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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 옥분 이라는 가수가 예전에 부른 "꿈을 먹는 젊은이" 라는 곡에 보면 '행복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것' 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정말이지 행복은 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오는것이 결코 아닌것 같습니다. 아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저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분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은 것을 봅니다. 그들은 행복 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에도 인색하고 어색해 합니다. 외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니 그렇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오늘 아침 행복한 삶에 대한 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행복 이라는 단어를 계속 접하다 보니 제 마음속의 행복이 점점 더 커지고 커지네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2014-02-18 11:45:29 | 이정희
우리나라는 복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복받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를 합니다. 이런 인사를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설날 아침에 복조리를 거는 풍습도 있고, 복(福)자를 여기 저기에 붙여서 복을 기원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된 이유중에 복음(福音)이란 단어가 한몫(?)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복을 좋아하는 민족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친근감을 갖기에 충분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보았습니다. 우리말의 복음은 영어로 gospel ( GOD spell, 하나님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복된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씀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성경 기록대로 죽으시고, 장사지내시고, 성경 기록대로 부활하신 것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사람들이 복 못지않게 좋아하는 단어가 있는데 행복이란 단어입니다. 영어의 bless, gospel, happyness 보다 우리말의 복, 복음, 행복은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 단어에 하나님의 개념만 도입하면 성경적인 단어가 됩니다. 창30:13절에 행복은 복에 기원을 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가 이르되, 나는 행복한 자니 딸들이 나를 가리켜 복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곧 행복한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사람이 스스로 찾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것으로 부터 행복(happyness)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일순간 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시는 것으로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관련 성경구절 몇개를 열거해 보겠습니다. 신명기 6 : 24 또 항상 우리가 행복하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법규를 행할 것과 {주}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을 명령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이 날과 같이 우리를 살려 보존하려 하심이라. 시편 144 : 15 그러한 처지에 있는 그 백성은 행복하니 참으로 {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그 백성은 행복하니이다.잠언 3 : 18 지혜는 그것을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니 그것을 간직하는 자는 다 행복하도다.로마서 14 : 22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너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허용하는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행복하도다.베드로전서 3 : 14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며 요즘 소치 동계올림픽이 한창 진행되고 있죠, 성적 순위와 더불어 메달의 색깔로 희비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메달의 순위는 금, 은, 동인데 만족감의 순위는 동, 금, 은이라고 합니다. 동메달의 만족도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이 금메달이고, 은메달을 딴 사람은 기쁨보다는 상실감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금메달을 딴 사람은 당연히 승리의 환호를 갖지만 길지는 않다고 합니다. 은메달을 딴 선수는 금메달을 따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 두고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동메달을 딴 선수는 메달권에 들었다는 안도감과 만족감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라 금메달이 좋을 것 같은데 나름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행복지수는 기대치가 크면 클수록 낮아지고, 기대치를 낮게 가질 수록 커지는 것 같습니다. 국민소득이 적은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나고,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낮게 나타나는 이치와 같다고 보여 집니다. 잘 사는 나라에 사는 국민들의 자살률이 높게 나타나고 우울증 환자들이 증가 한다고 합니다. 못사는 나라에서는 절대 그런 걱정 하지를 않죠^^ 행복이란 외적인 부와 지위와는 큰 상관관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많은 부를 가지고 있고,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모습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마음의 기대치를 적게 갖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 행복한 삶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행복한 한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4-02-18 11:09:02 | 조양교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미합중국의 시대'가 내부의 부패로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이 여실히 보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더욱 진하게 더 빈번하게 나타날수록 조양교 형제님의 댓글처럼 구원받은 자로서 미지근한 삶의 태도를 반성하고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신실하게 해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는 글에 감사합니다. 23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24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2014-02-18 10:33:04 | 김대용
믿는 자들이 미지근하게 있는 동안 세상의 부패속도는 가히 충격적이네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롱해도,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해도 마음에 의분을 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슬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지는 길만이 살길 입니다. 교회들이 속히 제자리로 돌아와서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했으면 합니다.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글 감사드립니다.
2014-02-18 09:00:06 | 조양교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소돔성이 도시가 아니라 국가 전체로 번져가고 있는것이 지금 현시대이고 앞으로 더 극심해 질것을 짐작할수 있지요#.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면 교회에서도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신 설교내용이 생각나요.... 먼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미개한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주님께서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삽니다....
2014-02-17 16:08:24 | 이수영
요즘 세상은 살인자의 인권도 존중되야 한다고 하고, 동성애자들도 성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당당히 외치는 시대입니다. 당사자 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제3자가 더욱 동조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너져버린 이 시대를 살며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써 더욱 정신을 차려야 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셔서 이 악한 세대를 참으시며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악한 세대를 언젠가 끝내시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신음하던 의로운 롯을 구출해 주신것 처럼 우리를 데리러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2014-02-17 15:11:09 | 이정희
안녕하세요. 군포에 사는 강평원 형제입니다.   5일전.. 인터넷 세계뉴스 코너에 한 기사를 보았고 충격적인 보도 내용을 보면서 성도님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이 글을 씁니다. “주민 40% 동성애자 美소도시, 시청에 `동성애 깃발'”란 기사였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용을 간추려 보면,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소도시 웨스트할리우드는 인구 3만5천여명 가운데 40%가 동성애자로 추정되며 시의원 5명 가운데 4명이 동성애자이다. 이 도시 시 청사에 게양되는 깃발에 동성애자를 표시하는 무지개 문양을 넣기로 결정했다. 그 전에 무지개 깃발을 게양했지만 지난 1월 시의회에서 돌연 무지개 깃발을 내렸고, 이후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나 봅니다.   도시 인구 3만5천여명 가운데 40%가 동성애자로 추정..시의원 5명 가운데 4명이 동성애자..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지금 현재 이런 도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도시가 또 있었죠? 네, 바로 소돔이죠. 창19:1~11 보시면, 바로 위의 웨스트할리우드가 과거 소돔의 도시가 아닌지 생각이 됩니다. 영어로 남색, 수간을 의미하는 단어인 sodomy는 성적타락이 극심했던 소돔(sodom, sedom)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또한 남성 동성애자 즉 남색자들을 영어로 sodomite라고 하는데 이는 ‘소돔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18:22, 레20:13 에서 남자와 함께 눕는 것은 가증한 것이고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후서 2 : 6, 유다서 1 : 7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자기를 음행에 내주고 낯선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로 보복을 당하여 그 뒤에 경건치 아니하게 살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오늘은 2월 17일.. 혹시 무슨날인지 아시나요? 바로 노아의 홍수가 시작된 날이네요. (물론 유대력과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양력)은 다르지만 달과 날짜는 같다는 가정하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7:11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째 해 둘째 달 곧 그 달 십칠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리며 창7:12 비가 밤낮으로 사십 일 동안 땅 위에 쏟아졌더라. 창8:13 제육백일년 첫째 달 곧 그 달 첫째 날에 물들이 땅에서 마르매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치우고 보니, 보라, 지면이 말랐더라. 창8: 14 둘째 달 곧 그 달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이후 1년 10일 곧 370일간(1달 30일, 땅이 마름 포함) 전 지구적인 홍수로 인한 심판이 임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일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로 인한 심판이 없을 것이며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계 최초로 동성애 협회에서는 무지개 색으로 그들의 국기를 만든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 합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서 보도된 웨스트할리우드 시청에 게양 될 위 사진의 국기를 가지고 논란을 일으켰나 봅니다.   이왕 동성애와 관련 최근 자료를 더 추가로 조사해 봤는데요.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소치 시장은 "우리 마을에 동성애자는 없다"고 말했는데, 발언과는 달리 게이들을 위한 소치의 카바레는 성황리에 운영 중이라 합니다. 또한, 2014년 1월 26일 “2014 56회 그래미 시상식”이 있었는데요, 놀랍게도 시상식장에서 동성커플을 포함한 33쌍의 합동 결혼식이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2013년 12월 19일 미국 뉴 멕시코주에서 동성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미국에선 17개주에서 합법화가 되어 시행하고 있습니다. 2013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처음 동성결혼 허용한 나라 네덜란드 외에 11개국이 합법화했으며 20여개의 국가는 시민결합의 형태로 인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도를 보니 러시아, 중국, 중동국가 등을 제외한  선진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공산권 및 중동 국가는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복음은 전파되기 어려운 곳입니다.  아무튼 이것을 보면 심각함이 많이 느껴지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의 상황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4 : 37 오직 노아의 날들과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그리고, 눅17:28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도 그와 같았으니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건축하였으되 성경에 기록된대로 정말 지금의 현재 상황이라 해도 “아니요”라고 말 못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후서 3:9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4-02-17 14:06:26 | 강평원
이모저모 부족한 지체로서 몹시 부끄러운 삶을 살아내지만, 본향의 초대장만큼은 간절히 사모하는 나날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의와 절제와 심판의 메세지를 세상과 나누면서 벨릭스의 운명을 거스리는 전도 열매, 그 의의 관을 향한 발걸음이고 싶습니다^^ "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딤전 4:8-
2014-02-16 23:38:11 | 최상기
항상 성도님들의 과분한 격려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겸손의 의미가 아니라 이런 칭찬과 격려는 제게 합당치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올린 글처럼 살려 노력하는 매우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고 진리의 사역에 별 도움이 못 되는 무익한 자입니다. 앞으로 홈피에서 제 글을 보시더라도 글에서 얻는 작은 유익이라도 있다면 그 소감을 나누어 주시고 제가 받기에 합당치 못한 분에 넘치는 격려는 마음속으로 해주시면 저 또한 감사하게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본향에 대한 소망이 날이 갈수록 커지길 바랍니다. 샬롬~!
2014-02-13 17:12:18 | 김대용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질수록 양극단의 끝자락에 서서 자신들이 상상하는대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지금 이 때, 형제님의 글로 인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내 양심이 잘 어우러져 믿음의 여정을 보내고 있는지를 점검해보게 됩니다. 언제나 귀한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02-13 08:34:59 | 김상진
구구절절 아멘이 됩니다 또한 마지막 운명을 확실히 믿고 있으나 매일을 기쁨으로 채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도 세상이 악으로 치닫고 있어 어린아이 키우기가 살얼음판 걷는것 같다는 말을 지인에게 들었지요... 다른 지인은 딸의 사윗감을 "돈많은사람"이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말세지말을 사는 우리는 맘몬세상에서사는 동안 바른 진리를 전하는 일을 통해 주님께 기쁨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4-02-11 17:57:41 | 이수영
대용형제님의 귀한 글을 늘 눈동냥으로 주워담기 바쁜 1인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다가올수록 우리의 동일한 운명공동체는 더욱 세상과의 분리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세상의 문화, 교육, 정치, 경제, 종교... 어느 것 하나 우리와 합치될 것이 없네요. 근본주의 성경 신자가 모인 사랑침례교회는 어쩌면 더더욱 고립을 자초하는 공동체일 수 있겠구나 생각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더욱 기쁨이 되는 것은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더욱 분리되고 우리 주님의 편에 서는 일이기에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닐런지요.. 육신을 입고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에 고급 청량제와도 같은 맑은 정신과 기준을 환기시켜주신 대용형제님께 가슴깊이 감사드립니다!
2014-02-11 15:23:06 | 정진철
어떻게 마음 먹는 것이 바른 것인지 확인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에 소망 둔 엄마로 비춰지는게 늘 숙제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당당히 전하는 그런 이웃이 되어지길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02-11 14:24:35 | 목영주
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듯 찔리는 심정 감출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을 어렵게 하는것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할까 하는 것입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내가 하기싫어도 떠밀려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했는데 사랑침례교회에 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8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제 자신이 형제님이 글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성도가 맞이할 운명의 종착지를 기쁘게 음미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하는 마음때문에 고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같은 지역의 어르신은 어떻게라도 이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전철역앞에 가판대도 펴놓고 또 연구하시며 그일을 하시기위해 건강관리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귀감도 되고 제 자신이 부끄러운 마음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땅을 향해있던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눈을 고정시키고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절제하며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가 마음에 새겨야 할 글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02-11 13:39:52 | 이정희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목사는 26세에 왕립의학협회로부터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대단히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44년 이상의 목회와 설교 사역을 통해 그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물론 이분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성경 신자가 보기에 교리적 한계가 명확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의 초인적인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고 특히, 저 불후의 명저 ‘설교와 설교자’는 설교자가 왜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위대한 막대기인가를 가장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교리적 한계를 지녔지만 위대한 설교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저서(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에서 성도가 궁극적으로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 논한 한 부분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 요한계시록 4장에서 ‘짐승’이라고 묘사된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중략-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모양에 있어서 그들은 혼합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존재들일까요? 그들이 천사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대단히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구속받고 영화된 인류를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피조 된 생물의 최고의 특성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의 주된 기능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거하게 될 만큼 고귀하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요! 그룹과 스랍, 그리고 이 짐승들에 대한 모든 성경의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이것이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과 영화, 그리고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 안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정해진 항거할 수 없는 처지가 운명의 사전적 의미라고 한다면 각 사람이 맨 마지막에 처하게 될 영원히 불변할 운명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윗글에서 마틴 로이즈 존스가 묵상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펼쳐지는 천상의 예배가 바로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함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 이어지는 사도 요한이 바라본 셋째 하늘의 왕좌에는 벽옥과 홍보석 같은 한 분이 좌정해 계십니다(계4;2~3). 왕좌 둘레에는 스물네 자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찬송(계5:9~10) 등을 살펴볼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물네 명의 장로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에도 공식 행사, 그것도 중요한 행사일수록 참여한 사람들의 자리 배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럴 때는 각 사람의 신분의 존귀함과 직책의 중함 정도에 따라 자리의 순서가 결정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왕좌 바로 옆 둘레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의 24자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는 하나님의 근위병 역할을 하는 ‘네 짐승’이 지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왕좌와 네 짐승과 장로들의 한가운데 그 고귀한 자리에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천사들은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밖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의 말씀을 참조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최종적인 위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 바로 옆, 즉 창조물로서 거룩하신 창조주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도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들은 천사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천사를 실제로 보여준다면 지금 바로 미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갈 사람들이 허다할 겁니다. 지금은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 다가설 수 없는 거룩한 영역에 존재하며 활동하는 천사들도 요한계시록 천상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옆에 자리한 구원받은 성도들을 밖에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할리웃이 만들어낸 히어로들을 보십시오. 소닉붐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초인적 존재인 수퍼맨이나 가슴에 원자로를 품고 철갑을 두른 가공할 위력의 아이언맨이나 사실 이들은 성경에 계시된 천사들의 권능과 존귀함과 비교하면 미미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만약 실제로 나타난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은 온 혼을 쏟아 부으며 그들에게 열광할 겁니다. 그러나 이들도 성경에 기록된 천사들에 견주면 기어 다니는 굼벵이보다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지상에 등장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들의 사악함은 상관치 않고 자신의 온 마음을 주었고 타락한 천사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춰 마음대로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6:1~2). 이런 놀라운 존재인 천사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온 우주와 모든 곳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까지 다가설 수 있는 존귀함, 즉 이 놀라운 신분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운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삽니까? 매일 매일 닥치는 육신과 삶의 필요를 위해서는 온 신경이 자연스럽게 쏠리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 세계를 먼지처럼 밀어젖히고 장차 우리에게 임할 변치 않을 극히 견고한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한 장소가 있습니다. 장차 성도들이 영원의 시간 속에 거하게 될 한 도시입니다. 온 우주의 심장부이며 모든 처소들 중에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존귀한 이 도시에 대해 바울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땅에 중심부인 예루살렘이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한 도시, 즉 하늘들과 땅의 모든 처소의 영원한 중심이 될 ‘새 예루살렘’은 빛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께서 직접 그 도시의 광채가 되시는 곳입니다(계21:23). 또한, 이 거룩한 도시, 모든 곳의 심장부는 그 누구도 아닌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곳입니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우리는 이사를 하기로 한 지역의 아파트를 고를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 중 하나가 어떤 회사가 건설한 아파트인가 하는 겁니다. 인지도가 높은 대형건설사일수록 당연히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도 다른 아파트에 비해 매입비용이 높습니다. 그 어떤 아파트나 건축물 혹은 어떤 정부가 기획하고 건설한 도시와도 비교되지 않은 예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건설하신 새 예루살렘은 구원받은 성도가 거하게 될 본향이요 최종적인 근거지가 됩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 거주민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21:4) 이렇게 창조물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약속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시는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존재로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영원히 분리해 주신다는 놀라운 약속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인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겁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1:4) 다시 언급하지만, 사망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아픔이 없다는 약속과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은 창조된 존재들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특혜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믿기에 우리는 구원받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때로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을 감수하고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과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흔들림 없이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요즈음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체적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여기도록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과연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얼마나 대접받고 있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의 영역이 아닌 눈에 보이는 환경, 조건, 경력, 사람의 능력, 학력, 재정적 준비, 인지도 등등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와 개개인의 구체적 삶 속에서 대접받고 있다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권능이 여러분의 지금의 삶까지 바꾸어 놓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상속 유업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이렇듯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이 모든 약속과 장차 받을 축복을 잊어버리거나 별 기대 없이 매일 눈에 보이는 필요를 채우는 것에만 열중한다면 성도의 삶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지향점 없는 각박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속에 절절히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오래전에 한국에서 로또가 처음 판매될 때 재미삼아 사오라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또를 사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값을 치르면 주는 영수증처럼 생긴 그 얇고 작은 종이가 수백억 가치가 있는 일등 복권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등에 당첨된 로또 복권을 소유한 사람에게 그 얇고 별 볼 일 없는 바코드가 찍힌 종이는 더는 쓸모없는 종이가 아닙니다. 수백억의 현금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귀한 물건이 됩니다. 그것은 당첨된 복권에 부여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금으로 수백억을 은행에 예금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 순간부터 자신을 수백억의 자산가로 생각하고 그 돈의 용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극도의 흥분과 희락을 절로 경험합니다. 당첨된 복권을 보여주지 않아도 지인에게 당첨 사실을 털어놓는 그의 진지한 표정과 말과 전인(全人)에서 풍겨 나오는 확고한 믿음은 듣는 이가 그의 고백을 절로 신뢰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사실 일등에 당첨된 복권은 같은 회차에 발행된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수많은 복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쇄된 글자가 찍힌 작은 종이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 종이에 부여된 약속이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복권과 다르기에 그런 능력을 발휘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비해 하찮기 그지없는 복권 속에 들어있는 약속에 대한 믿음도 사람을 바꾸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초월해서 감정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꿉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는 모습을 보기는 극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려니 눈에 보이는 각종 행사와 초현대식 교회 건물과 유명인 등 사람의 눈을 매료시키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울 도리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구원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성도가 맞이하게 될 최종적인 운명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참으로 적은 것을 알게 됩니다. 확률이 극히 희박한 로또 종이에 보내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믿음보다 더 초라한 대우를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천상에서 성도들의 사역을 눈이 떨어지라고 집중해서 보고 있는 천사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깁니다. 그동안 ‘성경지킴이’와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와 각종 미디어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바른 성경과 그로 인해 세워진 바른 교리가 있음이 전해졌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가장 부족하고 아둔한 저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존된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접하고 한때 머리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동의를 표했던 사람들 중에서 진리에 응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은 사실 적다고 봅니다. 진리에 반응하고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스스로 고안한 논리로 그럴 수밖에 없는 궁색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영상이라는 것이 참 편리하고 빠르게 진리를 전하고 있음에 감격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간편하게 진리의 가르침을 접하고 마치 홈쇼핑을 즐기듯 그것을 보는 것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도 됩니다. 영적으로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지적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이미 우리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할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성도가 종국에 다다를 찬란한 운명을 확고히 믿고 자신의 온 생을 기쁘게 헌신했던 사도 바울의 모습은 진리를 접하고도 여전히 간편함을 추구하며 영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오히려 이젠 적은 지식으로 어설픈 선생 역할을 해 보려 하는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만듭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고단한 짐은 점점 가중될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이전처럼 건전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서는 더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체계가 이룩되어야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휴거를 통해 교회를 불러올리실지 알 수 없으나 그때까지는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갈수록 악하고 험난해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을 꾸려가야 합니다. 이런 고단한 삶 속에서 성도가 위안을 얻고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굳게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점점 악해지는 배교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약속, 성도가 맞이할 운명의 종착지를 기쁘게 음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바울처럼은 못 되더라도 성도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리를 위해 손해 보고 결단하고 비진리와 결별하고 분리하는 담대한 모습을 보일 때 믿음의 능력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생생하게 세상에 증명될 것이고 바울이 고대하던 운명의 종착지에서 신실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이 하나하나 우리 각자에게 확정될 것이라 믿습니다.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고전9:24~25)
2014-02-11 11:49:15 | 김대용
부고에 대한 소식을 시적으로 표현해주시니 마음에 많은 것들이 와닿습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주님에 대한 복음을 전해주셨다는 것이 아직 믿음생활을 하지 않은 저희 아버지를 생각할 때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삼가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2014-02-08 12:39:08 | 김상진
가장 슬픈 시간에 함께하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버님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또 자식들에게 전하고 가셨으니 사실 가장 큰 일을 하셨습니다. 형제님과 자매님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2-07 11:00:48 | 관리자
형제님의 글에서 아버님의 사랑이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해주신 것은 이보다 큰 유산이 없으리라 봅니다. 훗날 기쁜 마음으로 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가지와 같이 사라져 버릴 운명이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맺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4-02-07 10:48:30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