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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설교 노트를 작성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603#c_606 이를 통해 중고등부 학생들이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고 배우는 것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오늘은 중고등부 학생 중에 모범적으로 설교를 잘 노트한 어기남 형제님과 박수선 자매님의 아들인 어진 군의 설교 노트 일부분을 발췌해 소개하려 합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photo2&write_id=1872 고등학생 시절부터 설교를 열심히 듣고 정리해 진리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려 노력하는 어진 군을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1 *설교 제목 : 당신들은 부활을 믿습니까? *설교 본문 : 사도행전 26장 1~8절, 19~29절 *설교자 : 정동수 목사님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369 *설교 요약 : 예수님의 구원은 몸과 영과 혼이 모두 구원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영과 혼은 영원히 산다. 앞으로 우리가 얻게 될 몸은 지금의 몸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지금의 몸으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몸을 주신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새 몸을 입어 부활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를 맺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몸을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시다. *배운 점 및 적용 :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부활시키려고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천국으로 들어갈 새 몸을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2 *설교 제목 : 돌직구 복음선포 *설교 본문 : 사도행전 24장 14~27 *설교자 : 정동수 목사님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481 *설교 요약: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보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와 드루실라를 만나자마자 돌직구를 던지며 단도직입적으로 복음 선포를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후 우리를 심판하시는데,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지를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신다. 사람의 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채워주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의 피와 부활의 복음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힘입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입어 의로워질 수 있는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 우리의 삶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사는 동안 절제를 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하여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 삶의 절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돌직구처럼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전했다. 벨릭스아 드루실라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부했다. 우리는 벨릭스와 같이 복음을 거부해서는 안되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 초청을 미루고 연기하면 영원히 지옥 불에 떨어진다. *배운 점 및 적용 : 벨릭스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 초청을 미루고 연기하는 우리 할머니를 위해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할머니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 3 *설교 제목 : 천년왕국 이야기 *설교 본문 : 요한계시록 20장 1~15절 *설교자 : 정동수 목사님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552 *설교 요약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시고 왕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천년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병을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시는 등 메시아 표적을 보여주신다. 7년 환난기 때에도 천년왕국의 복음 선포는 계속될 것이며, 7년 환난기가 끝나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는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으셨지만, 재림을 하실 때는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천년왕국은 천 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천년왕국도 천 년 후에는 끝나게 된다. 천년왕국이 모두 끝나면 하나님께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게 할 것이다. 천년왕국에는 마귀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에 사는 지금과는 달리, 천년왕국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마귀 없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천년왕국에서는 예수님이 천 년 동안 통치하실 것이며,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고 독재하실 것이다. 죄는 유전되지만 구원은 유전되지 않는다. 따라서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구원받아야 한다. 아무리 천년왕국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 산다 해도 구원이 없다면 결국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못 받는다고 환경의 탓을 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좋은 믿음의 환경에서 믿음 생활을 한다 해서 그것이 내 구원을 보장해 주리라는 생각을 가져선 안 된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든지 그것들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받으면 된다. *배운 점 및 적용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이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것임을 알고, 천년왕국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듣고, 어떠한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그것에 상관없이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  저는 지난 2014년 연말에 윤찬수 형제님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한 주 초등부 설교를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샛별같은 눈망울로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제 설교를 끝까지 집중하고 듣던 초등부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학부모님들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성심을 다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진리 안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학부모님들, 선생님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그것을 통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랑침례교회 주일학교 모든 학생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아이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2015-01-12 21:43:40 | 김대용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빌1:21)"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인생의 목표였던 그리스도께서 사실 자신의 생명 자체였고,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다 신앙의 여정에서 여러가지 고난을 겪지만, 그 모든 연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처음에는 우리가 가진 세상 것들을 하나씩 거두어 가시다가, 그래도 계속 고집을 부리면, 우리를 고난 속에 집어넣으셔서 문제의 근원인 우리의 자아를 다루십니다. 그래서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부대끼다 보면, 오랬동안 버텨오던 자아의 견고한 성채가 깨지고 무너집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고 구원 받은 성도라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께 넘겨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이 양다리 걸치기가 워낙 보편화되어 있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하고들 있지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명백한 간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그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대상에 마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요한1서 2:15-16)"   우리는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일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스펄전의 365일 묵상중.
2015-01-11 20:44:31 | 박진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은 점차적이 아니라 '단번에' 일어납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그러나 요한복음 12:24에서의 죽음은 로마서 6장의 '죄에 대한 죽음'이 아닌 '열매를 맺기 위해 죽는' 점진적인 죽음의 법칙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 옛 사람의 생명을 버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명은 반드시 계속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라.(요12:25)"는 말씀은 "자기의 '본성적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본성적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적 생명'으로 살면서 영생에 이르리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한 승리는 알고 있지만, 자연인인 옛사람의 본성적인 생명력으로만 살아가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본성적 생명은 영적인 영역에서는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성도들은 본성적인 생명을 의지할 때 무기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성도라 하더라도 우리의 본성적인 생명을 '미워'하고 부인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道)에 대해 깊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 위의 주님과 연합되어, 우리의 모든 본성적인 생명이 끊임없이 죽음에 넘겨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5-01-06 00:32:46 | 박진태
바른 기도는 바른 말씀만큼이나 우리의 영적 성장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바쁜 삶과 우리의 생각들을 묶어두려는 온갖 유혹거리들, 우리를 잡아끄는 절망과 두려움들 가운데서도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마음을 내놓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walk with God)하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올해에는 기도를 더 열심히 하고 가정에서도 모범을 보여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1-03 22:03:44 | 윤찬수
전도사님의 글을 읽으니 1983년 방영되었던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 화면에 충혈된 눈을 떼지 못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질곡의 세월을 버티고 오늘을 일구어 온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노고와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그리고 먼저 구원받은 자의 영적 책무까지 모든 것들을 차분하게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01-03 09:27:23 | 김대용
후기 요약 내용 중 "주위에서 공동체를 만들라"는 메세지는 긴장을 주면서 저에게도 추천을 하시내요. 특히 "의도적으로 아주 가까운 친구 모임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는 지혜는 꼭 배우면서 실천하고 싶습니다. 실제 사회일원으로서 통념적인 정리성에 비춰볼 때 옛 친구들과 퍽 소원 단절되고 있기때문입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고립상황에서도 거의 부담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평안하다는 점은 오히려 담론의 동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좋은 책을 읽고 바른 길을 걷도록 붙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1-03 01:50:53 | 최상기
책임(責任)의 사전적 뜻을 보면, ‘맡아서 행해야 할 의무나 임무. 또는 그것에 대한 추궁이나 의무를 지게 되는 제재’로 되어있다. 영어로는 ①responsibility (지위 또는 일에 대한 책임) ②blame (실패등에 대한 책임) ③charge (대금 청구) ④accountability (회계적 책임) ⑤obligation (법적 책임) 등 다양한 단어로 표현이 된다. 어제 저녁, 사위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관람하였다. 윤덕수라는 할아버지의 회고로 1950년 한국전쟁 때 흥남철수 작전으로 시작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덕수네 가족은 아버지, 엄마, 남동생, 끝순이, 막순이와 함께 6식구가 중공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행렬에 밀려 들어간다. 아버지는 남동생을, 어머니는 여동생을, 덕수는 막내동생을 업고 밀려드는 인파속에서 철수하는 군함에 기어올라 간다. 군함에 막 올라타려는 순간 덕수가 업고 있던 막내 여동생을 떨어트리고 만다. 자신의 몸만 갑판위에 올라있고 여동생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5가족은 오열을 터트린다. 그 순간 아버지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덕수에게 입혀주고 막순이를 찾아 다시 내려갈 중대 결심을 한다. 덕수는 안된다고 소리 소리를 쳤지만 아버지의 결심은 확고하다. ‘이제 네가 가족의 가장이니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지라’고 당부를 하면서 군함 아래로 내려간다. 결국 아버지와 이별한 채 부산에서 피난만의 생활을 하게된다. 이후 덕수는 선장이 되려는 장래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동생들과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돈을 벌기위해 독일의 탄광 광부로 지원하게 되고, 월남전 때 베트남 행을 자원하여 결국 고모가 운영하던 ‘꽃분이네’라는 가게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중략> 영화의 끝 무렵에, 덕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탁한 일에 대해 ‘이 정도면 그 책임을 다 한 것 같다’고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지난 날의 과거 회상을 마친다. 덕수 할아버지의 지난 삶에 우리나라 근대사의 모든 역경이 그 속에 다 녹아있다. 그러기에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에 마음으로 눈으로 공감하며 받아들였다. 오늘 날의 모습이 덕수 할아버지와 같은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아버지가 기족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가족을 향한 책임과 부지런함이다. 때로는 강하게도 보이고, 고집스럽게도 보이고, 인정이 없어 보이는 듯 하지만 아버지라는 위치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덕수의 아버지는 덕수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혀주고 찾을 가능성이 없는 딸을 찾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그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책임감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어려운 것을 경험한 세대는 자식의 세대에 어려움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은 어려움이 가져다 주는 고민과 갈등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책임을 지지않으려는 세대는 얼마나 위험한 세대인가? 나 자신과 내가 속한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책무라 생각한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셨다. 창조주께서 창조물들에게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죽음을 자원하셨다. 누가 죽음을 보여주기의 방편이라 생각하겠는가?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며, 막중한 책임감의 최종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존경과 사랑과 신뢰를 갖게 된다. 아버지된 우리들은 비록 죽음까지는 가지 않을지라도 모든 상황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2015-01-02 13:06:09 | 조양교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엎드려 기도하는 지체들이 늘어났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이뢰고 도움을 구해야 할 항목들이 너무 많은 것같습니다. 스펄젼이 설교할 때 지하방에서 기도로 함께 했던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2015-01-02 09:04:22 | 조양교
송구영신 예배 후에 새벽 늦게까지 교회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고 가셨는데 이렇게 또 글을 올려주셨네요. 새해 첫날 새벽 대화의 주제 중 하나였던 기도에 관한 스펄전의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1-01 20:18:33 | 김대용
"항상 기도하고 기도 중에 감사를 드리며 깨어 있으라.(골4:2)"   성경에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 아주 많아서 기도의 책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실로 성경에는 기도에 관한 예화, 교훈, 약속들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사례만 봐도,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하던 야곱,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 다니엘, 마음을 다해 늘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던 다윗, 기도해서 하늘에 불이 내려오게 했던 엘리야,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하며 기도했던 바울과 실라 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외에 기도에 대한 명령이나 기도에 관한 가르침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는 아무리 많이 해도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쉬지 말고, 날마다 매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지금 기도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이 둔감해져서 자신의 영이 얼마나 헐벗고 굶주려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영혼의 초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바라십니다.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성도가 수줍어서 머뭇거리며 간구하는 것도 기도요, 악한 영들과 싸우는 성도가 주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도 기도요, 주님 품안에서 죽어가는 성도가 주님께 부탁하는 마지막 소원도 기도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생명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의 통로를 통해 하늘로부터 생명수를 받아 그 힘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밝아온 새해에는 날마다 더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과 늘 깊이 교제할 수 있게 간절히 기도바랍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스펄전의 묵상중."
2015-01-01 11:36:38 | 박진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이 시대의 구원방주 사랑침례교회, 그리고 그 백성의 진정한 평강과 은총이 이 역사를 일구어 나가시는 아버지하나님 안에서 방주의 맨앞에 선 정동수목사님과 그 성도들과 온 애국백성으로 부터 全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015-01-01 09:27:17 | 오영수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새롭게 창조되면, 내가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어 죽었다는 사실이 실 생활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곧 '나'는 항상 십자가의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고, 창조된 '새로운 나'는 모든 일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고 하시면서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셨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시면 우리는 말 한 마디마저도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말과 행동은 '새롭게' 변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선 "말하기를 더디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진노하는 것도 더디 하라.(약1:19)"   주님께서는 쓸데없는 장황한 말과 세속적인 언행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죽어야만 침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옛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말이 많은 것입니다. 장황스런 말들이 처리되도록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십시오. 우리는 매순간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만 의지하며 말하는 사람은 행동도 주님만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아버지와 동행하시면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셨던 모든 말씀은, 전적으로 아버지를 의지해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순종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나'를 처리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말을 지어내며 함부로 말하는 '나'를 십자가에 처리하소서. 오 주님, 우리의 말과 행동을 다스려 주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 말만 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30 00:41:14 | 박진태
제 아내가 자매 모임의 취지를 밝힌 글을 썼습니다. 어떤 모임이든 모임의 성격이 확실해야 모이는 분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매님들 간에 삶을 진솔하게 나누는 교제가 풍성해지면서 우리 교회도 풍성히 성장하기 원합니다. 가까이 계신 자매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12-27 17:20:34 | 관리자
자매 모임의 목적과 의미   2014년도 어느덧 몇 날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저는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되어 온 자매 모임에 대해 특히 그 목적과 의미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단 제 개인의 의견을 정리해 보면,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교제하라는 성경의 권면에 따라(히10:24~25) 논쟁의 여지가 없이 교회 안의 지체들과의 사귐은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사실 공적 모임이 일반 교회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거의 일주일 내내 성도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일반 교회의 폐단을 답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참고로 미국의 거의 모든 침례교회들도 이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중에 유일하게 모이는 자매 모임은 자매들 간의 깊은 믿음의 교제와 건강하고 활기찬 교회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반 교회에서 흔히 있는 주중 자매들의 모임이나 지역 모임은 교회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준 형식의 틀 안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자매님들이 목요일에 모이는 모임은 그때그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따라 유연한 자세로 모일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모임의 리더를 특정인으로 지명하지 않은 채 서로서로 주체가 되어 말을 하고 제한된 시간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도록 매시간 그 주제에 맞는 인도자를 선정하며 또 연락과 정리를 위해 총무를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조율하기 위해 저는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사모라는 위치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또 어느 면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제 마음은 이렇지만 자매님들 입장에서는 사모의 위치에 있는 저를 어렵게 생각하거나 또는 기대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 모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매님들과 교제하고 소통하며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이해를 구하며 또 교회가 가는 방향과 추구하는 바를 함께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목사의 아내인 사모가 함께하는 자리이므로 저는 이 모임이, 성도들이 목회자와의 벽을 허물고 허심탄회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이루어간다는 동기 부여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자매 모임은 성경 연구반이나 기도 모임반의 성격을 띠지 않은 ‘자연스러운 교제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제를 통해 서로 삶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며 경험을 나누되 매번 달라지는 주제에 따라 큰 틀 안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매 모임은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자기의 삶을 오픈하고 진정한 지체로서의 관계를 맺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주중에 직장생활을 하거나 먼 거리에 있는 자매님들은 아쉽게도 어쩔 수 없지만, 오실 수 있는 분들은 진솔한 마음이 오고 가는 이 모임을 통해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의 자매들을 만날 수 있으니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귀한 시간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사랑, 이해, 격려, 위로, 나눔 그리고 권면과 용서까지도 생생하게 터득하고 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모임을 살아 있는 믿음의 장(場)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자매 모임의 취지와 방향 설정을 위해 바람직한 의견이 있으면 홈페이지나 이곳에 덧글을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자매 모임의 취지를 이해하신 자매님들 가운데 목요일에 오실 수 있는 분들은 오셔서 같이 삶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2015년에는 자매 모임에도 큰 부흥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쇠가 쇠를 예리하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을 예리하게 하느니라.(잠27:17)   정혜미 드림  
2014-12-27 17:16:03 | 관리자
자유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국가이다. 1620년 8월 영국 국교의 탄압을 받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맨손으로 땅을 갈고 교회를 세웠다. 이들의 노력이 오늘날 미국의 초석이 되었다. 그후 프랑스와 유럽연맹의 도움으로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의 기금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폭파된 이후 그 자리에 ‘프리덤 빌딩’이 세워졌다. 2006년에 상영된 아마겟돈이란 영화에서도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을 파괴하기 위해 우주선 2대가 발사된다. 우주선의 이름이 인디펜던스호와 다른 하나는 프리덤호이다. 그런데 그중 인디펜던스호는 유성에 의해 파괴가 되고 프리덤호에 탔던 주인공이 극적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유는 너무도 소증하다. 우리나라에도 이 자유의 물결이 봇물과 같이 밀려들고 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로부터 자유를 외치고, 학생들도 교권으로부터 자유, 기성의 정치권력으로 부터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는 현실이다. 자유의 개념이 너무 훼손되고 있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구속하고 얽매는 것은 고통과 압제를 주고 악하게 대우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호의와 선을 배척할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낳아주신 부모를 거역하고, 가르쳐 주신 스승을 비방하고, 정상적인 국가의 권력에 대항할 자유는 사실상 내맘대로 살겠다는(방종)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악을 선택하지 않고 선을 행할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다. 극한의 통제를 받고 있는 북한 땅의 경우 하나님을 믿을 자유가 없다. 거주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사생활마저 통제되고 감청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란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선을 행할 자유를 의미한다. 진정한 자유란 어떤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첫째, 지난 주 목사님의 설교에서 언급되었듯이 죄와 죽음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자유일 것이다. 죄와 죽음은 끊임없이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얽매이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만이 가능하다. 예수님의 피의 권능으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죄와 죽음은 여전히 실존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생명과 성령의 법에 지배받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성령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몸을 더 이상 불의의 도구로 내어주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의 몸을 의의 도구로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살아가면서 나를 얽어매는 것은 돈 곧 재물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돈이다. 돈에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도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라고 예외는 분명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돈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있는가? 간단하다. 재물이나 돈보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재물을 기꺼이 허비할 수 있으면 된다. 사도 바울의 경우 하나님께 '올인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세 번째, 죽을 때까지 나를 얽매는 것은 혀이다. 혀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완고하다.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약3:2)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니라.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서 그와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지옥 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 (약3:6) 혀와 마음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혀를 통해 밖으로 나온다. 나의 경우 말이 적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말에 대한 실수가 많아서 난처한 입장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마음에 선한 보고를 쌓는 일을 게을리하는 순간이 바로 혀에 구속되고 얽매이는 순간이다. 구속받아 얽매일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의 큰 희생을 통해 믿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예수님을 통해 부여된 이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힘써 알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누리는데 사용해야 겠다.
2014-12-23 15:50:34 | 조양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롬6:1-2)"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십자가는 죄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함께 다룹니다. 즉 죄인을 죽게 함으로써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순간적인 동시에 지속적입니다. 즉, 처음에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면서 내가 단번에 죽지만, 그 후에도 나는 지속적으로 죽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1) 순간적인 죽음 :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어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은 완료된 사실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2절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죽음과 연합되어 '죽어 있는' 나의 영적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어 있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그 '죽은' 위치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2) 지속적인 죽음 : 로마서 8장13절의 죽음은 죽이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로마서 6장2절에서 이미 '죽은' 성도들이 이제는 성령님에게 순종해서 자연인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즉 거짓, 음란, 미움, 분노, 다툼, 염려 등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으면서도 육신에 대해서는 계속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나면 나도 주님을 위해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아직도 죽기가 부담스럽다면 아직 주님의 그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19 22:15:25 | 박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