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도 바뀐 찬송가 가사로 듣게 되겠군요.
찬양을 통해서 말씀을 숙고하는 모습이 귀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글 올려 주세요^^
2015-09-21 11:06:48 | 이수영
참조 감사합니다
2015-09-20 23:12:18 | 윤계영
참조하세요.
마지막 나팔소리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12
2015-09-20 16:40:40 | 관리자
찬양을 준비하며 우리가 듣게될 하나님의 나팔소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바뀌는 가사를 올려주셔서 정확한 가사를 따라 신나게 불러봅니다.ㅎ
하나님께 영광 올리고 온 성도와 함께 은혜받는 아름다운 찬양이
될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5-09-20 00:02:39 | 김상희
오랫만에 글을 올렸는데,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세상이 주는 짐은 수고스럽고, 무거운짐이 되지만,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기록되어 있네요. 모두들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2015-09-19 21:50:14 | 김정호
안녕하세요?
주(차)옥(상)섬(김이) 팀은 - 여병수 형제님을 팀장으로 주일날마다 교회를처음 찾는분들과 교회인근 이웃들과의 민폐사전방지및 옥상시설의 안전도모를 위한 극대화를 위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섬김부서의 한곳인데요.
지난8월 어느날 찬양에 고무되신 몇몇 형제님의 제안으로 우리 주옥섬 섬김이팀도 주일예배에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올려드리자는 의견을 접수 일이차모임을 갖고 날짜를 잡는중 최종 9월 27일로 낙점이 되었던바 있읍니다
그 이후 날짜가 다가오면서 새로나올 찬송가에 개사될 하나님의 나팔소리의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하며 맞춰 나가는 동안 궁금증이 솟아 올랐는데 성경을 보니 나팔소리에도 처음울린 나팔소리와 마지막나팔소리가 있는겁니다. 왜 아담도 첫 아담이 있고 마지막 아담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27일 부를 하나님의나팔소리는 처음나팔소리 일까요? 마지막나팔소리일까요? 자세한 내용은 cbck 고린도전후서 25번 강해설교 후반부에 답을 주시고 계십니다. 궁금해야 찾게 되는 우리네 섣부른 넉넉함을 이번기회에 같이 고백하며 들추어 보시기를 추천 드려봅니다. 유대인에게는 성전이 지어져 있을때 매년 장막절을 지키며 듣게되는 나팔소리의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불러모으는 뜻이 숨어있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교회의 기다림입니까? (고전 15:51-52, 킹흠정)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보이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아멘-
9월 27일은 주옥섬 (새로 바뀔 찬송가 124장)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찬양으로 영광돌리기로 한날입니다. 124장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 할때에
주님 영광중에 강림 하시고
부활성도들과 살아있는 성도들모아
공중으로 모두 끌어올리리
(후렴)
나팔불 때나의이 름
나팔불 때나의이 름
나팔불 때나의이 름
부를때에 부활참여 하겠네
2. 무덤속에 잠자던자 그때다시 일어나
영화로운 부활승리 얻으리
부활성도 구름들속으로 채여올라가
공중에서 주의 얼굴뵈오리
3. 주님다시 오실날을 우리알수 없으니
항상기도하고 깨어있어서
기쁨으로 왕좌앞에우리 나가서도록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네
주옥섬 섬김이팀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기도 하지만 금년내에 바뀔 cbck 독립침례교회 전용 찬송가로 개사된 가사로 처녀 연습중임을 사전 알림을 통한 섬김과 예배드림의 하나됨을 병행 추진하고자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나팔소리에 대해 cbck 고린도전후서 25차 설교를 통해 공유하여 보자는 용기를 내어 보았읍니다.
성경엔 나팔소리가 여러군데 나오는데요, 제일 처음 나팔소리는 언제일까요?
찾아보니 출애굽기 19장 10절로 20절 사이에 나오는데 나팔소리를 듣기위해 모세를 통한 이틀간의 각자의 옷을빨며
거룩하게 구별한 백성들의 노력이 나옵니다. 셋째날 아침에 온산이 크게 진동하며 선택하신 백성을 부르는 나팔소리가 점점더 커질때에 모세가 응답하는 장면이 바로 성경에서 첫번째 율법의 나팔소리입니다.
그렇다면 고전 15장 51절에 마지막 나팔소리의 마지막은 언제를 이야기하는가?
계시록의 7 나팔소리중 7 번째 나팔일까요? 궁금하면 직접찾아 보셔야 하는데 오늘만큼은 제가 대신 찾아 드립니다.
적쟎은 교회들이 마지막 나팔소리의 뜻을 계시록까지 끌고 가는데요.
우리 흠정역 진영에서는 첫나팔- 율법의 나팔, 마지막나팔- 은혜의 나팔로 계시록의 나팔은 이미휴거된 교회랑은 전혀 관계 없는 뒷북인겁니다. 즉 이는 그동안 듣고 배운 말씀의 내용대로 환란전 휴거를 통한 교회시대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나팔소리인것입니다. 다시 말 하자면 율법의 나팔로 온 사망을 마지막나팔로 사망을 끝내버리는 생명의 마지막 나팔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론 사도바울이 고전15장을 쓸때는아마 AD 55년 쯔음으로 본다면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때는 AD 96년 쯔음이 될터인즉 사도바울은 계시록을 전혀 볼래야 볼수없는 상태에서 이글을 썼을거라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의 재림은 사도바울 당시에도 재림을 기다리는 강한 소망으로 기록 되였을 마지막 나팔로 이해 될수 있다는겁니다. 그러나 한영혼이라도 더 구원 받기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2015년에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이 얼마나 가슴뛰는 좋은 시기에 신구약을 모두 펼쳐놓고 하나님의 뜻을 흠정역 바른성경을 통해 알수 있는 축복이 우리 손위에 올려져 있다니......
참 좋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비의 그날을 여러분과 함께 사모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님안에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만 들릴 하나님의 나팔소리-
당일에 얼마나 잘 찬양으로 영광 돌리게 될지에 앞서 부르는 이와 듣는이 사이에 흐를 진정한 나팔소리의 의미에서 확정된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다시한번 우리의 믿음으로 승화 시킬 수있기를 소원 하며 마지막 한주간 동안만 이라도 주옥섬 찬양팀과 cbck 모든분들의 각자의 옷을 빨며 거룩하게 구별되어져 아름다운 찬양의 시간이 되어지기를 소원 합니다.
-샬롬-
2015-09-19 21:34:06 | 윤계영
김정호 형제님 반갑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시니 더더욱 반갑네요.
기다려주시고 오래참아주시는 긍휼하심으로
성한 모습으로 여기까지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함으로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을 만나고
나는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확연히 달라졌나 생각해봅니다.
2015-09-17 11:18:35 | 김상희
형제님의 단상에 공감하며 자주 올려 주시면 좋겠어요. 감사드립니다.
2015-09-17 10:48:45 | 이수영
내 자신의 늘어진 팔과 무릎을 바라볼때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그것을 세우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그분이 바로 생명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다시 만나고 난 후" 얻어진 담대함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임을 깨달아가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형제님의 귀한 글안에서 다시 한번 주님을 바라 봅니다!
2015-09-17 09:41:32 | 태은상
한편의 설교원고를 읽는 듯한 착각을 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는 귀한 글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종종 유익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샬롬^^^
2015-09-17 09:20:06 | 김영익
'자기 담대함' '자기 쓴뿌리' '자기 정죄함'
이런 의미들에 대한 단상은 결코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단어들인 거 같아요.
이렇게 예리하고 구체적인 나눔을 통해 우리모두가 시험들거나 실족하는 일이 줄어들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인생은 좋은 일로 메꾸기에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이제 60을 바라보며 더욱 느껴집니다.
청원자매님 말대로 정말 성령충만한 글이네요.^^
2015-09-17 08:07:59 | 오혜미
우리 영생의 동지들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주님의 일꾼들로써 함께 나아가요.
정말 헛되지 않은 수고를 주님께 드리고 싶네요! 현제님의 뜬금 좋은 글에 감사해요~^^
2015-09-17 07:24:06 | 성호현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 -고전 15:58-
아멘아멘아멘입니다.
저도 장형제님처럼 본문에서 갈무리해 덧글에 옮겨봅니다.ㅎㅎ
김형제님, 언제 이렇게 좋은 글을 쓰셨는지요. 앞으로도 성령충만한 글 부탁드립니다.
2015-09-16 19:10:01 | 이청원
김정호형제님!
인생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펼쳐주시는 커다란 위로와 사랑을 일필로 단숨에 써 내려가며 귀한 은혜를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아래의 문장들이 특히나 용기와 힘을 가져다 주었기에 다시금 적어봅니다. 샬롬^^
1. 늘어진 저의 손과 무릎을 반드시 말씀으로 다시 굳게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주의 일을 사모하는 영에게 있어서 큰 구렁텅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당연히 매를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심으로 징계를 참아주시는 주님, 이것이 ‘주의 긍휼’ 아니겠습니까? 감사드릴뿐이지요. 그래서 곁길로 갔다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분께 신속히 돌이키면 우선 안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은 돌이키는자들을 기뻐하십니다.
3. 결코 마귀에게 작은 틈도 주지 마십시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틈 탈수 없습니다. 말씀을 굳게 믿고 읽으며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세요. 그리고 새힘을 얻으시면 시간을 아껴서, 다시금 주의 일꾼으로 일하십시오.
나의 늘어진팔과, 무릎이 힘을 얻어 굳세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까지 잠시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주를 다시 만나고 난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2015-09-16 15:58:24 | 장용철
“오늘 말씀 읽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 늘어진 저의 손과 무릎을 반드시 말씀으로 다시 굳게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주의 일을 사모하는 영에게 있어서 큰 구렁텅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직 우리를 건져 주시는 주[LORD]가 계시기에 글을 쓰면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딤전 3:13, 킹흠정)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좋은 지위를 얻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서 큰 담대함을 얻느니라.』
이제 신앙적으로 성숙단계에 오르셔서 주의 일꾼으로 일하시는 지체들, 특별히 집사의 직분을 맞고 계신 형제님들은 이미 어느 정도 믿음의 맛을 보았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성경적 근거로 보면, ‘믿음의 담대함’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늘 우리에게 동행하여 주실뿐 아니라, 일할 능력까지도 공급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하는 각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잘 감당하면 그 능력 공급하심과 믿음의 담대함이 더 클 것이고, 혹여나 적절히 감당했으면 거기에 걸맞은 믿음의 담대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분량만큼 주시는 것이기에 더 크다고 더 작다고 우리가 사람을 높이고 낮출수는 없겠지요. 우리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믿고, 일꾼으로 세우신 분께 감사드리거나 낙심한 지체에게 서로 위로하며 더욱더 말씀대로 지체를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주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 합니다. 오직 주께서만이 주의 일꾼들을 판단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의 군사들은 이제 앞으로 더욱 만군의 주께 더욱더 인정받는 좋은 일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혹여나 전쟁중에 부상을 당하거나, 고갈되었거나, 혹여나 곁길로 갔는지 서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곁길로 간’ 지체들을 위해서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혹여라도 이런 지체들에게 ‘다시 일어날 이유’가 있어서 더 나누어 보겠습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써의 일꾼들은 늘 대대장되신 주 예수님의 명령하심에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한일에 푹빠져서 자기의 자랑으로 자기도 모르게 가득채워지게 되면 믿음의 담대함이 아닌, ‘자기 담대함’으로 무엇이나 된 것처럼 우쭐 되는 행동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는 갑작스럽게 지체들에게 또는 목사에게서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인간적인 섭섭함을 듣게 되면 저 뒤로 움츠러들어 등껍질속에 감추어버린 거북이 같이 숨고 안나오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항상 기회를 봐서 교회를 떠날 생각만하게 되겠지요. 자기 하는 일에 부족하여서 아쉬움만 남는 것이 지나쳐서 정죄감에 빠져있게 되어 무능력하게 되는 경우도 곁길로 빠진 것이라 할수 있겠지요.
그 동안 교회에서 ‘자기 담대함’, ‘자기 쓴뿌리’, ‘자기 정죄함’으로 일한 오류들에 빠지게 된다면 주와 계속 멀어지게 되고, 직무 수행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 되고 감당치 못한것보다 오히려 안좋은쪽으로 결과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류들에 빠졌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럴 때마다 주께서는 그 일꾼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주께로 돌이킬수 있도록 깨달음과 참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심을 늘 감사드립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곁길로 갈 때 마다 돌이킬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고, 바로 매번 채찍질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성한대 없이 결코 지금 이순간까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매를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심으로 징계를 참아주시는 주님, 이것이 ‘주의 긍휼’ 아니겠습니까? 감사드릴뿐이지요. 그래서 곁길로 갔다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분께 신속히 돌이키면 우선 안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은 돌이키는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동시에 이것도 마음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진노하기를 늦추시고 기다려주실 뿐이지, 우리가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강퍅한 마음을 계속가진다면 결국 주님의 징계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마음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볼때 큰 전환점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돌이킨후가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를 만난후부터 바로 주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의심많은 도마가 전과 후의 고백이 다릅니다.
(요 20:25)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였으나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분의 두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분 옆구리에 넣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요 20:27)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28) “도마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매”
우리가 곁길갔을때와 주님을 다시 만났을때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 했던 영이 다시 소망을 가질수 있다는 성경의 초대입니다.
주께서는 이시간도 믿음의 좋은 군사들이 빛을 발하여 일어나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허무의 자리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무능력의 자리에서, 두려움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시어 믿음으로 나아가 담대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실패 하셨습니까? 사망의 쏘는(sting) 것이 자꾸 나를 괴롭힙니까? 율법적으로 정죄감에 빠져 계십니까?
잠시 고개 드시고,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 보십시오. 그분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주의 보혈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 아뢰십시오. 피해가 안된다면, 부르짖으셔도 됩니다. 예배당이 아니여도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기도할수 있습니다.
다시 직무 수행할 영적인 능력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마귀에게 작은 틈도 주지 마십시오.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틈 탈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굳게 믿고 읽으며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세요.
그리고 새힘을 얻으시면 시간을 아껴서, 다시금 주의 일꾼으로 일하십시오. 나의 늘어진 팔과, 무릎이 힘을 얻어 굳세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까지 잠시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주를 다시 만나고 난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훗날에 우리 모두가 이런 고백으로 주께 영광돌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 -고전 15:58-
2015-09-16 12:56:58 | 김정호
맞아요~
달라졌어요를 시청하는 우리는 객관적이지만 당사자들은 주관적이라
제 모습을 보지 못하지요.
그래서 녹화된 장면을 보여주면 화들짝 놀라고 변화가 생기더군요.
그러기에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마음이 필요해요.
방어나 공격이나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는 전혀 해결이 안되요.
자기 고정관념이나 자기 생각을 다른 쪽에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2015-09-10 11:07:32 | 이수영
관계형성에 있어 객관적 관점에서 이해하기가 말처럼 쉽진 않지만
알고 노력한다면 좋은관계로 유지 발전하지 않을까..
깊이 공감이 가는 글 감사합니다.
2015-09-10 10:32:39 | 김상희
글을 읽으니 오래전 TV에 나왔던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라는
커피 CF 카피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다만 나의 사방 몇 미터라도 따뜻한 영적 온기를 발산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생활밀착형 교훈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 주는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2015-09-09 17:17:21 | 김대용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기자가 이르기를,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사무엘하 23:1-2)"
성경 속에 그 일생이 그려져 있는 모든 성도들 가운데, 특히 다윗은 다양하고 교훈적인 체험을 많이 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의 생애 속에서 옛날 다른 성도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시련과 유혹을 봅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그는 더욱더 우리 주 예수님의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거의 모든 계층과 환경에 속한 인간들이 겪는 고난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왕들은 왕들 나름대로의 시련이 있는 법인데 다윗은 바로 그 왕관을 썼던 사람입니다. 시골 농부는 또 농부 나름대로의 근심 걱정이 있는 법인데,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를 쳤던 사람입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은 또 많은 역경을 만나는 가운데 고난을 겪기 마련인데, 다윗은 엔게디 굴에 거한 적이 있던 사람입니다.
대장에게도 어려움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대장으로서 스루야의 아들들에게 심한 대접을 받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또 그의 친구들 가운데서도 어려움을 당하는데 바로 그의 조언자인 아히도벨이 그를 저버렸습니다. "참으로 내가 신뢰한 나의 친한 친구 곧 내 빵을 먹은 자가 자기 발꿈치를 들어 나를 대적하였나이다.(시 41:9)"
또 그의 가장 악한 원수들은 바로 집안 식구들이었습니다. 즉 그의 자녀들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가난과 부요함, 영광과 치욕, 건강과 약함 등 이런 것들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유혹들이 그에게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또 밖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유혹을 받았으며 안으로는 기쁨을 해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고난에서 벗어났는가 하면 곧 이어 또 다른 고난에 빠졌습니다. 한 가지 낙심과 놀라움을 겪고 일어나 정신을 차렸는가 하면 또다시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모든 파도가 덮쳐 왔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때문에 시련과 고난 받는 성도들이 다윗의 시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떻든, 너무 기쁨에 넘치든, 낙심하여 우울증에 빠져 있든, 아무튼 다윗은 우리의 그런 기분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우리도 여러 해 동안 그 말씀에서 배움을 얻으며 은혜 안에서 자라다보면 다윗의 시를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요, 그 시들이 "푸른 초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 23:4)"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09-08 20:29:53 | 박진태
우연히 새터민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이 장사를 하는 장면을 TV에서 보게 되었어요.
영업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새터민 청년은 도무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를 못하자
“아니 장마당(시장)에서 장사를 했었다면서?”
남한 청년이 묻자
“북한에선 나무를 해오면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서 그 자리에서 다 사갔어”
라고 대답합니다.
워낙에 물자가 부족하니 시장에 나가기만 하면 호객하지 않아도,
할 필요도 없이 다 팔렸다는 것이지요.
작은 레스토랑에서 영업을 해보는 날이었는데
남한 청년이 리더를 맡은 날,
먼저 토의를 하느라 반나절이 지나자 새터민 청년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어요.
“결론도 안 나는 토의만 하지 말고 직접 부딪쳐야 되지 아까운 시간만 낭비지”
남한 청년들은
“일단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토의하고 부딪쳐야지 무작정 할 수는 없어”
결국 소득 없이 하루를 마감했어요.
다음 날은 새터민 중 한 사람이 리더를 맡은 날, 군인이었던 청년이 리더가 되자
“너는 뭐 하고, 너는 이것하고, 너는 이리 만들라”
군인이었던 전력?이 발휘되어 명령조로 일을 분담시켰지요.
남한 청년들은 의사소통도 없이 명령식으로 일을 시키는 것에 불만을 표했고요.
결국 그날도 수확은 없이 끝났지요.
남한 청년들이 일에 접근하는 방식과 새터민들이 접근하는 방식에 많은 차이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대로, 자기가 아는 대로 반응하게 되어 있지요.
리더가 되어 일을 해보니까 드러나지 않았던 저마다의 방식이 서로에게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지요.
셋 째날은 팀을 나누어 영업과 레스토랑 두 팀으로 나누어 드디어 성과를 얻는 것을
보았어요.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적극적이고 유연성이 있는 사고로 행동하는 청년을 보는 내 마음은 호의적이지만
소극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사고와 행동을 보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동안 무관심했던 새터민들의 어려움도 보게 되었고요.
그러나 이런 장면을 보면서 비단 이들 두 그룹만의 문제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환경으로 인해 습득된 경험이 그 사람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지요. 자기가 보고 겪고 아는 대로 반응하게 되거든요. 절대적이랄 만큼!
더욱이 군대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기관이기에 더욱 대비가 되어 보인 부분이 있지요.
주변에 오랫동안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사회생활을 하는 지인을 봐도
역시 명령에 익숙하게 반응하는 것이 보이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하라면 하지 왜 이리 말이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자기 의견을 내는 것을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으로 보는 시야가 느껴졌지요.
그들 중에서 특별히 친화적인 청년이 돋보였는데
물건을 팔기 위해 접근 하지만 사람들의 상태를 읽고 사람에게 필요한 따뜻한 말로
먼저 다가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새터민 청년도
“물건을 팔기위해 물건을 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 하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라고 말하더라고요.
따뜻한 사람이 모두에게 환영 받는 것이 당연하지요.
타고난 천성이야 바꾸기가 어렵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면 달라질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달라졌어요‘ 라는 부부 상담 프로그램을 봐도
첫 장면은 원수 같은 두 사람이 어떻게 한 집에서 살아 왔을까? 싶은데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이 되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고, 결국 원수처럼 으르렁 대는 것도
상대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역반응이었던 것을 알게 되지요.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도 남편을 사랑하고 걱정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아예 무관심하면, 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으니 잔소리도 안하게 되죠.
남자들의 성향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반응을 하고
여자들의 성향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기를 원하기에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지요.
아내가 “ 팔이 아파요” ( 관심을 갖고 대화를 원해요)
남편은 TV 보면서 “ 병원 가봐” (문제 해결) 로 끝내죠.
반면에 남편은 ‘ 이런 말 하면 또 꼬치꼬치 물을테고.... 에-이 귀찮아, 말하지 말자’
속 편-하게 말없는 남편 되죠.
오죽하면 부부 상담사가
남자는 여자가 말하면 “그랬어-” “ 그랬구나” “그래?”
그-삼총사 로 대꾸만 해줘도 일등 남편이 된다고 우스개로 말하지요.
여자들은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공감을 원하고
남자들은 “길게 말하지 말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여자는 말이 너무 많아’- 문제 해결만을 원하니
오죽하면 금성과 화성 출신들이란 말이 나왔을까 싶지요.
무엇이든 전달하는 방식이 각자 다르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보니
같은 말이어도 감정적인 부분이 공감이 안 되어 서로 오해하고 놓치고 사는 것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형성된 사고들이 다르고, 경험이 각자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에 서로가 다른 부분들에 대해 시간을 들여 교제하고 마음을 드러내는 일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부부, 가족, 친구, 동료, 사회생활에서 더욱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15-09-08 11:21:27 | 이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