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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작은 일들의 날을 멸시하였느냐?(스가랴 4:10)"   대언자 스가랴는 고생스레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산은 적고 사기는 땅에 떨어져 도무지 일이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너무 작아보여 낙심했습니다. 본래의 성전에 턱없이 못 미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일이라고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사용하여 큰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에 당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일 수 있지만,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일과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사실 정도로 여러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당신 눈에는 자신이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일도 맡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하면 가장 큰 일에도 신실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일이 곧 가장 큰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일이 큰 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절대 사람의 평가에 영향받지 마십시오. 사람은 작은 일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가치관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모든 일이 다 사람 보기에 위대하고 온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큰 일이 되도록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미약한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려 했을때 그들의 일은 미약할 정도로 작아보였지만, 그래도 엄연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성전 뜰에 서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들을 용서하며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절대 멸시하지 마십시오. 그 작은 것 속에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영적인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작은 일은 보다 큰 일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어떤 일도 작지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베푼다면 어떤 선물도 작지 않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평가와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원을 기준으로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 워렌 위어스비 
2015-08-15 00:24:56 | 박진태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간청하오니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요나 4:3-4)"   분노하는 것이 항상 혹은 반드시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화는 그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제멋대로 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라고 자문해 봄으로써 우리가 내는 그 화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래, 합당하다."라고 답할 수 있는 화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분노는 미치광이의 횃불일 때도 많지만 때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엘리야의 불일 때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선과 자비로운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하는 잘못 때문에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화를 낸다면, 그처럼 하나님의 교훈을 많이 받고도 여전히 어리석은 우리 자신을 보고 화를 낸다면, 혹은 단지 사람들이 행하는 악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그것은 다 잘하는 일입니다.   죄를 범하는데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죄는 혐오스럽고 증오할 만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단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죄를 참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매일 악한 자들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시 97: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분노가 칭찬할 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정당치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럴 때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대해 "안 돼"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며, 아랫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고, 동료들에게 격노합니까? 이런 분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옛날의 그 악이 다시 우리 마음을 지배하려 드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런 거라면 우리의 거듭난 본성이 갖고 있는 모든 능력으로 그것에 저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듯이 분을 터트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면에서 정복자가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를 억누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동안 우리에게 한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자연적인 결함을 죄를 짓는 구실로 삼으면 안됩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나아가 주님께, 우리의 분노를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나아가십시오.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08-13 01:06:52 | 박진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나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 안에서 완전해지게 하려 함이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3)"   어려운 일로 인해 힘들 때면 요한복음 17장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왜 그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지 설명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셨듯이, 우리와도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게 하시려고 겪게 하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 우리가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 더 알게 되며, 특히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순종하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과 더욱 하나 되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하십니까? 모름지기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관심을 드러냅니다.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다른 목표를 바라보며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다면 더 이상 예전처럼 제멋대로 살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데,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자아의 자기주장과 고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자아를 다루시기 위해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 결국은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고난에는 예수님의 속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면, 눈앞의 어려움 보다는 그 고난에 담긴 주님의 깊은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고난에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2015-08-12 00:30:39 | 박진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가 천금보다 값진 교훈을 접하고도 그것은 내게 해당하는 바 없다고 판단하고 한쪽 귀로 들어온 교훈을 듣는 척하며 은밀하게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화의 삶이란 동과 서, 남과 북이 떨어져 있는 저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을 겁니다. 진리의 말씀과 언행을 일치시켜 보려 시도해도 부끄럽게 아직도 한참이나 모자란 상태가 저의 삶임을 고백하며 글 속에 담긴 귀한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반가움이 앞서는 진솔하고 강직한 글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8-10 17:39:35 | 김대용
유아교육 공부를 할 때 동화가 어른들을 위한 책이었고 시대배경을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지요. 아이들의 생각은 단순하지만 어른들은 너무나 복잡하다는 큰 차이가 있죠. 주님 앞에서 늘 우리는 어린아이 일수밖에 없지만 순수함과 단순함을 가진 어린아이이고 싶습니다.
2015-08-10 09:09:33 | 이수영
최근에 <성인을 위한 이솝우화>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본래 <이솝우화>는 아이가 아닌 성인을 위한 책이며,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책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에 읽은 이후 성인이 되어서 다시 읽어보니 매우 단순한 내용이지만 여러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신앙생활과 매칭 시켜가며 생각할 수 있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저희 아이들과 함께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를 놓고 신앙과 접목하여 생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들의 사고가 많은 관점에서 어른들에 비해서 참으로 단순하고 순수하며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을 가지고 진리를 표현하는 것들을 보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읽고 생각한 후에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신앙과 접목하여 교제를 나눠보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이해 할 수 있는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족한 내용이지만 제가 생각했던 바를 글로 공유해봅니다. 물론 어린 아이를 둔 부모가 아니어도 연령과 상관없이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을 더하기에 좋다고 봅니다. <여우와 나무꾼> 어느 날 사냥꾼들에게 쫒기던 여우가 나무꾼을 발견하고 그에게 숨겨달라고 간청했다. 나무꾼은 자기 오두막에 여우를 숨겨주었다. 잠시 후 사냥꾼들이 와서 나무꾼에게 여우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나무꾼은 목소리로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면서 손으로는 여우가 숨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사냥꾼들은 손짓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만 믿었다. 여우는 사냥꾼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와서 아무 말 없이 갔다. 나무꾼은 구해주었는데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걸 보고 여우를 비난했다. 여우가 답했다. "만약 당신의 몸짓과 태도가 당신의 말과 일치했다면 감사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이 우화는, 말과 행동의 다름에 대한 겉과 속의 불일치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아래와 같이 신앙과 접목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귀는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데는 최고의 명수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명명한다. 거짓은 항상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 우화에서처럼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성실한 나무꾼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워할 때 안전한 장소에 숨겨주는 척 했다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우리를 사자에게 먹잇감으로 넘기려는 속셈으로 안달이 나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므로 모순된 부분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진리를 모방 할 필요도 없으신 완전하게 진실하신 분이시므로 행함으로 모든 것을 입증하시는 분이시다<사 14:24>. 뿐만 아니라, 사냥꾼(마귀)이 들끓고 있는 이 땅에 우리를 남겨두지 않고 셋째 하늘에 우리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까지도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다<요 14:2>. 이렇듯 하나님은 스스로 어떠한 모순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의 약속을 직접 성취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여전히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마귀에게 틈을 내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할 만한 최선의 미끼를 이용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갈취해 가기 위하여 시시때때로 틈을 노리는 영적사냥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귀에게 속지 않으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요일 4:1>을 통해서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을 시험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은 <마 7:17-18/눅 6:44>을 통하여 "모든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선한 것을 주장하고 있다면 행동의 열매도 그와 일치하여 선한 열매를 내고 있는가?를 살펴보라는 말이다. 설교자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나무 즉,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포함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행동이 말씀에 근간하여 일치가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과 그리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말씀대로 언행을 일치해가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의 열매가 얼마나 선하고 고귀한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기만 해도 너무나 좋고 그들을 존경하며,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또한 겸손해서 자신의 노고를 알리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작정한 곳에서 수고의 흔적을 이름대신 남기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의 사람은 어떤가? 그들의 열매는 악하다. 악한 열매를 맺히는 사람의 이름은 자랑할 만한 곳과 문제가 있는 곳 양쪽에서 거론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들은 욕심을 내는 데에는 빠르고 자기를 판단하는 데는 느리기 때문에 정직성과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열심은 있지만 악한 열매를 내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시 11:6>. 이러한 메커니즘은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 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속인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네가 이 일들을 행하였을지라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도 전적으로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고 그것들을 네 눈앞에 차례대로 놓으리라, 하시는도다.” <시 50:21> 이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언행이 말씀과 일치가 되도록 힘써야 하며, 선한 곳에 열매를 내도록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분별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덕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화를 꿈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성숙한 인격’입니다. 최근에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면서, 제 자신에 대한 인격의 모자람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모자람이 많은 탓인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말씀이나 기도를 가까이 하기 보다는 평상시보다 멀리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아이러니하게 이런 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이런 글을 적을 만한 자격은 없지만, 신앙을 공유하는 분들이 있기에 행복해서 이렇게 용기를 내어 글을 올려봅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취할 수 있는 내용만 취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날이 무척이나 덥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평안 하세요~~
2015-08-10 01:51:07 | 김상진
전도사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채널이라는 용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멋지게 설명해 주셨네요. 구원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은 아들 하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8-05 18:12:46 | 박기용
좋은 글로 종종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시간과 건강과 우리가 알 수 없는 모든 여건 들 까지 허락하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주여, 영혼이 가난한 자들의 간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긍휼을 베푸사 주님 보시기에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2015-08-04 12:26:18 | 한원규
 우리는 다채널 세상에 살고 있다. 다원주의와 큰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채널이라고 하면 티브이 채널을 생각할 수 있는데, 지상파 방송이 케이블 티브이와 종편 방송으로 급속도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단일 채널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이요, 꽉 막힌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현시대에는 무한한 선택을 강요받고 또 그것을 누리는 풍요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좋은 세상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선택의 풍요로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문제는 선택의 풍요로움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처음에 만들어준 세상에는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모든 것이 선했고, 아름다웠고, 완전했다.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존재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어떤 대가를 지불 할 필요가 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단 한가지의 채널은 금지되었다. 악을 선택하는 채널이다. 하나님은 악을 대적하시고 경멸하신다.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시고, 그 어떤 악도 양립, 또는 용인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세우고, 사람들을 악에서 보호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채널을 두셨다. 이 죽음의 채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지극히 쉬운 일이었고, 악에서 보호를 받는 길이었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노선인 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부여된 무한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은 단 하나의 금기의 채널을 선택함으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먹으면 죽는다고 했던 과실을 따먹은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 결과 육체의 죽음과 고통스런 삶,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이 저주스런 운명은 하나님께서 허용한 무한한 채널보다 단 하나의 악의 채널을 선택한대 있다. 이제 사람은 의와 생명의 법을 떠나 죄와 죽음의 법에 예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법이 되었고, 최종의 법이 되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법에 예외가 없다. 사람들은 죄와 죽음의 법에 팔리게 되었고, 원치않는 모든 악한 일들의 지배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만 살수 있도록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떠나셔야만 했고, 하나님과 떨어진 사람은 궁극적 멸망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한 꼴이 되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에게 처해진 운명이란, 다양한 악의 채널을 선택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끔직한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내리신 죄와 죽음의 법은 엄중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나님은 죄는 극도로 미워하셨지만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출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하시기로 한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신비중의 신비이다. 죄는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기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신 것이다. 2천년전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그 신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을 아들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분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다. 당신 자신의 죄가 아니라 죄 없으신 하나님이 희생헌물이 되신 것이다. 그 희생헌물은 완전한 헌물이며, 영원한 헌물이시다.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성취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으므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을 위한 헌물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그 시간에 ‘다 이루었다’ 하시며 죄에 대하여 단번에, 영원히, 완전한 제거를 실행하시므로 모든 인류를 위한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마련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단 하나의 채널을 선택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것이다.  단 하나의 금기의 채널로 악을 극도로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처럼,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예비심으로 궁극적으로 악을 제거하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참으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끔직이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멸망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위해 단 하나의 의의 채널을 준비하신 것이다. 에덴 동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 역전되었다. 악으로 덮여있는 현 세상에서 구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단 하나의 채널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길 뿐이다.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행4:12)
2015-08-03 15:21:33 | 조양교
어르신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시네요~ 마음이 젊으신 만큼 몸도 강건하신 것 같아요. 저희도 목사님의 설교가 실제 생활에 녹아 나타나길 기도하며 살지요. 늘상 육신과의 전쟁이 있기에 넘어지기도 수없이 반복하며 주님께서 불러 주시길 기다리며 살아요....
2015-08-02 09:08:22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