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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교육 공부를 할 때 동화가 어른들을 위한 책이었고 시대배경을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지요. 아이들의 생각은 단순하지만 어른들은 너무나 복잡하다는 큰 차이가 있죠. 주님 앞에서 늘 우리는 어린아이 일수밖에 없지만 순수함과 단순함을 가진 어린아이이고 싶습니다.
2015-08-10 09:09:33 | 이수영
최근에 <성인을 위한 이솝우화>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본래 <이솝우화>는 아이가 아닌 성인을 위한 책이며,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책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에 읽은 이후 성인이 되어서 다시 읽어보니 매우 단순한 내용이지만 여러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신앙생활과 매칭 시켜가며 생각할 수 있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저희 아이들과 함께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를 놓고 신앙과 접목하여 생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들의 사고가 많은 관점에서 어른들에 비해서 참으로 단순하고 순수하며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을 가지고 진리를 표현하는 것들을 보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읽고 생각한 후에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신앙과 접목하여 교제를 나눠보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이해 할 수 있는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족한 내용이지만 제가 생각했던 바를 글로 공유해봅니다. 물론 어린 아이를 둔 부모가 아니어도 연령과 상관없이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을 더하기에 좋다고 봅니다. <여우와 나무꾼> 어느 날 사냥꾼들에게 쫒기던 여우가 나무꾼을 발견하고 그에게 숨겨달라고 간청했다. 나무꾼은 자기 오두막에 여우를 숨겨주었다. 잠시 후 사냥꾼들이 와서 나무꾼에게 여우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나무꾼은 목소리로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면서 손으로는 여우가 숨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사냥꾼들은 손짓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만 믿었다. 여우는 사냥꾼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와서 아무 말 없이 갔다. 나무꾼은 구해주었는데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걸 보고 여우를 비난했다. 여우가 답했다. "만약 당신의 몸짓과 태도가 당신의 말과 일치했다면 감사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이 우화는, 말과 행동의 다름에 대한 겉과 속의 불일치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아래와 같이 신앙과 접목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귀는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데는 최고의 명수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명명한다. 거짓은 항상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 우화에서처럼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성실한 나무꾼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워할 때 안전한 장소에 숨겨주는 척 했다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우리를 사자에게 먹잇감으로 넘기려는 속셈으로 안달이 나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므로 모순된 부분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진리를 모방 할 필요도 없으신 완전하게 진실하신 분이시므로 행함으로 모든 것을 입증하시는 분이시다<사 14:24>. 뿐만 아니라, 사냥꾼(마귀)이 들끓고 있는 이 땅에 우리를 남겨두지 않고 셋째 하늘에 우리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까지도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다<요 14:2>. 이렇듯 하나님은 스스로 어떠한 모순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의 약속을 직접 성취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여전히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마귀에게 틈을 내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할 만한 최선의 미끼를 이용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갈취해 가기 위하여 시시때때로 틈을 노리는 영적사냥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귀에게 속지 않으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요일 4:1>을 통해서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을 시험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은 <마 7:17-18/눅 6:44>을 통하여 "모든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선한 것을 주장하고 있다면 행동의 열매도 그와 일치하여 선한 열매를 내고 있는가?를 살펴보라는 말이다. 설교자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나무 즉,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포함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행동이 말씀에 근간하여 일치가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과 그리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말씀대로 언행을 일치해가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의 열매가 얼마나 선하고 고귀한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기만 해도 너무나 좋고 그들을 존경하며,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또한 겸손해서 자신의 노고를 알리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작정한 곳에서 수고의 흔적을 이름대신 남기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의 사람은 어떤가? 그들의 열매는 악하다. 악한 열매를 맺히는 사람의 이름은 자랑할 만한 곳과 문제가 있는 곳 양쪽에서 거론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들은 욕심을 내는 데에는 빠르고 자기를 판단하는 데는 느리기 때문에 정직성과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열심은 있지만 악한 열매를 내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시 11:6>. 이러한 메커니즘은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 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속인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네가 이 일들을 행하였을지라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도 전적으로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고 그것들을 네 눈앞에 차례대로 놓으리라, 하시는도다.” <시 50:21> 이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언행이 말씀과 일치가 되도록 힘써야 하며, 선한 곳에 열매를 내도록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분별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덕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화를 꿈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성숙한 인격’입니다. 최근에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면서, 제 자신에 대한 인격의 모자람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모자람이 많은 탓인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말씀이나 기도를 가까이 하기 보다는 평상시보다 멀리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아이러니하게 이런 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이런 글을 적을 만한 자격은 없지만, 신앙을 공유하는 분들이 있기에 행복해서 이렇게 용기를 내어 글을 올려봅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취할 수 있는 내용만 취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날이 무척이나 덥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평안 하세요~~
2015-08-10 01:51:07 | 김상진
전도사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채널이라는 용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멋지게 설명해 주셨네요. 구원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은 아들 하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8-05 18:12:46 | 박기용
좋은 글로 종종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시간과 건강과 우리가 알 수 없는 모든 여건 들 까지 허락하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주여, 영혼이 가난한 자들의 간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긍휼을 베푸사 주님 보시기에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2015-08-04 12:26:18 | 한원규
 우리는 다채널 세상에 살고 있다. 다원주의와 큰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채널이라고 하면 티브이 채널을 생각할 수 있는데, 지상파 방송이 케이블 티브이와 종편 방송으로 급속도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단일 채널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이요, 꽉 막힌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현시대에는 무한한 선택을 강요받고 또 그것을 누리는 풍요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좋은 세상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선택의 풍요로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문제는 선택의 풍요로움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처음에 만들어준 세상에는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모든 것이 선했고, 아름다웠고, 완전했다.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존재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어떤 대가를 지불 할 필요가 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단 한가지의 채널은 금지되었다. 악을 선택하는 채널이다. 하나님은 악을 대적하시고 경멸하신다.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시고, 그 어떤 악도 양립, 또는 용인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세우고, 사람들을 악에서 보호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채널을 두셨다. 이 죽음의 채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지극히 쉬운 일이었고, 악에서 보호를 받는 길이었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노선인 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부여된 무한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은 단 하나의 금기의 채널을 선택함으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먹으면 죽는다고 했던 과실을 따먹은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 결과 육체의 죽음과 고통스런 삶,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이 저주스런 운명은 하나님께서 허용한 무한한 채널보다 단 하나의 악의 채널을 선택한대 있다. 이제 사람은 의와 생명의 법을 떠나 죄와 죽음의 법에 예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법이 되었고, 최종의 법이 되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법에 예외가 없다. 사람들은 죄와 죽음의 법에 팔리게 되었고, 원치않는 모든 악한 일들의 지배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만 살수 있도록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떠나셔야만 했고, 하나님과 떨어진 사람은 궁극적 멸망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한 꼴이 되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에게 처해진 운명이란, 다양한 악의 채널을 선택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끔직한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내리신 죄와 죽음의 법은 엄중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나님은 죄는 극도로 미워하셨지만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출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하시기로 한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신비중의 신비이다. 죄는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기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신 것이다. 2천년전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그 신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을 아들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분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다. 당신 자신의 죄가 아니라 죄 없으신 하나님이 희생헌물이 되신 것이다. 그 희생헌물은 완전한 헌물이며, 영원한 헌물이시다.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성취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으므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을 위한 헌물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그 시간에 ‘다 이루었다’ 하시며 죄에 대하여 단번에, 영원히, 완전한 제거를 실행하시므로 모든 인류를 위한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마련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단 하나의 채널을 선택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것이다.  단 하나의 금기의 채널로 악을 극도로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처럼,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예비심으로 궁극적으로 악을 제거하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참으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끔직이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멸망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위해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준비하신 것이다. 에덴 동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 역전되었다. 악으로 덮여있는 현 세상에서 구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단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길 뿐이다.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행4:12)
2015-08-03 15:21:33 | 조양교
어르신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시네요~ 마음이 젊으신 만큼 몸도 강건하신 것 같아요. 저희도 목사님의 설교가 실제 생활에 녹아 나타나길 기도하며 살지요. 늘상 육신과의 전쟁이 있기에 넘어지기도 수없이 반복하며 주님께서 불러 주시길 기다리며 살아요....
2015-08-02 09:08:22 | 이수영
항상 진지한 모습으로 글을 남겨 주셔서 인상이 깊었는데 'Paradigm shift'로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직접 운영하시는 개인 블로그가 검색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 삶의 조각들을 지나치지 않고 깊이 묵상하시는 습관을 통해 이렇게 바른 믿음 안으로 들어오시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고 다시 뵐 때까지 진리 안에서 항상 평안하십시요!!
2015-08-01 17:20:26 | 김대용
"자질구레한 아픔과 번뇌에 연연하며 보잘것없는 편린들에 집착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더 큰 아픔과 질고에 다가가 큰 기쁨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런 지혜와 용기 그리고 깨달음이 내게 다가오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옛날 2008년 7월 16일 새벽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폐암과 투병하고 있는 동생의 병상에서 간호하며 끄적여 본 단상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간구한대로 그런 깨달음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최근 저의 주변을 다시금 정리하면서 하늘나라로 간 동생을 생각하며 미망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던 큰 아픔과 질고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에 비교될 수도 없고 이를 큰 기쁨으로 바꿀 수 없음을 잘 압니다. 또한 그런 지혜와 용기 그리고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 자신이 덧 없음을 잘 압니다.   7월 5일 용기를 내어 먼 곳에 있는 "사랑침례교회"를 찾아 예배에 참여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급진적 사랑"을 묵상하며 위에적은 나의 급진적 단상을 다시 주님께 간구해 봅니다. 내게는 너무나 과분한 75세 생애에 영적인 Pradigm shift가 올 것인지 기대를 해 봅니다. 지난 7월 7일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몸담고 있던 교회를 떠남을 편지로 올렸습니다. 직접 말씀드리기가 마음 아파서요.   그간 주일예배는 참석지 못했지만 목사님의 누가복음 강해 설교 말씀 "좋은 사람 되기", "나무는 열매로 안다.", "와서 듣고 행하는 사람 되기"를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믿음 안에서 새로워 지기를 간구해 봅니다. 지난 주일 서울 한마음침례교회를 참석한 일도 있습니다. 작은 모임이지만 좋았습니다. 제가 매주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교통비(2~3만원) 등 기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저의 지금의 경제력과 건강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저보다 훨씬 먼 곳에서 오시는 분도 계시는데. 제가 영적으로 계으른 탓일 것입니다. 첫 방문 시 제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 형제/자매님들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다음에 만나 뵐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너무 말이 많아 죄송합니다. 주님이 저를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2015-08-01 16:31:57 | 차영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예수님의 급진적인 사랑 실천하기 설교를 들으며 제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유형제님의 글을 읽으며 화성과 금성.. 각기 다른 별에서 온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사랑의 다섯가지 언어라는 책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사랑은 주는 것이라 하지만 받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랑을 줄 때 낭비 없는 효과적이고 진정한 사랑의 교감이 이루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5-07-27 23:13:34 | 김상희
아내인 제게 글이 참 와닿네요.^^저의 적용으로 남편에게 파격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 무엇일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네아이의 육아와 살림으로 늘 바쁜 저는 제 남편의 설겆이 한번이 참 큰사랑으로 와닿는 그런 사람이지요. 작고 약한 그릇인 아내들은 작은 그릇을 담는 큰 그릇인 남편의 조그마한 변화와 노력도 금방 알아 차린답니다. ㅎㅎ 급진적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저희 남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참 어렵게 돌려서 했네요. 곳곳에서 파격적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밤입니다. 샬롬!
2015-07-27 22:24:50 | 주경선
정말 마음을 움직이는 생각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너무나 다른 메카니즘을 갖고 있다보니 남자는 아내를 위해서는 죽을 수는? 있어도 변기 커버는 신경을 안쓴다네요... 작은 것들이 아내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말이죠...... 여자는 사소한 것들에 배려를 느끼고 사랑을 느끼는데 남자는 자기의 일이나 정치나 운동과 취미에 신경 쓰기도 바쁘다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2015-07-27 10:58:47 | 이수영
  # 나는 아내를 진정 사랑하고 있을까?   모처럼 동창회에 나가 어렸을 때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온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고 있을 때 여론조사를 한다며 친구들 모두에게 “양변기깔판”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 설교시간에 들었던 양변기깔판에 관한 이야기가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세대들이고 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친구들에게서 그네들 가정에서는 양변기깔판에 대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매우 궁금했던 것입니다.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가 고작 나까지 네 명에 불과 했습니다. 어떤 녀석이 “야, 그거~골치 아파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해줘~~”라고 말하자, 또 다른 녀석이 “아니고 말도 마! 난 앉아서 소변도 보는데 뭘~~” 그 녀석은 쑥스러운 듯 이런 말을 내 뱉고는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갑니다.   아뿔사!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있을 때 한 친구의 부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수씨는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시는군요.”   나는 그때 그 말을 듣는 순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약간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 까닭은 당신은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여러 날이 지나도 그 말이 좀처럼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워지지 않고 때가되면 어김없이 되살아나 그 말이 생각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친구부인이 나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였다는 나의 반발심이 서서히 그 기운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친구부인의 말이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동안 그런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을 모른다?”   긴 시간 동안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친구부인의 진단이 정확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위에서 시청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내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이렇게 나 자신에게 되묻고 보니 참으로 스스로가 기가 막힙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까지 사랑한다고 한 그 모든 행동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 줄 알고 하였던 그 모든 행동들이 알고 보니 사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친구부인은 내가 하는 말을 듣고는 내가 아직도 아내에 대해서 잘못된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즉석에서 알아보았던 모양입니다. 이 남자는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 같지 않은 남자라는 사실을 즉석에서 느낌으로 알아 맞혔던 것입니다.   곧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시! 즉 그 증거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다른 사람이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그 부끄러운 표시를 앞가슴에 달고 살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실로 나야말로 "임금님은 벌거숭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나는 아직도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 즉, 내 가슴에 붙어 있는 그 표시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지난 수개월간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답답해 하다가 어제 설교말씀 중에 “파격적인 사랑”이란 단어를 듣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그것을 알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긴? 당연히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무슨 조치?" "------?"   "그러니까 넌 그 표시를 네 가슴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것 아니냐? "------?"   “그리고 네가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표시를 붙이고 다니겠다는 것 아니냐?" “그것도 파격적으로~~“ "------?"   이렇게 나는 또 한방 제대로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허 허! 세상에 이럴 수가~~ 그게 그렇게 되다니~~ 자, 그러니 이를 어쩐다?   그러니까 내가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시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아보는 일은 조금도 시급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급한 일은 지금이라도 즉시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 아, 어떻게 하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답”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그가 나대신 죽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내(교회)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아내를 위해서 죽어? 어떻게? 파격적으로? 이것 참 큰일이로구나!   다른 남자들도 나처럼 이런 걱정을 하며 살까?   note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죽음이 나에 대한 그의 요구요, 나에 대한 그의 모든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나에게 말씀 하시고, 십자가로 나를 나무라시고, 십자가로 나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성경 말씀에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되는 교회가(즉 세상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요즘 쓰는 단어로 이야기하면 가출아내가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가출아내는 찾아오는 것만이 남편으로서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의 길입니다.   그런데 가출아내는 죄 값을 치러야 도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가출아내의 죄 값을 치르신 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세상의 남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도 내 아내 곧 내 교회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렸으니 너희들도 너희들의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 완성된 그분의 세상창조 목적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종말의 날 까지 계속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은 언제나 인간의 삶의 현장 그곳뿐임을 발견합니다.   2015년 7월 27일(월) 조용한 시간 이 아침에 유 용수
2015-07-27 10:01:44 | 유용수
누룩, 바이러스, 말(言語) 등은 모두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판단을 버려야 한다는 교훈도 마치 꼬리잡기처럼 거의 모두가 예외 없이 해당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라 저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에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을 화로 안에 잘 담아 방 한가운데 두고 그것으로 언 몸도 녹이고 때로 긴 겨울밤 맛난 간식을 조리하는 도구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말도 잘 관리하면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며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동력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로라는 안전망 혹은 차단막 밖으로 쏟아진 숯불처럼 우리의 말이 충분한 지혜와 인내와 겸손과 무엇보다 지극한 사랑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필시 갈등과 문제를 만들고 퍼뜨리는 불(火)로 전락할 겁니다. 부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과도하지 않게 행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길 소원해 봅니다. 항상 차분하고 깊이 있는 성찰로 귀한 교훈을 마음 깊이 넣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15-07-14 22:49:58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