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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제 아내의 이야기가 올라와서 조금 민망합니다. 저와 제 아내가 한 몸이요, 한 생각이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 있겠습니까? 다투어도 한 몸이요, 한 생각입니다. 다 교회를 위해서 그러니까요. 특히 제가 성격이 급하고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지 못하므로 제 아내가 가끔씩 공개적으로 제 의견과 다른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 몸이요, 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나 봅니다. “사모님이 목사님을 누르나 보다”라고 말입니다. 아니에요. 그게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고 그 방식으로 이 교회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나 제 아내는 위선의 탈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부족함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가 우리 교회입니다. 너무 좋은 성도님들이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위선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약점을 잘 보완해서 거침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목사(사모)”라는 문구의 뜻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가 목사로 목회를 하지만 안으로는 우리 둘이 같이 합니다. 자매 모임 등에서 더는 이런 문제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15-02-07 16:30:01 | 관리자
지금까지 살펴본 기도에 관한 글 중에 가장 깊이 다가오는 글입니다. 기도에 관한 오해가 넘쳐나는 이 시점에 바른 것을 추구하려고 애쓰시고 또 글도 매끄럽게 잘 써 주셔서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로 성도들에게 양식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내가 남편의 구원을 간절히 바란다고 해도 주님만큼 그렇게 간절히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이제 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안에서 안식하며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다음 글과 함께 읽으면 더 균형이 잡힐 것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4662
2015-02-07 16:12:08 | 관리자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일정표에 체크해놓고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정해논 기도시간에 다른 일이 있을 때는 마음에 부담이 큽니다. 박혜영 자매님의 기도방법을 나누어 주실 수 있는지요?
2015-02-07 14:00:27 | 하원범
우리 사랑침례교회의 비전 중 하나는 “참된 신약교회를 추구함”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박순호 자매님의 글은 우리 교회 내에 ‘그리스도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바울이 리더십을 제한한 것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를 핵심적으로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때는 성별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여성의 섬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울의 몇몇 언급들은 여성들도 교회 내에서 리더십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설마 여기에 나오는 뵈베, 마리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등이 설거지하고 밥 짓는 일만을 했겠습니까? 내가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종 우리의 자매 뵈베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의 마땅한 도리로 그녀를 받아들이고 무슨 일에서든지 그녀가 너희를 필요로 하거든 그녀를 도울지니라. 그녀가 많은 사람과 나의 구조자가 되었느니라. (롬 16:1-2) 우리를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인사하라.(롬 16:6) 주 안에서 수고하는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 16:12) 또한 바울은 구체적으로 교회내의 여성들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가 눈에 들어오게 구절들을 배열해 보겠습니다) ◎ 연로한 여자들도 그와 같이 하여 -거룩함에 합당하게 처신하도록 하며 -거짓으로 비난하지 말고 -자기를 많은 술에 내주지 말며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라. ◎ 이것은 그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맑은 정신을 가지며 -자기 남편을 사랑하고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게 하며 -신중하며 정숙하고 가정을 보살피며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여야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아니하리라.(디도서 2:3-5) 결국은 교회의 주인을 우리 예수님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이 있습니다. 뭐가 성경적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2015-02-07 13:44:26 | 하원범
"내가 하나님께 속한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순결한 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정혼시켰기 때문이라.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고후11:2-3)"   단순함은 사물을 명료하게 보는 비결입니다. 성도는 사물과 현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혼란에 빠지면 깊이 생각한다고 해서 사물이나 현상이 명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순종할 때만 사물과 현상이 명료하게 보입니다. 지적인 문제라면 오래 생각해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영적인 문제는 생각할수록 혼란만 더해집니다.   만약 여려분의 삶에 뭔가 하나님께서 압박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그 문제에 관한 여러분의 '하나님의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고후10:5)'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명료하게 될 것입니다. 논리적인 이해는 그 후에 따라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봐야 합니다. 지혜롭고자 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마11:25). 성령님의 다스림을 벗어난 것인 줄 알면서 허용하는 사소한 일은, 우리 삶에 커다란 영적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혼란은 우리가 시간을 들여 생각해도 명료해지지 않습니다.   영적 혼란은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즉시 분별력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겸허해 집니다.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우리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2015-02-07 10:58:12 | 박진태
기도에 관한 말씀이나 글을 듣고 보면 아~ 맞다 그렇지 하다가도 어느순간 내가 구한 기도의 응답이 예스, 노 이두가지로만 고정되어 초조하게 온몸에 힘주고 기다리는 모습을 봅니다. 내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안에서 안식하며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겠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제 삶속에서도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5-02-07 10:35:39 | 김혜순
제목만 보고 뭔일 있나? 순간 여러 가지가 스쳐지나갔습니다. ㅎㅎ 신앙 생활하면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는 고 정관념 때문이겠지요. 자매님께서 언급하셨듯이 바른말씀 바른교리 바른교회를 찾아 왔으니 거기에 합당한 생각으로 생활해야겠지요.
2015-02-07 10:25:38 | 김혜순
오늘 금요모임에서 자매님의 기도묵상은 깊은 고수의 사유라는 말을 듣고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에 대한 정의를 알지 못한 채 나름대로 결론을 지어 교회내에서 많은 혼란을 빚는데 자매님의 솔직하고 진지한 묵상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기도의 의미를 공감했습니다. 앞으로 종종 글로서 교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5-02-06 23:09:28 | 오혜미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사모가 다른 사람 앞에서 남편 목사를 칭할 때, 꼭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남편이 회사 과장이면 아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장님! 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얼마 전 누군가, ‘왜 우리 교회선 사모님이 목사님을 목사님이라고 안 부르지?’ 라고 하는 소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목사 컬럼에서, 목사님의 글 속에 ‘목사(사모)’라는 표현을 유독 강조한듯한 글을 읽고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목사(사모)라는 표현을 왜 그렇게 강조하셨을까? 하는 생각이요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느 분들은 목사님과 사모님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구나!! 하고요 대부분의 기성 교회교인들은 ‘목사님과 성도는 다 같은 제사장이다’ 라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목사님은 그래도 일반 성도들보다 한 단계위인 제사장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사모님도 부부지만 남편을 부를 때는 목사님이라고 불러야하고 목사님이 하는 말에는 수긍하며 순종해도 사모님이 하는 말과 행동에는 ‘사모가 조신하게 계셔야지, 너무 나선다 ’ 라는등의 표현을 써가며 사모는 할 말이 있어도 꾹 참고 우아한 모습으로 항상 웃으면서 성도들을 맞이해야한다는 의식이 있지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예전 교회에서는 그랬죠! 하지만 여긴 사랑 침례교회입니다. 정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목사님과 우린 다같은 성도입니다. 목사님은 한 단계 위인 제사장이고 우린 한 단계 아래인 평신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목사님과 사모님을 따로 분리해서 ‘목사님말만 옳고 사모님이 하는 말들은 간섭이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탈피해야한다고 봅니다. 목사님부부도, 집사님부부도, 우리부부도, 다 똑같은 부부입니다. 왜, 유독 목사님 부부만 따로 떼어 놓으려고 애를 쓰십니까? 그리고 교회는 또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봅니다. 집사님들 모임에 어떤 안건이 나오면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면 좋겠죠. 그러나 각자 생각이 있는바 의견일치가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럴땐 목사님께서 중심을 잡아주셔야지요(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자매님들 사이에서(예를 들어 자매모임등) 의견이 하나로 안 모아지면 어찌해야합니까? 당연히 사모님께서 중심을 잡아주셔야지요. 목사님의 목회방침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사모님이니까요. 그리고 그 의견에 따라야지요 왜, 목사님은 되고 사모님은 안되나요???!!! 바른말씀, 바른교리, 바른교회를 찾아 왔다면서 기성 교회의 관습을 이곳에 심으려는 생각은 없는지... 우리 모두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었습니다.
2015-02-06 17:24:03 | 박순호
요즘 내게는 한 가지 실제적 기도의 문제가 있다. 남편의 참된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데 과연 이렇게 복음에 완악하게 저항하는 남편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엄습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면서도 이루어질까 확신치 못한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는 참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   사실 기도는 내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는 나의 믿음의 강도 이전에,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의 공의와 긍휼 그리고 약속하신 말씀에 신실하신 그분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경우 이 사실을 망각한 채 마가복음 11장 23-24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으면 그것은 이교도들의 믿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마가복음의 이 말씀만 가지고 본다면 다짜고짜 될 줄로 믿는다는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받을 수 있다는 백지수표를 우리가 가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다른 말씀을 비춰 보면 다짜고짜 될 줄로 믿는다는 "센 기도"가 응답받는다고 하지 않고, 그런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는 아무리 열심히 구하고 믿어도 결코 응답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 다시 돌아가 나를 살펴본다. "그분을 믿고 기도하라. 받은 줄로 믿으라."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남편의 영혼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뜻이 있으니 내 기도는 결코 정욕에 쓰고자 함이 아니요 주의  뜻에 합한 일이니 그 응답은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응답이 꼭 남편의 구원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응답이 꼭 남편의 구원이어야 한다는 한 가진 사실에만 집착하면 불안해진다. 구원은 남편이 주님의 권유를 받을 때 마음을 스스로 열어야 가능하기에,  내가 믿는 한 우리 주님은 마귀처럼 그 사람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내 기도의 "받은 줄로 믿으라"는 무엇을 믿는 것인가?   남편의 구원 여부는 그 나중 문제이고 나의 기도가 주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주님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어떤 조치를 취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라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낙심치 않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이유는 그의 생명의 남은 날이 일 년이 될지 혹은 10년이 될지 알지 못하나 내가 기도함으로 주께서 그에게 끊임없이 구원의 기회들을 제시하시고 이끌어주셔서 마침내 기쁨의 날을 주시리라 바라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축구경기를 생각해 보면 확실히 프리킥의 찬스가 많이 주어지고 동료 선수의 정확한 패스가 많이 주어지다 보면 득점할 확률이 높아짐을 보게 된다. 바로 그와 같은 것이 기도가 아닐까?   내가 남편의 구원을 간절히 바란다고 해도 주님만큼 그렇게 간절히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이제 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안에서 안식하며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5-02-06 08:20:10 | 박혜영
박진태형제님, 늘 좋은 내용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 중에 "성숙한 기도는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면서 계속 여쭤 보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2-05 10:03:35 | 한원규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손을 다 같이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 올리자.(예레미야 애가3:41)"   참된 기도는 무기력함에서 출발합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껴야 거기서부터 진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자신의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마음을 들어 올려 정말 절실하게 주님께 부르것은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매달려 간절히 부르게 하시려고 우리를 큰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데, 우리처럼 작은 일에도 쉽게 우쭐대는 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난한 마음 없이 대충 기도해도 그냥 다 응답해 주신다면, 우리는 내가 믿음이 좋고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 하신 줄로 착각한 나머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쓸모없는 존재인지는 모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생도감이 넘칠 때는, 낮을 때로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어서 그 가난한 마음에 주님의 부요함이 가득 채워질 때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낱낱이 기록한 명세표이자,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게시판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모든 기도는 그 사람의 영적 수준과 영적 상태가 다 드러납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늘 뭔가를 달라고 조르기만 하다가, 철이 들게 되면 어머니가 뭘 원하시는지, 뭐 필요하거나 혹시라도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지 자꾸 물으며 우리의 기도도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간정하기만 하다가, 영적으로 성장해 감에 따라,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면서 계속 여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관심을 갖고 항상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입니다.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짊어진 것 같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도, 골방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아침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방을 나서게 됩니다.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두려움과 걱정을 하나님의 평안과 감사와 위로로 바꿔 놓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연약한 저희가 오늘 하루도 깨어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의 영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늘 더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과 긴밀히 동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시며, 이 부족한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스펄전의 묵상중.
2015-02-04 22:10:55 | 박진태
귀한 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상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피로를 핑계로 게을러지지 말아야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장하고, 권면을 통해 서로 유익이 되게 해 주시는 주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다.
2015-02-02 23:23:38 | 김지훈
성경을 읽는 것은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니라 '하나님 만나 뵙기'라는 묵상이 가슴 깊이 큰 울림을 줍니다. 별도의 저자가 표기되지 않은 것을 보니 오롯이 형제님의 글을 올려주신 듯합니다. 저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해 주는 귀한 묵상의 글에 감사합니다.
2015-02-02 12:05:56 | 김대용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3:16-17)"   한 성도가 다른 책 없이 오직 성경 한 권만으로도 온전히 성숙한 성도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고 '철저히' 갖추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롬10:17)" 그래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도 말씀에 계속 노출되면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믿음이 자라나게 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 갓난 아이가 잘 먹어야 잘 자라듯이 그리스도인도 말씀을 잘 먹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은 성도의 영적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매일 거둬야 했던 것은 영적 만나인 말씀을 매일 섭취해야 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욥은 하루 세 끼 식사보다도 말씀을 더 귀히 여겼습니다.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아마도 욥은 그 힘으로 고난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접근 방법에는 읽기, 듣기, 암송, 공부, 묵상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구든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성경 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를 보면, 대부분이 성경을 읽다가 믿음이 생기고, 성경 읽기로 믿음이 성장해서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는 훌륭한 열매로 입증된 아주 탁월한 성경 접근 방법입니다.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의 저자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성경 읽기는 그냥 '책 읽기'가 아니라, '하나님 만나 뵙기'입니다. 하나님을 매일 만나 뵙도록 하십시오.
2015-02-01 23:50:03 | 박진태
김대용형제님, 기도 관련 매우 유익한 내용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100% 믿음을 갖고 기도하며 나아가고, 내 유익을 구하는 기도보다는 다른사람의 유익을 간구하는 중보기도, 나아가서 국가와 민족이 지은 죄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말씀, 특히 불신자의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며 구원받기를 원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말씀에 더욱 힘 입어 저와 사랑침례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기도에 대한 큰 소망을 갖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항상 유익한 내용에 감사합니다. ^^
2015-01-28 13:07:28 | 한원규
Q : 할렐루야! 성경에 보면 어떻게 기도하라는 말씀들은 많은 데 반해 언제까지 기도하라는 말씀은 거의 없는듯합니다. 제가 말씀을 잘 모르는 이유로 인해 기도할 때 응답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지킴이를 찾아보아도 기도에 대해서만 나오지 언제까지 하라는 것은 안 나오네요. 전에 순복음교회 조 목사님이 설교에서는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마음에 평안함이 오고 확신이 오고 믿음이 오면 그걸로 응답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일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양해 바라겠습니다. 제 마음에 열의에 의해서 신학을 하다가 어떠한 사유로 인해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 열의는 식지도 않고 그러던 중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보는 게 수많은 목사들 그중에서도 젊은 목사들을 보면 저분들은 벌써 목사가 되어서 저렇게 목회를 하고 있는데 난 나이도 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 아직 신학교도 안 나왔고 참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나이는 계속 들어가고 있고 여건도 안 좋아서 신학은 할 수도 없고 제 마음의 소원은 간절한데 주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알게 해 달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에 말씀을 읽다가 사도행전 9장 10절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씀으로 강하게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말씀을 받은 적이 없어서 30분 동안 울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이 매번 말씀으로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기도 응답이 될 때까지 계속 울부짖어 기도 할 수도 없고 해서 말씀에 대해 잘 아시는 성도님께서 언제까지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여쭐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려고 해도 그것이 흠정역에 있는 교리랑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성경적인 것인지, 흠정역 성경 말씀에 대해서 잘 아시는 성도님이 계시면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형제님 반갑습니다. 한겨울에 감기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우선 아랫글과 설교 영상을 읽고 시청해 보십시요. 특히 ‘그리스도인의 기도’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들어보시면 큰 도움을 받으실 겁니다. 1.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7 2. 그리스도인의 기도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83 소위 '기도 응답'에 관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기에 형제님과 다른 분들을 위해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기도’ 후반부의 주요 내용에 제가 몇 가지를 부연해서 아래에 글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 38장에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성경 기록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침 받고 수명이 15년이나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명이 연장된 히스기야는 유다 왕국을 방문한 바빌론 사신들에게 나라 전체를 샅샅이 공개함으로 말미암아 바빌론에 의한 멸망이 유다 땅에 더 신속히 임하는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사람의 뜻대로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또한, 무한대의 영역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먼지에 불과한 사람의 뜻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사55:8~9) 그러므로 우리 안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신약 시대 성도들은 마음에 품은 간절한 소원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자들처럼 기도의 성취를 감히 하나님께 강요하는 태도를 깨끗이 청산하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벽을 다 재건한 후 하나님께 드린 느헤미야의 기도가 좋은 예가 되듯이 구약식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서 내가 형통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1 또 정한 때에 나무 헌물과 첫 열매를 드리게 하였사오니, 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느13:31) 이런 구약식 기도는 다르게 표현하면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다 하고 주인에게 그에 해당하는 만큼만의 대가를 구하는 것이 바로 종의 태도이고 종의 입장에서 구하는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모범적인 예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사도 바울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의 이 절절한 고백를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7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9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고후12:7~8) 그럼 고린도후서 12장의 이 말씀을 주해해 보겠습니다. 당시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 안에 가시”에 대해 어떤 성경 주석가는 갈라디아서 4장 13~14절과 함께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분명히 육신의 질병이며 아마도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죽다 살아난 후(행14:19~20) 뇌를 다친 바울이 얻게 된 ‘간질병’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받아 신약 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의 기록자가 되었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지역교회를 세운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열정적으로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순간적으로 몸의 통제력 상실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르 떨며 청중들 앞에서 쓰러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설교하던 바울 자신에게는 그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이었을까요. 물론 바울이 말한 “육체 안의 가시”가 간질이었는지 안질이었는지 아니면 질병이 아닌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고통과 고민을 안겼던 무엇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에도 큰 장애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치명적 고통에 대해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 자신이 세 번이나 간절하게 떠나가기를 하나님께 구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고후12:9) 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분량 이상으로 주어진 은혜와 사역의 성과를 통해 자칫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따뜻한 배려라는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간파합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육체 안의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요, 마치 진주조개가 아픔을 참고 품은 모래가 보석이 되듯이 고난이 주는 믿음의 훈장이며 영적 전쟁터에서 자신을 지키는 무기임을 깨닫고 고린도후서 12장 8절의 저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 우리는 연약하므로 때때로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장애가 되는 어떤 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와 별개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십니다.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바로 이런 명확한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초연하게 하나님께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감사함으로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약식 기도의 자세, 즉 종의 기도를 청산하고 신약 시대 성도의 기도,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소위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는 말은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각종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은사주의 시스템과 이미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래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부로라도 이런 표현은 쓰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하거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일이 해결되었다.’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간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도에 있어서 절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원리를 적용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에 따른 기도의 핵심은 그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존귀하게 여겨드리며 두려워하고 그분의 말씀에 경외감을 느끼며 떨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일을 하는 것, 밥 먹는 것, 길을 걷는 것, 숨 쉬는 것, 잠자는 것 등 온종일 생활하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기도와 예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 28절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고 종일 불안과 초조함에 떨며 사람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될 정도로 오랜 시간 기도에 열을 올려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기도했느냐 하는 양(量)의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는가 하는 질(質)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사람이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무어라 가르쳐 주는지와 그 안에 담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자신의 소원을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혹은 온종일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되고 목에서 무쇠솥을 긁어내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열정적인 기도는 도리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됩니다. 다시 한 번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빌립보서 4장 6~7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대해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소원하는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드려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구약 시대 성도들의 자세와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습니까? 그 기도에 대한 100%의 분명한 응답이 약속되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구 채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에게 7절의 답은 마치 동문서답처럼 여겨질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 분명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만사형통이나 소위 조지 뭘러식의 반드시 문제를 해결 받는 특급 기도 비결을 통한 바로바로식 응답이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는 문제가 해결되든 아니든,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혹은 해결 받는 것이 연기가 되었든 그런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의 영과 혼을 충만하게 채우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만 고정하도록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 생활을 통해 맛 볼 수 있는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탁월한 설교를 매우 모자란 실력을 통해 글로 풀어 놓은 부족한 답변이나마 부디 필요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은 영국 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목으로 1643년 영국 의회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소집된 교회 회의가 5년 동안 회의한 결과 작성된 철저하게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신앙고백서입니다.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저희의 입장은 다음의 글들을 참조해 주십시요. 1. 칼빈주의(개혁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47 2.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42 3. 런던침례교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766 4.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칼빈주의와 대체신학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397 부족한 답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 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2015-01-27 21:02:33 | 김대용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거듭남은 인간의 영 안에서 일어나는데, 사람이 거듭나면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장소가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구원받은 영의 가장 깊은 곳까지 깊숙히 침투하시는데, 그 최종 목표는 우리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과 결합시켜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 안에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는 말씀대로 인간의 영은 더러워 질 수 있으며 범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모신 존재로서 언제나 영이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탐욕, 음란, 교만, 미움 등의 영적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영 안에 악하고 더러운 영들을 초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이 바르고 잘 되어야 모든 일이 잘 됩니다. 다른 문제는 살아가면서 수정할 수 있지만, 영이 잘못되어 있으면 모든 것이 잘못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음과 영이 있는데, 문제는 마음은 올바른데 영이 더러워진 때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반대했다가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들었던 것은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좋은 마음이었지만, 그의 영은 대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영향으로 더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을 더럽히는 것들을 예리하게 분별해 냅니다. 따라서 영을 깨끗하게 지키려면 우리는 말씀을 늘 가까이 함으로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시119:9)"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5-01-27 00:33:41 | 박진태
우리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도록 기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짭은 역사지만 큰 기적이 이루어 진것 같아요. 사람이 많이 모여서가 아니라 그가운에서 질서 있게 조용히 소리 없이 움직이는 성도들의 모습 참 보기만해도 은혜가 됩니다. 주일날 일찍오면 언제나 한결같이 일찍 오셔서 차분히 준비하시는 자매님과 형제님을 만나게 대지요.각자가 알아서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 ! 거기에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듯 하며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신약 교회가 되겠지요
2015-01-23 05:02:46 | 윤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