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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다니엘 11:32]”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일 뿐 아니라, 성도들의 힘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아는 백성은 강합니다.   1. 지식은 믿음을 낳음 :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롬 10:17).” 믿음이 없는 사람도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겨납니다. 말씀을 통해 얻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믿음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면 그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증가하는 만큼 성장합니다.   2. 지식은 사랑을 낳음 : 지식은 믿음뿐 아니라 사랑도 낳습니다. 누구든 상대방에 대해 뭘 알아야 그 사람을 사랑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에 대해 뭔가 알아야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우리를 위한 그분의 희생과 사랑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만큼 더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3. 지식은 소망을 줌 : 지식은 또 소망을 줍니다. 지식은 소망의 대상이신 주님께서 분명히 존재하실 뿐 아니라,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알게 함으로 참된 소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4. 지식은 인내를 격려함 : 지식은 또 우리에게 인내해야 할 이유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로부터 얻는 유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묵묵히 참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은혜는 모두 다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 온전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서 항상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스펄전의 묵상중.
2014-08-05 18:52:43 | 박진태
"고난중의 감사가 신앙의 진수입니다," 충분히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낮추시고 낮추시고 낮추셔서 이제 더 낮추실것도 없다 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멀었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맨 밑바닥까지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도 제 마음은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속에 있는것을 봅니다. 오, 주여 ~ 내가 나를 누르니 뼈마디가 부서지는 고통중에 있나이다. 나를 도와주소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형제님.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사55:8)
2014-07-28 09:04:42 | 이명석
"주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매..."(신5:24)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거기에 대해 우리가 합당한 반응을 보이기를, 즉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에, 이렇게 타락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먼저 그 길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자아가 옆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도 "믿음이란, 성령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그분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종종 큰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하시는데, 그것은 그 가운데서 그들이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통회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역사하실때 겸손히 비켜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생애가 평탄한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맨 밑바닥까지 낮아져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아를 내려놓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빈곤, 질명, 불화, 파산이라는 고난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험한 길로 인도하셨다면,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고난 덕분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됐으니까요.   여러분은 환난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경험 - 철저히 타락한 자아의 발견, 통회, 그에 따른 권리 포기, 그리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영광...등 - 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형통하기만 했다면, 여러분은 아마 여전히 천박한 신앙 가운데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속에서 여러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에 의해, 여러분은 그분의 눈부신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고난중의 감사가 신앙의 진수입니다.   스펄전의 묵상.
2014-07-28 00:16:01 | 박진태
재창조론을 인정하기 어려운 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님께서 더 언급하지 않으신 replenish에 대해 제 생각을 올려 봅니다. 재창조론에서는 ‘채우다’ 또는 ‘다시 채우다’ 두 가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 ‘replenish’를 구태여 ‘다시 채우다’로 번역하여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이르신 것이 아니라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라고 이르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담과 이브는 그 말씀에 어떻게 대답(반응)했을까요? (1) 예. (2) 아니오. (3) (묵묵부답) 저는 위의 세 가지 중에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반문했을 것 같습니다. ‘네? 다시 채우라고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왜냐하면, 아담과 이브는 이제 막 창조되었고, 창조된 이래 땅을 채운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땅을 채우기는커녕, 아직 첫 아이도 낳지 않은 상태이죠.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는 말씀은 아담과 이브가 적어도 한 번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운 적이 있어야 그들에게 하실 수 있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들이 번성하게 하여 땅을 다시 채우리라’고 하셨다면, 또는 ‘너희들이 번성하면 땅이 다시 채워지리라’고 하셨다면 이치에 맞는 표현이지만,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담과 이브에게 ‘땅을 다시 채우라’고 하셨다면 그들이 무슨 영문인가 의아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되었든 그렇게 말씀하시려면 그 시기는 그들이 막 창조된 때가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흘러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대를 이어 출산하며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서 땅을 채운 후에 아담과 이브만 남기고 다 죽어 없어졌을 때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고 하신 것이 맞는다면, 이런 질문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다시 다산하고 다시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Be re-fruitful, and re-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고 하셨어야 옳지 않은가? - 창 1:22에서는 왜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라고 하셨나? 거기에도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다시 채우고(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fill the waters in the seas)’라고 하시든지 ‘다시 다산하고 다시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다시 채우고(Be re-fruitful, and re-multiply, and refill the waters in the seas)’라고 하셨어야 하지 않나? 이러한 것들을 감안할 때, 저는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가 말의 이치에 맞고 문맥에 어울리는 자연스런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2014-07-21 22:04:48 | 최상만
불볕더위가 이어지는 여름 날씨도 굴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성경을 연구한 귀한 열매를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날씨보다 더 뜨거운 형제님의 열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신자에서 더 나아가 성경을 성경대로 믿으며 그 깨닫고 믿은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그대로 삶에 적용하며 실천하려 몸부림을 치는 참된 성경 신자가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4-07-21 17:37:27 | 김대용
임형제님, 글 잘 읽었습니다^^ 지체들을 더욱세우려하시는 마음이 많이 와 닿습니다. 저도 창세기 1장 말씀들을 저번주에 깊이 묵상했었습니다. 결론은 말씀밖으로 나가면 안된다는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우리는 기록된 말씀과 성령님의 조명아래 하나님의 깊은것까지 깨달아 알순있습니다 하지만, 분량밖의것은, 계시된 말씀에 자고하지않도록 사탄의가시를 가지고 살았던 바울사도처럼 그렇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욥기38장에 아버지께서 땅의 기초들을 놓을때에 우리가 어디있었느냐고 물으시면서 창세기 1장 이전의 것들도 보여주십니다. 더욱 깊은곳까지 그물을 내리는것이 좋지만 , 이세상 모든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오신 그분에 의해 지어졌고,존재하므로(요1:1~5.고전8:6) 모든 초점을 겸손하게 우리 주님께 맞추고 뒤에 있는것은 생각치않고 오직 부활의 푯대,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갈뿐입니다, 물론 재창조론이라는 사탄의 계략에 휘둘릴일도 없을테고요^^ 이상은 모자란 제 소견이구요, ^^ 지체들의 공부를 위해 올려주신 글 감사합니다. 형제님^^
2014-07-21 14:33:41 | 이명석
 ◉ 재창조론(간극이론)에 관하여     성경신자들 가운데도 간극이론 또는 재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간극이론은 진화론자들에 맞서서 성경의 신빙성을 옹호하고 당시의 많은 신자들에게 보호장치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되어 함께 나눕니다.   아래 글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  < 재창조론의 주요 주장 내용 >   재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세기1장 1절과 2절 사이에 아담 이전의 다른 인류가 존재하였고, 그 세상이 노아홍수와는 다른 종류의 물 심판으로 멸망했다고 보고있다. 이 기간에 천사들의 창조와 사탄의 타락이 있었고, 매우 길고 긴 어쩌면 수십억 년의 기간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는데, 그 주장의 근거 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창1:1에서 창조된 땅이 창1:2에서 형태가 없어지고 비어지게 되었다는 점. (결국 창세기 1:3 빛의 창조 시점부터 첫째 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둘째, 창1:28(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replenish).)에서 replenish의 의미를 ‘다시채우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아담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아담부터 시작하여 지구를 채우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벧후3:5~7에는‘그때 있던 세상의 멸망’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점.   넷째, 사14:20(네 백성), 21(그들) 등 사탄으로 인하여 망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      이 외에도 몇 가지 설명들이 있지만 위 내용들에서 파생되거나 이것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것들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 재창조론에 대한 반론 > 1. 창1:2에 대하여 ①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것의 성경적 의미   먼저 재창조론에서는 형태가 없어지고, 비어졌다고 보고 있으나, 성경은 (그냥 단순하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정확하게 동일한 표현이 예레미야 4:23에 나온다. 예레미야 4장도 재창조 이전의 세상에 대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예레미야 4장 3절과 16절은 이 내용이 예루살렘 거주민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절에서 예레미야의 애가 끓는 이유도 ‘이전세상’의 멸망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 때문이다. 29절에서 이 멸망 때에 사람들이 수풀로 피해 달아나고 바위들로 기어오르는 장면을 보아도 이것은 재창조론에서 말하는 물의 넘침으로 인한 멸망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형태가 없고 비어있었다’를 다음과 같이 볼 수 밖에 없다. (렘4:23) 형태가 없다. (☞ 땅의 생김새(모양)가 일정하지 않다.) (렘4:27~29) 비어 있다 (☞ 생명체를 기준으로 그 황폐한 상태) (창1:2) 땅은 물로 덮여 있어서, 그 생김새(모양)를 일정하게 갖추고 있지 않으며, 아직 살아있는 어떤 것도 없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님. ② 하루의 구성에 대한 성경기록     첫째 날이 재창조론 주장과 같이 창세기 1:3(빛의 창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첫째 날은 성경기록과 같은‘그 저녁과 아침’이 되지 못하고 ‘그 아침과 저녁’이 되어버린다.  1절과 2절이 첫째 날 창조에 포함되어야 어둠이 먼저 위치하고 빛이 창조됨으로써 '그 아침과 그 저녁'이 성립하는 것이다.    2. replenish에 대하여   20세기 초반 들어서면서 re를 '다시'나 '강조' 접두어로 보는 일부 사전도 있으나, 그 이전에는 re가 '다시'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고, 특히 가장 권위있는 사전 중 하나인 Oxford English 사전은 replenish의 're'가  '다시'의 의미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3. 벧후 3:5~7에 대하여   벧후3:6에는‘그 때 있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7절에는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3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어서, 이 대목만 보면 3종류의 세상으로 세팅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맥 전체를 보면 벧후 3장에서 다루는 '그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해 진다. ① 이 내용을 기록한 이유와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그 때’의 의미 (벧후3:3,4)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벧후3장에서 베드로 사도는‘조상들이 잠든 이래로’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의견에 대한 반박을 하고 있다. 즉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아담 이후) 있었던 세상의 격변의 예를 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 또는 마지막 때에 비웃는 자들이 말하는 조상들은 누구일까? 아담 이전의 인류가 있었더라도 그들은 현생인류의 조상들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의 넘침으로 인한 세상의 멸망은 아담 이후에 즉 노아 때 일어난 홍수를 말한다. 벧후 3장에서의 '비웃는 자들'이 부정하고 싶은 것은 자기 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전 세상의 격변'이 아니다. 자기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영원히 격변 없이 그대로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며, 베드로 사도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의 '격변'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② ‘땅이 물 가운데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의 의미 - 이 장면을 재 진술하는 다른 구절들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자. 이 내용과 동일하게 땅이 물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시편 104:6~9에서 기록하고 있다.  전 우주적 물이 아니라 지구를 감싸고 있는 바다를 의미한다.‘땅이 물에서 나왔다는 것’은 바다와 땅의 분리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24:2) ③ ‘(벧후3:6) 물의 넘침(overflowed)으로 그때 있던 세상의 멸망(perished)’의 의미 - 여기서 멸망은 물의 넘침으로 인한 것이다. 미래에 있을 10~12절과 같은 원소들이 녹고 해체되는 소멸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는 것은 창세기 7:23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면 위에 있던 모든 생명체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의 날짐승에게만 해당된다. 따라서 창1장처럼  별들이나 바다생물들이나 식물들을 재창조할 이유가 없다. ④ 참고로 동일한 베드로사도가 기록한 벧전3:20에는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들은 여덟 혼이라고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4. 이사야 14:20의‘네 땅, 네 백성’에 대하여 - 사탄으로 인하여 망한 사람들 : 사14:20(네 백성), 21(그들) ⇒ 시21:10   이사야 14:20의 ‘네 백성’은 재창조 이전의 사람들이 아니라 타락한 현생인류다. 그들(네 백성)에 대한 언급이 21~25까지 뒷부분에서도 계속되는데, 특히 25절에서는 앗시리아 사람의 징벌 때에 그들 가운데 일부가 구출된다는 점을 언급한 것을 보면 이들은 재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완전히 멸망했다는 그 이전 인류가 아니다.    5. 기타 재창조론이 설명 할 수 없는 것들 ① 전 우주적, 원초적 빛 자체가 창세기 1:3에서 비로소 창조되었다. 따라서 창1:2 이전에 ‘이전 세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암흑 공간과 암흑 지구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원초적 빛도, 해도, 달도, 별들도 없었으며, 이것은 어떤 생물(동․식물)도 생존할 수 없는 상태다. 이 지적에 대하여 재창조론자들은 이 때는 계시록 21:23에 나오는 빛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빛이 되실 수 있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극도의 사악함 때문에 한 명도 남김없이 멸망당한 존재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 가운데 거했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계21:27에 보면 더럽게 하는 것, 가증한 것, 거짓된 것은 이 빛(하나님 자신)가운데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을 굳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시킬 필요가 없다. 바로 죽게 되기 때문이다.(출19:21) 상식적으로도 이런 극도로 사악한 사람들과 계21:23의 하나님의 본성을 입게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천사와 같이 변화된 - 요일3:2,3) 영원에 들어간 하나님의 아들들(최종 구원된 사람들)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인류(구원의 기회를 부여받음)보다 더 극심하게 멸망당해야 하는 사악한 존재들과 뒤섞여 빛으로 기능하는 세계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② 성경은 한 번 땅의 기초가 놓인 후 땅의 기초 자체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104:5) ③ 창조와 안식을 기술한 구절과 맞지 않는다. ○ 창1:1 처음에 하나님께서‘하늘과 땅’(the heaven and the earth)을 창조하셨다. ○ 출20:11 엿새 동안에 주가‘하늘과 땅’(heaven and earth)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 출20:11에서 정관사 the가 heaven에도 earth가 빠져 있지만 벧후 3:7에서는 ‘지금의 하늘과 땅(the heavens and the earth)’을 지칭할 때 다시 정관사를 사용 하고 있기 때문에 정관사 유․무는 1611년 당시 혼용되었다고 봐야한다.   ④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재 진술하는 많은 구절들에서 재창조는 한 번도 언급 되지 않았다. (시136편, 욥38장, 시24장, 사14장, 시104장) ⑤ 성경 전체의 계시 맥락에서도 재창조(지구의 reset)는 전혀 엉뚱한 내용이다. 구속사역을 거쳐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가족공동체(엡3:15, 계21:22)를 완성하는 것이 성경 속 하나님 계획의 개요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완전히 실패하여 갈아 업고 다시 reset하는 불완전한 분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분의 완전하신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한 단 하나의 완전한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인류의 타락까지 포함하여….    ******************************************************************************************* 이 문제는 우리 신앙의 결정적인 논점이 되지는 못합니다. 즉 이것과 다른 내용을 믿는 형제들과도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는 모든 초자연적이고 우리 이해를 뛰어넘는 성경기록들에 대한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 되므로 기록된 대로 단순하게 믿는 명확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내용이 저와는 다른 방향에서 재창조 교리를 바라보는 형제들에게도 진리 조명에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4-07-21 11:42:13 | 임원섭
글을 읽으며 절로 세상 왕국에 거주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열망하는 성도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문득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살아 있는 옛 본성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현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조차 몸부림을 치며 갈등하고 고뇌했던 현실을 망각하는 그 순간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위기의 순간이겠지요. 깊은 묵상의 글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07-19 13:05:31 | 김대용
형제님 좋은 묵상의 글 감사합니다. 마음 속 깊이 새기며... 하나님의 왕국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그 길을 선택 하도록 이미 제 마음을 열어주시고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2014-07-19 11:26:36 | 윤영원
샬~롬 오늘 이아침 공감하는 좋은글 올려주심에 감사합니다.. 제가 느끼는 세상왕국과 하나님왕국의 차이점 하나를 더 말하라면 세상왕국은 겉사람이 사는곳이고 하나님왕국은 속사람이 사는곳이라 말할꺼 같습니다~ 결국 다 비슷한 말이 되겠지만요~^^ 키다리와 땅딸이 이야기가 하나님왕국에서뿐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 사랑침례교회에서도 매시간 적용되는 현재의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 생각도 해봅니다~ 킹제임스성경과 정동수목사님의 바른말씀은 제게 영혼의 자유함과 기쁨과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까지 너무나 많은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심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2014-07-19 10:23:15 | 이명숙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소속되어 있으나 몸은 세상왕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왕국의 영향력을 받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의 차이점을 스쳐지나가는대로 기술해 보고자 합니다. * 세상왕국은 내가 왕이 되어 통치하려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되는 곳입니다. 너무 당연하죠^^ * 세상왕국은 죄와 사망의 법이 지배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들어갔습니다. * 세상왕국은 탐욕이 지배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성품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먹고 마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의와 사랑과 화평을 좇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내힘으로 사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사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내것을 채우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내것을 비우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나를 주장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인색한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베푸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주고 받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누군가에에게 흘려보내고 누군가에게 받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사고 파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거저주고 거저 받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믿음으로 사는 곳입니다. * 세상왕국은 내가 주인인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이 주인인 곳입니다. 실질적인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죠^^  하나님의 왕국에는 키다리와 땅딸이가 있답니다. 크고자 하지만 하나님이 낮추시는 땅딸이가 있고, 작아지고자 하지만 하나님이 높이시는 키다리가 있답니다. 세상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 세상왕국의 종착점은 영원한 멸망이고, 하나님의 왕국의 종착점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수하게 보존해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지식의 풍요함을 받은 사람들이 삶에 있어서도 더욱 지혜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까지 연결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열매맺는 좋은 땅이 되기를 이 아침 시간에 소망해 봅니다.    
2014-07-19 09:22:09 | 조양교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그분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효력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면서 믿음이 없다면 그 순종은 겉치레에 불과할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레일과 같이 함께 갈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의 열매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4-07-19 08:54:04 | 조양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휴가를 다녀오셨네요 박목사님께서도 혼자 지내시기 어려웠을텐데 항상 밝은 모습이셨습니다. 금요모임때 뵙게되어 반가웠습니다. 오혜미 사모님도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이 힘이 없어 보입니다.^^ 부부가 함께 할 때 우리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2014-07-19 08:44:58 | 조양교
사모님을 통해 캐나다가 눈에 선한 것 같습니다. 여행을 가려면 여러가지가 다 맞아야 하는 것인데 참 부럽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인의 본분과 선한 마음과 열정을 저희 어린 자매들에게 솔선해서 실천해 보이시는 사모님이 계셔서 참 좋습니다. ^^
2014-07-18 18:00:05 | 김경민
자매님 그간의 휴가 잘 보내고 오셨지요? 충전된 마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길 기대해요^^ 외국에 나가게 되면 더욱 교회에 대한 사랑이 샘솟고 궁금하고 하셨지요? 이번 주일엔 밝은 미소와 함께 뵈어요~ 더 젊어지셨을 듯 ㅎㅎ
2014-07-18 08:03:01 | 이수영
저는 은혜스러운 소구룹 모임에 참석을 못해서 아쉬웠는데 자매님의 생생하게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글 너무 감동이내요. 그래요 소그룹으로 모이니 아무 거리낌없이 술술 간증가 지나온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신앙 문제를 이야기 할수있어 참 좋은것같아요 자매님의 리더로 소그룹 모임이 은혜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며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2014-07-18 07:09:06 | 윤정용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예리하게 현시대 교회를 모슨된것을 이야기하셨내요. 왜/ 라는 말을 잘 세겨 들었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내 주위에 사람들을 섬기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수 있을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봅니다. 왜 를 항상 바르게 되세겨 봐야 되겠내요. 많은것을 생각나게 하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2014-07-18 06:54:28 | 윤정용
맞습니다 .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것은 마귀가 아니라 , 세상의 염려인것이 분명합니다. 6. 25 를지나 1.4 후태때 포로로 이북에 끌려가 30 개월 동안 포로 수용소에 있을때 그안에서 동료 한사람이 매일같이 가족걱정 앞날을 염려 하다가 그 염려와 걱정으로 인해 입술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가더니 결국은 음식도 먹지못하고 그 수용소 안에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남편 한태서 들었습니다. 현실에 충실히 적응하고 견디어낸 동료들은 포로 교환때 다시 가족을 품에 돌아왔답니다 30 개월이란 긴세월동안 고통을 견디어냈지만 , 그만큼 염려는 우리를 죽게 만들고 말지요.
2014-07-18 06:36:25 | 윤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