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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노니.(빌4:11)"   환경이나 물질에 행복을 쌓는 것은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변하고 물질은 닳아져 가치를 잃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지나가는 외적인 것 위에 행복을 쌓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진정한 자기 만족은 내면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간증도 그런 의미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노니."   자기 만족은 안일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안일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부담을 느꼈고, 위험과 박해에도 아랑곳없이 도시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 만족은 사실상 내실입니다. 삶에 용감히 맞서 거뜬히 대처할 영적 자원을 내 안에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만족은 하나님의 충족입니다.   여러분 삶에서 버팀목과 지지대를 다 떼어내도 여러분은 설 수 있습니까? 내면에 하나님의 충족과 만족이 있습니까? 하나님 방식에 따를 믿음만 있다면, 여러분도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고차원의 신앙 상태에 어떻게 도달했을까요? 그는 '내가 배웠노니'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 만족은 그의 구원에 자동으로 따라온 본래 은사가 아니었습니다. '경험으로 배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여기서 넘어집니다. 우리는 내적 자기 만족과 영적 충족을 당장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내실은 그렇게 다져지는 게 아닙니다. 경험으로 배워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과 역경과 희생을 경험하고 삶의 변화에 부딛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변화가 없으면 도전도 없고 도전이 없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고립되고 단절된 삶을 산다면 도전에 부딛칠 일도 없겠지만, 그것은 성숙해질 기회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숙한 사람들에게 삶이란 싸움터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싸움에 부딛쳐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사도 바울이 인생이라는 삶에 어떤 시험을 치렀는지 보려면 고린도후서 11-12장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내가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하고 매도 지나치게 맞고 감옥에도 더 자주 갇히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내가 유대인들로부터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을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고후11:23-25)" 여기에다 여러 번 여행중에 겪은 위험, 적들의 방해,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짐까지 더하면 사도 바울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주저앉아 포기하지 않고 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실을 다지는 법, 즉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모든 자원을 속에 품는 법을 고된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읽으면 풍랑 속에서도 만족한 사도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포기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일행의 목숨을 건져주실 거라고 공헌했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선생들아, 기운을 내라. 내가 하나님을 믿노니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행27:25)" 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삶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하는 법을 경험을 통해 배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배울 마음만 있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감동적인 간증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노니..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2015-03-29 20:37:57 | 박진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은 빛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게 하라. 어둠 가운데 다니는 자는 자기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하나님의 빛 속에서 본 것들은 그대로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빛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변하여 어두움이 됩니다.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라.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마6:23)"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빛을 비춰주셨음에도 그 빛을 외면한다면, 여러분의 영적 생명은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속으로 끊임없이 진리가 들어오게 하여, 그 진리에 순종하면서 그 진리와 더불어 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빛은 여러분에게 도리어 큰 짐이 될 것입니다.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은, 늘 과거의 영적 무용담을 들먹이며 자부심에 가득 차 있기는 한데, 실생활에서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경험이 진짜라면 지금 그 사람의 삶에서도 여전히 드러나 보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믿음은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가짜입니다. 영적인 자아도취를 조심하십시오.   성화의 교리를 잘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삶의 모든 문제에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삶의 문제는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그리스도 십자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합니다. 문제는 항상 십자가에 처리되지 않은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은 '십자가' 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3-27 00:40:52 | 박진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온전을 향해 가는 나에게 아직도 내려 놓지 못한 것들이 무엇일까! 그 동안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 오지는 않았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고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1,2).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주님을 위해 내려 놓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내려 놓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2015-03-24 07:15:06 | 박흥식
"베드로가 그분께 말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막10:28)"   베드로는 자신의 권리포기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해타산에 너무도 밝아서, 주님 그분 보다는 그분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는데 관심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권리포기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권리포기를 깨닫는데서 오는 지극히 순수한 결단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데, 이 믿음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는 고백이 포함됩니다. 즉 진정한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어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믿음이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권리포기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데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헌신으로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타산적 권리포기'란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둥근 사각형'처럼 일종의 형용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권리포기에는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대가를 염두에 둔 권리포기는 헌신이 아니라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권리를 포기하면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소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 주님의 자유로움과 부요함이, 인정받을 권리를 포기하면 주님의 겸손함이, 옳고 그름을 따질 권리를 포기하면 주님의 관대함과 온유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리를 포기해야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권리를 포기함으로 자아가 죽어야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드러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권리포기는 상실이 아니라 성취입니다. 권리를 포기하는 만큼 주님을 더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리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3-24 00:30:41 | 박진태
자매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얘기를 들었는데 어쩜 이리도 세세히 기록하세요? 메모하시지도 않았는데... 탁월한 리포터네요.. 어제의 간증은 들어도 들어도 싫증나지 않은데 결론은 다 같더라고요ㅡ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 늘 전해져 오네요..
2015-03-23 19:06:22 | 오혜미
어제는 새롭게 더해지신 분들의 소회를 들으며 주님께서 이 한 분 한 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실까를 잠잠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과연 얼마나 간절하고 정성어린 마음 그리고 가식 없는 솔직함으로 새롭게 한가족이 된 성도님들을 대했는가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 모두의 정성과 섬김과 무엇보다 정직함이 하나 됨의 귀한 열매로 맺혀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모임에 대한 진솔하고 정감 어린 스케치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3-23 14:16:57 | 김대용
여러 모양으로 모인 지체들의 짧은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혼들을 궁휼히 여기셨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나온 여정들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각자의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 인도하셨고, 그리고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그 높으신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나는 점점 쇠하고, 주님은 점점 흥하는 그런 교회"... 그렇게 주님의 교회를 이루어 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015-03-23 08:55:12 | 태은상
김호진 형제님?이신듯-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님에도 댓글을 달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교회에 나오시지 못해도 유투브를 통해 만나를 섭취하며 주님을 고대하는 우주적인 교회 성도들이 많이 계세요.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시면 한번 방문해 주시면 반가울 것 같아요. 이미 우리 교회 성도가 되신 듯^^ 주님께서 속히 바른 길을 찾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3-23 08:46:50 | 이수영
글을 내려 보다가 문득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초면에 죄송합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는 목사는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분들의 지식을 인정하고 저도 모르게 높이며 지금까지 달려오다 길을 잃었습니다. 제 잠정적 결론이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목사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은 하나님을 경외하시는 분 같아서 그분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더 마음에 잘 들어옵니다. 저는 사랑침례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참 부럽습니다. 사람들이 정목사님의 지식을 신뢰해서 모인 것 같지 않습니다. 다들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죠. 실상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교회들의 모습이 형성된 교회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 아닐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쁜것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에 나온 수많은 교회의 요건들을 세상과 타협해서 이것 빼고 저것 빼고 편한 것만 취해서 교회로서 일하자고 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어떠할까 생각하니 그저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기쁜 글에 우울한 댓글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살아있고 오늘을 허락 받았으니 제게도 진정한 예배와 쓰임받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허락 될 것 아니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기대해봅니다.
2015-03-23 08:23:10 | 김호진
성도들이 각자 뽑기를 통해 자매 3 팀과 형제 3팀으로 모여 그룹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방은 한국을 잠시 방문 중으로 교회 오신지 두 주째가 되신 분도 계셨고, 다양한 연령층의 자매님들이 간증으로 감동을 나누었습니다. 각기 우리교회에 오기까지 그리고 지금의 상태에 대하여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박수도 자주 터져 나왔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아이의 학교친구 엄마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의 교육을 받다가 ‘하나님 어머니’에 대해 듣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 나가게 되었답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청소를 하면서, 음식을 만들면서도 수시로 주님께 “참된 진리를 알게 해 주세요” 기도를 간절하게 하면서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알아보는 가운데 흠정역 성경을 먼저 알게 되었고 정 목사님의 설교를 유투브를 통해 몇 개월 듣다가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에 간절히 오고 싶어서 머나먼 거리인데다 고속도로 주행은 한 번도 안 해봤기에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죽을 각오를 하고 아이 둘을 태우고 교회를 방문했고 직접 예배에 참여하며 너무 기뻐했다지요. 계속해서 교회를 나오면서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석 달을 나오던 중 12월에 가족음악회에 아이덕분에 처음으로 교회에 좋은 아빠인 남편과 함께 참석했지요. 정말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보신 주님의 은혜로 지금은 온 가족이 행복하게 동일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간증에 모두 박수를 절로 치게 되었지요.   5대째 믿음의 가정에서 목사만 열두분에  권사만 80명인 집안에서 교회를 옮길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적도 없이 열심히 교회를 섬겨왔는데 남편 분께서 인터넷을 통해 유-명한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섭렵 하던 중에 정 목사님의 설교를 접하게 되고 올바른 교회라는 분별을 하시고 많은 시간을 들여 유투브를 통해 정 목사님의 강해 설교를 모두 다 듣고 부부가 한마음으로 교회의 모든 일에서 손을 놓기 위해 약 1년 동안 준비하고 정리가 되자 바로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답니다. 적지 않은 세월 믿음 가운데에서 살아왔지만 이제야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고 “BC가 AD로 된 것 같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 교회에서 믿음생활하기를 바란다고-   올바른 설교를 하는 목사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갈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올바른 교회를 찾던 중 우리교회를 알게 되어 두 주 째 오신 자매님은 너무 기쁜 가운데 호주에 계신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차근히 잘 살펴보라 ” 하셨다고 하네요. 올바른 교회를 찾았으니 이제 호주에 가면 두 세 가정이라도 모여서 바른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평소에 성경을 열심히 탐독하던 남편이 유투브를 통해 정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서 “올바른 설교를 하는 목사가 한국에도 있다” 고 하면서 우리교회에 오게 되었고 이제 모든 것들이 변화되는 경험을 하는 중에 있다는 값진 간증으로 우리 모두 기쁜 박수로 화답을 하였지요.   “남편의 인도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교회에 나왔기에 지금은 너무 자유롭고 바른 말씀으로 누리는 기쁨이 있다“ 는 남편의 덕을 보고 있다는 자매님의 간증도 기뻤지요.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 이니라 > 아모스8장 11절 말씀으로 표현해 준 간증도 있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은 지식일 뿐 성화 되지 않는 성도와 목사와 자신의 모습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찾고 찾으면서 돌고 돌아 드디어 우리교회를 찾아와 참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가정이 변하고 있다는 간증도 있었고   매 주 전해지는 강단의 말씀이 목사의 인격이 뒷받침이 되지 않아 너무 어려움 속에 섬길 교회를 찾아 순례?를 하다가 우리교회에 와서 안착하게 되었다는 간증도 있었고   작은 교회의 목사가 하라는 대로 온갖 일을 힘에 겹도록 하다가 지쳐서 식구들을 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풀었던 자매님이 유투브를 통해 설교를 듣게 되면서 우리교회로 오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온갖 일을 맡아서 일을 했기에 ‘어떻게 그만 두지’ 고민하던 중에 자꾸만 목사와, 성도들과 트러블이 생기는 중 목사가 “나오지 말라” 고 해줘서 너무 기쁜 마음으로 정리하고 우리교회 나오게 되었다고. 우리교회 나오면서 성경에 대해서 이제 제대로 알아가는 기쁨과 본인 자신이 변하니 가정이 화목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간증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영어 흠정역을 알게 되어 국내에서 보던 성경의 번역이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흠정역을 보는 교회를 찾다가 우리교회에 와서 바른 교리를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간증과 더불어 요즘에는 지식보다는 개인의 변화인 성화의 과정에 더 마음을 써야겠다는 귀한 생각을 나눠 주신 분도 있었고요.   성도들의 여러 가지 간증들이 저마다 색깔은 다르지만 올바른 교회에 왔고,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동일한 간증들이었지요. 또한 목사님의 설교대로 변화되도록 성화에 힘을 쓴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일반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전철을 타면 옆에 앉은 분에게 내리는 순간까지 우리 교회와 목사님의 설교를 꼭 들어보라고 권유하고 내린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지요. 섬기는 동안 서로를 알아가며,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꾸면서 바른 교리 안에 올바르고 견고하게 서로를 세워 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누며 각자를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행복한 나눔의 시간이었습니다.
2015-03-22 23:42:31 | 이수영
자매님 글을 읽으니 변화의 날 아름다워던 자매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기자기한 글이 마치 소녀처럼 느껴집니다. 작은 복장 하나를 통해서 20년 복장에도 변화를 주고 사랑과 권면의 경험들을 이렇게 글로 표현해주시니 느껴지는 바도 있고 사소하게 지나쳤던 제 모습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네요. 권면도 관심과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기억하며... 늘 부드러운 마음으로 권면에 귀기울이며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2015-03-20 23:33:10 | 주경선
자매님! 헤어스타일도 바뀌신 지금 모습이 최소 10년은 젊어보이시고 아주 잘 어울리신답니다.^^ 내 스타일 내 개성만 고집하지않고 열린 사고를 갖는다는 것 참 좋은것 같습니다. 저도 권면을 받으면 나를 돌아보고 바꾸려고 노력하겠습니다.
2015-03-20 11:52:13 | 이정희
자매님 옷입는 스타일이 저랑 많이 비슷해 공감이 갑니다 ㅎㅎ 내 스타일의 편안함 고집하는 마음 내려놓기 쉽지 않죠. 교회안에서 화려하지 않으면서 편안한 단정함이 보기에도 좋음을 인정하며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5-03-20 10:06:50 | 김혜순
내 안의 고정된 틀을 내려놓기 어려운 법인데, 나를 내려놓고 권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랑의 권면으로 인해 변화된 모습이 훨씬 젊어 보여서인지 더욱 건강하게 느껴집니다 ^^
2015-03-20 08:00:30 | 윤영원
자매님은 정말 복장 하나를 변화시키면서 너무 젊어지셨어요.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이 하는 말중에 이 교회는 성도들이 어쩜 다 그렇게 예쁘게 생기고 밝냐고 저에게 그러시더군요. 일단 복장이 단정하니 이미지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성도간의 권면이 자연스럽고 친근함으로 받아드려질 때 우리의 속마음도 한껏 부드럽고 평안한 상태가 아닌가 싶어요. 상대방을 멀리해야겠다 생각하고 마음에서 접어 놓으면 겉도는 얘기만 하고 진심의 얘기는 나오지 않잖아요. 하여튼 저도 자매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서로 사랑의 표현을 부드럽게 하고 지내기로 해요.
2015-03-20 07:44:53 | 오혜미
자기 습관을 고치기는 참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와 남편은 최소한 간단하게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물론 두 사람이 사는 집이니 규모도 작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그만큼의 분량을 내보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지인이 6인용 식탁을 주면 우리가 쓰던 동그란 식탁을 남을 준다든가, 안마용 의자를 얻으면 사각의자를 버린다든가..... 옷장도 될 수 있으면 헐렁하게 유지하고 싶지요. 아주 간단하게 계절에 입을 옷 두어 벌이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헐벗고 사는 것도 아니고 딱히 어디 나갈 일도 없기에 새 옷을 사는 일도 없어요. 나그네의 삶이니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살려고 생각하지요. 구원 받고나서 가치관이 변해서-목사님의 가르침대로- 여자들의 경우 긴 치마에 헐렁한 윗옷을 입는 것이 좋다고 하시고 남성의 특성을 말하시며 형제들의 시선이 가는 옷은 입지 말라고 하셨지요. 가슴이 너무 파여서 자매가 몸을 숙였을 때 본의 아니게 형제들을 당황하게 한다고 여름에도 과도하게 시원한? 옷이나, 투명해서 비치는 옷, 너무 짧은 치마는 금기였어요. 무릎까지 오는 폭이 좁은 스커트는 앉으면 올라가서 스카프로 가려야 해서 스카프가 자매들의 필수품이었어요. 워낙 꾸미는데 재주가 없는 저는 아주 편하게 잘 적응해서 커다란 옷도, 긴 치마도 좋아하면서 20여 년간 잘 지내왔어요^^ 한 여름에도 반팔에 긴 치마를 입었지요. 치렁치렁한 치마에 헐렁한 윗옷이 맵시 있게는 안 보이잖아요? 지금 떠올려보니 월남치마 입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보였을 거 같아요^^     그렇게 지내는 동안 한 성도 두 성도를 통해서 권면을 받게 되었어요. 이왕이면 제 나이에 맞게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하면 좋겠다고. 맵시에 대해선 생각도 안하고 산지가 20년이 넘다보니 처음엔 ‘내 옷 차림이 성경에 어긋난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러지?‘ 하고 지나쳤지요. 결정적으로 초여름 결혼식에서 다 함께 한가지로 통일해서 입기로 한 날 해프닝이 있었지요. 공지에 <치마는 너무 긴 옷은 말고>라는 글이 떴어요. ‘헉!!! 난 항상 긴 치마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럼 난 이번 특송에서 빠지면 되지 뭐.......’ 처음엔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두어 번의 권면도 있었고, 내게 관심이 없으면 그런 말도 안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 편한 것, 익숙한 것을 포기하고 권면을 받아들이기로 작정 했지요. 결혼식에 나로서는 엄청 짧은^^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더니 자매님들의 반응이 모두 “좋다” 고 하지 뭐에요? 사실 스타킹 신는 것도 싫고, 몸에 딱 맞는 것도 싫었지만 마음을 바꾸고 시도를 했더니 모두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그래, 그럼 내가 조금 불편한 것으로 모두가 좋아하면 내 자유를 포기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자매님들의 관심과 권유에 귀를 기울였더니 훨씬 젊어 보인다고 해요. 한 자매님은 “자매님이 우리 교회에 온 이후로 요즘이 가장 젊어 보여요” 라고^^ 자매들의 관심과 사랑이 있는 권면 덕분에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고 있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치마 길이를 적당하게 줄여서 입어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네요.   혹시 주변의 성도들이 어떤 동일한 내용의 말을 하거든 저처럼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한번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보고 자신을 돌아보면 결국 우리 교회 전체의 모습이 보기 좋아지겠지요. 권면도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어렵지요. 누가 지적을 해서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겠어요? 칭찬의 좋은 말 하는 것보다 듣기에 싫은 말 할 때가 가장 고민하고 어렵게 하는 권면이니까요. 평소에 사용하는 말이나 행동을 돌아보라고 하는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요?                      
2015-03-19 23:30:12 | 이수영
"너희의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들의 관례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함과 불법에게 종으로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고, 스스로 거룩해질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대속(代贖)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속에 의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와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해를 매순간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려는 열심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이루신 그 완전한 의(義) 앞에 나의 의, 곧 나의 모든 노력과 공로를 다 내려놓고 늘 그 의에 복종하며 그 의를 의지해서 사는 면에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을 의지하지 않는 인간적 경건을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에 의한 거룩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경건에 의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신앙은,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과 허세에 의한 헛수고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비추어 일일이 분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대속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열정적 헌신이나 뼈를 깎는 고행으로도 하나님을 조금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속에 의한 거룩함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자신을 의(義)에게 종으로 내주려면 우리는 주님께 항상 순종해야 합니다. 참된 순종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도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정말로 순종하고 싶다면, 순종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죽으면 됩니다. 죽지는 않으면서 순종하려고 노력하니까 순종하기가 그렇게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갈2:20)"고 분명히 고백하는 사람에게 순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은 죽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2015-03-19 23:26:24 | 박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