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설교원고를 읽는 듯한 착각을 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는 귀한 글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종종 유익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샬롬^^^
2015-09-17 09:20:06 | 김영익
'자기 담대함' '자기 쓴뿌리' '자기 정죄함'
이런 의미들에 대한 단상은 결코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단어들인 거 같아요.
이렇게 예리하고 구체적인 나눔을 통해 우리모두가 시험들거나 실족하는 일이 줄어들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인생은 좋은 일로 메꾸기에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이제 60을 바라보며 더욱 느껴집니다.
청원자매님 말대로 정말 성령충만한 글이네요.^^
2015-09-17 08:07:59 | 오혜미
우리 영생의 동지들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주님의 일꾼들로써 함께 나아가요.
정말 헛되지 않은 수고를 주님께 드리고 싶네요! 현제님의 뜬금 좋은 글에 감사해요~^^
2015-09-17 07:24:06 | 성호현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 -고전 15:58-
아멘아멘아멘입니다.
저도 장형제님처럼 본문에서 갈무리해 덧글에 옮겨봅니다.ㅎㅎ
김형제님, 언제 이렇게 좋은 글을 쓰셨는지요. 앞으로도 성령충만한 글 부탁드립니다.
2015-09-16 19:10:01 | 이청원
김정호형제님!
인생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펼쳐주시는 커다란 위로와 사랑을 일필로 단숨에 써 내려가며 귀한 은혜를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아래의 문장들이 특히나 용기와 힘을 가져다 주었기에 다시금 적어봅니다. 샬롬^^
1. 늘어진 저의 손과 무릎을 반드시 말씀으로 다시 굳게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주의 일을 사모하는 영에게 있어서 큰 구렁텅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당연히 매를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심으로 징계를 참아주시는 주님, 이것이 ‘주의 긍휼’ 아니겠습니까? 감사드릴뿐이지요. 그래서 곁길로 갔다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분께 신속히 돌이키면 우선 안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은 돌이키는자들을 기뻐하십니다.
3. 결코 마귀에게 작은 틈도 주지 마십시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틈 탈수 없습니다. 말씀을 굳게 믿고 읽으며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세요. 그리고 새힘을 얻으시면 시간을 아껴서, 다시금 주의 일꾼으로 일하십시오.
나의 늘어진팔과, 무릎이 힘을 얻어 굳세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까지 잠시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주를 다시 만나고 난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2015-09-16 15:58:24 | 장용철
“오늘 말씀 읽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 늘어진 저의 손과 무릎을 반드시 말씀으로 다시 굳게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주의 일을 사모하는 영에게 있어서 큰 구렁텅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직 우리를 건져 주시는 주[LORD]가 계시기에 글을 쓰면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딤전 3:13, 킹흠정)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좋은 지위를 얻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서 큰 담대함을 얻느니라.』
이제 신앙적으로 성숙단계에 오르셔서 주의 일꾼으로 일하시는 지체들, 특별히 집사의 직분을 맞고 계신 형제님들은 이미 어느 정도 믿음의 맛을 보았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성경적 근거로 보면, ‘믿음의 담대함’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늘 우리에게 동행하여 주실뿐 아니라, 일할 능력까지도 공급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하는 각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잘 감당하면 그 능력 공급하심과 믿음의 담대함이 더 클 것이고, 혹여나 적절히 감당했으면 거기에 걸맞은 믿음의 담대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분량만큼 주시는 것이기에 더 크다고 더 작다고 우리가 사람을 높이고 낮출수는 없겠지요. 우리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믿고, 일꾼으로 세우신 분께 감사드리거나 낙심한 지체에게 서로 위로하며 더욱더 말씀대로 지체를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주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 합니다. 오직 주께서만이 주의 일꾼들을 판단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의 군사들은 이제 앞으로 더욱 만군의 주께 더욱더 인정받는 좋은 일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혹여나 전쟁중에 부상을 당하거나, 고갈되었거나, 혹여나 곁길로 갔는지 서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곁길로 간’ 지체들을 위해서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혹여라도 이런 지체들에게 ‘다시 일어날 이유’가 있어서 더 나누어 보겠습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써의 일꾼들은 늘 대대장되신 주 예수님의 명령하심에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한일에 푹빠져서 자기의 자랑으로 자기도 모르게 가득채워지게 되면 믿음의 담대함이 아닌, ‘자기 담대함’으로 무엇이나 된 것처럼 우쭐 되는 행동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는 갑작스럽게 지체들에게 또는 목사에게서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인간적인 섭섭함을 듣게 되면 저 뒤로 움츠러들어 등껍질속에 감추어버린 거북이 같이 숨고 안나오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항상 기회를 봐서 교회를 떠날 생각만하게 되겠지요. 자기 하는 일에 부족하여서 아쉬움만 남는 것이 지나쳐서 정죄감에 빠져있게 되어 무능력하게 되는 경우도 곁길로 빠진 것이라 할수 있겠지요.
그 동안 교회에서 ‘자기 담대함’, ‘자기 쓴뿌리’, ‘자기 정죄함’으로 일한 오류들에 빠지게 된다면 주와 계속 멀어지게 되고, 직무 수행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 되고 감당치 못한것보다 오히려 안좋은쪽으로 결과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류들에 빠졌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럴 때마다 주께서는 그 일꾼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주께로 돌이킬수 있도록 깨달음과 참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심을 늘 감사드립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곁길로 갈 때 마다 돌이킬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고, 바로 매번 채찍질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성한대 없이 결코 지금 이순간까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매를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심으로 징계를 참아주시는 주님, 이것이 ‘주의 긍휼’ 아니겠습니까? 감사드릴뿐이지요. 그래서 곁길로 갔다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분께 신속히 돌이키면 우선 안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은 돌이키는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동시에 이것도 마음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진노하기를 늦추시고 기다려주실 뿐이지, 우리가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강퍅한 마음을 계속가진다면 결국 주님의 징계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마음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볼때 큰 전환점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돌이킨후가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를 만난후부터 바로 주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의심많은 도마가 전과 후의 고백이 다릅니다.
(요 20:25)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였으나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분의 두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분 옆구리에 넣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요 20:27)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28) “도마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매”
우리가 곁길갔을때와 주님을 다시 만났을때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 했던 영이 다시 소망을 가질수 있다는 성경의 초대입니다.
주께서는 이시간도 믿음의 좋은 군사들이 빛을 발하여 일어나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허무의 자리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무능력의 자리에서, 두려움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시어 믿음으로 나아가 담대함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실패 하셨습니까? 사망의 쏘는(sting) 것이 자꾸 나를 괴롭힙니까? 율법적으로 정죄감에 빠져 계십니까?
잠시 고개 드시고,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 보십시오. 그분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주의 보혈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 아뢰십시오. 피해가 안된다면, 부르짖으셔도 됩니다. 예배당이 아니여도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기도할수 있습니다.
다시 직무 수행할 영적인 능력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마귀에게 작은 틈도 주지 마십시오.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틈 탈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굳게 믿고 읽으며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세요.
그리고 새힘을 얻으시면 시간을 아껴서, 다시금 주의 일꾼으로 일하십시오. 나의 늘어진 팔과, 무릎이 힘을 얻어 굳세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까지 잠시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주를 다시 만나고 난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훗날에 우리 모두가 이런 고백으로 주께 영광돌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 -고전 15:58-
2015-09-16 12:56:58 | 김정호
맞아요~
달라졌어요를 시청하는 우리는 객관적이지만 당사자들은 주관적이라
제 모습을 보지 못하지요.
그래서 녹화된 장면을 보여주면 화들짝 놀라고 변화가 생기더군요.
그러기에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마음이 필요해요.
방어나 공격이나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는 전혀 해결이 안되요.
자기 고정관념이나 자기 생각을 다른 쪽에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2015-09-10 11:07:32 | 이수영
관계형성에 있어 객관적 관점에서 이해하기가 말처럼 쉽진 않지만
알고 노력한다면 좋은관계로 유지 발전하지 않을까..
깊이 공감이 가는 글 감사합니다.
2015-09-10 10:32:39 | 김상희
글을 읽으니 오래전 TV에 나왔던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라는
커피 CF 카피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다만 나의 사방 몇 미터라도 따뜻한 영적 온기를 발산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생활밀착형 교훈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 주는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2015-09-09 17:17:21 | 김대용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기자가 이르기를,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사무엘하 23:1-2)"
성경 속에 그 일생이 그려져 있는 모든 성도들 가운데, 특히 다윗은 다양하고 교훈적인 체험을 많이 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의 생애 속에서 옛날 다른 성도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시련과 유혹을 봅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그는 더욱더 우리 주 예수님의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거의 모든 계층과 환경에 속한 인간들이 겪는 고난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왕들은 왕들 나름대로의 시련이 있는 법인데 다윗은 바로 그 왕관을 썼던 사람입니다. 시골 농부는 또 농부 나름대로의 근심 걱정이 있는 법인데,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를 쳤던 사람입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은 또 많은 역경을 만나는 가운데 고난을 겪기 마련인데, 다윗은 엔게디 굴에 거한 적이 있던 사람입니다.
대장에게도 어려움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대장으로서 스루야의 아들들에게 심한 대접을 받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또 그의 친구들 가운데서도 어려움을 당하는데 바로 그의 조언자인 아히도벨이 그를 저버렸습니다. "참으로 내가 신뢰한 나의 친한 친구 곧 내 빵을 먹은 자가 자기 발꿈치를 들어 나를 대적하였나이다.(시 41:9)"
또 그의 가장 악한 원수들은 바로 집안 식구들이었습니다. 즉 그의 자녀들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가난과 부요함, 영광과 치욕, 건강과 약함 등 이런 것들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유혹들이 그에게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또 밖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유혹을 받았으며 안으로는 기쁨을 해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고난에서 벗어났는가 하면 곧 이어 또 다른 고난에 빠졌습니다. 한 가지 낙심과 놀라움을 겪고 일어나 정신을 차렸는가 하면 또다시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모든 파도가 덮쳐 왔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때문에 시련과 고난 받는 성도들이 다윗의 시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떻든, 너무 기쁨에 넘치든, 낙심하여 우울증에 빠져 있든, 아무튼 다윗은 우리의 그런 기분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우리도 여러 해 동안 그 말씀에서 배움을 얻으며 은혜 안에서 자라다보면 다윗의 시를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요, 그 시들이 "푸른 초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 23:4)"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09-08 20:29:53 | 박진태
우연히 새터민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이 장사를 하는 장면을 TV에서 보게 되었어요.
영업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새터민 청년은 도무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를 못하자
“아니 장마당(시장)에서 장사를 했었다면서?”
남한 청년이 묻자
“북한에선 나무를 해오면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서 그 자리에서 다 사갔어”
라고 대답합니다.
워낙에 물자가 부족하니 시장에 나가기만 하면 호객하지 않아도,
할 필요도 없이 다 팔렸다는 것이지요.
작은 레스토랑에서 영업을 해보는 날이었는데
남한 청년이 리더를 맡은 날,
먼저 토의를 하느라 반나절이 지나자 새터민 청년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어요.
“결론도 안 나는 토의만 하지 말고 직접 부딪쳐야 되지 아까운 시간만 낭비지”
남한 청년들은
“일단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토의하고 부딪쳐야지 무작정 할 수는 없어”
결국 소득 없이 하루를 마감했어요.
다음 날은 새터민 중 한 사람이 리더를 맡은 날, 군인이었던 청년이 리더가 되자
“너는 뭐 하고, 너는 이것하고, 너는 이리 만들라”
군인이었던 전력?이 발휘되어 명령조로 일을 분담시켰지요.
남한 청년들은 의사소통도 없이 명령식으로 일을 시키는 것에 불만을 표했고요.
결국 그날도 수확은 없이 끝났지요.
남한 청년들이 일에 접근하는 방식과 새터민들이 접근하는 방식에 많은 차이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대로, 자기가 아는 대로 반응하게 되어 있지요.
리더가 되어 일을 해보니까 드러나지 않았던 저마다의 방식이 서로에게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지요.
셋 째날은 팀을 나누어 영업과 레스토랑 두 팀으로 나누어 드디어 성과를 얻는 것을
보았어요.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적극적이고 유연성이 있는 사고로 행동하는 청년을 보는 내 마음은 호의적이지만
소극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사고와 행동을 보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동안 무관심했던 새터민들의 어려움도 보게 되었고요.
그러나 이런 장면을 보면서 비단 이들 두 그룹만의 문제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환경으로 인해 습득된 경험이 그 사람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지요. 자기가 보고 겪고 아는 대로 반응하게 되거든요. 절대적이랄 만큼!
더욱이 군대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기관이기에 더욱 대비가 되어 보인 부분이 있지요.
주변에 오랫동안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사회생활을 하는 지인을 봐도
역시 명령에 익숙하게 반응하는 것이 보이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하라면 하지 왜 이리 말이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자기 의견을 내는 것을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으로 보는 시야가 느껴졌지요.
그들 중에서 특별히 친화적인 청년이 돋보였는데
물건을 팔기 위해 접근 하지만 사람들의 상태를 읽고 사람에게 필요한 따뜻한 말로
먼저 다가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새터민 청년도
“물건을 팔기위해 물건을 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 하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라고 말하더라고요.
따뜻한 사람이 모두에게 환영 받는 것이 당연하지요.
타고난 천성이야 바꾸기가 어렵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면 달라질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달라졌어요‘ 라는 부부 상담 프로그램을 봐도
첫 장면은 원수 같은 두 사람이 어떻게 한 집에서 살아 왔을까? 싶은데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이 되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고, 결국 원수처럼 으르렁 대는 것도
상대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역반응이었던 것을 알게 되지요.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도 남편을 사랑하고 걱정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아예 무관심하면, 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으니 잔소리도 안하게 되죠.
남자들의 성향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반응을 하고
여자들의 성향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기를 원하기에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지요.
아내가 “ 팔이 아파요” ( 관심을 갖고 대화를 원해요)
남편은 TV 보면서 “ 병원 가봐” (문제 해결) 로 끝내죠.
반면에 남편은 ‘ 이런 말 하면 또 꼬치꼬치 물을테고.... 에-이 귀찮아, 말하지 말자’
속 편-하게 말없는 남편 되죠.
오죽하면 부부 상담사가
남자는 여자가 말하면 “그랬어-” “ 그랬구나” “그래?”
그-삼총사 로 대꾸만 해줘도 일등 남편이 된다고 우스개로 말하지요.
여자들은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공감을 원하고
남자들은 “길게 말하지 말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여자는 말이 너무 많아’- 문제 해결만을 원하니
오죽하면 금성과 화성 출신들이란 말이 나왔을까 싶지요.
무엇이든 전달하는 방식이 각자 다르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보니
같은 말이어도 감정적인 부분이 공감이 안 되어 서로 오해하고 놓치고 사는 것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형성된 사고들이 다르고, 경험이 각자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에 서로가 다른 부분들에 대해 시간을 들여 교제하고 마음을 드러내는 일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부부, 가족, 친구, 동료, 사회생활에서 더욱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15-09-08 11:21:27 | 이수영
이시대의 말씀의 부재로 부패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형제님의 마음을
공유하기 원하는 귀한 시를 읽으며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백배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09-04 02:11:20 | 김상희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명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2015-09-03 09:43:26 | 목영주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이때까지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2:27-28)"
본문에서 예수님처럼 우리는 자신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모든 슬픔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큰 슬픔이 당하게 되면, 그저 그것이 빨리 자나가기만을 바라지 말고, 예수님처럼 그 슬픔 가운데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슬픔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공은 우리를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에 빠뜨려서 영이 둔해지고 흐려지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성공하며 잘 풀리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슬픔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가식과 거품을 제거해서 자신의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을 대면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슬픔을 겪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슬픔은 웃음보다 나으니 이는 얼굴의 슬픔으로 인하여 마음이 더 나아지기 때문이라.(전 7:3)"
극심한 슬픔을 겪으면서 깨지고 변화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온전히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하며 그로부터 큰 위로를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극심한 슬픔을 견뎌 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슬픔을 이겨낸 사람은 누구보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2015-09-02 23:40:20 | 박진태
목민심서 등을 통해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세기의 천재 다산의 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네요.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세상을 부패시키는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다산의 시를 통해 다시금 절절하게 느낍니다.
진리를 깨달아 알고 있음에도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진리를 몰랐던 다산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저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하는 귀한 시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9-01 12:30:13 | 김대용
밴드 닉네임 때문인지 다산 정약용 선생보다 다산 정진철 형제님이 먼저 떠올랐네요~ ^^
220년 전 일이지만... 두 아이들 상황이 그려지면서... 이 아침에 마음이 울컥하네요..ㅜㅜ
형제님 말씀처럼 정말 절대빈곤은 이 나라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바른 말씀과 진리의 절대 빈곤 시기인 것 같아요... 건물 아닌 교회들이 해체되고...
이른 아침 많은 생각과 감사함을 느낄 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형제님~^^
2015-09-01 06:24:44 | 성호현
어떤 아이 둘이서 걸어가는데
동생은 쌍상투하고 누이는 묶은 머리 했네
동생은 말을 배울 나이고
누나는 다박머리 드리웠네
어미를 잃고 우는 저 두 갈래 길에서
붙잡고서 연유를 물으니
흐느껴 울며 말을 못하네
울면서 말하길, 아빠는 오래 전 떠났고
엄마는 짝 잃은 신세였어요
쌀독은 벌써 비어서
사흘이나 굶었어요
엄마는 저를 안고 흐느껴 울며
눈물 콧물 두 뺨에 얼룩졌어요
동생은 울면서 젖을 찾았지만
젖은 말라서 붙어버렸어요
엄마는 제 손을 잡고
이 젖먹이를 업고서
저 산골에 가서는
구걸하여 먹였어요
어시장에 이르러서는
제게 엿도 먹여줬어요
이 길까지 데리고 와서는
동생을 사슴 새끼 품듯 안고 잤어요
동생은 세상모른 채 잠이 들었고
저 역시 죽은 사람처럼 잠들었어요
문득 깨고 나서 보았더니
엄마는 여기 없었어요
말하다가 울다가
눈물 콧물 줄줄 흐르네
날 저물어 어두워지면
새들도 집을 찾는데
외로운 두 오누이
찾아갈 집이 없구나!
슬프다! 이 나라 백성들
하늘의 떳떳함마저 잃었구나!
지아비와 지어미가 사랑하지 못하고
엄마도 제 자식 돌보지 않네
옛날 내가 마패 갖고 암행어사 되었을 때
당시가 갑인년(甲寅年)이었는데
임금님 분부하셨지, 고아들을 보살펴서
고생 없게 하라고..,
모든 벼슬하는 관리들아!
이 말씀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 전, 조선후기. 절대빈곤으로 인하여 가족이 해체되는 지경을 한탄하며 다산(茶山)이 지은 시(時)입니다. 다행히 오늘날 이 시대에는 절대빈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말씀의 빈곤은 날로 더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또 마치 이 시가 오늘날의 기독교를 풍자하고 있는 듯해서 인지 시(時)를 읽고 또 다시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이 에려옵니다.
바른 말씀으로 많은 혼들이 회심하며,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 같은 소망을 품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혼들이 더해지길 원하는 마음에서, 다산 선생님의 시(時) 한 수와 함께 글을 공유해봅니다.
2015-08-31 23:32:26 | 김상진
사사기를 읽다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삿 2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모든 날 동안과 여호수아 보다 더 오래 산 장로들 곧 주께서 이스라엘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모든 날 동안 주를 섬겼더라.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 곧 자기들 주위
사방에 있던 백성의 신들을 따라가며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겨 주의 분노를 일으키므로 그들을 노략 자들의
손에 넘겨 주시고 또 사방에 있던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 그들을 파시니 그들이 더 이상 자기 원수들 앞에서 패하게
하셨으므로 크게 고통을 당하였더라. 삿 2 : 12-15
그러므로 많은 고통을 당한뒤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한 구출자를 일으키셔서 건져 내게 하셨으
니 곧 갈렙의 동생이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더라.
이 옷니엘의 부인은 갈렙의 딸 악사 였습니다.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빼앗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옷니엘이 그것을 빼앗아 승리함으로
가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게 되었습니다. 삿 1:12-13
평소에 갈렙이 자녀들 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와 긍정적인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걸어갔던 것을 보았음으로
신실하게 주만 바라고 그의 남편과 함께 살아 갔으므로 하나님께서 부페해가는 이스라엘을 그들을 통하여 건져
내셨던 것입니다 .
옷니엘도 주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싸운 용사이였지만 그의 아내가 많이 내조를 했기 때문에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는
때묻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나갔기 때문에 그들을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주의 영께서 그에게 임하셨음으로 그가 이스라엘을 재판 하였음으로 또 그가 나가서 싸울때에 주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그의 손이 구산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었고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 삿 3 :11
그러므로 옷니엘과 악사 부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사십년 동안 평안하게 살아 간 것을 보고 하나님이 들어 쓰시
기에 합당한 인물로 준비되어 있는 귀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가끔씩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저의 어머님의 신실하신 믿음으로 나를 길러 주셨기에 그래도 오늘날 이만큼이
라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신 그 어머니의 믿음을 보았기에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
앞으로 세상은 죄로 인해 더 혼탁해서 삶의 질이 떨어지고 문명의 발달로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살어 가는것
같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세상 향략에 도취되어 살게하는 죄악이 홍수 같이 휩쓸려 내려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 어떻게 내 자녀들이 주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신실하게 이 세상을 살어 갈것인가 ?
이런 생각을 가끔씩 해 봅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실하게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죄악의 홍수가 휩쓸려 와도 하나님의 손길이 너희들을 보호해 주신단다, 하는 말을 해주곤 합니다.
그래서 늘 주님께 기도 드립니다
우리들의 자녀가 손자들 까지 어려서 부터 하나님의 위대 하심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행하는
대로 복을 주시고 또한 행하는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면 하나님의 자녀로 늘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께닫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 합니다.
2015-08-30 07:45:47 | 윤정용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았사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시나이다.(시 73:22-23)"
아삽의 심정은 행복하게 보이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질투심에 불탔습니다. 결국 아삽은 착하게 살아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리게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는 말씀을 깨달은 아삽은 자신의 속사람에 대해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삽은 이 전 절에서 "내 마음이 괴로우며 내가 속 중심에서 찔렸나이다.(시 73:21)"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어리석고"라는 말 속에는 죄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처럼 "어리석은" 자가 됨으로써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의 정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여 "내가 이같이 무지하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말할 수 없을 정도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아주 억한 어리석음으로 단순히 연약해서 그랬다는 것으로는 변명할 수 없는 그런 어리석음입니다. 오히려 그 고집 세고 고의적인 무지 때문에 정죄받아 마땅한 어리석음입니다. 왜냐하면 경건치 못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 끔찍한 종말은 잊어버린 채 다만 그들이 현재 형통한 것만 보고 질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런 아삽보다 더 낫다고 할만큼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혹시 우리 자신은 이미 온전함을 얻었다거나 아니면 징계를 하도 많이 받아서 우리 안에 있던 모든 고집들이 다 쫓겨 나갔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이야말로 진짜 교만입니다. 만일 아삽이 어리석었다면, 자신을 평가할 때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야 얼마나 더 어리석겠습니까!
여러분, 뒤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처럼 신실하게 대하셨을 때도 그처럼 신실하게 대하셨을 때도 그분을 의심했던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큰 영적인 복을 주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실 때면 "싫어요, 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항의했던 여러분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그분의 섭리들을 보고 잘못 해석하여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대적하고 있구나!"라고 탄식하며 신음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정말 우리 마음을 안다면, 우리의 어리석음이 악한 어리석음이라는 기소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를 인정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어리석음"을 때달은 우리는 아삽이 결론적으로 갖게 된 다음과 같은 고백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께서 주의 권고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중에는 영광으로 나를 받아주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나이까?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시 73:24-25)"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08-28 23:42:01 | 박진태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 4:6-8)"
사형집행을 앞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고별 서신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서신이 아니라 확신의 서신입니다. 자신의 일이 거의 끝난 것을 알지만 그것도 그를 낙심시키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믿음의 고백에서 사도 바울의 세 방향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자신의 확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곁을 둘러보며 자신이 준비되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처형될 죄수로 보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물로 드려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 고백에 사도 바울은 죽음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두렵다거나 심지어 죽음 자체가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떠난다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장막을 해체하고 이동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란 단순히 장막을 해체하고 영광스런 새 집에 입주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우리 몸은 한시적 거처일 뿐입니다.
둘째로 삶의 막바지에서 사도 바울은 곁을 둘러보았을 뿐 아니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마치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사도 바울은 두려움 없이 곁을 둘러볼 수 있었고 후회 없이 뒤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뒤를 돌아보니 삶이 늘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싸워야 했고 경주해야 했으며 청지기 직분을 다해야 했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로마에서 마지막 싸움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실패할 것 같은 때도 있었지만 주님은 언제나 그를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곁을 둘러보고 뒤를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앞을 내다보았습니다.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 4:8)"
미래가 안전함을 알 때 마음에 찾아드는 평안, 그런 평안은 다시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주님께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없이 곁을 보았고, 후회없이 뒤를 돌아보았고 회의나 불안 없이 앞을 내다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주께 이런 말씀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마 25:23)"
언젠가는 여러분과 저의 삶도 끝날 것입니다. 날짜나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빠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편지에 절절히 증거했듯이 우리도 다 세방향을 바라보며 똑같이 증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십시오. 남들이 어찌하든 당신은 주님께 신실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 워렌 위어스비
2015-08-18 23:31:31 | 박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