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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연초부터 목사님이 매주 월요일날 보내주시는 문자를 보며 성경일독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데 처음엔 새해를 맞아 의욕 넘치게 성경을 읽다가 요근래는 내가 성경을 읽고 있는건지 읽는 분량에 쫒겨서 글씨를 읽는건지 모르게 숙제를 하듯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나마도 이번주는 정해주신 분량을 다 읽지도 못했구요. 글을 읽다보니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대하고 읽어야 할는지 저 자신을 돌아보며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제 다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서 남은 성경일독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2014-06-22 01:28:04 | 이정희
지속적으로 체꼐적으로 성경읽는 일을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겠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정작 말씀읽는 일들이 너무 소홀해 지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내 안에서 움직이게 하옵소서!
2014-06-20 17:43:43 | 조양교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일인 것 같네요, 균형을 잡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 보아야 겠습니다. 사랑침례교회가 해야 할 일들이 균형을 잡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본질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2014-06-20 17:41:22 | 조양교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성경읽기   - 조지 뮬러 -    저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은 후 처음 4년 동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먼저 신앙 서적을 찾는 잘못에 빠졌습니다. 이전처럼 소설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설교집과 경건한 위인들의 전기를 주로 읽으면서도 성경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성경을 거의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 관계로 저는 성경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지식에 있어서나 은혜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참 지식은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거의 4년 동안 믿음의 기초에 대해서조차 무지한 가운데 지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眞理)만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요 8:31-32).   1829년, 24세가 되어 비로소 말씀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제 삶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 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경보다 다른 책들을 더 좋아하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이 쓴 책을 더 즐겨 읽는 사람이 있다면, 저의 사례를 통해 경고를 받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다른 책들에 더 매료되어 왔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성경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읽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기 전(前)에, 그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 더불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뛰어난 선생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성령님께서 언제나 즉각적으로 가르쳐 주시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구절에 대해서는 그 뜻을 보여 주시기를 거듭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갖고 인내로써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3. 구약과 신약을 매일 일정량 읽어서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각 성경기록의 연관 관계를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2) 영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3) 이렇게 체계적으로 성경 전체를 통독해 나감으로써 성경 전체의 개념을 균형 있게 파악하게 되어, 어떤 특정한 견해에만 치우치거나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 전체를 한 번도 통독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날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루 몇 장씩 읽으면 일 년에 성경 전체를 한 번 읽을 수 있습니다.    4. 우리가 읽은 말씀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읽은 구절 가운데 몇 구절만 묵상하거나, 시간이 허락하면 읽은 내용 전체에 대해서 하루 종일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경의 한 책이나, 서신서, 복음서의 한 부분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배운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 깊이 새겨져서 반드시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 조지 뮬러.
2014-06-18 20:08:38 | 박진태
옥성호 형제의"서초교회 잔혹사'를 읽고 허탈감에 빠졌었던 얼마전 때가 생각납니다.교회란 곳이 어쩌면 가장 안전한 불법의 온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균형감각은 커녕 시조에 밀려 부초처럼 떠 다니는 우리의 교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요?올바른 인성교육 대신 돈 많이 버는 법,출세 하는 법만 가르치는 세상의 풍조가 고스란히 밀려들어온 작금의 교회들에 중용의 도를 가르칠 분,어디 계신가요?
2014-06-18 17:09:53 | 유옥희
"중생한(다시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종종 더 곤고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을 통해 저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반성해 볼 수 있는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6-17 20:41:16 | 김대용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 대해서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는, "화산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명과 같다"라고 표현 하면서, 그런 문명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범죄학자들은, 이 시대를 '인간성 상실 시대'라고 표현들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처럼 '위험사회', '인간성 상실시대'를 국면하게 된 주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극단으로 치우치려 하는 성향 즉, '균형감 상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서, 우리 기독교도 지금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회의 극단의 흐름을 타고 영적인 균형감을 잃어버린 채, 마치 부패경쟁을 하듯 추락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출간된 "서초교회 잔혹사"와 같은 제목을 가진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러한 배경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는듯 합니다. 또 이처럼 영적 균형감을 잃어버린 교회는 당연히 영적 균형을 상실한 성도들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금식을 하고, 말씀을 보고, 설교를 들어도 '영적 균형감'이 상실되어 버린 상태에서는 오히려 그것은 영민한 사탄의 도구로 활용이 되어질 수 있는 아이러니가 발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균형감 즉, 중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중용'에 대해서 먹는 것으로 표현한 바가 있는데, "잘 먹었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소화를 잘 시켜 배설을 잘 했는가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잘 먹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영적인 음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말씀을 잘 먹었다는 것은 많이 읽었다거나 많이 깨달았다가 아니라 얼마나 내것으로 소화를 잘 시켰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제 아무리 우리손에 들린 진리의 성경 "킹제임스 흠정역"이라고 해도 영적 균형감이 상실된 채 지식으로만 알고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사탄의 영민한 도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우리 사랑침례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소유해야 할 것이 바로 '영적인 균형감'이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신 28:14>, <수 1:7>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말 들 중의 어떤 것에서든지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그들을 섬기지 말지니라"<신 28:14>.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심히 용감한 자가 되어 내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모든 율법대로 지켜 행하고 그것을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수 1:7>. 이와 관련해서 인터넷에서 좋은 글이 있어서,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를 해봅니다. ---------------------------------------------------------------------------------------------------------- 영적 균형감 A. W. 토저   1. 도덕적 이중성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위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우리는 흔하게 듣게 된다. 종교 사상가들은 이런 불균형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처방을 내렸다. 공자는 “중용(中庸)”을 가르쳤고, 석가는 “금욕주의와 육신의 안락을 피할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잡는 것이 덕스러운 생활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도 이런 도덕적 불균형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리는 처방은 “새 철학”이 아니라 “새 생명”이다. 기독교의 이상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종종 더 곤고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끌고 가려는 힘과 그를 죄로 끌고 가려는 힘이 자기 안에 병존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육신적으로는 아담의 자녀요 흙의 아들이다. 이런 도덕적 이중성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 5:17>. 그러나 참된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그를 성장시키려고 활동하신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육신과 싸우려고 할 때 그의 전투는 때때로 그로 하여금 금단적인 것들을 행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성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성령님의 활동은 무의식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의 자애로운 뜻에 순종하여 협력하여야 한다. 바로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양 극단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도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뒷짐지고 기다린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언급한 불균형이다. 우리의 도덕적 반응이 없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고 절제의 훈련을 하고 하나님의 목적들을 인정하여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발전은 없다.   2. 영적인 기형의 상태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서 결국 영적인 기형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우리는 담대해지려다가 지나쳐서 뻔뻔스럽게 될 수 있다. 용기와 온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에게 이 두가지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분이 그분의 적들과 대립할 때,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나타났다. 둘째, 우리는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날 수 있다. 솔직하면서도 무례하지 않는 균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발견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숨김없이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리는 성격이라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 말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도 사랑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벧전 4:8 참조>. 셋째, 깨어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심하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오류와 싸우다 보니 우리는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의를 품는 경향이 있다. 사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이단을 쫒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도록 유혹하다가 실패할 때 사탄은 우리가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도록 부추긴다. 넷째, 진지해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울해질 수 있다. 성도들은 언제나 진지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침울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기쁨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약이다.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다섯째, 양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양심의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질 수 있다. 우선 사탄은 성도의 양심을 파괴하여 비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 실패 할 때 그는 반대적인 전술을 써서 신자의 양심을 병들게 한다. 이것은 신자가 양심적으로 너무 예민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까봐 늘 두려워하기 때문에 늘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신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동들의 수를 줄여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것조차 두려워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을 “경건의 증거”라고 착각한다.   3. 끝맺는 말.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가? 당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만난 자신만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고, 또 그분의 진리와 그 진리를 체험적으로 사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진리로 성화되는 경험도?.., 그리고 그 충만한 경험으로 인한 평안이 마음에 넘치고 있는가? 이 경험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해 줄 수 없으며, 이 경험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참된 성도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출처: 살아있는 이들 80호
2014-06-17 05:37:23 | 김상진
제 아이들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실패를 두려워 하지말고 도전하고 부딪혀 보라고 멋진말은 다 가져다 쓰면서도 정작 제 자신은 어려움과 부담을 싫어하고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은 것처럼 저도 다윗의 믿음의 삶을 따르는 씩씩하고 멋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싶습니다. 꾸준히 올려주시는 글 감사합니다.
2014-06-11 15:33:57 | 이정희
이번주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던 중 감동받은 글이 있어 올립니다.   시련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그 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엡 1:18)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시련을 당하든 늘 그렇게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장차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음을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과 행동은 당신이 이미 구원 받아서 그 구원을 드러내면서 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당신이 아직도 이전과 다름이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앞에 고난들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해쳐 나가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훈련과정들을 면제시켜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12절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라는 말씀대로 당신을 연단하기 위한 시련이 오면, 가슴을 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연하게 맞이하십시오.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나의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나이다."(시 18:29) 고 한 다윗의 고백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싸우십시오.   절대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는 씩씩하고 멋진 자녀가 되십시오. 우리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그 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흘러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2014-06-09 23:57:03 | 박진태
자매님 어쩜 저랑 너무 비슷하시네요. 저도 제 실수에는 관대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혹 실수라도 하면 온갖 타박과 짜증을 부리지요 제가 한 실수도 아이들과 남편에게 전가시켜 화를 낼때도 많고요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반성하게도 되네요. 하나님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자매님의 모습이 너무 귀하네요. 자매님의 글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저에게 또다시 그런 상황이 닥쳤을때 떠올리겠습니다. 거울앞에선 제 모습과도 같은 자매님의 글 감사해요.
2014-06-09 13:56:04 | 이정희
깊고 진한 묵상이 담긴 글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해묵은 성품의 허물과 약점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자매님의 글을 읽으며 오히려 한없이 부실한 제 성품을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약점을 드러내어 보여주시는 것이 그만큼 성숙을 이루셨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본받아 자신을 다듬는 일에 열심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잔잔하면서도 예리한 묵상의 글에 감사합니다.
2014-06-03 11:06:17 | 김대용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라 절로 답글을 쓰게 되네요^^ 저는 워낙 글 쓰는 것을 싫어하고 재주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티나 모임을 조금을 꺼려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사람들이 제가 조용하고 차분한(?)줄 아시지만 알고보면 욱~하는 다혈질 성격에 까칠한 면이 많아 인간관계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고쳐볼려고 노력을 안하는게 문제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를 꺼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습성이 오래 베어서인지 오히려 편한거 같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참 그렇습니다. 요즘은 제자신이 바뀌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쉽지가 않네요!! 자매님 글을 통해 제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자주 부탁해요~~
2014-06-02 08:01:53 | 김세라
글을 읽으며 동지 한명을 만난듯 기쁜마음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동시에 드네요. 찬양곡 주님을 따른다는 건 멀고도 험한 길. 그러나 주님 바라보면 쉽고도 평화로운 길. 내 생각대로 가고자 하면 언제나 실패뿐이지만 주님의 명령 따라간다면 나 언제나 승리뿐이네. 때로는 유혹이 따르며 내 갈 길 험하여도 주님의 신실한 약속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거룩한 주의 말씀 따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따라가세. 홀로 한 분이신 주님, 복되시고 전능하신 분. 주 명령 따라 흠도 없이 책망도 받을 것 없이 주님의 명령 따라간다면 나 언제나 승리뿐이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 만물을 살게 하신 주, 주께서 명령하네. 주님 오시기까지 이 명령 지키라. 자매님, 우리 이런 이 되도록 주님만 바라봐요~
2014-06-01 23:30:49 | 태은상
아름다운 간증의 여운을 느끼며 묵상하게 되네요... 크지도 작지도 않는 너무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에서 쉽게쉽게 재연되는 현상이 아니가 싶기도하네요.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투사"(남탓)를 하지않고 성숙한 모습으로 삶의 예배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부끄럽지만 나누고자 이 글을 올려" 지체들을 권면하심에 감사애요 경민자매님!
2014-06-01 15:07:59 | 이춘옥
아침 일찍 일 때문에 출근한 남편과 방과 후 수업이 있어 학교에 간 큰 아이 때문에 모처럼 막내 아이와 단둘이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아침을 먹여야 했기에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야채와 햄을 이용해 볶음밥을 해 보려고 야채다지기를 꺼냈습니다. 평소 제가 아끼는 것 중에 하나가 이 야채 다지기입니다. 사이즈는 작고 수동이지만 독일의 유명한 주방용품 회사에서 만든 아이디어 상품인데, 재료를 넣고 손잡이가 달린 줄만 서너 번 잡아당기면 여기저기 튈 염려 없이 원하는 만큼 골고루 다져 나와 요리를 손쉽게 도와줍니다. 뒤처리도 간단해서 잘 이용하고 있는데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리한 칼날이 들어 있어 늘 주의를 기울여 아이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상자 채 그대로 넣어서 보관을 잘 해야 합니다. 오늘도 무심코 야채와 햄을 넣고 줄을 두어 번 당기려던 찰나 뚜껑을 너무 가볍게 누른 상태에서 줄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통을 놓쳐 저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간 야채다지기와 그 안에 있던 미처 썰어지지 않은 온갖 재료들, 그리고 문제의 그 위험한 칼날이 순식간에 공중에서 쏟아지면서 주방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칼날은 다행히 제 발 앞에 떨어져 아찔한 위기도 모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처 다 다지지 못한 재료들은 온통 주방위에 흩어져 순간 몇 초간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평소 다지기를 사용 하면서 주의하여 사용하던 터라 오늘의 사고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침 아이는 거실에서 놀고 있어 ‘이 상황을 모르고 있어서 다행이지’ 하는 생각이 순간 스치더군요. 그런데 저의 그 다음 반응에 저도 사실 놀랐습니다. 만약 평소 남편과 큰아이가 같은 상황에서 제 곁에 있었다면 분명 저는 그들이 들으라는 듯 더 호들갑을 떨며 온갖 짜증을 부리며 분을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이는 웃으며 다가와 치우는 것을 도와주며 “그냥 나가서 먹자.” 그랬을 테지요. 그런데 지금 제 곁에는 누군가 저의 짜증을 받아 줄 사람도 없었지만 이 황당하고 짜증난 상황이 오히려 쉽게 체념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제가 치워야할 상황이고, 아직 3살 밖에 안 된 둘째 아이에게 이 상황이 알려져야 좋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아이와 저는 지금 배가 고픈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떨어진 재료들을 주어 담았습니다. 그리고 걸레로 바닥을 닦고, 주어 담은 재료를 물로 씻어 다시 다지기에 넣고 곱게 다져 프라이팬에 쏟았습니다. 아이와 조용히 완성된 볶음밥을 먹으면서 30분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 그동안 자의이든 타의이든 벌어졌던 분노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 했었는지 과거의 제 모습이 떠올랐고 지금 현재 제가 했던 대처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보면 불안과 갈등에 대처하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 방어 기제들이 있는데 이 중 용납할 수 없는 자기 자신 내부의 문제나 결점이 자기 외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투사’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남을 탓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저는 유독 완벽하고 꼼꼼하며 불같이 화를 잘 내고 엄하신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하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이런 태도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에 좋은 태도였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부족한 누군가를 속으로 멸시한다거나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을 때 오는 좌절감 같은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나는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런데 20대 초반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난 이후부터 이런 제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고 고쳐보려고 부단히 애써 본 결과 저의 노력이 10 이라면 나머지 90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제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저도 모르게 제 속의 이 쓴 뿌리들을 서서히 제거 해 주셨습니다. 이 쓴 뿌리들은 어찌나 생명력이 강하고 질긴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저는 물론 가장 가깝게 제 가족들에게도 상처를 주고는 합니다. 아직 어려 연약한 저희 아이들과 저와는 반대로 온유한 성품의 남편이 가장 가까운 피해자인 셈입니다. 저를 교회에서 아시는 분들은 그러시겠지요. ‘아니 자매처럼 얌전하고 조신한 사람이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믿을 수 없어요.’ 하시겠지만 그 분들께 부끄럽게 고백하건데 ‘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혹은 이런 모습을 벗어버리고 싶어 나름 노력한 결과이지요.’ 라고 솔직히 고백하려합니다.   저는 오늘 평소와는 다르게 스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체념하면서 상황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 ‘그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수습하는 것도 내 몫이 되어 버렸으니 화내서 뭘 해. 어서 치우고 밥이나 먹자.’ 하고 차분히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 스스로에게 놀라면서 이전의 제 모습이 얼마나 주님께는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는 물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었는지를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바닥을 다 닦고 나서 잠시 무릎 꿇고 기도 하였습니다. ‘주님, 지금 벌어진 일을 통해 제 자신의 지난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그동안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제 자신을 용서해 주시고 저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앞으로도 같은 상황에서 제가 화내기를 멈추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원합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누군가나 아직 3살 밖에 안 된 저희 아이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저게 무슨 시츄(situation)인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쁘고 평안하더군요.   혹시 지금 저와 같은 경험으로 이미 벌어진 어떤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계시거나 그로인해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해결점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인식하고, 부족하고 연약함이 있다면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의지하여 우리를 능히 사망에서 건져 내신 그 분의 권능을 믿고, 예수님의 온유하신 성품을 닮아가도록 각자가 기도하고 서로 권면하는데 있다고 여겨 개인적으로 깨달은 바를 성도님들께 부끄럽지만 나누고자 이 글을 올려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그 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 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 그런즉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들어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신 줄 알므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붙들자.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갈 것이니라. (히 4:12~16)  
2014-05-31 18:35:14 | 김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