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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님의 글 말미를 읽어내려 가니 절로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의미 있는 글에 감사합니다.
2014-04-17 00:40:31 | 김대용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간절히 사모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일 수도 있겠다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요즘은 하루가 멀다하고 아파트 현관문에 광고 전단지가 서너개 씩 붙어 있습니다. 핸드폰을 켜도 TV를 봐도 온통 자기를 피알하고, 제품을 홍보하고, 기업을 홍보하며 마케팅 전쟁을 벌이는 터라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아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믿는 사람들에게 조차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탐구하고 더 깊이 사모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형제님의 진지한 묵상을 읽으며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살며 하나님의 왕국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PS: 주일에 바자회준비로 주방에서 자매님 곁에서 부지런히 조력하시는 형제님을 뵈면서 참 자상한 분이시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
2014-04-16 20:57:57 | 김경민
우리의 진정한 소망 요한복음 5:1-9 1 이 일 뒤에 유대인들의 명절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이제 예루살렘의 양 시장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주랑 다섯 개가 있고 3 이것들 안에 허약한 자, 눈먼 자, 다리 저는 자, 몸이 오그라든 자들의 큰 무리가 누워 물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더라. 4 이는 어떤 때에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었고 물을 휘저은 뒤에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5 거기에 삼십팔 년 동안 병약함을 지닌 어떤 사람이 있더라.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운 것을 보실 때에 그가 이제 그런 상태로 오랫동안 있은 줄 아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 하시니 7 그 허약한 사람이 그분께 대답하되, 선생님이여, 물을 휘저을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내려가나이다, 하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온전하게 되어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바로 그 날은 안식일이더라.   베데스다 연못의 역할은 성전에 물을 공급하며 종교적, 의학적 용도로 사용 되었습니다. 성전 제사에 드려지는 양을 사고파는 양시장이 근처에 있었고 제사에 사용될 양을 깨끗이 씻었던 곳입니다. 베데스다의 히브리어 뜻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입니다.  단어에서 말하듯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병을 고치고자 하는 병자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또는 연극의 무대라고 생각 하고 그때의 상황을 한번 그려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 주변에는 많은 각각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항상 가득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 앞을 못 보는 사람, 문둥병자 등 많은 지저분하고 거동이 불편한 병자들이 무기력 하게 자리를 펴고 누워 있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모두 연못의 물이 움직이는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물이 움직입니다. 병자들은 일제히 뛰기 불편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가는 많은 병자 들이 있고 더구나 내 앞에는 다리를 저는 병자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첫 번은 그렇게 앞의 다리가 불편한 병자 때문에 못에 못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다음번 물이 흔들릴 때는 과연 그 다리 불편한 병자 뒤에 계속 갈까요. 아니면 넘어뜨리고 앞으로 갈까요? 처음은 양심이 가책을 느끼겠지만, 먼저 들어가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회가 거듭 할수록 더 가혹하게 넘어 트리고 밟고 먼저 물에 들어가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쓸 것입니다.   여기서 나 자신 또는 그리스도인에게 질문 던져 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의 병 고침이 간절하지만 과연 제일먼저 그 연못에 들어 갈 수 있을까요? 저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 합니다. 물로 뛰어 가다가 다리 불편한 병자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고 부축하고, 앞 못 보는 병자를 보면 붙들고 연못에 인도하고 그렇게 못 들어가면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아 다음 번을 기다리고 주여 이번에는 내 앞에 아무도 없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요?   지금의 사회에서도 성공한 일부만을 너무 부각 시키고 우리 모두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사회에서만이 아니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헌금하고 했더니 이런 기적 같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교회생활 열심히 하면 저처럼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간증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도전이 될 때고 있지만 나는 지금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회의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38년 동안 병약함을 지닌 사람은 희망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간구하는 핵심은 병이 고침을 받아 온전하여 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본질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말씀 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핵심을 말하고 계신데 병자는 아직도 동문서답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물을 휘저을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자는 예수님이 오셨는데 아직도 연못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지금 내 앞에 오셔서 지금 원하는 게 뭐냐 하고 말씀 하시면 뭐라는 대답이 나올까요? 빚을 청산해 주세요. 배우자를 보내 주세요. 우리 아들 대학에 좋은 대학이 입학 시켜주세요 이번에 사업 계약 건이 성사되게 해주세요. 이번 선거에 당선되게 해주세요. ..... 지금 이 시간 이 세상의 것이 잘되는 것이 좋은가요?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좋은가요?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거하게 해주세요. 이 답을 일초의 망설임 없이 하실 수 있으세요?. 온전히 나의 궁극의 목적지를 하나님의 왕국에 두고 계신가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과학과 사회적 관습에 익숙해 져서 무언가를 주어야 무언가를 얻는다는 무의식의 습관이 자꾸 하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무언가를 하여야 하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고 생각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단순한 은혜의 법칙을 알려 주셨는데도(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은혜로,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구원은 영원토록 보장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000야 네가 무었을 원하느냐? 그때 주저 없이 하나님의 왕국을 소망하는 형제, 자매님들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2014-04-16 17:58:37 | 김기범
열왕기상 13장을 참으로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매우 독특하고 어찌 보면 복잡 미묘한 장면들을 담고 있는 본문은 저도 관심을 두고 읽었던 말씀입니다. 형제님이 잘 정리해 주셔서 읽는 분들에게 유익이 전해질 줄로 생각합니다. 명철함이 돋보이는 성경 해석과 글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04-16 00:42:50 | 김대용
형제님이 말씀하신 본문을 별 심각성 없이 읽어나갔었는데 형제님의 글을 보고 다시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대언자와 늙은 대언자를 살펴보며 형제님의 글을 읽으니 공감이 갔습니다. 그리고 이 어찌 보면 황망한 죽음을 당한 젊은 대언자 보다도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악한 길을 돌이키지 않는 여로보암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이나 사는 동안의 우여곡절과 시련은 인간의 눈에서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님의 결론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늘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도로서의 자녀로서의 본분임을 다시금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요일5 :3)
2014-04-15 18:47:28 | 김경민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며칠 전 열왕기상13장의 말씀을 궁금해 하는 성도님의 메시지를 받고, 저도 읽어보고 묵상한 후에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은 사실 다윗의 혈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0지파가 그를 따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권력 욕심이 생겨나자 점점 완악해져가고 죄를 점점 더 심각하게 짓는 과정이 본문에 나옵니다.  먼저, 열왕기상 12장 25절~33절 내용을 보시면,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네 신들이다 라고 말해주고는 그 앞에 경배하게 만드는 사건이 나옵니다. 또한 산당들의 집을 짓고는 레위의 아들들이 아닌 백성 중에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고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정한 날짜에 자기가 벧엘에 만든 제단 위에 헌물을 드리고 백성도 그리하게 하는 악한 죄를 여로보암이 저지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열왕기상 13장에는 이름도, 출신도 알려지지 않은 젊은 하나님의 사람(대언자)가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이 벧엘에 있는 제단 옆에 서서 분향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왕상13:1-3 다윗의 집에 요시야가 태어날 것과 그가 산당들의 제사장들을 죽이고 그 뼈를 제단 위에 태울 것을 예언하고, 그 표적으로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재가 쏟아 질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 젊은 대언자의 예언대로 요시아왕 때에 그 예언이 성취됩니다. 왕하23:15~20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20절. 또 거기에 있던 산당들의 모든 제사장들을 제단들 위에서 죽인 뒤 사람들의 뼈를 제단들 위에서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왕상13:4-6 여로보암왕은 이 젊은 대언자가 선포한 말이 듣기에 거북했던지 그를 잡으라 하고 지시했는데 그의 손이 굳어지고 대언자가 말한 표적대로 제단도 갈라지고 그 위에 재가 쏟아집니다. 7-10절. 이 일을 다 겪고 난 여로보암은 그 대언자에게 간청해 다시 손이 회복되었고, 식사 초대를 했지만 젊은 대언자는 주님의 말씀(빵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네가 왔던 같은 길로 되돌아 가지도 말라. )에 순종하고자 그 식사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11절 이하에는 또 이름도, 출신도 알 수 없는 한 늙은 대언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벧엘에서 젊은 대언자가 여로보암에게 한 일들을 다 듣고는 자기 아들들을 시켜 그 젊은 대언자와 만남을 주선 후 이제 식사 초대를 제안합니다.   18절. (중략) 나도 그대와 같은 대언자라. 천사가 주의 말씀으로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가 빵을 먹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그러나 그가 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였더라. 여로보암왕의 식사 초대를 거절했던 젊은 대언자는 이번에 늙은 대언자의 거짓말에 순응해 주님의 말씀(빵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네가 왔던 같은 길로 되돌아 가지도 말라. )을 져버리고 식사에 응합니다. 결국 주의 말씀에 불순종한 젊은 대언자는 목숨을 잃고 조상들의 돌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죽음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젊은 대언자를 죽인 사자(lion)는 그 대언자가 타고 갔던 나귀도 손대지 아니하고 대언자의 시체도 먹지도 않았습니다. (왕상13:24-26)   둘째, 거짓말을 했던 늙은 대언자는 젊은 대언자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그의 시체를 수습하러 왔고, 자신이 죽게 되면 그 젊은 대언자 돌무덤 옆에 자신도 묻어 달라고 말합니다. (왕상13:29-31)   이 두 가지 사실로 보건대, 이 모든 과정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자가 정말 배가 고파서 젊은 대언자를 죽였다면 먹어치우고 타고 있던 나귀도 잡아 먹는게 상식이니까요. 본문에 나오는 사건을 두고 어떤 성도님들은 왜 늙은 대언자는 거짓말을 일부러 하여서 결국 그것이 불씨가 되어 젊은 대언자가 죽음에 이르게 까지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 질문은 조금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대언자가 죽게 된 원인이 늙은 대언자의 거짓말 때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늙은 대언자가 거짓말을 할수 있느냐? 대언자가 되어서 거짓을 말해도 되느냐?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각각의 대언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대언자가 거짓을 말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일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냐?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마땅히 이뤄져야 하는 상황가운데 선하게 인도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젊은 대언자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로보암 왕 앞에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대로 표적이 바로 눈앞에 이뤄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간구의 기도소리에 여로보암왕의 굳어진 팔이 다시 회복되는 놀라운 치유 현장에 당사자로 있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권능이 강하게 임하는 당시에 젊은 대언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늙은 대언자와 만남에서 그가 실수한 부분이 발견됩니다.   늙은 대언자는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18절. (중략) 나도 그대와 같은 대언자라. 천사가 주의 말씀으로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천사가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받은 대언의 말씀과 그분의 뜻-(빵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네가 왔던 같은 길로 되돌아 가지도 말라.)-이 더 위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사실 천사가 전해준 말씀과 하나님께서 직접 대언자에게 하신 말씀을 비교할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게 곧두박질치는 가능성을 언제든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늙은 대언자에게 말한 천사가 주님으로부터 온 천사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는데도, 그런 부분을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지 않았던 부분도 젊은 대언자의 실수 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많은 성도들이 있지 않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둥, 내가 천사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는다는 둥, 천사 아니라 천사 할아버지가 말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서 잘못된 부분이 들어난다면 과감이 물리쳐야 됩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젊은 대언자와 늙은 대언자 간에 어떤 사건을 초점두는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열왕기상 12장에 이어서 14장에 이르기까지 여로보암왕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권면하시고, 경고하시고, 징계하시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과정가운데 두 대언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여로보암 왕이 자신의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두 대언자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유다에서 온 이름도 알 수 없는 이 젊은 대언자는 여로보암왕에게 충분히 자신의 죽음에 모습을 보이면서 까지 하나님의 경고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봅니다. 비록 그가 행하는데 있어서, 마지막 부분에 실수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지만, 그가 전달한 메시지는 살아서 역사 하였습니다.   왕상13:32 그가 주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친 말과 또 사마리아의 도시들에 있는 산당들의 모든 집을 향하여 외친 말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하니라. 그러나 이렇게 까지 젊은 대언자가 죽음을 통해 여로보암 왕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지만, 여로보암은 여전히 악하고 완악한 마음가운데 거하다가 결국 자신의 집안에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33절. 여로보암이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성도여러분은 여러분이 여로보암왕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같은 것들이 우리 안에는 없나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까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어리석음이 우리 안에는 없나요? 젊은 대언자의 죽음이 사람의 관점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늘 신실하게 선하게 이뤄가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간섭하심, 동행하심이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족쇄같고, 노예 같은 생각이 들어 불평이 나올 때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믿으시지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짜증날때도~~ 아멘!!
2014-04-15 17:33:49 | 오광일
아름다운 동화로 인해 깨우침주신것에 감사합니다. "사랑에는 목적이 없다..." 언제쯤 주님의 값없이 주신 사랑을 온전히 깨우칠수 있을까요. 엄마는 가끔 너무 냉정하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지 못함이.. 또한 제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은채, 남편을 질타하는 제 이기심이.. 과연 가족을 진실로 사랑한것인가? 에 대한 물음을 하게 되네요. 이번 결혼과 가정 시리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마음속으로 작정합니다.
2014-04-14 04:51:40 | 태은상
날씨가 쌀쌀해질때부터 한겨울이 지나 다시 따뜻한 봄이 올때까지.. 아궁이의 불은 은근하게 피어 올라야만 하죠. 세상은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한겨울의 차가움이 가득하지만, 교회안에 들어오면, 또 주님이 함께 하시는 제 마음이.. 자매님의 글처럼 안방 구들장입니다. 영원히 따뜻한 봄날, 주님을 만나는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2014-04-14 04:36:49 | 태은상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이사야53:5)   빌라도는 우리 주님을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주어 채찍으로 치게 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이 휘두르던 채찍은 가장 끔찍한 고문 도구 중 하나로, 황소의 힘줄로 만들어졌는데, 그 힘줄 사이사이마다 날카로운 뼈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채찍으로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면서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사정없이 채찍질 당하시고, 그 온 몸이 피에 젖어 붉게 물들었을 때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모질게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확실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을 맞으시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조금도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을 위해서 묵묵히 그 모진 채찍질을 견디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셨습니다.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갖은 모욕을 당하며 오래 참고 서 계신 주님을 보라! 죄인들이 전능하신 주의 손을 묶고 자기들이 만드신 창조주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그분의 성전들은 가시덤불로 뒤덮이고 곳곳마다 피가 흘러내린다. 그분의 등은 온통 채찍 자국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보다 더 날카로운 채찍이 그분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는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시는 그 모습을 항상 우리 마음판에 새기고 삽시다. 우리 죄 때문에 그처럼 값진 대가를 지불하셔야 했던 주님의 피 흘리는 모습을 늘 잊지 맙시다.   스펄전.
2014-04-12 21:45:11 | 박진태
요즘 열왕기 성경을 읽으며 솔로몬을 비롯한 왕들의 행적을 읽고있는 제 마음에 100퍼센트 공감가는 말씀이네요. 비단 왕들 뿐만 아니라 제게도 크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기도를 제 마음에 깊이 새겨야 되겠습니다.
2014-04-11 22:00:34 | 이정희
우리교회 오기전 부터 홈페이지 들여다 보는건 모든 분들이 같이 경험하는건가봐요. 저도 혼자 말씀들으며 정말 많이 들어와 보면서 여기교회는 참 따뜻하다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요즘도 바빠서 댓글을 달지 못하지만 틈만 나면 들어와 훑어봅니다. 경민자매님 말씀처럼 늘온기를 유지하는 아궁이 역할 할수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4-04-11 21:09:55 | 김혜순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빌4:12)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비천하게 되는 것"은 알면서 "풍부하게 되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과분한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기독교 신앙을 욕되게 하다가 결국은 바닥으로 곤두박질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실패보다 성공이 오히려 위험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자기가 풍부에 처할 줄 아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이 가졌을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넘치도록 풍족한 가운데서도 제대로 처신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배부르든 배고프든 모든 일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다 배웠다"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배부름에 처하는 법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배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 잘못하는 바람에 고기가 아직 그들 입에 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다가도 막상 먹을 것이 많아지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많은 선물을 받게 되면, 그 부요함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도 시간이 흐르다보면, 점점 그 마음이 둔해지기 쉽습니다. 배가 불러 하나님을 차츰 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것으로 만족하는 삶에 익숙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배고픔에 처할 줄 아는 것보다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것이 휠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배부르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기도드릴때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그 선물들로 인해 저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시고, 배부를 때에 더욱 두려워 할 줄 알게 하소서"   스펄전. 
2014-04-11 20:18:34 | 박진태
자매님의 교회사랑 마음 안에 있는 제 기쁨입니다. 과연 현대인의 마음 밭에도 저런 애틋한 향수가 있을까...! 차디찬 세멘트 동굴 도시에서 태어나 고향이라 부르기엔 너무 어중간한  공간과 속도를 배회하는 젊은 도시민은 이미 외로운 실향민일 뿐이고, 현대 교회 역시 세상과 타협하면서 저질성에 물든지 오래다보니  맛을 잃은 소금들 역시 많은 부분 영적인 이방인 게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출 애굽처럼 빛을 쫓아 모인 우리들의 행렬과 여정을 어찌 감축하지 않으리오. 이처럼 교회 홈피에서 세대와 시공을 초월하여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지체들의 열기가 끝없는 세상까지 펼쳐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2014-04-11 16:43:11 | 최상기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성경말씀이 있어 적어봅니다. 신명기 32장11절 독수리가 자기 둥지를 휘저으며 자기 새끼들 위에 너풀거리고 자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으며 자기 날개 위에 그것들을 업는 것 같이 주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둥지에서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먹으며 평온히 살고 싶은 새끼 독수리들에게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혹독히 훈련시키는 어미 독수리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시련으로 단련시켜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거겠지요.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도 휘리릭 스쳐지나가네요^^
2014-04-11 13:49:01 | 이정희
자매님의 댓글은 로그인을 안 할 수가 없게 만드는 비법이 있나봐요^^ 연탄불,,, 정말 또 떠오르네요 어릴적 추억이..ㅋㅋ 아마도 아궁이든 연탄불이들 어릴적 보았던 어느 집의 아랫목은 늘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던 것 같아요. ^^
2014-04-11 12:14:55 | 김경민
저는 연탄보일러 세대입니다. 하루에 세번 연탄을 갈아야 했는데 그중 한번은 꼭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시간대라 밤잠을 설치시며 연탄을 갈던 엄마 모습이 떠오르네요. 힘들어도 제시간에 연탄을 갈아야지 불을 꺼트렸다가는 번개탄에 불을 붙여 다시 살리는것이 여간 힘든게 아니었거든요... 또 어릴적 시골 이모집은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때서 난방을 했는데 그러면 안방 구들장 장판이 뜨거운 열기에 시커멓게 그을려있던 기억도 나구요. 그 불씨를 화로에 담아 안방에 가져다 놓고 개다리 소반에 차린것도 별로없는 김치와 청국장과 화로에 즉석으로 구운 김에 간장만 넣고도 맛있게 먹었던 소박한 밥상도 생각나고요^^ 자매님이 정감있는 글을 올려주셔서 옛추억도 떠올려보고 어릴적 사랑으로 가족을 챙기던 부모님 마음을 생각해 보며 그런 사랑이 넘치는 우리 사랑침례교회가 되기를 저도 소망해 봅니다.
2014-04-11 12:04:43 | 이정희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아니 시시때때로 교회 홈피를 드나드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이 교회의 교인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랬으니까요.    오늘 아침에 홈피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앞 문방구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유나,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이유처럼 우리 교회 홈피가 이렇게 활성화가 잘 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곳에 살아 있는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다른 어느 곳을 가 봐도 우리 교회 홈피만큼 온기가 느껴지는 곳은 사실 보기 드문 일입니다.    저는 비록 아궁이 세대는 아니지만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자주 지냈던 경험이 있어서 아궁이에 불 때던 추억이 새록새록 있답니다. 볏짚이나 장작을 부엌 안팎에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아침저녁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면 그 앞에 앉아서 경험한 다양한 추억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아궁이 앞을 떠나지 않고 늘 불을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불이 꺼지면 온기도 사라집니다. 우리의 믿음도, 교회의 존폐도 결국은 모두 우리 마음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았을 때 지속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결국은 주님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문득 마음에 교회 홈피를 보면서 '그래도 아직은 우리 교회가 살아 있구나...... 주님이 함께 하시는구나'하고 안도의 마음을 느끼게 되어 이 글을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써 내려갑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부터 더 잘해야겠구나. 더 신실해야 겠구나'하는 마음의 부담도 생기게 됩니다.   사랑의 온기... 이 불씨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지속되기를, 그래서 이 땅의 차갑게 식어버린 믿음이, 그리고 상처받은 많은 영혼이 다시 온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항상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역할을 잘 감당하는 우리 사랑침례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2014-04-11 09:37:00 | 김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