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 아멘이 됩니다
또한 마지막 운명을 확실히 믿고 있으나
매일을 기쁨으로 채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도 세상이 악으로 치닫고 있어 어린아이 키우기가 살얼음판
걷는것 같다는 말을 지인에게 들었지요...
다른 지인은 딸의 사윗감을 "돈많은사람"이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말세지말을 사는 우리는 맘몬세상에서사는 동안 바른 진리를 전하는 일을 통해
주님께 기쁨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4-02-11 17:57:41 | 이수영
대용형제님의 귀한 글을 늘 눈동냥으로 주워담기 바쁜 1인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다가올수록
우리의 동일한 운명공동체는 더욱 세상과의 분리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세상의 문화, 교육, 정치, 경제, 종교... 어느 것 하나 우리와 합치될 것이 없네요.
근본주의 성경 신자가 모인 사랑침례교회는
어쩌면 더더욱 고립을 자초하는 공동체일 수 있겠구나 생각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더욱 기쁨이 되는 것은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더욱 분리되고 우리 주님의 편에 서는 일이기에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닐런지요..
육신을 입고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에
고급 청량제와도 같은 맑은 정신과 기준을 환기시켜주신
대용형제님께 가슴깊이 감사드립니다!
2014-02-11 15:23:06 | 정진철
어떻게 마음 먹는 것이 바른 것인지 확인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에 소망 둔 엄마로 비춰지는게 늘 숙제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당당히 전하는 그런 이웃이 되어지길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02-11 14:24:35 | 목영주
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듯 찔리는 심정 감출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을 어렵게 하는것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할까 하는 것입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내가 하기싫어도 떠밀려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했는데 사랑침례교회에 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8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제 자신이 형제님이 글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성도가 맞이할 운명의 종착지를 기쁘게 음미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하는 마음때문에 고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같은 지역의 어르신은 어떻게라도 이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전철역앞에 가판대도 펴놓고 또 연구하시며 그일을 하시기위해 건강관리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귀감도 되고 제 자신이 부끄러운 마음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땅을 향해있던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눈을 고정시키고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절제하며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가 마음에 새겨야 할 글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02-11 13:39:52 | 이정희
좋은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살게 될 곳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2-11 13:25:35 | 관리자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목사는 26세에 왕립의학협회로부터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대단히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44년 이상의 목회와 설교 사역을 통해 그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물론 이분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성경 신자가 보기에 교리적 한계가 명확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의 초인적인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고 특히, 저 불후의 명저 ‘설교와 설교자’는 설교자가 왜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위대한 막대기인가를 가장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교리적 한계를 지녔지만 위대한 설교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저서(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에서 성도가 궁극적으로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 논한 한 부분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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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장에서 ‘짐승’이라고 묘사된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중략-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모양에 있어서 그들은 혼합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존재들일까요? 그들이 천사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대단히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구속받고 영화된 인류를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피조 된 생물의 최고의 특성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의 주된 기능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거하게 될 만큼 고귀하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요! 그룹과 스랍, 그리고 이 짐승들에 대한 모든 성경의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이것이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과 영화, 그리고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 안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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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정해진 항거할 수 없는 처지가 운명의 사전적 의미라고 한다면 각 사람이 맨 마지막에 처하게 될 영원히 불변할 운명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윗글에서 마틴 로이즈 존스가 묵상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펼쳐지는 천상의 예배가 바로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함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 이어지는 사도 요한이 바라본 셋째 하늘의 왕좌에는 벽옥과 홍보석 같은 한 분이 좌정해 계십니다(계4;2~3). 왕좌 둘레에는 스물네 자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찬송(계5:9~10) 등을 살펴볼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물네 명의 장로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에도 공식 행사, 그것도 중요한 행사일수록 참여한 사람들의 자리 배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럴 때는 각 사람의 신분의 존귀함과 직책의 중함 정도에 따라 자리의 순서가 결정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왕좌 바로 옆 둘레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의 24자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는 하나님의 근위병 역할을 하는 ‘네 짐승’이 지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왕좌와 네 짐승과 장로들의 한가운데 그 고귀한 자리에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천사들은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밖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의 말씀을 참조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최종적인 위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 바로 옆, 즉 창조물로서 거룩하신 창조주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도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들은 천사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천사를 실제로 보여준다면 지금 바로 미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갈 사람들이 허다할 겁니다. 지금은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 다가설 수 없는 거룩한 영역에 존재하며 활동하는 천사들도 요한계시록 천상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옆에 자리한 구원받은 성도들을 밖에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할리웃이 만들어낸 히어로들을 보십시오. 소닉붐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초인적 존재인 수퍼맨이나 가슴에 원자로를 품고 철갑을 두른 가공할 위력의 아이언맨이나 사실 이들은 성경에 계시된 천사들의 권능과 존귀함과 비교하면 미미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만약 실제로 나타난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은 온 혼을 쏟아 부으며 그들에게 열광할 겁니다. 그러나 이들도 성경에 기록된 천사들에 견주면 기어 다니는 굼벵이보다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지상에 등장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들의 사악함은 상관치 않고 자신의 온 마음을 주었고 타락한 천사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춰 마음대로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6:1~2).
이런 놀라운 존재인 천사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온 우주와 모든 곳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까지 다가설 수 있는 존귀함, 즉 이 놀라운 신분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운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삽니까? 매일 매일 닥치는 육신과 삶의 필요를 위해서는 온 신경이 자연스럽게 쏠리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 세계를 먼지처럼 밀어젖히고 장차 우리에게 임할 변치 않을 극히 견고한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한 장소가 있습니다. 장차 성도들이 영원의 시간 속에 거하게 될 한 도시입니다. 온 우주의 심장부이며 모든 처소들 중에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존귀한 이 도시에 대해 바울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땅에 중심부인 예루살렘이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한 도시, 즉 하늘들과 땅의 모든 처소의 영원한 중심이 될 ‘새 예루살렘’은 빛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께서 직접 그 도시의 광채가 되시는 곳입니다(계21:23). 또한, 이 거룩한 도시, 모든 곳의 심장부는 그 누구도 아닌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곳입니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우리는 이사를 하기로 한 지역의 아파트를 고를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 중 하나가 어떤 회사가 건설한 아파트인가 하는 겁니다. 인지도가 높은 대형건설사일수록 당연히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도 다른 아파트에 비해 매입비용이 높습니다. 그 어떤 아파트나 건축물 혹은 어떤 정부가 기획하고 건설한 도시와도 비교되지 않은 예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건설하신 새 예루살렘은 구원받은 성도가 거하게 될 본향이요 최종적인 근거지가 됩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 거주민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21:4)
이렇게 창조물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약속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시는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존재로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영원히 분리해 주신다는 놀라운 약속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인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겁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1:4)
다시 언급하지만, 사망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아픔이 없다는 약속과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은 창조된 존재들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특혜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믿기에 우리는 구원받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때로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을 감수하고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과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흔들림 없이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요즈음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체적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여기도록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과연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얼마나 대접받고 있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의 영역이 아닌 눈에 보이는 환경, 조건, 경력, 사람의 능력, 학력, 재정적 준비, 인지도 등등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와 개개인의 구체적 삶 속에서 대접받고 있다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권능이 여러분의 지금의 삶까지 바꾸어 놓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상속 유업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이렇듯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이 모든 약속과 장차 받을 축복을 잊어버리거나 별 기대 없이 매일 눈에 보이는 필요를 채우는 것에만 열중한다면 성도의 삶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지향점 없는 각박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속에 절절히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오래전에 한국에서 로또가 처음 판매될 때 재미삼아 사오라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또를 사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값을 치르면 주는 영수증처럼 생긴 그 얇고 작은 종이가 수백억 가치가 있는 일등 복권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등에 당첨된 로또 복권을 소유한 사람에게 그 얇고 별 볼 일 없는 바코드가 찍힌 종이는 더는 쓸모없는 종이가 아닙니다. 수백억의 현금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귀한 물건이 됩니다. 그것은 당첨된 복권에 부여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금으로 수백억을 은행에 예금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 순간부터 자신을 수백억의 자산가로 생각하고 그 돈의 용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극도의 흥분과 희락을 절로 경험합니다. 당첨된 복권을 보여주지 않아도 지인에게 당첨 사실을 털어놓는 그의 진지한 표정과 말과 전인(全人)에서 풍겨 나오는 확고한 믿음은 듣는 이가 그의 고백을 절로 신뢰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사실 일등에 당첨된 복권은 같은 회차에 발행된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수많은 복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쇄된 글자가 찍힌 작은 종이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 종이에 부여된 약속이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복권과 다르기에 그런 능력을 발휘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비해 하찮기 그지없는 복권 속에 들어있는 약속에 대한 믿음도 사람을 바꾸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초월해서 감정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꿉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는 모습을 보기는 극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려니 눈에 보이는 각종 행사와 초현대식 교회 건물과 유명인 등 사람의 눈을 매료시키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울 도리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구원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성도가 맞이하게 될 최종적인 운명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참으로 적은 것을 알게 됩니다. 확률이 극히 희박한 로또 종이에 보내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믿음보다 더 초라한 대우를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천상에서 성도들의 사역을 눈이 떨어지라고 집중해서 보고 있는 천사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깁니다.
그동안 ‘성경지킴이’와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와 각종 미디어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바른 성경과 그로 인해 세워진 바른 교리가 있음이 전해졌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가장 부족하고 아둔한 저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존된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접하고 한때 머리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동의를 표했던 사람들 중에서 진리에 응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은 사실 적다고 봅니다. 진리에 반응하고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스스로 고안한 논리로 그럴 수밖에 없는 궁색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영상이라는 것이 참 편리하고 빠르게 진리를 전하고 있음에 감격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간편하게 진리의 가르침을 접하고 마치 홈쇼핑을 즐기듯 그것을 보는 것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도 됩니다. 영적으로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지적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이미 우리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할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성도가 종국에 다다를 찬란한 운명을 확고히 믿고 자신의 온 생을 기쁘게 헌신했던 사도 바울의 모습은 진리를 접하고도 여전히 간편함을 추구하며 영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오히려 이젠 적은 지식으로 어설픈 선생 역할을 해 보려 하는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만듭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고단한 짐은 점점 가중될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이전처럼 건전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서는 더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체계가 이룩되어야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휴거를 통해 교회를 불러올리실지 알 수 없으나 그때까지는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갈수록 악하고 험난해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을 꾸려가야 합니다. 이런 고단한 삶 속에서 성도가 위안을 얻고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굳게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점점 악해지는 배교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약속, 성도가 맞이할 운명의 종착지를 기쁘게 음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바울처럼은 못 되더라도 성도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리를 위해 손해 보고 결단하고 비진리와 결별하고 분리하는 담대한 모습을 보일 때 믿음의 능력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생생하게 세상에 증명될 것이고 바울이 고대하던 운명의 종착지에서 신실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이 하나하나 우리 각자에게 확정될 것이라 믿습니다.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고전9:24~25)
2014-02-11 11:49:15 | 김대용
부고에 대한 소식을 시적으로 표현해주시니 마음에 많은 것들이 와닿습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주님에 대한 복음을 전해주셨다는 것이 아직 믿음생활을 하지 않은 저희 아버지를 생각할 때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삼가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2014-02-08 12:39:08 | 김상진
가장 슬픈 시간에 함께하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버님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또 자식들에게 전하고 가셨으니
사실 가장 큰 일을 하셨습니다.
형제님과 자매님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2-07 11:00:48 | 관리자
형제님의 글에서 아버님의 사랑이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해주신 것은 이보다 큰 유산이 없으리라 봅니다.
훗날 기쁜 마음으로 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가지와 같이 사라져 버릴 운명이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맺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4-02-07 10:48:30 | 조양교
조용함 속에 진정한 가치와 힘이 있다는 교훈과 함께
아버님의 일생을 시적 감성으로 풀어내신 잔잔한 글은
그 어떤 뛰어난 석공이 새긴 묘비보다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기념비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족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 하심과 평강이 함께하길 바라오며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임을 생생히 증언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02-07 10:32:46 | 김대용
다들 명절준비에 분주할 때라
항상 깊이 사고하는 분이시니 더욱
연락을 못하셨겠구나 !싶습니다.
글 읽으며 엄마생각도 겹쳐졌지요.
지금은 주님과 함께 계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도 곧 주님과 함께 있기를 고대하니까요.
그래서 장럐식에서 찬양으로 위로하는 것 이지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하셨으니 주께서 완전한 평강을 주신 글 감사합니다.
2014-02-07 08:30:17 | 이수영
조용하고 부드러운 글 속에..
아버님에 대한 형제님의 사랑과 이별의 아픔이 느껴지네요.
형제님의 슬픔을 같이 나누며,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014-02-07 00:38:21 | 강평원
마음에 깊이 와닿는 글이네요.
나이들고 병들고 죽음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더욱 확실히 붙잡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원한 나라로 입성하신 아버님을 그리며 훌륭한 글을 남겨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정말 너무 커다란 아픔을 느낄 때 소리없는 하나님의 위로로 충만해지는 은혜를 누려야겠습니다.
2014-02-07 00:20:52 | 오혜미
아름다운 글 뒤에 아픈 마음이 들어있네요
얼마나 허전하실까요. 주님의 크신 위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2014-02-07 00:00:48 | 김혜순
잔잔한 시같은 글인 줄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어르신께서 하나님께로 가셨군요
너무나 큰 슬픔일 땐 사람의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있는데
형제님과 가족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2014-02-06 22:36:15 | 임성희
형제님과 자매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지난주일 아침시간에 승강기에서 내리면서 얼핏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어떤 인사 한마디 못드리고 내가 잘못 본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오후 예배시간을 끝내고 11층 교제 시간에 아버님의 소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위로의 말을 전하고, 훌륭하신 아버님을 두신것에 저 또한 주님께 감사드리고 우리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확실한 소망이 있기에 또 한번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병수 형제
2014-02-06 22:35:44 | 여병수
수개월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아버님 병환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기도로써 위로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올립니다.
왜 부고를 전하지 않았냐는 질타를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하는 사정또한 있음에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올립니다.
죄송합니다.
2014-02-06 21:52:20 | 유용수
# 게시판위에 앉은 까치 한 마리
사람들은 조금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엄살일 지라도 아프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 아프면 이런 엄살도 나오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힘들면 어느 누구에게 호소하고 싶어집니다.
이 호소가 발전하여 큰 소리로 울부짖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힘들면 아무에게도 호소할 마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좋으면 소리를 막 지르고 싶어 합니다.
어깨를 들썩들썩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너무 좋으면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잘 안 나옵니다.
좋은 것!
깊이 있는 것!
가치 있는 것!
그것은, 요란함 속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아래 조용하고 고요함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조용한 힘일 것입니다.
햇볕은 아무 소리 없이 그 열을 하루 종일 내리쏟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열기는 대단합니다.
그 속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죽이는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조용히 자기의 열기만을 쏟아 내기만 합니다.
이것이 조용한 힘입니다.
이슬은 우리들 모두가 잠든 밤에 아무런 소리 없이 맺혀 집니다.
영롱한 그의 모습은 청아하기만 합니다.
깨끗합니다.
이슬 맺힌 잎사귀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 생명력이 풋풋합니다.
내가 더 크다고 자랑하지 않고 내가 더 작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자기의 방울들을 만들어 갑니다.
만들다 땅에 떨어져 자기의 생명을 다 하고 갑니다.
이렇듯 이슬은 모든 식물에 새로운 생기를 가져다줍니다.
이것이 조용한 힘입니다.
우렁찬 천둥소리는 요란합니다.
번쩍이는 번개 불은 두려움을 몰고 옵니다.
이것에 맞으면 건물이 파괴고 사람이 맞으면 검은 숯이 되어 까맣게 타 죽습니다.
대단한 전기 에너지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대단함 뒤에는 부드러운 구름의 조용한 움직임 속에서 생겨납니다.
구름과 구름의 충돌이 천둥이요, 구름과 구름의 마찰이 번개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 근원이 조용한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대자연에 있어서까지도 힘은 조용함 속에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가장 큰 힘은 소리 없이 작용함에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요란한 힘의 근원도 부드러움의 조용한 움직임에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고요한 새벽에 드리는 조용한 기도는 놀라운 힘의 근원임을 느낍니다.
하루가 새롭고 아침이 상쾌합니다.
조용함 가운데 사랑이 이글이글 내려 쏟습니다.
조용함 가운데 사랑이 스며들듯 젖어 듭니다.
조용함 가운데 사랑의 근원이 부드럽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로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여 지지 않습니다.
만져지지도 않고, 소리 내지도 않습니다.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조용함 속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소리 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조용한 움직임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성장을 이끌어 갑니다.
이러한 사랑은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사랑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설날을 맞아 분주히 움직이던 지난 화요일!
삶에 지치고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까치 한 마리가 영원히 쉴 곳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숨 가쁜 날개 짓으로 조그만 게시판에 위에 앉으려 날개를 펄럭입니다.
그리곤 숨을 몰아쉬시며 길을 묻습니다.
하~얀 국화 한 송이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듭니다.
이름 모를 다른 꽃잎들도 모르겠다며 흔들흔들 몸짓으로 답을 합니다.
애고 힘들다!
조금 쉬었다 가자!
까치 한 마리가 게시판 위에 앉았습니다.
“유 생수 집사 이 땅위에 89년을 사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다.”
너무 지쳐 있었고, 너무 외로우셨습니다.
젊은 날, 홀로 만주벌판을 돌고 돌아 20세의 젊은 청년으로 남한 땅에 정착하시고
멎진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서울의 밝은 동네에서 여성의 멋을 창조하는 의상실을 운영하시며
큰 영화를 누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우리 자식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요.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넘치셨던 분이셨습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찬송소리를 들으시면서 조용한 가운데, 고요함 가운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면서,,,,,,,
유 용수
2014년 2월 6일(목)
2014-02-06 21:41:39 | 유용수
까치가 재미있는 동물이네요.
동화를 보면 "은혜를 갚는 동물"로 많이 등장하고,
민요를 봐도 "까치야, 까치야, 너는 헌 이 가지고, 나는 새 이 다오~~"부르기도 하고
헌 이..
새 이..
은 혜..
까치는 구원의 은혜로,
구원자에게 자기 생명까지도 버리는 "보은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이름지어준 까치! 처음 이름 지을때 불렀을 원음이 궁금하네요. ㅎ~
또 한가지 궁금한 것은..요한계시록 2 : 1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어 먹게 하고
또 흰 돌을 그에게 줄 터인데 그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그 돌을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느니라.
첫번째 아담은 모든 가축과 공중의 날짐승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고,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구원받은 교회에 주실 흰돌에 기록되어 있는 새 이름입니다.
2014-01-31 11:39:19 | 강평원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얼마나 입에 착착 감기는 가사와 멜로디인지요
매년 설 명절이면 빼놓지 않고 듣게 되는 곡인데요
아담이 한국인의 정서에 꼭 맞게 까치라고 예쁜 이름 지은준것에 감사한 하루입니다.
내일은 민족 고유의 명절 설 입니다.
모두들 가족과 정을 나누는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주일날 뵈요.
2014-01-30 22:28:50 | 이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