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6249개
조양교 형제님 안녕하세요 글로써 만나니 또한 반갑습니다. 영어로 찾아보니 단일 = single 이네요. 이 뜻은.. 1. 단 하나의, 하나뿐인(one only), 유일한(sole), 2. 혼자만의, 1인용의 등등이 있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누가복음 11장, 33 누구든지 등잔불을 켜서 은밀한 곳이나 통 밑에 두지 아니하고 등잔대 위에 두나니 이것은 들어가는 자들이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몸의 등불은 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 몸도 빛으로 가득하되 네 눈이 악하면 네 몸도 어둠으로 가득하니라. 35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둡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위 말씀의 구절이 문맥상 더 이해하기 좋은거 같습니다. 성경전체에서 single을 검색해 보면.. 마 6:22, 눅 11:34, 행 2:46, 엡 6:5, 골 3:22 총 5번 사용되었네요. 앞의 두 구절은 single eye 로.. 뒤의 세 구절은 singleness of heart 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마음 = 눈 = 빛 :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는 단일한 눈과 마음이 외부의 빛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지 저는 생각이 되어집니다. 사실 이제까지 이 말씀을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형제님이 쓰신 좋은 글을 보며 저 또한 사람들의 빛을 쫓지나 않는지, 하나님께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단일하게 하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4-01-24 00:39:15 | 강평원
또다시 우리 50대 청년의 사유와 저작활동에 깊이 찬사를 보냅니다. 말씀을 자세히 읽어야 하며 말씀의 완전성을 마음에 새기도록 일깨우는 사명이 우리 교회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읽게 해 주시니 다시한번 정확한 말씀의 달콤함을 느낍니다. 자꾸 읽어놔야 안목의 정욕을 조절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23 18:31:43 | 오혜미
"{주}께서 듣는 귀와 보는 눈 그 둘을 다 만드셨느니라." (잠20:12)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을 최첨단 동영상 카메라로 만드셨습니다. 눈의 정교함을 연구한 논문만 해도 그 분량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보는 눈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는 눈은 하나님의 목적하신대로 사용할 때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공통의 특징중 하나는 눈이 두개라는 것인데요, 두개의 눈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고 촛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눈은 0.1미리 이하의 작은 크기나 비물질적인 것들은 보지 못하도록 적당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는 보이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고 부정확하므로 보는 것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됩니다. 어쨋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눈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이 쉴새없이 뇌에 전달됩니다. 이토록 신비한 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6:22,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22 몸의 등불은 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하되 23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라.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 (흠정역)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몸이 빛으로 가득하게 할 수 도 있고, 또 어둠으로 가득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결론은 눈을 악하게 하지말고 단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단일과 악"을 대비하고 있는데요, 왜 "선과 악"으로 대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개역성경은 "눈이 성하면(좋으면), 눈이 나쁘면"으로 대비를 했습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개역)  이 글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시력이 좋으면 온 몸이 밝고, 시력이 나쁘거나 안경을 쓰면 온 몸이 어둡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영해를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일단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위 20절에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재물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고,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제, 기도, 금식을 할 때 사람앞에 보이려 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께 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24절 이후부터 두 주인에 대한 언급이 있고, 육체와 땅의 일을 구하기에 앞서 33절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의 말씀을 하시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 22,23절을 보겠습니다. 시력이 좋고 나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악은 선의 반대로서의 악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난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누리는 육체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알려주고 계신 것이고요,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땅히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하늘의 복을 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부와 명예에 눈을 두는 것은 악한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늘의 복에 눈을 단일하게 두는 것이 우리 온몸을 빛으로 가득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개역성경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어려운 내용이지만 흠정역 성경으로 통해 그 의미가 분명히 와닿고,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눈을 이 땅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알려주시는 구절입니다.    
2014-01-23 15:41:50 | 조양교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성경기록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모호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해주신 것들을 분명하게 붙들어야 겠습니다. 복음과 구원은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디지탈 시대에 꼭들어맞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01-21 18:00:05 | 조양교
우리 50대 청년들의 활발한 사유활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지속적으로 주님을 높이고 말씀을 드러내는 일에 시간과 정열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본이 됩니다. 구원에 대한 정확한 설명에 또 힘이 납니다. 아멘!
2014-01-21 12:52:06 | 오혜미
제목이 정말 참신합니다.^^ "하나님은 애매모호한 것을 싫어하시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신다."는 이 부분이 제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복음을 모호한 것으로 변개하는 악함에 맞서 변개되지 않은 진리를 전하는 우리 모두가 지치지 않고 끝까지 신실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2014-01-21 12:01:29 | 김대용
구원은 디지털이다.애매모호한 아날로그적인 것이 아니다.다시 태어나는 것, 구원은 확실한 실체이지 애매모호함이 아니다.(요 3:3,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태어나지 않은 것은 0 이고, 태어난 것은 1이다.사람이 만든 컴퓨터는 확실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 0과 1만을 사용하여 명령과 데이터를 형성한다.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체의 유전자 DNA도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 G:구아닌 이라는 4가지의 염기를 사용한 디지털 정보체계 이다.이것들은 다시 A-T와 D-C와 만 결합되게 되어 있어 확실한 디지털 정보 체계로 명령과 데이터를 형성한다.컴퓨터와 생명체의 정보 전달 체계가 애매모호한 아날로그 체계라면 아마도 혼돈 그 자체 일 것이다.제대로 된 통계가 생성될 수 없고, 생명체의 재 생성도 불가능 할 것이다.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요 3:3 흠정역)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요 3:4 )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요 3:5)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6)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우리는 육적으로 어머니의 양수인 물속에서 첫 번째로 태어났고 영은 죽은 상태로 태어났다.우리의 죽어있는 영은 성령에게서 두 번째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우리를 혼란하게 하였던 다음(벧전 2:2, 개정)의 성경 구절로 인하여 다시 태어남의 의미가 혼미해져 어디까지 자라나야 구원에 이르는 것 인지 알 수 없게 하는 아날로그적인 성경 구절을 바른 성경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벧전 2:2, 개정)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시인하고 다시 태어난 것은 영의 상태가 0에서 1로 바뀌는 단 1회의 사건으로 영이 다시 태어난 획기적인 사건이다.구원은 애매모호한 아날로그적인 사건이 아니고 죽었던 영이 산영이 된 사건이다.다음(벧전 2:2, 킹흠정)의 성경말씀 처럼 새로 태어난 아기 이다.그리고 말씀의 젖으로(성경말씀으로) 성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축복된 신생아 이다.(벧전 2:2, 킹흠정)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구주의 보혈로, 영적으로, 새롭게 탄생한 하나님 나라의 신생아!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른 복 받은 신생아 이다.(고후 7:10, 킹흠정)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함을 설명하셨다.(요 3:3,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요 3:4, )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요 3:5, )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6, )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 3:7, )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우리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영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영원히 죽을 인생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하나님은 애매모호한 것을 싫어하시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신다.오직 너희의 예는 예라 하고 너희의 아니요는 아니요라 하라.애매모호한 혼돈 속에서 살지 말고 확실한 말씀을 붙들어야 구원받은 자의 영이 행복하다.(약 5:12, 킹흠정) 그러나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먼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맹세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예는 예라 하고 너희의 아니요는 아니요라 하라. 이것은 너희가 정죄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2014-01-21 11:39:41 | 허광무
맞습니다. 모두 어른들의 책임이지요. 아이들에게는 이제 '몬스터'도 좋은 것처럼 미화 시키는 세상이되었고, 게다가 전교 1등이면 재수 없다며 학대를 하는 지경이라고 하니, 이제 공부로만 전교 1등을 해서는 안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수없다는 소릴 안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도 전교 1등을 해야되는 분위기라고 하니, 참 안타깝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교회와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2014-01-21 10:08:31 | 김상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참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라는 말을 하는 몬스터로 아이가 자란 것은 그런 환경을 만들고 허용한 우리 모든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참으로 폭탄주&음란 문화에 취해 있는 우리 사회의 일부 전문직 어른들과 절묘하게 overlap 됩니다. 이 지상의 어느 교회에서든 아무리 자녀의 교육이 지고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신앙의 가치를 가볍게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깊은 타락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내 것을 포기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 항상 사탄 마귀는 그 지점에서 위선의 불씨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합니다. 부디 진리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견고하게 간직되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4-01-20 14:24:01 | 김대용
어렸을 때는 공부보다 인성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한 표를 던집니다. 성경말씀 묵상은 당연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경에 비할 바는 안되는 책이지만, 인문학 서적 중에서 '논어'와 같은 책으로 인성공부를 곁들이면 좋다고 봅니다. 논어는 너무 쉬고 간결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해하기 좋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정에 넘쳐나길 기도하겠습니다.^^
2014-01-19 21:22:38 | 김상진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것은 어느 가정에서나 해당되는 과제이지요. 그래도 자매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성경으로 바르게 훈육하고 키워내려는 데는 귀감이 됩니다.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초중고 학생들을 보면 참 암담하기 짝이 없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키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 아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선과 죄악'의 구도이든, 인생의 중대한 문제가 되든지 간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게 되어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자매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아이도 11살이네요. ㅠㅠ 언제, 시간이 되면 부부끼리 교육에 대해서 심각하게 논의해보면 좋겠네요~ 샬롬~~ ^^
2014-01-19 21:18:04 | 김상진
만만치않은 공부 가르치는 어려움보다 인성 안 잡힐때 눈물이 나고 어렵습니다. 집에서만이라도 공부는 인내를 기르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게끔 심어주고 싶고, 유언도 다른건 좀 못해도 말씀은 습관되게 살다와라.. 적어놨습니다. 오늘도..(죽을때 덜 후회되게) 아이들을 예수님 마음으로 바라보아지길 기도합니다.
2014-01-19 14:20:44 | 목영주
오늘 이제 11살이 된 제 첫 아이를 앉혀 놓고 심각하게 야단을 쳤습니다. 평소에도 엄하게 하는 편이지만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점점 더 말을 안듣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친다고 하고, 엄하게 키워 본다고 하고, 나름 성경적으로 아이를 바르게 키워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역부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단지 회초리 몇대를 때리기 보다는 아이에게 진실하게 죄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의미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 정말 힘이 듭니다. 제 자신 하나 주님 앞에 바로 세우지도 못하면서 아이를 바르게 양육하기란 참으로 아이러니 같습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자녀도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말씀을 보니 제 안에 평안이 생깁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기쁨과 소망이 제 안에서 샘솟아 넘칩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 만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아이도 주님께 맡깁니다. 최근에 창세기부터 아이와 함께 읽기 시작했는데 이 말씀이 제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내가 보건대 아브라함은 분명히 크고 강력한 민족이 되며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 안에서 복을 받으리니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뒤에 있을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판단의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친히 그에게 이루리라, 하시고(창18:18~19)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형제님의 깊이 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19 01:20:46 | 김경민
  늑대 무리는 새끼 양육을 매우 중시합니다. 무리 중에서 새끼를 생산할 수 있는 늑대는 오직 수컷 알파와 암컷 알파만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수한 종자의 생산과 효율적인 관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암컷 알파늑대는 적게는 3마리에서 많게는 9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게 됩니다. 암컷알파는 새끼를 낳으면 10주 동안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보살피다가 그 이후에는 무리에게 새끼 양육을 맡깁니다.(무리가 있을 경우) 이때 ‘베이비시터’의 역할은 주로 조직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늑대이거나 늙은 늑대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꼭 그들에게만 새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파 늑대를 비롯하여 모든 늑대가 새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후 6개월 까지 공동으로 보호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등 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왜, 늑대 무리는 새끼양육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해야 조직이 건재해지고 조직이 건재해져야 다른 늑대 무리나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늙어도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험용도라고나 할까요? 이처럼 늑대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자신들의 무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꿉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다름 아닌 바로 새끼늑대 즉, ‘다음 세대’ 입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이 땅에 무죄한 피를 흘려가며 신앙을 모범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아야 했고, 칼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거꾸로 박혀진 못 위를 걸어가면서까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주님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 오히려 세상을 능가하는 흉내를 내며 기복주의와 권위주의를 도구삼아 ‘샤머니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스스로가 샤만(무당)이 되어, 예수님은 단지 천국티켓을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성령님은 복 빌어주고 귀신 쫓고 병이나 고쳐주면 되는 그런 싸구려 신(神)정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우리 기독교의 ‘구원’ 설교는 구원파에게, ‘재림’ 설교는 다미선이나 제칠일안식교 등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죄’는 도덕설교로, ‘의’는 윤리 설교로 대체시키고 있으며, ‘심판’은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극단 종말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성령님의 가르침을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채 교회들은 교리가 아닌 비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상속에서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롬 1:21> 교회를 세우기에 급급하며, 혹시 이단으로 오해나 받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성도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나 않으까? 하면서 잔뜩 주눅이 든 전당포가게 쯤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동성애’ 뿐만 아니라, ‘종교일치운동’까지도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자신들의 능력 과시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형편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미혹하여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바벨탑) 건축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 <요 16:8-11>   이처럼 지금의 기독교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숭배<골 3:5>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어 그 전통이 말씀보다 위에 있게 함으로써 전통이 마치 진정한 신앙의 유산인양 두 눈에 힘을 주며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은 전통이 진리인줄로 착각하며 더 이상 온전한 하나님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다음 세대들은 더 이상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할 턱이 없습니다. 오직 이 화려한 세상에서 그들에게는 물질주의가 제공해주는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낙(樂)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며 또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을 행하느니라.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막 7:7-9>   며칠 전에 아내로부터 자녀 교육에 열정이 남다른 고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의 푸념에 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극정성으로 아이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외출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벌어져 숨이 턱하니 막혔다고 합니다. 전교 1등을 한다는 자신의 아이가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와서 학생신분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들에게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야단을 쳤는데, 아이의 변명이 더 숨이 막힐 일입니다.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서 말하는 우등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공부만 잘 하면 우등생일까요? 정말로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2년 4월에 전국 16개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서, 학생들이 임신ㆍ출산ㆍ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5조), 복장ㆍ두발 등 용모에 있어 개성을 실현할 권리(12조) 등이 시행됨에 따라 중고등학생들이 임신을 해도, 건전치 못한 옷을 입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강요 금지(16조) 조항도 마련되어 있어서 부모들이 교회를 가자고 강조해서도 안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학문은 철학(philosophy, 哲學)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의 목표는 ‘의(義), 정(正), 지(知)’ 즉, 신(神)에 대한 의로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바르게 사는 도(道)에 대하여, 인간(人)의 본질에 대한 지식(知識)을 가르치는 철학 교육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도 그러한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생산자(경제), 군인(국방), 철인(정치)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주의’에서 기인한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노동자 생산을 위한 교육제도를 이식시켰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은 ‘의(義), 정(正), 지(知)’라는 이념 대신에,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나타내는 ‘지정의(知情意)’에 대한 교육철학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특히, 여기에서 정(情)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으로써 즉,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1910년에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 받았던 ‘지덕체(智德體)’ 이론이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의 교육 이념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세대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조차 배울 수도 없고 강조되지 않은 비본질적인 교육 즉, 지식만을 위한 교육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우월주의’가 우리 사회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두려움도, 바르게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질서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실체 없는 교육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생각하는 사고력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듯함). 그래서 앞에서 전술한 학생(전교 1등 한다는 고등학생)처럼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는 세대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소년 범죄율이 전체 범죄의 6.8%를 넘어선 적이 없었으나 2012년에 이르러 8.3%를 넘어섰고 그 중에서 강력 범죄 발생 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더욱 악해져 가는 사회 환경)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다음세대(자녀)들을 양육해야 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적만 좋은 우등생 자녀로 만들든지 아니면, 비록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말씀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말입니다. 물론, 학교 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우등생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발선상에서 만큼은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에 분명한 목표(우선순위)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부모들의 몫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성도들이라면, 선택이라는 자율성을 뛰어 넘어 의무감으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속성이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수 24:19, 삼상 2:2, 6:20, 욥 6:10, 시 71:22, 잠 9:10, 30:3, 사 5:16, 5:24, 10,20, 호 11:12, 요 17:11, 딤후 1:9, 요일 2:20, 계 4:8, 6: 10, 15: 4 ..,>.    늑대들은 더 나은 늑대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시킵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더 사회적이고, 더 조직에 충성하고, 더 무리들을 아끼고, 더 질서를 존중하고, 더 사냥을 잘 하는 등.., 한 마디로 ‘더 늑대다운 늑대’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모든 동물이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늑대들은 사냥만 잘 한다고 해서 우등생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늑대는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핵심은 ‘헌신’이고, ‘배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늑대는 절대로 높은 서열에 이르지 못하며 오래지 않아 무리에서 퇴출을 당하고 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늑대는 아주 철저하고 냉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도,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통해서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히 6:1>. 그 첫 걸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성품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의 구별됨. 즉,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요 4:24>, 그러한 사람을 다윗처럼 마음에 맞는 자<행 13:22>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많은 늑대들이 살았지만, 인간들의 왜곡된 지식으로 모두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도 왜곡된 교리와 전통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전수된다면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같이 올바른 크리스천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나마 이 땅에 신앙의 양심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과 선조들의 피.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다던 이 인천 땅에 다시금 바른 성경 『1611 킹제임스흠정역』을 허락해주셨고, 이를 통해서 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교리를 전수해줄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그러나 더 이상 감격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올바른 성경을 통해 올바른 교리를 할머니/할아버지가 그리고 부모들이 듣고, 읽고, 깨달아 삶과 가정에서 다음 세대(자녀, 손자)들에게 바르게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사명이므로 하루 이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의 선조들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이 우리 가운데서 불 일듯 일어날 것 이라고 확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간은 바로 ‘오늘’ 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바른 교리의 복음이 가정에서 삶에서 다시 되살아나 ‘다음 세대가 이 세대보다 주님을 더 잘 믿는 세대’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 <열왕기상 19:18>
2014-01-18 23:29:03 | 김상진
사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전체에 15%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온건주의는 기독교를 누르기 위해서 다산정책을 펴고 있는데, 학계에 알려진 바로는 통계적으로 어느 나라든 이슬람 교도가 그 나라의 인구 5%가 넘어서면 테러가 자행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도 대략 20만 가량의 이슬람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독교를 가장 나쁜 종교로 매도하고 있어서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미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조장된 오해와 편견으로 말이지요~
2014-01-10 01:13:52 | 김상진
여기에서 다룬 참된성도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참된성도는 말씀에 의지하여 성화를 이루어가려고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렇게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가는 자매님의 모습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2014-01-10 01:07:30 | 김상진
이슬람교가 어떤 교리를 가졌는지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꾸란의 구체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여 주시니 등골이 서늘해지기까지 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는데 형제님의 열정으로 이곳은 훈훈하네요. 앞으로도 이 겨울을 잘 부탁합니다.^^
2014-01-09 19:47:20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