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의 말씀의 부재로 부패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형제님의 마음을
공유하기 원하는 귀한 시를 읽으며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백배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09-04 02:11:20 | 김상희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명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2015-09-03 09:43:26 | 목영주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이때까지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2:27-28)"
본문에서 예수님처럼 우리는 자신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모든 슬픔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큰 슬픔이 당하게 되면, 그저 그것이 빨리 자나가기만을 바라지 말고, 예수님처럼 그 슬픔 가운데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슬픔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공은 우리를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에 빠뜨려서 영이 둔해지고 흐려지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성공하며 잘 풀리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슬픔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가식과 거품을 제거해서 자신의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을 대면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슬픔을 겪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슬픔은 웃음보다 나으니 이는 얼굴의 슬픔으로 인하여 마음이 더 나아지기 때문이라.(전 7:3)"
극심한 슬픔을 겪으면서 깨지고 변화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온전히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하며 그로부터 큰 위로를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극심한 슬픔을 견뎌 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슬픔을 이겨낸 사람은 누구보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2015-09-02 23:40:20 | 박진태
목민심서 등을 통해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세기의 천재 다산의 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네요.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세상을 부패시키는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다산의 시를 통해 다시금 절절하게 느낍니다.
진리를 깨달아 알고 있음에도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진리를 몰랐던 다산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저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하는 귀한 시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9-01 12:30:13 | 김대용
밴드 닉네임 때문인지 다산 정약용 선생보다 다산 정진철 형제님이 먼저 떠올랐네요~ ^^
220년 전 일이지만... 두 아이들 상황이 그려지면서... 이 아침에 마음이 울컥하네요..ㅜㅜ
형제님 말씀처럼 정말 절대빈곤은 이 나라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바른 말씀과 진리의 절대 빈곤 시기인 것 같아요... 건물 아닌 교회들이 해체되고...
이른 아침 많은 생각과 감사함을 느낄 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형제님~^^
2015-09-01 06:24:44 | 성호현
어떤 아이 둘이서 걸어가는데
동생은 쌍상투하고 누이는 묶은 머리 했네
동생은 말을 배울 나이고
누나는 다박머리 드리웠네
어미를 잃고 우는 저 두 갈래 길에서
붙잡고서 연유를 물으니
흐느껴 울며 말을 못하네
울면서 말하길, 아빠는 오래 전 떠났고
엄마는 짝 잃은 신세였어요
쌀독은 벌써 비어서
사흘이나 굶었어요
엄마는 저를 안고 흐느껴 울며
눈물 콧물 두 뺨에 얼룩졌어요
동생은 울면서 젖을 찾았지만
젖은 말라서 붙어버렸어요
엄마는 제 손을 잡고
이 젖먹이를 업고서
저 산골에 가서는
구걸하여 먹였어요
어시장에 이르러서는
제게 엿도 먹여줬어요
이 길까지 데리고 와서는
동생을 사슴 새끼 품듯 안고 잤어요
동생은 세상모른 채 잠이 들었고
저 역시 죽은 사람처럼 잠들었어요
문득 깨고 나서 보았더니
엄마는 여기 없었어요
말하다가 울다가
눈물 콧물 줄줄 흐르네
날 저물어 어두워지면
새들도 집을 찾는데
외로운 두 오누이
찾아갈 집이 없구나!
슬프다! 이 나라 백성들
하늘의 떳떳함마저 잃었구나!
지아비와 지어미가 사랑하지 못하고
엄마도 제 자식 돌보지 않네
옛날 내가 마패 갖고 암행어사 되었을 때
당시가 갑인년(甲寅年)이었는데
임금님 분부하셨지, 고아들을 보살펴서
고생 없게 하라고..,
모든 벼슬하는 관리들아!
이 말씀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 전, 조선후기. 절대빈곤으로 인하여 가족이 해체되는 지경을 한탄하며 다산(茶山)이 지은 시(時)입니다. 다행히 오늘날 이 시대에는 절대빈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말씀의 빈곤은 날로 더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또 마치 이 시가 오늘날의 기독교를 풍자하고 있는 듯해서 인지 시(時)를 읽고 또 다시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이 에려옵니다.
바른 말씀으로 많은 혼들이 회심하며,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 같은 소망을 품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혼들이 더해지길 원하는 마음에서, 다산 선생님의 시(時) 한 수와 함께 글을 공유해봅니다.
2015-08-31 23:32:26 | 김상진
사사기를 읽다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삿 2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모든 날 동안과 여호수아 보다 더 오래 산 장로들 곧 주께서 이스라엘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모든 날 동안 주를 섬겼더라.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 곧 자기들 주위
사방에 있던 백성의 신들을 따라가며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겨 주의 분노를 일으키므로 그들을 노략 자들의
손에 넘겨 주시고 또 사방에 있던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 그들을 파시니 그들이 더 이상 자기 원수들 앞에서 패하게
하셨으므로 크게 고통을 당하였더라. 삿 2 : 12-15
그러므로 많은 고통을 당한뒤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한 구출자를 일으키셔서 건져 내게 하셨으
니 곧 갈렙의 동생이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더라.
이 옷니엘의 부인은 갈렙의 딸 악사 였습니다.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빼앗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옷니엘이 그것을 빼앗아 승리함으로
가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게 되었습니다. 삿 1:12-13
평소에 갈렙이 자녀들 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와 긍정적인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걸어갔던 것을 보았음으로
신실하게 주만 바라고 그의 남편과 함께 살아 갔으므로 하나님께서 부페해가는 이스라엘을 그들을 통하여 건져
내셨던 것입니다 .
옷니엘도 주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싸운 용사이였지만 그의 아내가 많이 내조를 했기 때문에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는
때묻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나갔기 때문에 그들을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주의 영께서 그에게 임하셨음으로 그가 이스라엘을 재판 하였음으로 또 그가 나가서 싸울때에 주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그의 손이 구산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었고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 삿 3 :11
그러므로 옷니엘과 악사 부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사십년 동안 평안하게 살아 간 것을 보고 하나님이 들어 쓰시
기에 합당한 인물로 준비되어 있는 귀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가끔씩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저의 어머님의 신실하신 믿음으로 나를 길러 주셨기에 그래도 오늘날 이만큼이
라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신 그 어머니의 믿음을 보았기에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
앞으로 세상은 죄로 인해 더 혼탁해서 삶의 질이 떨어지고 문명의 발달로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살어 가는것
같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세상 향략에 도취되어 살게하는 죄악이 홍수 같이 휩쓸려 내려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 어떻게 내 자녀들이 주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신실하게 이 세상을 살어 갈것인가 ?
이런 생각을 가끔씩 해 봅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실하게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죄악의 홍수가 휩쓸려 와도 하나님의 손길이 너희들을 보호해 주신단다, 하는 말을 해주곤 합니다.
그래서 늘 주님께 기도 드립니다
우리들의 자녀가 손자들 까지 어려서 부터 하나님의 위대 하심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행하는
대로 복을 주시고 또한 행하는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면 하나님의 자녀로 늘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께닫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 합니다.
2015-08-30 07:45:47 | 윤정용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았사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시나이다.(시 73:22-23)"
아삽의 심정은 행복하게 보이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질투심에 불탔습니다. 결국 아삽은 착하게 살아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리게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는 말씀을 깨달은 아삽은 자신의 속사람에 대해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삽은 이 전 절에서 "내 마음이 괴로우며 내가 속 중심에서 찔렸나이다.(시 73:21)"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어리석고"라는 말 속에는 죄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처럼 "어리석은" 자가 됨으로써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의 정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여 "내가 이같이 무지하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말할 수 없을 정도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아주 억한 어리석음으로 단순히 연약해서 그랬다는 것으로는 변명할 수 없는 그런 어리석음입니다. 오히려 그 고집 세고 고의적인 무지 때문에 정죄받아 마땅한 어리석음입니다. 왜냐하면 경건치 못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 끔찍한 종말은 잊어버린 채 다만 그들이 현재 형통한 것만 보고 질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런 아삽보다 더 낫다고 할만큼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혹시 우리 자신은 이미 온전함을 얻었다거나 아니면 징계를 하도 많이 받아서 우리 안에 있던 모든 고집들이 다 쫓겨 나갔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이야말로 진짜 교만입니다. 만일 아삽이 어리석었다면, 자신을 평가할 때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야 얼마나 더 어리석겠습니까!
여러분, 뒤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처럼 신실하게 대하셨을 때도 그처럼 신실하게 대하셨을 때도 그분을 의심했던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큰 영적인 복을 주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실 때면 "싫어요, 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항의했던 여러분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그분의 섭리들을 보고 잘못 해석하여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대적하고 있구나!"라고 탄식하며 신음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정말 우리 마음을 안다면, 우리의 어리석음이 악한 어리석음이라는 기소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를 인정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어리석음"을 때달은 우리는 아삽이 결론적으로 갖게 된 다음과 같은 고백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께서 주의 권고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중에는 영광으로 나를 받아주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나이까?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시 73:24-25)"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08-28 23:42:01 | 박진태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 4:6-8)"
사형집행을 앞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고별 서신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서신이 아니라 확신의 서신입니다. 자신의 일이 거의 끝난 것을 알지만 그것도 그를 낙심시키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믿음의 고백에서 사도 바울의 세 방향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자신의 확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곁을 둘러보며 자신이 준비되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처형될 죄수로 보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물로 드려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 고백에 사도 바울은 죽음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두렵다거나 심지어 죽음 자체가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떠난다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장막을 해체하고 이동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란 단순히 장막을 해체하고 영광스런 새 집에 입주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우리 몸은 한시적 거처일 뿐입니다.
둘째로 삶의 막바지에서 사도 바울은 곁을 둘러보았을 뿐 아니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마치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사도 바울은 두려움 없이 곁을 둘러볼 수 있었고 후회 없이 뒤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뒤를 돌아보니 삶이 늘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싸워야 했고 경주해야 했으며 청지기 직분을 다해야 했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로마에서 마지막 싸움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실패할 것 같은 때도 있었지만 주님은 언제나 그를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곁을 둘러보고 뒤를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앞을 내다보았습니다.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 4:8)"
미래가 안전함을 알 때 마음에 찾아드는 평안, 그런 평안은 다시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주님께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없이 곁을 보았고, 후회없이 뒤를 돌아보았고 회의나 불안 없이 앞을 내다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주께 이런 말씀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마 25:23)"
언젠가는 여러분과 저의 삶도 끝날 것입니다. 날짜나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빠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편지에 절절히 증거했듯이 우리도 다 세방향을 바라보며 똑같이 증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십시오. 남들이 어찌하든 당신은 주님께 신실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 워렌 위어스비
2015-08-18 23:31:31 | 박진태
아멘~!
늘 좋은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8-17 12:46:31 | 한원규
"누가 작은 일들의 날을 멸시하였느냐?(스가랴 4:10)"
대언자 스가랴는 고생스레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산은 적고 사기는 땅에 떨어져 도무지 일이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너무 작아보여 낙심했습니다. 본래의 성전에 턱없이 못 미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일이라고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사용하여 큰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에 당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일 수 있지만,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일과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사실 정도로 여러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당신 눈에는 자신이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일도 맡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하면 가장 큰 일에도 신실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일이 곧 가장 큰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일이 큰 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절대 사람의 평가에 영향받지 마십시오. 사람은 작은 일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가치관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모든 일이 다 사람 보기에 위대하고 온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큰 일이 되도록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미약한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려 했을때 그들의 일은 미약할 정도로 작아보였지만, 그래도 엄연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성전 뜰에 서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들을 용서하며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절대 멸시하지 마십시오. 그 작은 것 속에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영적인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작은 일은 보다 큰 일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어떤 일도 작지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베푼다면 어떤 선물도 작지 않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평가와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원을 기준으로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 워렌 위어스비
2015-08-15 00:24:56 | 박진태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간청하오니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요나 4:3-4)"
분노하는 것이 항상 혹은 반드시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화는 그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제멋대로 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라고 자문해 봄으로써 우리가 내는 그 화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래, 합당하다."라고 답할 수 있는 화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분노는 미치광이의 횃불일 때도 많지만 때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엘리야의 불일 때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선과 자비로운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하는 잘못 때문에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화를 낸다면, 그처럼 하나님의 교훈을 많이 받고도 여전히 어리석은 우리 자신을 보고 화를 낸다면, 혹은 단지 사람들이 행하는 악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그것은 다 잘하는 일입니다.
죄를 범하는데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죄는 혐오스럽고 증오할 만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단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죄를 참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매일 악한 자들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시 97: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분노가 칭찬할 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정당치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럴 때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대해 "안 돼"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며, 아랫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고, 동료들에게 격노합니까? 이런 분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옛날의 그 악이 다시 우리 마음을 지배하려 드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런 거라면 우리의 거듭난 본성이 갖고 있는 모든 능력으로 그것에 저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듯이 분을 터트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면에서 정복자가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를 억누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동안 우리에게 한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자연적인 결함을 죄를 짓는 구실로 삼으면 안됩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나아가 주님께, 우리의 분노를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나아가십시오.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08-13 01:06:52 | 박진태
저와 저의 기도에 대해 돌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여름 항상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2015-08-12 12:11:49 | 김대용
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네요!
좋은 내용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8-12 07:51:32 | 김상진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나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 안에서 완전해지게 하려 함이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3)"
어려운 일로 인해 힘들 때면 요한복음 17장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왜 그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지 설명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셨듯이, 우리와도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게 하시려고 겪게 하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 우리가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 더 알게 되며, 특히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순종하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과 더욱 하나 되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하십니까? 모름지기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관심을 드러냅니다.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다른 목표를 바라보며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다면 더 이상 예전처럼 제멋대로 살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데,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자아의 자기주장과 고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자아를 다루시기 위해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 결국은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고난에는 예수님의 속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면, 눈앞의 어려움 보다는 그 고난에 담긴 주님의 깊은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고난에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2015-08-12 00:30:39 | 박진태
아멘!
2015-08-10 22:51:20 | 김상진
형제님,
용기 내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란 걸로 따지면 저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우리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5-08-10 19:12:27 | 김항수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가
천금보다 값진 교훈을 접하고도 그것은 내게 해당하는 바 없다고 판단하고
한쪽 귀로 들어온 교훈을 듣는 척하며 은밀하게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화의 삶이란 동과 서, 남과 북이 떨어져 있는 저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을 겁니다.
진리의 말씀과 언행을 일치시켜 보려 시도해도 부끄럽게 아직도 한참이나 모자란 상태가
저의 삶임을 고백하며 글 속에 담긴 귀한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반가움이 앞서는 진솔하고 강직한 글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8-10 17:39:35 | 김대용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더많은 좋은글 기대해도 되겠죠?
2015-08-10 16:52:57 | 김영익
김 형제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성화에 초점을 두고 삽시다.
샬롬
패스터
2015-08-10 10:09:5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