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거리가 많은 참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라는 말을 하는 몬스터로 아이가 자란 것은
그런 환경을 만들고 허용한 우리 모든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참으로 폭탄주&음란 문화에 취해 있는 우리 사회의 일부 전문직 어른들과 절묘하게 overlap 됩니다.
이 지상의 어느 교회에서든 아무리 자녀의 교육이 지고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신앙의 가치를 가볍게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깊은 타락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내 것을 포기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 항상 사탄 마귀는 그 지점에서 위선의 불씨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합니다.
부디 진리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견고하게 간직되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4-01-20 14:24:01 | 김대용
어렸을 때는 공부보다 인성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한 표를 던집니다.
성경말씀 묵상은 당연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경에 비할 바는 안되는 책이지만, 인문학 서적 중에서 '논어'와 같은 책으로 인성공부를 곁들이면 좋다고 봅니다. 논어는 너무 쉬고 간결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해하기 좋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정에 넘쳐나길 기도하겠습니다.^^
2014-01-19 21:22:38 | 김상진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것은 어느 가정에서나 해당되는 과제이지요.
그래도 자매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성경으로 바르게 훈육하고 키워내려는 데는 귀감이 됩니다.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초중고 학생들을 보면 참 암담하기 짝이 없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키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 아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선과 죄악'의 구도이든, 인생의 중대한 문제가 되든지 간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게 되어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자매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아이도 11살이네요. ㅠㅠ
언제, 시간이 되면 부부끼리 교육에 대해서 심각하게 논의해보면 좋겠네요~
샬롬~~ ^^
2014-01-19 21:18:04 | 김상진
만만치않은 공부 가르치는 어려움보다 인성 안 잡힐때 눈물이 나고 어렵습니다.
집에서만이라도 공부는 인내를 기르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게끔 심어주고 싶고, 유언도 다른건 좀 못해도 말씀은
습관되게 살다와라.. 적어놨습니다. 오늘도..(죽을때 덜 후회되게) 아이들을 예수님 마음으로 바라보아지길 기도합니다.
2014-01-19 14:20:44 | 목영주
오늘 이제 11살이 된 제 첫 아이를 앉혀 놓고 심각하게 야단을 쳤습니다.
평소에도 엄하게 하는 편이지만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점점 더 말을 안듣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친다고 하고, 엄하게 키워 본다고 하고, 나름 성경적으로 아이를 바르게 키워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역부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단지 회초리 몇대를 때리기 보다는 아이에게 진실하게 죄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의미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 정말 힘이 듭니다. 제 자신 하나 주님 앞에 바로 세우지도 못하면서 아이를 바르게 양육하기란 참으로 아이러니 같습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자녀도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말씀을 보니 제 안에 평안이 생깁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기쁨과 소망이 제 안에서 샘솟아 넘칩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 만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아이도 주님께 맡깁니다.
최근에 창세기부터 아이와 함께 읽기 시작했는데 이 말씀이 제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내가 보건대 아브라함은 분명히 크고 강력한 민족이 되며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 안에서 복을 받으리니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뒤에 있을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판단의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친히 그에게 이루리라, 하시고(창18:18~19)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형제님의 깊이 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19 01:20:46 | 김경민
늑대 무리는 새끼 양육을 매우 중시합니다. 무리 중에서 새끼를 생산할 수 있는 늑대는 오직 수컷 알파와 암컷 알파만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수한 종자의 생산과 효율적인 관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암컷 알파늑대는 적게는 3마리에서 많게는 9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게 됩니다. 암컷알파는 새끼를 낳으면 10주 동안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보살피다가 그 이후에는 무리에게 새끼 양육을 맡깁니다.(무리가 있을 경우) 이때 ‘베이비시터’의 역할은 주로 조직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늑대이거나 늙은 늑대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꼭 그들에게만 새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파 늑대를 비롯하여 모든 늑대가 새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후 6개월 까지 공동으로 보호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등 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왜, 늑대 무리는 새끼양육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해야 조직이 건재해지고 조직이 건재해져야 다른 늑대 무리나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늙어도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험용도라고나 할까요? 이처럼 늑대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자신들의 무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꿉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다름 아닌 바로 새끼늑대 즉, ‘다음 세대’ 입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이 땅에 무죄한 피를 흘려가며 신앙을 모범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아야 했고, 칼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거꾸로 박혀진 못 위를 걸어가면서까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주님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 오히려 세상을 능가하는 흉내를 내며 기복주의와 권위주의를 도구삼아 ‘샤머니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스스로가 샤만(무당)이 되어, 예수님은 단지 천국티켓을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성령님은 복 빌어주고 귀신 쫓고 병이나 고쳐주면 되는 그런 싸구려 신(神)정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우리 기독교의 ‘구원’ 설교는 구원파에게, ‘재림’ 설교는 다미선이나 제칠일안식교 등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죄’는 도덕설교로, ‘의’는 윤리 설교로 대체시키고 있으며, ‘심판’은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극단 종말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성령님의 가르침을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채 교회들은 교리가 아닌 비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상속에서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롬 1:21> 교회를 세우기에 급급하며, 혹시 이단으로 오해나 받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성도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나 않으까? 하면서 잔뜩 주눅이 든 전당포가게 쯤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동성애’ 뿐만 아니라, ‘종교일치운동’까지도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자신들의 능력 과시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형편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미혹하여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바벨탑) 건축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 <요 16:8-11>
이처럼 지금의 기독교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숭배<골 3:5>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어 그 전통이 말씀보다 위에 있게 함으로써 전통이 마치 진정한 신앙의 유산인양 두 눈에 힘을 주며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은 전통이 진리인줄로 착각하며 더 이상 온전한 하나님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다음 세대들은 더 이상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할 턱이 없습니다. 오직 이 화려한 세상에서 그들에게는 물질주의가 제공해주는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낙(樂)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며 또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을 행하느니라.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막 7:7-9>
며칠 전에 아내로부터 자녀 교육에 열정이 남다른 고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의 푸념에 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극정성으로 아이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외출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벌어져 숨이 턱하니 막혔다고 합니다. 전교 1등을 한다는 자신의 아이가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와서 학생신분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들에게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야단을 쳤는데, 아이의 변명이 더 숨이 막힐 일입니다.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서 말하는 우등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공부만 잘 하면 우등생일까요? 정말로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2년 4월에 전국 16개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서, 학생들이 임신ㆍ출산ㆍ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5조), 복장ㆍ두발 등 용모에 있어 개성을 실현할 권리(12조) 등이 시행됨에 따라 중고등학생들이 임신을 해도, 건전치 못한 옷을 입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강요 금지(16조) 조항도 마련되어 있어서 부모들이 교회를 가자고 강조해서도 안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학문은 철학(philosophy, 哲學)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의 목표는 ‘의(義), 정(正), 지(知)’ 즉, 신(神)에 대한 의로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바르게 사는 도(道)에 대하여, 인간(人)의 본질에 대한 지식(知識)을 가르치는 철학 교육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도 그러한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생산자(경제), 군인(국방), 철인(정치)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주의’에서 기인한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노동자 생산을 위한 교육제도를 이식시켰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은 ‘의(義), 정(正), 지(知)’라는 이념 대신에,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나타내는 ‘지정의(知情意)’에 대한 교육철학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특히, 여기에서 정(情)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으로써 즉,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1910년에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 받았던 ‘지덕체(智德體)’ 이론이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의 교육 이념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세대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조차 배울 수도 없고 강조되지 않은 비본질적인 교육 즉, 지식만을 위한 교육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우월주의’가 우리 사회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두려움도, 바르게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질서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실체 없는 교육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생각하는 사고력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듯함). 그래서 앞에서 전술한 학생(전교 1등 한다는 고등학생)처럼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는 세대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소년 범죄율이 전체 범죄의 6.8%를 넘어선 적이 없었으나 2012년에 이르러 8.3%를 넘어섰고 그 중에서 강력 범죄 발생 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더욱 악해져 가는 사회 환경)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다음세대(자녀)들을 양육해야 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적만 좋은 우등생 자녀로 만들든지 아니면, 비록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말씀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말입니다. 물론, 학교 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우등생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발선상에서 만큼은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에 분명한 목표(우선순위)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부모들의 몫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성도들이라면, 선택이라는 자율성을 뛰어 넘어 의무감으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속성이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수 24:19, 삼상 2:2, 6:20, 욥 6:10, 시 71:22, 잠 9:10, 30:3, 사 5:16, 5:24, 10,20, 호 11:12, 요 17:11, 딤후 1:9, 요일 2:20, 계 4:8, 6: 10, 15: 4 ..,>.
늑대들은 더 나은 늑대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시킵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더 사회적이고, 더 조직에 충성하고, 더 무리들을 아끼고, 더 질서를 존중하고, 더 사냥을 잘 하는 등.., 한 마디로 ‘더 늑대다운 늑대’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모든 동물이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늑대들은 사냥만 잘 한다고 해서 우등생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늑대는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핵심은 ‘헌신’이고, ‘배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늑대는 절대로 높은 서열에 이르지 못하며 오래지 않아 무리에서 퇴출을 당하고 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늑대는 아주 철저하고 냉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도,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통해서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히 6:1>. 그 첫 걸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성품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의 구별됨. 즉,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요 4:24>, 그러한 사람을 다윗처럼 마음에 맞는 자<행 13:22>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많은 늑대들이 살았지만, 인간들의 왜곡된 지식으로 모두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도 왜곡된 교리와 전통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전수된다면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같이 올바른 크리스천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나마 이 땅에 신앙의 양심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과 선조들의 피.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다던 이 인천 땅에 다시금 바른 성경 『1611 킹제임스흠정역』을 허락해주셨고, 이를 통해서 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교리를 전수해줄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그러나 더 이상 감격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올바른 성경을 통해 올바른 교리를 할머니/할아버지가 그리고 부모들이 듣고, 읽고, 깨달아 삶과 가정에서 다음 세대(자녀, 손자)들에게 바르게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사명이므로 하루 이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의 선조들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이 우리 가운데서 불 일듯 일어날 것 이라고 확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간은 바로 ‘오늘’ 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바른 교리의 복음이 가정에서 삶에서 다시 되살아나 ‘다음 세대가 이 세대보다 주님을 더 잘 믿는 세대’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 <열왕기상 19:18>
2014-01-18 23:29:03 | 김상진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말씀에 인도 받고 싶습니다.
형제님의 넓은 가슴 밭에서 자라는 파란 죽순을 음미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그 마음을 사랑합니다^^
2014-01-12 01:39:05 | 최상기
사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전체에 15%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온건주의는 기독교를 누르기 위해서 다산정책을 펴고 있는데, 학계에 알려진 바로는 통계적으로 어느 나라든 이슬람 교도가 그 나라의 인구 5%가 넘어서면 테러가 자행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도 대략 20만 가량의 이슬람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독교를 가장 나쁜 종교로 매도하고 있어서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미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조장된 오해와 편견으로 말이지요~
2014-01-10 01:13:52 | 김상진
여기에서 다룬 참된성도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참된성도는 말씀에 의지하여 성화를 이루어가려고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렇게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가는 자매님의 모습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2014-01-10 01:07:30 | 김상진
이슬람교가 어떤 교리를 가졌는지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꾸란의 구체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여 주시니 등골이 서늘해지기까지 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는데 형제님의 열정으로 이곳은 훈훈하네요.
앞으로도 이 겨울을 잘 부탁합니다.^^
2014-01-09 19:47:20 | 김대용
형제님 갑자기 그렇게 댓글을 쓰시니 잠깐 놀랬습니다. 물론 제 부족한 글이
특정 상황이나 인물을 염두에 둔 글이 아님을 아시지만, 우연히 읽는 중에
유익을 얻으셨다는 뜻임을 알고 있습니다.
혹여 한 분이라도 오해하실까 하여 짧게 댓글을 올립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항상 강건 하십시요.
2014-01-09 19:32:51 | 김대용
형제님의 엄중한 메세지를 잘 헤아리며 "갈6:1"말씀을 맘 속에 품습니다.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저의 위선을 사랑으로 깨우쳐주셔서 감사드리며,
저의 절제치 못한 언행으로 상심하신 분들껜 용서를 구하며 사죄드립니다.
교회 지체로서 걸림돌이 아닌 고임돌로 살아가도록 성찰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이처럼 바른 메세지의 교회 일원으로 심겨주신 주님 은혜가 큰 기쁨을 주십니다.
"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 - 고전1:10 -
2014-01-09 17:22:21 | 최상기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본다는 것이 대단한 축복이라는 마음이 다시금 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고 하셨는데 올 한해는 성경을 마음들여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을 알아가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2014-01-09 17:14:22 | 이정희
문득 2년 전 극장에서 아이랑 같이 보았던 에니메이션 가 떠오르네요. 늑대무리의 리더를 '알파'라고 하지요.... 우리의 참 구원자 이신 예수님은 진정한 인간의 리더이십니다. 그 분의 걸어가신 길을 우리는 그대로 따라가야 하겠지요.
형제님의 깊이있는 통찰력에 다시한번 놀라며 형제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 어렵지만 기도하며 실천 해 나아가는 사랑침례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4-01-09 00:19:05 | 김경민
정말 제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독이라 형제님의 진지한 글이 마치 질병에 대한 처방전 같이 느껴지네요.... 고통스럽더라도 내 자신의 상태를 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직시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도의 삶은 참으로 어렵고 힘들지만 이미 보장 된 길이기에 인내하며 믿음으로 매순간 승리해야 겠습니다. 서로 독려하면서 말이에요. 귀한 글 감사합니다.
2014-01-09 00:08:53 | 김경민
동물 가운데 늑대만큼 억울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이전의 글 ‘왜, 늑대인가?’에서 잠시 다루었듯이, 늑대는 인간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동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사람들로부터 학살을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테러(terror: 공포, 그리스어 ‘terrior’에서 파생된 됨. ‘terrorism’은 공포의 확산의 뜻을 지님.)를 당해온 셈입니다. 그런 피해자인 늑대를 두고, 우리 사회는 단독테러를 자행하는 범행을 일컬어 일명, ‘론 울프테러(lone wolfe terror)’라고까지 명명합니다. 늑대가 들으면 억울해서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crime)와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팁(tip)을 드리자면, 그것은 범법동기에 의해서 구분됩니다. 범죄는, 가해자 자신(들)의 이익이 동기가 되어 자행하는 범법행위이지만, 테러리즘이란 정치․종교․이념 간의 갈등이 동기가 되어 자행되는 범법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테러(terror)의 개념이 바라보는 각도(입장)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일제치하로부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윤봉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의로운 순국열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를 정치적인 테러분자로 여기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한 편에서는 영웅, 다른 편에서는 잔인한 킬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도가 인간과 늑대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15c 이후 인류는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늑대들의 구역을 찬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신들의 영역과 무리(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목숨을 내놓고 다투는 그들만의 습성이 있는데, 그러한 늑대의 습성을 알리 만무했던 우리 인간과의 갈등은 그때부터 불가피하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를 찬탈당한 늑대들은 전처럼 사냥감을 찾기가 어려워져 새끼들의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개간한 농가의 양, 염소, 말들을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한 과정에서, 늑대는 인간을 습격하는 ‘잔인한 킬러’라는 오명이 생겼고, 그 이후로 사람들은 늑대를 총, 덪 등으로 사냥하기 시작 했으며 심지어는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마구잡이로 죽여 댔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결과로 사람들은 늑대의 방해가 없이 땅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늑대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는 시국을 맞게 되었습니다.(참고로 늑대는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 포식자의 위치를 담당합니다.)
이처럼 ‘오해와 편견’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늑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지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가 결여된 ‘선입견’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익관계에 따른 타협(탐욕)’입니다.
심리학에서 ‘초두효과(primacy effect)’라고 불리 우는 용어가 있습니다, 초두효과란, ‘초기의 정보 즉, 첫인상이 나중의 정보보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형성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선입견은 이러한 초두효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문제점은 한 번 뇌리에 고착되면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좋지 않은 선입견은 자기방어 기재로 작용하기 때문에 객관성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믿고 싶어 하는 타협성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한비자(韓非子)는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고, 뽕나무 벌레를 보면 소름끼쳐 하지만 어부들은 손으로 뱀장어를 잡고 부녀자들은 누에를 친다." 라며 이익이 있는 일 앞에서는 누구나 용사처럼 용감해진다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입견과 이익관계가 하나로 결합하게 되면 선입견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더 없이 좋은 구실이 되어줍니다. 설령 선입견이 이익관계에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또 다른 구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마치 이브가 뱀의 말에 꼬임당해 선악과를 탐하기 위한 구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듯이 말입니다.<창 3:3> 다시 말해서, 이익을 넘어 탐욕이 되어버리면 기존의 좋은 선입견도 더 이상 귀찮은 것이라고 치부하게 되어버립니다. 이쯤 되면 명확한 기준이 되는 법(法)도 무시하게 되어 탐욕을 위한 타협에 우정을 싹티우며 손잡을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그런 유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 예로,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들이 이러한 유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한 가지 예를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테러집단은 이슬람교의 부흥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12살 전후의 어린 소년 병사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입시키는 내용은, 이슬람 외에는 구원이 없으며 이슬람 교리를 핍박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꾸란 8:39, 9:123, 47:4>는 거짓 교리 입니다. 더 나아가 특히, 기독교인들과 싸울 때는 가차 없이 벌하라<꾸란 8:57>고 합니다(그 방법으로는 목을 베는 것인데, 김선일 사건이 그와 같은 사례입니다). 그 같은 교육을 받은 소년병들에게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모든 종교는 응징의 대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특히 기독교는 가장 나쁜 종교이면서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 오히려 알라의 뜻이라는 정당성이 선입견으로 뇌리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면 행동적인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행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관과 관련하여 내세에 주어지는 인본주의적 상급(이익)을 가르칩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죽으면 연옥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다가 죄의 정도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 때에 갈라지게 되는데, 단지 직통으로 천국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알라를 위해서 순교(테러행위)를 당하는 것이다<꾸란, 4:74, 9:89>. 그리고 그 순교자(테러분자)는 포상으로 천국 가는 첫날 72명의 미인들과 성관계를 즐길 수 있는 정력이 부여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어이없는 비상식적인 교리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목숨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의 몸을 폭탄과 함께 내던지는 어리석은 일을 자행합니다. 이처럼 ‘선입견’과 ‘이익관계의 조화’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탄의 절묘한 계략’으로 활용 됩니다. 그런데, 사탄의 이러한 계략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인가? 답은 아닙니다. 현재 기독교에도 사탄의 탐욕스러운 인본주의 교리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오해와 편견’이라는 열매로 탐스럽게 무르익고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짜 신도들도 넘쳐 납니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짜 성도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이 되어주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해하고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한 지독한 사랑까지도 흉내 내는 일도 가능하며, 심지어는 인류애도 품어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에게는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가짜 성도처럼 장기적으로 흉내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물론 가끔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남들에게 좋게 보이려하는 그릇된 일도 하지만 그 때마다 성령님의 자극으로 자신들이 곧바로 알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기독교는 소위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폄하할 때 표현하는 개독교가 되어 버렸다고 사람들이 종종 표현하는데,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씁쓸할 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탐욕으로 마귀와 손을 잡은 이 땅의 기독교는 온통 ‘오해와 편견’으로 조장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가짜의 정체는, 인본주의적 산물인 복(福) 사상의 주체가 되는 맘몬입니다. 맘몬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인양 믿고 있는 가짜 성도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바른 교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른말을 하는 그들을 교세라는 뒷배를 이용하여 이단으로 매도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가짜 하나님(실상은 맘몬)이 뭔가 더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맘몬이 하나님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맘몬의 능력으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소위 성령님의 열매라고 착각하면서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만의 확증이라고까지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대가를 주님 오신 날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우며 이를 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자신들이 주님을 오해했다고 변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마태복음 7:21~23> 우리 손 안에 쥐어져 있는 진정한 말씀(KJB)만이 그들의 심판자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작금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하여 알파늑대(우두머리)에게 소감을 묻는다면, 알파늑대는 이렇게 말을 할을 할 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은 있어. 우리 신의 이름은 대자연(大自然)이지. 자연은 여태까지 우리 늑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하고 제공해 주었어. 우리가 뭘 잘해서 그렇게 허락해 준 것이 아니라, 자연은 원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을 대상으로 너희들처럼 감히 거래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우리에게 자연은 오직 경배의 대상일 뿐이지. 자연은 우리가 있기 이전에 스스로 존재<출 3:14>하고 있었어. 그래서 자연 앞에서는 우리 늑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굴복할 수밖에 없지. 우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대자연 앞에서 만큼은 굴복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정해놓은 규칙(순리)대로 순종하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며 살지. 우리는 그것이 우리 늑대가 오랫동안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온 지혜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어<잠 1:7>. 우리는 너희들이 믿는 신(神)을 잘 몰라. 하지만, 우리도 우리에게 부여해준 모든 대자연을 보면서 자연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신성을 모른 척 변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롬 1:20>.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자연은 잔인하고 사악한 너희 인간을 존중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것도 많은 권위를 부여해주면서 말이야. 너희가 잔인하다는 소문은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왔는데 듣자하니, 너희들은 너희들이 믿고 싶은 대로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내는데 능숙하다지?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조상(늑대)들을 죽여 왔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진정으로 믿는 신(神)까지도 너희 손으로 잡아 죽였다며? 그런데도 너희 신(神)은 너희를 용서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야? 우리는 단지 자연이 너희들에게 부여해준 권위 때문에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지 못했지만, 너희 신(神)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너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하여 기꺼히 목숨을 내놓으셨다고 하던데? 아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구원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런 스토리는 소설에서도 듣도 보지도 못한 믿겨지지 않는 일인데 말이야! 만일 그 이야기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너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너희들을 부러워하지 않아, 왜냐고? 우리는 너희처럼 잘못된 선입견과 탐욕에 가득 찬 추악한 냄새를 풍기면서까지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거든. 우리가 너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냄새 때문이야.“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한 번도 이성적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오해와 편견속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흘러왔고, 여전히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해답을 늑대로부터 찾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제시해준 비결이라고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침묵’이라는 단어 였습니다. 늑대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듯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찬 한 세상. 그리고 이 새대. 이제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수 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시험이 찾아 오지만, 어쩔 수 없는 죄 많은 인간이라서 용서를 못한다는 핑계는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물을 찾지 않고도 죄 없는 늑대처럼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음이 가능해 졌기 때문입니다.
<요 13: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2014-01-08 23:12:55 | 김상진
성도님들의 귀한 댓글에 감사합니다.
위선이라는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깊숙이 빠져
아주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는 함정과 같은 특성이 있기에
성경 말씀을 읽고 저 자신을 돌아보며 깨달았던 묵상을 나누는
차원으로만 이해해 주십시오.
모든 분들의 평안함과 강건함을 소망합니다.
2014-01-08 21:50:23 | 김대용
얼마 전부터 많이 생각했던 것들 이었는데, 형제님의 글을 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보는 분들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보다 가장 먼저 자신을 돌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반성을 하게 될 것 같네요.
인간은 누구나 위선적인 부분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위선을 위한 위선이 있는지를 잘 생각해 봐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14-01-08 20:30:04 | 김상진
이 글을 통해 제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 보게 됩니다.
찔림도 있고, 권면의 글로 느껴지는 이 글을 여러번 되새기며 읽어야 할 것 같네요.
유익한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2014-01-08 19:03:07 | 윤영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해당되지만 특히 위선, 위선자란 말씀 앞에서 작아지는 저를 봅니다.
좋은 글을 써주신 형제님! 감사합니다.
2014-01-08 15:58:21 | 차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