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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라는 이 말씀이 나를 부끄럽게 하네요. 주위에 도와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도 무관심하며 살았네요. 하나님께 거저 받은 은혜를 잊고 살지 않아야 겠다고 다짐하고 살지만 행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3-16 10:13:05 | 박흥식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빌4:12)"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가난하게 사는 법은 알면서 부자로 사는 법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난할 때는 기도하며 늘 깨어있다가도, 잘살게 되면 금세 영이 무뎌지고 흐려져 버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풍부에 처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물질이 많아져도 영적으로 둔해지거나 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베풀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그들이 마음을 높이지 말고 확실치 않은 재물을 신뢰하지도 말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게 하고 또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하하며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딤전6:17-18)"고 하면서 그것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빌4:18)"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평소에 가난한 자들을 열심히 돌봤습니다."다만 그들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줄 것을 원하였는데 바로 그 일은 나 역시 열심히 행하던 바라.(갈2:10)"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도다.(행20:35)"는 말씀에 따라 물질의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물질로 성도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은 가난할 때보다 부요할 때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배가 부르면 주님을 향한 갈망이 사그라지기도 하지만, 재물이라는 것이 인간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특성이 있는 까닭에 재물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주님보다는 물질을 더 사랑하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물이 많아지면 "풍부에 처하는 법"을 따라 잘 나누어주며 살아야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은 그것을 혼자서 다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대신해서 잘 나누어주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의 진정한 소유권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물질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물질로 다른 사람을 섬길 때는. 나를 위해 쓸 때는 느낄 수 없는 은밀한 기쁨이 따릅니다. 아마도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일 것입니다.   잘 나누어주고 베푸는 충직한 관리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03-16 00:38:45 | 박진태
이제 좀 있으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몸소 체험 하시겠네요. 내가 아이를 낳는 것 보다 내가 낳은 아이가 또 다음 세대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것이 더욱 특별하다고 누군가는 말씀하시던데 정말 그런지 좀 있으면 할아버지가 되시는 전도사님께 여쭤봐야 겠네요. 다시한번 축하를 드리며 주님의 은혜를 입어 순산 하기를 기도합니다.
2015-03-13 11:57:34 | 이정희
올려주신 귀한 글을 읽으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포시 흔드시는 거대한 요람 속에서 배냇짓 웃음을 지으며 재롱을 부리는 아기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기의 모습과 마음으로 아버지께만 눈을 고정하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고상하고 순결한 삶이겠지요. 할아버지의 대열에 동참하시게 됨을 축하드리며 우리 교회의 모든 아기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성장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015-03-13 10:53:15 | 김대용
우리는 하루하루 기적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태양에서 지구가 위치한 공간을 라이프 존(life-zone)이라 부른다. 더 멀면 추워서 생명체가 살 수 없고, 더 가까우면 뜨거워서 살 수 없다.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정확한 위치에 지구가 존재하고 있다. 광활한 우주공간은 갖가지 유성파편들이 날아든다. 무엇보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태양풍은 수소폭탄의 위력을 버금간다. 지구라는 땅덩어리는 서 있는 그 위치가 신비롭고, 각종 위험에 맞설 수 있도록 몇 꺼플의 보호막으로 덮이고 또 덮여 있다. 낮에는 태양으로부터 여과된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받고, 밤에는 달을 통한 다양한 조명과 밀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반짝이는 별들의 빛이 온 하늘을 수놓는다. 지구라는 땅덩어리는 컹컹거리는 세찬 파도물결의 대양이 있고, 갖가지 녹색 잎과 흙과 바위들로 뒤엉킨 거친 대륙을 형성하고 있다. 사람의 손길과 상관없이 그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공간일 뿐이지만 그 속에 생명의 힘이 꿈틀거리며 역동한다. 지구라는 땅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무지막지한 창조물들이 소리 높여 울어대지만 조용한 가운데 그 모든 것들을 응시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사람이다. 모든 창조물들의 존재도 신비롭지만 사람만큼 신비로울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칫솔모가 있는 칫솔에 소금을 뭍혀 양치를 하고, 비누를 뭍혀서 머리를 감고, 온몸을 쏟아지는 물로 구석구석 헹구어 낸다. 식사를 하고, 습관적인 일들을 하면서 창의적인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간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도움과 협력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살아간다. 클래식 음악을 듣기도 하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기도 하며, 조간신문을 펼쳐들고 사건 사고의 소식이나 새로운 정보에 눈과 귀를 쫑긋 세운다. 사람과 절친인 개나 고양이가 사람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의 이런 외부 행동과 상관이 없이 심장은 쉴새없이 펌프질을 하고, 각종 대사활동이 몸속에서 활발히 진행된다. 부모의 모양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고, 태어난 그 사람들 중에서 그 겉모양이 같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겉모양이 다양하리만치 속 모양 또한 다양함을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사람의 그 섬세함과 다양함은 온 우주의 시스템을 함축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안 있으면 시집간 딸아이가 손녀를 출산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자신의 세대를 넘어 그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것은 묘하지 않은가? 아이는 어미의 뱃속에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루하루 할 것이다. 아이의 부모는 태어날 아이를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한다. 무엇이 필요할까? 인터넷이나 지인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아기 용품 파는 곳을 여기저기 발품파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잠시 후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자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볼 것이다.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것이다. 입을 통해 젖을 먹고, 옹아리를 할 것이다. 손으로 무언가 쥐려 할 것이고, 발로 허공을 휘저을 것이다. 무언가 정보를 얻으려 애를 쓸 것이고, 나름 살기위한 발버둥을, 생존의 몸부림을 칠 것이다. 본인은 온 힘과 악을 써보지만 어른들은 그런 행동들을 바라보며 귀여움에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이제 갖 태어난 생명체는 하루하루 기적을 체험해 나간다. 전에 해볼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존재로 .....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을 통해 생명이 이어지게 하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시스템을 장치해 놓으셨다. 그 장치로 인해 기적이 일어나고 그 기적을 통해 하루하루의 생활이 이어져 간다. 정작 성인들은 기적을 밋밋하게 받아들이지만 새로운 생명체로 인해 생동감 있는 그 기적을 다시한번 체험하고 즐거워한다. 그 기적을 통해 다름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창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당한 일이 모두의 일이 아니고, 모두에게 당한 일이 나의 일이 아니다. 나에게 경험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게 된다. 일상의 반복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특별한 일들을 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일상의 일이기도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새로운 일이며 특별한 일이다. 우리 교회에 아이의 탄생소식이 많이 들린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많이 들린다.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한다.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아이는 태어나고,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가 덮여있는 곳에서 꽃은 피어난다. 다음세대를 위한 준비는 상황과 상관없이 일어난다. 일상의 일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적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2015-03-12 21:07:08 | 조양교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무엇때문에 바쁘게 살아가는지..사실 정확한 목적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슨 일만 터지면, 정부와 대통령 비난하는 ...참 ...안타까운 사람들을 보면서 저 자신도 돌아보게 됩니다. 큰소리치고, 으름장 놓아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한국식 고정관념도 한 몫 하는 것 같구요. 바른 성경으로 변화되어 각자 있는 곳에서 조용히 ..인내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5-03-11 12:04:23 | 오광일
오랜만이시네요 우리네의 모습이 우물통안에 있는 개구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작 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무감각하고, 서로의 이해다툼을 위해서는 한치의 양보심도 배려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더 속터지실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민족이 물질때문에 더 귀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15-03-10 21:37:58 | 조양교
형제님! 평안하셨는지요? 오랜만에 잔잔한 묵상의 글을 올려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진솔하고 구성진 언어를 잘 담금질해서 마음 깊이 담을 수 있는 시어로 올려 주셔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목이 가장 제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대한민국아 제발 조용히 좀 살자!" 왠지 '대한민국' 자리에 제 이름을 넣고 싶어지네요.~ㅎ 잡다한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며 살고 싶은 소망을 되새기며 앞으로도 귀한 글을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03-10 13:01:48 | 김대용
먼저 진리의 영으로 깨어있는 자들이 이땅 각처에서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간구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이것을 위해 우리교회의 사역이 더욱더 성장하기를 소망해봅니다.
2015-03-10 11:20:17 | 김영익
유용수형제님, 아침을 깨우는 대한민국 모든 구성원의 각성이 필요하고, 특히 교회들의 대오각성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매우 시급한 과제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5-03-10 10:14:11 | 한원규
# 대한민국아 제발 조용히 좀 살자!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리려니 얼굴이 부끄럽고 손가락이 부끄러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 달 간의 긴 여름휴가 기간 중에 모처럼 느껴보는 저녁시간! 오래간 만에 시내버스를 타고 광화문 쪽으로 즐거운 시내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은 첫 수학여행을 떠나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을 돌아서는 순간!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세상에! 아직도 데모를 하고 있다니~~ 이내 내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탄식이 흘러 나왔습니다.   대한민국아! 제발 좀, 조용조용히 살면 안 되겠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지금도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하루 종일 자동차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이런 물건, 저런 물건사라고 외쳐대는 소리들,,,,,,, 고장 난 시계나 TV에 라디오, 오디오까지 산다는 소리들,,,,,,, 여름에는 모기장 달으라는 소리에, 고장 난 컴퓨터나 냉장고 팔라는 소리들,,,,,,, 오징어에 영광굴비나 양파에 감자, 고구마까지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한 뼘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골목 안 이웃집에서는 어느 부부의 싸움하는 소리에 덩달아 터지는 어린아이의 울부짖는 소리! 곧이어 들려오는 강아지의 억, 억, 질러대는 소리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열심히 달음박질쳐 왔습니다. 어느덧 문뜩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가는 곳마다 아파트는 하늘을 찌르며 솟아올라 마천루를 이루는 듯 하고, 길들은 널찍널찍 뚫려 있어 과연 대한민국이 몰라보게 발전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슈퍼나 백화점에 가면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고 이름도 모르는 각종 먹을 것들과 입을 것들이 없는 게 없이 쌓여있어 대한민국이 진짜로 잘 살게 되었구나!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 꼭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시끄러워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루라도 좀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인재와 자연 재해에, 엽기적인 각양 각종의 공해까지 하루도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끄러운 속에서도 스트레스에 쪄들어 죽기는커녕, 거리에 나가 보면 여기저기서 처녀 아이들이 대로상에서 배꼽들을 다 들어내 놓고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기는 봐야겠는데, 영~낯설어서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더니 무슨 영업장 선전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촛불 들고 광화문 네거리를 마비시키는 것과 처녀들의 배꼽춤을 같은 날 동시에 구경 할 수 있는 좋은 나라! 너무나 좋고 너무나 대단한 나라가 아닙니까?   에휴~~ 대한민국아 제발 좀 조용히 들 살자!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더 해야겠습니다. 동네 한복판에다 트럭 갖다 대 놓고 확성기로 냅다 소리 지르며 장사하시는 상인여러분! 벌어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새댁이 배가 제법 부르던데 그 집 그 아낙 아기 떨어질까 걱정돼서 그러니 제발 조용조용히 좀, 장사해 주실 수 없으시겠는지요? 요즘, 사람 새끼 생산량이 절대 부족해서 나라에서 돈까지 주어 가며 새 국민 늘리기 정책까지 세워 시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나라 좋은 나라 금수강산을 다시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돌려놓을 수 없겠는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애들도 다시 쑥 쑥 잘 낳게 되지 않을까요?   뭐라고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자란 아이라면 면역이 되어서 괜찮을 거라고요?   대단하다! 정말로 대단해!!   여기까지 글을 써 놓고 숨을 돌려 지난세월들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우리들은 대한민국이 동방예의지국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칭찬을 받으며 그 가슴 뿌듯함으로 웃음꽃 활짝 피우며 살아왔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새 나라의 어린이“라는 동요까지 부르며 자라왔습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 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일제의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 된 민족이 국민계몽의 일환으로 제일 먼저 부른 노래가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나고 서로서로 돕는다고 노래했으니,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이 나라 이 민족이 얼마나 정신이 똑 바로 박힌 지혜로운 민족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로운 민족이 어떻게 된 일이기에 해방 된지 70년이 된 지금, 새 나라의 어린이노래를 부르고 자란 내가 환갑이 넘었는데도 이 민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는커녕 아침잠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요?   한국기독교는 새벽기도로 세계에 유명합니다. 한국교회만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천국 문을 두드리며 주님의 잠을 흔들어 깨워 놓고 울며불며 졸라대는 민족은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100년이 넘었다고 한국교회의 우두머리들은 온 세상에 대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0여 년 동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주님의 단잠을 흔들어 깨워놓고 울며불며 조른 것이 무엇이었기에 이 민족의 아침잠은 아직도 깨우지 못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 100년에 이 나라의 교회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맘모스 교회당건물들과 가마니로 쓸어 담는다는 막대한 액수의 헌금과 기복신앙으로 머릿속이 꽉 들어찬 1천만의 자칭 기독교인들뿐이지 않습니까? 머릿속에 기복신앙으로 꽉 들어찬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헌금과 무당집 복채와는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올바른 성경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의 손에 바른 성경인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이 바른 말씀으로 바르게 양 무리들의 늦잠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나 자신도 잘못된 성경과 잘못된 교회와 잘못된 목사의 설교에 흠뻑 취한 신앙생활을 하며 고요한 아침에 절어서 하나님아버지를 불러왔다는 사실에 대단한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들 수가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솔직히 “우리는 늦잠꾸러기들의 나라"라고 회개하며 고백을 해야 할 때입니다.   세계사의 대낮에서 왕따 당하여 잊혀 지기 전에 말입니다. 아니 지금 무섭게 아침잠에서 깨어 일어나고 있다는 중국에 다시 등덜미를 잡혀 옛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말입니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아직도 이를 허옇게 드러내고 으르렁대고 있는 일본의 앞 발톱에 다시 얼굴을 할퀴기 전에 말입니다.   2015년 3월 9일(월) 유 용수
2015-03-09 21:57:45 | 유용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지 아니하시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거니와 이 일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무엇을 선포할 것인가? 첫째는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다. 즉,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도(道)'의 양면, 곧 죽음과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어 주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임을 전해야 합니다. 죽음과 부활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로서 자신의 직책에 대해,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 종은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인이었지만 복음 전파에 관해서는 자신을 종으로 여겼고, 종으로서 주인에게 명하신 임무를 다하기 위해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유창한 언변이 필요없습니다.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의 도에 '대해' 선포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 '그 자체'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 해도 전파하는 사람 때문에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말솜씨로 복음을 전하면, 그것이 도리어 십자가의 능력을 가로막아서 아무리 열심히 전도해도 열매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4-5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 안에 서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 안에 서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의식적으로 '사람의 말과 지혜'로 전도하는 것을 삼가며 하나님만 의지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권능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데 사람의 말재주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전도자는 사자(使者)들이 어명(御命)을 선포하듯이 당당하게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선포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들은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단순하게 믿고 '십자가'만을 선포했습니다. 현대 교회의 세속화 현상은 '십자가'를 선포해야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널리 선포할 수 있도록,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죽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어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2:20)"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는 참된 믿음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해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나서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십자가'를 선포할 종을 찾고 계십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다.   "잘 들으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분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5-03-07 23:35:19 | 박진태
나는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그 순간이 변화의 출발점이군요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은 극히 편향적인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2015-03-05 21:17:11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