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와 여러 성도님들의 사랑 가운데서 아버지의 장례예식을 잘 마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마음의 무거운 짐과 염려가 있었는데 주님께서 평안한 가운데 모든 것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은 제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큰 기쁨과 우리 몸의 부활 휴거 재림의 소망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정말 몸으로 마음으로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영정 사진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의 어떤 모습보다도 더 밝고 환한 모습, 영화로운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소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와 주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병상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늘 평안한 모습은 제게 언제나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랜 치매로 딸조차도 깜박깍박 하셨지만 모든 것은 다 잊어버려도 주님에 대한 믿음과 그동안 들어서 생각나는 말씀들을 꼭 붙잡고 남은 삶을 잘 정리하시길 기도했었는데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셨음을 마음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철없던 20대 초반
엄마가 돌아가셨던 그 순간에도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얼마나 크게 제 귀에 그리고 마음에 울려 퍼졌었는지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또 쇠하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이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었는지요.
그리고 그 약속대로 지금까지 저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고 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5-06-06 07:38:51 | 조은자
일상 생활가운데, 그속에서 주님을 묵상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형제님의 자세를
저도 본받아야겠습니다.
좋은 묵상들 감사합니다^^
2015-06-06 00:12:51 | 오광일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서 가까이해야 할 것과 마땅히 멀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끌리는 대로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의 위치를 돌아보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2015-06-05 10:17:21 | 조양교
요사이 몸의 표현이 자유로워지고 솔직해졌다고 해도 오히려 사랑을 대하는 마음은
점점 더 인스턴트화 되어만 갑니다.
우리네 인생이 바르게 위치를 변경함으로써 정돈되어 간다면
그 본질은 몸 이전에 마음일 것이란 생각을 귀한 글을 읽으며 잠깐 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고즈넉한 분위기가 넘치는 깊은 묵상의 글을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6-04 15:17:44 | 김대용
형제님, 그런장면을 보면 흔히들 쯧쯧 혀를 차며 세상이 말세야.. 한마디씩 하며 지나칠 일을 주님과 연관지어 생각하며 영적인 깨닳음을 얻으시는 모습이 귀하시네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도 형제님과 마찬가지로 눈만뜨면 세상으로 돌려지는 두 눈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위치변경 해야겠습니다.
2015-06-04 12:58:45 | 이정희
유용수 형제님, 가까이 할 것을 멀리 할 때 우리 마음에 불행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부모 자식 간에 거리감이 생기면 부모도 자식도 행복감을 느낄 수 없듯이 말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이고, 형제,자매지간에도 그렇지요!
빨리 원인을 제거하고 그동안 내 곁에 소중히 두었던 나의 자존심과, 부모 자식 간의 친밀한 관계 회복 이란 '위치 변경' 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행복을 회복할 수 있듯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행복은 불가능하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5-06-04 12:27:24 | 한원규
유 형제님, 감사합니다.
위치 변경이라는 제목이 참 좋으네요.
좋은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6-04 09:50:52 | 관리자
# 나의 위치변경
공항출국장에서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장면을 그야말로 실감나게 라이브로 보았습니다.
처음에 저는 무슨 영화촬영을 하는 줄로 착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젊은 청춘남녀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상인 듯
서로가 서로를 포옹하며 입맞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문화와 의식들이
빠른 속도로 서구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하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특히 결혼식장에서는 신랑신부가
양가부모님과 많은 하객들 앞에서 입 맞추는 것을 너무 당연시합니다.
신혼여행지 에서는 더욱 노골적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행동하는 것들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들 세대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싶어도
보는 눈이 쑥스럽고 행동하려는 내가 민망스러워 그렇게 하지를 못 했는데,
요즘의 젊은이들은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세대와 세대 간의 차이,
즉 문화의 차이 의식의 차이 그래서 행동의 차이로까지 나타나는 것인가 봅니다.
이렇게 우리의 문화와 의식들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대들은 이런 것들을 가능한 한 좋게 이해하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신랑신부의 이러한 모습들이 더욱 솔직하여 그냥 아름답게만 보일 뿐입니다.
그네들 역시 너무 행복해 하는 표정들이지 않습니까?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들을 피부로 속삭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져있고 달콤함에 녹아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함께 빠져있고 녹아있는 것입니다.
웅덩이에 빠져있으면 바깥이 보이질 않는 법!
설탕과 프림이 녹아있는 커피 한 잔속에는 이들이 보이질 않고
진한 커피의 향 만 물신 풍길 뿐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그저 아름답게 이해할 수밖에,,,,,,,,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은 저렇게 가까이 한 몸이 되어 있어야 하겠구나!”
이러한 생각을 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거기에 기쁨이 있으며 거기에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어떤 것이든 가까이 있어야 할 것이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때 사람들은 허전함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며
불행함을 느끼는가봅니다.
그렇다면 멀리 있어야 할 것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오~그렇구나!
바로 그것이로구나!
빠른 화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듯 어떤 단어 하나가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가까이 할 것과 멀리 할 것의 위치변경!
이 위치변경이란 단어가 뜨거운 여름철 팥빙수를 급히 먹을 때
머릿속을 때리는 것처럼 그렇게 내 머리를 아프게 때리고 지나갑니다.
“위치변경!”
이 한 단어가 내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며
기쁘게도 하고 행복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멀리 있어야할 것이 가깝게 있는 것에 대한 불행함과 함께,,,,,,,,
지난세월 저는 너무 쉽게, 너무도 무감각하게 이러한 위치변경을 접하며 살아왔습니다.
가까이 있어야 할 것을 가까이 두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고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중요한 위치에 두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멀리 두어야할 것을 가깝게 두어 그 위치가 변경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만은 놓칠 수 없다며 꼭~움켜쥐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에게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가까이 있어야 할 것이 가까이 있지 못하는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공항출국장에서 본 라이브의 한 장면이, 젊은 청춘 한 쌍의 사랑 놀음이,
나의 생각을 여기에까지 이끌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못 볼 것을 보게 하신 주님!
그 한 장면으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나와 가장 가까이 계셔야할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눈만 뜨면 나의 눈은 세상으로 자꾸 돌려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계셔야할 그 자리에 다른 무엇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의 위치변경을 발견합니다.
주님!
용서하소서!
그리고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나를 당신의 앞으로 돌리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5년 6월 3일(수)
유 용수
2015-06-03 21:16:27 | 유용수
형제님!
깊이 생각해 보며 제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해주는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5-27 14:29:36 | 이정희
묵묵히..이 단어에서 깊은 신뢰가 느껴집니다
모든 일에서 자기 주장이나 자기 자랑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면서 이 단어가 마음에 들어오면서 잠시나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엄마로서,아내로서,성도로서 ..맡겨진 삶을 기쁨으로 뿌리를 내리며 묵묵히 행하며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5-05-26 22:51:27 | 최은희
묵묵히, 잠잠히 정진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지며, 그와 같이 행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전을 찾아서 조금 정리해 보았습니다.
hold[keep] one's peace 묵묵히 행하다. 침묵을 지키다
묵묵히 (默默-) 침묵하며, 말없이 잠잠히 silently, in silence
2015-05-26 22:26:00 | 박기용
샬~롬
저도 '묵묵히'란 이 세글자가 뇌리에 남는..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감사 합니다..
2015-05-26 12:03:06 | 이명숙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평강의 마음을 유지하면서
주님께 모든 짐을 내어 드리는 자세로
묵묵히’의 의미로
모든 일들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글귀가 참 마음에 와 닿네요. 감사드려요.
2015-05-25 09:32:13 | 이수영
묵묵히 행함 (Hold one's peace)
영어킹제임스 성경 읽기 밴드가 올해로 2년차로 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요한복음,누가복음, 사도행전을 읽었고 요즘에는 창세기를 읽고 있는데, 창세기 24장 21절에 “묵묵히”라는 단어를 보고 너무 마음에 감동이 밀려와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신부를 구하기 위한 여정이 기록된 장으로 성경적인 결혼을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은 미혼 시절 한 번 쯤은 이 부분을 읽어보면서 나의 미래의 배우자를 만났을 때 과연 내가 기도한 대로 그 사람이 행동을 할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 추억이 묻어나는 성경에 한 부분입니다.(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파견한 나이 많은 종의 모습에 관심을 두고 읽게 되었습니다.
창24:2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종 곧 자기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던 종에게 ...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자신이 오랫동안 신뢰해온 종이자 벗 같은 가장 나이 많은 종에게 특별 미션을 부탁합니다.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오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임무를 부여받고 ...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창24:12 그가 이르되, 오 주 곧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원하오니 이날 내게 일이 잘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친절을 베푸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자.
창24:15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보라, 리브가가...
너무도 순식간에 기도 응답이 되어,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로 적임자임을 증명해주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 이쯤되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을 것입니다. 기도하자마자 기도의 내용이 이뤄지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기도응답에 대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창24:21 그 사람(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그녀(리브가)를 보고 놀라워하며 묵묵히 주께서 자기의 여정을 형통하게 해 주셨는지 여부를 알고자 하더라.
여기서 “묵묵히”라는 단어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held his peace (KJB)
without saying a word (niv)
in silence (nasv)
remainded silent (nkjv)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묵묵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여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지켜보며 자신 안에 있는 주님께서 주신 평강을 유지하면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갔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오늘날 적용해 본다면, 성경 신자가 주님 앞에 어떤 일을 행할 때, 묵묵히 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때 단순히 ‘말없이 한다는 의미의 묵묵히’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평강의 마음을 유지하면서 주님께 모든 짐을 내어 드리는 자세로 묵묵히’의 의미로 모든 일들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단순히 말없이 목사의 권위에 교회의 지시에 순종하기를 강요한다는 사실입니다. 순진한 성도들은 어떤 지시 사항에 말없이 순종하면 그게 믿음인 줄 알고 평생을 종교의 속박 속에 진리안의 참 자유함을 모른 체 살아갑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말없이 행하는 그 모습에 인간적인 감동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럴까요?
주님께서 주신 평강의 마음을 가지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묵묵히 행함.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의미의 묵묵히 행함이 더욱 풍성하기를 기도해 봅니다.
벧후1:2 하나님과 예수 우리 주를 아는 것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기를 원하노라
2015-05-25 00:53:10 | 오광일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갈5:17)"
거듭남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구원받으면서, 옛 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삶이란, 옛 사람의 본성적 생명은 계속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면서, 주님의 생명에 순종하여 매순간 그 생명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본성적 생명의 특징은 교만, 고집, 탐욕, 분노 등으로 대표되는 옛 자아의 자기주장, 그리고 자아의 선함과 신실함을 자랑하는 자기 의(義)입니다. 이 본성적 생명이 계속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져야 우리가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져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주님의 온전하심을 향해 계속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신앙의 내적 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교회 참석과 봉사 등 외적 활동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본성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3대 적은, 마귀, 세상, 육신(본성)인데, 마귀는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육신을 자극해서 죄를 짓게 함으로 우리의 영을 무력하게 하고, 그로써 우리가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고 하셨으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늘 주님과 교제하면서 성령 안에서 깨어 있으면,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본성적 생명의 움직임을 명확히 분별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즉시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승리하는 자는 주님의 생명으로 더욱 충만해져서 주님의 온전하심을 향하여 견고하게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5-05-20 22:05:40 | 박진태
'보호하심'은 '우리를 고통으로 부터 보호해 주시는게 아니라, 고난과 고통 속에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임과, '우리가 그분과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그 분은 한시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내용이 마음속에 '평강'을 주는군요. 박진태형제님, 좋은 글 공유, 감사합니다.
2015-05-18 10:27:08 | 한원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고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상속 유업을 받게 하셨나니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잠시 근심하고 있지만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벧전 1:3-6)"
고통의 한가운데 영원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 없는 미래를 주실 뿐 아니라 그 미래로 가는 길에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현재의 고난을 영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의 시각에는 우리에게 훨씬 더 큰 용기를 주시는 요소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보호하심'입니다. 보호하심은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이요. 우리가 뜻밖의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다가올 영원 속에서 유업이 있다고 말한 뒤에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내려고 예비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영원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동안 매일 우리와 동행하고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이 현재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보호하심'은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통이 전혀 없는 삶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고통으로 부터 보호해 주시는게 아니라, 고난과 고통 속에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보호하시기에 우리는 "산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소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소망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매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영원을 약속하신 분께서 영원까지 가는 내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그분은 한시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이기는 능력, 영원" 폴 트립
2015-05-15 00:15:56 | 박진태
수영자매님은 기억의 달인이세요.
즐거운 운동회...학교에서도 볼 수 없는 정겨운 순간들이 또하나의 가족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인 거 같아요.
저희도 온 가족이 모여 뛰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하늘나라 가기전에 ....작은 소망일까요? 대망일까요? ㅠㅠ
2015-05-11 19:06:12 | 오혜미
즐겁고 편안한 가운데 수준높은 체육대회를 즐겼습니다.
진행을 맡으신 한분 한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가을 운동회가 기대되네요^^
수영 자매님의 정리된 글을 통해 그 때 그시간을 회상해 봅니다.
2015-05-11 12:52:10 | 조양교
운동회를 위해 수고해 주신 형제/자매님들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분들의 적극적인 섬김이 없었으면 운동회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5-11 11:58:5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