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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僞善)은 참으로 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집요함이 마치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달음질을 해도 전혀 거리가 벌어지지 않고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아옵니다. 잠시 마음의 긴장을 풀면 어느덧 위선은 사람의 내면 깊숙이 둥지를 틀고 곧바로 증식을 위한 세포분열을 시작합니다. 위선과 관련된 성경 구절은 신구약을 통틀어 모두 42번 등장합니다. 위선, 위선자들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는 hypocrite, hypocrites, hypocritical, hypocrisy, hypocrisies, dissemblers, dissembled, dissimulation 등이며 특히, 신약성경에 27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위선(僞善) 관련 구절들 중에 마태복음 7장 1~5절과 누가복음 6장 41~42절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성경이 위선과 위선자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으며 위선이 사람의 내면에 파놓은 은밀한 함정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위선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 중에도 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중화기에 속합니다. 매우 선한 사람조차도 한순간에 위선의 늪에 빠질 수 있고 복음 사역에 매진하던 교회나 단체가 위선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와해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치 누룩과 바이러스처럼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기에(눅12:1) 삽시간에 대중들을 선동해 위선적 사고와 행동 아래로 헤쳐 모이게 만들어 한 시대를 타락하게 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합니다. 먼저 위선의 독특한 기능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또는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게 될 때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인과 단체 그리고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찾게 합니다. 그런 후에 외부로부터 포착한 문제를 자신의 내면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왜곡시켜 집착하게 만듭니다. 41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형제여,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겠노라, 할 수 있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리라. (눅6:41~42)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가 빠져버린 함정의 특징이 타인의 잘못과 부정적인 면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정확하게 잡아내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는 모순의 극치임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위선자가 집중하는 타인은 우선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까이에 있는 동역하는 형제/자매일 경우가 많다는 것도 중요한 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아주 작은 먼지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고 사실 시간이 지나면 눈물 등에 의해 저절로 제거되어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사안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속담을 적용해도 무방할 정도의 것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지만 크게 걱정하거나 공론화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위선자의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어떤가요? 물론 물리적으로 눈 속에 기둥만큼이나 큰 나무인 들보가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비유이기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보는 눈의 모든 기능을 영구히 상실시키고도 남을 치명적이고 위급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생길 수 있는 부산물과 같은 형제의 눈 속에 작은 티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온유하게 문제에 대한 권면의 말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절체절명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형제를 몰아붙이고 공격하며 급기야 공동체 전체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할 일은 형제의 눈 속에 미세한 티끌을 놓치지 않는 극도의 예민함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내면은 이미 파국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데 아직은 그냥 두어도 괜찮은 형제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이 어리석음은 결국 심각한 위기로부터 방치된 자기 자신과 무모한 위선자의 비판의 칼날을 감내해야 하는 형제/자매와 공동체 모두를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없고 눈 속에 거대한 들보로 막혀 있는 자가 어찌 티끌이 들어간 사람의 눈 속에 바람을 집어넣어 그 부스러기를 제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누가복음 6장의 위선자는 그런 명백한 자신의 모순과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내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내 의견과 관점이 정확하니 내 말을 듣고 내가 제시한 해결책을 따르라고 호언장담하는 위선자는 교회 안의 지체들과 공동체에 커다란 짐이 될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위선자가 발견한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당장은 그냥 두어도 되지만 제거해 버린다면 좋을 것이고 분명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커다란 들보를 눈 속에 간직한 위선자가 그 티를 제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눈 속에 있는 들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코가 눈인지 입이 눈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위선자의 손은 치료하고 해결하는 손이 아니라 흉기로 돌변할 것이 뻔합니다. 문제를 발견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위선자의 좌충우돌하는 일련의 행동은 사사건건 지체들과 공동체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주 작은 위선이라도 사람의 내면에서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에게 진리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해결책을 꺼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치명적 문제인 들보에 대해 집중하고 깊이 생각하라는 교훈입니다(마7:3). 자기 내면의 어떤 굽어진 요소들이 거대한 들보라는 문제를 키웠나를 차분하게 생각하고 돌아보는 것이 묵직한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위선자의 눈 속에 들보를 빼내는 첫 시작은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정확하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눅6:42) 눈 속의 티가 점점 커져 시야를 가리는 들보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또한,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들보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부지런히 자신을 말씀의 거울로 비춰보고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속속들이 성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급한 행동보다 먼저 깊이 자신의 속 중심까지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의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치료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위선자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위선자 그룹이었으며 종교 시스템의 전도사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도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도다. 그것은 겉으로는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23:27)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곤경에 빠트릴 함정을 파는 행위가 정당하고 선한 것이라 여겼기에 자신들의 악행을 절대로 고침 받지 못했습니다. 자!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퍼지고 있는 배교의 물결을 보십시오. 이 가증한 물결의 최전방에 서 있는 타락한 기독교계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이런 악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렇게 행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날 밤 베개를 베고 누워 잠들기 전 저절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 짧은 몇 분의 시간조차 두려워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져 항구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스스로 장애를 입힌 사람들입니다. 1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딤전4:1~2) 이 시대가 더욱 빠르게 극악한 배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것은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만이 위선의 독주에 취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심각한 배교현상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기만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성경에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는 '위선의 역사'가 주는 뼈아픈 교훈을 깊이 되새기지 않았기에 발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착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현시대의 기독교는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교보다 당연히 하나님 앞에 선하며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오늘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월등하고 바르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이 무모한 믿음은 성경의 교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 (전1:9)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벧후2:1) 은사주의로 교인들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로 전락시키고 WCC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도 자신을 복음주의자라 외치며 만담가와 개그맨처럼 우스갯소리로 설교시간을 장식하는 타락한 목사들도 강단에서만큼은 다들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 위기는 도대체 누가 불러온 것일까요? 각자 다 선한 선생이 되어 한국교회의 위기와 해법을 논하는데 과연 그 위기를 만든 장본인은 누구란 말입니까? 독주에 진탕 취하고 싶은 알콜중독자도 처음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딱 한 잔 만!!'이라는 위선의 구호를 외칩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만든 배교의 장본인들이 하나같이 강단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걱정하고 위기라고 떠드는 것은 자신의 배교행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위한 일종의 위선입니다. 가증함으로 가득한 이런 위선적 설교에 취해 교인들은 '그래 아직 우리 교회는 괜찮은 교회야.' '아직 우리 교회는 살아있어.'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이 시대의 모순과 문제를 분별하는 제대로 된 분이군.'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깊은 늪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대언자,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간단명료한 기준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번지르르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구체적인 행동들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리의 길을 택한 행동들이 그의 세월의 앨범 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15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16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남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마7:15~18) 위선자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더불어 위선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모순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는 제쳐 두고 타인의 작은 잘못과 문제를 교정해보려 달려드는 무모함입니다. 정리하면, 위선이라는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마7:3)”와 “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눅7:42)”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의 문제를 감지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실체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 장애를 겪게 하는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야 형제/자매의 영적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교회와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 원리입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길 권장하지 않고(야3:1)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밝혀내는 논박의 전문가가 되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마7:1~2, 눅6:37). 물론 한편으로 성도는 시대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고전6:2).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반드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허물은 없는가, 나에게 부족함은 없는가, 내 생각에 잘못된 부분은 없는가를 항상 먼저 살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선의 은밀한 함정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논쟁과 논박에서 승리한 사람보다 한참이나 성숙한 주님 보시기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한없이 부족한 사람인 저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엄격하고 빈틈없이 자신을 살피고 온유하게 지체를 섬길 수 있는 지혜와 명철함이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갈6:1)
2014-01-08 14:48:17 | 김대용
매우 무거운 주제라서 강평원 형제님께서 일러주신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개인적으로 출애굽기 책에 관한 지식이 너무 짧아서 제기한 내용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다만 십여 년 전의 경험입니다. 현존한 애굽이라는 나라는 그들의 고대사에서 출애굽 사실에 대한 상대국 입장에서의 기록사항이 궁금하여 도서관 자료나 온라인 등에서 알아보는 수준이었으나 시내산 경로에 얽힌  내용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승학 저자의  "출애굽의 새로운 경로" 를 밝히게 된 동기, 탐구의도와 열정, 그리고 탐색답사 경로상의 고비고비 위험 앞에서 기적의 하나님 은혜를 감사하면서도 이 부분에 대하여 엄밀한 고증에 입각한 비판과 논쟁의 연구대상인지 분별 할 순 없지만, 이스라엘민족이 홍해를 잘 건너도록 도해지점의 삼각주 바닥을 앝게 만드시고 무난히 바다를 걸어서 건너게하신 섭리와 수장된 애굽 군사의 마차와 바퀴 등 많은 유물 등을 제시한 자료를 접하면서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절대권능의 구속사역에 대하여 더욱 감격하고 기쁨이 충만한 경험이었습니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우선 "떨기나무" 책에 대한 몇 서평 등 비판의 글을 검색하였으나 두 진영의 관점과 주장이 상호 절충 또는 대립함을 목격하고 결국 교회 차원의 가르침과 지체님들의 고견을 기대케 되었습니다.
2014-01-07 16:58:55 | 최상기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는 국기가 초록 바탕에 아랍어(語)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알라 외에는 신(神)이 없고, 무함마드는 예언자이다.”라는 《코란》1절이 씌어 있을 정도로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이며, 외국인의 내륙여행은 불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유적 발굴이나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만은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히브리서 11 : 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7 13:25:25 | 강평원
한 때 저도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크나 큰 배신과 좌절을 맛 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그런데 그 상처들이 쉽게 아물지가 않더군요.그때부터 강아지를 기르게 되었습니다.왜 진작 이 녀석들을 키우지 못 했을까 후회 할 정도로 그 아이들에게 빠져 들었습니다. 맑고 천진난만한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나 또한 그 애들같이 순수해 질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되구요. 이 녀석들 때문에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지만 대신 제 수고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많은 기쁨을 안겨 주는 존재가 우리 강아지들 (하늘이, 바다)이랍니다.
2014-01-06 16:32:36 | 유옥희
자매, 형제님들 안녕하세요. 군포에서 사는 강평원 형제라 합니다. 새해에도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은혜와 평안이 늘~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처음으로 글을 써 봅니다. 그동안 몇 번 이런저런 글을 써볼까 하다가 부끄러운 솜씨에 썼다가 지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자의 주치의로 지내셨던 김승학 집사님의 강연을 보고 "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출애굽의 경로가 다르구나!" 란 생각이 들었고 여러가지로 찾아보고 연구해 봤는데, 맞다는 가능성이 있어 같이 생각해 보고자 이렇게 "출애굽의 새로운 경로?"란 글을 써 봅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어제 목사님께 문의를 하려고 했는데, 바쁘셔서 말씀을 못드렸고 검증이 안된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래 그림과 같은 출애굽의 경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 그림을 보면.. 여러 지명은 물음표로 있거나 다녀오신 분들의 성지순례 후기를 들어보면 성경기록과 조금은 다르다는 내용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승학 형제님의 강연을 들어보고 출애굽의 새로운 경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출애굽이라 하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말할텐데.. 지금까지 건넜다는 홍해 왼쪽부분(시나이 반도 오른쪽도 홍해임)과 시내산은 시나이반도에 있는 것으로 이집트내에 있는 장소입니다.     위의 사진처럼.. 새롭게 유추해본 출애굽의 경로입니다. "몇일동안 어떻게 그렇게 멀고 먼 경로(약560km)를 몇백만의 사람이 이동할수 있는가?"란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특별한(?) 힘을 쓰신 성경 기록들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특히 기존 시내산은.. AD527년경 로마카톨릭에서 지정한 것으로 더더욱 믿을 수 없으며 지금의 새로운 경로가 더 확실성을 갖게 합니다.       뉴웨이바 삼각주입니다. 가로 9KM, 넓이 6KM 여의도의 4~5배 면적으로 이정도는 되어야 몇백만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곳 주변 바다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는 데요. 특히 옛날에 싸움에서 사용하는 병거와 병거 바퀴가 많이 발견된다 합니다.         위 사진 말고도 많은 증거 물품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또 특별한 것은.. 솔로몬 왕이 홍해를 건넌 지점에 기둥을 새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거해서 없다고 그분은 증언합니다. 보시는 것과 같이 지금은 푯말 하나만 썰렁하니 세워져 있다 합니다. (이집트 누웨이바 지점에 있는 기둥은 현재 존재함)       위 사진은.. 홍해 건넌지점과 건넌 후의 지점을 보여줍니다. 양쪽 다 특이하게 삼각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넓은 평지로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위 그림은.. 위성에서 찍은 바다의 깊이를 나타내는 사진입니다. 정말 정말 특이하게도 홍해 양쪽 삼각지를 이은 부분만이 깊지 않은 지점이고 그 옆으로는 급격하게 깊은 바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것을 보노라면.. 정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게 아닌가란 경이로운 느낌마져 듭니다. 사실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요.       하나님이 강림하신 시내산을 보고 계십니다. 산이 정말 다른 곳에 비하여 조금은 검게 보이네요. 출애굽기 19장 16~25절을 보면.. 강림하시는 모습과.. 보기 위하여 더 가까이 나와 죽을까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산입니다. 열왕기상 19장 8~18절을 보면 대언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있는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림에는 없지만 동굴 사진도 있습니다. 요즘 3일 동안.. 구글 어스를 통해 여러 장소를 탐험(?)을 해봤는데.. 이것말고도 정말 놀라운 흔적들(장막친 흔적 등등)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출애굽의 경로는 많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위에 있는 장소가 조금은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요? 만약 이 장소가 사실이라면.. 그동안 이슬람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폐쇄되어 볼 수 없었고, 어찌보면 그로 인하여 보존 되었던 증거들을,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믿지 않는 시대에.. 눈에 보이는 증거들 까지도 보여주시며 은혜를 주시려는 것은 아닐까요?  형제 자매님들 생각은 어떠세요?   김승학 형제님의 강연 동영상을 찾아서 보시고요.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14-01-06 14:49:17 | 강평원
항상 사람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깊이 있는 글을 올려 주셔서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글을 통해서 '나는 항상 주변 환경과 타인을 통해 고난의 원인을 찾기 전에 나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반성하고 있는가?'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4 23:26:53 | 김대용
최자매님의 모습을 뵈면 항상 푸근하시고 따뜻하셔서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오신줄 알았는데... 그런 힘든 여정을 함께 헤쳐오셨기에 가족애가 남다르신 거였네요. 요즘처럼 쉽사리 가정이 붕괴되는 이시대에 가족간의 사랑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헤쳐오신 형제님 가정이 참으로 본이되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안에서 항상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4-01-04 22:15:27 | 이정희
연작되는 글의 시작인가요^^? 어떤 면에서 호랑이, 사자. 곰 같은 육중한 맹수가 늑대나 여우보다 훨씬 사람에게 위험한 동물일 겁니다. 그럼에도 늑대나 여우가 더욱 포악하거나 희화화된 이유는 어쩌면 인간이 보기에 더 만만하고 하찮게 여길만한 동물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이 기대되네요. 괜찮으시다면 '성경지킴이'에도 올려 더 많은 분들이 형제님의 귀한 글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항상 신실하고 젠틀하게 옆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1-04 22:14:27 | 김대용
보통의 글솜씨가 아니시네요. 짐승....우리 집에 두마리나 있는데 사람과 짐승이 어우러져 사는 것이 평화스러운 거 같아요 . 이글을 읽으며 배반하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2014-01-04 21:53:37 | 오혜미
새해를 맞이하여 진솔한 인생여정을 말씀해 주셨네요. 교회안에 가식과 허황된 자랑이 난무 하지 않고 진정한 대화와 인간적인 사귐이 있는 것은 우리 사랑교회의 소박함을 더해준다고 봅니다. 그 누군가 우리교회 문턱이 높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아름다운 가족을 이룬 형제님가정을 보면 어렵던 시절이 있었는가 싶도록 참 따뜻하고 정감있어보입니다.
2014-01-04 20:41:36 | 오혜미
그 동안 늑대는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고 괴롭히는 악랄한 동물로 생각했었는데 형제님의 글로 늑대는 멋지고 용감하고 정직한 동물이라 생각되네요~^^ 늑대의 행태와 습성을 사실적인 접근을 통해 바라본대로 우리도 정직하고 겸손하게 순리적으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예수님의 속죄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해봅니다. 흥미진진한 늑대이야기 후속편을 기대하겠습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 형제님~^^
2014-01-04 20:28:33 | 이우상
최근 킹제임스에 대해서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만 받으면 나머지는 킹제임스가 됐건, 개역개정이 되었건 상관없다고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성장하건말건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자매님의 글을 읽으면서 구원받은 자들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해봅니다.
2014-01-04 20:09:03 | 김상진
제목이 눈에 확 띄기도 할 뿐 아니라, 직장 생활 13년차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은 경력이지만, 조양교 형제님 글에 상당한 공감을 했습니다. 제 경우는 다행히 상사나 동료 등의 사람 때문에 이직을 한 적은 없지만, 저도 벌써 네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음을 셈해보게 되었습니다. 심약한 탓인지 (주 하나님께서는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주시므로) 큰 어려움 없이 직장 생활을 해 왔고, 이직에 관련한 스트레스도 거의 없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겉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내면으로 어려움과 갈등과 고민이 많이 생겨나고, 세상 흐름에 끌려갈 때마다 참담하고 비참한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 하나님의 자녀로 보여야 하는데, 그렇기는 커녕 스스로 부끄러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성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조양교형제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뵐 때마다 진중함과 우직함이 느껴졌는데 다양한 경험까지 있으신지,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주일에 뵙겠습니다 샬롬.
2014-01-04 20:05:30 | 김지훈
  어느 날 인간관계에서 회의감을 느끼면서, 문득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인간에게서 지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과연,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측면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더 나은 점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나름 비교해보니, 첫째, 동물은 그들의 본능을 꾸밈없이 자신들의 삶속에 투영시키면서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최소한 인간보다 ‘정직’합니다. 둘째, 인간은 지능을 탐욕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동물은 자신이 가진 탁월한 능력을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도구로 여길 뿐 자랑삼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인간보다 ‘겸손’합니다. 셋째, 인간의 본성은 교만하고 이기적이어서 화려하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만, 동물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리지 않고 소박하게 자신들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인간보다 ‘순리적인 존재’입니다. 넷째, 인간은 탐욕에 눈이 멀어 합리적이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우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동물은 생존을 위한 기초욕구 이외에는 욕심이 없어 인간보다 균형감이 있다는 측면에서 ‘중용(中庸)의 미학’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많은 동물들에 대해 관심으로 가지고  다큐나 자료들을 즐겨 보는 가운데, 인간과 가장 흡사하게 사회구조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물은 다름 아닌 ‘늑대’라는 맹수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늑대라는 동물은 친숙한 동물이 아닙니다. 매우 사납고, 잔인하며, 음흉한 맹수로 각인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음흉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을 가르켜 늑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동화나 영화, 음악 속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어져 있으며, 심지어는 성경에서도 사납거나 약탈하는 사람을 늑대(이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합1:8, 렘5:6, 마7:15. 요10:12, 욥 30:29).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늑대의 습성에서 기인된 비유일 뿐이지 늑대 자체가 부정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비유는 늑대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칭찬인 셈입니다.   늑대를 11년간 직접 추적하며 연구한 생물학자 ‘팔리 모왓’은 자신의 저서「울지않는 늑대」라는 책의 서문을 통하여 늑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 했습니다.  「오히려 늑대는 먹이가 되는 생물종(種)의 장기적인 안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며, 가축에게 입히는 손해는 아주 적은 정도이며, 대개의 경우 인간의 거주지나 농업 시설 가까이에는 살려고 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문제의 ‘진실’이다. 우리는 특대의 유죄를 선고할 때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적인 잘못된 인식에 근거를 두면서, 포악하며 무자비한 킬러라는 신화화된 이미지는 사실상 우리가 던진 우리 스스로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희생 늑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팔리 모앗의 글이 사실일까? 하며 실제로 늑대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니, 늑대는 실제로 ‘잔인한 킬러’ 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동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전한 동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 여러 문헌들과 자료들을 통해서 알게 된 늑대의 특징을 살펴보니, 늑대는 한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 하는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암컷과 새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입니다. 거기다 언제나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를 양보하며, 독립하고 나면 자신들의 영역에 접근하는 새끼를 적으로 간주하는 다른 맹수들과는 달리, 새끼들은 종종 부모늑대에게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게다가 늑대는 매우 조직적으로 사냥을 하고, 용맹하며, 절대로 비굴하게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동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효율적인 소통능력으로 조직을 보존하며, 자신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즉시해가면서 앞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동물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늑대’라는 맹수는 매우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갖게 할 만큼 충분한 동물입니다. 최소한 저에게는 말이지요.   최근 이와 같은 늑대에 대한 오해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늑대와 관련된 서적들이 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는 달리 조금 엉뚱한 것 같지만, 인간의 본성과 배치되는 늑대의 습성을 가지고 신앙과 접목을 시켜 보면 나름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전술한 바와 같이 동물이 인간보다 분명이 나은 면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늑대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무런 죄가 없는 늑대는 인간이 만든 오해와 편견이라는 올가미로 인해서 무참히 학살을 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아직도 잔인한 킬러로 묘사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진실의 왜곡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통해 우리 기독교 역사에 위로와 교훈을 리뷰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셋째, 늑대의 습성들 가운데서 인간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그들만의 특유의 행태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철저해서 우리 신앙과 비교해보면 그들에게서 얻어 낼만한 몇몇의 반성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판단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늑대(동물)를 통해서 신앙에 접목시켜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동물을 재물로 삼은 것은 동물이 인간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죄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랬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떤 동물보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시지만 인간은 동물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인 이른바, ‘죄 덩어리’라는 부분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동물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교만과 만용을 결코 즐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 동안 인간을 대신해서 죽은 동물에게서 우리가 배워야할 신앙적인 교훈은 어쩌면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속죄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도덕과 윤리라는 잣대를 절대 선(善)인 것처럼 들먹이며 자신들의 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 병이라는 죄의 열매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동물과 비교만 해봐도 인간은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는 단지 그 대상이 늑대라는 맹수가 가장 적절하다고 발견했을 뿐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생물학자도 아닌 반쪽짜리 지식의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늑대라는 동물의 특성만을 가지고 감히 신앙에 접근해보겠다는 것이 다소 억지적이고, 모순적인 한계가 드러날 수도 있지만 나름의 생각의 깊이를 정리하고 나누어 보고자 이렇게 용기를 내어 <신앙에 대한 늑대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몇 차례에 걸쳐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글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물론, 사실에 기초해서 말입니다. 다소 글이 부족하더라도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본다는 사실에 흥미로 여겨주시고 기대 없이 읽어봐 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왜, 늑대인가?’에 대한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2014-01-04 19:33:30 | 김상진
직업을 여러번 바꿨지만 충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오셨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삶에 대한 열심이 있기에 안주하며 머무르려 하지 않죠. 중간에 '지금 20년 가까이~~다른 모습이었겠죠' 라는 부분이 깊은 공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좀 더 좋은 삶을 위해 여지껏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고 수년 간 익혀온 익숙함을 떠나죠, 그리곤 이것이다 싶으면 아닌 것 같고 떠나온 그 곳이 더 좋았는데...라고 후회하는 삶을 반복하게 되죠. 그러다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어딜가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이 곳이 가장 내가 꿈꾸던 곳에 가까운 곳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게 되죠. 그렇게 비바람을 견디다 보면 기쁜 웃음을 보게 되고요. 그런데...여러 곳을 거치는 중에 진짜 참 좋은 곳을 발견했는데 내가 혹여 젊은 혈기로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면...그리고 여러 상황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다면...얼마나 후회스러울까요. 사회에서는 그렇다하지만,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또 얼마나 눈물 흘려야 할까요. 작은 아들을 항상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또 얼마나 간절할까요...
2014-01-04 12:19:13 | 박순호
趙 형제님의 지나온 이야기들이, 지난 한해를 보내면서 저의 삶속에서도 뒤돌아 볼때에,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하는군요. 항상 인간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서 만족을 가져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겠지요, 2014년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천국시민으로서 묵묵히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최상기, 김형욱 형제님의 대글에 백프로 동감하면서, 조형제님 좋은 글 감사하고, 금년에도 형제님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2014-01-04 09:07:35 | 오영수
아멘.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결정이 비록 잘못된 결정이었더라도 그 잘못된 결정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와 은혜에 저도 조형제님과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쓰신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제목을 "교회 옮기기"로 바꿔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완벽한 직장이 없듯이 완벽한 교회도 없을것입니다. 더욱이 자기 마음에 쏘오옥 드는 교회는 당연히 이 세상엔 없을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세상에서 (당연히 완벽한 교회는 아니지만) 저와 저희가족을 사랑침례교회에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2014-01-02 18:30:42 | 김형욱
85년 처자식이 있는 가운데 군대를 제대했습니다. 1년이 채 지나기전에 직장을 옮겨 다녔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습니다. 때론 상사가 마음에 들지않고, 때로는 일하는 업무가 마음에 들지않고, 때로는 회사가 발전성이 없어서... 한번, 두번 옮겨 다니다 보니 생활도 안정이 되지않고 직장 옮기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버렸습니다. 월급쟁이로 3군데 정도 옮겨다닌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손위 동서가 전자부품 공장을 창업하려는데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흔쾌히 받아들이고 일을 시작했는데 불과 1년만에 교통사고로 고인이 되버렸습니다. 마음잡고 한곳에 집중하려 했는데 환경이 도와주질 않는 겁니다. 법인체다 보니 돌아가신 분 명의로 또 1년간 공장을 돌립니다. 역부족이죠, 대기업의 협력업체로 등록이 되어 있다보니 다행히 인수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나마 공장 사정을 알고 있는 터이므로 함께 일하자는 제의로 약 1년간  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우유 대리점 힘이 들어 못하겠다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남의 밑에 일하느니 자영업을 한번 해보자는 의지가 생겨났습니다. 인수한 회사 사장의 권유를 일거에 날려 버리고 우유 대리점을 시작했고,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일이라 처음으로 하는 사업이므로 열심히 했습니다. 한 1년여 지나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슈퍼마켓의 횡포가 눈에 거슬린 겁니다. 갑의 횡포죠, 우유대리점을 넘기고 슈퍼를 인수하기로 결정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가락시장에 가서 야채와 과일을 사오고 밤 11시가 되어야 일이 끝납니다. 하루종일 잠바를 입고 꼴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에 같이 근무했던 후배가 찾아옵니다. 자동차 대리점을 해보라는 겁니다. 슈퍼는 재고관리도 힘들고 꼴도 아니고 이제 제대로된 사업장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1년여 운영했던 슈퍼를 처남에게 넘겨 버리고 자동차 대리점을 개설합니다. 야심차게 출발했던 대리점이 1년만에 침체국면에 들어서게 됩니다. 만회책으로 정비코너를 병행해서 운영하기로 결정합니다. 싸게 나온 노래방이 있다고 해서 노래방도 인수하는 등 갑자기 분주해지고 뿡 뜨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제대후 불과 10년 사이 10개 가까운 업종을 걷어 치우고 새로운 일을 벌려 나간 겁니다. 일을 벌리는 것은 돈과 의지만 있으면 되지만 정리하는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과 돈이 소비가 됩니다. 이것 저것 분주했지만 사실 빛 좋은 개살구인거죠, 사업하는 사람이 가장 바쁠 때는 부도직전의 시간입니다. 정신차리고 이것 저것 주판알을 퉁겨보니 총체적인 부실 국면입니다. 당시 나의 상황과 IMF 직전의 상황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과욕이 화를 부른 겁니다. 한가지만 제대로 할 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업장, 재건축에 들어간 아파트, 하나 하나 정리해 나가도 끝이 보이질 않네요, 미정리 상태에서 지금 다니는 회사로 피신하다시피 들어갑니다. 지금 20년 가까이 근무를 하면서 입사 초기에는 몇번이고 그만 둘 위기에 처합니다. 그럴때 마다 그동안 갈아 엎었던 기억들을 다시금 생각하고 또다시 뼈아픈 일을 겪지 말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견디어 냈습니다. 성급히 결단했다면 아마도 지금은 다른 모습이었겠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광야길 동안 여러가지 환경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저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저의 잘못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환경을 통해서도 시험하시고, 나쁜 환경을 통해서도 시험을 하시고 나의 내적 탐욕을 가지고도 시험을 하십니다. 또한 인간관계라는 사람 막대기를 통해서도 시험을 하십니다. 힘든 상사를 주심으로, 난폭한 동료를 주심으로, 힘든 거래처를 주심으로 시험을 하십니다. 이런 여러 경우에 있어서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포기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번의 직장, 사업을 옮기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옮기는 것 자체가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사업에 대한 매력은 뭔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지금 보다는 낫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결과 영업환경과 어려움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오죽하면 옮기겠느냐 하지만 옮기는 것이 결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공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 성공합니다. 아니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기에서 실패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실패합니다. 아니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 함께 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기에서 힘든 환경을 극복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 힘든 환경을 극복할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여기에서 인간 막대기에 견뎌낸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견뎌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지만 일반적인 인생사에 있어서는, 사람으로서 받을 수 있는 공통의 시험에 있어서는 낮은 확률에 몸을 내맡길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가 경험한,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 높은 확률의 길을 추천합니다. 이 내용은 저의 경험을 근거로 한것이고 일반화라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밝힙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의로 단련되기를 원하시고, 징계로 단련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네 눈에 지혜롭게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직장을 옮겨 다녔던 지난 세월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내 명철과 내 지혜에 더 의지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저의 행로를 인도해 주셨슴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4-01-02 17:47:44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