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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령 형제님! 다음에는 간단 명료한 질문이나 글로 서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시죠! 머리에서 쥐나는 줄 알았습니다 온 몸을 비틀어 가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다보니 스팀이 올라오면서 내가 왜 이글을 읽고 있어야 하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글로 고문당하는 느낌을 살짝 경험하면서 끝을 보았습니다. ㅎ~~~~~ 잘 모르는 박무령형제님에 대한 매너로 읽기는 다 읽었습니다.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얼나마 될까? 안타깝다! 어떻게 생각하냐의 대답으로는 사사로이 해석한 것 같아 보입니다. 라고 견해를 밝힙니다. 그 외에는 아무생각도 안납니다. ^^ 박무령 형제님! 성경공부 잘 하시되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시고 사이트안에 있는 여러 자료와 말씀들을 잘 들어서 좋은 결실얻기를 바랍니다. 샬롬!
2013-11-08 01:40:50 | 노영기
박무령 형제님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이런 질문을 하실때는 지금 덧글을 다신 것처럼 질문을 하게된 배경을 먼저 소개 하시고, 질문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런 목적 등을 밝혀 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 공간이다 보니,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글만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 평안하세요^^
2013-11-07 21:05:22 | 오광일
먼저 제가 올린 글을 통해 불쾌감을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동수 목사님께서 강의하신 야고보서 2장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을 무렵 어느날 인터넷에서 이화영 목사님의 해석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 지식이 짧았던 저는 정동수 목사님과 이화영 목사님의 대립되는 해석에 대해 고민해 오다가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서 결론을 내는데 도움을 얻고 싶었습니다. 제가 올린 글에 대해 불편해 하시는 분이 계셔서 삭제를 하려고 했지만 삭제가 불가능 했습니다. 제가 올린 글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7 15:26:28 | 박무령
박무령님.. 질문하신 내용에 답글은 달아드렸지만, 이런 작업이 결코 쉬운것은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쑥 이러이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런식의 질문은 ...마음을 많이 어렵게 합니다.(질문내용이 어려운게 아니라)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가 '~~지식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의와 상식을 가지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3-11-07 11:22:53 | 오광일
긴 글을 세세히 읽으시고 다른 분들을 위해 요약정리 해주신 오광일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위 인용된 글을 쓰신 목사님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어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읽는 게시판이니 다른 분들도 참조하시라는 의미에서 교회와 신앙의 기사를 링크해 올립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472 더불어 윗글을 쓰신 목사님께서 교단을 나와 몸을 의탁했다는 예OO 박사님이라는 분은 과거에 제가 하던 일과 관련되어 조금 알던 분입니다. 이 분이 어떤 인물인지도 아래 기사로 충분히 설명될 것입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66 우리 모두에게 바른 분별력이 견고하게 유지되길 소망합니다.
2013-11-07 11:01:13 | 김대용
샬롬! 긴 글에서 핵심 내용을 요약해 보면... 1.본문의 문맥(야고보서1,2장)을 볼 때 본문의 ‘행함’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명백하다. 이런 문맥을 볼 때 야고보 선생이 야고보서 1장에서 말한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약 1:12, 25)을 야고보서 2장에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바꿔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선생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두 말을 줄여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야고보 선생의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야고보서 2장 14절의 구원을 영의 구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2.필자는 즉시 야고보서를 펴서 본문의 문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었다! 필자는 즉시 빌립보서 2장 12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내친김에 히브리서 6장 4-8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크게 놀란 필자는 오랫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은 ‘복과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줌. (창 15:3-6)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서(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일(영혼구원을 받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 [ 감상평 ] 1. 성경을 연구하고 올바른 것들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는 칭찬해 드립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이 아닌 개역성경으로 글을 쓰셨네요. 교과서가 올바르지 않으면, 거기에서 나오는 내용도 올바르지 못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복” 과 “상”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본인이 원하는 결론에 맞춰서 해석을 유도하면 안됩니다. 2. 야고보서의 구원을 “복과 상 받는 것”으로 단정지으셨는데, 이런 식의 접근은 대단히 위험한 추론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이단 교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 구절을 들어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입증하려고 하셨지만, {불행히도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필자(이화영 목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라는 식의 겸손하지 못한 말까지 하신걸 보니 많이 염려가 됩니다. 3. “성경에서 몇 천년 동안 몰랐던 것을 본인만 깨달았다.” 이런 말 하는 사람 치고 온전한 사람 본적이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이단 교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통해 볼 때 늘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기독교 신앙의 교과서인 성경 문제가 해결되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 됩니다. ----------------------------------------------------------------------------- [야고보서 핵심 요약]- 정동수 목사님께서 “야고보서 오해 풀기” 라는 제목으로 강해해 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밝힙니다. 야고보서는 크리스천 삶에 대한 강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책들과는 달리 야고보서에는 신학적, 교리적 내용을 많이는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교리적 오류를 바로 잡거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대로 살 것을 촉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약1:22,3:13) (1)긍정적인 믿음 a.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약2:18)/ 행위와 함께 일하는 믿음(약2:22) b. 아브라함의 믿음: 창15장, 창22장. 그가 구원받은 뒤에 그의 행위가 그의 믿음을 확증함 (2)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란? 율법행위가 아니라 선한 행위를 의미함. 즉 구원 이후에 삶속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합당한 행위(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나와야 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올바른 크리스천의 믿음이 아니다. 마땅히 나와야 할 합당한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봐야할 지도 모른다. (3) 의롭게 됨의 의미 성경의 두 용례 a.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칭의)-롬3:28, 롬4:2 b. 사람이나 하나님이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 정당성을 인정 받는 것, 옳다고 인정 받는 것(딤전3:16, 롬3:4, 마11:19)- 약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은 두 번째 의미의 의롭게 됨을 뜻한다. 감사합니다.
2013-11-07 01:26:43 | 오광일
안녕하세요. 이화영 목사님께서 쓰신 글인데요. 여러분들은 이 분의 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깨달은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구원’이란 단어를 명사는 주로 ‘소테리아(swthriva)’를 사용했고, 동사는 주로 ‘소조(swv/zw)’를 사용했다. 이것이 잘 나타난 구절이 사도행전 12절이다.   (행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소테리아)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소조)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성경 기자들이 ‘소테리아’와 ‘소조’를 다양하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1) 성경 기자들은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행 16: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소조)을 받으리라 하고   본문에 사용된 ‘구원’이란 단어는 ‘영혼구원’을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경 기자들은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신약성경 기자들은 신자의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딤후 4: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소조)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바울 사도의 말이다. 그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생명(영생)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님이 나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볼 때 본문의 구원이 그의 육체가 죽을 때 그의 영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신약성경 기자들은 신자의 육체가 부활해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에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히 9: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소테리아)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중생한 신자들의 육체를 부활시켜서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다.     4) 신약성경 기자들은 ‘땅에서 복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행 27: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소조)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본문은 바울 사도가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서 배를 타고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 때 큰 풍랑으로 인해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로마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죄수들을 모두 죽이자”고 백부장(지휘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살리기 위해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에 상륙하라”고 명령했다. 성경은 이것을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부하들이 죄수들을 살해하려는 뜻을 막았다”고 표현했다. 본문에 사용된 ‘구원’이란 단어가 사람의 영을 구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소조(swv/zw)’다. 바울 사도는 오래 전에 예수님을 믿어서 영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불신자인 백부장에게는 바울 사도의 영을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 사람의 영을 구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따라서 본문의 구원이 바울 사도의 육체를 구원해주는 것(목숨을 구원해주는 것-육체가 복을 받는 것)을 뜻하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소개한 성경말씀에 기록된 ‘구원’도 ‘육체가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행 27: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소조)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행 27:30-31)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소조)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행 27:33-34)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소테리아)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은 성경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원: 하나님의 은혜, 또는 그 긍휼하심에 의해 사단의 세력과 죄로 인한 멸망에서 구해내는 일. 성서 중에도 종교적 의미가 아니고, 재해, 불행, 외적(外敵)등에서의 구원의 용례(用例)를 보게 된다(히 11:7, 시 34:6, 출 14:13, 신 20:4, 눅 1:71, 행 7:25). 또한 신약에는 병에서 ‘고침을 받는다’는 표현을 ‘구원되었다’는 의미의 말로 쓴 경우도 있다(마 9:22, 약 5:15, 막 6:56).”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은 ‘죄에서 영을 건져주는 구원’과 ‘재해와 질병과 외적으로부터 육체를 건져주는 구원’만 소개했다. 하지만 성경 기자들은 ‘구원’이란 단어를 또 다른 경우에도 사용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성경의 구원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5) 신약성경 기자들은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신약성경 기자들이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것을 깨닫는 것이 성경의 구원을 바르게 깨닫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위구원론을 주장했다. 그 결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서신서는 야고보서, 빌립보서, 히브리서, 베드로서 등이다. 하지만 본 장에서는 지면 관계상 야고보서를 통해서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사실만 확인하도록 하겠다.   (약 2: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소조)하겠느냐   지난 2천여 년 동안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본문의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영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까닭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야고보서를 근거로 기세 좋게 “중생한 신자도 큰 죄(혹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은혜구원을 믿는 신자들은 야고보서 때문에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것은 유명하다. 권연경 교수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잘 알려진 대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신약의 일부로 인정하기를 주저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 비교해 볼 때, 복음적 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야고보서의 칭의론이 바울의 칭의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며 그는 ‘어느 누구라도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박사모를 그에게 씌워주고, 그가 나를 바보라 부를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했다.”   개혁파 신학자 켄달 박사는 그의 저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에서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루터는 기껏해야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간주하였고, 그가 죽기 불과 1, 2년 전에는 ‘비텐베르그대학에서 야고보서를 가르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하던 대부분의 은혜구원론자들은 “야고보서는 진짜 신자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도리를 가르친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종합주석은 야고보서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야고보서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있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 외에 인간의 행위가 덧붙여져야 한다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원설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다만 진실된 믿음에는 행함이 수반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야고보서 2장 14절을 바르게 깨닫기 전까지는 야고보서 2장 14절이 말하는 구원이 영혼구원인 줄 알았다. 이 때문에 필자는 본서를 집필하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증언했는데, 어째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증언한 것일까?’   필자는 오랫동안 이 숙제를 풀지 못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나님이 갑자기 야고보서 1장 25절이 생각나게 해 주셨다!   (약 1: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필자는 즉시 야고보서를 펴서 본문의 문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었다! 필자는 즉시 빌립보서 2장 12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내친김에 히브리서 6장 4-8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크게 놀란 필자는 오랫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은 ‘복과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이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소개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과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첫 번째 증거는 야고보서 1장에 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선생은 시험을 당하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율법을 잘 지켜서) 생명의 면류관(상)을 받게 하고, 복을 받게 하려고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약 1: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상-필자 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 1: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본문의 ‘자유롭게’란 단어는 ‘엘류데리아(ejleuqeriva)’다. 디럭스바이블 헬라어사전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엘류데리아: (합법적이거나 방탕한, 주로 도덕적으로 혹은 의례적으로) ‘자유’. <고전 10:29> 여명. liberty; 1)구원과 관계없는 것을 하거나 안 해도 되는 자유. 2)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할 자유, 권리. 3)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사는 자유, 진정한 자유.”   이 해석을 볼 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신자가 영혼구원을 받기 위해서 강제로(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을 의미하지 않고, ‘신자가 복과 상을 받기 위해서 자원해서 지켜야 하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고보 선생은 야고보서 1장에 이어 야고보서 2장에서도 신자가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했다.   (약 2:8-9)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약 2:12-14)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소조)하겠느냐   본문의 문맥을 볼 때 본문의 ‘행함’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명백하다. 이런 문맥을 볼 때 야고보 선생이 야고보서 1장에서 말한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약 1:12, 25)을 야고보서 2장에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바꿔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선생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두 말을 줄여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야고보 선생의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야고보서 2장 14절의 구원을 영의 구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성도들이 지옥의 공포에 시달린 것이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두 번째 증거는 야고보가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서 구원을 설명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부터 보자.   (약 2: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친 사건을 근거로 “신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신자도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거나, “아브라함처럼 사는 신자만 진짜 신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이 명백한 오류인 것은 창세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창 22:16-17)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들을 바쳐서 영혼구원을 받았는가? 전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들을 바쳐서 큰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쳐서 큰 복만 받았겠는가? 당연히 하늘의 상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충성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큰 상을 주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사람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다’는 뜻인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것을 예로 든 후에 라합이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사실을 예로 들었다.   (약 2: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이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어서 큰 복을 받은 것은 여호수아서와 다른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그 일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하는 복과 유다지파의 살몬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는 복과 다윗왕의 고조모가 되는 복을 받았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어서 큰 복만 받았겠는가? 그녀 역시 아브라함처럼 큰 상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들어서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다만 야고보가 “라합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았다”는 말을 줄여서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 당시의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야고보의 표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히브리서 11장에 있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은 사람들의 예를 들어달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께 충성하면 상을 받는 진리를 설명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은 신자들의 대표자는 모세일 것이다.   (히 11:24-26)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는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처럼 큰 고난을 감수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신약시대의 신자들도 모세처럼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아서 방주를 지을 수 있었다”고 했고(히 11:7), “아브라함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고 했다(히 11:8-10). 이렇게 믿음의 위인들이 상 주심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충성한 사실을 소개하던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 11: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 말은 ‘아브라함도 모세처럼 상 주심을 바라보며 외아들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상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충성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와 야고보서 기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복을 받은 사건을 근거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복과 상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다만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복과 상을 받는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한편 야고보서 기자와 히브리서 기자는 동일하게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도 행함으로 상을 받은 신자의 표본으로 소개했다.   (약 2: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히 11: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와 야고보서 기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다만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의롭게 된다)”고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이것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아브라함부터 보자.   (창 15:3-6)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서(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일(영혼구원을 받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롬 4:2-3)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처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동일하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것과 그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증언한다.   라합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여호수아서는 라합이 영혼구원을 받은 시점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수 2: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서 영혼구원을 받았다. 이 때의 라합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다. 이처럼 라합도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았다!   야고보서 2장 22절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창세기 본문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창 22: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기 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했다. 하지만 이삭을 바치기 전에는 하나님이 인정할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큰 복과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을 인정해 주셨다. 야고보는 이것을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성결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성기호 박사는 필자의 야고보서 해석을 읽은 후에 메일로 다음과 같은 평을 보내주었다.   “이화영 목사님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셨군요. 구원이란 의미가 다양함도 잘 지적하셨고요.”   어떤 목회자는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보내주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방금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정말 구원에 관한 독보적인 해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도하시고, 몸부림쳐서 받아낸 명쾌한 말씀입니다. 영혼구원과 복과 상급에 대한 구원을 발견하신 목사님은 행복자십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했던 루터가 목사님을 만나셨다면 아마도 큰 절을 하셨을 것입니다.”   필자의 책을 호평해 준 성기호 박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한다.   성경에 해박한 신자들은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의 구원론 난해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한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잘 모르지만 교단의 교리를 맹신하지 않는 신자들은 베뢰아 사람들처럼 지혜롭게 처신할 것이다.   (행 17:11-12)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부언 야고보서의 본뜻을 깨달은 것으로 판단하는 필자는 오랫동안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마르틴 루터 신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오죽 답답했으면 “나에게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조화시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내 박사모자를 씌워주고 ‘나를 바보라고 부르라’고 하겠다”고 약속했겠는가? 모르긴 해도 마르틴 루터 신부가 필자의 야고보서 해석을 가장 기뻐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 때문에 필자는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뵌 후에 가장 먼저 마르틴 루터 신부를 만나보고 싶다.     *에피소드 필자가 본서의 초판을 출판하자, 필자가 소속한 노회원들 중의 일부가 필자의 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필자가 400년이 넘도록 진리로 믿어져 온 칼빈주의 구원론을 개혁했고, 그 때까지는 필자의 구원론이 충분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들 중의 강경파들이 필자와 함께 진지하게 성경의 구원을 연구하기를 거부하고, 무조건 필자에게 필자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 점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교수님의 평가를 믿는다”고 주장하며 필자의 주장을 무조건 묵살했다. 새로운 사상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는 현상에 관해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마 13:57) 천명하셨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운동은 무엇이든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맨 먼저 반발을 받게 되는 법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은 그들이 소속한 천주교회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고, 예수님의 사상은 주님과 한 민족인 유대인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다. 이처럼 필자의 구원론은 필자가 소속한 노회원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다! 필자는 필자의 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위임받은 노회원들에게 “부실한 초판을 회수하고, 교단신문에 사과광고를 내겠지만 초판을 보완한 증보판은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계속 그런 입장을 고수하자, 연구위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초판을 회수해서 처분하고, 교단신문에 사과광고를 게재했다. 하지만 얼마 못되어서 노회원들은 필자의 증보된 책이 인터넷 서점에 보급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경파들을 또다시 필자에게 그 책의 철회를 요구했다. 반면 온건파들은 필자에게 “양보할 것”을 간청했다. 어느 날 노회가 열렸다. 그러자 필자의 책 문제로 인해서 회의가 몇 시간동안 공전되었다. 필자를 아끼는 목회자들과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장로는 필자에게 양보할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에 부담을 느낀 필자는 마음이 약해져서 “나의 주장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노회원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그렇게 해서 노회가 끝났다. 필자는 매우 섭섭했지만, 그 때 모든 일이 마무리 된 줄 알았다! 하지만 필자가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터졌다. 필자와 함께 오던 어떤 목회자가 휴게소에서 필자에게 음료수를 사 주었는데, 그 음료수를 마신 후에 필자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약 20분 후에 필자의 얼굴은 E. T처럼 변했고, 온몸이 축 늘어졌고, 두 눈이 완전히 실명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필자는 즉시 필자의 죄를 회개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깨닫게 해 주신 진리를 부인한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금방 죽거나, 최소한 불구자가 될 것 같던 필자의 몸이 불과 1-2분 안에 정상이 되었다! 하지만 믿음이 작은 필자는 그 후에 제비뽑기로 한 번 더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다. 아내와 함께 ‘주장철회’, ‘계속주장’을 적은 종이를 봉투에 넣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았다. 한 번 뽑았는데 ‘계속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기드온의 양털 시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제비를 뽑았다. 그래도 ‘계속주장’이 나왔다. 그 때부터 필자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교단에서 쫓겨나는 일을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줄기차게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신 구원론을 전파하고 있다! 필자가 애정을 가지고 섬기던 교단에서 쫓겨날 때 필자에게는 필자를 쫓아낸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가 충만했다. 머리로는 그들을 용서해야 할 것을 아는데도 마음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교단에서 쫓겨난 필자를 양촌치유센터로 인도해 주셨다. 필자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내적치유와 축사사역을 받았다. 그 때 필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고, 필자 속에 들어있던 악한 영들을 추방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필자를 쫓아낸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가 사라져 버렸다.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진정으로 그들을 축복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필자 부부는 양촌치유센터의 치영원에서 내적치유사역과 축사사역을 공부했다. 양촌치유센터의 원장인 김종주 박사는 필자 부부를 양촌치유센터의 전인치유사역자로 세워주었다. 마음의 상처와 악령들 때문에 고생하는 내담자들을 치유하는 일은 필자 부부에게 전에 맞볼 수 없었던 커다란 보람을 안겨주고 있다. 몇 년, 마음의 상처와 악령들 때문에 혹은 몇 십 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던 내담자들이 2박 3일 간의 전인치유를 받은 후에 천국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황송하게도 어떤 내담자들은 필자에게 큰 절을 하기도 하고, 필자를 ‘생명의 은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느 날 필자는 라이프신학교 총장인 예영수 박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때 필자는 예 박사에게 필자의 저서 [이것이 구원이다]를 선물했다. 며칠 후에 예 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책을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며 “목사님이 쓴 다른 책들도 보내 달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필자는 예 박사에게 필자의 다른 저서들을 보냈다. 몇 주 후에 예영수 박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것이 구원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며 “꼭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몇 주 후에 필자는 예영수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또 다시 책에 관한 칭찬을 한 후에 “도대체 어떤 교단에서 그렇게 잘 쓴 책들을 문제 삼아서 목사님을 쫓아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필자가 초판을 부실하게 써서 오해가 발생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설명했다. 예 박사는 “이 책을 학위논문으로 발표하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예영수 박사와 그가 대표회장으로 있는 교단(사단법인 국제교회선교연합회-독립교회연합회)의 임원들은 필자를 그 교단의 목사로 받아주었다. 이에 필자는 지면을 빌어서 필자의 책을 인정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를 목사로 인정해 준 예영수 박사와 교단의 임원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필자는 현재 양촌치유센터에서 전인치유 강의와 전인치유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설교와 강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필자의 기도제목 중의 하나는 본서를 전국의 서점에 보급하는 날이 오는 것과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본서를 강의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본서에 공감하는 독자들의 기도후원을 부탁하는 바이다.   혹시라도 필자를 교단에서 축출한 목회자들 중에서 그 일을 후회하는 이들이 있다면(그런 목회자가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필자는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했던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창 45: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어느 날 필자는 유투브에서 온 몸에 55%이상에 3도 화상을 입어서 몸과 얼굴이 크게 상한 이지선 자매의 간증 동영상을 보았다. 그 때 그 자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만일 당신이 예전의 얼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그 때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수많은 어려운 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필자는 필자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옛날에 목회할 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겠는가?” 예전에 필자가 자립하는 교회에서 훌륭한 성도들과 함께 재미있게 목회를 했기 때문에 그 때로 돌아갈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필자의 절대적인 마음은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때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기쁘고 보람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물론, 지금보다도 훨씬 더 무능한 종으로 일생을 끝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ttbb?Redirect=Log&logNo=110166677667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2013-11-06 21:36:02 | 박무령
오광일 형제님과 김대용 형제님의 섬김에 항상 고마운 마음입니다. 욥기는 이해하고 깨닫기 쉽지 않아 다소 어려움이 있는데 이렇게 명료하고 분명하게 가르치시니 알찬 공부가 되네요. '항상 하나님 안에서 바른 길로 행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부단히 스스로의 지각을 훈련하자'는 권면의 말씀이 차분히 마음에 다가오네요. 혹시 나도 말씀을 사용하여 그럴듯이 자신을 포장하고 있지않나 돌아보게 되네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려야 할것 같아요. "어떤 일도 다툼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생각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각 사람이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각 사람이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ㅡ 빌립보서 2장 3~4
2013-11-06 18:35:42 | 이춘옥
이렇게 질문으로 홈페이지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광일 형제님의 적절한 답변이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도움을 드리고자 답변을 보충하겠습니다. 1. 먼저, 사무엘기상 28장에 등장하는 영매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대략 4가지입니다. ①사무엘의 참 모습이 아니라 사울의 상상이나 환상이라는 것, ②사무엘로 변장한 악령일 것이라는 것, ③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하심으로 마귀가 사무엘로 잠깐 변신한 것, ④실제 죽음으로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땅속 낙원에 있던 사무엘의 혼이라는 견해 등 네 가지입니다. 이 네 가지 견해를 접하며 두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영매가 사무엘의 혼을 불러올리는 과정에서 심히 놀랐다는 것입니다.(삼상28:12) 이것은 영매가 사무엘의 혼을 접하고 자신이 그동안 접했던 영적 세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권능을 느꼈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영매가 불러올린 사무엘의 혼이 대언한 내용이(삼상28:16~19) 사무엘기상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사울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 등 모든 내용이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것을 통해 사울의 상상이나 환상은 분명히 아니며 또한, 하나님께서 마귀 등을 사용하셔서 사무엘로 변장시켜 이런 일들을 대언하게 하셨고 그것을 성경 기록으로 남겨두셨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반 사항을 염두에 두시고 오광일 형제님께서 위에 링크해 주신 글을 읽으시면 의문이 풀리시리라 생각합니다. 2. 욥의 세 친구 중의 한 명인 엘리바스는 팔레스틴 동남쪽에 위치한 에돔의 도시 데만 출생입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지혜자와 철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욥의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이며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엘리바스는 데만 출신답게 치밀하고 명료한 사고력을 바탕으로 견고하고 풍부한 논리와 화려한 수사가 가득한 언변으로 듣는 이를 압도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욥기 4장과 5장을 읽노라면 이렇게나 다양한 지식이 축적된 오늘을 사는 독자라도 그의 화려한 언변과 치밀한 논증에 매료될만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장과 5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책망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얻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욥기 42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바스를 포함한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들을 하신 뒤에 주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 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오르나니 너희가 내 종 욥과 같이 나에 대하여 옳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욥42:7) 그렇다면 이토록 치밀한 논증가인 엘리바스가 어떻게 잘못된 생각과 주장에 빠지게 된 것일까요? 먼저, 엘리바스의 주장에는 두 가지의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엘리바스는 4장 7~8절을 통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환난과 고통은 오직 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5장 6절에 “고통은 티끌에서 생기지 아니하며 고난은 흙에서 솟아나지 아니할지라도”에서 무언가 욥이 원인(죄)을 심었으니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난이라는 싹이 돋아났을 것임을 화려한 수사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깊이 있는 논증을 고려할 때 그는 분명 웬만한 지식에 정통한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 널리 알려졌었을 ‘의인 아벨의 무고한 죽음’을 친구 욥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간과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무고한 욥의 고난이 사탄의 공격 때문이라는 사건의 원인을 모른다 해도 아벨의 무고한 죽음을 상고할 때 욥의 현재의 고난이 죄인이 그 죄의 대가를 치른다는 보편적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두 번째 문제는 욥의 친구로서 오랜 세월 욥을 지켜보았을 텐데도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해 축적되어 온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믿을 만한 자료들을 모두 폐기한 것입니다. 더불어 바로 이 순간 욥에게 닥친 엄청난 고난을 자신의 치우친 논리 안으로 짜 맞추기 위해 갑자기 욥을 사악한 인생을 살았던 죄인이요, 선한 척했지만 은밀한 죄를 간직한 위선자로 만드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언제나 사고와 논증의 과정은 자연스럽고 보편타당하며 공정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생각에 현재 상황을 억지로 끼어 맞추기 위해 논리를 비약하면 공정하지 못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지성인의 이런 비뚤어진 사고과정이 더욱 위험한 것은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오류를 그럴싸하게 포장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오판으로 빠지게 할 능력이 있기때문입니다. 바로 욥기 4장 5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변론이 이런 예의 전형입니다. 5장 후반의 엘리바스의 말을 읽자면 제법 하나님의 대언자의 선포인 양 권위가 넘치고 기품이 흐릅니다. 사실 그 내용만 떼어내어 보자면 온당한 부분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위에 결론을 말씀드렸듯이 엘리바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호된 책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무고한 친구를 공격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옳지 않은 것을 설파했습니다.(욥42:7) 욥의 세 친구도 어떤 면에서는 선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지성을 악하게 사용해서 선한 친구를 공격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번제 헌물을 바치도록 하시고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욥42:8) 때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논쟁에는 양측 모두의 잘못이 동반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예리한 칼로 경계를 정확히 나누듯 선악 간의 분명한 판결을 내리십니다. 진리 안에 속한 구원받은 사람들 간에도 심한 논쟁과 의견 대립, 더 나아가 인신공격과 심지어 모함까지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 사이의 반복과 갈등이기에 서로의 주장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때로 성경 말씀이 동원되고 제법 듣는 사람을 설득시킬 신빙성 있는 논거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진리의 말씀으로 인간의 편견을 포장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모두 욥기를 읽으며 심지어 믿음의 사람들 간의 긴장관계와 대립 속에서도 바른 분별을 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쪽을 선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안에도 언제든 분쟁과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양쪽 모두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인 것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합한 바른길은 명료하고 단순하며 자연스러운 쪽이며 오랜 세월을 통해 검증되었다는 것입니다. 판단이 잘못된 쪽일수록 성급하게 내세운 궁색한 자신의 의견을 정립하기 위해 복잡다단하며 현란한 논리로 무장하게 마련입니다. 항상 하나님 안에서 바른길로 행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부단히 스스로의 지각을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싸늘해지는 날씨 속에서도 강건하시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6 02:05:30 | 김대용
샬롬! 1번 질문에 대한 내용들은 keepbible에 구글 검색을 통해서 많은 내용들을 확인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활용해 보세요. 영매가 죽은 사람을 불러올 수 있나요?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26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07#c_
2013-11-06 00:52:23 | 오광일
1.사무엘기상28장3절 이하에 점치는 여자가 사무엘을 불러 내는데, 하나님의 사람이영매의 부름에 나타날 수 있는지요? 14절이하 사무엘이 나타나는데 진짜 사무엘인지,사무엘 모습한 다른 영인지 ? 2.욥기4장-5장에 걸쳐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죄를 지어 징계를 받는다고 질책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인지,엘리바스가 스스로 욥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
2013-11-05 17:56:33 | 김한옥
7080부부 아니면 나올수 없는 순발력이 부럽습니다. 옛날 아이들 데리고 교제 다니던 생각도 나구요... 뛰어난 솜씨로 동영상까지 만들어 주신 손길에 감사드려요. 제목 클릭하며 바리톤 목소리로 노래가 흘러 나오나? 했네요 ㅎㅎ
2013-11-05 15:47:14 | 김혜순
샬롬! 위에서 여러 지체분들이 설명하신 것처럼... 어떤 기도단이 (마치 성가대, 찬양대..처럼) 특정 조직원이 활동하는 것 같은 그런 조직은 구체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교회와 성도들, 이 나라와 성경사역 등을 위해 기도하는 줄로 알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게시판에 글을 올리실 때는 ...특별히 어떤 것에 대해 질문 혹은 의문사항이 있으실 때는 질문을 하게된 배경과 왜 그런 것들이 궁금한지에 대한 구체적은 언급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뜬금없이 ()()지식인에 질문글 올리듯이 글을 올리면..답변을 쓰기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질문하신분의 의도를 오해하는 답글이 올라 올수도 있구요. 모든 것을 질서 정연하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하세요^^
2013-11-05 01:06:12 | 오광일
사랑침례교회 오광일 형제입니다. 요르단...세계지리 시간에 잠깐 들었던 기억 말고는 생소한 나라에서 주님을 사모하는 자매님 ...!! 진리는 어느곳, 어느 때에나 동일 하게 역사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동역자분들이 요르단 지역에도 생기길 기도합니다.!!
2013-11-05 00:55:41 | 오광일
샬롬! WCC 실체를 알게되셨다면... 더이상 망설이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지 않을 까요? 살후2:10...(중략)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 1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12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 물론 위 말씀이 적용되는 시점이 지금은 아니지만 이 말씀에서 지혜와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WCC를 추종(겉으로든 혹은 중립적이든 관계없이)하는 자체가 이미 본인이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는 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할까요? 살후3:1-5에 그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말씀을 정리해보면... 배도하는 한국 교계의 해결책!! 1)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와 같이 자유로운 행로를 가져 영광스럽게 되어야 함. [ 온전히 보존되어 우리글로 손에 들려주신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으로 잘못된 교리의 뿌리들을 모두 파내고 올바른 교리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더욱 자유로운 행로를 가지고 한국말을 쓰는 우리 민족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그 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2. 또 우리가 부당하고 사악한 자들에게서 건져지도록 기도하라.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아니하니라.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성경을 갖고 있다 하여도 사악한 무리, 사탄의 무리들은 눈에 불을 키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간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올바른 성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올바른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성경을 소유하고 있으니 나는 올바른 자이다 라는 환상은 대단히 위험하겠지요.] 3. 그러나 주께서는 신실하사 너희를 굳게 세우시며 악으로부터 너희를 지키시리라. [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실 것이니, WCC아니라 그보다 더 무서운 세력들이 있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다만 우리가 "너희"라는 단어에 해당되는 사람이어야 하겠지요.] 4. 명령하는 내용들을 행하고 행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 [행위 구원이 아니라. 진리안에서 진리에 입각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5. 하나님을 사랑하고 , 인내하고,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 이 배도의 시기에 우리가 할일이 뭐 있겠습니까?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시대의 죄들에 대해서는 담대해 주님의 마음으로 경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잘 안듣고 무시하고 오히려 경고의 나팔수들을 역공격할 거라 뻔히 예상됩니다. 인내해야겠지요. 주님 다시오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힘을 내시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께서 주시길 기원합니다.
2013-11-04 00:02:48 | 오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