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태형제님, 늘 좋은 내용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 중에 "성숙한 기도는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면서 계속 여쭤 보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2-05 10:03:35 | 한원규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손을 다 같이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 올리자.(예레미야 애가3:41)"
참된 기도는 무기력함에서 출발합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껴야 거기서부터 진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자신의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마음을 들어 올려 정말 절실하게 주님께 부르것은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매달려 간절히 부르게 하시려고 우리를 큰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데, 우리처럼 작은 일에도 쉽게 우쭐대는 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난한 마음 없이 대충 기도해도 그냥 다 응답해 주신다면, 우리는 내가 믿음이 좋고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 하신 줄로 착각한 나머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쓸모없는 존재인지는 모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생도감이 넘칠 때는, 낮을 때로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어서 그 가난한 마음에 주님의 부요함이 가득 채워질 때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낱낱이 기록한 명세표이자,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게시판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모든 기도는 그 사람의 영적 수준과 영적 상태가 다 드러납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늘 뭔가를 달라고 조르기만 하다가, 철이 들게 되면 어머니가 뭘 원하시는지, 뭐 필요하거나 혹시라도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지 자꾸 물으며 우리의 기도도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간정하기만 하다가, 영적으로 성장해 감에 따라,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면서 계속 여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관심을 갖고 항상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입니다.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짊어진 것 같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도, 골방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아침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방을 나서게 됩니다.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두려움과 걱정을 하나님의 평안과 감사와 위로로 바꿔 놓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연약한 저희가 오늘 하루도 깨어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의 영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늘 더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과 긴밀히 동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시며, 이 부족한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스펄전의 묵상중.
2015-02-04 22:10:55 | 박진태
귀한 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상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피로를 핑계로 게을러지지 말아야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장하고, 권면을 통해 서로 유익이 되게 해 주시는 주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다.
2015-02-02 23:23:38 | 김지훈
성경을 읽는 것은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니라 '하나님 만나 뵙기'라는 묵상이
가슴 깊이 큰 울림을 줍니다.
별도의 저자가 표기되지 않은 것을 보니 오롯이 형제님의 글을 올려주신 듯합니다.
저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해 주는 귀한 묵상의 글에 감사합니다.
2015-02-02 12:05:56 | 김대용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3:16-17)"
한 성도가 다른 책 없이 오직 성경 한 권만으로도 온전히 성숙한 성도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고 '철저히' 갖추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롬10:17)" 그래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도 말씀에 계속 노출되면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믿음이 자라나게 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 갓난 아이가 잘 먹어야 잘 자라듯이 그리스도인도 말씀을 잘 먹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은 성도의 영적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매일 거둬야 했던 것은 영적 만나인 말씀을 매일 섭취해야 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욥은 하루 세 끼 식사보다도 말씀을 더 귀히 여겼습니다.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아마도 욥은 그 힘으로 고난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접근 방법에는 읽기, 듣기, 암송, 공부, 묵상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구든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성경 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를 보면, 대부분이 성경을 읽다가 믿음이 생기고, 성경 읽기로 믿음이 성장해서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는 훌륭한 열매로 입증된 아주 탁월한 성경 접근 방법입니다.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의 저자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성경 읽기는 그냥 '책 읽기'가 아니라, '하나님 만나 뵙기'입니다. 하나님을 매일 만나 뵙도록 하십시오.
2015-02-01 23:50:03 | 박진태
김대용형제님, 기도 관련 매우 유익한 내용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100% 믿음을 갖고 기도하며 나아가고, 내 유익을 구하는 기도보다는 다른사람의 유익을 간구하는 중보기도, 나아가서 국가와 민족이 지은 죄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말씀, 특히 불신자의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며 구원받기를 원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말씀에 더욱 힘 입어 저와 사랑침례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기도에 대한 큰 소망을 갖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항상 유익한 내용에 감사합니다. ^^
2015-01-28 13:07:28 | 한원규
Q : 할렐루야!
성경에 보면 어떻게 기도하라는 말씀들은 많은 데 반해 언제까지 기도하라는 말씀은 거의 없는듯합니다. 제가 말씀을 잘 모르는 이유로 인해 기도할 때 응답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지킴이를 찾아보아도 기도에 대해서만 나오지 언제까지 하라는 것은 안 나오네요. 전에 순복음교회 조 목사님이 설교에서는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마음에 평안함이 오고 확신이 오고 믿음이 오면 그걸로 응답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일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양해 바라겠습니다.
제 마음에 열의에 의해서 신학을 하다가 어떠한 사유로 인해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 열의는 식지도 않고 그러던 중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보는 게 수많은 목사들 그중에서도 젊은 목사들을 보면 저분들은 벌써 목사가 되어서 저렇게 목회를 하고 있는데 난 나이도 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 아직 신학교도 안 나왔고 참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나이는 계속 들어가고 있고 여건도 안 좋아서 신학은 할 수도 없고 제 마음의 소원은 간절한데 주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알게 해 달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에 말씀을 읽다가 사도행전 9장 10절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씀으로 강하게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말씀을 받은 적이 없어서 30분 동안 울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이 매번 말씀으로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기도 응답이 될 때까지 계속 울부짖어 기도 할 수도 없고 해서 말씀에 대해 잘 아시는 성도님께서 언제까지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여쭐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려고 해도 그것이 흠정역에 있는 교리랑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성경적인 것인지, 흠정역 성경 말씀에 대해서 잘 아시는 성도님이 계시면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형제님 반갑습니다.
한겨울에 감기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우선 아랫글과 설교 영상을 읽고 시청해 보십시요. 특히 ‘그리스도인의 기도’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들어보시면 큰 도움을 받으실 겁니다.
1.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7
2. 그리스도인의 기도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83
소위 '기도 응답'에 관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기에 형제님과 다른 분들을 위해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기도’ 후반부의 주요 내용에 제가 몇 가지를 부연해서 아래에 글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 38장에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성경 기록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침 받고 수명이 15년이나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명이 연장된 히스기야는 유다 왕국을 방문한 바빌론 사신들에게 나라 전체를 샅샅이 공개함으로 말미암아 바빌론에 의한 멸망이 유다 땅에 더 신속히 임하는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사람의 뜻대로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또한, 무한대의 영역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먼지에 불과한 사람의 뜻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사55:8~9)
그러므로 우리 안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신약 시대 성도들은 마음에 품은 간절한 소원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자들처럼 기도의 성취를 감히 하나님께 강요하는 태도를 깨끗이 청산하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벽을 다 재건한 후 하나님께 드린 느헤미야의 기도가 좋은 예가 되듯이 구약식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서 내가 형통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1 또 정한 때에 나무 헌물과 첫 열매를 드리게 하였사오니, 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느13:31)
이런 구약식 기도는 다르게 표현하면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다 하고 주인에게 그에 해당하는 만큼만의 대가를 구하는 것이 바로 종의 태도이고 종의 입장에서 구하는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모범적인 예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사도 바울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의 이 절절한 고백를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7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9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고후12:7~8)
그럼 고린도후서 12장의 이 말씀을 주해해 보겠습니다.
당시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 안에 가시”에 대해 어떤 성경 주석가는 갈라디아서 4장 13~14절과 함께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분명히 육신의 질병이며 아마도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죽다 살아난 후(행14:19~20) 뇌를 다친 바울이 얻게 된 ‘간질병’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받아 신약 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의 기록자가 되었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지역교회를 세운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열정적으로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순간적으로 몸의 통제력 상실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르 떨며 청중들 앞에서 쓰러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설교하던 바울 자신에게는 그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이었을까요.
물론 바울이 말한 “육체 안의 가시”가 간질이었는지 안질이었는지 아니면 질병이 아닌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고통과 고민을 안겼던 무엇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에도 큰 장애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치명적 고통에 대해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 자신이 세 번이나 간절하게 떠나가기를 하나님께 구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고후12:9) 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분량 이상으로 주어진 은혜와 사역의 성과를 통해 자칫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따뜻한 배려라는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간파합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육체 안의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요, 마치 진주조개가 아픔을 참고 품은 모래가 보석이 되듯이 고난이 주는 믿음의 훈장이며 영적 전쟁터에서 자신을 지키는 무기임을 깨닫고 고린도후서 12장 8절의 저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
우리는 연약하므로 때때로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장애가 되는 어떤 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와 별개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십니다.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바로 이런 명확한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초연하게 하나님께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감사함으로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약식 기도의 자세, 즉 종의 기도를 청산하고 신약 시대 성도의 기도,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소위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는 말은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각종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은사주의 시스템과 이미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래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부로라도 이런 표현은 쓰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하거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일이 해결되었다.’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간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도에 있어서 절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원리를 적용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에 따른 기도의 핵심은 그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존귀하게 여겨드리며 두려워하고 그분의 말씀에 경외감을 느끼며 떨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일을 하는 것, 밥 먹는 것, 길을 걷는 것, 숨 쉬는 것, 잠자는 것 등 온종일 생활하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기도와 예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 28절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고 종일 불안과 초조함에 떨며 사람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될 정도로 오랜 시간 기도에 열을 올려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기도했느냐 하는 양(量)의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는가 하는 질(質)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사람이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무어라 가르쳐 주는지와 그 안에 담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자신의 소원을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혹은 온종일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되고 목에서 무쇠솥을 긁어내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열정적인 기도는 도리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됩니다.
다시 한 번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빌립보서 4장 6~7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대해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소원하는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드려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구약 시대 성도들의 자세와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습니까? 그 기도에 대한 100%의 분명한 응답이 약속되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구 채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에게 7절의 답은 마치 동문서답처럼 여겨질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 분명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만사형통이나 소위 조지 뭘러식의 반드시 문제를 해결 받는 특급 기도 비결을 통한 바로바로식 응답이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는 문제가 해결되든 아니든,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혹은 해결 받는 것이 연기가 되었든 그런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의 영과 혼을 충만하게 채우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만 고정하도록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 생활을 통해 맛 볼 수 있는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탁월한 설교를 매우 모자란 실력을 통해 글로 풀어 놓은 부족한 답변이나마 부디 필요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은 영국 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목으로 1643년 영국 의회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소집된 교회 회의가 5년 동안 회의한 결과 작성된 철저하게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신앙고백서입니다.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저희의 입장은 다음의 글들을 참조해 주십시요.
1. 칼빈주의(개혁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47 2.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42 3. 런던침례교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766 4.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칼빈주의와 대체신학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397
부족한 답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 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2015-01-27 21:02:33 | 김대용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거듭남은 인간의 영 안에서 일어나는데, 사람이 거듭나면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장소가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구원받은 영의 가장 깊은 곳까지 깊숙히 침투하시는데, 그 최종 목표는 우리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과 결합시켜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 안에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는 말씀대로 인간의 영은 더러워 질 수 있으며 범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모신 존재로서 언제나 영이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탐욕, 음란, 교만, 미움 등의 영적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영 안에 악하고 더러운 영들을 초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이 바르고 잘 되어야 모든 일이 잘 됩니다. 다른 문제는 살아가면서 수정할 수 있지만, 영이 잘못되어 있으면 모든 것이 잘못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음과 영이 있는데, 문제는 마음은 올바른데 영이 더러워진 때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반대했다가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들었던 것은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좋은 마음이었지만, 그의 영은 대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영향으로 더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을 더럽히는 것들을 예리하게 분별해 냅니다. 따라서 영을 깨끗하게 지키려면 우리는 말씀을 늘 가까이 함으로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시119:9)"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5-01-27 00:33:41 | 박진태
우리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도록 기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짭은 역사지만 큰 기적이 이루어 진것 같아요. 사람이 많이 모여서가 아니라 그가운에서
질서 있게 조용히 소리 없이 움직이는 성도들의 모습 참 보기만해도 은혜가 됩니다.
주일날 일찍오면 언제나 한결같이 일찍 오셔서 차분히 준비하시는 자매님과 형제님을
만나게 대지요.각자가 알아서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 ! 거기에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듯 하며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신약 교회가 되겠지요
2015-01-23 05:02:46 | 윤정용
뜻깊고 화기애애한 모임의 분위기를 사모님 글을 통해 그대로 전달받았습니다.
봄,여름,가을의 지난했던 과거를 거쳐 주님안에서 남은여생을 위로받으며 진정한 겨울의 안식을 누리고 계시는 어르신들께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몸 건강하게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소망합니다.
3.1뜻깊은 날에 뜻깊은 찬양을 기대하겠습니다.
2015-01-22 12:32:33 | 이정희
자매님! 주일의 풍경을 소박하고 정감있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주일날 교회에 오시는 인원이 500명이 넘는데도 사고없이 지켜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듯이 모든 일을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회계보고 해야될 것을 염두에 두고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01-22 12:22:23 | 이정희
미소가 제목인 특별한 글에
"오해에서 시작해 사해를 지나 삼해를 거쳐 이해에 다다른다."는 클래식한 유머가
제 마음 깊이 와 자리를 잡습니다.
고운 정도 정이요, 미운 정도 정이라면 하나의 교회 안에서 하나의 마음을 품고
바른길을 가도록 서로 이끌고 따뜻한 손으로 잡아주며 바른 교회를 만들어 가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잔잔한 필체로 정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1-21 23:30:19 | 김대용
그날의 모임을 스케치하듯 친절히 글로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들께서 항상 강건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길 소망합니다.
2015-01-21 23:17:04 | 김대용
역시나 따뜻한 글,정결한 문체..감사합니다
어르신들이 자기 소개하실때는 부끄러워하시는 것이 저희들에게도 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3월 첫주 찬양을 기대합니다~^^
2015-01-21 21:00:52 | 최은희
저도 수영자매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이렇게 주일의 하루가 가는구나 ~정리가 되네요^^
곳곳에 소리없이 섬기는 손길이 있기에 530명의 성도가 즐겁고 행복한 주일이 되었음을 새삼스레 느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15-01-21 20:50:05 | 최은희
이수영자매님, 교회 첫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듯하여 감사한 마음입니다. 목회자부터 성도들까지 모두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함을 구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또한 소리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겨주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적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이 기회를 빌어 교회를 애써 섬겨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그리스도 심판석에서 하나님의 보상이 크리라 믿습니다.
2015-01-21 14:19:36 | 한원규
윤정용사모님, 1.4후퇴때 피난길에 애피소드 재밌게 읽었습니다만 큰 일 날뻔 하셨군요! 아무일 없이 이제까지 잘 살아오신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임 말미에 미디어선교헌금, 3.1 어르신들 특송등 여러가지 의미있는 결정도 내리시고 믿음의 아름다운 본이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015-01-21 14:05:26 | 한원규
글을 읽으며 머리속으론 그모습들이 그려집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분들과 함께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2015-01-21 13:37:41 | 김혜순
따뜻한 모임이야기 올려 주셔서 따스함이 전해지니 감사해요.
자주 이런 모임이 있으면 좋겠네요^^
3월에 있을 실버채리티 찬양이 기대됩니다.
2015-01-21 11:57:24 | 이수영
우리 교회는 처음에 3가정으로 송내에서 시작되었지요.
처음 장소는 45명 정도가 되니 너무 좁아서 근처로 조금 넓혀서 갔고
그 땐 아이가 단 둘이었지요.
이사 가서도 아이들이 중등과 유, 초등 합해 모두 10명이 안되었지만
두 번째 장소에서 지내는 동안 주일학교가 초등부와 중등부가 시작되었고
소수지만 찬양도 했고요.
삼계탕(삼양라면+계란)을 끓여먹으며 주일저녁 교제가 자연스레 시작되었어요.
또 그 장소가 비좁아져서 세 번째로 근처에 있는 건물의 두 층을 얻어서 이사했지요.
장소가 조금 넓어져 초등과 중등부가 차츰 자리매김이 되었어요.
점점 성도들이 늘어나 오전 예배를 예배당과 초등부 교실에서도 TV를 통해서 드려야 했고요.
먼저 된 성도들이 초등교실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 배려가 이사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어요.
네 번째로 소래 예배당으로 옮겨와서는 처음엔 너무 넓어 운동장 같은 느낌 이었지요^^
아이들을 찾으려면 옥상으로 해서 12층 교육실 방마다 한참을 돌아다녀야 했지요.
12층 전 층과 11층 반을 사용하는데 한동안은 넉넉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장소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는데 그 때 마침 아래층
식당 옆의 건물이 나면서 교육실이 11층으로 내려갔고
지금 현재는 두 층을 온전히 사용하게 되었어요.
이런 변화들을 겪으면서 성도 수가 적을 때는 규모가 작아서 혼자서도 넉넉히 해내던
일들이 점점 일도 많아지고 규모가 확대되어서 그 때마다 예배용의자, 식탁과 의자,
식기며, 수저, 만찬그릇, 주일학교 용품 등을 매번 사오곤 하는 일이 생겼지요.
우리 교회는 자원해서 일을 하기에 누가 지정하는 일이 없다보니
일의 분담이 잘 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지만
신실한 성도들의 헌신 덕분에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해오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주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정말 우리교회는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독특한 교회지요.
요즘에 여기저기서 자원하여 아름다운 섬김들이 생기고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지요.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가며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겨온
성도들이 있어서 가능 했어요.
앞으로도 모두가 그렇게 주님을 섬기리라 기대합니다.
주일 아침에 왔을 때 금요모임 때 미처 치우지 못한 흔적들이 보이면 깨끗하게 치우고
정리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화장실 비치 용품도 채우고, 예배당 환기도 시키고
하는 일들이 자연스레 시작되었고 성도들이 하나 둘 동참해서 오늘날 500명이 되는
교회의 살림이 원활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면 기적이라고 할 만 하지요.
요즘 성도수가 많다 보니 식당은 한정되어 있어 배식 줄도 길고 기다리는 일도 많아져서
시간차를 두고 내려가도록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복잡하긴 하지요.
식사 후 커피머신 앞에 줄도 상당히 길고요.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기계라 할지라도 전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요.
성도들이 오기 전에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일찍 오시는 분들이 사랑 카페의 품격있는
맛있는 커피와 담소를 나누기에 불편함이 없게 하려고 섬기는 성도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교회에서 가장 먼저 오시는 분들은 박 장균 형제와 고 정순 자매님이세요.
박 형제는 피아노에서 주일을 준비하고, 수원에서 오시는 고 자매님은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식당 식탁을 닦아주세요.
가끔은 이른 시간에 교회를 처음 방문 하시는 분들이나
책을 구입하려고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아침 일찍 식사 당번 자매님들의 도마소리와 가끔씩 터지는 웃음소리들이 즐겁고,
만찬이 있는 주는 포도즙을 만찬용 개인 잔에 채우느라 집중해서 포도 쥬스를 따르고,
많은 양의 빵을 구워와 만찬을 준비해서 11, 12층 별로 각 장소에 준비하고,
10시가 넘으면 매 주 주차 봉사하시는 분들이 이정표를 준비해서 내려가시고,
이어서 암송 반은 서로 모여서 커피와 녹차를 준비해서 성경암송을 위해 모이시고,
특송 하시는 분들도 조금 일찍 와서 반주자와 맞추어 보시고,
채리티 악기 팀들도 그날의 찬송을 미리 연주해 보고,
11층 교육실에서 교사들도 그날 필요한 인쇄를 복사기로 뽑고, 아이들의 간식을 준비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가운데 성도들과 마주치며 서로 눈인사로 안부를 확인하지요.
청년들과 중등부, 초등부, 유년부, 유치부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하고,
11층 도서실에서 조용히 책을 보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참 예쁘지요.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서 성도들을 맞는 형제님들의 웃는 모습도 보기 좋아요.
서점은 새로 들어온 책들도 정리하고 비치용은 따로 분류해 스티커 붙이고,
사랑카페에선 그윽한 커피향과 코코아 향들과 담소소리와 더불어 간간히 웃음 소리,식당은 일찍 오시는 성도들의 카페가 되어 삼삼오오 교제의 장이 이루어지죠.
목사님도 식당으로 내려가 식탁마다 담소하시는 분들을 돌아보시고
근황을 나누기도 하지요.
부지런한 성도들은 일찍 도착해서 교제도 나누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기에
10시가 넘으면 각 처에서 모두 바쁘게 보내지요.
점심시간에 13층 옥상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놀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도들과의 식사 교제도 못하고 옥상을 지켜주시는 분들 덕분에 부모들도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 있지요.
주일에만 온 성도가 모이다 보니 헤어지기 싫어서 저녁까지 남아 교제하는 분들도 많고
주교사나 집사들, 청년들, 찬양 팀 등 각 팀마다 필요에 의해 모이기도 하느라
거의 저녁식사까지 함께 나누는 성도들이 아주 많아요.
저녁을 준비해서 수고 하는 일과 설거지가 자원해서 이루어져 너무 감사하지요.
묵묵히 섬기는 성도들의 본을 보고 자원하여 저녁을 팀별로 준비하는 것을 보고
참 기뻤어요. 주님 보시기엔 얼마나 흐뭇하실까요?
누가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일이 없어도 이렇게 아름답게 섬기는 모습이
너무 감사해서 막 자랑-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우리교회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죄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어디나 의사소통의 문제들이 일어나고 오해에서 사해, 삼해를 거쳐 이해가 되고나면
형제애도 더 생기고 서로를 이해하고 세워주고 격려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요.
우리가 KJV을 보아도 결국은 사람이 갖고 있는 죄성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갖고 있기에 부딪히기도 하고, 소리도 내고, 마음이 합했다가, 대립도 했다가 하는
과정들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그런 과정들이 우리가 서로 다듬어지는 현상이 아닐까요?
원석이 깨지고 연마되어 다듬어져야 아름다운 모양이 되듯이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부대끼기 싫어서 뒷짐지고 멀찌감치 서있기로 작정한다면야
맘 상하는 일도 없겠지만 원석인 채로 나 홀로 군중속의 고독을 면치 못하지요.
교회란 마음을 먼저 열고 다가가는 사람의 공동체인 것 같아요.
‘미운 정, 고운 정’ 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이들이 떠들기도 하고 소란스럽기도 하고, 우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시끄러울 수 있지만
그것이 곧 건강한 아이라는 증거니까요.
사람인 이상 communication을 안 할 수는 없기에 소통의 어려움은 다들 있기 마련이죠.
우리교회를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기대를 너무 높게? 생각하고 오시는 분들도 가끔은 있는데 우리는 사람이지 천사가 아니잖아요?
완전한 교회는 이 세상엔 없기에 성도라 해도 이러한 과정을 누구나 겪게 되지요.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단적인 예는 같은 장소에서 광고를 들었는데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를 보면서 화자는 한 가지를 얘기 했음에도 청자는 해석을 다 다르게 한다는 것이에요!!!!
결국 같은 내용이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아 여러 가지 내용이 돼요!!!!
서로 어떤 방법이든 대화를 해서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정말 엉뚱해지거든요.
자전거의 핸들을 1도만 방향을 다르게 잡아도 시간이 흐르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참 자랑스러워요.
자기십자가는 <자기 의>를 못 박는 곳이지요.
내 생각, 내 자존심, 내 이기심, 내 이익, 자기 愛, 내 교만 등등.....
내 십자가는 내가 나를 못 박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 누가 대신 할 수도 없어요.
연마과정을 지나면 더 아름다워지고 과거보다는 조금이라도 성숙해 지니까요.
비록 가까이 있는 성도들처럼 자주 모일 수는 없어도 주일날 성도들의 얼굴모습만 봐도
분위기가 느껴지거든요.
지면을 빌어 정말 여러 분야에서 보이지 않게 말없이 수고하는 많은 성도들께 감사드려요^^
물론 그 보상은 물 한잔도 기억하시는 주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고요.
교회의 이모저모를 꼼꼼하게 효율적으로 챙겨주시는 최 상기 형제님의 곳곳의 물품 정리와
노련한 일솜씨의 덕을 크게 보고 있음은 두말 할 것이 없고요.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함께 하고,
또 주님 나라에서도 함께 즐거이 찬양하며 지내기를 소원합니다.
2015-01-21 11:49:24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