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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도하고 기도 중에 감사를 드리며 깨어 있으라.(골4:2)"   성경에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 아주 많아서 기도의 책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실로 성경에는 기도에 관한 예화, 교훈, 약속들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사례만 봐도,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하던 야곱,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 다니엘, 마음을 다해 늘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던 다윗, 기도해서 하늘에 불이 내려오게 했던 엘리야,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하며 기도했던 바울과 실라 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외에 기도에 대한 명령이나 기도에 관한 가르침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는 아무리 많이 해도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쉬지 말고, 날마다 매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지금 기도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이 둔감해져서 자신의 영이 얼마나 헐벗고 굶주려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영혼의 초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바라십니다.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성도가 수줍어서 머뭇거리며 간구하는 것도 기도요, 악한 영들과 싸우는 성도가 주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도 기도요, 주님 품안에서 죽어가는 성도가 주님께 부탁하는 마지막 소원도 기도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생명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의 통로를 통해 하늘로부터 생명수를 받아 그 힘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밝아온 새해에는 날마다 더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과 늘 깊이 교제할 수 있게 간절히 기도바랍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스펄전의 묵상중."
2015-01-01 11:36:38 | 박진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이 시대의 구원방주 사랑침례교회, 그리고 그 백성의 진정한 평강과 은총이 이 역사를 일구어 나가시는 아버지하나님 안에서 방주의 맨앞에 선 정동수목사님과 그 성도들과 온 애국백성으로 부터 全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015-01-01 09:27:17 | 오영수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새롭게 창조되면, 내가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어 죽었다는 사실이 실 생활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곧 '나'는 항상 십자가의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고, 창조된 '새로운 나'는 모든 일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고 하시면서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셨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시면 우리는 말 한 마디마저도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말과 행동은 '새롭게' 변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선 "말하기를 더디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진노하는 것도 더디 하라.(약1:19)"   주님께서는 쓸데없는 장황한 말과 세속적인 언행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죽어야만 침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옛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말이 많은 것입니다. 장황스런 말들이 처리되도록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십시오. 우리는 매순간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만 의지하며 말하는 사람은 행동도 주님만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아버지와 동행하시면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셨던 모든 말씀은, 전적으로 아버지를 의지해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순종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나'를 처리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말을 지어내며 함부로 말하는 '나'를 십자가에 처리하소서. 오 주님, 우리의 말과 행동을 다스려 주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 말만 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30 00:41:14 | 박진태
제 아내가 자매 모임의 취지를 밝힌 글을 썼습니다. 어떤 모임이든 모임의 성격이 확실해야 모이는 분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매님들 간에 삶을 진솔하게 나누는 교제가 풍성해지면서 우리 교회도 풍성히 성장하기 원합니다. 가까이 계신 자매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12-27 17:20:34 | 관리자
자매 모임의 목적과 의미   2014년도 어느덧 몇 날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저는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되어 온 자매 모임에 대해 특히 그 목적과 의미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단 제 개인의 의견을 정리해 보면,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교제하라는 성경의 권면에 따라(히10:24~25) 논쟁의 여지가 없이 교회 안의 지체들과의 사귐은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사실 공적 모임이 일반 교회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거의 일주일 내내 성도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일반 교회의 폐단을 답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참고로 미국의 거의 모든 침례교회들도 이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중에 유일하게 모이는 자매 모임은 자매들 간의 깊은 믿음의 교제와 건강하고 활기찬 교회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반 교회에서 흔히 있는 주중 자매들의 모임이나 지역 모임은 교회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준 형식의 틀 안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자매님들이 목요일에 모이는 모임은 그때그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따라 유연한 자세로 모일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모임의 리더를 특정인으로 지명하지 않은 채 서로서로 주체가 되어 말을 하고 제한된 시간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도록 매시간 그 주제에 맞는 인도자를 선정하며 또 연락과 정리를 위해 총무를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조율하기 위해 저는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사모라는 위치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또 어느 면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제 마음은 이렇지만 자매님들 입장에서는 사모의 위치에 있는 저를 어렵게 생각하거나 또는 기대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 모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매님들과 교제하고 소통하며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이해를 구하며 또 교회가 가는 방향과 추구하는 바를 함께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목사의 아내인 사모가 함께하는 자리이므로 저는 이 모임이, 성도들이 목회자와의 벽을 허물고 허심탄회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이루어간다는 동기 부여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자매 모임은 성경 연구반이나 기도 모임반의 성격을 띠지 않은 ‘자연스러운 교제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제를 통해 서로 삶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며 경험을 나누되 매번 달라지는 주제에 따라 큰 틀 안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매 모임은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자기의 삶을 오픈하고 진정한 지체로서의 관계를 맺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주중에 직장생활을 하거나 먼 거리에 있는 자매님들은 아쉽게도 어쩔 수 없지만, 오실 수 있는 분들은 진솔한 마음이 오고 가는 이 모임을 통해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의 자매들을 만날 수 있으니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귀한 시간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사랑, 이해, 격려, 위로, 나눔 그리고 권면과 용서까지도 생생하게 터득하고 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모임을 살아 있는 믿음의 장(場)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자매 모임의 취지와 방향 설정을 위해 바람직한 의견이 있으면 홈페이지나 이곳에 덧글을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자매 모임의 취지를 이해하신 자매님들 가운데 목요일에 오실 수 있는 분들은 오셔서 같이 삶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2015년에는 자매 모임에도 큰 부흥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쇠가 쇠를 예리하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을 예리하게 하느니라.(잠27:17)   정혜미 드림  
2014-12-27 17:16:03 | 관리자
자유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국가이다. 1620년 8월 영국 국교의 탄압을 받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맨손으로 땅을 갈고 교회를 세웠다. 이들의 노력이 오늘날 미국의 초석이 되었다. 그후 프랑스와 유럽연맹의 도움으로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의 기금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폭파된 이후 그 자리에 ‘프리덤 빌딩’이 세워졌다. 2006년에 상영된 아마겟돈이란 영화에서도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을 파괴하기 위해 우주선 2대가 발사된다. 우주선의 이름이 인디펜던스호와 다른 하나는 프리덤호이다. 그런데 그중 인디펜던스호는 유성에 의해 파괴가 되고 프리덤호에 탔던 주인공이 극적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유는 너무도 소증하다. 우리나라에도 이 자유의 물결이 봇물과 같이 밀려들고 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로부터 자유를 외치고, 학생들도 교권으로부터 자유, 기성의 정치권력으로 부터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는 현실이다. 자유의 개념이 너무 훼손되고 있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구속하고 얽매는 것은 고통과 압제를 주고 악하게 대우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호의와 선을 배척할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낳아주신 부모를 거역하고, 가르쳐 주신 스승을 비방하고, 정상적인 국가의 권력에 대항할 자유는 사실상 내맘대로 살겠다는(방종)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악을 선택하지 않고 선을 행할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다. 극한의 통제를 받고 있는 북한 땅의 경우 하나님을 믿을 자유가 없다. 거주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사생활마저 통제되고 감청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란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선을 행할 자유를 의미한다. 진정한 자유란 어떤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첫째, 지난 주 목사님의 설교에서 언급되었듯이 죄와 죽음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자유일 것이다. 죄와 죽음은 끊임없이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얽매이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만이 가능하다. 예수님의 피의 권능으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죄와 죽음은 여전히 실존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생명과 성령의 법에 지배받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성령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몸을 더 이상 불의의 도구로 내어주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의 몸을 의의 도구로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살아가면서 나를 얽어매는 것은 돈 곧 재물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돈이다. 돈에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도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라고 예외는 분명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돈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있는가? 간단하다. 재물이나 돈보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재물을 기꺼이 허비할 수 있으면 된다. 사도 바울의 경우 하나님께 '올인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세 번째, 죽을 때까지 나를 얽매는 것은 혀이다. 혀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완고하다.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약3:2)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니라.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서 그와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지옥 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 (약3:6) 혀와 마음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혀를 통해 밖으로 나온다. 나의 경우 말이 적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말에 대한 실수가 많아서 난처한 입장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마음에 선한 보고를 쌓는 일을 게을리하는 순간이 바로 혀에 구속되고 얽매이는 순간이다. 구속받아 얽매일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의 큰 희생을 통해 믿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예수님을 통해 부여된 이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힘써 알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누리는데 사용해야 겠다.
2014-12-23 15:50:34 | 조양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롬6:1-2)"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십자가는 죄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함께 다룹니다. 즉 죄인을 죽게 함으로써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순간적인 동시에 지속적입니다. 즉, 처음에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면서 내가 단번에 죽지만, 그 후에도 나는 지속적으로 죽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1) 순간적인 죽음 :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어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은 완료된 사실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2절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죽음과 연합되어 '죽어 있는' 나의 영적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어 있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그 '죽은' 위치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2) 지속적인 죽음 : 로마서 8장13절의 죽음은 죽이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로마서 6장2절에서 이미 '죽은' 성도들이 이제는 성령님에게 순종해서 자연인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즉 거짓, 음란, 미움, 분노, 다툼, 염려 등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으면서도 육신에 대해서는 계속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나면 나도 주님을 위해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아직도 죽기가 부담스럽다면 아직 주님의 그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19 22:15:25 | 박진태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엄청난 도덕적 실패를 경험했기에 그의 저작과 설교는 참고하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다윗이 죄를 범한 이후에 기록한 글들은 성경에서 제외시켜야 할 겁니다. 큰 아픔과 좌절을 겪은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전해 준 귀한 교훈을 잘 정리해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리더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적용해야 할 지침으로 알고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4-12-19 12:08:52 | 김대용
이제 12월의 한 중간이 지나간다. 그 어느 겨울보다 초반부터 강추위다. 매서운 칼바람으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않고 두꺼운 속옷을 겹겹이 싸매어 입는다. 올 겨울의 날씨가 심상치 않아 뽁뽁이?라는 것을 외풍이 직접닿는 유리창에 붙였다. 가족들이 한결 낫다고 한다. 낮시간이 짧아지고 밤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지다 보니 활동감도 많이 떨어진 듯하다. 그래도 추위를 이겨내려고 하다 보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고 충분히 수면을 하면 한결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추위와 더불어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몸에 긴장감이 많이 드는 그런 시간이다. 최근 목사님의 추천으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중 한권인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 (고든 맥도널드) 라는 책이다. 맥도널드 목사님은 40년 가까운 목회를 하셨고. 은퇴후에도 강연과 집필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초교파 복음주의 목사님이시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리더로서의 삶을 살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 책은 영적 리더를 위한 내면세계의 건축법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실제 경험을 통해 우러나온 내용이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간과해서 안될 귀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이의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하 책 내용 발췌) 데이비드 맥컬러우의 책 ‘위대한 다리’에는 맨허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브루클린 다리 건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 다리는 이스트 강위로 아치형으로 건축되어 있다. (공사기간 : 15년, 1883년 완공) 1872년 이 다리의 설계 책임자는 이렇게 보고했다. ‘수면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뉴욕 타워를 위해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반 대중에게 간단하게라도 해명하고 싶습니다. 지난 겨울 토대를 쌓기 위해 수면 아래 쏟아부은 석조와 콘크리트의 양이 지금 눈에 보이는 브루클린 타워에 사용된 양과 동일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리더십에 관한 변함없는 원리를 보여준다. 리더가 오랜 시간 견뎌낼 수 있느냐는, 수면 아래에서(리더의 영혼 안에서) 하는 작업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 작업을 예배, 경건의 시간, 영성 훈련이라 부른다. 그 작업은 조용한 가운데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만이 보시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1. 중심 찾기 리더십을 열망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리더가 되는 것은 특권이지만 그 대가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이 하는 말을 모두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리더의 삶에는 비평가들이 따라 다니기 마련이며, 또 어떤 경우 이런 비평가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재빨리 터득하게 된다. 영적 리더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확실하게 무너트리기 위해서 영적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다.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영성고전을 힘껏 읽지 않는다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다. 2. 따라 살아야 할 좌우명 샤를르 드 푸코(1858-1916)는 ‘하나님의 임재앞에 거하고 ...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삶’이란 어구로 자신의 한평생을 표현하고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썼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는 바람을 동기로 삼지 말라. 당신이 기도하는지 알 수 없도록 내밀한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이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것 외에 다른 동기는 갖지 말라.’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삶이 하나님의 임재앞에 거하는 것보다 쉬운가? 아니면 어려운가? 매력적이고 호감가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약하고, 가난하고, 신뢰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함게 하는 것은 어떤가? 여기서 나의 성품과 소명은 매일 시험대 위에 오른다. 3. 영혼을 기경하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영혼을 훈련하는 작업은 그리스도인 리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이는 추가로 할 일도 아니고, 선택사항도 아니며, 3순위에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러한 핵심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평생 리더십의 자리에 있지 못하거나 그가 이룬 업적도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분의 뜻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것이 거의 확실하다. 4. 동기 찾기 나는 성숙하지 못한 영혼에게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현상들을 보았다. 사역을 계속해 나가려면 더 깊은 동기와 힘의 원천에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초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하려면 먼저 건물의 잔해부터 깨끗이 치워야 한다. 습관, 동기, 환상, 야망, 여러 형태의 교만을 밝히 드러내고 버려야 한다. 이런 행위를 회개라고 한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의 가장 강력한 활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사탄의 무기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속임수에 대한 하나님의 무기이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시몬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베드로의 일행을 보고, 그 능력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려 했다. 베드로는 시몬이 품은 동기의 기초에 바로 도전을 가했다. ‘21 [하나님]의 눈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므로 이 일에는 네가 차지할 몫도 없고 나눌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사악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네 마음의 생각이 혹시 용서될 수도 있으리라. 23 내가 보니 네가 쓴맛의 쓸개 속에 있으며 불법에 매여 있도다, 하매 ‘ (행8:21-23절) 바울은 인정받는 욕구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잘했다’는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썼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동기들이 영혼에 뒤섞일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잘했다’는 말을 듣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면 중독같은 것의 조정을 받게 될 것이다. 올해의 필요한 일정량의 인정은 마약처럼 내년에는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동일한 추진력을 갖기 위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인정을 필요로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성취윤리에 영향을 많이 받은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신 덕분이라는 메시지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승자들’을 찬양하는 것을 들을 때 , 우리 대부분은 자신들도 똑같은 성공을 이룬 때에야 ‘자신의 가치’가 입증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또 자신이 이런 찬양을 받지 못하면 아마도 자신은 원래부터 하나님께 귀중한 존재가 아닐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성취하는 것이 동기가 된다면 최고의 리더가 되어서도 기쁨이 거의 없고 만족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고상한 동기가 있을까? 물론있다. 모세는 백성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고 고난과 종살이에 대한 하나님의 민감함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종교제도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목소리를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렸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분명 순종의 원리를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린양의 어머니가 되기로 결단했다. 이것들이 우리 삶에서 키워낼 수 있는 동기들이다. 후기 오늘날의 리더들이 오랜 시간 섬기기를 바란다면, 이 책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요약해 주는 네가지 핵심 원리가 있다. 1. 매일 회심을 경험하라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 중에 당신의 삶을 예수님께 재 헌신하는 시간을 가져라, 매일 다시금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누리라. 2. 매일의 훈련으로 당신의 삶을 든든히 하라 성품은 훈련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어있는 영혼으로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삶이 허물어질 때 영성훈련은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줄 수 있다. 3. 소명의식으로 살라 소명을 아는 것이 당신의 삶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인지하라. 당신의 소명은 때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의식하라. 내 경우 하나님께 ‘60대 남자를 위한 새로운 소명이 있으십니까?’하고 물었다. 이후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같이 함께 있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통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말해야 할 때이구나’ 이것이 나의 새로운 소명이 되었고 매일 이 소명으로부터 어떻게 살 계획을 세울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4. 주위에서 공동체를 만들라 반드시 당신 주위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친밀한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몇 년 전 목사들이 친한 친구들이 없다고 특히 교회에는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건강하지 못한 생활양식임을 깨달았다. 오히려 아내와 나는 의도적으로 아주 가까운 친구모임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오랫동안 이들은 우리 삶에 균형과 지혜를 가져다주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리더라면, 반드시 수면아래에 견고한 토대를 쌓으라. 그러고 나서 수면위에서, 당신이 섬기는 사람들의 삶속에서 만들어질 활기 넘치는 유산 속에서 그 열매를 관찰하라
2014-12-18 14:36:09 | 조양교
마귀에 관해서 이해가 부족합니다. Q : 정동수 목사님. 안녕하신지요? 부산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에 관해서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마귀를 심판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 없는 몸으로 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개역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귀의 일을 멸하시었다고 말하는데(요일3:8).......맞는지요? 마귀를 심판하는 것은 예수님 재림 후에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에 마귀는 이미 심판받았는지요? 일부에서는 부활하셨을 때에 마귀의 일을 멸했다고 하는데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A : 형제님 평안하신지요? 문의하신 부분에 관해 킵바이블 관리팀에서 목사님을 대신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먼저 인용하신 요한일서 3장 8절 후반부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이 부분은 말씀 그대로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 여자의 씨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창3:15), 하나님께서 사탄을 그리스도인의 발밑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는 약속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신약교회 시대가 열린 지금 이 순간 사탄이라고도 하는 마귀의 일들은 완전히 멸하여졌을까요? 신약교회가 시작된 후에 기록된 바울의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마귀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종들의 일을 방해하며(살전2:18), 간사한 꾀로 성도들을 미혹하고(엡6:11), 그리스도인을 여러 가지 악한 일로 괴롭히며(고후12:7), 불신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마음을 가리고(고후4:4) 그들이 더 악한 길로 빠지도록 속이고 있습니다(딤후3:13). 마귀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받고 멸하여졌다면 어떻게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마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위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마귀들(devils)의 수장인 마귀(the devil)는 과거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셋째 하늘에 있었으며(겔28:12~19), 현재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세상의 통치자로서 하늘의 처소 어딘가에 그의 본거지가 있습니다(욥1:6, 슥3:1). 그리고 앞으로 있을 7년의 환난 기간 중 더욱 극심한 환난이 벌어지는 후반기 3년 반의 대환난기에 마귀는 이 지상으로 내어 쫓기며(계12:9,10, 12), 천년왕국의 기간에는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계20:1~3), 천년왕국 이후에 잠시 풀려나 땅에서 민족들을 속이고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계20:7~8). 이것이 마귀의 마지막 활동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모든 활동이 종료된 이후에야 비로소 마귀는 자신의 최종 종착지인 게헨나(Gehenna)라고 불리는 불과 유황으로 이루어진 호수에 던져지게 됩니다(계20:10). 정리하면 마귀는 지금도 매우 활발하게 사악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그의 악한 일들이 완전히 멸하여지고 ‘게헨나’라고도 하는 최종 지옥에 던져지는 마귀에 대한 심판의 추이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이미 이겼습니다(요일4: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마귀의 군대와 여전히 치열한 영적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의 여정을 신실하게 마칠 때까지(딤후4:7~8) 울부짖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마귀를 대적하며(벧전5: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을 이루어가며 삶을 마쳐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이미 약속된 승리와 하늘의 보상이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이며(계21:7)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겁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마귀(the devil)나 그의 수많은 졸개인 마귀들(devils)은 귀신이 아니며 또 어떤 이단들의 주장처럼 불신자가 죽은 이후에 귀신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도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진리를 잘 숙지하시고 마귀에 관한 아래의 강해 영상과 글들을 시청하시고 읽으시면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마귀(Devil)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31 *사탄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07 *루시퍼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520 *조직신학 33_사탄01 :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77 *조직신학 34_사탄02 :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78 *마귀를 대적하라(설교) :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89 *마귀인가, 귀신인가?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56 *사탄(선도)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consult&write_id=62&page=3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진한 명조체 마귀는 무엇을 뜻합니까?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48 *귀신유감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12 부디 진리 안에서 큰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12-17 12:59:05 | 김대용
주께 생각을 고정시키고 주를 신뢰하는 자에게 완전한 평강을 주심을 매 순간 확인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릴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완전한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길...두손모아 기도드립니다
2014-12-17 09:34:39 | 태은상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2:20)"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십자가의 대속(代贖)입니다. 우리의 죄의 근원은 아담에게서 물려 받은 죄성(sinful nature)이며, 이 죄성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속의 특징은 이 자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끝장을 내고 나서 새롭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자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옛 사람이 아닌 새로운 인격을 창조하시고 그 인격안에 들어오심으로, 우리의 인격의 새로운 중심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그냥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창조된 인격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곧 나의 영이요, 나의 자아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새로운 인격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의 인격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상의 상태로 창조됩니다. 성령님께서 중심이 되시면,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롬5:5), 즉 사람이 학습해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인격을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대속을 믿는 즉시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성령님으로 새롭게 창조됩니다. 이렇게 새롭게 창조된 인격의 특징은, 그 속에서 사람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샘솟아난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17 00:19:49 | 박진태
신약 시대 음식에 관한 바른 기준은 무엇입니까? Q :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파주에 사는 김○○이라고 합니다. 저는 근 13년간 천주교에 몸담고 있다가 스스로 5년 전 개신교로 교적을 옮겼습니다. 개신교로 옮긴 후에 무늬만 교인이 되기 싫어서 제 나름대로 성경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8개월 전부터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처음으로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반교회에서 설교하는 교리와 비교해 보니 정말 개역성경이 아닌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실하게 전달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고 바른 구원관을 접하게 되어 너무나 신선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하.......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성경에 의거한 정확한 구원관도 없이 막연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겠구나!”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으로 사방팔방을 둘러봤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침례교회와 같은 교회를 제 주위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또 듣고를 반복하며 며칠 전에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의 책도 구매하고 특히 mp3 CD를 운전하며 늘 듣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를 통해 날마다 너무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1장의 CD에 50분 정도 길이의 말씀이 21개 정도의 분량으로 들어 있는데 들을수록 진리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듯합니다. 저의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정동수 목사님.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는 구절이 있어 문의를 드립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에게는 먹는 음식에 대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해 구분되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 집에서 구약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음식구분이 없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의 말에는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고 쓰여 있습니다(행15:29). 질문 사항 1. 왜 야고보는 신약시대에 먹는 음식에 대하여 언급을 하나요? 잘못된 것 아닙니까? 2  야고보의 언급이 맞는다고 하면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먹고 있는 선짓국도 먹으면 안 되는 건가요? 더불어 목매어 죽인 것도 멀리하라고 하는데 목매어 죽인 개고기 등도 먹으면 안 됩니까? 목사님 바쁘신데 귀찮게 해드려 죄송하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A : 형제님 이렇게 메일로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형제님의 물음에 목사님을 대신해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도행전15장 6~21절은 예루살렘에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한 일명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성경기록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출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지도자들 사이에 이방인 신자들의 할례문제와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는 등의 문제로 갈등과 논쟁이 있었습니다(행15:1~2).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의 19~20절의 판결은 이런 당시 상황의 맥락에서 나온 말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새롭게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 신자들을 배려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에게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최소한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의 판결은 신약시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대변했다기보다 당시의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한 교회 지도자의 발언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 후 시간이 흘러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신약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집대성한 바울의 고린도전서 10:27~28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야고보의 판결보다 더 온전하고 더 점진된 계시의 말씀이라 볼 수 있는 이 기록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 중에서 누가 너희를 잔치에 초대하여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라고 음식에 대한 행동 기준을 명쾌하게 가르쳐 줍니다. 다만 28절에서 우상에 바쳤던 음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 사람의 약한 양심을 위해 함께 먹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되는 행동이라는 권면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음식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 신약 시대라고 해도 세상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와 고상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식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상식의 차원에서조차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사도행전 15장의 야고보의 판결은 과도기에 유대인 신자와 비유대인 신자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과도기적 시대 상황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후 성경에 기록된 더 점진적인 계시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이라고 본다면 신약 교회의 교리를 완성한 바울에 의해 기록된 고린도전서 10장의 음식에 관한 성경 말씀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말씀입니다. 부족한 답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기 바라며 항상 단순한 진리의 말씀과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12-16 22:08:15 | 김대용
칼빈주의와 구원받은 자의 죄에 관해서 궁금합니다. Q : 안녕하세요. 저는 가정교회로 신앙을 지켜가는 김○○이라고 합니다. 저희 가정도 킹제임스 영어 성경을 읽으며 유튜브에 올라온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와 강의를 시청합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존 파이퍼 목사나 폴 워셔 혹은 존 맥아더 목사의 설교를 듣는데요. 뭔가 좀 율법주의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분별할 지식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존 파이퍼 목사가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정확히 칼빈주의를 뭐라 정의를 해야 하는지요? 이것을 말로 설명하려니 어렵습니다. 지금 시대에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보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또, 이단이 많다 보니 어느 목사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무척이나 혼동되고 힘이 듭니다. 그리고 저희 아들이 죄에 관해 물어봅니다. 구원받은 자는 죄에 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구원받은 자는 죄에 대해 어떠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에 죄에 자유함을 얻은 자이고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기에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희가 거제라는 먼 곳에 살아 유튜브로나마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접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 : 형제님 반갑습니다. 먼저 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 폴 워셔 목사, 존 맥아더 목사는 모두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목회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상당히 방대한 신학 사조 혹은 신학의 체계라 할 수 있는 칼빈주의를 일단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칼빈주의(Calvinism)는 흔히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라고도 하며 마틴 루터의 뒤를 이은 2세대 종교개혁자로 분류되는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존 칼빈(Jean Calvin, 1509.7.10 ~ 1564.5.27)에 의해 발단하고 정리되어 후대에 그의 성경 해석과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확산하고 정립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종교 개혁을 거치며 유럽 전역에 프로테스탄트의 주류 신학으로 자리를 잡으며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칼빈주의는 16~17세기 영국에서 칼빈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인 청교도(Puritan, 淸敎徒)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확산하였습니다. 현재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파로는 대표적으로 장로교를 들 수 있지만, 예외적으로 개혁 침례교회 등 다른 개신교단에서도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곳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칼빈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칼빈주의의 기원은 사실 칼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가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정립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람 즉, 소위 교부라 불리며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립되고 발전하는데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최고의 공신으로 평가받는 어거스틴(Augustine)이 칼빈주의의 참 기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어거스틴의 정통을 물려받은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원을 가진 칼빈주의 신학 사상은 흔히 다섯 솔라(Five Solas)로 알려진 라틴어로 쓰인 다섯 가지의 표어와 튤립 교리라 불리는 5대 강령,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등을 통해 세상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 배치되는 내용과 체계를 이루고 많은 사람을 미혹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 5대 강령 중에 ‘전적 타락’의 교리와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와 밀접한 ‘칼빈주의 예정설’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주권으로 창세전부터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미리 선택하시고 로봇처럼 아무 의지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인간의 영과 혼을 깨우셔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만을 구원으로 이끄신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인간은 구원받는 것에 자신의 의지조차도 발휘하지 못하는 완전히 무의미한 로봇이 되며 어떤 관점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기에 힘을 써서 전도할 필요성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못된 기원을 가지고 있고 그 면면을 살펴볼 때 비성경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며, 또한 제네바 통치 당시 비정한 학정과 지독한 독선으로 얼룩졌던 칼빈에 대한 역사 자료들이 지금까지 생생한데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칼빈주의라는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까요? 사실 칼빈주의를 조금만 깊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칼빈이라는 희대의 천재를 통해 성립되고 수많은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수재들을 통해 정교하게 부풀려지고 세워진 이 사상 체계가 성경을 매우 교묘히 왜곡해 왔으며 어떻게 가장 성경적인 신학 사상으로 자신을 위장해 왔는지 잘 알게 될 겁니다. 이제 여기서 이 영악하고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괴물의 모순과 잘잘못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는 것이 불가능은 아니나 짧은 하나의 글로는 사실 수박 겉핥기식의 논설을 펼치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래에 튤립 교리라 불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해 심층 분석하고 설명한 강의 동영상을 소개해 드리니 시청하고 칼빈과 칼빈주의를 비평한 책과 그와 관련된 킵바이블의 글도 소개해 드리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2015년 초에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 출간을 준비 중인 신간 ‘칼빈주의 바로알기’를 통해 이 약삭빠르고 덩치 큰 괴물이 어떻게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성경의 진리에서 이탈하게 했는지 이해의 깊이를 더하시면 좋겠습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 : 1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76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2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77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3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79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4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80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5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84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분석 6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185 *칼빈주의(개혁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47 *칼빈주의 구원 도표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170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책 소개)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42 *하나님과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독재에 항거하며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53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칼빈주의와 대체신학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397 칼빈주의는 이 정도로 갈음하고 더불어 문의하신 구원받은 사람의 죄 문제에 관해서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가장 깊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신약성경 구절 중 하나가 바울의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는 로마서 7장 13~25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23~25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2 내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들 안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처럼 가장 걸출한 신약 시대의 성도조차 이런 갈등을 겪었는데 하물며 오늘을 사는 그 누가 이 땅의 삶 중에서 육신으로부터 100% 자유로워져서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구원의 영원한 안전함을 보장받아 마땅히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하는 성도들도 때로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의 법을 섬길 수 있습니다(롬7:25). 이런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또한 세월이 갈수록 줄어들 수 있게 우리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서 5장에 육신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대비시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만약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대신 속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으므로 구원받은 후에 짓는 모든 죄에 대해서는 별 의미가 없고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앞으로 서게 될 그리스도의 심판석(롬14:10, 고후5:10)에서 그야말로 큰 낭패를 보게 될 겁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제 남은 지상에서 삶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모습과 태도를 보이느냐가 영원의 시간 속에서 누리게 될 그리스도인의 보상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마치 화재로 인해 모두 타버린 집에서 벌거숭이 몸뚱어리로 겨우 구출된 사람인 것 마냥 받게 될 보상의 손실은(고전3:12~15) 한날의 부끄러움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그것으로 만족하련다.”라는 졸렬한 생각에 심취한 사람은 그날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해 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이런 중대한 성경에 진리에 대해서는 아래의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라.”라는 설교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인의 죄 문제에 관한 좋은 글들도 소개해 드리오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라 (고전 3:1~17) :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550 *죄와 죄들의 차이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73 *제 2장 죄에 대한 승리 비결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4_02&write_id=62 *제 3장 죄에 대한 승리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4_02&write_id=61 *범죄자 중에 기독교인이 많다고요?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499 *의인 코스프레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037 이 외에도 성경지킴이 사이트 오른쪽 위 끝에 있는 구글 검색 메뉴를 이용하셔서 단어 검색을 하시면 다른 많은 글과 영상을 읽고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형제님의 고민처럼 어떤 설교자와 성경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라가야 할지 정말 혼란스러운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길을 찾아 행하기 위해 힘써야겠습니다. 제 부족한 답변이 형제님께서 바른길을 찾으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앞으로 메일로 질문해 주시는 내용 중에서 함께 나누어 유익할 만한 것들은 정리해 가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14-12-16 21:57:31 | 김대용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이 말씀대로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인 되시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음에 연합해 죽었다가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4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었느니라."고 한 것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자아'가 죽었으므로, 이제 '자아'는 더 이상 우리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의 중심은 내 '자아'가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자아'는 자만하건 겸손하건 간에 더 이상 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나 '세상'보다 더 깊이 다루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아서, 아무리 가르치고 훈련해도 조금 나아질 뿐, 그 부패한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아'는 잘 달래서 교화시킬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 '자아'라는 중심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 주님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변화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마저도 육신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내세워 '나'의 욕심을 채우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고집을 부리게 되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내 '자아'에서 주님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죽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믿음의 길이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께 계속 순종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다스리시게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최대의 적은, 죄나 세상이 아니라 '자아'입니다.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2-15 21:42:17 | 박진태
죽은자는 말이없고 죽은자는 어떤일을 당해도 결코 반응하지 않지요. 간혹 인터넷 뉴스에 보면 분명히 사망이 선고되어 입관을 기다리던 사람이 깨어나는 황당한 경우도 있던데 저또한 옛사람이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는데도 어떤 일을 만나면 벌떡 벌떡 일어날 때가 아~~~주 많음을 고백합니다.
2014-12-15 13:18:42 | 이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