 지금은 예수님이 부모님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하고 기도만 하고있는 상태라 가슴 한켠에 먹다 체한 것 처럼 안타까운 마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침례교회의 모든 형제 자매님들의 가족중에 아직 구원받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교회가 모두다 합심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부모님을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2013-11-29 13:42:20 | 이정희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잘읽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깊은 번민이 아닐 수 없네요,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귀가 잡혀있는 천년왕국에서 조차 죄를 짓는 것을 보면 환경문제가 해결이 되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연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내속에 있느냐?는 것이죠, 나침반과 같이 주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새로운 역활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을 향한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으면 합니다. 귀한 묵상 감사합니다.
2013-11-29 11:27:23 | 조양교
구약을 보면서 왜 이스라엘은 잘나가면 우상숭배에 빠지는지 이해가 안됐어요. 아! 그러나 다시 태어나고 내안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에도 이스라엘의 모습이 내게도 있다는 나의 실체에 대해 참 수도 없이 낙심하고 넘어지고 ......아담의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날마다 전쟁을 치르는 것에 익숙해 가면서 나의 이러함에도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 감격합니다. 정말 가족은 더 어려운 대상입니다. 온 가족이 친가 외가 모두 한믿음안에 있는 가정이 드물지만 부럽습니다..... 형제님의 블도저 같은 열정에 감탄합니다 다시 전략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2013-11-29 07:50:34 | 이수영
사람은 어디를 가나 똑같지요.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도 모양만 다를 뿐 똑같고요 그러나 생명의 씨앗이 있으면 싹이 나옵니다. 모양도 다르고 영양상태도 다르고 땅의 형질도 다르지만 생명의 씨앗이기에 각기 연약하고 모양과 상태가 다를지라도 생명이 있습니다 좋은 밭에 옮겨 잘 양육이 되고 의지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열매를 거두게 되지요 사람을 보면 똑같을 수 밖에 없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생명이 있으므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지요 유유상종이라는 말과 같이 같은 류가 모이고 끌리게 되는 것 같아요 형제님의 예리한 분별력과 바른 가치관이 청년들에게 좋은 향기로 영향을 끼치기를 원합니다. 생각하게 하는 글 감사해요.
2013-11-29 07:38:31 | 이수영
저도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그 놀라운 사건들 첫째는 모두 죽으나 어린양 피를 발라 재앙이 지나간것,홍해가 갈라지는것들을 직접 보고 경험한 이스라엘이 쉽게 하나님을 잊는것을 보면서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 있습니다. 아마도 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것 같습니다. ㅠㅠ. 어떤 일본 사람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바뀌는 방법은 세 가지 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교류하는 사람을 바꾸는 것 이 세가지 방법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 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저는 사람이 바뀌는 건 오로지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아 새롭게 되는것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시간을 쓰게 되고 사는곳이 이 세상이 아닌 하늘 본향으로 바뀌며 교류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성도들과 구원받아 하늘에 계신 성도들로 바뀌니 사람이 바뀌게 되겠지요. 형제님 권면의 글처럼 우리 모두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으로 예수님을 닮아가십시다.
2013-11-29 05:23:39 | 김형욱
예수님 닮아가기   요한복음 4장 29 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이에 그들이 도시에서 나와 그분께로 오더라.   부정한 땅, 사마리아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통과하지 않는 부정한 땅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갖고서 들어가십니다. 고작 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주시려고 예수님께서 한 낮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으셨습니다. 사마리아 부정한 땅으로 반드시 가셔야 하겠다고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선생님이라고 했다가, 대언자라고 했다가, 메시아 그리스도로 나중에 깨닫을때까지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개념치 않으시고 우물에 앉으셔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여자는 결국 깨닫고서 자신의 물 항아리도 팽개쳐 놓고서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외칩니다. “와서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번개가 우르릉 거리고 땅의 지축이 흔들거립니다. 깊은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로 보이는 끝이 없이 깊은 심연을 바라보다보면 그 깊음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지구표면 어디엔가 발을 붙이고 서 있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무섭게 느껴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벌레와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지으신 하나님의 권능을 상상해 봅니다. 작은 무씨앗에서 커다란 무가 자라나게 하시는 권능을 봅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의로우라. 라고 요구하셨지만 우리 가운데 누가 얼마나 거룩할 수 있으며, 누가 얼마나 의로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 공로에 의지하여 의롭고, 거룩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을 은 삼십에 팔아버릴 것을 다 아시면서도 제자의 발을 씻어 주셨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옆구리 창자국에 손을 넣게 하셨습니다.(실제로 넣지는 못했을 겁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선 난 물고기나 잡으러 간다고 예수님을 떠나버린 제자들. 밤새도록 고기를 잡겠다고 난리였는데, 물고기는 그날따라 무슨 특수훈련을 받은 고기들처럼 한 마리도 그물에 안 걸려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베드로를 다시 또 찾아가셔서 아침 밥상도 차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구라고 부르시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저는 쉽게 교만해집니다. 저 정도로 1대1로 양육을 받았다면 나는 더 잘 믿었을 거라고요. 저렇게 깨닫는 것이 어려울까? 참으로 깨닫는 것이 느리고 답답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모세도 많이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정도 보여주었고, 그 정도 가르쳤으면 이제 좀 알아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꾸지람하실 법도 한데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내 옆구리 창자국에 넣어보아 구원을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A: 목사님 제가 장남에 장손인데요. 제사 지내도 될까요? B: 제사 지내셔도 됩니다. A: 네? @@ 천주교에서는 되도, 기독교에서는 안 되잖아요? B: 예수님 믿으세요? A: 네~ ? @@ 잘 모르겠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 따라서 가급적 나오려고요. B: 그러니깐 제사 지내셔도 됩니다. A: @@   A: 목사님 제가 장남에 장손인데요. 제사 지내도 될까요? B: 제사 지내시면 안 됩니다. A: 네? @@ 천주교에서는 된다는데 왜 기독교에서는 안 되는 거죠? B: 그럼 천주교로 가세요. A: 네~ ? @@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 따라서 가급적 나오려고 했는데 아내랑 천주교로 가야겠군요. B: 그러니깐 제사 지내지 마시라고요.   예수님은 거룩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 예수님을 닮아간다고 하면서 믿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거룩함과 예수님의 의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신학대학을 장학금 받으면서 다녔고, 신학 박사학위가 있고, 내가 성경 통독 300번 넘게 했고, 나처럼 성경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지, 히브리어, 헬라어도 내가 알만큼은 알고, 내가 모태신앙이고, 나는 예수님을 아주 일찍 중학교 때 만났지, 그러니깐 나는 거룩해.   너는 아직 교회 다니면서 담배를 피냐? 너는 아직 교회 다니면서 술을 마시냐? 쯔쯔쯔 한심한 놈. 아직도 성경 통독을 한 번도 못했다고, 아직도 한번구원 영원구원도 못 믿어? 칼빈의 5대 강령을 믿고 있단 말이야? 쯔쯔쯔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도대체 뭐한 거냐? 구원을 받기는 받은 거야? 다 늙어서 이제 교회 나와서 뭘 어떻게 배워서 어느 세월에 구원을 얻겠어. 젊어서 도대체 뭘 하고 산거야? 매일 술이나 퍼 마셨겠지. 설교시간에 아주 퍼질러서 엎드려서 잠을 자면서 교회는 도대체 왜 나오는 거야? 헌금도 안하면서 교회 와서 밥만 축내면서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언제부터 예수님 믿으셨나요? 교회를 나가서 첫날에 믿으셨나요? 몇 일만에 예수님을 믿으셨는지요? 몇 달 만에 믿으셨는지요? 몇 년 만에 믿게 되셨는지요? 그동안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를 다녔던 그때 우리자신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린 우리들의 영적 교만이 거룩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사람들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람들의 지금의 겉모습을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 거룩함이 아닐는지요?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가운데 나의 자녀가 많다. 라고 섬기라고 하시지 않으실까요?   [마태복음 18:10]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느니라. [사도행전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공격하여 해치지 못하리니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라, 하시더라. [로마서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자기 형제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기회를 두는 사람이 없는지 판단할지니라.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2013-11-29 01:56:39 | 최호준
형제님의 힘있는 글에 감동이 넘칩니다. 페북에 링크 걸어서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장모님 장인, 형제들과 친척들. 그 결과로 제사상에 밥을 13 그릇씩 떠놓던 제사상이 없어졌고, 친부모님은 교회를 몇년째 출석하시고 계십니다. 새벽기도도 매일 열심히 나가십니다. 그런데, 종종 방문해서 예수님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어떤 분이신지 여쭤보면 세례(가까운 장로교를 나가고 계심)를 받으셨지만,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답답해서 목사님께 이메일도 드렸습니다. 잘 복음을 전하시겠다고 답장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도 방문하여 구원을 검증해보면 전혀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십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해드리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은 조금만 길어지면 눈을 보면 벌써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이 보입니다. 열심히 새벽기도 시간에 가셔서 참으로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실 겁니다. 복 받게 해달라고요.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주말에 달려가서 모시고 와서 예배를 함께 드려야 할런지. 돌아가시기 전에 꼭 믿으셔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사랑침례교회처럼 좋은 교회가 청년들에 의해서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2013-11-29 01:05:15 | 최호준
저도 아이를 둘 키우고 있어서 다른 어떤것 보다 아이들이 자라서 주님안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망이 제일 큽니다. 지금은 부모 품안에서 그래도 세상물결에 휩쓸리지않고 보호받으며 살고 있지만 앞으로 학교를 마치고는 스스로 믿음을 지키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로 악해져만 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것이 얼마나 힘든것인지를 잘 알기에 항상 붙들고 이야기하고 함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도 합니다. 그래도 큰 위안이 되는 것은 바른 성경과 바른 말씀 옳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마음을 정한 지체들이 모인 이 귀한 교회에 우리 아이들이 함께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구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많은 아이부터 청년까지 모두 구원받고 하나님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을 정하고 거친 이 세상을 이기며 힘있게 살아가게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주님앞에 기도합니다.
2013-11-28 23:57:22 | 이정희
많은 청년들이 경배와 찬양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어야 은혜받는다고들 알고있고 새벽기도 ,방언으로 믿음의 척도를 재는 시대에 형제님같이 그곳에서 벗어나 올바른 말씀으로 분별력있게 조언해주시니 크게 귀감이 됩니다 우리 청년부들의 앞날이 기대가 되어요^^
2013-11-28 23:08:35 | 최은희
길고 깊은 묵상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청년의 때를 지나며 바른 말씀과 믿음안에서 정착한 모습을 잘 증언해 주셨네요. 오로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많이 외치지만 과연 그러한가...이글을 보고 깨닫는 분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2013-11-28 22:49:30 | 오혜미
좋은 글 감사합니다. 청년들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성도들이 잊지 말아야 할 전도서 말씀이네요. 바른 말씀과 진리를 추구하며, 자신을 게으름과 나태함에 내어 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샬롬
2013-11-28 22:28:45 | 김지훈
흔히 청년 혹은 청춘을 아직 활짝 피어나지 않은 망울이 맺힌 꽃봉오리에 비유합니다. 저의 청년기는 20대를 고스란히 지내온 9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응답하라~!’ 라는 제목으로 90년대 청춘의 다양한 군상을 다룬 드라마가 추억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90년대도 이제 어엿하게 과거 대접을 받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청년기는 고등부, 청년부를 거쳤던 교회 생활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소위 경배와 찬양 문화가 전국적 열풍을 일으켰던 90년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함께 이런저런 찬양집회를 쫓아다니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 애쓰기도 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캠퍼스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명한 선교단체에서 그들의 뜨거운 열정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군 전역 후에는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아는 대형교회에 출석하며 수천 명이 넘는 청년부와 미국에서 직수입한 첨단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 속에서 나를 변화시킬 무언가를 간절히 구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저는 제 나이에 걸맞지 않게도 아직 미혼이기에 청년부에 속하게 되는 호사(?)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 청년의 시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보내야 하며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당시 다니던 교회 지하 기도실에 가서 함께 기도하고 집에 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늦은 밤에 항상 한쪽에서 기도하시던 여자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고등부 같은 학년 친구의 어머니였습니다. 안 들으려 해도 한쪽에서 열성적으로 기도하시던 그분의 기도 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가족, 특히 자녀들을 위한 기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어머니 뜨거운 기도를 받고 자란 제 친구는 그 후 무난하게 결혼하고 자녀도 낳고 무난하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무난한 것 그 이상의 무엇을 찾아볼 수 없는 교인이 되었다는 것, 바른 성경이나 바른 교리 찾아 고민하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그저 원만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그 친구에 대한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과거 저도 가끔 경험했던 교회 간증집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흔히 ‘전도 왕 모 집사’라고 해서 열정적인 전도 혹은 교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로 유명한 여 집사가 초청되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역설하는 전형적 모습이 연상되는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이런 간증에 흔히 등장하는 것이 자녀 자랑입니다. 대략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기도를 심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자녀들이 세상적으로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사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전문 직종에 진출해 엄마에게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하라고 용돈을 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었다는 자랑에 회중들은 이내 아멘을 합창하곤 했습니다.  과연 그 뜨거운 어머니의 믿음의 기도를 받아먹고 자란 자녀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간증집회에 자주 거론되던 그 많은 잘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 사회 곳곳에서 리더로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원만한 기독교인이 되었을지 몰라도 비진리와 불법에 항거하고 진리를 위해 손해 볼 수 있는 크리스천이 되지 못한 이들이 간증에 등장하는 복 받은 자녀들 중 허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크리스천 부모들의 열망은 실상 다른 사람들 보기에 그럴싸한 눈에 보이는 복에 대한 갈망이었음을 과연 숨길 수 있을까요?  코스타(KOSTA)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웬만한 크리스천들은 다 아는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이 단체는 해외 여러 국가에 흩어져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앙 수련회를 진행하는 곳입니다. 아마도 애초에 이것을 시작한 목사님들의 생각은 해외 유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국내 들어오든 해외에서 자리를 잡든 후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는 리더들이 될 터이니 이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포부가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분들의 바람은 얼마나 실현되었습니까? 지금도 이 단체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핵심 운영진이라는 분들의 면면 보노라면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복음을 혼탁하게 하는 이분들이 과연 젊은이들을 이끌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당 홈페이지에서 그 수련회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아도 유학생들이 멀리 타국에서 공부하며 느끼는 고독과 어려움을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의 반응일까요?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필요들을 채우고 현실 속에 느끼는 여러 고민을 나누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과연 이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들이 청년들을 양육시켰던 패턴들이 거의 이와 같습니다. 저는 단언하건대, 이렇게 해서는 복음을 위해, 진리를 위해 손해 볼 수 있는 크리스천이 절대로 양육되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들은 그동안 청년들에게 무엇을 심어 주었습니까? 진로와 취업, 결혼 등 미래가 불안정하기만 한 청년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과거 교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바로 비전(vision)입니다. 하나님의 비전 혹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비전 등을 모토로 내세워 뭔가 원대한 가치를 청년들에게 던져주고 그것을 좇아 쉼 없이 달려가면 그 끝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그야말로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전략이 불안한 미래를 안고 사는 젊은 세대를 교회에 붙잡아두는 한국 교회의 방법론이었습니다.  주로 미국에서 검증된 최신 프로그램의 도입과 교회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유지하는 것에 효과만점인 각종 대외 선교활동, 은사주의의 부스러기들,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받은 감동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특성을 지닌 현란한 찬양 문화 등 정말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지 않고 철저하게 세상에 물든 청년들이 입맛만을 맞추는, 더 나아가 담백한 입맛을 가지고 있던 청년들조차 자극적인 영적 양식에 익숙하게 만들어 버리는 교육이 바로 한국교회가 청년들에게 행했던 교육입니다. 마땅히 진리의 보금자리로서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가르쳐야 함에도 많은 청년들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만 있다면 MSG가 잔뜩 들어간 프로그램도 전혀 마다치 않고 도입했던 모습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배와 찬양 문화가 그야말로 한국의 크리스천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허리케인보다 더한 광풍으로 감싸 안았던 90년대 초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엄청난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한국의 경배와 찬양문화를 선도하던 모 선교단체에서 주최하는 ‘올네이션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였습니다. 당시 모임을 주최하던 목사가 “88 올림픽 이후 이곳에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라는 감격스러운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당시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당시 그 단체를 이끌던 하 모 선교사님이 그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선교사로 헌신할 청소년, 청년들은 일어나십시오, 거룩한 생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청소년, 청년들은 일어나십시오.”라는 외침에 회답해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던 그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액면 그대로 당시 그런 거룩한 가치에 헌신한 청년들이 진정성이 있었고 그 후 잘 양육되었다면 지금 한국의 교회들의 영적 기상도가 이렇게 암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원만하게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갖고 교회 집사로서, 평범하고 성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30~40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와 함께 90년대 청년기를 거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때로 2,000억 원 넘어 들여 지은 웅장한 교회 건물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또 일부는 그렇게 교회를 이끄는 리더들에게 항거해 마치 세상에 이 교회밖에는 갈 교회가 없는 양 분리되어 나올 생각도 못하고 끊임없이 아옹다옹하기만 합니다. 그들은 또한 전임자가 물러난 후 새로이 담임을 맡은 40~50대의 젊은 목사들이 이전보다 더욱 악하게 교회를 이끌어도 대형교회 교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꿋꿋하게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에 편입되어 진리로 인한 심각한 고민보다 현실에 순응하며 그 속에서 안식하는 요령을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너무도 바쁘게 땀 흘리며 살아가다가 주일 하루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유일한 낙이요 자부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바른 신약교회가 도대체 무엇이며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는 그저 원만한 기독교인 일 뿐입니다.  저는 감히 확신하건대, 90년대 중·고·청년부를 거쳐 온 대부분 한국의 30~40대 크리스천들의 가장 대표적인 현재의 모습들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오 청년이여, 네 젊은 때를 기뻐하라, 네 젊은 시절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들로 걸으며 네 눈이 보는 대로 걸으라. 그러나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 자리로 데려가실 줄 너는 알라. 그러므로 슬픔을 네 마음에서 제거하며 악을 네 육체에서 치우라. 어릴 때와 젊을 때는 헛된 것이니라(전11:9~10).  아마도 청년에 대한 구절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구절 중 하나가 위 전도서 11장의 구절일 겁니다. 이 두 구절에는 청년들의 특징이 함축되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미래를 위해 도전하며 마음에 열망하는 것들을 소유하고자 달려가는 시기가 바로 청년의 때입니다. 때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향락에 몸을 내어 맡기는 것이 이 시기의 특권인 듯 행동하는 것이 우리 주위에 흔한 젊은이들의 모습이고 솔직히 상당수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90년대 청년들에게 통했던 교회들의 구호와 프로그램의 효력도 이제는 서서히 그 수명을 다해가는 듯합니다. 세상의 유혹은 더욱 강렬하게 조직화하며 자극적이 되어 가는데 교회들은 세상과 대항하고 그 흐름에 역행하기는커녕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 호응해 따라가던 그 발걸음조차 이제는 힘겨워 보입니다. 그나마도 이곳저곳 심지어 지방에서 상경한 청년들까지 몰려들던 대형교회의 청년부마저도 아주 조금씩 위축되고 그 위상이 추락하여 갈 때쯤이면 정말 한국 기독교는 암울한 쇠락의 시대로 본격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독립침례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독립침례교회의 청년부도 당연히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분리되어 온 귀한 지체들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여기도 사람의 속성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며 역설적으로 독립침례교회 청년부를 경험하며 왜 이전 일반 교회의 청년부 담당 사역자들이 그런 현란한 프로그램과 세상의 시스템을 청년부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욕구와 열망을 충족시키지 않고는 그들을 모을 수 없다는 일반적 원리를 청년부 사역자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20대 중반의 몇 년을 보냈던 서빙고의 한 대형교회는 청년들의 주일 예배장소 중 하나로 홍대의 유명 클럽을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청년 유흥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세상 속으로 침투하는 사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욕망의 카니발의 벌어지던 장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행한다는 것은 사실 치기 어린 의욕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참신함과 진취적인 것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들의 청년부 문화의 극단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사용해 청년들을 모으고 그런 행위들이 효과를 발휘하고 그것을 또 다른 교회에서 벤치마킹을 하며 복음이 빠진 속된 부흥기법만 난무하는 청년부가 곳곳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는 단순하고 명료하며 담백한 복음만을 가지고는 청년들에게 다가가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 보입니다. 더불어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니라 이유 없는 기독교 안티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늘어나고 복음은 이전보다 더욱 젊은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11장 9~10절은 세상의 관념으로 보았을 때 청년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권면을 합니다. 노년에나 생각해야 할 인생의 마감과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청년 시절부터 묵상하라는 선명한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교회들은 청년들에게 세상의 관념에서 보아도 거부감이 없는 교훈만을 주고 양육해 왔습니다. 미래에 대한 도전, 진취적 기상, 열정적 헌신, 창의적인 활동, 심지어 세상에 나가 높은 고지를 정복하라는 ‘고지론’까지 모두 도전하고 쟁취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크리스천 청년들은 세상에 나아가 건실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서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청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면 매우 큰 문제입니다. 보이는 것들의 가치를 초월하는 영존하는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전도서 11장의 교훈을 교회에서조차 청년들에게 가르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진정 암울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청년들이 추구해야 할 불변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도 보존되는 영존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고전3:12~15, 고후5:10) 더불어 몇십 년의 짧은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쇠락하는 인간의 청춘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허무할 뿐이라는 단적인 선언이 명료한 진리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전11:10)  효율성을 자랑하는 세상의 기법으로 부흥하는 교회들의 청년부가 그 위세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성장하는 청년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허약하고 헐벗은 초라한 영적 상태에 처한 중년이 될 뿐임을 우리는 지난 세월의 교훈 속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담백하고 깨끗한 복음의 위력으로 청년들의 삶을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신념을 결코 양보하지 않을 때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진리의 횃불이 청년들의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말씀을 수호하고 많은 교회들의 그릇된 행위들을 정확히 분별하며 바른 교리 안에 굳건하게 서서 좁은 길 가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들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세상은 점점 암울해져 가고 이전 시대에 없던 인면수심의 젊은이들마저 곳곳에서 출몰한다는 삭막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시대의 영적 상황이 암담할수록 더욱더 세상의 가치가 아닌 영존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진리로 인해 청춘의 꽃봉오리를 활짝 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청년들이 일어나는 참된 부흥이 이 땅 곳곳에 허락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내가 온 마음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오 내가 주의 명령들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숨겼나이다. 오 찬송을 받으실 주여, 주의 법규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내 입술로 밝히 드러내었으며 모든 재물을 기뻐하는 것 같이 주의 증언들의 길을 기뻐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훈계들을 묵상하고 주의 길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내 자신이 주의 법규들을 기뻐하고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119:9~16).   
2013-11-28 19:08:08 | 김대용
회개와 회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갖게 되었습니다. 항상 회개는 나 자신부터 시작해야 남에게 권면할 수 있고 나와 공동체의 회복도 가능해 짐을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나는 회개할 것이 없으니 너를 정죄하련다.'라는 생각에 빠진 이들이 참혹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의 내면을 잘 살펴야 하는 고통스럽더라도 복이 되는 회개와 회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13-11-28 00:42:42 | 김대용
그리스도 닮기..회개.. 구원 이후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간절히 원하는 것이지만 회개하지 못하고 또 잘못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굳은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죄에 대해 민감한 또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길 바랍니다
2013-11-27 18:26:08 | 임성희
신앙생활이란?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답이 날로 날로 길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들, 예전, 전통, 절기 등에 열심을 내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바른 성경 킹제임스 흠정역을 만나서 매일 말씀을 읽고 바른 교리를 깨닫아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3-11-27 15:35:49 | 최호준
치료의 최종목적은 회복에 있습니다...이 글이 마음에 와 닿네요. 하나님과 나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키시기위해 이땅에 오셔서 저의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예수님이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2013-11-27 11:36:13 | 윤영원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치료의 과정을 겪어야 하고 고통없이 깨끗하게 치유되기 어렵겠죠.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할 여러가지 일들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협력하기를 소망합니다.
2013-11-27 11:05:04 | 김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