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산고를 겪으면 자기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거니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세상에 사람이 난 기쁨으로 인해 다시는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부모가 자녀를 기르며 겪는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정말 고통을 피하며 산다면 결혼해 가정을 일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결혼하고 자녀를 낳습니다.
고통을 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불순종때문에 오는 고통도 있지만 고통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만일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면 통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질병과 노쇠의 고통은 분명 궁극적으로는 죄의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통은 훨씬 숭고한 사역을 감당합니다. 고통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우선 고통은 정화의 위력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였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고통 자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 고통은 우리를 깨끗게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둘째 사역은 그리스도께 동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때 여러분과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일을 전부 겪은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셋째 사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일부러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 이름을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의 고통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앞둔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사 그분을 놀라운 영광으로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습니다.
고통은 우리을 정결하게 합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인을 예수님과 더 가까워 지게합니다. 고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영광과 영예를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많은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사도바울은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를 계속 겸손하고 쓸모있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여느 그리스도인 처럼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셨지만 그 필요는 다 채우셨습니다. 연약함과 고난이 오히려 능력과 영광이 되도록 사도바울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내게도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전폭적으로 그분께 내어드릴 때에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4-11-25 00:40:24 | 박진태
저또한 작은 한 동심원으로 ...
2014-11-23 22:56:15 | 남인수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편42:5)”
우울증은 현대 세계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삶의 이유와 희망이 사라진 탓이겠지요. 우리는 우울증을 극복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대언자 엘리야가 갈멜산 싸움 후에 얼마나 낙심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숙면과 좋은 음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상하게 엘리야를 챙기셨습니다. 휴식으로 힘을 얻게 하신 후에야 그에게 다시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중에도 과로 때문에 낙심과 절망의 나날을 지내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잘못된 신체 습관이 우리를 우울증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사탄의 공격의 결과일 때도 있습니다. 결과는 거의 언제나 죄책감, 패배의식, 절망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적 원인으로 우울증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울증은 대개 일정한 방식을 따릅니다. 우선은 자기보호로 시작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은 상처를 받습니다. 이 상처는 여러분의 평안과 즐거움을 앗아가려 위협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상처에 정직히 직면하여 해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주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연민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자기처벌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뒤로 물러나 자신을 보호하고, 외롭게 홀로 남은 자신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신을 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울증에는 답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오셔서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우울증을 이겨내시도록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공격이 느껴지는 즉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의 모든 상처를 그분께 아뢰야 합니다.
둘째 단계는 시선을 나에게서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연민은 여러분과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태도입니다. 자기연민과 싸울 힘을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시편 42편과 43편에 시편기자는 “내 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하리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기에 내가 나를 벌할 필요가 없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8: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값을 짊어지셨는데 여러분이 자신을 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4-11-22 00:53:28 | 박진태
"내가 진리 안에서 너희를 사랑하며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안 모든 자도 그리함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할 진리로 인함이로다.(요한2서 1-2)"
일단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 진리에 복종하게 되면, 그 누구도 그 진리를 우리에게서 몰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진리를 손님처럼 대하지 말고 주인으로 모셔서, 항상 진리의 말씀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진리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진리가 완전히 내 것이 되게 하는 비결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붙잡고 의지할 생명줄로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요, 우리 나그네 길의 동반자요, 우리가 죽을 때의 안내자요, 우리가 영원히 부를 노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 형편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전적 타락의 진리는 죄로 물든 우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진리는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는 사랑의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청산하셨다는 대속(代贖)의 진리는, 우리를 죄에 대한 형벌에서, 그리고 죄에 관련된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줍니다. 자유 중에서 최고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귀한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영적 양식입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우리가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잘 자라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하셨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갓 태어난 성도는 아이가 잘 먹어야 쑥쑥 자라나듯이, 진리의 양식을 정말 잘 챙겨 먹어야 신앙이 제대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이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0)"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적 식사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잘 먹지 않으면 절대로 건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욥도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0)" 고 했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보다도 말씀의 섭취를 더 소중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영적 건강의 비결입니다. 성도들이 갖고 있는 영적인 문제의 거의 대부분은 영적 식사를 게을리 한데서부터 비롯된 것들입니다.
성경 읽기를 매일 규칙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성경 읽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고정해 놓으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적어도 하루에 한 장 이상 씩 꼭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긴밀히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서, 그 말씀을 늘 묵상하고, 항상 철저히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 내가 주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편119:97, 103).
"내 명령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스펄전.
2014-11-18 01:05:34 | 박진태
제가 마음으로 늘 새겨야 할 저에게 너무나도 합당한 글입니다.
저도 영적 수준이 낮아서 혀를 잘 못 다스려서 말하고 나서 두고두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자책도 많이 하곤 했는데 글을 읽으니 제 영적 수준이 어리기 때문이었군요.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할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4-11-17 16:08:36 | 이정희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약 3:2)"
우리가 얼마만큼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깊숙히 연합되어 있으며, 또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지는 우리의 '혀'가 말해줍니다.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자기 혀를 절제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소위 신실한 사역자들마저도 함부로 말함으로 자신의 '육'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만일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절제한 혀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니라.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서 그와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지옥 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약 3:6)"고 했습니다. '본성의 행로'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성향을 말하는데, 혀는 잠자고 있는 이 본성에 불을 붙여 갑자기 확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평온한 상태에 있다가도 어떤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확 끓어올라 폭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지옥의 무기는 '혀'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님께서는 부당한 고소와 심문을 당하시는 중에도 놀랍게 침묵을 지키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을 나타내셨습니다.(눅 23:9)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음과 연합된 성도들은 주님처럼 침묵함으로 '혀'의 요란함과 분쟁을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혀는 아무 때나 옛사람의 본성에 불을 질러, 우리 안에 분노와 증오의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몹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혀를 절제함으로 자신의 영적 수준을 드러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 깊숙이 거하여 혀를 다스리는 가운데, 요란하며 조급하고 분노에 찬 말들을 주님의 침묵으로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완전함은 우리의 기도의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는 힘은 오직 기도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디모데전서 2:8)"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우리의 영적인 위치를 확실히 지키도록 하십시오. 말실수 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오 주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편 141:3)"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1-14 23:54:40 | 박진태
저도 어떤 문제를 만나면 입으로는 주님을 찾지만 인간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보고 총 동원해 보다가 결국 그것으로 해결이 안될때에야 비로소 마음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2014-11-11 15:14:13 | 이정희
"우리가 전에 왕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그분을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나 그분의 권능과 그분의 진노는 그분을 버리는 모든 자를 향하나이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원수를 막고 우리를 도와줄 병사와 기병의 무리를 왕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이라.(에스라8:22)"
예루살렘을 향해 일행들과 함께 멀고 험한 길을 떠나는 에스라로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호위병이 함께 따라가 준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거룩한 부끄러움 때문에 단 한 명의 호위병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이방국의 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 주시지도 않는 분이라고 생각할까봐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인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인간의 도움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행은 사람들의 어떤 보호도 받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해서 그분의 보호를 받으며 담대히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에스라처럼 하나님을 위해 이런 거룩한 부끄러움과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성도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조차도 사람의 도움을 너무 의지하다가 자신의 간증에 먹칠을 하곤 합니다.
가이사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주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교회를 위해 주정부에서 기금을 받아 내려고 그렇게 애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수 없는 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후원자는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만큼 복된 일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의지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도 그렇게 급히 친구나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가시겠습니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적인 수단도 사용해야 합니다." 라고요? 물론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수단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도 인간적인 방법을 너무 많이 의지해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을 다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면 그 믿음의 분량대로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간증이 아주 많습니다.
스펄전.
2014-11-10 23:57:26 | 박진태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마20:22)"
영적생활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시는 곳을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 혼란을 겪고 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보이지 않을 때(눅11:5 ~ 8) :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에게 무심해 보이는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때로는 하나님아버지도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무심하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모든 것이 밝혀질 때가 올 것입니다. 더 깊이 알고 온전히 하나 되기까지는 우정에도 어두운 날이 있고, 사랑에도 고통스런 기다림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전혀 보이지시 않을 때도 그분을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그늘이 덮일 때(눅11:11 ~ 13) : 하나님께서 때로는 얼핏 냉담한 아버지로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구하는 자마다 받고 찾는 자는 찾으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10절)" 지금은 하나님아버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지만, 왜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겪어야 했는지 언젠가 밝히 보여주실 것을 믿고 인내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심이 생길 때(눅18:1 ~ 8)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어떤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에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꼭 붙잡아 믿음 안에 더욱 굳건히 서십시오.
지금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그 일을 위해서라도, 그보다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PS "하나님 형상닮게 모난 나를 연단하실때"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시고, 나는 고난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내게 낮은 마음가지게 하시려고 좁은 길로 인도하실때 하나님은 은혜라 부르시고, 나는 연단이라 부릅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나를 떼어 놓으려고 부와 명예를 풍족히 갔다줄때, 하나님은 시험이라 부르시고, 나는 축복이라 부릅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2014-11-04 22:29:08 | 박진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구원의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세상이 점점더 악해지고 사나워지고 살기 어려워져 가는것을 보면서도 짙은 어둠후에 여명이 밝아오듯 우리 주님께서 오실날이 가까워 옴을 알기에 두려움에 빠지지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평안히 쉴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2014-11-04 15:25:26 | 이정희
주님은 모든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에 오래 참으시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결말이 되어 참으로 기쁘셨겠네요~
더불어 상급도 많겠구나 ~하는 생각도 ^^
특별한 경우라 잊혀질수 없는 아름다운 마침표네요.
2014-11-03 17:30:11 | 이수영
한 혼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신 과정이 참 아름답고 귀하시네요.
그 기도에 주님께서 아름다운 결실로 화답해 주신듯 합니다.
세상을 떠날때 마음에 조금이라도 맺힌것이 없을수 있게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겠네요.
가슴 따뜻하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시는 잔잔한 글 감사드립니다.
2014-11-03 16:01:52 | 이정희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능력이시오, 나의 노래시며 그분께서 또한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이사야12:2)”
두려움에 빠지기 너무도 쉬운 이 시대에 이사야 12장 2절은 꼭 알아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장차 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낙담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성경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공경과 경외를 의미합니다. 이는 잔인한 주인 앞에서 벌벌 기는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합당한 공경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길이 이 두려움에서 열립니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뜻하신 삶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셀 수 없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싸움에 이기도록 능히 도우실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의 근본 원인을 찾아보면 분명히 부각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두려움의 참 원인은 불신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폭풍우 속에서 배가 침몰하려 할 때에도, 조금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신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풀지 못할 만큼 큰 문제, 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짐, 싸워 이길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싸움은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믿음이 자라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는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는 기도하며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 안에 계신 성령님은 연약한 당신에게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당신을 약탈하고 농락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27:1)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위어스비) 중.
2014-11-02 23:12:19 | 박진태
참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한 영혼을 주님 전에 인도하기까지 여정..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물론 주님의 은총없인 불가한 일이기도 할테구요.
또한 아직도 사랑치 못하는 대상과 완악한 제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를 주셨습니다.
감사드려요.
2014-11-02 22:25:22 | 장경희
가을이 되니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주위에 아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부터 한 17년 전이 되는 것 같네요.
이층교회를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젊은 부부 집사님이 찾아와서 자기들은 큰 교회를 나가는데 우리 교회를 나오겠으니
친정아버지가 위암인데 앞으로 6개월밖에 못산다고 병원에서 시한부로 판정을 받았다고 전도를 좀 해서 그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전도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부탁을 받고 그 집을 찾아가니까 언덕진 마을에 구멍가게를 하고 생활을
하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딸만 셋인데 큰딸 부부가 우리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손녀딸 이름이 김꿈새 였습니다. "꿈새 할아버지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면서 성경을 읽어
드리고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완강하게 거부를 하면서 내가 믿을 것 같으면 젊어서 믿었지 안 믿겠다고 하시면서 전엔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하는 목사를 멱살을 붙잡고 싸우기까지 했으니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부탁을 받았으니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예배를 드리고 전도를 했습니다. 바싹 여위고 배만 복록 나와서 기운이
없어서 밖으로 나가시지는 못하니까 돌아누워서 대꾸도 안 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을 떠나야 할 혼을 생각하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은 그분의 딸 부부만 부탁을 안 했어도 안 믿겠다고 완강히 거부한다는 핑계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사위와 딸. 부부는 열심히 교회에 나오시면서 온 교인들이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서는 매월 마지막 주에는 구제헌금을 드렸습니다. 앞에다가 헌금 바구니에 차례로 나와서 어린이들도 천원 하나라도 찬송을 부르며 오른쪽으로 나와서 좌측으로 들어가면서 성의껏 구제헌금을 모아서 어려운 집이나 갑자이 어려운 일 당한 집을 도왔습니다. 하루는 그 구제헌금을 싸들고 가서 그날도 냉랭한 반응으로 대하는 꿈새 할아버지께
"이 돈 얼마 안 되는데 병원비에 써 주세요." 하면서 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찾아갔더니 반가워하면서 "어서 오세요." 하시는 겁니다. 속으로 깜짝 놀랐어요.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이렇게 큰 줄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 후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이면서 말씀을 듣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점점 병이 깊어져서 집에서는 힘들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입원하신 병원이 세브란스 병원인데 주일이면 그 안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시고 믿음이 쑥쑥 자라는 것이 제 눈에 보였습니다.
한번은 갔더니 세례 [침례]를 받고 싶다고 해서 준비를 해 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장로교회서는 세례라고
했으니까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까?" 목사님이 물으시니까 "그러니까 받죠!" 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 생각에는 약식 세례가 이럴 때는 좋은 것이구나. 만약 침례 같으면 못 받으셨을 텐데 .
다 죽어가는 사람을 침례탕에다 들어가게 할 수는 없겠구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평소 때는 예수님도 요르단강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침례를 받았는데 왜 머리에 물만 묻히는 약식 세례를 주는 걸까? 하는 의문은 있었지만
침례 교회서만 침례를 주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며 감격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아주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그날도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가 초음파 검사하는 모니터를 연결해놓고는 환자의 맥박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다가 점점 잦아지고 일직선으로 쭉 그어지면 운명하시는 거니까 의사나 간호사에게 알려달라고 하면서 얼굴까지 덮어 놓았습니다. 마지막 혼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입성하는 귀한 시간이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이 환자가 손으로 얼굴에 덮인 이불을 벗기면서 "저거 어떻게 되었나 보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놀래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습니다.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 하는 분이 모니터에 자기 생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부터 고민이 되었습니다. 왜 못 돌아가실까. 대게는 병원에서 가신다고 하면 가시는데 원인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실 분은 빨리 가셔야지 며칠 안 남었다고 해서 매일 가다시피 하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못 가시는 원인을 알았습니다. 그 부인되시는 분이 "사모님 참 이상해요. 동네 사람들이 손을 잡고 말을 하면
잘하는데 나는 손을 잡으면 뿌리치고 외면을 해요." 하는 것입니다. 아, 원인이 여기 있구나. 하고 환자한테 갔습니다.
"꿈새 할아버지 천국에 가셔야지요." 하니까 "가야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 못 가시겠네요." 했드니 왜요?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 문이 안 열려요. 아니 천국에 가시려면 누구든지 다 용서하시고 사랑해야 하는데 왜 부인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면 뿌리치고 외면을 하고 마음 아프게 하십니까? 그래서는 천국에 못 가십니다.
천국에 갈 마음에 준비가 되어야 천사가 와서 데려가는데 그 마음가지고 못 가십니다."
"살다 보면 부부간에 섭섭 한것도 있었겠지만 다 풀고 용서하셔야지요, 꿈새할머니가 병원 뒷바라지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시는데요. 전에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으셨습니다. 한 손으로 가게 보며 살림하시고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
고마움도 모르시고 그렇게 부인 마음을 섭섭하게 해 놓고 천국에 가신다고요. 절대 못 가십니다."했더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겠어요?" 했드니 "네!"하고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그럼 절대로 건성으로 하시면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셔야 합니다." 꿈새 할머니를 모셔올 테니 여보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요, 고마워요. 하라고 하고서는 꿈새 할머니를 모시고 남편 있는 침대로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자기 부인 손을 붙잡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여보, 수고 많이 했어요. 고마워. 당신을 사랑해 ,!" 하면서 눈물이 글썽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모님 사모님 이 양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하면서 감격해 하였습니다. 아니 ,어찌 평생에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안했단말인가. 이런 부부도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천국 문이 열리겠구나!
사람이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맺혀있는 것이라든지 섭섭하고 원망 들을것 은 다 용서하고
풀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평안할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 같아요.
지옥에 가는 사람은 끝까지 원망, 불평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지만, 천국에 소망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 용서가 될 수 있으니까요. ; 그래요. 우리 모두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 나가면 이 세상을 떠날 때
기쁨으로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 이로서 모든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요 13 ;34.35
그런데 그분은 그 다음 날 오전에 조용히 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장례식은 은혜롭게 교회에서 마쳤습니다. 한번도 교회에 못 나오시고 딱 6개월 믿고 가셨어요.
물론 병원 교회에는 몆 주 나가셨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일이 생생하고 흐뭇합니다.
귀한 생명이 영원히 구원받은 일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그 이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송 관 하 성도님............
2014-11-02 05:22:32 | 윤정용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예수님의 기쁨은 무엇이었을까요? 행복이라는 말을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모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자기 포기와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일을 행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오니 기뻐하라.(빌4: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도 예수님의 기쁨같이 충만하기를 간구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그 기쁨을 내게 들어오게 하시도록 마음 문을 열었습니까?
은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세상적인 성공, 육신의 건강, 환경의 좋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충만한 삶을 살려면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가지셨던 것 같은 사귐 가운데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가장 먼저 방해하는 것은 주위 상황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품는 짜증과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염려가 들어와 말씀을 숨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무슨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염려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참된 기쁨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해 생수를 쏟아내실 수 있는 그런 샘이 되십시오. 위선과 교만을 멈추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져 있는 당신의 참 생명안에 거하십시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주위 사람들에게 그 존재 자체가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2014-11-01 00:29:54 | 박진태
어느 대기자가 쓴 칼럼을 읽으며 느꼈던 경탄과 비탄이 교차합니다.
경탄이란 필자로서 형제님의 뛰어난 지식과 실력,
그리고 킵 바이블에 저장된 엄청난 물량의 보석에서 발산하는 빛의 압도입니다.
비탄이란 독자로서 저 자신의 무식과 무능,
또 우량 기업 킵 바이블의 한 주주로서 전혀 주가를 알지 못 하는 어둠의 굴레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글로서 자주 일깨워주시니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0-27 23:51:01 | 최상기
킹제임스 성경이 주님께서 온전히 보존해 주신 성경이라는 것을 다시금 제 마음에 각인케 해주시고 어떤 마음가짐 으로 성경 말씀앞에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해주시는 귀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둔한 사람인지라 출력하여 여러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2014-10-24 15:45:34 | 이정희
아침시간에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잘 정리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분이라도 믿음의 근거인 잘못된 교과서를 사용하면 다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믿는 자의 삶이 영적 싸움중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적 무장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깨어서 종을 울려주고 경각심을 주는 글 감사합니다.
2014-10-24 09:36:43 | 조양교
야고보서 3:13 너희 가운데 지식을 갖추고 지혜로운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자신의 행위를 보일지니라.
야고보서 3: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야고보서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으로 관능적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야고보서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거기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느니라.
야고보서 3:17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화평하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이 없고 위선이 없나니
야고보서 3:18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자들의 화평 속에서 뿌려졌느니라.
이 아침에 머리를 맑게 하는 귀한 글 감사합니다. 링크된 내용도 찬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2014-10-24 08:34:45 | 김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