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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진리의 영으로 깨어있는 자들이 이땅 각처에서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간구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이것을 위해 우리교회의 사역이 더욱더 성장하기를 소망해봅니다.
2015-03-10 11:20:17 | 김영익
유용수형제님, 아침을 깨우는 대한민국 모든 구성원의 각성이 필요하고, 특히 교회들의 대오각성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매우 시급한 과제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5-03-10 10:14:11 | 한원규
# 대한민국아 제발 조용히 좀 살자!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리려니 얼굴이 부끄럽고 손가락이 부끄러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 달 간의 긴 여름휴가 기간 중에 모처럼 느껴보는 저녁시간! 오래간 만에 시내버스를 타고 광화문 쪽으로 즐거운 시내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은 첫 수학여행을 떠나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을 돌아서는 순간!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세상에! 아직도 데모를 하고 있다니~~ 이내 내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탄식이 흘러 나왔습니다.   대한민국아! 제발 좀, 조용조용히 살면 안 되겠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지금도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하루 종일 자동차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이런 물건, 저런 물건사라고 외쳐대는 소리들,,,,,,, 고장 난 시계나 TV에 라디오, 오디오까지 산다는 소리들,,,,,,, 여름에는 모기장 달으라는 소리에, 고장 난 컴퓨터나 냉장고 팔라는 소리들,,,,,,, 오징어에 영광굴비나 양파에 감자, 고구마까지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한 뼘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골목 안 이웃집에서는 어느 부부의 싸움하는 소리에 덩달아 터지는 어린아이의 울부짖는 소리! 곧이어 들려오는 강아지의 억, 억, 질러대는 소리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열심히 달음박질쳐 왔습니다. 어느덧 문뜩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가는 곳마다 아파트는 하늘을 찌르며 솟아올라 마천루를 이루는 듯 하고, 길들은 널찍널찍 뚫려 있어 과연 대한민국이 몰라보게 발전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슈퍼나 백화점에 가면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고 이름도 모르는 각종 먹을 것들과 입을 것들이 없는 게 없이 쌓여있어 대한민국이 진짜로 잘 살게 되었구나!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 꼭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시끄러워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루라도 좀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인재와 자연 재해에, 엽기적인 각양 각종의 공해까지 하루도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끄러운 속에서도 스트레스에 쪄들어 죽기는커녕, 거리에 나가 보면 여기저기서 처녀 아이들이 대로상에서 배꼽들을 다 들어내 놓고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기는 봐야겠는데, 영~낯설어서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더니 무슨 영업장 선전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촛불 들고 광화문 네거리를 마비시키는 것과 처녀들의 배꼽춤을 같은 날 동시에 구경 할 수 있는 좋은 나라! 너무나 좋고 너무나 대단한 나라가 아닙니까?   에휴~~ 대한민국아 제발 좀 조용히 들 살자!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더 해야겠습니다. 동네 한복판에다 트럭 갖다 대 놓고 확성기로 냅다 소리 지르며 장사하시는 상인여러분! 벌어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새댁이 배가 제법 부르던데 그 집 그 아낙 아기 떨어질까 걱정돼서 그러니 제발 조용조용히 좀, 장사해 주실 수 없으시겠는지요? 요즘, 사람 새끼 생산량이 절대 부족해서 나라에서 돈까지 주어 가며 새 국민 늘리기 정책까지 세워 시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나라 좋은 나라 금수강산을 다시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돌려놓을 수 없겠는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애들도 다시 쑥 쑥 잘 낳게 되지 않을까요?   뭐라고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자란 아이라면 면역이 되어서 괜찮을 거라고요?   대단하다! 정말로 대단해!!   여기까지 글을 써 놓고 숨을 돌려 지난세월들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우리들은 대한민국이 동방예의지국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칭찬을 받으며 그 가슴 뿌듯함으로 웃음꽃 활짝 피우며 살아왔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새 나라의 어린이“라는 동요까지 부르며 자라왔습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 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일제의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 된 민족이 국민계몽의 일환으로 제일 먼저 부른 노래가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나고 서로서로 돕는다고 노래했으니,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이 나라 이 민족이 얼마나 정신이 똑 바로 박힌 지혜로운 민족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로운 민족이 어떻게 된 일이기에 해방 된지 70년이 된 지금, 새 나라의 어린이노래를 부르고 자란 내가 환갑이 넘었는데도 이 민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는커녕 아침잠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요?   한국기독교는 새벽기도로 세계에 유명합니다. 한국교회만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천국 문을 두드리며 주님의 잠을 흔들어 깨워 놓고 울며불며 졸라대는 민족은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100년이 넘었다고 한국교회의 우두머리들은 온 세상에 대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0여 년 동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주님의 단잠을 흔들어 깨워놓고 울며불며 조른 것이 무엇이었기에 이 민족의 아침잠은 아직도 깨우지 못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 100년에 이 나라의 교회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맘모스 교회당건물들과 가마니로 쓸어 담는다는 막대한 액수의 헌금과 기복신앙으로 머릿속이 꽉 들어찬 1천만의 자칭 기독교인들뿐이지 않습니까? 머릿속에 기복신앙으로 꽉 들어찬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헌금과 무당집 복채와는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올바른 성경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의 손에 바른 성경인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이 바른 말씀으로 바르게 양 무리들의 늦잠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나 자신도 잘못된 성경과 잘못된 교회와 잘못된 목사의 설교에 흠뻑 취한 신앙생활을 하며 고요한 아침에 절어서 하나님아버지를 불러왔다는 사실에 대단한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들 수가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솔직히 “우리는 늦잠꾸러기들의 나라"라고 회개하며 고백을 해야 할 때입니다.   세계사의 대낮에서 왕따 당하여 잊혀 지기 전에 말입니다. 아니 지금 무섭게 아침잠에서 깨어 일어나고 있다는 중국에 다시 등덜미를 잡혀 옛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말입니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아직도 이를 허옇게 드러내고 으르렁대고 있는 일본의 앞 발톱에 다시 얼굴을 할퀴기 전에 말입니다.   2015년 3월 9일(월) 유 용수
2015-03-09 21:57:45 | 유용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지 아니하시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거니와 이 일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무엇을 선포할 것인가? 첫째는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다. 즉,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도(道)'의 양면, 곧 죽음과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어 주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임을 전해야 합니다. 죽음과 부활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로서 자신의 직책에 대해,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 종은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인이었지만 복음 전파에 관해서는 자신을 종으로 여겼고, 종으로서 주인에게 명하신 임무를 다하기 위해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유창한 언변이 필요없습니다.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의 도에 '대해' 선포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 '그 자체'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 해도 전파하는 사람 때문에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말솜씨로 복음을 전하면, 그것이 도리어 십자가의 능력을 가로막아서 아무리 열심히 전도해도 열매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4-5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 안에 서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 안에 서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의식적으로 '사람의 말과 지혜'로 전도하는 것을 삼가며 하나님만 의지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권능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데 사람의 말재주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전도자는 사자(使者)들이 어명(御命)을 선포하듯이 당당하게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선포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들은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단순하게 믿고 '십자가'만을 선포했습니다. 현대 교회의 세속화 현상은 '십자가'를 선포해야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널리 선포할 수 있도록,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죽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어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2:20)"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는 참된 믿음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해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나서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십자가'를 선포할 종을 찾고 계십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다.   "잘 들으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분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5-03-07 23:35:19 | 박진태
나는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그 순간이 변화의 출발점이군요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은 극히 편향적인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2015-03-05 21:17:11 | 조양교
디모데전서 5 : 8 "그러나 누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집 사람들을 부양하지 아니하면 그는 믿음을 부인한 자요 불신자보다 나쁜 자니라."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건전한 믿음의 가정이 세워져야 건전한 교회가 세워집니다. 나에게 맡겨진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곧 교회를 든든히 하는 길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2015-03-05 21:09:56 | 조양교
요즘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가정이 붕괴되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나싶습니다. 제가 어렸을적에는 주위에 이혼한 가정이 희귀하리만치 없었는데 지금은 제 주위를 둘러보면 이혼한 가정도 너무많고 저의 친척 쪽에도 몇가정이 이혼을 했으리만큼 이혼도 흔하고 대부분의 부모가 갓난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직장에 가거나 집에있는 주부도 나라에서 비용을 대주니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바보취급 당하는 판국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남으로 모든 불행과 비극이 시작됐는데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지는 않을테니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저도 아이들이 더 커서 제 품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있을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부어 줘야겠습니다.
2015-03-05 13:02:29 | 이정희
실제 성경 신자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문제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윗글에 담긴 것과 같은 교훈을 접할 때마다 내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고 단정하는 모습이 저 멀리 있으려니 안심하던 영적 수렁을 바로 내 옆에 자리 잡게 만들곤 합니다.
2015-03-04 21:20:31 | 김대용
가정이란 추운 겨울 차갑게 얼어버린 손과 발을 녹여주는 화롯불 같아야 하는데 갈수록 삭막해져만 갑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는 따스한 온기가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2015-03-04 21:17:29 | 김대용
실제로 있었던 실화 두 개를 소개해 주셨는데 가슴이 뭉클합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가장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하는데 그나마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이렇게 부모 없이 홀로 자라나는 어린 생명들의 삶 속에 간섭하고 역사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2015-03-04 14:01:22 | 한원규
박진태형제님, 늘 좋은 내용의 글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 중에 "주님께서 쓰임 받으려면 먼저 우리의 인격의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모난 데가 어딘지 모릅니다. (중략) 그래서 주님께서 때로는 극심한 고난으로 우리의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 이라는 내용이 큰 울림으로 제 가슴에 와 닿습니다.
2015-03-04 13:48:38 | 한원규
우리에게 인간적인 열정이 일어나는 것을 자제해야 함이 요구되네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귀와 마음을 열고 끈기 있게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함을 또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3-04 09:14:42 | 박흥식
 깊은 협곡 밑으로 한탄강이 흐르고 강위에는 넓은 평야로 벼농사를 짖고있는 냉정리 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2킬로 데는둘레의 둥근 연못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옆에 조그마한 사택이 아담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4년동안 목회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아지랑이가 가믈 가믈 피어나는 초여름 어느날 그 연못을 지나가는 소 달구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에 저는 그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은 마차에 올라타고 소를 몰고 가는데 그옆에는 부인이 걸어서 가고 있었거든요 !  뛰다가 걷다가 하는 그 부인을 보고 있노라니,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남존 여비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것은 부부가 아니라 종을 부리는 모습이지, 같은 인격으로 한집에 사는  부부가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 되시는 분이 우리 교회에 혼자서 가끔 나오셨습니다.  한 오십이 조금 넘으셨는데 흰 광목으로 치마 저고리를 입고 다녀서 육십세도 더 들어보였습니다.    가끔 교회 올때는 품속에다 쌀이나 잡곡을 한대박씩 싸 갖고와서 우리 집에다 맡겼습니다.  시장에 장을 보러 갈때는 그 것을 갖이고가서 팔아서 필요한 소지품을 사서 남편한태 들키지 않게  쓰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무서우세요?  예! 우리는 하루도 조용히 사는날이 없답니다.  아들이 둘인데 큰 아들은 몆년전에 집을 나가 버리고 둘째가 17세인데 국민 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에도  안보내고  농사일을 배우라고 집에서 일을 시키는데 조금만 잘못하면 야단을 치고 화가 나면 곡갱이고  삽이고 들고 때릴려고 해서 이 아들이 산에다 움막을 짖고 혼자 사는데, 정신이 불안 해서인지 늘 안절 부절  하면서 사회 생활도 못하고 혼자서 겨우 밥만 끌여먹고 살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차라리 눈에 안보이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태연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어떠 했겠어요, 늘 울면서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목회지를 서울로 옮기게 되어 떠났습니다 .   그런데 그 집이 늘 궁금 했습니다. 그 후로 한 2년후 소식을 들었습니다.     산에서 혼자 살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집에다 불을 놓아서 초가집이 다 타버리고 그 아들은   감옥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제일 큰 축복이 남/여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으라고 하셨는데 그렇치 못하고 불행 하게도 비참하게 비극으로 끝내는 가정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복을 저주로 바꾸어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것 같아요.     40년쯤 지난 일인데도 가끔은 내 머리에는  불행한 가족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2015 .2 .19 캐나다 한국 타임지에 토론토 노스욕 에서 3살짜리 할엘티야 마쉬 라는 어린이가 티셔츠에  기저기를 차고 부츠만 입고 새벽 4시에 집을 나가 10시에 영하 19도 체감 온도28도의 강추위에서 홀로  견디다 6시간 후에 데이커 {유치원 어린이집 } 앞에서 쓰러져 있는것을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이미   동사로 목숨을 소생시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럼 왜 애기가 자고 깨자 마자 어린이 집을 향해 갔을가요 ?   마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웠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늘 사랑을 쏫고 잘해 주어서 엄마의 사랑 대신   선생님의 사랑이 이 마쉬의 마음을 채워 주었던 것이지요, 추위도 모르고 자고 깨자 마자 늘 다니던 어린이   집으로 걸어서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같겠지요!     그런데 집에서 어린이 집이 먼 거리에 있었나봐요,    마쉬 할머니가 아침에 보니 손자가 없어서 경찰에 신고를 해서 찾느라 헬리곱타 비행기를 다 동원해서    찾았는데 어린이 집 앞에 쓰러져 있었답니다, 그 사건을 우리 큰 딸이 토론토에 살고 있는데 카톡에다    보내서 클릭해서 보았습니다.      자녀는 엄마 아빠가 길러야 되나봐요, 우리나라 나이로 4살이니 얼마나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겠어요 !    마쉬의 부모가 이혼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어서 할머니 한태 맡기고 돈을 벌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눈망울이 초롤 초롱한 마쉬의 사진을 보노라니 얼마나 춥고 힘들어서 얼어 죽었을가 ?    하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사랑 스러운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이 많이 필요할때 듬뿍 주어서 구김살 없는 밝은 얼굴로 씩씩하게     자라는 어린이 들로 가정마다 잘 양육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때 우리 사회도 더 밝고 건강한 행복한 사회가 되겠지요.  
2015-03-04 04:55:35 | 윤정용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따로 있을 때에 모든 것을 풀어 자기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더라.(막4:34)"   어떤 일은 주님께서 설명해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쓰임 받으려면 먼저 우리의 인격의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모난 데가 어딘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교만, 고집, 욕심으로 늘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선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도록 성경 말씀, 우리 주위의 사람들, 우리가 처한 환경, 여러가지 사건 등을 통해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문제를 보여주셔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문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옛 자아에서 나오는 일종의 자기기만으로 신앙생활의 큰 걸림돌입니다. 자신을 다루시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결국은 우리를 깨뜨려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속속들이 잘아십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면, 겸손하고 용기있게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거기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주님의 손길을 피할 데가 없는 코너로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깨지지 않은 한, 우리는 변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때로는 극심한 고난으로 우리의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문제를 인정하는데서 변화는 시작됨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3-04 00:44:21 | 박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