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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깊고 화기애애한 모임의 분위기를 사모님 글을 통해 그대로 전달받았습니다. 봄,여름,가을의 지난했던 과거를 거쳐 주님안에서 남은여생을 위로받으며 진정한 겨울의 안식을 누리고 계시는 어르신들께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몸 건강하게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소망합니다. 3.1뜻깊은 날에 뜻깊은 찬양을 기대하겠습니다.
2015-01-22 12:32:33 | 이정희
자매님! 주일의 풍경을 소박하고 정감있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주일날 교회에 오시는 인원이 500명이 넘는데도 사고없이 지켜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듯이 모든 일을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회계보고 해야될 것을 염두에 두고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01-22 12:22:23 | 이정희
미소가 제목인 특별한 글에 "오해에서 시작해 사해를 지나 삼해를 거쳐 이해에 다다른다."는 클래식한 유머가 제 마음 깊이 와 자리를 잡습니다. 고운 정도 정이요, 미운 정도 정이라면 하나의 교회 안에서 하나의 마음을 품고 바른길을 가도록 서로 이끌고 따뜻한 손으로 잡아주며 바른 교회를 만들어 가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잔잔한 필체로 정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1-21 23:30:19 | 김대용
저도 수영자매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이렇게 주일의 하루가 가는구나 ~정리가 되네요^^ 곳곳에 소리없이 섬기는 손길이 있기에 530명의 성도가 즐겁고 행복한 주일이 되었음을 새삼스레 느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15-01-21 20:50:05 | 최은희
이수영자매님, 교회 첫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듯하여 감사한 마음입니다. 목회자부터 성도들까지 모두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함을 구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또한 소리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겨주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적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이 기회를 빌어 교회를 애써 섬겨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그리스도 심판석에서 하나님의 보상이 크리라 믿습니다.
2015-01-21 14:19:36 | 한원규
윤정용사모님, 1.4후퇴때 피난길에 애피소드 재밌게 읽었습니다만 큰 일 날뻔 하셨군요! 아무일 없이 이제까지 잘 살아오신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임 말미에 미디어선교헌금, 3.1 어르신들 특송등 여러가지 의미있는 결정도 내리시고 믿음의 아름다운 본이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015-01-21 14:05:26 | 한원규
우리 교회는 처음에 3가정으로 송내에서 시작되었지요. 처음 장소는 45명 정도가 되니 너무 좁아서 근처로 조금 넓혀서 갔고 그 땐 아이가 단 둘이었지요.   이사 가서도 아이들이 중등과 유, 초등 합해 모두 10명이 안되었지만 두 번째 장소에서 지내는 동안 주일학교가 초등부와 중등부가 시작되었고 소수지만 찬양도 했고요. 삼계탕(삼양라면+계란)을 끓여먹으며 주일저녁 교제가 자연스레 시작되었어요.   또 그 장소가 비좁아져서 세 번째로 근처에 있는 건물의 두 층을 얻어서 이사했지요. 장소가 조금 넓어져 초등과 중등부가 차츰 자리매김이 되었어요. 점점 성도들이 늘어나 오전 예배를 예배당과 초등부 교실에서도 TV를 통해서 드려야 했고요. 먼저 된 성도들이 초등교실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 배려가 이사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어요.   네 번째로 소래 예배당으로 옮겨와서는 처음엔 너무 넓어 운동장 같은 느낌 이었지요^^ 아이들을 찾으려면 옥상으로 해서 12층 교육실 방마다 한참을 돌아다녀야 했지요. 12층 전 층과 11층 반을 사용하는데 한동안은 넉넉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장소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는데 그 때 마침 아래층 식당 옆의 건물이 나면서 교육실이 11층으로 내려갔고 지금 현재는 두 층을 온전히 사용하게 되었어요.   이런 변화들을 겪으면서 성도 수가 적을 때는 규모가 작아서 혼자서도 넉넉히 해내던 일들이 점점 일도 많아지고 규모가 확대되어서 그 때마다 예배용의자, 식탁과 의자, 식기며, 수저, 만찬그릇, 주일학교 용품 등을 매번 사오곤 하는 일이 생겼지요. 우리 교회는 자원해서 일을 하기에 누가 지정하는 일이 없다보니 일의 분담이 잘 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지만 신실한 성도들의 헌신 덕분에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해오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주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정말 우리교회는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독특한 교회지요.   요즘에 여기저기서 자원하여 아름다운 섬김들이 생기고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지요.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가며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겨온 성도들이 있어서 가능 했어요. 앞으로도 모두가 그렇게 주님을 섬기리라 기대합니다.   주일 아침에 왔을 때 금요모임 때 미처 치우지 못한 흔적들이 보이면 깨끗하게 치우고 정리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화장실 비치 용품도 채우고, 예배당 환기도 시키고 하는 일들이 자연스레 시작되었고 성도들이 하나 둘 동참해서 오늘날 500명이 되는 교회의 살림이 원활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면 기적이라고 할 만 하지요.   요즘 성도수가 많다 보니 식당은 한정되어 있어 배식 줄도 길고 기다리는 일도 많아져서 시간차를 두고 내려가도록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복잡하긴 하지요. 식사 후 커피머신 앞에 줄도 상당히 길고요.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기계라 할지라도 전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요. 성도들이 오기 전에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일찍 오시는 분들이 사랑 카페의 품격있는 맛있는 커피와 담소를 나누기에 불편함이 없게 하려고 섬기는 성도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교회에서 가장 먼저 오시는 분들은 박 장균 형제와 고 정순 자매님이세요. 박 형제는 피아노에서 주일을 준비하고, 수원에서 오시는 고 자매님은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식당 식탁을 닦아주세요.   가끔은 이른 시간에 교회를 처음 방문 하시는 분들이나 책을 구입하려고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아침 일찍 식사 당번 자매님들의 도마소리와 가끔씩 터지는 웃음소리들이 즐겁고,   만찬이 있는 주는 포도즙을 만찬용 개인 잔에 채우느라 집중해서 포도 쥬스를 따르고, 많은 양의 빵을 구워와 만찬을 준비해서 11, 12층 별로 각 장소에 준비하고,   10시가 넘으면 매 주 주차 봉사하시는 분들이 이정표를 준비해서 내려가시고,   이어서 암송 반은 서로 모여서 커피와 녹차를 준비해서 성경암송을 위해 모이시고,   특송 하시는 분들도 조금 일찍 와서 반주자와 맞추어 보시고, 채리티 악기 팀들도 그날의 찬송을 미리 연주해 보고,   11층 교육실에서 교사들도 그날 필요한 인쇄를 복사기로 뽑고, 아이들의 간식을 준비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가운데 성도들과 마주치며 서로 눈인사로 안부를 확인하지요. 청년들과 중등부, 초등부, 유년부, 유치부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하고, 11층 도서실에서 조용히 책을 보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참 예쁘지요.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서 성도들을 맞는 형제님들의 웃는 모습도 보기 좋아요. 서점은 새로 들어온 책들도 정리하고 비치용은 따로 분류해 스티커 붙이고,   사랑카페에선 그윽한 커피향과 코코아 향들과 담소소리와 더불어 간간히 웃음 소리,식당은 일찍 오시는 성도들의 카페가 되어 삼삼오오 교제의 장이 이루어지죠. 목사님도 식당으로 내려가 식탁마다 담소하시는 분들을 돌아보시고 근황을 나누기도 하지요. 부지런한 성도들은 일찍 도착해서 교제도 나누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기에 10시가 넘으면 각 처에서 모두 바쁘게 보내지요.   점심시간에 13층 옥상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놀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도들과의 식사 교제도 못하고 옥상을 지켜주시는 분들 덕분에 부모들도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 있지요.     주일에만 온 성도가 모이다 보니 헤어지기 싫어서 저녁까지 남아 교제하는 분들도 많고 주교사나 집사들, 청년들, 찬양 팀 등 각 팀마다 필요에 의해 모이기도 하느라 거의 저녁식사까지 함께 나누는 성도들이 아주 많아요. 저녁을 준비해서 수고 하는 일과 설거지가 자원해서 이루어져 너무 감사하지요. 묵묵히 섬기는 성도들의 본을 보고 자원하여 저녁을 팀별로 준비하는 것을 보고 참 기뻤어요. 주님 보시기엔 얼마나 흐뭇하실까요?   누가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일이 없어도 이렇게 아름답게 섬기는 모습이 너무 감사해서 막 자랑-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우리교회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죄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어디나 의사소통의 문제들이 일어나고 오해에서 사해, 삼해를 거쳐 이해가 되고나면 형제애도 더 생기고 서로를 이해하고 세워주고 격려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요. 우리가 KJV을 보아도 결국은 사람이 갖고 있는 죄성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갖고 있기에 부딪히기도 하고, 소리도 내고, 마음이 합했다가, 대립도 했다가 하는 과정들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그런 과정들이 우리가 서로 다듬어지는 현상이 아닐까요? 원석이 깨지고 연마되어 다듬어져야 아름다운 모양이 되듯이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부대끼기 싫어서 뒷짐지고 멀찌감치 서있기로 작정한다면야 맘 상하는 일도 없겠지만 원석인 채로 나 홀로 군중속의 고독을 면치 못하지요. 교회란 마음을 먼저 열고 다가가는 사람의 공동체인 것 같아요. ‘미운 정, 고운 정’ 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이들이 떠들기도 하고 소란스럽기도 하고, 우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시끄러울 수 있지만 그것이 곧 건강한 아이라는 증거니까요. 사람인 이상 communication을 안 할 수는 없기에 소통의 어려움은 다들 있기 마련이죠. 우리교회를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기대를 너무 높게? 생각하고 오시는 분들도 가끔은 있는데 우리는 사람이지 천사가 아니잖아요? 완전한 교회는 이 세상엔 없기에 성도라 해도 이러한 과정을 누구나 겪게 되지요.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단적인 예는 같은 장소에서 광고를 들었는데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를 보면서 화자는 한 가지를 얘기 했음에도 청자는 해석을 다 다르게 한다는 것이에요!!!! 결국 같은 내용이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아 여러 가지 내용이 돼요!!!! 서로 어떤 방법이든 대화를 해서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정말 엉뚱해지거든요. 자전거의 핸들을 1도만 방향을 다르게 잡아도 시간이 흐르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참 자랑스러워요. 자기십자가는 <자기 의>를 못 박는 곳이지요. 내 생각, 내 자존심, 내 이기심, 내 이익, 자기 愛, 내 교만 등등..... 내 십자가는 내가 나를 못 박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 누가 대신 할 수도 없어요. 연마과정을 지나면 더 아름다워지고 과거보다는 조금이라도 성숙해 지니까요. 비록 가까이 있는 성도들처럼 자주 모일 수는 없어도 주일날 성도들의 얼굴모습만 봐도 분위기가 느껴지거든요. 지면을 빌어 정말 여러 분야에서 보이지 않게 말없이 수고하는 많은 성도들께 감사드려요^^ 물론 그 보상은 물 한잔도 기억하시는 주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고요. 교회의 이모저모를 꼼꼼하게 효율적으로 챙겨주시는 최 상기 형제님의 곳곳의 물품 정리와 노련한 일솜씨의 덕을 크게 보고 있음은 두말 할 것이 없고요.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함께 하고, 또 주님 나라에서도 함께 즐거이 찬양하며 지내기를 소원합니다.
2015-01-21 11:49:24 | 이수영
1월 18일 주일 오후 소예배실에서 조양교 전도사님이 70세 이상 되는 형제/자매님들을 모시고 은혜스러운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임 순서는 먼저 유년부의 귀여운 어린이들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찬양을 불렀습니다. 두 번째로 전도사님의 말씀 선포와 세 번째는 각자 자기 나이와 이름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임을 준비하신 전도사님의 정성이 담긴 떡과 과일과 과자로 풍성한 대접을 받으며 말씀을 들었는데 참 재미있고 의미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일반적인 설교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계절 이야기를 꺼내시며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데 그중에 어르신들은 어느 계절이 제일 좋다고 생각 하십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대부분 봄이나 가을이 좋다고들 하셨습니다. 그럼 조양교 전도사님의 말씀 선포를 요약해 옮겨 보겠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도 봄의 어린 시절과 청년 때의 여름 그리고 장년의 가을과 노년의 겨울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인생의 계절마다 독특한 맛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새싹같이 생동감이 넘쳐나는 어린 시절, 꽃이 만발한 것 같은 청년의 때,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가을에 해당하는 장년, 열매를 수확한 후 휴식하는 겨울과 같은 노년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세 가지의 본질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1. 책임감으로 살아갑니다. : 남편으로, 부모로, 직장인으로, 사회인으로 등등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2. 사랑 : 사랑해야 할 책임(의무)로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로 남편으로 또한 할아버지 할머니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녀는 애물단지고 손자/손녀는 보물단지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자식이 아버지에게 “나를 키우실 때는 그렇게 엄하게 하시더니 어째서 손자는 그렇게 사랑만 하십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내 자식이니까 잘 키워야 할 책임감이 있었지만 손자는 너의 자식이니까 네가 잘 키워야하고 나는 그런 책임은 없어. 그러니 나는 사랑만 하면 되는 거다.”라고 대답했답니다. 3. 시련을 통한 유익 :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힘들었던 때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큰 유익을 얻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관람한 국제시장을 통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어르신들이 겪어온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얼마 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가족과 함께 관람했습니다. 남자 주인공이 아버지의 두리마리 겉옷을 붙잡고 사진 앞에서 “아버지요 저 많이 힘들었습니다! 장남으로 나에게 맡겨진 책임감을 위해 사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맡겨주신 장남의 책임감을 다했습니다.”라며 뿌듯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리라.”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 할 때 ‘하나님 아버지 저 그때 많이 힘들어 습니다.’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골 3:2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땅에 애착을 두지 않는 삶을 살려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전도사님의 귀한 말씀 선포를 들으며 문득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제 나이 여덟 살 겨울에 1.4 후퇴의 피난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모두가 보따리를 이고 지고 아이들은 걸어서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정처 없이 남으로 남으로 갔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당시 저희 집은 강원도 영월이었습니다. 1.4후퇴 때 아홉 식구가 충주 쪽으로 해서 경상도로 내려갔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가다 보니 혼잡해서 가족이 두 패로 갈라져서 며칠을 애태우며 찾아 헤매던 일, 하마터면 이산가족이 될 뻔 했는데 다행히 찾아서 다 함께 피난을 잘 마쳤던 일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한번은 어느 시골의 빈집에 들어갔는데 하도 피난민이 많아 방이 비좁아 아이들은 석가래 두 개를 가로질러 이불과 보따리를 올려놓는 선반으로 쓸려고 만들어 놓은 곳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는데 그만 졸다가 그 사이로 발이 빠져서 목만 대롱대롱 걸려 혼이 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다행히 손을 아래서 바치고 여럿이 힘을 써서 간신히 위로 올라가 위기를 모면하고 아침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주먹밥을 나누어 먹고 살았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다 형제들이 모이면 오빠 두 분이어서 그때 제가 선반에 걸려 죽을 뻔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그려졌듯이 지나온 우리의 삶은 질곡의 역사였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자유롭고 번영을 이룬 국가에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앞선 세대들의 노고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정된 것은 3 월 1일 주일 전원이 나가서 특송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대접을 많이 받고 있으니 우리도 교회를 위해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자고 해 자원해서 미디어 선교 헌금을 드리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만장일치로 모두 찬성을 해 결정했습니다. 한 30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서 모처럼 모두 활짝 웃으며 같은 겨울의 쉼을 얻는 동질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님 어르신들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한 지체됨을 느꼈습니다. 모임을 위해 애써주신 조양교 전도사님 부부와 그 외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5-01-21 11:29:05 | 윤정용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골2:12)"   여기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십자가 진리의 양면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 분을 의지할 때, 그 분께서는 우리 안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완전하게 이루어 주십니다. 즉,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고, 육을 벗을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죽음'에 치우쳐서 항상 어둡고 소극적인 반면, 다른 이들은 '죽음'의 측면은 회피하고 긍정적인 '부활'의 측면만 강조합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1) 옛 아담의 본성적인 생명을 처리할 수 있는 죽음의 역사가 상실되고, 2) 그에 따라 성령님의 사역이 본성적인 생명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며, 3) 처리되지 못한 자연인의 본성적 생명을 마치 부활의 생명인 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후자가 더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6절7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작도 단순한 믿음으로 한 것 같이 주님 안에 거하는 일도 단순히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부활의 측면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항상 주님 안에서 성령님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적 뿌리이자 기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 치라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의 죽음에 연합되어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고, 주님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그 곳이 우리의 영적인 주소요, 영적인 위치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자리에 앉았고, 거기에 부활의 능력을 얻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5-01-20 00:47:09 | 박진태
한 여자를 아내로 선택하면 다른 여자는 내 배우자가 아니라는 지극히 간단한 말이 교회생활 전반에 적용이 될 거 같아요. 미우나 고우나 한평생 함께 하는 배우자처럼 교회를 생각하는 성숙한 지체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2015-01-17 17:53:20 | 오혜미
조양교전도사님, 진정한 선택은, 진정한 포기(행동)를 수반해야 한다는 지혜로운 말씀에 크게 공감하며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교황이 이런 얘길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모독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되고, 존중해야 한다고..." 평화의 사도로 가장한 바빌론 음녀체제 교황의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서 유일신 신앙을 지켜온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핍박해 올지요! 사탄의 교묘한 술책이 넘쳐나는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오 주여, 속히 오소서!
2015-01-17 15:29:22 | 한원규
사람은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옷을 입을까?, 누구를 만날까? 점심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등 일상의 선택에서부터 직장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직장을, 진학하려는 사람은 어느 학교를, 결혼하려는 사람은 어떤 배우자를, 이사를 하려는 사람은 어느 지역, 어떤 집을 구할까? 이런 저런 고민도 하면서 결국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 진지해 질 수 밖에 없다. 한번 잘못 선택하면 그 후유증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지금 한 직장에서 20년을 보냈지만 그 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았다. 젊은 나이에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이 나아보이고, 저것을 선택하면 예전 것이 나아보이고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고스란히 물적, 시간적 대가를 치루어야 만 했다. 그래도 후회 없는 선택이 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일과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난 것이다. 아내에게 물어본다.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땟을까?’ ‘지금보다 좀 나았을까?’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물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 이런 여유있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제는 좀 더 잘 할 수 있고, 문제의 중심에 서있지 않고 멀찍이 떨어지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선택하는 일이다. 이단 사이비, 여타 종교들은 제쳐놓고라도 기독교내에서도 어떤 교회를 선택할까? 어떤 지도자를 선택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최소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이상 심각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나의 영적인 방향이 결정되기에 그렇다. 선택의 우(愚)에 있어서 대안이 없어서, 버리기 아까워서 선택하는 사례가 있다. 어떤 사람이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남 주기 아까워서 결혼한다면 그 결혼생활이 행복할까? 뾰족한 대안이 없거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하다면 어떨까? 행복한 결혼을 장담하기 심히 어려울 것이다. 결혼이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마음이다. 그랬을 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인내하고 평생을 이겨낼 것이다. 작금의 중도하차의 많은 예들이 잘못된 내적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많은 교회들이 처음에 세웠던 기준점에서 많이 이탈했다. 그 현상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고, 이에 대한 증거가 사랑침례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목사님은 왔다가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아파 하신다. 사랑침례교회의 추구하는 바를 충분히 살펴보고 자신의 내적동기를 돌아 보아야 한다. 구원자 예수님과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 킹제임스 성경, 신약교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은 다른 모든 여자를 배우자로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선택하는 것은 다른 모든 신들을 거부하고 포기하는 결정이다. 이 논리로 말하자면 킹제임스 성경을 선택하는 것은 개역성경을 포기하는 것이고, 신약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구약식 교회를 포기하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표적으로 탄생한 민족이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권능을 눈으로 몸으로 체득한 민족이다. 주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이라고 약속까지 한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으로 돌아간 예가 성경에 가득하다. 이스라엘 백섣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포기하지 않은 구석이 남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성경기록을 선택하는 것은 그에 부홥되지 않는 것들은 철저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기를 아는 사람이 진정 선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값을 치루지 않는 선택, 값을 치루지 않는 포기는 어떤 면에서 진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의 선택이 올바르다면 인내로서 경주해 나가고, 다른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이 우리의 생각속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지속되어야 함을 이 아침 시간에 돌아본다.
2015-01-17 11:45:17 | 조양교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속에 거하므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모든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그것이 너희를 가르친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2:27) 이제 사랑침례교회에 온지도 요번 2월달이 되면은 벌써 일년이 되어가네요, 제 마음을 다시 한번 지키기위해,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우리 교회를 올때의 초심을 보려고 제가쓴 글을 보다가 오류가 있어서 수정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것은 , 이 사랑침례교회로 보내신것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의 수 많은 미혹된 번역을 흠정역 성경을 보면서 얼마나 기가 차던지요...... 한글 킹제임스를 4년간 보았지만, 그 또한 잘못된 번역이 너무나 많은것을 지금와서 알게 된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혹시나 , 이 글을 보시는 다른 교회성도님들이 계시다면 빨리 돌이키시길 소원합니다. 샬롬~~
2015-01-13 23:45:38 | 이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