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놀랍고 감탄스런 논고입니다.
우리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대답들을 한꺼번에 정리해 주셨네요.
맑은 정신과 부드러운 심정으로 잘 썼다는 표현에 저도 공감백배합니다.
형제님 부지런히 주변의 복잡한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우리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거든요..ㅠㅠ
2014-10-24 08:01:25 | 오혜미
긴 답변을 써주셔서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믿음이라면 "(시12 ;6.7)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라는 말씀을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킹제임스 흡정역 성경을 만나기 전에는 성경이 왜 이렇게
기록 되었을까 했는데 지금은 그 의문이 다 풀렸습니다. 보존된 바른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
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어 마음속이 시원하고 기쁩니다.
바른 신약 교회를 하기 위해 애쓰시는 정동수 목사님을 볼 때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는지요.!
그 목사님 밑에서 배운 형제님의 글을 읽을 때 스승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네요. 긴 답변을 통해 많이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2014-10-24 06:42:07 | 윤정용
하나님의 단순하지만 명확하고 완전하신 말씀에 믿음의 기초를 동여매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길을 따라 걷는 것....
처음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주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여 걷는 길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스스로 자만에 빠져 지뢰밭을 밟기도 하고
혹은 사탄에게 생각을 내어주어 다른 길로 걷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합니다.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믿음의 기초가 명확하다고 생각함이
혹시 혼자만의 착각인지 아닌지 되짚고 또 짚어 봅니다.
2014-10-23 22:54:29 | 태은상
맑은 정신과 부드러운 가슴으로 기록한 훌륭한 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저와 같이 글 솜씨가 부족한 성도들을 잘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패스터 정동수
2014-10-23 17:25:50 | 관리자
존 맥아더 목사의 구원론과 오래된 사본에 관한 논담
갈수록 짙어지는 가을 단풍에 웬일인지 하염없어지는 계절입니다. 그동안 안개 자욱한 삶의 골짜기를 지나며 어찌어찌 살다 보니 제법 오랜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연히 메일을 통해 접하게 된 한 자매님의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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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신지요? 저는 정동수 목사님의 유튜브 설교와 성경 강해를 통해 바른 말씀을 듣고 기쁨이 넘쳐나는 자매입니다. 저는 요즘 목사님을 영상으로 거의 매일 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성경 강해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와 킵바이블을 통해 듣는 목사님의 성경 강해와 비슷한 것 같아서 듣다가 몇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첫째, 존 맥아더 목사님의 구원론 중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분명한데 그렇게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감지됩니다. 이 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둘째, 존 맥아더 목사님은 마가복음 말미 16장 9절 이하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사본학적으로도 오래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나와 있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어째서 킹제임스 성경은 후대에 첨가된 이 구절들을 받아들였을까요? 또 사본은 오래된 것일수록 항상 옳은 겁니까?
귀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답변을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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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매님의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질문에 답변을 드리고 이어서 이것과 연관되어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 놓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존 맥아더(John Fullerton MacArthur, 1939~) 목사님이 얼마나 저명하고 대단한 사람인가부터 간략히 소개합니다. 5대째 목회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내 저명한 신학대 중 하나인 탈봇신학대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 썬 벨리에 위치한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부임해 오직 설교 역량으로 1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사람입니다. 또한, 1985년부터 매스터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며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고 여러 기독교 서적을 저술했습니다.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를 성경 해석에 관한 한 현존하는 최고의 설교자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강해 설교의 대가, 진리 수호의 백전노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목사님입니다.
이제 막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성경 신자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도 이처럼 현존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이라 할 존 맥아더 목사의 주장에 흔들리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분의 명성과 권위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조건 없이 모두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건 안될 일입니다. 잘못된 자신의 가르침이 가져올 광범위한 피해까지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 신자 측면에서 볼 때 존 맥아더 목사의 문제점을 잘 정리한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존 맥아더의 두 가지 오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077
윗글의 내용을 정리하면 존 맥아더의 문제점은 ‘예수님의 피는 보배롭지만, 그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성경 신자들과 달리 천사가 아닌 경건한 셋의 후손으로 해석한다는 겁니다. 또한, 가장 큰 문제로 국내에도 번역된 그의 저서 ‘참된 무릎꿇음’등과 설교를 통해 ‘Lordship salvation(주재권 구원론 혹은 주 되심 구원론)’을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구원론은 극단적 칼빈주의 구원관으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점차 영적으로 성숙해지며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구원받는 것, 즉 구원과 성화를 잘 구분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구원받음에 있어 ‘믿음 더하기 행위’를 요구하는 비성경적 구원관입니다.
본문 밑에 달린 댓글들도 잘 읽어 보시면 존 맥아더 목사의 문제점에 대해 이해를 깊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존 맥아더는 개혁주의(칼빈주의)신학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국내 장로교 목사님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또한 부흥과 개혁사 같은 본격 개혁주의 출판사에서 존 맥아더의 저서 여러 권을 번역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가 언급되었거나 관련 있는 아래의 글들도 참조하십시오.
*폴 워셔와 Lordship salvation(로드십 혹은 로드쉽 구원)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761
*칼빈주의(개혁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47
*구원 취소의 이단 교리가 퍼지는 이유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536&page=8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는가?(Do We Really Know the Gospel?)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82&page=
링크 걸어 놓은 글들을 다 읽으시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읽어 보시면 메일로 질문하신 자매님처럼 존 맥아더 목사의 가르침으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 그럼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당대 최고의 설교자이자 훌륭한 성경교사요 신학자로 정평이 나 있는 존 맥아더 목사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16장의 9~20절은 최초에 마가가 마가복음을 집필한 뒤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라 가르칩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지금까지 발견된 사본 중 기록 연대가 오래된 사본에 이 구절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혼란은 아래의 글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8장: 본문 문제 3, 마가복음 16장 9-20절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28
*마가복음의 마지막 12 구절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530
윗글들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가복음 16장이 8절에서 끝나고 9절 이후부터는 확실하지 않다고 믿는다면 누가 보아도 마가복음의 결론은 완결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기록한 복음서가 이렇게 갑자기 모호하게 끝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를 포함해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 본문 학자들이 내린 결론을 따라 본래 마가복음의 결말 부분은 손실되거나 했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16장 9절부터 20절까지는 마가가 아닌 후대의 누군가가 첨가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성경 보존의 교리(시12:6-7)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 신자는 아무리 대단한 신학자와 목사, 저명한 성경교사가 주장한다 해도 절대 이렇게 성경과 어긋나는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더불어 ‘마가복음의 마지막 12 구절들’이란 글에서 논증된 것처럼 마가복음 16장이 본래 8절까지만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신약성경 전체와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하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래된 사본일수록 더 정확하고 믿을만하다는 존 맥아더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십시오.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45
위 긴 글에서 ‘오래된 사본’에 관한 내용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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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천주교회(로마 카톨릭)의 성경 본문 비평에는 내재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뒤늦게 후대에 기록된 사본들에는 필사자들의 실수가 축적될 가능성이 크므로 기록 연대가 오래된 사본일수록 성경의 원문에 더 가깝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 비평가들은 후대의 사본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상대적으로 수가 훨씬 적은 오래된 사본에 더 많은 신뢰와 권위를 줍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제 사본학계의 주류에 있는 다수의 사본학자들 또한 이러한 주장을 지지합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그들이 가장 신뢰하는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에 보존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산 동방 정교회 수도원에 보존된 ‘시내 사본’입니다. 이것들은 주후 4세기경 필사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초기 교회들이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같은 소수 사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거의 모든 곳에서 공인 본문 사본만을 사용하였고 그 사본이 닳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조심스레 그것을 필사하고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기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하던 오래된 사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워낙 많은 교회들이 이런 사본들만을 사용하였으므로 이런 계통의 사본들은 현존하는 사본들의 99%를 차지할 정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 팔레스타인 등의 기독교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됩니다.
반면에 사실상 기독교를 타락시켜 중세 암흑시대가 시작하는 기반을 닦은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의 꼭두각시였던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등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 바티칸 도서관과 시내 수도원에 간직되어 왔습니다. 또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값싼 파피루스에 대부분의 사본들을 필사하였기에 이것들을 오래 보존하기 어려웠으나 바티칸 사본 등은 벨럼이라는 가죽에 필사되어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개역성경이나 현대 역본들의 각주에는 종종 “더 좋은 사본 혹은 더 신뢰할 만한 사본 혹은 더 오래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언급되는 ‘더 좋은 사본’, ‘더 신뢰할 만한 사본’, ‘더 오래된 사본’은 하나같이 천주교회의 소수 사본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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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오래된 사본일수록 더욱 신뢰할만하고 권위가 있다는 주장은 얼핏 타당한 것 같지만 사실 기독교와 사본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얼마나 헛된 믿음인가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새로 발견되는 사본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합니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98
*영화: 어둠 속의 등불(A Lamp in the Dark): 킹제임스 성경과 교회의 역사(영화 후반부에 ‘바티칸의 비평 본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과 현대 역본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시청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4&write_id=30
너의 믿음의 기초를 어디에 매어 놓았는가?
이제 순수한 마음으로 메일을 보내주신 자매님의 질문에 신실한 분들의 훌륭한 글에 힘입어 부족한 답변을 갈무리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왜 존 맥아더처럼 대단히 탁월한 지성인이 매우 치명적이라 할 비성경적 구원론과 잘못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설명했지만 존 맥아더는 저 또한 배우고 싶은 점이 많은 뛰어난 설교자요 세상이 인정하는 기독교계의 거물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저 오순절 은사주의자나 번영신학 따위를 추구하는 속된 기독교계의 거물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성경의 진액을 잘 뽑아내는 탁월한 성경교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함에도 그의 가르침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지성인이 그보다 한참 못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우리가 분별해 낼 수 있는 잘못된 사상과 가르침에 깊이 빠져들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히려 우리가 대단한 지적 자만심에 빠진 건 아닙니까? 이쯤 되면 상당히 불안해지기까지 합니다. 혹시 성경 신자의 믿음을 추구하다 나도 모르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먼저 제가 왜 1611년 반포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한 점의 오류도 없이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성경이라고 믿는지 몇 가지 단순하고 명백한 이유를 고백하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시편 12편 6~7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의 순수한 말씀들을 온전히 보존해 주시겠다고 더없이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6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혹자는 어떻게 이런 중차대한 믿음 또는 교리를 단 두 구절의 성경을 기반으로 해서 세우려 하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구절, 한 단어라도 하늘과 땅보다도 쉽게 없어지지 않고 모두 성취되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마5:18, 마24:35) 그래서 저는 위 구절들을 통해 성경을 보존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습니다.
둘째, 오늘날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이 없다면 그와 함께 초래되는 극심한 혼란과 배교 현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피폐함을 바로잡을 길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시리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공의로우심, 지극하신 사랑의 성품을 생각할 때 도저히 성경 보존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더불어 불완전한 부분이 너무도 많은 개역 성경 등 로마 카톨릭이 퍼트린 천주교 사본에 근간한 성경들이 가져온 폐해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이고 말고를 떠나 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연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주께서 이런 영적 무지와 혼란 속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내버려두실 분이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에 근거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셋째, 평균적인 수준의 중·고등학생 정도의 논리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기독교 역사, 성경 사본의 역사,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 과정과 킹제임스 성경 자체를 조금만 살펴보면 누구라도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킹제임스 성경 외에 말씀을 온전히 보존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부합하는 다른 대안이나 후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진리는 반드시 명시적이고 단순합니다. 그래야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의 뼈대를 이루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대한 교리가 매우 복잡다단한 설명과 학문적 논증 과정을 거쳐야만 온전하게 설명되고 이해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절대 성경의 모든 교리와 방대한 내용 모두를 누구나 쉽게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꼭 깨닫고 알아야 할 믿음 생활의 뼈대를 이루는 중대한 교리는(예를 들어 예수님의 대속 사역, 인간의 구원, 천국과 지옥, 재림 등) 누구나 설명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뚜렷하고 단순한 논리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 보존의 교리와 사본의 역사에 대한 부분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맑은 정신과 바른 지각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 반대편에 있는 소위 오래된 사본에 뿌리를 둔 성경들이 더 정확하고 여러 번역본을 참고하고 그것도 모자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 성경까지도 참고해야 겨우 희미하게나마 완전한 성경에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떻습니까? 하나같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본학과 신학의 전문 지식을 동원하고 복잡다단한 논증 과정을 거쳐야 겨우 순진한 그리스도인의 고개를 끄덕여 볼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면 어떤 분은 당신들도 성경지킴이나 출간한 여러 책자에서 사본학을 거론하고 심지어 그렇게 터부시하는 성경 원어까지 가끔 거론하며 나름 복잡하게 킹제임스 성경을 변호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보존해 주신 흠 없는 완전한 성경이라는 믿음의 논증은 위에 제가 명시한 몇 가지의 단순한 항목만으로 차고 넘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세상엔 교묘하게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동원해 순진한 성도들을 영적으로 미혹하고 혼란에 빠트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은 성경 신자들 중에 지적 능력이 뛰어난 지체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킹제임스 성경을 신학적으로 연구하고 사악한 주장을 반박한 자료들이 축적된 선한 열매로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연구의 결과물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견고하게 다지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러함에도 저는 확신하건대 성경 신자의 믿음의 기초는 반드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뚜렷하고 단순한 진리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기준이 흔들리면 존 맥아더 같은 뛰어난 목사나 신학자, 저명한 성경교사가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성경과 배치되는 가르침을 퍼트릴 때 대다수의 순진한 성도들이 그 함정을 피하거나 헤치고 나오기 어렵게 됩니다.
가끔은 성경 신자들 사이에서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경악할만한 소식을 접하게도 됩니다. 오랫동안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에 출석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좋은 제목으로 여러 성도들에게 평가되어 근본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해외의 좋은 대학에서 유학까지 마치고 와서 정작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말씀에 대한 믿음을 버린 분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런 분들은 심지어 교회를 쪼개고 나가서 소위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것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막상막하의 기가 막힌 소식이 또 있습니다. 한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을 알리고 심지어 킹제임스 성경이라면 콧방귀를 끼는 청교도 개혁주의 인터넷 카페에까지 담대하게 킹제임스 성경과 바른 교리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알리던 한 분이 지금은 그가 목이 터지라고 외쳤던 그 모든 믿음을 완전히 폐기하고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대체 이분들의 믿음의 기초는 어디에 매여 있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뚜렷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믿음의 기초가 매여 있었다면 이런 처참한 결과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이분들이 따르던 것은 더욱 정교한 논리와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만큼 더욱 치밀하고 빈틈없는 가르침이며 허탄한 지적 유희를 즐겼을 뿐입니다. 매우 민감한 이야기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꺼내는 이야기지만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이렇게 겉으로는 엇비슷하지만 본질상 전혀 다른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뿐더러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성경도 이런 태도를 가질 것을 적극 권면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또한 애초에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완전하게 보존해주신 한 치의 오류도 없는 말씀이라는 진리는 몇몇 선하고 영민한 신학자들에 의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하더라도 그들의 연구로 또렷해진 진리를 믿는 대다수의 성경 신자의 믿음이 이분들의 복잡다단한 신학 지식과 사본학 지식을 모두 다 섭렵하고 나서야 탄탄해지는 것은 아니고 또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대한 성경의 진리는 반드시 명시적이고 단순한 특징을 보이는 것입니다.
지식을 쌓는 것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지적 유희를 즐기는 데만 탐닉하고 자신의 믿음의 기초가 지금 어디에 매여 있는지, 자신의 영적 성숙이 지금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 살펴볼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때 흔쾌히 성경 신자의 믿음에 동의하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도 무언가 새로운 지식, 자신이 보기에 더욱 월등한 가르침을 대면하면 금방 자기 믿음의 기초를 옮겨 버립니다. 차라리 조급함을 버리고 차분하게 그런 가르침과 주장의 허점을 연구해 볼 인내심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이러한 미덕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지식만을 추구하자면 교단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세상에서 인정받는 유명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적어도 세상의 눈엔 우리 못지않은 치밀하고 논리적인 변증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만 쫓아간다면 성경 신자임을 가장해서 알량한 원어와 사본학 지식을 동원해서 킹제임스 성경을 공격하고 은근히 개역 성경을 옹호할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교단 신학의 포근한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장자 교단의 달콤한 열매를 함께 나누는 편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처지가 남 탓만 할 상황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바른 신약교회를 추구하고 킹제임스 성경을 더 널리 알리자고 하면서 혹시 누군가 매우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 혜성처럼 등장해 치밀한 논리와 해박한 신학 지식을 무기로 세상의 저 오만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단번에 무릎 꿇게 하고 킹제임스 성경이 한국의 주류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이 되도록 해 줄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 그게 아니라도 다만 일반 교회와 교인들이 무시하지 않게 독립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라면 이왕 해외 유학을 다녀오면 좋을 것 같고 영어도 잘하면 좋을 것이고 아니면 다만 어떤 방법으로든 미국 근본주의 신학교의 졸업 이력이라도 홈페이지에 걸어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혹은 이도 저도 아니면 탄탄한 세상 경력이라도 갖추고 있으면 선한 사역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은근한 기대가 우리 사이에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닙니까?ㅡ물론 이것은 현재 그저 선한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여건에 계신 분들을 무분별하게 비판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 모습만을 추구하며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나아가려는 우리 안의 은밀한 욕구에 대한 지적일 뿐입니다.ㅡ배교의 거대한 물결이 온 세상을 뒤덮은 마지막 때 우리를 영적 소수자로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런 정도라면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닐까요?
성경 신자들이 왜 오늘날 소수의 진영을 이루어 힘겹게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깨닫고 부디 스스로 자기 믿음의 기초를 절대 흔들리지 않는 뚜렷하고 단순한 진리에 매어놓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은 분명히 이 단순한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고 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을 설득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의 방대함과 해박함이 우리 믿음의 뿌리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항상 사람들이 보기에 월등하게 보이고 정교하게 보이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믿음의 기초를 묶어놓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혹시 너의 연약함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는 아니냐며 비소를 보내신다면 그 또한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그저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은 오직 그것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판단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끝으로 비록 개혁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설교와 설교자’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기고 위대한 통찰력을 소유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 중에 제가 가장 감동했던 한 부분을 인용하며 미욱한 사람의 글을 맺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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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원천은 공부입니다. 지혜의 원천은 분별력입니다. 지식은 공부함으로써 얻습니다만 지혜는 그런 방법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이 공부하면서도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보통 그 특성상 추론적인 반면, 지혜는 좀 더 직관적입니다. 지식은 대화와 이야기와 고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혜는 어떤 의미에서 거의 타고난 재능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이 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이론적인 반면 지혜는 언제나 실제적입니다. 지식은 인생과 삶 등 본질적인 부분에 대체로 큰 관심이 없지만 지혜는 언제나 이런 문제들에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이렇게 지혜는 항상 살아서 무언가 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구분점은, 지식으로는 의지와 상관없이 활동하는 정신을 소유하는 반면, 지혜에 있어서는 의지에 복종하여 행동하는 정신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올바른 종류의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가 현대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하다는 저의 말에 여러분도 동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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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혜와 통찰력이 오늘을 사는 성경 신자들에게 차고 넘치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15 지혜는 루비보다 귀하니 네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그것과 비교될 수 없도다. 16지혜의 오른손에는 많은 날이 있고 지혜의 왼손에는 재물과 명예가 있나니 17지혜의 길들은 즐거운 길이요, 지혜의 모든 행로는 화평이니라. 18지혜는 그것을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니 그것을 간직하는 자는 다 행복하도다.(잠3:15~18)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3~17)
2014-10-23 17:24:07 | 김대용
저는 어느 책에서 그대로 발췌하시는줄 알았는데 많은 수고가 따르는 일이었군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의 묵상의 글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동안 형제님께서 올려주신 짧은 묵상의 글을 통해 많은 힘과 위로와 제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은혜입은것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올려 주시는 글 천천히 묵상하며 읽겠습니다.
2014-10-23 11:41:34 | 이정희
좋은 글을 발췌하고 성경 구절을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으로 바꾸고 이런저런 부분들을 교정하시는
그 노고가 절대 간단치 않을 겁니다. 이 때문에 댓글로 뿐 아니라 많은 성도님이 마음으로 공감하며
올려주신 글을 통해 깊은 묵상이 주는 유익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주일 뵐 때도 훤칠한 키와 푸근한 미소로 맞아 주시고 또 이렇게 좋은 묵상의 글로 섬겨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형제님과 가족 모두에게 풍성하게 부어지길 소망합니다.
2014-10-22 12:30:26 | 김대용
"영원한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이 땅의 삶이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라는 귀한 묵상이
제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 줍니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듯 연단 속에서 성숙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하겠습니다.
귀한 글에 감사합니다.
2014-10-22 12:17:47 | 김대용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10-22 11:56:02 | 관리자
청원자매가 좋은 글을 달았네요. 특히 두번째 잊어비릴 줄을 알라. 그것은 기술이라기보다 행복이다..
이 글은 마음의 비타민이 될 거 같아요.
이렇게 여러 사람이 화합해서 서로 좋은 글과 말을 나누니 참 좋네요..( 맑은 가을 아침에 ㅎㅎ...)
2014-10-22 07:06:34 | 오혜미
주신 글에 순종하며 힘겨움을 견디는 동안 마음이 많이 컸습니다. 많이 감사드려요~
2014-10-22 01:58:56 | 목영주
어느새 6개월이 된거군요. 덩달아 따라오게 해주시니 감사할밖에요.^^
2014-10-22 00:27:43 | 이청원
제가 일주일에 몇번씩 올리는 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어 제가 올리는 글에 대한 과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스펄전목사님의 365일묵상집과 오스왈드챔버스목사님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챔버스목사님은 스펄전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십대에 회심한 스펄전목사님 다음가는 설교자이시고 우리 교리에 적합한 분입니다.)과 토저의 여러 경건서적들을 발췌하여 제가 신앙적으로 겪은 부분과 교리에 부합한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기본 묵상집을 읽고 마음에 감동받은 글을 선택하여 문맥상 교리에 맞지 않거나 일반교회에서 다루는 편협한 묵상내용은 배제하고 우리 믿음에 맞는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작성합니다. 그런 다음 개역성경은 빼고 킹제임스흠정역 말씀을 앞뒤 문맥에 맞추어 올리면서 교정작업을 마치게 됩니다.
제가 묵상글을 올리며 같은 믿음안에 계신 형제자매님분들과 공감을 가지고자 시작하게 되었고, 어느덧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계속 이 묵상 글을 올려도 괜찮은지, 괜히 교만해지지는 않은지 걱정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글을 올리지만 언제까지 올릴지는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같이 공감하는 글을 올리고 싶은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2014-10-22 00:05:41 | 박진태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지 마라.
잊어버릴 줄을 알라. 그것은 기술이라기보다 행복이다.
기쁨을 주는 일은 소유하지 말라. (비그친밤 잠자리에 들며)
2014-10-21 23:58:10 | 이청원
'서 '라는 글자 하나의 차이가 확연하지요?
글자 하나의 의미가 이렇게 다른데 성경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우리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신실하십니다.
2014-10-21 21:17:37 | 이수영
-모든 일을 감사하라고 하지않고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음속에 담아가지고 갑니다~
바른길로 가게끔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비오는 오후 저녁식사를 마치며)
2014-10-21 19:55:22 | 목영주
와!! 오늘 형제님의 글내용이 마음에 절실히 와 닿습니다.
위기를 겪고 극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 평범한 진리이지만 막상 위기시에는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겠지요.
우리 모두 위기를 기회로 여기며 모든 일에 절망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순응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저도 어느 정도는 쬐금 경험을 했기때문인 거 같습니다.
사랑성도여...모두 넘어지더라도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십시다.... (비오는 오후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2014-10-21 18:26:09 | 오혜미
어렸을 때 짓궂은 장난을 한 적이 있다. 화단이나 길가를 살펴보면 개미들이 줄을 지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주변에는 어김없이 소복한 봉우리가 있는 개미집이 있다. 발로 뭉개보기도 하고, 물을 한바가지 퍼부은 적도 있다. 개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다. 우왕좌왕 개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갈 길을 갔다. 몇일이 지나 궁금한 생각에 내가 저질렀던(?) 그 자리를 가보았다. 말짱하게 복구되었다. 성경기록을 보면 개미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한다. (잠6:6-8절) 하나님께서 개미에게 지혜를 심어 놓으셨다. 부지런함과 인도자 없이도 겨울을 위한 양식을 준비한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나간다.
사람은 고통없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현실은 평상심을 흔들어 놓는 크고 작은 고통을 받고 산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큰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일 수도 있고, 부도나 파산의 경험일 수도 있고, 시험에 낙방하거나 퇴직의 경험일 수도 있다. 욥과 같은 경우 순식간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잃고, 전 재산이 송두리 채 날아가 버리고,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처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은 인생의 큰 위기에 해당한다.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이런 일을 닥쳐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을 했을 때 그 충격이 평균적으로 3개월 정도 간다고 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면 마음을 추스르게 되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느냐? 하면서 다시금 일어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낙담과 좌절로 인해 삶을 포기하는 사례도 생겨난다. 개미는 인도자가 없어도 위기를 극복한다. 사람에게는 인도자가 필요하다. 위기의 순간 일수록 그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헤쳐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하고,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위기를 겪었고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유능한 인도자가 된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유능한 인도자가 될 자질을 갖고 있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서 구출받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큰 위기를 벗어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경미한 위기는 쉽게 극복할 내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위기를 겪은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다고 본다. 위기의 상황에서 주저앉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 위기를 극복한 사람은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고 또한 동일한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현재의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 미래의 발판이 되고 큰 유익을 제공해 준다.
개미를 보자. 개미는 참 부지런하다. 어려움도 잘 극복해 나간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열심히 일한다. 집이 무너지면 즉각 보수에 들어간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개미들은 그 어느 때 보다 활발히 움직인다. 겨울의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장의 겨울도 아니고, 이 땅의 풍요로운 삶뿐이 아니다. 영원한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이 땅의 삶이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살전5:18절에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일을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을 감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감사할 수 있다. 비록 우리 앞에 안좋은 일들을 당할지라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함과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다. 영원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감사할 수 있다. 온실 속에서 고통이 없는 주관적인 삶뿐이었던 사람은 무미건조한 영원이 기다릴 것이다. 개미와 같이 살았던 사람은 풍요로운 영원을 만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며 긴 릴레이를 펼치는 개미를 보자. (비오는 날 오후 시간에)
2014-10-21 16:16:41 | 조양교
세상 법에도 확정 판결이 내려진 어떠한 사건이나 법률에 대하여 두번이상 심리/재판을 하지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되거늘 하물며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고 내리신 판결이야 말해 무엇할까요!
그저 하나님앞에 감사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2014-10-21 13:58:57 | 이정희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게 하심이라.(롬3:26)"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지은 죄로 인해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빚을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지불하시고, 하나님의 영수증까지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는 이 사실이 전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제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인 나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나에 대한 형벌의 집행은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죄 값을 청산하고 이미 의롭게 된 나에게 또 다시 형벌을 부과하시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당당하게 "누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무슨 일로 고소하리요?" 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도 친히 우리가 의롭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내 힘으로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값을 완전히 청산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느낌이나 우리의 지식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일, 즉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 값이 완전히 청산되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완전히 구원받았음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스펄전의 묵상중"
2014-10-20 23:29:31 | 박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