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한 목욕물처럼 포근한 형제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이효석 작가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가 떠오릅니다.
벌써 11월도 다 지나가고 이내 거리를 덮었던 낙엽들도 시나브로 사라져 갑니다.
작은 낙엽 하나에도 창조의 섭리와 인생을 향한 진한 교훈이 담겨 있음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11-25 22:30:03 | 김대용
새삼 계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가 되네요.
어느새 11월 말-
이제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네요.
한해를 얼마나 주님의 자녀로서 살았는지......
가을의 낙엽은 사색을 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네요.
2014-11-25 15:31:11 | 이수영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때 주님이 나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더욱 더 또렷이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14-11-25 14:27:14 | 이정희
카리브 섬 여행은 어찌되는건지..
할아버지가 괘씸해서 할머니 혼자 가실려나?^^
보도블럭위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보며 겨울로 들어서는 초입에 서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사색하기 좋은 계절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편지에 공손히 답장해야겠습니다.
2014-11-25 14:18:13 | 이정희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결국은 자기를 가둬둔다는 반전의 교훈이 잊혀지지 않을 거 같아요.
성화되어간다는 것이 참 갈수록 망망대해임을 자꾸 느끼게 됩니다...
2014-11-25 12:27:09 | 오혜미
그 할아버지 어떻한대요. ㅜ.ㅜ
남편이 물건을 사오래서 나왔다가 낙엽이 곧곧에 뒹구는 광경을 보고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같이 보고 즐겨줄 사람이 없네요. 갑자기 항시 바쁘게 일하는 남편에게도 미안해지고요.
이제 이 분기도 막바지에 들어서 추수할때가 되고 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잃은것보다 얻은게 많았다는 생각도 들고......가족과 함께 이겨울 내실을 다져가자구요. 좋은글 감사해요.
2014-11-25 11:55:24 | 이청원
이른 아침, 여느 때와 같이 둘째 딸과 함께 출근 길에 오른다. 어둠이 걷히고 어슴프레 밝아진다. 몸에 한기가 쭉 밀려온다. ‘좀 춥지않니?’ ‘아니,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어제보다는 추운 것 같은데...’ 하면서 말을 흘리고 차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거뭇 거뭇, 축축하게만 보인다. 사람과 나무는 반대다. 날이 추워지면 사람은 두꺼운 옷을 껴입지만 나무는 여름내 화려하게 입었던 옷들을 떨구어 낸다. 나무에게 여름이 성장의 기간이라면 겨울은 내실을 다지는 기간이다. 여름내 늘려 놓았던 나뭇가지의 표피를 단단히 여며 나간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날씨가 의외로 푸근하다. 센티한 마음에 주변 공원 길을 걸었다. 낙엽 떨어지는 풍광이 장난이 아니다. 도로와 보도위 낙엽은 쓸어담을 엄두가 나지 않고, 간간이 빌딩 주변의 경비원들의 손길이 분주히 움직인다. 공원 한 귀퉁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조그만 손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에 흥얼댄다. 평일인데 등산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다.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가을을 한껏 느끼려는 것일까?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하나님앞에 가서 항의?를 했다고 한다. 할 일도 많은데 왜 갑자기 데려오시면 어떻게 하냐구. 그 항의에 하나님은 수많은 예고를 해주었다고 답했다. 이 사람은 눈이 동그레 졌다. ‘봄이 되면 풀과 꽃을 피우고 나무에 잎사귀를 돋아나게 했다. 여름이면 생명의 풍성함을 노래하게 했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게 하고, 겨울이면 화려했던 모든 것들을 거둬들이게 했다. 해와 달과 별들을 통해 시절을 알게 하고, 생명체들의 생성을 통해 삶과 죽음의 때를 알려 주었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시간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때를 통해서 편지를 쓰시기도 하며, 시를 쓰시기도 하며, 노래하시기도 하신다. 삶을 보고 죽음을 보지 못하며, 어두움을 보며 빛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일생에 한 면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다.
최근에 읽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 노부부가 있었다. 두사람은 60번째 생일과 40주년 결혼 기념일을 동시에 맞이했다. 어느 조용한 저녁, 두사람앞에 요정이 나타났다. ‘두분은 40년동안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고 아끼며 사셨기 때문에 소원을 한가지씩 들어드리겠어요’ 신실하며 사랑스런 아내였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멋진 유람선을 타고 로맨틱한 카리브 섬을 여행할 수 있는 티켓을 원했다. 와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할머니의 손에 티켓이 쥐어졌다. 다음으로 요정은 할아버지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30년 젊은 아내와 살고 싶어요’ 요정은 코를 만지작 거리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90살로 변해 버렸다!
만약에 요정이 할아버지에게 먼저 질문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욕심은 또 다른 절망을 맛보게 한다. 편견과 욕심속에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통해 죽음 저편의 삶을 생각하고, 어두움을 통해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해야 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금도 편지를 쓰신다. 새들의 노래소리와 떨어져 뒹구는 낙엽소리와 함께...
2014-11-25 11:36:12 | 조양교
형제님 글을 접할때마다 '아..이 길이 맞지..' 지쳤을 때 힘이 되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2014-11-25 10:54:43 | 목영주
올려주시는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2014-11-25 08:58:45 | 김혜순
"여자가 산고를 겪으면 자기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거니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세상에 사람이 난 기쁨으로 인해 다시는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부모가 자녀를 기르며 겪는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정말 고통을 피하며 산다면 결혼해 가정을 일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결혼하고 자녀를 낳습니다.
고통을 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불순종때문에 오는 고통도 있지만 고통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만일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면 통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질병과 노쇠의 고통은 분명 궁극적으로는 죄의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통은 훨씬 숭고한 사역을 감당합니다. 고통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우선 고통은 정화의 위력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였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고통 자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 고통은 우리를 깨끗게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둘째 사역은 그리스도께 동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때 여러분과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일을 전부 겪은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셋째 사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일부러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 이름을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의 고통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앞둔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사 그분을 놀라운 영광으로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습니다.
고통은 우리을 정결하게 합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인을 예수님과 더 가까워 지게합니다. 고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영광과 영예를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많은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사도바울은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를 계속 겸손하고 쓸모있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여느 그리스도인 처럼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셨지만 그 필요는 다 채우셨습니다. 연약함과 고난이 오히려 능력과 영광이 되도록 사도바울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내게도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전폭적으로 그분께 내어드릴 때에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4-11-25 00:40:24 | 박진태
저또한 작은 한 동심원으로 ...
2014-11-23 22:56:15 | 남인수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편42:5)”
우울증은 현대 세계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삶의 이유와 희망이 사라진 탓이겠지요. 우리는 우울증을 극복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대언자 엘리야가 갈멜산 싸움 후에 얼마나 낙심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숙면과 좋은 음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상하게 엘리야를 챙기셨습니다. 휴식으로 힘을 얻게 하신 후에야 그에게 다시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중에도 과로 때문에 낙심과 절망의 나날을 지내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잘못된 신체 습관이 우리를 우울증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사탄의 공격의 결과일 때도 있습니다. 결과는 거의 언제나 죄책감, 패배의식, 절망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적 원인으로 우울증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울증은 대개 일정한 방식을 따릅니다. 우선은 자기보호로 시작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은 상처를 받습니다. 이 상처는 여러분의 평안과 즐거움을 앗아가려 위협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상처에 정직히 직면하여 해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주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연민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자기처벌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뒤로 물러나 자신을 보호하고, 외롭게 홀로 남은 자신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신을 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울증에는 답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오셔서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우울증을 이겨내시도록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공격이 느껴지는 즉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의 모든 상처를 그분께 아뢰야 합니다.
둘째 단계는 시선을 나에게서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연민은 여러분과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태도입니다. 자기연민과 싸울 힘을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시편 42편과 43편에 시편기자는 “내 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하리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기에 내가 나를 벌할 필요가 없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8: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값을 짊어지셨는데 여러분이 자신을 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4-11-22 00:53:28 | 박진태
"내가 진리 안에서 너희를 사랑하며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안 모든 자도 그리함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할 진리로 인함이로다.(요한2서 1-2)"
일단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 진리에 복종하게 되면, 그 누구도 그 진리를 우리에게서 몰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진리를 손님처럼 대하지 말고 주인으로 모셔서, 항상 진리의 말씀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진리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진리가 완전히 내 것이 되게 하는 비결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붙잡고 의지할 생명줄로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요, 우리 나그네 길의 동반자요, 우리가 죽을 때의 안내자요, 우리가 영원히 부를 노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 형편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전적 타락의 진리는 죄로 물든 우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진리는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는 사랑의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청산하셨다는 대속(代贖)의 진리는, 우리를 죄에 대한 형벌에서, 그리고 죄에 관련된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줍니다. 자유 중에서 최고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귀한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영적 양식입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우리가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잘 자라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하셨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갓 태어난 성도는 아이가 잘 먹어야 쑥쑥 자라나듯이, 진리의 양식을 정말 잘 챙겨 먹어야 신앙이 제대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이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0)"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적 식사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잘 먹지 않으면 절대로 건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욥도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0)" 고 했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보다도 말씀의 섭취를 더 소중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영적 건강의 비결입니다. 성도들이 갖고 있는 영적인 문제의 거의 대부분은 영적 식사를 게을리 한데서부터 비롯된 것들입니다.
성경 읽기를 매일 규칙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성경 읽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고정해 놓으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적어도 하루에 한 장 이상 씩 꼭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긴밀히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서, 그 말씀을 늘 묵상하고, 항상 철저히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 내가 주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편119:97, 103).
"내 명령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스펄전.
2014-11-18 01:05:34 | 박진태
제가 마음으로 늘 새겨야 할 저에게 너무나도 합당한 글입니다.
저도 영적 수준이 낮아서 혀를 잘 못 다스려서 말하고 나서 두고두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자책도 많이 하곤 했는데 글을 읽으니 제 영적 수준이 어리기 때문이었군요.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할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4-11-17 16:08:36 | 이정희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약 3:2)"
우리가 얼마만큼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깊숙히 연합되어 있으며, 또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지는 우리의 '혀'가 말해줍니다.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자기 혀를 절제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소위 신실한 사역자들마저도 함부로 말함으로 자신의 '육'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만일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절제한 혀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니라.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서 그와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지옥 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약 3:6)"고 했습니다. '본성의 행로'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성향을 말하는데, 혀는 잠자고 있는 이 본성에 불을 붙여 갑자기 확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평온한 상태에 있다가도 어떤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확 끓어올라 폭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지옥의 무기는 '혀'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님께서는 부당한 고소와 심문을 당하시는 중에도 놀랍게 침묵을 지키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을 나타내셨습니다.(눅 23:9)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음과 연합된 성도들은 주님처럼 침묵함으로 '혀'의 요란함과 분쟁을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혀는 아무 때나 옛사람의 본성에 불을 질러, 우리 안에 분노와 증오의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몹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혀를 절제함으로 자신의 영적 수준을 드러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 깊숙이 거하여 혀를 다스리는 가운데, 요란하며 조급하고 분노에 찬 말들을 주님의 침묵으로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완전함은 우리의 기도의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는 힘은 오직 기도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디모데전서 2:8)"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우리의 영적인 위치를 확실히 지키도록 하십시오. 말실수 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오 주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편 141:3)"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1-14 23:54:40 | 박진태
저도 어떤 문제를 만나면 입으로는 주님을 찾지만 인간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보고 총 동원해 보다가 결국 그것으로 해결이 안될때에야 비로소 마음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2014-11-11 15:14:13 | 이정희
"우리가 전에 왕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그분을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나 그분의 권능과 그분의 진노는 그분을 버리는 모든 자를 향하나이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원수를 막고 우리를 도와줄 병사와 기병의 무리를 왕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이라.(에스라8:22)"
예루살렘을 향해 일행들과 함께 멀고 험한 길을 떠나는 에스라로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호위병이 함께 따라가 준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거룩한 부끄러움 때문에 단 한 명의 호위병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이방국의 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 주시지도 않는 분이라고 생각할까봐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인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인간의 도움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행은 사람들의 어떤 보호도 받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해서 그분의 보호를 받으며 담대히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에스라처럼 하나님을 위해 이런 거룩한 부끄러움과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성도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조차도 사람의 도움을 너무 의지하다가 자신의 간증에 먹칠을 하곤 합니다.
가이사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주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교회를 위해 주정부에서 기금을 받아 내려고 그렇게 애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수 없는 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후원자는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만큼 복된 일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의지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도 그렇게 급히 친구나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가시겠습니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적인 수단도 사용해야 합니다." 라고요? 물론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수단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도 인간적인 방법을 너무 많이 의지해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을 다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면 그 믿음의 분량대로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간증이 아주 많습니다.
스펄전.
2014-11-10 23:57:26 | 박진태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마20:22)"
영적생활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시는 곳을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 혼란을 겪고 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보이지 않을 때(눅11:5 ~ 8) :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에게 무심해 보이는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때로는 하나님아버지도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무심하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모든 것이 밝혀질 때가 올 것입니다. 더 깊이 알고 온전히 하나 되기까지는 우정에도 어두운 날이 있고, 사랑에도 고통스런 기다림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전혀 보이지시 않을 때도 그분을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그늘이 덮일 때(눅11:11 ~ 13) : 하나님께서 때로는 얼핏 냉담한 아버지로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구하는 자마다 받고 찾는 자는 찾으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10절)" 지금은 하나님아버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지만, 왜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겪어야 했는지 언젠가 밝히 보여주실 것을 믿고 인내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심이 생길 때(눅18:1 ~ 8)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어떤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에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꼭 붙잡아 믿음 안에 더욱 굳건히 서십시오.
지금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그 일을 위해서라도, 그보다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PS "하나님 형상닮게 모난 나를 연단하실때"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시고, 나는 고난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내게 낮은 마음가지게 하시려고 좁은 길로 인도하실때 하나님은 은혜라 부르시고, 나는 연단이라 부릅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나를 떼어 놓으려고 부와 명예를 풍족히 갔다줄때, 하나님은 시험이라 부르시고, 나는 축복이라 부릅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2014-11-04 22:29:08 | 박진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구원의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세상이 점점더 악해지고 사나워지고 살기 어려워져 가는것을 보면서도 짙은 어둠후에 여명이 밝아오듯 우리 주님께서 오실날이 가까워 옴을 알기에 두려움에 빠지지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평안히 쉴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2014-11-04 15:25:26 | 이정희
주님은 모든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에 오래 참으시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결말이 되어 참으로 기쁘셨겠네요~
더불어 상급도 많겠구나 ~하는 생각도 ^^
특별한 경우라 잊혀질수 없는 아름다운 마침표네요.
2014-11-03 17:30:11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