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으며 동지 한명을 만난듯 기쁜마음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동시에 드네요.
찬양곡
주님을 따른다는 건 멀고도 험한 길.
그러나 주님 바라보면 쉽고도 평화로운 길.
내 생각대로 가고자 하면 언제나 실패뿐이지만
주님의 명령 따라간다면 나 언제나 승리뿐이네.
때로는 유혹이 따르며 내 갈 길 험하여도
주님의 신실한 약속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거룩한 주의 말씀 따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따라가세.
홀로 한 분이신 주님, 복되시고 전능하신 분.
주 명령 따라 흠도 없이 책망도 받을 것 없이
주님의 명령 따라간다면 나 언제나 승리뿐이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
만물을 살게 하신 주, 주께서 명령하네.
주님 오시기까지 이 명령 지키라.
자매님, 우리 이런 이 되도록 주님만 바라봐요~
2014-06-01 23:30:49 | 태은상
아름다운 간증의 여운을 느끼며 묵상하게 되네요...
크지도 작지도 않는 너무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에서
쉽게쉽게 재연되는 현상이 아니가 싶기도하네요.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투사"(남탓)를 하지않고
성숙한 모습으로 삶의 예배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부끄럽지만 나누고자 이 글을 올려" 지체들을 권면하심에 감사애요 경민자매님!
2014-06-01 15:07:59 | 이춘옥
아침 일찍 일 때문에 출근한 남편과 방과 후 수업이 있어 학교에 간 큰 아이 때문에 모처럼 막내 아이와 단둘이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아침을 먹여야 했기에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야채와 햄을 이용해 볶음밥을 해 보려고 야채다지기를 꺼냈습니다.
평소 제가 아끼는 것 중에 하나가 이 야채 다지기입니다. 사이즈는 작고 수동이지만 독일의 유명한 주방용품 회사에서 만든 아이디어 상품인데, 재료를 넣고 손잡이가 달린 줄만 서너 번 잡아당기면 여기저기 튈 염려 없이 원하는 만큼 골고루 다져 나와 요리를 손쉽게 도와줍니다. 뒤처리도 간단해서 잘 이용하고 있는데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리한 칼날이 들어 있어 늘 주의를 기울여 아이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상자 채 그대로 넣어서 보관을 잘 해야 합니다.
오늘도 무심코 야채와 햄을 넣고 줄을 두어 번 당기려던 찰나 뚜껑을 너무 가볍게 누른 상태에서 줄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통을 놓쳐 저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간 야채다지기와 그 안에 있던 미처 썰어지지 않은 온갖 재료들, 그리고 문제의 그 위험한 칼날이 순식간에 공중에서 쏟아지면서 주방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칼날은 다행히 제 발 앞에 떨어져 아찔한 위기도 모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처 다 다지지 못한 재료들은 온통 주방위에 흩어져 순간 몇 초간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평소 다지기를 사용 하면서 주의하여 사용하던 터라 오늘의 사고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침 아이는 거실에서 놀고 있어 ‘이 상황을 모르고 있어서 다행이지’ 하는 생각이 순간 스치더군요.
그런데 저의 그 다음 반응에 저도 사실 놀랐습니다.
만약 평소 남편과 큰아이가 같은 상황에서 제 곁에 있었다면 분명 저는 그들이 들으라는 듯 더 호들갑을 떨며 온갖 짜증을 부리며 분을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이는 웃으며 다가와 치우는 것을 도와주며 “그냥 나가서 먹자.” 그랬을 테지요. 그런데 지금 제 곁에는 누군가 저의 짜증을 받아 줄 사람도 없었지만 이 황당하고 짜증난 상황이 오히려 쉽게 체념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제가 치워야할 상황이고, 아직 3살 밖에 안 된 둘째 아이에게 이 상황이 알려져야 좋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아이와 저는 지금 배가 고픈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떨어진 재료들을 주어 담았습니다. 그리고 걸레로 바닥을 닦고, 주어 담은 재료를 물로 씻어 다시 다지기에 넣고 곱게 다져 프라이팬에 쏟았습니다. 아이와 조용히 완성된 볶음밥을 먹으면서 30분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 그동안 자의이든 타의이든 벌어졌던 분노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 했었는지 과거의 제 모습이 떠올랐고 지금 현재 제가 했던 대처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보면 불안과 갈등에 대처하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 방어 기제들이 있는데 이 중 용납할 수 없는 자기 자신 내부의 문제나 결점이 자기 외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투사’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남을 탓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저는 유독 완벽하고 꼼꼼하며 불같이 화를 잘 내고 엄하신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하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이런 태도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에 좋은 태도였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부족한 누군가를 속으로 멸시한다거나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을 때 오는 좌절감 같은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나는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런데 20대 초반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난 이후부터 이런 제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고 고쳐보려고 부단히 애써 본 결과 저의 노력이 10 이라면 나머지 90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제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저도 모르게 제 속의 이 쓴 뿌리들을 서서히 제거 해 주셨습니다. 이 쓴 뿌리들은 어찌나 생명력이 강하고 질긴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저는 물론 가장 가깝게 제 가족들에게도 상처를 주고는 합니다. 아직 어려 연약한 저희 아이들과 저와는 반대로 온유한 성품의 남편이 가장 가까운 피해자인 셈입니다. 저를 교회에서 아시는 분들은 그러시겠지요. ‘아니 자매처럼 얌전하고 조신한 사람이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믿을 수 없어요.’ 하시겠지만 그 분들께 부끄럽게 고백하건데 ‘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혹은 이런 모습을 벗어버리고 싶어 나름 노력한 결과이지요.’ 라고 솔직히 고백하려합니다.
저는 오늘 평소와는 다르게 스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체념하면서 상황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 ‘그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수습하는 것도 내 몫이 되어 버렸으니 화내서 뭘 해. 어서 치우고 밥이나 먹자.’ 하고 차분히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 스스로에게 놀라면서 이전의 제 모습이 얼마나 주님께는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는 물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었는지를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바닥을 다 닦고 나서 잠시 무릎 꿇고 기도 하였습니다.
‘주님, 지금 벌어진 일을 통해 제 자신의 지난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그동안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제 자신을 용서해 주시고 저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앞으로도 같은 상황에서 제가 화내기를 멈추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원합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누군가나 아직 3살 밖에 안 된 저희 아이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저게 무슨 시츄(situation)인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쁘고 평안하더군요.
혹시 지금 저와 같은 경험으로 이미 벌어진 어떤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계시거나 그로인해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해결점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인식하고, 부족하고 연약함이 있다면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의지하여 우리를 능히 사망에서 건져 내신 그 분의 권능을 믿고, 예수님의 온유하신 성품을 닮아가도록 각자가 기도하고 서로 권면하는데 있다고 여겨 개인적으로 깨달은 바를 성도님들께 부끄럽지만 나누고자 이 글을 올려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그 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 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 그런즉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들어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신 줄 알므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붙들자.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갈 것이니라. (히 4:12~16)
2014-05-31 18:35:14 | 김경민
자기 이익의 시험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창 13:9).”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삶을 시작하면 우리 앞에는 광활한 땅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다 보면 때로는 오히려 이 권리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양도하게 됩니다.
가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려고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너무 당연해 보이는 그런 자리에 우리를 두십니다. 이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훈련을 통하여 육신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영적 통찰력이 무뎌져 주님과의 교신에 차질이 생깁니다. 믿음의 삶에서 가장 큰 적은 죄가 아니라 선, 최선이 아닌 어설픈 차선입니다. 우리는 죄는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어설픈 선은 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난한 선은 최선의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최선을 요구하시는 주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우리가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차선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롯과 땅 문제가 생겼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아브라함을 바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2014-05-31 15:25:24 | 박진태
그러나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 겸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4:7~12)
목사(목자; Pastor)는 그리스도의 양떼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고 보호하는 직무를 가진 자로서 감독과 장로와 같은 사람입니다.(벧전5:2) 어떤 분들은 위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목사, 교사 등이 직분이 아니라 개별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사(선물)라고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목사 겸 교사라는 사람을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결코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알 듯이 목사는 집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신약 교회에 주신 직분(office)입니다.(딤전3:1~7)
그렇다면 목회에 대한 소원을 품은 형제가 자신이 과연 목사로 부르심(소명; Calling)을 받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지침은 무엇이 있을까요? 영국의 대표적 청교도 목회자인 리차드 백스터, 설교의 황태자로 불렸던 찰스 스펄전,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마틴 로이드 존스 이 세 분이 제시했던 항목들 중 중요한 것 위주로 추려 몇 가지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
목회에 대한 자발적이고 강력한 소원이 있어야 한다.
목회에 대한 떨쳐 버릴 수 없는 압박감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정신을 짓누르는 강한 부담감이며 목회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목회에 대한 열망이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
목회에 대한 열망에 사심이 없어야 한다. 세상적인 야망으로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사역에 적합지 않다.
목사가 될 사람은 보통 수준 이상의 영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진리를 확고히 알고 이해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어야 한다.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중요한 교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에서 공적인 설교 기회를 통해 경건한 성도들에게 검증받아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진리로 능히 인도할 만한 출중한 언변을 타고나야 한다.
목회에 부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경건한 사람이어야 하며 동시에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열심은 뛰어나지만,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목사 되기 전에 지금까지 복음 사역에 대한 자신의 수고로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지 점검해 보라.
구원받은 이후에 너무 쉽게 잘못된 교리나 행동에 빠지는 사람은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그의 믿음과 가르침에 배치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역에 대한 여러 자격 요건을 갖추는 일에 게으르고 그것을 꺼리는 사람은 적합하지 않다.
모든 일에 무능한 사람은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목회 사역에 대해 자만하는 사람도 목사로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목사로 부르신 사람은 때와 장소 등의 환경이 차츰 갖춰지고 본인이 준비되면 대개 목회할 사역지가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이상과 같은 요소들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에게 대입해 점검하면 과연 자신이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단 이런 검증의 기간은 사람에 따라 비교적 짧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때로 수년 이상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 검증은 선배 목회자와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현재 교회의 모든 문제와 배교 현상은 결국 목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어떤 분의 말에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성경 신자들 사이에도 목사에 대한 거부감은 아니더라도 ‘목사는 반드시 타고나야 한다.’는 선명한 명제나 목사의 직무에 대한 부르심(소명)을 강조하는 것에 은근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더러 있는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목사는 하나님의 선물로 선정된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선물은 받는 대상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선물은 선물로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선물로서의 자격과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반대로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선물을 하찮게 여기고 선물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면 선물을 받지 못했던 초라한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알 듯 구약의 대언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활동은 이미 종결되었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복음 전도자의 활동 영역까지 목사의 직무에 통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 목사 겸 교사는 사실상 성도들을 목양하고 말씀을 선포하며 영적 전장(戰場)에서 주님의 군단을 앞장서 이끄는 신약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분입니다.
한국 TV 드라마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재벌들의 일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재벌 집안에 그것도 총수인 회장이 편찮을 때 항상 가방 하나를 들고 황급히 등장하는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의 신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재벌가의 주치의인 대학병원 교수입니다.
아쉬울 것 하나 없고 거만함이 자연스러운 재벌가 사람들조차 이 주치의 선생에게는 깍듯이 대하며 갖은 예의를 다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 우리가 보도를 통해 접하듯 억만장자도 건강을 잃으면 만년 동안 쓰고 남을 재산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바르게 이끌고 그들의 영적 장애와 병을 고치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 주치의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꼭 받아야 할 선물을 거부하면 그 피해는 거부한 당사자에게 돌아갑니다. 자! 여러분 역사상 가장 탁월하게 사역했다는 거의 모든 목사들의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명제는 결국 이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는 교육받고 훈련받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 물론 이 말은 부르심을 확인한 목사후보생에게 교육과 훈련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일단 위 명제에 동의한다면 목회 사역의 현장에는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소명이 있는) 목사와 그렇지 못한 목사로 양분된다는 엄정한 현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소명을 받은 목사는 과연 얼마나 되고 그렇지 못한 목사들의 사역은 무가치한 것일까요? 감히 저는 이 무거운 주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목회를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 옥한흠 목사님의 이야기를 빌려 보겠습니다. 이 분은 분명히 여러 문제와 한계를 지니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목회자와 목회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할 몇 안 되는 한국인 중 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생전에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발췌해 올립니다. 옳은 것을 취하고 잘못된 것은 걸러내어 중요한 교훈으로 삼는 것에 문제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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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목사는 앞으로 한국교회 내에 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걸출한 영적 리더들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시대를 선도하는 리더들이 나온다면 한국교회의 상황은 다시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목회자는 말씀에 온 생명을 걸어야 한다고 옥 목사는 강조한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피와 땀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 그렇다면 한 시대에 쓰임 받는 설교자(목사)는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옥 목사는 시대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설교자들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타고난다고 말한다. 찰스 스펄전, 필립스 브룩스,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 루터 같은 위대한 설교자들은 한결같이 타고난 설교자들이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교회에서 ‘설교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목사들도 무언가 타고난 특성이 있다. 설교자에게 유리한 선물(은사)가 있다. 그런 은사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설교 분야에서 앞서가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어눌한 사람보다는 능변인 사람, 전달력이 좋은 사람이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도 효과적인 설교를 하게 마련이다. 영적 파워가 남다른 사람들도 있다. 인격과 개성 자체가 특별히 영성과 관련된 사람들도 있다. 디모데전서 3장에는 감독의 여러 가지 자격이 나온다. 그러나 선물(은사)는 오직 한 가지만 제기된다. 바로 가르치는 재능이다. 선물(은사)는 타고난 것이다. 옥 목사는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타고난 은사, 하나님이 주신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땅의 많은 설교자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스스로 타고난 설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의 교회 중 95%, 아니 99%에선 타고난 설교자가 아닌 평범한 설교자들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세계 역사입니다. 우리는 뛰어난 사람들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이 미치는 영향은 1% 미만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탁월한 설교자뿐 아니라 99%의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요. 실제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왔습니다. 그들의 인도 아래 수많은 성도가 구원받고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은 실은 영적 야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설교를 이용해 성공하겠다는 야심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순수하지 않은 야심입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라면 99%의 평범한 설교자보다는 1%의 비범한(타고난) 설교자의 범주에 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에 그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진정 타고난 설교자는 타고난 것만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 가운데 성령님으로 무장하게 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포할 말씀을 주시고, 성령님의 기름 부음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설교자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시대적 섭리가 있을 때에만 그런 위대한 설교자가 나옵니다. 따라서 거기에 내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 되지요. 비록 타고난 설교자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설교자의 생명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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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처럼 목회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대단히 혹독한 검증을 거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타고난 설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가지고 목회 사역에 헌신하게 되는 처절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현대 교회들의 영적 어려움은 갈수록 가중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의 바른 설교자 그리고 한 사람의 바른 목회후보생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뜨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지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하며 중대한 직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까?
한없이 부족한 제가 보기에 침례교회 그중에서도 독립된 지역 교회를 이루고 있는 침례 성도들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단 성경 지식의 면에서 비교적 뛰어납니다. 또한, 분명히 바른 교리라 할 목사와 목사가 아닌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차등 없이 동등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될 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을지라도 사람은 항상 바른 원리를 뒤틀어 버릴 수 있는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성경 신자들이 모였다는 지역교회 안에서 목사(목자)와 회중(양떼)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 어떤 경우에는 양떼 중에 목자의 목자요, 설교자의 선생이 된 듯 착각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많은 성경 지식이 일종의 지적 허영을 일으킬 위험에 바른 교회를 추구하고 성경을 많이 배우는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더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성도 자신이 큰 영적 해악을 초래할 뿐입니다.
돌이켜 보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고 알리며 그를 기반으로 해서 성경적인 바른 신약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던 형제님들도 모두 목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 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과 목사의 직무에 대한 중대함을 서로 구분하여 지혜롭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휴거 받는 그날까지 킹제임스 성경을 더 널리 알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한국 땅에 마지막 참된 부흥을 앞장서 이끌 사람들도 결국 목사입니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이 땅의 성경 신자들은 이런 강렬한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경제적 부담이 적은 변두리 한적한 곳으로 빠져나가 자신들만의 우물을 파고 고고하게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독립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아쉬움이 생길 겁니다. 서울의 5대 상권과 각 지방의 중심도시 한복판, 사탄의 전략적 요충지에 담대하게 개척의 깃대를 꽂고 영적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탁월한 전사들이 우리 사이에서 속속 배출되길 소망해 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선한 사역은 헌신된 목사 한 사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중국에 지음(知音)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존재가치와 깊은 속마음을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이르는 말입니다. 옛날 중국에 거문고를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백아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아 옆에는 그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만 들어도 그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연주하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종자기가 옆에 있으므로 해서 백아의 연주는 비로소 빛을 발하고 그 존재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백아에게 종자기라는 친구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그가 죽은 후에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바른 지역교회에서 이렇게 백아와 종자기처럼 지음(知音)의 관계를 맺는 바른 목사와 조력자들이 배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바른 목사 못지않게 신실한 조력자들도 우리에게는 매우 절실합니다. 요즈음 저는 한 발 물러서 좋은 목사의 사역을 응원하는 소박한 조력자의 삶을 사는 것이 제 분량에 맞고 참 귀하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바른 신약교회를 추구하는 지역교회들은 바른 교리들을 굳건히 수호하면서 한국의 상황에 맞는, 이 땅의 잃어버린 혼들을 얻을 수 있는 젊은 교회들로 큰 폭의 환골탈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룩한 성과에만 만족하면 안 됩니다. 그에 안주하지 않고 진취적인 자세로 담대하게 전쟁터를 향해 나아가는 젊은 영적 리더들이 배출되지 않는다면 단언하건대, 조국과 이 땅에서 성장하고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대단히 암울합니다.
젊은이들이 친구의 생일 케익에 촛불을 켜고 장난스럽게 부르는 축하곡으로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어? 사랑하는 아무개 왜 태어났니?’라는 매우 짧은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나서 구원받고 천상의 삶에 비하면 구차하기 짝이 없는 지상에 아직 남겨져 살고 있습니까? 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이 지상에 왜 태어났는가 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참모습을 살펴볼 때 성경 신자라 하고 성경을 남보다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데 판단은 칼처럼 잘하지만 정작 행위의 열매는 부실하기 그지없지 않습니까? 만약 복음을 알리는 것에 대한 열심이 오순절 은사주의 교인이나 장로교인보다 훨씬 못한데 머리만 잔뜩 커져 있다면 이것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팔짱을 끼고 자신의 지식으로 판단부터 하려 하기 전에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바르게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모든 열정을 기꺼이 바치는 사람이 믿음과 그에 따른 행위가 함께 성장하는 참된 성경 신자입니다.
또한 내가 주의 음성을 들었는데 이르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더라.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사6:8)
이사야의 이 고백처럼 영적으로 대단히 척박한 오늘날 분연히 일어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목사와 일생을 그와 함께 기쁘게 헌신할 조력자들이 여기저기서 속속 일어나야 합니다. 사막에서 탈진해 쓰러진 사람에게 한 모금의 물이 목숨을 구하듯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이 일을 주님께서 반드시 성취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05-30 16:32:09 | 김대용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24:63)
여기서 이삭이 한 일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친구들과 돌아다니며 할 일없이 지내거나, 시시껄렁한 책을 읽으며 보내거나, 시간이나 때우려고 쓸데없는 짓을 하며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이 이런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되면 지금은 자기들 눈에 그처럼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 헛된 일들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묵상하는 가운데 더 많은 유익도 얻고 재미있는 시간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질 때, 우리 모두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날 뿐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 살며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묵상의 주제는 결국 모두 예수님과 관련된 것들인데, 묵상의 대상이 예수님이라면 그 묵상은 정말 달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묵상하다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만일 오늘 하루 일과 중 이런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주님을 묵상해 보십시오. 한 시간도 좋고, 30분도 좋고, 10분도 좋습니다. 아주 좋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을 만나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맞으러 가봅시다.
스펄전의 묵상.
2014-05-29 21:03:29 | 박진태
우리가 잘 알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범위 안에서
건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며 특히 가장이 된 형제들은 가족을 성실히 부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결코, 세상을 떠나 자기만의 성을 쌓는 등의 모습이
성경에 합당한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이 아니기에
세상이 미워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강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나는 과연 세상의 미움을, 그것도 강렬한 미움을
받고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반성할 부분이 참으로 많네요.......
좋은 묵상의 글에 감사합니다.
2014-05-27 08:53:39 | 김대용
상황처지와 상관없이 세상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들 끝까지 잘 돌보다 가는게 소원입니다.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4-05-27 07:42:19 | 목영주
마음의 티백...너무 공감가는 글입니다. 이렇게 좋은 형제 , 자매님들과 함께 할수 있는 교회 공동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2014-05-26 13:04:26 | 오광일
KJB 영어 성경읽기 모임에서 말씀 묵상을 하다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것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2014년 5월 26일(월) John 14:15-24 (요한복음 14장15-24절) 성령님의 이름을 본문에서는 두가지로 표현합니다. (1) 위로자(another Comforter) (2)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이 성령님께서 해주시는 일은 16-17절에 반복해서 말씀하시듯이.. "He may abide with you for ever" "for he dwells with you, and shall be in you"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이니 때문이라.. 너무 감사. 아멘입니다. 우리가 한번도 직접 예수님을 뵌적도, 부활하신 것도...아무것도 눈에 경험은 없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걷는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요. 믿음으로 걷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때론 우리가 육신적으로 세상에 속해 있다 보니 내가 고아가 아닌가?하는 슬픈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고아...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고, 돌봐줄 부모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살아갈 이유도 없는... 세상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앞날(짦은 이 세상의 삶의 윤택,평안함)을 위해 이것저것 분주하게 일하고, 공부하고, 준비하고, 정말 열심히 살아갑니다. 특히, 한국사람들이 더 그런거 같습니다. 부지런 하지요. 그런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해 보면.. 난 뭐지?.. 왜이렇게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거 같지..? 나도 뭔가 미래를 위해서 ...뭐 해야는거 아닌가? (물론, 사람인지라 당연히 준비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저도 무지 고민합니다..ㅜㅜ) 그런데, 그런 고민끝에 우리가 생각해 내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것입니다.(물론, 회의론적으로 세상을 보자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방향은 너무 고차원, 추상적인것 같고, 인터넷, 언론 매체들에서 알려주는 삶의 지혜들이 현실적으로 와 닿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면..어찌 해야 할까요? 다소 추상적이고 고차원 적이지만, 정답은 21절인거 같습니다. " 내 명령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언론매체들이 알려주는 삶의 방편에 귀기울이는것 이상으로 이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정말,,,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것들을 지켜보려고 노력을 하고 계시나요?(행위구원을 말하는게 절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서 절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목숨걸고 지키려고 노력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어쩌면 우리는 이슬람에 극단적 근본주의자들 보다 더 믿음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경전인 꾸란의 말을 목숨처럼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온갖 악한 짓을 자기 목숨 버리면서 까지
저지른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거는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저의 평생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럴때 주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는 인생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8절에.."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께서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위로없이 절대 버려두지 않겠다" 세상의 고아같은 마음이 밀려와 ..주님과의 교제가 어려우시다면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를 고아같이 무시하고 버릴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절대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안에 이미 계신, 위로자 되신, 진리의 영이 되신 성령님을 외면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주의 말씀으로 위로받고 힘을 내어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때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도 기뻐 춤추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느껴지시나요? 행복한 5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4-05-26 12:54:54 | 오광일
이글을 통해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향기와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오래참음.. 주님의 것들만 우려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아침을 열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광야 생활을 통해 주님의 것으로 주님께 영광돌리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2014-05-26 07:58:37 | 태은상
고난과 핍박뿐 아니라 오히려 좋은 환경과 풍요로움이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이 드러나는
뜨거운 물 일수 있다는 예리한 분석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진리를 전해도 귀를 막고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와 하나님의 선한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찾기 매우 어려운 삭막한 시대에 바른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보상이
절대로 평범치 않을 것임을 믿습니다.
귀한 글에 감사합니다.
2014-05-25 23:48:12 | 김대용
적절한 비유로 좋은 묵상거리를 올려 주셨군요. 어려움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번 더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2014-05-25 19:11:55 | 임원섭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주의 사랑에 따라.."(호세아3:1)
성도 여러분, 그 동안 체험한 것들을 하나하나 회상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또 매일매일 어떻게 먹이고 입히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안 여러분의 나쁜 태도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견디셨는지, 애굽에 두고 온 고기를 못 잊어 그리워하던 모습과 수시로 원망하던 소리를 얼마나 참고 견디셨는지, 어떻게 바위를 쳐서 물을 주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여러분을 먹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안 여러분이 겪은 모든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충만하게 넘쳤는지,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어떻게 사해 주셨는지, 여호와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어떻게 여러분을 인도해 주었는지 한번 회상해 보십시오.
이처럼 그 동안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회상하면서 장차도 내려 주실 그 분의 사랑을 믿음으로 그려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언약과 피는 단순히 과거만을 위한 언약의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그 사랑과 용서를 절대 중단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된다 해도 조금도 악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분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의 차가운 강물 안에 발을 딛고 서게 된다 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망조차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롬8:38-39)
스펄전.
2014-05-24 22:39:13 | 박진태
우리나라가 너무 잘못되어 갑니다.
겉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사람이 살수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고 하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나라와 민족이 망하는 동일한 패턴이 반복됨을 엄중히 말합니다.
자중지란(自中之亂),
같은 나라內에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 물어뜯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망하게 합니다.
성(城) 내부에서 성민((城民)들이 서로 싸우면, 그 성(城)을 함락시키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2014-05-24 22:28:49 | 오영수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더.
너무 바쁘게 지내지 않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늘 말씀과 묵상의 글에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5-24 17:43:45 | 오혜미
아멘!
자신을 점검해보게 하는 글인것 같네요.
티백 속의 것이 뜨거운 물의 시험을 통해 드러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설때
불에 의해 선과 악한 보고가 드러날 것으로도 비유되는 듯 하네요.
마음의 티백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들로 채워나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늘 유익한 글을 올려 주심에 감사드려요.
2014-05-24 17:16:38 | 이춘옥
아멘!
구정물도 떠서 투명 유리컵에 가만히 놔두면
불순물이 가라 앉아 위에는 깨끗해 보이는 물이 보입니다
막대로 저으면 순간 지저분한 물이 되버리지요.
막대기, 뜨거운 물 .....우리 인생에 피해 갈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필요악 인것 같아요...
항상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2014-05-24 13:17:56 | 이수영
티백은 차를 싸서 넣은 종이 주머니를 의미합니다. 뜨거운 물에 담그면 차가 우러 나오게 되어 있는데 시중에 다양한 종류의 티백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차 맛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자판기 커피를 가장 애용하는 사람입니다. 이 티백은 겉모양만 봐서는 그 안에 어떤 차가 들어있는지 말 수 없습니다. 뜨거운 물에 담그면 종이 주머니에 어떤 차가 들어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죠. 싸구려 차인지, 잘 가공된 고급차인지, 차 향은 어떤지, 차 맛은 어떤지, 차 색깔은 어떤지 알수가 있습니다. 차의 내용물을 알려면 뜨거운 물과 만나게 해 주면 되는 것이죠
마음의 티백은 어떠할까요?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내용물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다면 뜨거운 물?을 부어보면 됩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몰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본인 스스로도 알기 어려운것이 사실입니다. 나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나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나요?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나요? 뜨거운 물이라는 힘든 상황을 직면하면 답이 나옵니다. 이 힘든 상황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고, 사는 장소에 따라 다르고 처해진 상황이나 사람마다 다릅니다. 과거에는 칼과 창으로 억누르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지금 북녁 땅이 그러하겠지요, 물과 빵이 없는 경제적 빈곤 상태 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육체의 질병이나 장애를 갖고 있는 상태일수 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믿음이 있다면 믿음이 드러날 것이요, 불신앙이 있다면 불신앙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는 물질적 풍요가 뜨거운 물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이, 사람들로 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명성이 뜨거운 물일 수 있습니다. 칼과 창을 이겨냈던 많은 사람들이 부와 칭찬과 명성앞에서 마음속 깊숙히 숨겨져 있던 불신앙의 덩어리가 우려 나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지탄과 짓밟힘을 받고 일어선 명성가들이 초기에 숱한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였지만 재물과 명성이라는 뜨거운 물에 그 본색이 드러난 예를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다고 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물을 만나게 하심으로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내기를 원하시고, 그 드러난 것을 통해 나의 태도를 분명히 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믿음의 반응으로 나타난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보상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첫 세대들이 불순종할 것을 미리 아셨지만 38년의 시험의 기간을 허락하심으로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시고 다음세대로 하여금 그들의 전철을 밟지않고 가나안땅에서 상속유업을 받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 시험하지는 않으시지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우리 인생에 뜨거운 물을 만나게 함으로 시험하십니다. 광야의 첫 세대는 실패했습니다. 광야에서 시체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티백에 담아야 할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존귀하신 말씀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소망, 사랑, 복음에 합당한 생각, 말, 태도들, 선한 것들, 의로운 것들, 등등 .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들을 마음에 채운 사람들은 뜨거운 물이 그것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겠지만, 마음에 악한 것들을 쌓아둔 사람은 뜨거운 물이 그 사람을 쓰러트리는 결정적 순간이 될 것입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네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 (신명기 8:2절)
2014-05-24 10:42:11 | 조양교
성경을 읽을수록 우리가 지금 현재 사는것은
이땅에서의 안위가 아닌 영원한 생을 위한 준비기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됨니다 .
각자를 연단하는 것에 사단도 포함된 거겠지요.
365일 묵상 올려주시니 감사해요~
2014-05-24 10:08:27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