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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2:20)"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십자가의 대속(代贖)입니다. 우리의 죄의 근원은 아담에게서 물려 받은 죄성(sinful nature)이며, 이 죄성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속의 특징은 이 자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끝장을 내고 나서 새롭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자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옛 사람이 아닌 새로운 인격을 창조하시고 그 인격안에 들어오심으로, 우리의 인격의 새로운 중심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그냥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창조된 인격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곧 나의 영이요, 나의 자아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새로운 인격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의 인격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상의 상태로 창조됩니다. 성령님께서 중심이 되시면,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롬5:5), 즉 사람이 학습해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인격을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대속을 믿는 즉시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성령님으로 새롭게 창조됩니다. 이렇게 새롭게 창조된 인격의 특징은, 그 속에서 사람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샘솟아난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17 00:19:49 | 박진태
신약 시대 음식에 관한 바른 기준은 무엇입니까? Q :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파주에 사는 김○○이라고 합니다. 저는 근 13년간 천주교에 몸담고 있다가 스스로 5년 전 개신교로 교적을 옮겼습니다. 개신교로 옮긴 후에 무늬만 교인이 되기 싫어서 제 나름대로 성경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8개월 전부터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처음으로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반교회에서 설교하는 교리와 비교해 보니 정말 개역성경이 아닌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실하게 전달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고 바른 구원관을 접하게 되어 너무나 신선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하.......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성경에 의거한 정확한 구원관도 없이 막연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겠구나!”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으로 사방팔방을 둘러봤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침례교회와 같은 교회를 제 주위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또 듣고를 반복하며 며칠 전에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의 책도 구매하고 특히 mp3 CD를 운전하며 늘 듣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를 통해 날마다 너무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1장의 CD에 50분 정도 길이의 말씀이 21개 정도의 분량으로 들어 있는데 들을수록 진리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듯합니다. 저의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정동수 목사님.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는 구절이 있어 문의를 드립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에게는 먹는 음식에 대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해 구분되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 집에서 구약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음식구분이 없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의 말에는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고 쓰여 있습니다(행15:29). 질문 사항 1. 왜 야고보는 신약시대에 먹는 음식에 대하여 언급을 하나요? 잘못된 것 아닙니까? 2  야고보의 언급이 맞는다고 하면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먹고 있는 선짓국도 먹으면 안 되는 건가요? 더불어 목매어 죽인 것도 멀리하라고 하는데 목매어 죽인 개고기 등도 먹으면 안 됩니까? 목사님 바쁘신데 귀찮게 해드려 죄송하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A : 형제님 이렇게 메일로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형제님의 물음에 목사님을 대신해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도행전15장 6~21절은 예루살렘에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한 일명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성경기록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출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지도자들 사이에 이방인 신자들의 할례문제와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는 등의 문제로 갈등과 논쟁이 있었습니다(행15:1~2).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의 19~20절의 판결은 이런 당시 상황의 맥락에서 나온 말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새롭게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 신자들을 배려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에게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최소한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의 판결은 신약시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대변했다기보다 당시의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한 교회 지도자의 발언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 후 시간이 흘러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신약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집대성한 바울의 고린도전서 10:27~28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야고보의 판결보다 더 온전하고 더 점진된 계시의 말씀이라 볼 수 있는 이 기록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 중에서 누가 너희를 잔치에 초대하여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라고 음식에 대한 행동 기준을 명쾌하게 가르쳐 줍니다. 다만 28절에서 우상에 바쳤던 음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 사람의 약한 양심을 위해 함께 먹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되는 행동이라는 권면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음식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 신약 시대라고 해도 세상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와 고상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식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상식의 차원에서조차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사도행전 15장의 야고보의 판결은 과도기에 유대인 신자와 비유대인 신자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과도기적 시대 상황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후 성경에 기록된 더 점진적인 계시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이라고 본다면 신약 교회의 교리를 완성한 바울에 의해 기록된 고린도전서 10장의 음식에 관한 성경 말씀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말씀입니다. 부족한 답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기 바라며 항상 단순한 진리의 말씀과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12-16 22:08:15 | 김대용
칼빈주의와 구원받은 자의 죄에 관해서 궁금합니다. Q : 안녕하세요. 저는 가정교회로 신앙을 지켜가는 김○○이라고 합니다. 저희 가정도 킹제임스 영어 성경을 읽으며 유튜브에 올라온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와 강의를 시청합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존 파이퍼 목사나 폴 워셔 혹은 존 맥아더 목사의 설교를 듣는데요. 뭔가 좀 율법주의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분별할 지식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존 파이퍼 목사가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정확히 칼빈주의를 뭐라 정의를 해야 하는지요? 이것을 말로 설명하려니 어렵습니다. 지금 시대에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보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또, 이단이 많다 보니 어느 목사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무척이나 혼동되고 힘이 듭니다. 그리고 저희 아들이 죄에 관해 물어봅니다. 구원받은 자는 죄에 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구원받은 자는 죄에 대해 어떠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에 죄에 자유함을 얻은 자이고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기에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희가 거제라는 먼 곳에 살아 유튜브로나마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접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 : 형제님 반갑습니다. 먼저 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 폴 워셔 목사, 존 맥아더 목사는 모두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목회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상당히 방대한 신학 사조 혹은 신학의 체계라 할 수 있는 칼빈주의를 일단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칼빈주의(Calvinism)는 흔히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라고도 하며 마틴 루터의 뒤를 이은 2세대 종교개혁자로 분류되는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존 칼빈(Jean Calvin, 1509.7.10 ~ 1564.5.27)에 의해 발단하고 정리되어 후대에 그의 성경 해석과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확산하고 정립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종교 개혁을 거치며 유럽 전역에 프로테스탄트의 주류 신학으로 자리를 잡으며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칼빈주의는 16~17세기 영국에서 칼빈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인 청교도(Puritan, 淸敎徒)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확산하였습니다. 현재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파로는 대표적으로 장로교를 들 수 있지만, 예외적으로 개혁 침례교회 등 다른 개신교단에서도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곳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칼빈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칼빈주의의 기원은 사실 칼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가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정립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람 즉, 소위 교부라 불리며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립되고 발전하는데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최고의 공신으로 평가받는 어거스틴(Augustine)이 칼빈주의의 참 기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어거스틴의 정통을 물려받은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원을 가진 칼빈주의 신학 사상은 흔히 다섯 솔라(Five Solas)로 알려진 라틴어로 쓰인 다섯 가지의 표어와 튤립 교리라 불리는 5대 강령,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등을 통해 세상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 배치되는 내용과 체계를 이루고 많은 사람을 미혹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 5대 강령 중에 ‘전적 타락’의 교리와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와 밀접한 ‘칼빈주의 예정설’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주권으로 창세전부터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미리 선택하시고 로봇처럼 아무 의지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인간의 영과 혼을 깨우셔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만을 구원으로 이끄신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인간은 구원받는 것에 자신의 의지조차도 발휘하지 못하는 완전히 무의미한 로봇이 되며 어떤 관점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기에 힘을 써서 전도할 필요성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못된 기원을 가지고 있고 그 면면을 살펴볼 때 비성경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며, 또한 제네바 통치 당시 비정한 학정과 지독한 독선으로 얼룩졌던 칼빈에 대한 역사 자료들이 지금까지 생생한데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칼빈주의라는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까요? 사실 칼빈주의를 조금만 깊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칼빈이라는 희대의 천재를 통해 성립되고 수많은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수재들을 통해 정교하게 부풀려지고 세워진 이 사상 체계가 성경을 매우 교묘히 왜곡해 왔으며 어떻게 가장 성경적인 신학 사상으로 자신을 위장해 왔는지 잘 알게 될 겁니다. 이제 여기서 이 영악하고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괴물의 모순과 잘잘못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는 것이 불가능은 아니나 짧은 하나의 글로는 사실 수박 겉핥기식의 논설을 펼치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래에 튤립 교리라 불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해 심층 분석하고 설명한 강의 동영상을 소개해 드리니 시청하고 칼빈과 칼빈주의를 비평한 책과 그와 관련된 킵바이블의 글도 소개해 드리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2015년 초에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 출간을 준비 중인 신간 ‘칼빈주의 바로알기’를 통해 이 약삭빠르고 덩치 큰 괴물이 어떻게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성경의 진리에서 이탈하게 했는지 이해의 깊이를 더하시면 좋겠습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 : 1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76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2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77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3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79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4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80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5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84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6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85 *칼빈주의(개혁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47 *칼빈주의 구원 도표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70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책 소개)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42 *하나님과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독재에 항거하며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53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칼빈주의와 대체신학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397 칼빈주의는 이 정도로 갈음하고 더불어 문의하신 구원받은 사람의 죄 문제에 관해서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가장 깊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신약성경 구절 중 하나가 바울의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는 로마서 7장 13~25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23~25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2 내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들 안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처럼 가장 걸출한 신약 시대의 성도조차 이런 갈등을 겪었는데 하물며 오늘을 사는 그 누가 이 땅의 삶 중에서 육신으로부터 100% 자유로워져서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구원의 영원한 안전함을 보장받아 마땅히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하는 성도들도 때로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의 법을 섬길 수 있습니다(롬7:25). 이런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또한 세월이 갈수록 줄어들 수 있게 우리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서 5장에 육신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대비시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만약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대신 속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으므로 구원받은 후에 짓는 모든 죄에 대해서는 별 의미가 없고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앞으로 서게 될 그리스도의 심판석(롬14:10, 고후5:10)에서 그야말로 큰 낭패를 보게 될 겁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제 남은 지상에서 삶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모습과 태도를 보이느냐가 영원의 시간 속에서 누리게 될 그리스도인의 보상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마치 화재로 인해 모두 타버린 집에서 벌거숭이 몸뚱어리로 겨우 구출된 사람인 것 마냥 받게 될 보상의 손실은(고전3:12~15) 한날의 부끄러움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그것으로 만족하련다.”라는 졸렬한 생각에 심취한 사람은 그날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해 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이런 중대한 성경에 진리에 대해서는 아래의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라.”라는 설교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인의 죄 문제에 관한 좋은 글들도 소개해 드리오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라 (고전 3:1~17) :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550 *죄와 죄들의 차이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73 *제 2장 죄에 대한 승리 비결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4_02&write_id=62 *제 3장 죄에 대한 승리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4_02&write_id=61 *범죄자 중에 기독교인이 많다고요?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499 *의인 코스프레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037 이 외에도 성경지킴이 사이트 오른쪽 위 끝에 있는 구글 검색 메뉴를 이용하셔서 단어 검색을 하시면 다른 많은 글과 영상을 읽고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형제님의 고민처럼 어떤 설교자와 성경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라가야 할지 정말 혼란스러운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길을 찾아 행하기 위해 힘써야겠습니다. 제 부족한 답변이 형제님께서 바른길을 찾으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앞으로 메일로 질문해 주시는 내용 중에서 함께 나누어 유익할 만한 것들은 정리해 가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14-12-16 21:57:31 | 김대용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이 말씀대로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인 되시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음에 연합해 죽었다가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4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었느니라."고 한 것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자아'가 죽었으므로, 이제 '자아'는 더 이상 우리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의 중심은 내 '자아'가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자아'는 자만하건 겸손하건 간에 더 이상 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나 '세상'보다 더 깊이 다루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아서, 아무리 가르치고 훈련해도 조금 나아질 뿐, 그 부패한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아'는 잘 달래서 교화시킬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 '자아'라는 중심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 주님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변화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마저도 육신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내세워 '나'의 욕심을 채우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고집을 부리게 되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내 '자아'에서 주님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죽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믿음의 길이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께 계속 순종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다스리시게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최대의 적은, 죄나 세상이 아니라 '자아'입니다.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15 21:42:17 | 박진태
죽은자는 말이없고 죽은자는 어떤일을 당해도 결코 반응하지 않지요. 간혹 인터넷 뉴스에 보면 분명히 사망이 선고되어 입관을 기다리던 사람이 깨어나는 황당한 경우도 있던데 저또한 옛사람이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는데도 어떤 일을 만나면 벌떡 벌떡 일어날 때가 아~~~주 많음을 고백합니다.
2014-12-15 13:18:42 | 이정희
최재원형제님의 간증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십자가의 도'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방황하는 원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옛사람은 구제 불능입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훈련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이 해결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나니...(갈2:20)"라고 했듯이, 우리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함으로 옛사람을 끝장내야 합니다.   이러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참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주님의 죽음에 연합된다는 뜻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을 이기려는 노력에 있지 않고 단순히 그것에 대해 죽는데 있습니다. 죽으면 이깁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이 숨겨져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나니..."   십자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를 정말 괴롭히는 것은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되는 길은 오직 십자가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가 없기에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 곧 죄로부터의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청산하셨다는 '대속(代贖)'의 진리를 믿기만 하면, 그 십자가의 능력은 언제든지 우리 삶에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을 이기려는 노력에 있지 않고, 단순히 그것에 대해 죽는데 있다."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13 21:30:25 | 박진태
이제는 이전에 보뎐 손 때 묻은 개역성경들까지 다 버려서 개역에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 알아보려면 앱을 이용해야 하지요. 빌 3:20절을 개역은 시민권으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우리 흠정역은 생활방식으로 되어있지요. 영어로는 conversation 인데 왜 생활방식으로 번역을 했느냐고 친구가 물어왔어요. 영어사전을 찾아서 아래 쪽으로 내려가 '(고어) 생활방식' 을 보여 주고 제임스 왕 때 영어성경이 쓰여진 당시부터 지금까지 흠정역은 한 번도 개정이 없는 변함없는 성경임을 강조했지요. 외국에 나갈 때 마다 우리 CD를 가지고 나가서 누구에게든 전하려고 하는 친구에요. 자기가 다니는 교회서 나온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정말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익숙해 있어서 감사가 줄어든 것 같아요. 올해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것들에 감사를 얼마나 했는지? 나의 마음이 주님께로만 향하는 나날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014-12-11 16:43:31 | 이수영
글을 읽는내내 이보다 더 감격스럽고 가슴벅차고 감사할 수가 없네요. 살아서 주님오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이나 죽어서 영광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 둘중 어느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임하더라도 그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2014-12-11 15:37:12 | 이정희
아침 눈을 뜨면서 부터 잠들면서 까지 온통 제 머릿속 생각이 주님으로 가득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교회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낼때였고.. 그때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자 말씀에 대한 갈증으로 내영혼이 메말라 갈때였으며.. 그때는 직장동료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 내마음이 원망과 분노로 강팍할 때였으며.. 그때는 이 모든것들이 주님이 안계셨다면 견딜수 없는 그런 상황이였습니다.. 지금 저는 그토록 찾아 헤메던 바른교회를 찿았으며.. 지금 저는 그토록 애타게 찾던 바른 하나님 말씀을 매주일 들으며 영혼의 자유함을 누리고 있으며.. 지금 저는 선한직장동료와 기쁘게 일하고 있으며.. 지금 저는 원망과 분노로 강팍했던 제 마음에 부드러움이란 평안을 찾아 행복합니다.. 헌데 지금 이런 제게 안타깝게도 눈뜨면서 부터 잠들때까지 내 생각속에 계셨던 예수님이 자꾸 조금씩 사라지는것 같습니다..어느순간 그자리를 티비 드라마가 채우고, 쓸데없는 세상생각들로 채울때가 점점 많아지는 요즘 입니다.. 이지면을 빌어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 내 생각을 주님께 다 내어드리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자매님.. 귀한글로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2014-12-11 13:20:00 | 이명숙
 예전에 개역성경으로 말씀을 읽을 때 좋아했던 구절이 이사야 26장 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입니다.   여기서 심지는 우리가 쉽게 연상할 때 초를 지탱하는 심지를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 한결같고 믿음직스런 사람을 이야기 할 때도 '그사람 심지가 참 곧은 사람이야'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흠정역으로 보니,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인데도 참 의미가 확연하지요. 우리에게 보다 명확하고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사실이 참 새삼 은혜로 다가옵니다.   다음은 제임스 낙스목 사님이 쓰신 <성령의 열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요즘 자매모임에서 <성령의 열매>를 읽고 함께 교제를 나누기에 어젯밤 읽다가 너무 좋은내용이라 잠시 공유합니다.    여기 보시면 지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은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완전한 평강(perfect peace)이란 말씀이 실로 놀랍지 않으십니까? 누구를 지키십니까? 그의 생각(whose mind)이 주님께 머물러(is stayed)있는 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를 생각 속에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발적으로 생각을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고정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평강(화평, 평화)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질병이 왔을 때도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머물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번영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칠 때도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선택이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환경과 여건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thought)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악한 추측과 상상과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실한 것, 정직한 것, 올바른 것, 순수한 것 ...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살아갈 때 영적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심, 두려움, 염려, 분노, 쓴뿌리, 이 모든것들 대신 위에 열거된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운다면 곧 그것이 승리입니다.   우리 모두 생각대신 기도를 하십시다. 아멘!    구구절절 귀한 내용이라 올려봅니다. 샬롬~
2014-12-11 09:45:37 | 김경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4:17)"   만약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짧아서, 우리가 그분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가 싶으면, 어느 새 그분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장차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뵙게 될 날을 생각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모릅니다. 그때가 되면 그분께서는 잠시 머물다 떠나시지 않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구세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경이로움에 잠겨..넋을 놓고 바라보리라. 영원 속에서 그분의 기이한 사랑을 흠모하리라..)   천국에서는 마귀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계21;4)" 하신 말씀처럼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아무 걱정도 없이, 찬란한 영광중에 계시는 우리 주님을 벅찬 가슴으로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 빛나는 얼굴을 항상 바라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마음 설레는 일입니까!   아, 그 날이여, 언제나 오려는가! 언젠가 저 죽음의 문을 넘어서면, 우리는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우리 주님의 눈부신 영광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교제를 누리는 천국의 입구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이란, 보내는 우리에겐 아쉬운 이별이지만, 떠나는 본인에게는 사랑의 주님과의 설레는 상봉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슬퍼하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의 묵상중.   "소천하신 장모님을 생각하며 발췌하였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신 형제 자매님분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드립니다."
2014-12-11 00:29:39 | 박진태
샬~롬 저는 노란 들국화 향기보다 하얀 백합꽃 향기를 참 좋아합니다.. "어두운 밤이되면 은은히 비춰주는 달과별을 보며 너는 외롭지 않고 즐겁다고 속삭이겠지" 란 글귀에선 그간 잊고 살았던 어릴적 소녀의 감성을 깨우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떠한 환경이 주어지든 그 환경을 잘 다스리고 정리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면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분명 능력의 하나님 손에 붙잡혀 사는 사람이며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 속마음을 짐작할수 있으며 좋은말에는 늘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나쁜말에는 늘 독한 냄새가 난다는 탈무드의 지혜는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새겨야할 말임을 또 한번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느곳에 있든 잠시라도 주님의 기쁨의 도구로 쓰임받는 시간 되길 기도 합니다.. 자매님,귀한글 감사 합니다.^^
2014-12-10 11:44:26 | 이명숙
지난 주일에는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고 떡을 제공해 주셔서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인지 몰라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장례식에도 가보지도 못하고 떡만 맛있게 먹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섬기시는 모습 고맙습니다. 어느 형제님인지 살짝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늘 좋은 글은 보는데 어느 형제님인가도 궁금했고요.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2014-12-10 06:43:58 | 윤정용
잘 살아가는 길   어떤 시골 마을에 이상한 장사꾼 하나가 들어 왔습니다. 그 장사꾼은 이렇게 외치면서 마을을 누비고 돌아다녔습니다.    “자, 여기 잘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잘 사는 방법을 사시오! 이 방법을 사면 절대 실패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장사꾼이 소리치는 말을 듣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길을 걷던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장사꾼이 떠들고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잠깐 사이에 장사꾼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여보시오,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을 내가 사겠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한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나한테도 파시오. 나도 삽시다.”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사꾼은 다른 장사꾼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옷도 잘 입었고 흰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점잖게 생긴 노인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오늘은 특별히 잘 사는 방법을 공짜로 나눠 주겠소. 바로 이 말이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이오. 사람의 속은 들여다볼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 속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좋은 말에는 늘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나쁜 말에는 늘 독한 냄새가 나는 법입니다. 혀는 사용하기에 따라 가장 좋은 것도 되기도 하고 가장 나쁜 것도 될 수도 있습니다.”   ㅡ탈무드 지혜의 책에 있는 글을 옮겼습니다.ㅡ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       약 3 ; 2                                                                      주여 나를 잡아주소서   찬란하게 아름다운 세상에 취해서 마음을 뺏기고 주님을 잊고 살까 두렵습니다. 달콤한 세상 재미에 빠져 먹고 마시며 즐길 때 주님의 십자가를 멀리 떠나갈까 두렵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 주소서. 외롭게 홀로 서 있을 때 포근한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감싸 주시고 힘이 없고 연약하여 울고 있을 때 주님께서 힘 있는 능력의 손으로 나를 잡아 주소서.   주여 나를 주님의 기쁨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환     경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 환경은 벗어날 수가 없답니다. 환경을 잘 다스리고 정리해 나간다면 어떠한 환경도 그 사람에게는 좋은 벗이 될 수 있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 보면 그 환경이 그 사람을 빛나게 해줄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이든지 지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이 그를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는 능력 있는 분의 손에 붙잡힌 자일 것입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이런 삶을 살 수 없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감사하는 자는 그분의 자녀일 것입니다.                                                      들  국  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들판에 홀로 피어서 열심히 열심히 아름다운 모습을 바람에 휘날리며 그윽한 향기를 멀리멀리 보내고 있는 들에 핀 들국화야!   무엇이 그리 기뻐서 늘 방실방실 웃으며 해님을 보고 웃고 있느냐 ? 어두운 밤이 되면 은은히 비춰주는 달과 별을 보며 너는 외롭지 않고 즐겁다고 속삭이겠지.   바람에 부탁해서 삭막한 도시 속에서도 맡을 수 있도록 너의 그윽한 향기를 실어 보내렴.   지치고 찌든 삶 속에서 너의 향기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아주 많이 보내다오. 눈으로 안 보여도 너의 존재로 세상이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행복할 거야 .   ㅡ 위의 글 들은 십 년 전쯤 적어 놓았던 글들입니다. ㅡ                                                            
2014-12-10 06:30:37 | 윤정용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자신을 못 박은 죄인들의 용서를 하나님께 간구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용서라는 것은 심지어 사치로까지 여겨집니다. 때로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에 관계가 금방 회복되고 화목하게 보이는 것만을 용서와 화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요 동역자였던 바나바와의 강렬한 갈등을(행15:36~41)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바로 그 갈등의 원인이었던 마가에 대한 애정 어린 평가로써(딤후4:11) 갈무리했던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화해의 열매가 무르익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꼭 필요하기도 합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 수 있길 저도 간절히 소망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분주함 속에도 변함없이 신실하게 좋은 글을 다듬어 올려 주셔서 항상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12-09 16:49:05 | 김대용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마18:21-22)"   용서는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다치는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상대에게 원한과 앙심을 품고 용서하지 않으면 내 속사람에게 독이 퍼져 정서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병에 걸립니다. 그 병은 인간이 만든 약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합니다. 남들은 실수할 수 있지만 나는 절대 실수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과민합니다. 남들의 말과 행동을 모두 나와 연결시켜 해석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속으로 파고들어, 삶의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가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대개 외롭고 비판적이며 불안합니다.   용서하려면 먼저 용서받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것을 깨달았으면 여러분도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내면에서 앙심의 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용서가 필요함을 인정하기 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가 힘든 대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항상 남을 비난합니다. 다른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면 자신이 착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단 자기가 그렇게 착하다고 믿으면 용서의 필요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뜻으로 사도 바울은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엡4:32)"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눅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피 흘리셨기에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무슨 수로도 그분의 용서를 얻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분은 무조건 여러분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해주시는데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아무리 많은 배상금으로도 보상될 수 없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여러분의 적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입니다.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오늘부터 용서의 마음을 기르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다음번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나 모욕을 주거든 마음으로 즉시 용서하십시오. 겉으로든 속으로든 되받아치려는 성향을 일체 물리치십시오. 하나님께 너그러운 태도를 달라고 기도하고, 상대를 사랑으로 대하십시오. 증오는 불행과 속박을 주지만 용서는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참고로 제가 올리는 글 중에 뼛속깊이 체험한 내용입니다."
2014-12-09 01:07:35 | 박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