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가는 길
어떤 시골 마을에 이상한 장사꾼 하나가 들어 왔습니다.
그 장사꾼은 이렇게 외치면서 마을을 누비고 돌아다녔습니다.
“자, 여기 잘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잘 사는 방법을 사시오!
이 방법을 사면 절대 실패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장사꾼이 소리치는 말을 듣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길을 걷던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장사꾼이 떠들고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잠깐 사이에 장사꾼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여보시오,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을 내가 사겠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한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나한테도 파시오. 나도 삽시다.”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사꾼은 다른 장사꾼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옷도 잘 입었고 흰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점잖게 생긴 노인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오늘은 특별히 잘 사는 방법을 공짜로 나눠 주겠소.
바로 이 말이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이오. 사람의 속은 들여다볼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 속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좋은 말에는 늘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나쁜 말에는 늘 독한 냄새가 나는 법입니다.
혀는 사용하기에 따라 가장 좋은 것도 되기도 하고 가장 나쁜 것도 될 수도 있습니다.”
ㅡ탈무드 지혜의 책에 있는 글을 옮겼습니다.ㅡ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 약 3 ; 2
주여 나를 잡아주소서
찬란하게 아름다운 세상에 취해서 마음을 뺏기고 주님을 잊고 살까 두렵습니다.
달콤한 세상 재미에 빠져 먹고 마시며 즐길 때 주님의 십자가를 멀리 떠나갈까 두렵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 주소서. 외롭게 홀로 서 있을 때 포근한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감싸 주시고 힘이 없고 연약하여 울고 있을 때 주님께서 힘 있는 능력의 손으로
나를 잡아 주소서.
주여 나를 주님의 기쁨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환 경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 환경은 벗어날 수가 없답니다.
환경을 잘 다스리고 정리해 나간다면 어떠한 환경도 그 사람에게는
좋은 벗이 될 수 있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 보면 그 환경이 그 사람을
빛나게 해줄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이든지 지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이 그를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는 능력 있는 분의 손에 붙잡힌 자일 것입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이런 삶을 살 수 없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감사하는 자는 그분의 자녀일 것입니다.
들 국 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들판에 홀로 피어서 열심히 열심히 아름다운 모습을 바람에 휘날리며
그윽한 향기를 멀리멀리 보내고 있는 들에 핀 들국화야!
무엇이 그리 기뻐서 늘 방실방실 웃으며 해님을 보고 웃고 있느냐 ?
어두운 밤이 되면 은은히 비춰주는 달과 별을 보며 너는 외롭지 않고 즐겁다고 속삭이겠지.
바람에 부탁해서 삭막한 도시 속에서도 맡을 수 있도록 너의 그윽한 향기를 실어 보내렴.
지치고 찌든 삶 속에서 너의 향기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아주 많이 보내다오.
눈으로 안 보여도 너의 존재로 세상이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행복할 거야 .
ㅡ 위의 글 들은 십 년 전쯤 적어 놓았던 글들입니다. ㅡ
2014-12-10 06:30:37 | 윤정용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자신을 못 박은 죄인들의 용서를 하나님께 간구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용서라는 것은 심지어 사치로까지 여겨집니다.
때로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에 관계가 금방 회복되고 화목하게 보이는 것만을 용서와 화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요 동역자였던 바나바와의 강렬한 갈등을(행15:36~41)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바로 그 갈등의 원인이었던 마가에 대한 애정 어린 평가로써(딤후4:11) 갈무리했던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화해의 열매가 무르익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꼭 필요하기도 합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 수 있길 저도 간절히 소망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분주함 속에도 변함없이 신실하게 좋은 글을 다듬어 올려 주셔서 항상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12-09 16:49:05 | 김대용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마18:21-22)"
용서는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다치는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상대에게 원한과 앙심을 품고 용서하지 않으면 내 속사람에게 독이 퍼져 정서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병에 걸립니다. 그 병은 인간이 만든 약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합니다. 남들은 실수할 수 있지만 나는 절대 실수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과민합니다. 남들의 말과 행동을 모두 나와 연결시켜 해석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속으로 파고들어, 삶의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가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대개 외롭고 비판적이며 불안합니다.
용서하려면 먼저 용서받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것을 깨달았으면 여러분도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내면에서 앙심의 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용서가 필요함을 인정하기 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가 힘든 대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항상 남을 비난합니다. 다른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면 자신이 착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단 자기가 그렇게 착하다고 믿으면 용서의 필요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뜻으로 사도 바울은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엡4:32)"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눅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피 흘리셨기에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무슨 수로도 그분의 용서를 얻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분은 무조건 여러분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해주시는데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아무리 많은 배상금으로도 보상될 수 없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여러분의 적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입니다.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오늘부터 용서의 마음을 기르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다음번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나 모욕을 주거든 마음으로 즉시 용서하십시오. 겉으로든 속으로든 되받아치려는 성향을 일체 물리치십시오. 하나님께 너그러운 태도를 달라고 기도하고, 상대를 사랑으로 대하십시오. 증오는 불행과 속박을 주지만 용서는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참고로 제가 올리는 글 중에 뼛속깊이 체험한 내용입니다."
2014-12-09 01:07:35 | 박진태
어제의 나를 경쟁상대삼아 중단없이 조금씩 더 전진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되기를 소망합니다.
2014-12-08 13:26:25 | 이정희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 글을 통해 제 자신을 돌아보니 그 기준에서 벗어날 때가 참 많았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아니라고 우기고 싶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서 '나'를 만들어 놓을려다 보니 삶 속에서 "이정도면 뭐~~" 하며 대충 만족해버리거나 교만해지는 삶이 반복되는가 봅니다. 날마다 환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처럼 단순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겠어요.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2014-12-07 23:04:19 | 김상진
"그분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되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 곧 그는 그것을 구원하리라.(눅9:23-24)"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셨고 여러분의 삶에 뜻을 두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으셨고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생명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갈2:20)"고 말했습니다. 그의 생명은 자신을 위해 간수해야 할 보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 투자해야 할 보화였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삶은 딱 한 번입니다. 삶이 끝나면 더 이상 그리스도께 귀한 것으로 그 삶을 드릴 기회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소망은 남들의 길이 아닌 자기 길을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경주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경주에 승리하여 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보다 오늘 좀 더 전진했는가? 아니면 더 뒤떨어지고 영적으로 패배했는가? 다른 그리스도인을 기준으로 여러분을 측정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여러분에게 주시려는 그분의 상이 측정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경주하는 선수가 범할 수 있는 최악의 과오 하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릴보서 3장에서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늘 목표점에 두십시오. 다른 선수들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베드로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21:22)"
사도바울은 기쁨으로 완주하기 원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7절에 그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의의 관이 예비된 날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께 어떤 사명을 받았든 궁극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고 선행과 종교 활동으로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다는 것이 대다수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복음 - 기쁜소식 - 알려 주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행위 구원은 나쁜 소식입니다. 아무도 해 낼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구원은 기쁜 소식입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내 생명, 나의 길, 내 사명, 매일 아침 이 세 문구를 되새겨보면 좋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는 내 생명을 내 것으로 아끼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 바치며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을 달리고 있는가? 나는 그분께 받은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그분께 드리면 그분이 여러분 안에 - 여러분의 생명, 여러분의 길, 여러분의 사명 안에 - 그분의 완전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4-12-07 22:39:47 | 박진태
형제님!
항상 좋은 글 발췌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2014-12-01 22:02:49 | 정진철
형제님 올리신 글을 읽으니 언젠가 읽었던 가슴뭉클한 짧은글이 떠올라 적어봅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어느날, 자신이 그간 걸어온 삶의 길을 돌아보니 기쁘고 즐거웠던때는 발자국 네개가 나있는데 죽을만큼 괴롭고 힘든 인생의 구렁텅이를 지날때는 발자국이 두개여서 주님께 투덜댔답니다.
"주님! 항상 저와 함께하신다고 하셨는데 왜 정작 제가 힘들고 어려울때는 함께있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네가 힘들고 어려운 절망의 구렁텅이를 지날때 내가 너를 안고 그 곳을 지났단다"
주님께 감사한 첫눈 내리는 12월의 첫날입니다.
2014-12-01 14:07:16 | 이정희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늙었으되 지금까지 의로운 자가 버려지거나 빵을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5)”
다윗이 자신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쓴 말입니다. 늙어서 자기 삶을 뒤돌아보던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자기를 돌보셨는지 깨달았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아무리 늙고 싶지 않더라도 세월에는 속수무책입니다. 노화는 삶의 일부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고 했습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셔 골리앗을 죽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늙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셨으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성전 건축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시편 37편25절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기운을 북돋우시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바뀌고 삶이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은 절대 변치 않으시며 그분의 약속은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노년을 맞은 다윗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항상 자기와 함께 하셨다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는 성경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마28:20)”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그가 언제나 하나님 뜻 가운데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낙심하여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범한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다윗을 책망하고 징계해야 하셨지만 절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버림받은 기분일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25절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고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일상적 필요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물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떨어지는 참새도 지켜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며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예수님의 3년간 공적사역 중에도 사람들의 신체적, 정서적, 물질적 필요를 놀랍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분은 어린아이를 아끼셨고, 문둥병자들과 장애인들에게 시간을 내주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최고의 행적은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입니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필요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들의 애원에 귀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슬퍼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에 응답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긴 생애를 돌아보며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절대 버리지 않으셨고 모든 필요를 채우셨으며 앞으로도 항상 채우실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고 그분을 위해 살고 있다면,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어떠하든 안심해도 좋습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다윗의 말이 맞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어느 날 여러분도 다윗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늙었으되 지금까지 의로운 자가 버려지거나 빵을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도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4-12-01 00:47:06 | 박진태
어쩜 글을 이렇게 잘 쓰실까요? 생각을 정리하기도 벅찬데 생각을 잘 표현한
글 한편으로 다시금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낙엽도 제대로 보지 못한 가을을 보내고 벌써
내실을 다져야 할것 같은 계절이 기다리고 있네요.
이겨울...그리고 2014년의 한달을 그 어느때보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2014-12-01 00:39:03 | 주경선
신실하게 담아주시는 영적 교훈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2014-11-29 12:08:34 | 태은상
형제님! 험난했던 믿음 여정을 다시금 글로 접하게 되어 은혜가 됩니다.
성도를 언제나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이후로도 형제님의 가정과 삶 속에서
늘 동행해 주실 줄 믿습니다.
2014-11-28 16:10:27 | 장용철
잘 요약된 간증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님께서 쓰시는 귀한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11-28 15:44:16 | 관리자
글로 읽으니 차분하게 보게 되네요.
참으로 우리 선진들의 신앙의 측면을 바로 보게 되고
그때는 성경이 그것 밖에 없었던 시대였지요.
지금은 바로 번역된 성경이 있으니 보는 눈과 들을 귀가 있으면
누구든지 올바르게 믿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2014-11-28 13:54:15 | 이수영
돌아왔던 지난 시간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형제님의 열의 넘치는 간증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안에서 잘 다듬어지시고 귀히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가족 모두가 기쁨 가운데 믿음생활하시고,
교회안에서 믿음의 교제가 더욱 굳건해지길 바랍니다.
2014-11-28 09:42:23 | 조양교
바른모습, 거룩한 모습, 앞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40년, 거뜬하겠죠.^^
2014-11-28 00:55:58 | 이청원
‘교회 찾아, 진리 찾아, 아찔한 외줄 타기 40년’은 제 평생 들은 간증 중에
가장 기발하고 재치 넘치는 제목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형제님께서도 산 넘고 강 건너 먼 곳을 돌고 돌아
믿음의 험한 여정을 잘 견디며 이곳에서 뵙게 되었네요.
저와 같은 또래에다가 또 의정부에 살고 계시니 여러모로 형제님의 간증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앞으로 귀한 은사로 잘 섬겨 주시고 좋은 이야기도 나누어 주세요.
열정 넘치는 간증과 간증문에 감사하며
부디 하나님의 평강이 형제님과 가족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길 바랍니다.
2014-11-27 22:15:56 | 김대용
일부 사이비목사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순간 영적으로 완성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성도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르게 만드는 이런 잘못된 성경 해석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신앙의 성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면서 성장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안도감의 교리'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주기만 하면 그런 사람들의 믿음은 쑥쑥 잘 자라납니다. 그런데 이 사이비 목사들은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완전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사실을 기뻐하며 감사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렇게 배운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한 시도를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며 거부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착각으로 빠뜨려 현 상태에 안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교훈은 영적 성장에는 독극물처럼 치명적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 는 말씀에도 믿음은 성장하는 것임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믿음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반드시 성장합니다.
여러분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A.W. 토저.
2014-11-27 21:32:31 | 박진태
1. 우매한 배경
의정부에서 출석하고 있는 나서일 형제입니다. 저의 간증이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주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고백이 되길 원하며, 바른 신약교회를 추구하는 우리 형제님들과 자매님들 사이에 선한 유익이 되길 원합니다.
외람되지만 저의 짧은 40년 생애를 소재로 한 이 간증에 제목을 붙인다면, 제 인생은“교회 찾아, 진리 찾아, 아찔한 외줄 타기 40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제목처럼 돌이켜보면 저의 청춘은 아찔하기만 한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 세대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가던 그 어렵고 힘들던 시절, 교회는 그분들에게 큰 위로와 안식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에게도 교회는 늘 그렇듯 신-구약 분간 없이 그저 하나님의 집, 성전’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와 교회를 이끄는 목사를 위해 성전을 출입하고 제사장을 섬기듯 자신들의 신령과 진정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제 아버지께선 여든이 가까운 고희를 훌쩍 넘긴 연세이심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어머니의 기일이 다가오면 자녀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미리 작성하신 설교문을 낭독하시며 추도 예배를 집례 하십니다. 아버지의 설교 내용은 아직도 당신의 기억 속에 선명한 어머님의 신앙 일대기입니다. 처녀 시절 새벽마다 종지기를 자처해 종을 울리며 성도들을 깨우고, 교회 건축을 위해 갓난아기를 업고 빨간 벽돌을 나르며, 고열로 죽어가는 큰 손자를 살리겠다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려는 시어머니를 막아서고 무당보다 더 용한 목사님을 모셔왔던 열심히 넘치시던 분이 바로 생전의 어머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신앙적 배경은 그지없이 교회와 목사들을 각각 성전과 제사장으로 믿어 섬겨 온, 제 부모님의 이러한 순박한 신앙 배경에서 성경에 있지도 않고 그래서 가당치도 않은, 소위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가정환경 속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저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제 주위 사람들에게 저는‘예정된 구원을 확정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 기록대로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신 참된 복음에 대한 믿음과 상관없이 부모님께서 종교적으로 이룬 공덕으로 인해 구원받고 천국을 떼놓은 당상으로 예정 받은 사람처럼 그렇게 부모의 종교에 기생하며 산 것입니다.
2. 느닷없는 출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영적 소속도 의미도 불분명하던 20대, 저는 열등감과 분노와 아집으로 이 세상의 신이 만들어 놓은 문화 속에서 도시가 제공하는 모든 것들을 먹어대고, 들이키고, 토하고, 피워대고 그 너절한 일들을 하기 위해 많은 젊음의 날들을 낭비해 버렸습니다. 양 귀를 뚫어 귀고리를 차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기이한 것들을 쫓으니, 지인들 사이에선 전 그냥‘도를 아십니까?’라고 통했고, 그렇게 불렸습니다.“만나면 반갑다고 합장하며 도를 아십니까?”....... 저는 또한, 무정부주의자였고, 우상을 만드는 조각가였으며, 철학책을 가지고 다니며 궤변적이고 외설적인 시를 지었던‘뉴에이저’였습니다.
모든 것을 제 안에서 새롭고 파격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 제 안을 혼돈의 지식으로 마구 채웠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나의 예술적 희귀함과 천재성을 몰라주는 것이라 여기니, 세상에 대한 저의 모든 대화법은 그저 푸념 섞인 말과 욕설과 불온한 행동이었습니다.
헤비메틀 사운드를 넘어 더 사악하고 퇴폐적인 데스메틀과 더 심하게는 북유럽풍의 신화와 자연과 마술 숭배의 음악을 접하며, 한편으로는 고고한 평화주의자처럼 90년 대 말부터 미국이 개입한 전쟁에 대해 반미 반전을 담은 평화 퍼포먼스를 서울 도심과 미 대사관 앞에서 단발적으로 치르며, 시대의 주목받는 청년 양심가인 양 제 자신을 높이고 알량한 것을 말하고,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았던 그 이력들을 자랑했습니다.
점점 그 지경으로 나아감에 아니, 그 수렁으로 빠져 감에 그나마 제 속에 기독교 흔적이라 할 수 있었던 저의 부모님과 칼빈이 이어준 그 종교성과 더불어 제 머릿속에 이제 유통기한이 다 된 듯한 ‘하, 나, 님’이라는 이름마저도 제 기억 저편에서 지워갔습니다.
그렇게 멸망하는 짐승처럼“그 누구의 개입도 필요 없다.”라고, 캄캄한 밤 무적의 트럭처럼 질주했던 그 혼돈의 20대 중반 무렵 어느 날,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는지 모르지만, 옛적에 이름만 써넣고 가본 적은 없는 교회란 곳을 다니는 철학을 전공한 한 형제가 불쑥 집에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느닷없는 그의 출현에, 전 무엇에라도 홀린 듯 청소년기 이후로 처음으로‘교회 사람’과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천사와 같았던 그 형제는 끊임없이 저의 그런 푸념들, 욕지거리를 다 듣고도 도망치지 않고 그냥 이해해주고 기도해 줬을 뿐입니다. 그렇게 그 형제로 인하여 마치 재계약되듯이 청소년기 이후로 다시 시작된 교회생활은 차츰 적응이 되었고 또, 교회 출석이 정기화되면서 십일조까지도 추려서 내는 종교적 발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그 간지러운 문화가 좋아졌습니다. 젊은 자매들이 오빠! (청)학동 오빠!’하고 부르는 그 붙임성이 마냥 좋아서 그때로부터 펼치고 다녔던 머리를 위로 세워(선비 머리 또는 비녀 꽂은 일명 똥 머리)가다듬었고 또, 젊은 형제들의 친절과 고상함이 제 눈엔 다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일이면 악의없는 그들을 따라 넋 놓고 교회 문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3. 죽음과 사랑
90년대 당시, 이미 총신대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있던 낙도선교회를 통한 낙도 선교를 목적으로 제가 출석하던 교회의 청년들은 해남반도 남단 ‘소안도’라는 섬을 복음화 목적으로 삼고, 그곳에 배를 타고 들어가 사영리 전도와 봉사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영문도 모른 체 부자연스럽게 동생 같은 청년들에게 질질 끌려 그 섬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의 이름으로 선행을 베푸는 모든 것이 선교라 생각했기에 예의 바르고 정중한 선교를 하기 위해 청학동 청년처럼 차량 운행, 도배질, 폭풍으로 쓰러진 가옥 수리, 독거노인 말동무, 다시마 걷기, 북 치며 동네 아이들 모으기 등 전도사님과 자매들이 시키는 대로 마치 평생의 모든 선행을 몰아서 하듯이 그 일들을 다 해냈습니다. 그리하여 그 봉사 마지막 날 청학동 청년이 일궈낸 선행의 결과들로 교회에서 벌어진 신유집회에 인근의 제법 많은 주민이 몰려들었습니다.
처음 경험해보는 신유 집회는 의심과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저에겐 그저 신기와 무서움이 교차하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소아마비로 인해 크다만 한쪽 다리가 제 눈앞에서 한 마디 쑥 자라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눈시울은 붉어졌고, 평생 고된 일로 인해 거의 90도 이상으로 굽혀진 할머니의 허리와 등판이 스르르 펴지는 것을 보고, 저의 이성에 반하여 나오는 눈물을 숨기려 구석진 곳으로 가서 웅크렸습니다.
복음 설교와 함께 모든 치유의 사역이 끝나고 덩그러니 교회 안에 우리 청년들만 남았을 때, 청빙 된 김 모 목사님께서 전도사님과 함께 무리 중에 숨어 있던 저를 복음으로 초청하셨는데, 저는 비적비적 멋쩍게 나와 그 잠시의 어색함이 싫어 눈을 감았고, 이내 정해진 듯한 지체들의 뻗은 손길 안에서 처음으로 진짜 기도란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둠의 진탕에 죽은 개보다 못한 죄인인 저 자신을 또렷이 보게 되었고, 동시에 성경의 한 구절이 정확히 뇌리를 관통했는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롬5:8)
아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내가 아직 죄인 이었을 때에!.......이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 이 하나님의 사랑이 갑자기 내 속에서 믿어졌습니다. 현재 내가 죄인이기에 영적으로 죽어있고 나중에 진짜 죽었을 때에 지옥 형벌에 처할 것이라는 죄 된 나의 상태가 깨달아졌습니다. 그 즉시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안에서 구원을 받게 하사 나를 내치지 않고, 참으로 아버지의 자녀로 받아주셨음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저의 망령된 행실과 사망의 냄새를 풍겨냈던 일들을 그제로부터 하나하나 분별하여 버렸고 돈 들여 곱게 길러온 긴 머리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또 전함에 있어 가히 은혜가 되지 못했기에 그 즉시 신실한 교회 오빠들처럼 깔끔하게 정돈했습니다.
4. 새로운 물결
어언 시간이 지나 저 자신도 신앙이 커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처음 저를 다시 교회로 인도했던 천사 같은 형제가 제 혈액형 B형에게 꼭 맞는 선교단체가 있으니 그 단체에서 개최하는 선교캠프에 가보라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턱 하니 바로 선교에 헌신할 것 같은 불안한 직감을 품고, 모 단체‘선교 캠프’에 참석했습니다. 그 선교 캠프에서‘최 모 선교사’ㅡ그의 신앙배경은 베뢰아에서 귀신론, 양태론적 삼위일체 등을 주장하는 추리 신학 등의 영향을 받은 자로서, 저는 그것도 모른 체 초기 간사 시절 그의 생일에 그를 이 시대의 사도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낭송하기까지도 했음ㅡ 를 위시해 국내외 많은 선교사 등 화려한 말들의 강사진들과 스텝들은 하나님의 큰 것들을 말하며, 수천 명 모인 자들과 더불어 저의 피를 뜨겁게 했습니다.
‘선교 단체에는 신학이 필요치 않고 신학이 없다!’는 단체 대표의 모순적인 언변에 그래서 신학 학위 없이도 단체에서 정한 소정의 교육 프로그램만 이수하게 되면, 평신도 누구든 국내에선 선교 동원가로 해외에선 선교사로서 그렇게‘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할 수 있다.’는 그 설득에 저는 이 단체와 단체에서 알려준 신사도 계열 선교 전략가‘루이스 부쉬’가 제안한 북위 10도에서 40도 안에 속해 있는 미전도 종족 국가와 이슬람권에 속한 나라들에 대한‘10/40 창 선교전략 및 영적도해’라는 새로운 물결에 저의 신앙의 진로를 걸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선교 슬로건은 단순하고 만만하였기에 그것 자체가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저는 미지의 어떤 이슬람 국가를 소위‘왕의 대로’로 삼고, 예루살렘까지‘왕의 군대’ㅡ카톨릭 교세 확장식 발상으로 시대착오적 용어임ㅡ 로 출정하기 위하여 소정의 교육과 국내 오지 침투 훈련 등을 다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우리는 순종하고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단순, 집중, 반복!
하나님의 선교를 하다가 굶어 죽을 것 같습니까? 그럼 그냥 굶어 죽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선교를 하다가 빈털터리 될 것 같습니까? 그럼 그냥 멋있게 망해버리십시오!
여러분 이런 자극적인 구호와 함께 타악기와 전자음과 함성으로 1시간여, 만트라 기법에 의해 혼과 영이 혼미한 상태가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또 그 즉시 격식 없는 차림의 설교자가 나와 대부분의 설교 내용을 이러한 격정적인 웅변조로 연설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감성적인 젊은 세대들은 이 첨단적 동원력에 웬만하면 다 넘어갑니다. 다수의 청년들은 이러한 큰 집회 끝 무렵에 앞뒤 가리지 않고 손들고 울며 나와 서원 비슷한 내적 맹세들을 하며 기독교의 핵심은‘선교’라 한정지으며, 그‘감성선교지식’의 우쭐됨에 빠져 암묵적으로 본인들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과 지역 교회들을 계몽의 대상이라 치부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 선교낭만주의에 빠져 선교 관련 이곳저곳 바삐 전전하는 중,‘아차!’하고 나이를 먹어감에 결국 자기를 해외 선교지로 도피시키는 등의 극단적 선택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심각하게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치 동물을 사육하듯 하는 이런 선교 훈련 프로그램으로 많은 미혼의 청춘들이 부실한 선교 신학의 포로가 되어 전 세계를 방랑하고 있습니다. 감히, 이것이 한국의 초교파 뭇 선교단체들과 뭇 선교사들 및 그 연합의 부실한 영적 상태와 악한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각국으로 파송된 선교사와 그런 사역자들의 영적 상태가 과연 이러하다 하면 그것은 각 나라와 민족들에 대한 재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 묻은 복음의 강조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혈기가 부려지는 종교 스킬이 전파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때 제가 훈련생과 시간이 지난 후에는 간사로 몸담았던 이 선교회는 1983년경 한 쌍의 남녀가 베뢰아 김기동 목사의 주례로 결혼과 동시에 터키에 파송됨으로써 그 한 가정이 해외 개척 사역을 열고, 2014년 현재에 이르러 연혁 31주년을 맞이한 자생한 국내 최대 초교파 해외 선교 단체입니다. 물론 이 선교단체는 그들 스스로 극구 부인하는 것처럼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아니기에 신·구약시대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영체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성경과 바른 교리에 대해서도 전혀 모릅니다. 이렇게 한심한 영적 상태로 600~700명에 이르는 단체 소속 선교사들을 통해 해외 선교를 해 보려 하니 흡사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 나가서도 새듯이 갑갑하고 안타까운 상황만 연출할 뿐입니다.
그들의 선교 사명과 선교 사역 정신의 근간은 소위‘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1920년대 중국 시안성(장안성)한 가정교회에서 시작된 일명 ‘복음의 서진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오늘날 토마스 왕(기독교 21세기 운동 총재), 브라더 윈(하늘에 속한 사람 저자), 슈융쩌(중국 가정교회 리더 대표)을 통해 다시 주창되어 미래 선교 운동의 의미를 제시하고 확립시켰습니다.
이‘백 투 예루살렘 운동’의 현대 기독교 선교 전략에 더해진 의미는‘선교의 방향성’으로, 그 내용은 20세기까지 복음 전파에 있어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교회가 그 세계 선교 리더쉽을 가졌었는데 21세기 들어와 서구교회의 타락과 몰락으로 그 선교 리더쉽이 촛대가 옮겨진 것처럼 아시아 대륙 즉 한국과 중국으로 이전되었기에 이 아시아 교회는 마지막 시대적 선교 부름에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힘써 많은 미전도 종족이 포진해 있고 최후의 복음화 대상이 되는 10/40 창 선상의 경로를 통해 한국-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중동, 중동으로부터 이스라엘-예루살렘까지‘천국복음’을 편만이 실어 나르면, 그것이 재림의 시점을 앞당기는 데 일조가 되어 이 불굴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비로소‘재림한다’라는 무천년적 후천년설 교리에 입각한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황당한 이론이었습니다.
이렇게 엉뚱한 소위 천국 운동의 하나로 모 단체와 연합하여 진행했던 일들이‘2004 예루살렘 예수 행진’이었고 또, 단독으로 계획 진행한‘2006 아프카니스탄 평화 축제’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신사도 운동을 통한 사도직·선지자직의 복원을 주장하고 귀신론에 입각한 선교지 영적 도해 및 땅 밟기 사역, 국제 기도의 집-마이클 비클의‘ihop’의 직통계시와 예언적 기도 형태를 접목한 24시간 기도 체인, 역 라마단 기도운동 및 이스라엘 중보기도 운동 그리고, 임파테이션(선임 은사자가 ‘해븐리 터치’하면 성령이 운동하여 또는 성령 세례가 발하여져, 갖가지 신비가 사모하는 자에게 전이되어 그 신비를 소유하거나 일시적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은사 운동임) 등등.......
여하튼 저는 이 시대를 앞서 예견하는 듯한 그들의 멋들어진 말들에 속아 4~5년간 발런티어로 무보수 전임 및 협력 간사로서 각 부서로 배치 당하며 부품처럼 발령받고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30대 초반까지 현실감 없이 보내던 중에 분명 이곳에 있으면 아무것도 득이 없을 것에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보내어 앞의 현실을 진로를 직시하고 생각하도록 은혜 가운데서 지금의 제 아내를 보물로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저와 똑같은 서원과 내적 맹세를 지키기 위해 단체에 발을 디딘 당시의 제 아내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훈련생 기간을 마치고 전임 간사로 갓 임명받아 당시 북서울 지부의 대표간사로서 의욕 충만한 한 자매를 사모하여 저는 주도면밀하게 교제의 기회를 만들고자 온갖 일들을 우연인 것처럼 만들어 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스치듯 단체에서 만나고 결국 교제하며 결혼에까지 성공했습니다.
그때 저희는 단체의 대표를 주례자로 청빙하였고 정말 주목받고 싶은 결혼식을 소망했지만, 단체 대표의 비서 간사가 저희 결혼 날짜를 알고도 임의로 그날에 단체 대표의 해외 일정을 추가함으로 아쉬움 속에서 자랑할 만한 결혼식이 아닌, 평범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때 그 작은 일에도 개입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마 결혼식이 일정대로 진행되었다면, 그 선교회의 종이 되어 오히려 성경 신자들과 대치하는 넓은 길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결혼은 꿈이 아니었고 또 현실을 기만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단체에서 무보수 또는 불특정 후원 재정으로는 가정을 건사할 수 없다는 생각과 불안에 내심 간사직을 내려놓는 등 사역 종료를 생각하던 차에 결정적으로 저를 대실망과 깊은 회의감에 빠뜨렸던 두 가지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2004 예루살렘 예수행진’직후, 당시 단체의 중보기도 사역을 담당했던 이모 총무 ㅡ현재: 자칭 이스라엘 중보기도 선교사로서 용모를 바꾸어 활동 중ㅡ 의 지방 사역 중 여성도들과의 부도덕한 행각이 사실로 드러나 단체에서 비공식 제명된 사건으로 인한 큰 충격 하나가 있었고 더불어 2006년 당시 행정부를 통해 단체의 수장급인 강모 선교사가‘2006 아프카니스탄 평화 축제’개최를 위한 대 외교부를 그 수신자로 하는 청원과 탄원 형식의 문서를 출력 발송코자 할 때 그 문서의 전문을 읽게 되었는데 이는 가히 비성경적 내용으로서 어떤 정치 소속의 세속적 협박과 다름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대략 내용은“국가 차원에서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2006 아프카니스탄 평화 축제’는 탈레반의 테러 위험성이 있으니 해당 단체는 해외여행을 자제하고 삼가라!”는 그 외교부의 권고에 오히려“해외 평화봉사를 위한 한국 외교부의 행정적 절차에 신속을 기하지 않으면 전국 모든 지부와 해외지부가 봉기하여 한국 외교부에 대해 궐기 할 것!”이라는 정부를 협박하는 다소 반정부적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체의 이러한 공격-사역중심의 선교지상주의적 그 정체성과 앞서 물의를 일으킨 사역자의 비윤리적인 사건에 대한 비성경적-비공식적 처리들을 목도한 이후, 당시 조용히‘개인 사정이 있다.’둘러대며 즉시로 간사직 사임 절차를 밟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 아내는 순식간에 이뤄진 저의 결정에 당시 북서울 지부 대표 간사직을 영문도 모른 체 울먹이며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시점에 저희 가정은 제 아내의 청년기 시절을 이끌어 주셨던 목사님께서 새롭게 미아동에 있는 50년 된 모 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셨다는 것과 그 교회에서 50주년 희년기념을 맞이해 선교사 파송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교회의 성도가 되어 1년간 선교사 허입을 소망하며, 이내 지난날 단체의 간사 경력이 소급 적용되어 당회로부터 교회 파송이 가능케 되므로 저희 가정은 당시의 교회를 주 파송 교회로 하여 그동안 내심 아집을 갖고 열망해왔던 터키로의 평신도 선교와 그토록 바라던 근엄한 선교사 임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5. 쓸모없는 소금
소아시아 지역의 터키는 초대교회 시대 사도바울 선교여행의 중심지로서 저희 가정은 2년을 콘야(성경에 나오는 지명:이고니움)에서 1년을 에페소(성경지명:에베소) 근방 이즈미르에 거하고 이동하며 언어와 그들의 문화를 배워가며 한국교회의 방식대로 복음 전할 기회를 하루하루 품어갔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은 터키 이슬람(수니파 98%)이 서구화로 인해 본질이 희석되었다고 보지만 그 생각은 오판입니다. 이들은 터키라는 나라를 통해 개방적인 행태를 취한 후 오히려 유럽과 한국에 역으로 이슬람을 활발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터키는 이란이 미국에 의해 지금까지도 견제받는 오늘날, 은폐된 이슬람 거점 국가로서 그렇게 사탄에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반면 많은 수의 대 터키 사역자들은 기독교 선교사에 대한 핍박과 순교가 여전히 잠재한 터키 동부보다는 더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지중해 풍광과 유럽 및 그리스 여행과 유랑에 있어 지리적으로 접근이 쉬운 터키 서남지역에 편중하여 그곳에 거처를 두고 각국의 기독교 기법 등을 통해 분주히 복음 전파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많은 수가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혼의 구원받음’(영혼 구령 Soul winning) 에 대한 우선적 일에서 벗어나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 또한 그들의 전철을 밟아 그냥‘그 땅에서 외국인의 삶만 살다 왔음‘을 실토합니다.
그 민족들에게 이렇게 부실한 현대 선교사들이 들고 온 기독교는 많은 것 중에 하나 추가된 외래 종교요, 경건의 능력이 없어 때론 그들의 조소거리가 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의 매 순간이 교리적이며 유일신‘알라’가 자기들의 매 삶을 경전을 통해 참된 무슬림의 삶인지 아닌지 측정하고 달아 본다는. 알라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색채가 모호한 종교인들이나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나 무신론자들을 어떤 참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보다도 더 증오하고 경멸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실한 유형의 선교사들은 이슬람권에서 특히 더 실패하고 있고, 결론적으로 실패하였던 저희 가정은 당시 제 아내의 자궁근종으로 인해 막달 둘째 아이의 출산이 위험스러웠고 또한 터키 현지 의료진의 미덥지 않음을 귀국 상황의 빌미로 삼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6. 오점 투성이
돌아와 보니, 그런 와중에 저희 가정을 파송했던 교회는 담임 목사님 측과 장로님들의 실무진 측의 심각한 재정 문제로 교회 내에 투명성이 깨지고, 이내 분열이 생겨 당회로부터 터키 선교사로 위촉받았던 저희 가정은 애매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이내 자동으로 저희 가정의 선교 약정기간은 보고 없이 그렇게 종료되었습니다.
교회의 깨어짐은 지체 간의 교제가 데면데면 냉랭하게 됨은 서로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었습니다. 저와 저희 가정 또한, 교회의 아픔 가운데 무관심이라는 폭력을 상처를 교환한 간접 가해자였고 패배자였습니다. 그때부터 소소한 신앙생활만이라도 겨우 이어가기 위하여 올바른 교회를 찾기 위해 교회 투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입맛에 맞는 교회하나 걸려라!’하는 요행을 바라며 매일 투명인간처럼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구미에 맞는 교회들은 역시나 없었습니다.
‘성도의 머릿수를 목사의 영성으로 치부하고 가늠하는 교회들.
오고 가는 봉투 속에 싹트는 교회 건축과 사고파는 직분들.
주보 뒷면 십일조를 낸 명단에서 입금자명을 찾는 순진한 성도들.
주일 오전 예배에 강단에 선 담임목사를, 이스라엘 어디쯤 되는 지파의 대제사장으로, 오후 예배에선 부목사들을 수제사장들로 그렇게 스스로 계급 지어 성도들을 평신도로 명하여 그 위에서 천주교 지존자 놀이하는 목회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철저히 사람을 위하기에, 매주 오후 예배와 전도 집회를 프로그램화하여 청년 자매들을 강단의 무희로, 청년 형제들을 하드 록 가수로 세우고“잘한다!, 영성 있다!”칭찬하는 각 남녀 전도회 및 선교부.
교회에서의 영적 간음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육체적 음행을 하는 지도자들.
“예배에 성공하자!”라는 자기 의와 보여주기식 실적주의.
사람의 생각을 더한 분리주의와 고전적 세대주의(하나님의 역사적 경륜)를 부인하는 것.
장로들의 전통과 교단의 신학교들의 전통을 성경의 우위에 둔 종교 사대주의.
겸손의 옷을 입지 못하여“나만 안다!”고 우쭐대는 지식 우월주의…….
결국 많은 교회의 하나님의 양 떼를 기만하고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음흉하고 엄숙한 모임들에 저희 또한 밝히 드러나지는 않았을 뿐, 저들과 똑같은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한 오점투성이기에 양심상 저들의 연약함에 우리의 연약함이 더해지는 그 최악을 피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교회 투어’하는 것을 그만두고 저희는 스스로 고립되고자‘가정교회’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ㅡ이는 교회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발상임을 나중에 알게 됨.ㅡ
이후 저와 제 아내는 마치 기독교로의 새로 개종한 사람들처럼 저희 자신들의 믿음의 기초를 초기화하듯 다시 성경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한 성경적 용어와 용례들을 알고자 각종 성경 버전들을 구입하고 인터넷을 통해 각 교회의 목사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그들이 배포한 기독교 교리와 믿는 바를 자료로 받아 나름 분별하며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침례교회 목사님께서, 한글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근간으로 인터넷상에 기독교 교리와 믿음을 명확하게 정리한 자료를 읽던 중, 바로 그 목사님께서 부목사로 사역하는 교회가 저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기뻐하며 즉시 그 침례교회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출석한 지 2주 ㅡ과도하게 첫 주 만에 침례를 요청하면 성도님들이 이상히 여기실 것 같아 한 주를 더 인내하였음ㅡ 만에 구원받음의 확신을 하고 물방울 세례가 아닌 정확한 성경적 침례 ㅡ물속으로 잠기는ㅡ 를 받음으로써 그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7. 인도된 마음
그때부터 교회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침례교회와 침례 성도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알고 입문하는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참으로‘없음’이 없는 완전한 성경 또,‘없음’이 있는 성경을 부끄럽게 하는, 창조자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송이 꿀같이 달고 행복했습니다. ㅡ얼추 설교를 분별할 줄 아는 정도로 그간 성장했음을 조금 알게 됨ㅡ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고 더욱 성숙한 성경 신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자연스레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즈음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그 교회 출석과 동시에 알게 된 킵바이블 사이트와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였습니다.
이렇게 지난날의 방황과 어려움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컷 듣고 성도 간의 뜨거운 교제를 나누며 예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를 아십니까’로 통하며 스스로 괴짜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던 젊은 시절의 방황을 뒤로하고 침례를 받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된 것은 저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교회 출석 후 어느덧 3년여의 세월이 지나고 저와 제 아내와 아이들은 우리 가족의 영적 성숙과 평안을 위해서 양심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좀 더 먼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인천 사랑침례교회로 발걸음을 옮겨 이곳에 영적 둥지를 틀게 됐습니다.
저는 우리 가족의 선택과 이런 일련의 변화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했다고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제 가족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새롭게 사랑침례교회의 가족이 되어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열심히 배우고 사람들에게 알리려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잘 가르치며 성도님들과 하나 된 모습으로 믿음의 여정을 꿋꿋하게 걸어가겠습니다.
8. 샬롬
끝으로 지금까지 들으시기에 나름 장구했던 이‘교회 찾아 진리 찾아 아찔한 외줄 타기 40년’ 아니, 이‘믿음의 여정’중에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통해 사랑침례교회로까지 인도해 주시고 평생에 감사할 간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한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또한, 수년 전부터 이 터에서 올바른 성경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각과 심정으로 한국 교회의 선물이 되고자‘처벅처벅’걸어와 주시고 신실하게 터 잡고 계셨던, 우리 형제님들과 자매님들께 깊은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샬롬!
2014-11-27 21:30:31 | 관리자
나의 60번째 생일에 결혼 몇주년이지? 하다 계산기 꺼내기
귀찮아 웃고맙니다. 나는 어떤 소원을 말할까 생각하면서요.
나이 먹어가면서 신앙의 동반자와 함께 사는 행복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2014-11-25 22:31:29 | 김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