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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에 관해 얼마나 알고계십니까? 그 분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그분은 지식이 무한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모든 곳에 계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창1: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기에 영적이고, 정서적이고, 이성적이고, 도덕적입니다. 우리는 의지의 지적인 행위로써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할 때에 하나님의 친구됨의 측면들, 곧 용서, 내적인 변화, 평안, 목표와 소망들이 우리 삶의 요소들이 됩니다. 그분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완벽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주님의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생명을 공유함을 의미합니다.   -요1서1: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및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부르심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관계의 조건을 지정할 완전한 권한은 창조자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이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창조주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이셨습니다. 선택은 중요합니다. 모든 선택은 필연적으로 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더욱더 배워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분의 영감 받은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적절하고 능력 있게 말씀하는 성경의 권능 및 그에 따라 행할 때 초래되는 삶의 참된 변화가 있음을 압니다. 개인적인 필요를 느끼는 가장 깊은 영역들이 위로와 도전과 책망과 인도로 채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 지닌 으뜸가는 능력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주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가운데서 그분을 만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지극히 커다란 만족을 얻습니다. 이러한 흡족함은 하나님을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그분이 다함이 없는 풍성함을 지니고 계심을 , 또 그 풍성함을 성령님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기를 원하심을 발견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오직 섬김에 열심히 집중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바깥에 위치하게 하는 일은 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하는 일입니다. 모든 활동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는 절대로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으로 나의 생애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드려 그분께서 성령님으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의 결과로 창조주와 더불어 맺은 관계의 진실 됨을 증거 하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우리의 생애동안에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가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거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골1:27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즉 주님께서 내안에 살고 계시고, 또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즐거워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 생애의 특정한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시기적절하게 주어짐을 경험합니다. 시련의 때에 평안을 얻고, 혼란의 때에 그분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특별한 속성을 지녔을까요? 성경은 어떻게 해서 변함없이 모든 세대에게 살아있고 적절한 책일까요?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하나님 말씀의 꿰뚫는 능력은 무엇을 말해주나요? 그것이 당신의 삶의 가장 깊고 가장 민감한 영역들에 손댈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당신이 감추었던 것을 밝히 비출 것이며 당신의 동기를 살필 것입니다. 성경은 필요할 때마다 엄청난 위로를 전해 줄 것입니다. 당신이 인도를 원할 때 빛을 비추어 줄 것입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당신은 어두운 데서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창조주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 중에서 이 관계를 즐거워하거나 제대로 누리는 수준 높은 삶을 사는 이들은 소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어떠합니까? 혹시 풍성한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혹시 죄악 되고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에서 건짐 받지 못한 건 아닌가요? 혹은 타협적인 삶을 사는 까닭에 장래의 소망에 대하여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어두움 속에서 행하는 어떤 일들이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당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길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큰 영적 전투를 치르는 영역은 어디인가요? 바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시간을 내는 문제입니다.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명령들을 지키라.   그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그분을 주님으로 여겨 완전히 복종함을 의미하며 그분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서 강력한 역사를 시작하시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종 깨어짐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 경험은 당신의 그 어떠한 경험들보다도 더 깊이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하나님의 영이 비추는 거룩한 빛에 의해 당신이 지닌 모든 영역의 어두움이 다 노출됩니다. 당신이 지닌 이기적인 동기가 다 드러납니다. 자백하지 않았고 용서받지 못한 모든 죄들이 돌연 엄청난 무게로 당신을 짓누릅니다. 이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근심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그와 같은 깨달음은 또한 어떠한 확신을 줄까요? 진행되는 이런 일들의 배후에 전능자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이 있음을 깊이 확신하게 합니다.   나는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또 나를 통해서 일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분의 삶을 사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나는 완전히 부서졌고 철저히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존재가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졌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분이었습니다. 나는 평안을 얻었고 나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좋은 때도 있었고 나쁜 때도 있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나는 늘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누렸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때를 만납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벗이 했던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경험하면서 나는 지극히 놀라곤 합니다. “때로는 좋지 않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 하나님은 내게 시기적절한 말씀을 주십니다. 시련의 때에도 나는 그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당신은 자기 생애의 주인이 되시는 주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지 않으렵니까? 그렇게 하면 당신은 성령님의 충만을 경험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그분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으렵니까?  
2013-12-16 10:16:33 | 이수영
살면서 종종 기사를 통해 로또의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에 대해 들으면 한편 부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로또복권을 구입해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 또는 어딘가에서 나누어주는 행운권을 받아서 열심히 응모해 보지만 단 한번도 당첨된 적이 없기 때문에 왠지 그런 행운과 저와는 거리가 멀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주님안에서 살면서 제가 얼마나 행운아인가 하고 자주 생각해봅니다. 우선 태어난것도 최소한 1억분의 일의 확률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고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수백억명의 사람들이 살아왔는데 그중 구원받은 것을 생각해 보면 도대체 얼마의 확률일지 가늠이 안될 정도이니 제가 얼마나 행운아 일까요? 기껏 행운권의 최고 선물은 자동차나 때로 아파트 한채인것에 비하면 구원을 값으로 비교할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수시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얘들아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인지 너희는 모르지? 이 지구상에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니? 이 구원을 돈으로 비교할 수 있겠니? 엄마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부자인 삼성 이건희 회장님이 하나도 안부럽다 그분 돈하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맞바꿀수 있겠니?" 하고 이야기 하면 제 마음도 수천억 가진 부자가 된것 같고 모든 근심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면서 마음이 풍요로와 지곤 합니다. 하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저희 아이들은 제가 "얘들아 우리가 얼마나 복받은~~"하고 운을떼면 "알아 알아 엄마 내가 받은 구원을 삼성 회장님 돈으로 바꾸겠어? 나도 이건희 회장 안부러워"하고 제 레파토리를 외워서 읊곤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말뿐이 아닌 아이들 마음에 항상 넘쳐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제 마음도 죽을때까지 변치않기를 바라고요.
2013-12-14 22:26:44 | 이정희
이 글을 읽노라니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던 말이 생각 납니다.저역시 수 십년간의 종교의 틀 속에서 종노릇하던 일 인으로서 다시 생각해도 아찔 합니다. 주일마다 성경 본문과는 상관 없는 "교양강좌"(?)를 들으며 갈등 하고있던 제게 친구 권사는 "똑 같은 말씀을 들어도 나는 이렇게 은헤가 되는데 당신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던 말도 생각 납니다.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힌 그들에겐 진리를 전해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아닐까요?
2013-12-14 16:50:52 | 유옥희
비단 공산주의만이 세뇌가 있는것이 아님을 쉬 접합니다 엉혼의 자유속에서 웬지 허전함을 느끼고 체득된 대로의 길을 다시 반복하려는 사람을 보며 참 무서운 세뇌구나 !싶었네요 새 포도즙은 새 포대에 넣도록 잘 버리는것이 필요하지요.
2013-12-14 12:37:23 | 이수영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두 가지 관점에서 자기의 믿음을 바라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즉 선 본질 후 현상에 대한 명확한 자아진단의 필요성과 확신성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의 본질에 따라 결정되고 나타나는 새 본성의 당연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전혀 본질상의 문제의식이 없는 소위 인위적인 옛 본성의 작위적인 현상인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자리 잡힌 두 본성 간에 얼마나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냐의  실제적인 전투와 승패의 경험에 좌우되지 않을 경우엔 쉽게 옛 본성에 휘말리고 잡혀버린 채  새본성의 연약함과 부끄럼의 태를 쉬이 벗어나기가 참 어려워지는 경우를 맞을 때, 바른 말씀과 교리의 울타리 안에서 양치기의 꼴의 질과 양떼들의 식음 태도는 매우 주요한 변수라는 점에서 이처럼 자각과 돌봄을 선사하신 귀한 글을 읽고나니 저 역시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로 계산하고 오해할 때 항상 실망과 넘어짐을 경험하였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12-14 11:30:11 | 최상기
혹여라도 오해가 있을까 하여 댓글을 올립니다. 저는 당연히 우리 사랑침례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종교 시스템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얻으시고 구원받은 성도님들인 것을 믿습니다. 단지, 부족한 문장을 통해 잠시나마 우리 시대의 가슴 아픈 영적 현실에 대한 묵상을 나누려 한 것임을 헤아려 주십시요. 항상 감사합니다.
2013-12-14 01:40:06 | 김대용
*1편 :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3778   종교생활에 심취해 바른 신앙과 구원의 도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요? 때로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쉽게 변하거나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친구 중에 교통사고로 뇌에 위중한 부상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과 본인의 노력으로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이 없을 정도로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죽기 직전까지 갔던 엄청난 사고와 오랜 회복기간을 거치고도 이 친구의 성격적인 단점은 거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인정하는 그 독특한 아집과 단점들이 그런 큰 인생의 위기를 겪고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변하기 힘든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정확하게 증명해 줍니다.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저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매 그가 이르되, 아니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니(눅16:27~30)  본문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지하세계의 낙원에 있는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아직 살아있는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그들이 회개하여 지옥의 자식 신세를 면하게 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종교 시스템의 노예로 살다가 지옥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종교의 핵심 요소인 눈에 보이는 것,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즐겨 반응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형제들의 종교성을 타파시키려는 이 부자의 내면에 증식하는 지독한 종교 바이러스는 지옥의 불꽃으로도 박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호흡이 그 육체에 붙어있는 동안 당대 가장 고급스러운 삶의 범주를 누리고 살다가 지옥의 불꽃 속에 절여지는 대반전을 경험하고도 생각의 중심축이 옮겨지지 않은 이 놀라운 현상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위에 이야기했듯이 지옥의 고통은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를 놀랍도록 한참이나 초월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이 부자는 지금 그 초월적 징벌의 세계를 온몸―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이들이 말하는 혼적인 몸(soulish body)―으로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끝내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부패한 사고의 틀을 전혀 벗어버리지 못하는 놀라운 실상을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보이는 것이 있어야 믿을 수 있고 기적적인 일 정도는 일어나야 사람이 변하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대언자들의 선포로는 절대 충분치 않다는 이 전혀 낯설지 않은 하나의 전형적인 신념은 21세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종교 시스템은 심지어 이 부자를 거슬러 올라가 가인에게까지 다다릅니다(유11). 또한, 이러한 굳건한 일종의 사고방식 즉, 사람의 눈과 감각기관으로 감지되는 현실 세계의 증거들을 통해서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은 모든 현세적인 축복을 갈망하는 기복적 태도와 사실상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이를 정확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바로 종교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역사를 타고 흐르는 이 뿌리 깊은 지독한 욕망의 덫이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누렸던 한 사람을 지옥 자식 신세에서 면하지 못하게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종교에 빠진 이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바른 믿음을 규정하고 정의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참으로 들었은즉, 그것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것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10:17~18).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1~3).  이와 함께 지옥의 불꽃이라는 초월적 형벌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부패한 사고체계를 허물지 못했던 부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통렬한 선포가 위의 말씀들과 얼마나 정교하게 일맥상통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눅16:31).  지금 이 순간까지도 천국과 지옥의 방문기를 설파하는 거짓 간증자들을 통해 저리도 명확한 성경 말씀은 여전히 모욕을 당하고 멸시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실존했던 인물인 유대인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와 복음의 엄청난 간극에 대해서 명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끝까지 고집하며 종교인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복음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명확한 계시의 말씀들이 기록된 성경책을 밤낮없이 들고 다니면서도 종교인으로 살다가 파멸해 간 선배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허다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거대한 종교 시스템 속에 기생하는 거짓 대언자요, 거짓 선생들입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5~18).  종교인, 특히 거짓 대언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마태복음 7장 21절~23절의 말씀도 개역 성경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오히려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1~23)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마7:23).”라는 말씀은 제아무리 기적적인 은사를 뽐내고 세상도 부러워할 만한 찬란한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예수님께서 결코 안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받은 적이 없는 거짓 대언자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변질된 나무요,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까지 가로막는 종교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숙주일 뿐입니다.  이렇듯 파멸의 길로 이끄는 거짓 대언자들에게 사로잡힌 종교인들 중에 상당수는 대단한 지성인이며 매력이 넘치는 인기인이고 권세가이며 모략이 넘치는 전략가들입니다. 그들은 복잡한 수식을 척척 풀어내고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뚫고 들어가 유연한 처세로 세상에 우뚝 서고 화려한 논리가 탑재된 말솜씨로 청중을 장악하며 고매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둔하고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명료한 복음의 정수를 깨닫지 못해 수시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나 정작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딤후3:7).  종교인은 여전히 철학, 선행, 고행, 희생, 헌신, 자선과 심지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도, 헌금, 예배, 침례, 유아 세례, 각종 성사 등의 종교 행위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달하고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사람의 모든 행위와 의는 누더기와 같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갔나이다(사64:6).  심지어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모 교단의 어떤 교회는 그 이름이 ‘종교’라고 한다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묘한 것은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특별히 지난 WCC 부산총회 준비에 열심을 보였다고 하니 교회의 이름과 무언가 통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WCC 부산총회 준비가 한창이던 때 그것을 지지하는 한 교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왜 WCC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사악한 단체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교인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일쑤였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며 제 말에 논리적으로 더 내세울 것이 없어지자 이 교인은 비로소 명언(?) 한 마디를 남깁니다. “당신이 뭘 그렇게 잘 알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장담합니까? 그렇게 당당하다면 WCC 총회를 추진하는 목사님들보다 더 유명해지고 권위가 생긴 다음에 와서 말을 하세요.” 이렇듯 종교인들의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세상이 부여한 권위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시대의 대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심연에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하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버려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던 거지였던 나사로가 낙원의 거주자가 된 모습을 지독한 회한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부자처럼 종교인에게도 생전에 가슴 시린 추억이 있고 소박한 즐거움에 미소 짓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들도 뜨거운 피를 가졌고 연인과 함께 절절한 사랑을 나누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다시 오지 않는 흘러간 청춘을 추억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합니다. 그들도 세월 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지는 이런 모든 삶의 조각들의 소중함을 알기에 자기 나름대로 종교 시스템 속에서 영존하는 생명을 얻어 보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마지막은 명백한 파멸입니다.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미래는 철저하게 닫힌 미래일 뿐이고 원상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종교 시스템에 발목이 붙잡혀있는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거짓 선생의 덫을 벗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만족하게 하는 그 자리에 안주하면 당신의 그 모든 소중한 삶의 조각들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당신의 두 눈과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함과 분노와 저주와 자포자기일 것입니다.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일생을 복음을 모르고 종교생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절망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사람의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그야말로 완벽한 절망입니다. 부디 제발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완벽한 절망, 그 혹독한 미래에서 속히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거니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다시는 보상도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잊혔기 때문이로다. 또한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이제 사라졌나니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 중에서 그들이 차지할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전 9:5~6)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막9:48~49)
2013-12-14 00:04:10 | 김대용
사람은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이 끊임없이 미래를 바라보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친구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거나 전화 통화를 하다가 끊을 때 대부분 “다음에 또 보자.” 혹은 “다음에 연락하자.”라고 말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것도 이런 성향이 반영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항상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꾸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여깁니다. 장성해서 결혼하면 평안하고 안락한 중년과 노년의 삶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자녀들의 미래가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소망하며 삶을 일구어 나아갑니다.  과연 미래가 열려있지 않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주유를 가득하고 달려갈 준비를 모두 마쳐도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에 놓여 있다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람에게 미래가 열려있지 않고 닫혀 있다면 그는 삶의 추진력을 상실하고 모든 기능들이 일거에 해체될 것입니다.  성경은 미래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어떤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에게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미래는 소망을 담고 앞날에 대한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닫힌 미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극심한 근심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요즘 난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야~!”라고 자조 섞인 고백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도 바로 이런 ‘닫힌 미래’를 맞이하며 살게 된 사람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감당해야 할 닫힌 미래는 더 이상의 변화나 개선이 허용되지 않고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막9:44). 분명히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인 이 부자는 당시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풍요와 환락을 누리며 살았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가 입었던 자주색 옷은 당시로서는 왕이나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귀족들이 즐겨 입었던 옷으로 그의 사회적 위치를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삿8:26, 에8:15). 또한,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사치를 즐기고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듯 돈을 맘 놓고 써도 재산이 줄어들 줄 모르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눅16:19) 심지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거의 매일 벌이는 파티에서 남겨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고자 하는 나사로를 비롯한 여러 거지들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건대 실로 대단한 재력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자는 당시에 살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따르는 멋진 삶을 살던 사실상 당대의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던 부자는 삶을 마감한 후에 영원히 고정되어 변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종류의 현실 속에 처하게 됩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눅16:23~24)  언젠가 지금 광주·전남 지역에 킹제임스 성경을 알리고 바른 신약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한재석 형제님의 설교 중 들었던 “여러분은 과연 지금 죽는다면 당장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에 올라가 그분을 뵈올 텐데 그때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육신을 벗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하실지 생각하고 사시나요?”―물론 제 기억에서 추출한 것으로 설교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라는 대략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설교를 들으며 매우 참신하게 우리가 잊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죽은 후에 눈을 떠 보니 지옥의 불꽃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그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요? 사실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솔직한 답입니다. 천상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지옥 불꽃 속에 절여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심정도 감히 인간의 평범한 정서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임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지옥은 제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사람이 지옥이라는 무자비한 진공청소기의 위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누리다 삶을 마감한 부자가 그야말로 대반전, 엄청난 뒤바뀜, 상상 이상의 엄혹한 현실을 마주할 때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지는 짐작이 불가능하고 간접체험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매우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대문을 활짝 열고 지금도 쉴 사이 없이 구원받지 못한 혼들을 빨아들이고 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정작 이런 심각한 위기를 뼈가 저리게 느낄 수 없으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한 인간에게 닥친 시급한 위기와 위협은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받은 구원의 감격만을 기뻐하기에는 주위에 파멸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복음이 널리 퍼져있다고 자부하는 한국 땅에서조차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미처 구원받지 못하고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멈춰 버리는 비극이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하고 충격적인 것은 파멸의 대륙으로 건너가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살아생전에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라고 자부했던 종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주저함 없이 부르는 것을 볼 때 그는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이었고(24절) 생전에 모세 5경을 읽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들었던 사람일 것입니다(29절). 짐작건대 그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걸맞게 유대인의 율법과 규례를 배우고 지키며 각종 헌물과 희생물을 부족함 없이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훌륭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지없이 그가 죽은 후 지옥의 불꽃 속에 절규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16장 23절의 ‘고통 중에’라는 말의 원어는 고문 등의 극단적 자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 견딜만한 고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릴만한 상황이 절대로 아닙니다. 살아있다면 곧 기절해 버릴 수도 있는 극한의 고통을 쉴 사이 없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이런 지옥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여의도에 위치한 불신자들도 다 아는 한 대형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형제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형제님의 고백은 전에 그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교리와 규범에 빠져 소나무 뿌리를 뽑아낼 기세로 기도에 열중하며 신비한 것을 추구하던 시절에도 무엇인가 은사주의 교회의 모든 모습이 내내 역겹고 불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바른 교회를 찾고 또 찾아 결국 그곳에서 빠져나와 지금의 교회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그 교회를 세계적인 초대형 교회로 일군 목사 일가의 범죄와 비리는 낱낱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해당 교회의 교인들은 잠잠하기만 합니다. 매 주일 기독교방송에 방영되는 예배 영상을 보아도 여전히 평안하게 주일예배에 참여하고 문제의 핵심에 위치한 원로 목사가 노구를 이끌고 더듬거리며 하는 그 설교에 아멘을 연발할 뿐입니다. 수십만 명의 교인들 중에 그런 비리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폭로 기자회견을 열고 또는 더 이상 참지 못해 교회를 뛰쳐나가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단 1%도 안 되는 듯합니다.  하나님과 본인 자신만 알 수 있는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뉘라서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런 명명백백한 비리와 타락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이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모범적으로 멋지게 별처럼 살았다고 자부했던 유대인 부자는 실은 마귀의 자녀요 지옥의 자식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세상 누구보다 구원받기에 가장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었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을 읽을 수 있었고 살아서 활동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풍요로운 생활이 그의 영적 지각을 둔감하게 했지만, 그것이 그가 구원받을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그의 몸에서 호흡이 멈추기 전까지 회개하고 돌이켜 참믿음을 소유한 자가 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너무도 명료하고 단순한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채 많은 종교 행위만을 먼지 같은 유산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 지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영적 문제에 있어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가 그 옛날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의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시급하고도 위중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여기서도 교묘한 기만전술을 펼칩니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이끌어 가려는 마귀의 집요함은 또 다른 이단의 무리를 통해 이 화급한 문제에 물타기를 시도하곤 합니다.  소위 매우 큰 믿음을 소유했다고 자부하는 어떤 목사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매우 참신한 화두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미 다 알 듯이 이 사람은 지독한 은사주의자요, 신사도주의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신 속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명백한 행위구원론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들에 대한 중대한 이슈를 이런 황당한 거짓 선생을 통해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 철저하게 매장해 버리려는 사탄의 간악한 술책에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도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요,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오늘날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종교생활에 빠져 끝내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도 결코 사탄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은 그들은 자신의 욕망, 고집, 불순종,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 굳어 버린 양심 등으로 인해 스스로 수렁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실로 엄청나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편 계속 :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3779&page=&cate_name=&sfl=&stx=&sst=&sod=&spt=&page=
2013-12-14 00:00:08 | 김대용
스스로 자기에 대한 매우 솔직한 입장에 설 때 이외로 기쁨과 소망을 만났던 것 같아요. " 그래요, 전 우리 교회의 그 많은 섬김 안에서 늘 이기적이고 야박하기만 한 채무자였습니다" 그 빚 짐까지 은혜롭다는 것을 일러주신 주님 은혜를 감사할 따름입니다...
2013-12-13 10:05:48 | 최상기
매우 진지하게 대안을 요구하셔서 적이 망서렸습니다.  그냥 지나치는 건 도리가 아니라서 궁리도 해 봤지만 그 역시 만만찮았구요,  평이한 구시대를 살아낸 늙은이로선 현 시대상에 더 많은 부담을 갖기 마련이죠. 형제 자매님들의 고견들 감사하면서 추후 본 건은 더 활발한 담론을 가질만한 필요를 느낍니다.
2013-12-13 08:49:27 | 최상기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그분앞에 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제인가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더욱 우리는 겸손히 주님이 기뻐하시는일이 무엇인가 내가 말하고있는 말은 혹시 합당한 말인가 자신을 돌아본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글, 아니 말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3 06:16:59 | 윤정용
참 좋은글을 써주셨내요. 마지막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차려야 될것 같아요 마귀는 더욱 간계를 써서 우리에게 접근해 오니까요.요즈음은 친절을 배풀어도 저 사람이 왜 나에게? 무슨 속샘이 있을거야 하고 의심을 하고 더욱 가까이 하기를 꺼리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끼리는 그런거 없이 마음을 주고 받는 대화에서 참 자유를 느끼는것 같아요 특히 우리 사랑교회 형제 자매님들 한태서 많이 느껴요. 혹시 불만 불평이 늘 깔려있고 안좋은 말을 전하는 그래서 이간을 시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는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자들하고는 절대 사김을 같지 않아야 물이안듭니다 주유소에서 총무로 일하시는 동생분도 형님의, 그리고 형수님의 인격에 서서히 녹아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믿음의 울타리로 들어오게 된것 같아요 그소리를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2013-12-13 05:58:57 | 윤정용
최상기 형제님을보고 아는것이 참 많으시구나 생각은 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교육과 좋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렇구나 간증을 듣고 알았습니다. 생각도 깊게 하시고 교회봉사도 몸을 아끼지않으시고 열정이 넘치시는것 같아요. 몸만좀 더욱 튼튼하게 신경을 쓰셨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이 잡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세요.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왜야하면 저도 45년 생이거든요.
2013-12-13 05:44:31 | 윤정용
김경민 자매님은 언젠가 목요 자매모임에 내가 못 참여했을때 피어슨 선교사님이 설교한 것을 글로 썼는데 너무 머리에 잘 들어오고 어찌나 물이 흐르듯 잘 썼는지 아니 원고를 받아서 썼는가 어찌 이렇게 내용을 잘 썼을가 물어보았더니 그냥 설교를 듣고 썼다고 했습니다 전에 작가의 꿈을 꾸었다고 해서 역시 그렇구나~!하고 알아보았습니다. 보고 읽고나서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하는 일이란 어려운 것인데 정말 잘 쓰는것 같아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좋은 작품을 써 보는것이 어떻겠어요? 그리고 김대용 형제님 고마워요 ,늘 홈피를 관리하시느라 수고해 주시는것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형제님인지 한번 보고싶군요. 그리고 좋은 영화가 있으면 소게해서 어쩌다 한번이라도 보고싶은 생각이 드네요,저도 특히 플란다스다의 개가 많이 생각이 나네요.
2013-12-13 05:34:29 | 윤정용
'초원의 집'을 안다고 하면 청년부에서 쫓겨날 것 같아 차마 시인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도 너무도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기억이 나니 가슴이 아픕니다. ㅎ ㅎ 80년대 일요일 오전 등에 방영했던 외화는 휴일이 주는 독특한 정서와 맞물려 어린 마음을 이국적인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 시절 ‘플란다스의 개’라는 일본에서 제작된 만화 시리즈물이 있었는데 제가 어린 시절 보고도 후에 몇 번에 걸쳐 재방영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하여튼 제가 어릴 때 보았던 것이 국내에서는 첫 번째 방영이었습니다. 트랄랄라, 트랄랄라~~하는 주제가도 좋았고 네로와 파트라슈의 우정도 어린 사나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개구리 왕눈이의 촉촉한 봄비 같은 피리선율이며 당대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창작동요제 대상곡인 ‘노을’도 깨끗한 동심에 아로새겨진 추억의 노래입니다. 자~인제 그만 절제의 시간을 맞이해야겠네요. 김경민 자매님의 귀한 글과 세대가 다르지만, 공감을 표해주신 이수영 자매님과 다른 지체분들의 공감 댓글 덕분에 추억을 생각하며 더불어 문화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귀한 밤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2 22:56:16 | 김대용
'초원의 집' 생각이 납니다.^^ 구수한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네요~~ 뭔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거 같습니다. 미국은 세대차이에 대한 공감도를 높이기 위해서 오래된 만화영화를 수 십년이 가도 계속해서 방영해준다고 하네요~~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잘 선택해서 관람해야 하는 것도 잊으면 안되겠지요~~^^
2013-12-12 17:15:00 | 김상진
저도 미국드라마 '초원의 집'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적 '맥가이버'나 '육백만불의 사나이','에어울푸'등 재미있게 보았던 미국 드라마가 꽤 많았었네요. 주말 밤마다 기대하며 보곤했던 '주말의 명화'도 이젠 추억이 되었네요. 그랬던 시절이 불과 25년도 안지났건만 지금 세상은 그때 그 어린 소녀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변했습니다. 지금처럼 최첨단 시대에 전화는 걸고 받고 문자 시계면 족하다고 2G폰을 고수하고 옛날에 왕도 가마 밖에는 못탔는데 자동차가 굴러 가기만 하면됐지 하고 50만원주고 산 완전 고물차를 6년을 끌다 폐차를 시킨 저같이 시대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래서 '고리타분하다','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을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고 사브작 사브작 손편지를 쓰던 스마트폰과 게임 자극적인 영화 드라마 없이도 마음이 풍요롭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입니다. 요며칠 우리 집안에서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들의 스마트폰 개통을 두고 작은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기숙사 생활하고 딸은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할건데 굳이 비싼 요금을 내가며 스마트폰을 개통할 필요가 있느냐는 저와 지금껏 스마트폰 없이 지낸것만으로도 대단한거 아니냐며 스마트폰을 개통해야된다는 아이들, 중립적인 입장에서 저와 아이들 사이를 조율하는 남편까지 며칠간의 토론끝에 결국 제가 물러섰습니다. 저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아이들이 쉽고 당연하게 이 세상것들을 수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더 뜸을 들였습니다. 조금있다 나가서 두 아이의 스마트폰을 개통해주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살 수는 없겠지요 다만 우리 아이들이 이런 세상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넉넉히 이 세상 악한물결을 이기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기도하는 것이 제가 해야할 일인것 같습니다. 우리 사랑침례교회에 나오는 모든 아이들이 앞으로 이 세상을 잘 헤쳐나가고 믿음또한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마음과 지혜를 모으고 정보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옛추억을 생각나게 해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2 13:30:31 | 이정희
세대가 다른데도 같은 것을 보고 생각한 공감대가 있네요. 스마트폰의 유용성을 누리고 있지만 폐단도 많이 나타나고 있지요.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아나로그의 따스한 감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갑니다. 이시대에. 우리 교회가 유일하게 거룩을 지켜가는 보루같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기본적인 예의도 도덕심도 공중도덕도 강요로 느끼는 시대라 참 답답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성도들의 탄식은 더 하지 싶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동화되지 않도록 경성하며 살아야 하니 말이죠.....
2013-12-12 11:33:19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