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제가 특별 부탁해서 따로 올린 것입니다.
나중에 은퇴해서도 이런 영상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3-11-13 13:31:12 | 관리자
두 번째 이야기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금메달을 받았다.
역대 최고 문자를 뽑는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금메달을 받았다.
2012년.11월,9일 세계문자학회 등에 따르면
지난 1~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2차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1위에 올랐다.
2위는 인도의 텔루그 문자, 3위는 영어 알파벳이 차지했다.
대회에는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인도 등
자국에서 창조한 문자를 쓰거나
타국 문자를 차용·개조해 쓰는 나라 27개국이 참가했다.
참가한 각국 학자들은 30여분씩 자국 고유문자의 우수성을 발표했으며,
심사는 미국, 인도, 수단, 스리랑카, 태국, 포르투갈 등 6개국
심사위원이 맡았다.
평가 항목은 문자의 기원과 구조·유형, 글자 수, 글자의 결합능력,
독립성 등이었으며 응용 및 개발 여지가 얼마나 있는지도 중요한 요소였다.
대회는 '글자로도 올림픽이 가능할까'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됐다.
지난 2009년 10월 자국에서 창조한 문자를 가진 나라
16개국이 모여 문자의 우수성을 겨뤘고,
문자의 우열을 가리는 세계 첫 공식대회의 시작이었다.
이 대회에서도 한글이 1위를 차지했고,
그리스와 이탈리아 문자가 뒤를 이었다.
이번 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양하 전 주 레바논 대사는
"국가가 개입하면 대회의 공정성이 훼손될 수 있어 학자를 중심으로
민간 차원에서 대회를 열었다"며 "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한 아프리카의
몇몇 국립대 교수가 문자가 없는 자국의 현실을 소개하며
한글을 보급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전 대사는 "영어 알파벳 26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는 300여개에 불과하지만
한글 24자로는 이론상 1만1천여개,
실제로 8천700여개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며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정보전달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설명했다.
한글 발표자로 나섰던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는
"각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발표자와 심사위원으로 나섰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 결과 한글이 최고라는 게 검증됐고,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참가한 각국의 학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방콕 선언문'을 발표,
자국 대학에 한국어 전문학과와 한국어 단기반 등을 설치하는 등
한글 보급에 힘쓰기로 했다.
이 전 대사는 "문자는 언어와 달리 쉽게 변하지 않는 데다
이번 대회에 창조, 개조 문자까지 참가한 만큼 사실상 문자올림픽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2013-11-12 13:35:35 | 정구만
한글에 관한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
제가 인테넷으로 받은 내용 중 한글에 관한 좋은 내용을 덧 붙입니다.
.
.
.
한글이 세계 5대 언어가 된다는 내용으로 민족적 자긍심이
충만해지는 내용입니다.
역시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현재 지구상 언어는 6912종류가 있지만,
언어학자 데이비드 해리슨에 따르면
기존 언어 중 90%가 2050년까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살아남을 언어와 어떤 언어가 새로 주도적 언어가
될지 궁금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100년 후 살아남을 10대 주요 언어로는 6개 유엔 공용어
(영어 아랍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 프랑스어) 외에
독일어 일본어 히브리어 그리고 한국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사용 인구 면에서 한국어는 2050년까지 5대 언어에
속할 전망이다.
한국어의 부상을 네 가지 측면에서 예측해 본다.
우선, 언어의 힘은 해당 국민의 생존력이 중요한 요소다.
한국 독일 일본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통점 중 하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쟁과 같은 시련에서 살아남은 국가들이다.
독일과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패했음에도
여타 승전국들보다도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스라엘은 4차에 걸친 중동전과 수많은 국지전에서
아랍세계와 대결을 벌여 버텨온 국가다.
한국은 20세기에 일제 식민통치를 겪었고,
한국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냉전의 최전방이라는
일촉즉발의 안보 상황에서도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다.
이런 생존력은 근면한 국민성을 갖게 만들었고, 근면정신은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언어의 힘은 해당 국민의 창의성에
바탕을 둔다.국민이 창의적이어야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경제력에서 앞서가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다시 말해, 창의성이
바탕이 되어야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을 지속할 수 있다.
독일 자동차산업,
일본 소재산업,
이스라엘 정밀산업
그리고 한국 전자산업은 모두 세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이들 국가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
또 언어는 문화적으로 친근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
즉 외국어로서 주도적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가 매력
적이어야 한다.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팝음악 인기가 영어를
친근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듯이
한류(韓流)라 칭하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인기도를 보면
증명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아시아와 중동을 넘어 북미에까지
수출되고 있고,K팝이라 불리는 국제화한 대중가요는
유럽에서도 붐을 일으키고 있다.마지막으로 한글의 강점은
최첨단 단순성 (cutting-edge simplicity)에 있다.
한글은 언어 자체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쉬운 언어라는 뜻이다.
미국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는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세계에 없다.세계의 알파벳"이라고 했고, 미국 여류작가 펄 벅은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격찬했다.
이런 강점 덕분에 문자를 갖고 있지 않은 민족들의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으로 한글이 쓰이고 있다.
그 예로 네팔 소수민족인 체팡족과 태국 라후족이 그들 고유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이런 추세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 된다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용 인구에 있어서 한국어는 2050년 안에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그리고 아랍어에 이어 5위에 속하는
언어가 될 것이다.즉 한국어는 향후 40년 내에 사용자 수에
있어서 독일어와 일본어는 물론유엔 공용어인 프랑스어와
러시아어까지 추월한다는 뜻이다.
최첨단 단순성을 강점으로 한 한국어는 세계인들로 하여금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을 이끌어 냄으로써 매력적인
외국어로 떠오르고 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한글은 반포된 지 600년 만에 세계 5대 언어로 자리매김할
날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2013-11-12 13:34:28 | 정구만
글자의 기원과 한글의 우수성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축약된 지식이 응집된 글 이어서 올려 봅니다.
학생들에게도 유익한 글이라 생각 됨니다.
제목 "한글은 얼마나 우수할까, 위대할까?"
최 성재
전세계 언어학자치고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한글은 과연 다른 문자와 비교하여 얼마나 우수한 문자일까, 위대한 문자일까?
첫째는 만들어진 기간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 문자는 로마자와 한자인데, 이것들은 각기 3천년 이상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한자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한자가 쓰이는 동안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불완전한 문자라는 말이다.
로마자가 불완전한 것도 두말할 필요 없다. 로마자 표기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 유독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거의 완벽한 한글에 비해 로마자는 표현할 수 없는 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수를 써도 한글로 쓴 것을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한글이 로마자보다 시원찮은 문자라면 오히려 한 번 정해진 로마자 표기에 모두들 감탄하기 바빠서 딴죽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자가 지닌 결정적인 약점은 모음이다. A, E, I, O, U 다섯 글자밖에 없다. 이를 보완하는 게 반자음인 W, Y이다. 그러니 한글로는 간단히 표시되는 'ㅓ, ㅕ, ㅡ, ㅢ' 등은 원천적으로 표기 불가능하다. 'ㅐ, ㅒ, ㅚ' 등도 불가능하다. 반면에 한글에는 모음이 무려 10개나 되는데다가 이를 응용하면 얼마든지 이중 모음을 더 만들어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모음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3천년이 걸렸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이를 불과 30년도 안 되어 완벽하게 창제하셨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창제 완료하고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반포함.)
로마자는 멀리 이집트로 그 기원이 올라간다. 아직도 이집트 글자를 상형문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아니다. 그것은 표음 문자이다. 이를 밝혀낸 사람이 바로 로제타 돌을 해독한 저 유명한 언어 천재, 16살에 대학 교수가 된 샹폴리옹(Champollion)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가져온 로제타 지역의 괴상한 돌을 그 이전 사람은 모두 그림을 보고 추호도 의심없이 상형 문자로 알고 그 뜻을 읽어내려고 머리가 빠지고 벗겨지고 희어지도록 아둥바둥 애만 태웠다.
샹폴리옹은 그러나 그 아래 쓰인 그리스 문자에 힌트를 얻어 그것이 상형 문자가 아닌 표음 문자라는 과감한 가정을 하고 연구한 결과, 마침내 이를 다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동그라미가 왕을 뜻한다든지 하여 약간의 표의 문자적 요소도 있긴 있었다.
문제는 이 이집트 문자가 너무 복잡했다는 데 있었다. 그 그림을 일일이 외워서 그린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를 아주 간단히 바꾼 인종이 나왔다. 그가 바로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나와 지중해를 휘어잡아 곳곳에 식민 도시를 건설한 페니키아인이다. 그들이 건설한 도시로 제일 유명한 게 바로 한니발의 카르타고이다.
이들 페니키아인들은 상업과 군사 중심의 인종이라서 복잡한 문자는 영 생리에 안 맞았다. 그래서 이를 대폭 간소화한 것이다. 거의 그림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추상화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구약 성경을 기록한 셈족의 문자이다. 이것도 이집트 문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다가 현재는 야훼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 이름을 입으로 감히 발음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발음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호와나 야훼나 문자 상으로는 똑같다. 로마자로 표기하면 둘 다 'YHWH'이다. 사실 음운 현상에서 모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하지만 자음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대로 사람들은 이런 문자를 큰 불편함 없이 쓸 수 있었다. 대신에 그 발음을 정확히 하려면 굉장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보통 머리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모음을 발명하고 또 글자 모양도 더욱 간단하고 아름답게 만든 인종이 바로 저 유명한 그리스인이다. 이들 때문에 비로소 문자가 소리나는 대로 기록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도 누구나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다. 말은 어차피 누구나 아는 일이고 이제 이를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 익히는 데 허비하는 시간 대신 생각하는 시간에 투자함으로써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폭발적으로 늘어 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남한 정도 되는 그리스가 그 후 얼마나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는지는 삼척 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자음에 이은 모음의 발명이었다.
이것은 후에 아라비아 문자가 발명됨으로써 수학적 지식에 날개를 달아 주었던 것과 유사한 엄청난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그리스에서 나온 영어 단어 rational(합리적인)은 원래 구구단을 욀 수 있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문자로 기록한 구구단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로 기록해 버리면 천치 아닌 한 누구나 몇 대 회초리만 맞으면 초등학교 2학년이라도 외울 수 있다.
그리스인은 이 모음을 발명한 게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알파벳의 제일 첫 자와 끝 자를 모음으로 장식했다. 그게 바로 알파(A)와 오메가(Ω)이다. 각각 'ㅏ', 'ㅗ' 발음이다. 알파벳이란 말도 첫 두 자, 곧 모음 하나와 자음 하나를 일컫는다. 로마자로 말하면 에이비(AB)나 마찬가지이다. 알파베타(Alphabeta)라고 하던 것을 나중에 영어에서 알파벳(Alphabet)이라고 한 것이다.
표음 문자는 크게 셋으로 구분되는데, 페니키아문자 같은 자음만으로 된 것, 일본의 가나와 같은 자음과 모음을 함께 발음하는 음절 문자, 로마자나 한글 같이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어 있는 알파벳(음소 문자)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음소 문자가 가장 발달한 것임을 두말할 필요 없다. 만약 음절 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우리 나라같이 음이 다양한 말은 최소한 3천 자가 필요하다.
이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소리를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하여 적는 데, 인류는 무려 3천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세종 즉위 후 바로 시작했다고 해도 불과 25년만에 그리스 문자를 압도하는 완벽한 문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건 세종대왕 혼자가 아니라 집현전 학사 모두가 오로지 이 일에만 매달렸다고 해도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의 창의력이 세계에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한글 창제는 요새 식으로 계량화하면 노벨상 100개에 해당하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본다.
한글의 위대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몇 개만 더 들자. 둘째, 소리와 발음 기관의 완벽한 연관성이다. 로마자는 소리와 문자는 전혀 별개이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이집트에서 예를 들면 '소'할 때 'ㅅ' 소리가 나니까 '소'를 그려 놓고 이를 'ㅅ'이라고 하자라는 식이었다. 이것이 말이 다른 페니키아, 그리스로, 로마로 가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그런데 1940년 영주의 희방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은 발음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다. 이것은 세계 언어학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서양에서 음성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겨우 [d, t], [b, p], [s, z], [v, f], [g, k] 등을 짝지어 유성음 무성음을 구별해 놓고 득의만면하고 있었는데, 15세기초에 벌써 이런 것을 완벽하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g, k]를 혀가 입천장에 닿는 모양을 본떠서 아예 글자 모양과 비슷하게 [ㄱ, ㅋ] 더 나아가 된소리까지 표현하여 [ㄱ, ㅋ, ㄲ]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ㅋ, ㅌ, ㅍ, ㅎ]에서 보듯이 기본자 [ㄱ, ㄷ, ㅁ, ㅇ]에서 격음일 경우에 힘이 더 드는 걸 감안하여 줄을 한 두 개 더 그었던 것이다.
이 원리를 응용하여 한글을 가르치면(이런 교재가 빨리 나오기 바란다. 마음만 먹으면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일주일 이내에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한글은 정말 배우기 쉽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머리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어떤 외국인에게도 금방 가르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다가 새로운 것을 연관시키면 아주 쉽게 배우고 잊어 버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음은 더욱 경이롭다. 천지인과 발음 기관을 같이 본떴다. 하늘은 둥그니까 간단히 아래 아 [·], 땅은 평평하니까 [ㅡ], 사람은 서 있으니까, [ㅣ],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할 수가 없다. 실지로 발음을 해 보면 전세계의 모든 발음이 [·]할 때는 입이 둥글게 크게 벌어진다. [ㅡ]는 입이 옆으로 벌어지면서 혀가 평평해진다. [ㅣ]는 혀가 앞으로 내밀어지면서 세워진다.
여기서 각각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등이 나오는데, 물론 처음에는 [ㅣ, ㅡ]에 앞 뒤 또는 위 아래에 '아래 아'자를 덧보탠 것이었다. 이것도 경이로운 것이 세계 모든 발음이 [ㅏ] 발음을 할 때는 반드시 숨을 내쉬게 되어 있고, [ㅓ]할 때는 숨을 들이쉬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 밖과 안에 '점'을 찍은 것이다. [ㅗ, 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ㅗ]는 반드시 아래로 내리쉬고, [ㅜ]는 아래에서 위로 치받치게 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한글은 누가 보아도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 있다. 왜? 모음은 반드시 가운데, 또는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자는 풀어쓰기 때문에 척 보고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가 없다. 한글은 소리나는 단위가 음절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대로 활용하여 한 자 한 자에 자모를 붙여 놓아 소리 단위를 금방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로마자는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음절 구분을 못한다. 한글은 바보라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한글을 아는 사람은 바보라도 로마자 아는 천재와 같은 급이 된다는 말이다. 음소 문자이면서 음절 문자의 장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가 나오면서 다시 위력을 떨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직 한글에서 뒤지는 이유는 바로 한글의 24자가 하나의 디지털로서 무한한 조합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완성형을 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찬진의 한글은 조합형을 택했던 것이다. 역시 똑똑한 조상 덕에 간단히 미국의 천재를 바보로 만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완성형을 표준으로 삼은 일은 정말 개탄스런 일이다. 디지털이란 것도 기껏해야 [0]과 [1]이라는 두 문자를 이용한 이진법을 무한히 연결하는 것인데, 한글은 그 자체가 무한히 응용할 수 있는 24개의 디지털 기호이다. 지금은 겨우 워드프로세서에 응용하는 정도이지만, 이를 잘 응용하면 엄청나게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확실히 구별하면서도 음절 단위로 쓰게 됨으로써 정보화 시대에 또 하나의 경이적인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병우식 자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바로 과학적인 한글의 장점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현재 널리 보급된 것과는 달리 왼손은 초성을 치고 오른손은 중성과 종성을 동시에 치는 원리이다. 한 글자를 한 번에 치는 방식이다. 그러면 아무리 손가락이 굳은 사람도 1분에 쉽게 3백 타 이상을 친다.
무려 1분에 1300타, 1400타까지 가능하다.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쓸 수 있다. 속기사는 전부 공병우식을 쓰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정보화 시대에 이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은 위정자 때문에 공병우씨가 그렇게 평생을 애썼는데도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2년 전인가 삼성에서 공병우식 자판을 만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현재 방식으로는 아무리 빨라야 7백 타, 8백 타가 한계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대왕은 한국의 바보도 외국의 천재와 비슷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서양 바보들에게 배워서 도리어 바보가 된 위정자가 서양 흉내내느라고 우리 좋은 것을 다 버렸으니 말이다.
한글의 위대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표음 문자이면서 표의 문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 전용을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한글의 이 장점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글은 음절 단위로 쓰기 때문에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음절 문자의 장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어원을 밝혀 적을 수 있어서 표의 문자 구실도 제법 훌륭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말로 구별해서 설명하기로 하자.
우리말 -- 훈민정음 해례에서 종성부용초성법을 택해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조선 중기의 8종성법에서 한글학회에서 이를 다시 살린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뭇잎'-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나문닙'이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그러면 도대체 말로 할 때와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어원을 밝혀 '나무'에다가 관형격 조사 '의'에 해당하는 사이시옷 'ㅅ' 거기다가 주둥아리 입이 아니라 받침에 'ㅍ'을 써서 '잎'이라고 함으로써 척 보면 이것이 나무에 달린 잎이구나, 라고 알게 된다.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한글을 배우면 웬만한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안다.
'이것을'-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이거슬'로 적는다고 해 보자.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것을'은 '이것'과 '을'을 합한 것임을 아주 간단히 나타낸다. 뜻이 금방 머리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
'있다'-이것을 '이따'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이것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한글의 이런 장점은 뜻글자인 한자도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음성을 나타내되, 시각적인 효과로 뜻글자 구실도 훌륭히 해 내는 것이다.
한자말--이것도 아주 잘 나타낸다.
'천리만리'-이것을 '철리말리'라고 쓴다고 해 보자. 그러면 말할 때와는 달리 도대체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가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천리만리'라고 쓰면 초등학생도 '천 명, 만 명', '천 개 만 개' '천 원 만 원'의 '천, 만'이란 걸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이런 걸 좀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한자까지 가르쳐 주면 더 좋지만, 그에 앞서 바보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런 걸 가르쳐 주면 설령 한자를 모른다고 해도 말뜻을 아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고 바보 학생도 천재가 되어 새로운 말을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
대신 천재, 천사, 천국, 천치, 천성 등의 '천'은 '하늘, 타고난'의 뜻이 있다는 것도 꼭 알려 주어야 한다. 물론 한자를 곁들이면 더욱 좋고. 그러나 이를 꼭 한자를 병기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도만 가르쳐 주면 아주 정확한 언어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가 어느 정도 되는 학생들은 한자를, 한문을 꼭 가르쳐서 조상들이 한문으로 남긴 엄청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한글은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드는 경이의 문자이다.
한글의 장점은 연구하면 할수록 계속 쏟아져 나올 게 틀림없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 글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한글은 누가 만들었을까.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나는 세종대왕이라고 본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런 경이적인 창작품은 절대 여러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천재의 머리에서 나온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위대하다고 수천 명의 머리를 합해서 나온 게 아니다. 상대성 원리가 신의 영역을 건드린 발견이라고 해서 일류 과학자 만 명의 머리를 합해서 나온 게 아니다. 고독하게 한 천재가 각각 발견한 것이다. 이런 것은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방해가 된다.
둘째, 세종대왕은 두 가지만 스스로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훈민정음 창제와 작곡이다. 나머지는 누가 했는지, 그 본인의 이름이 거의 다 밝혀져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왕의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공으로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것도 대부분 '어제(御製)'란 말을 붙였을 것이다.
세종실록에 보면 매우 겸손했던 세종대왕이 음운학에 대해서만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말도 아주 직설적이었다.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에 자모가 몇 개 있느냐? 만약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너희가 (이두를 정리한) 설총만 옳게 여기고 임금의 일은 그르게 여기니 어찌된 일이냐?"
셋째, 당시 학자들은 오로지 유학이었다. 집현전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이런 따위의 음성학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연구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설령 연구에 일부 참여했다고 해도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문 숭배가 종교의 수준까지 이르렀던 때이다. 실지로 신숙주, 성삼문이 만주로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러 가는 것은 한글 창제 이후의 일이다.
이들은 완벽을 기하려는 세종대왕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찬에게는 무슨 훈민정음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는 게 아니었고 동국정운을 정확히 만들기 위해 중국 음운에 대해 물어봤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왕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훈민정음을 거의 혼자 발명하신 듯하다. 설령 직접 창제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관계없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훈민정음은, 한글은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뺀 것도 못난 위정자들 탓이라고 본다. 모든 공휴일을 다 폐지해도 한글날은 공휴일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만들고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들어 주는 한글을 기리는 날을 공휴일로 안하고 도대체 무엇을 공휴일로 한단 말인가. 열심히만 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한글 창제하는 것처럼 창의적으로 머리를 쓰면 열흘 놀고 하루 일해도 능히 선진국을 앞설 수 있을 것이다.
펌 : http://songhyun.com/bbs/zboard.php?id=hangul&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
2013-11-11 14:46:02 | 허광무
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11-09 18:16:07 | 박무령
많은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11-09 18:15:21 | 박무령
박무령 형제님~!
많은 성도님들이 이렇게나 따뜻하게 글을 남겨 주셨네요. 어떻게 보면 사랑침례교회 홈피나 킵바이블이
딱딱하고 엄격한 듯 보이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글을 올리실 때 조금만 유념해 주셔서 상세한 의도를 기술해 주시면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질문이나 좋은 댓글로 앞으로도 함께 해 주시고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의 교제도 이루어 질 수 있길 바랍니다.
이번 일로 침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활발하게 참여하시는 분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8 18:58:54 | 김대용
형제님 저는 임원섭입니다. 구원에 관한 교리는 명확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고민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마음으로든 말로든 행위로든 그것을 통해 나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은혜로 죄를 사하시는 분은 공식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로마서에서는 마음과 말을 믿음의 단서로 제시하며(롬10:10), 아브라함에게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으로(창15:6), 눅19장 삭게오에게서는 그의 재물에 대한 결단으로,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서는 그의 고통 중 고백으로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것들 가운데 야고보서에서는 특히 행위로 우리의 믿음에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회개의 표지로서의 행위입니다.오늘날처럼 그때도 복음을 남용하여 공식을 가지고 방종하는 풍조가 극성을 부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15:1~6, , 시32:1,2, 롬5:1,10을 읽으시고 그것들을 종합해보십시오.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칭의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와 구원에 관하여 균형을 잡으시는데 도움이 되실것입니다. 아무리 교리적으로 안심을 해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합당하지 못하면 평안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교리는 명확하게 세워야 합니다. 속이는 자들이 이것으로 성도를 속박하고 두려움으로 또는 반대로 방종으로 우리를 넘어뜨리기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시간을 갖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면 weldu37@nate.com으로 메일주세요. 샬롬
2013-11-08 15:52:49 | 임원섭
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박무령형제님을 존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전혀 없고 이 시대에 전달된 말씀은 완전하니 있는 그대로 믿는 것에서 출발하시면 첫 단추를 바르게 끼웠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는 믿음을 통한 구원의 안전보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교리안에서 야보고서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촛점을 맞추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배우고 믿는 바는 성경말씀은 100%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의 사람을 써서 말씀을 완성하신 우리 성령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에게서는 불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은 두말하는 분이 아님을 믿기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
2013-11-08 10:22:55 | 노영기
제가 이 글을 올리면서 노영기 형제님 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이렇게 난해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야고보서 2장에 대한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해오다가 저의 의문을 풀어주실 분이 이곳에 계시지 않으실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질문을 통해 고민해 주신 노영기 형제님과 여러분들에게 피해를 드린것
같아 죄송합니다. 더불어 저의 질문에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2013-11-08 02:34:27 | 박무령
제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질문을 하게 된
배경과 목적등을 자세하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8 02:06:38 | 박무령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2013-11-08 02:02:33 | 박무령
박무령 형제님!
다음에는 간단 명료한 질문이나 글로 서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시죠!
머리에서 쥐나는 줄 알았습니다
온 몸을 비틀어 가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다보니 스팀이 올라오면서 내가 왜 이글을 읽고 있어야 하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글로 고문당하는 느낌을 살짝 경험하면서 끝을 보았습니다.
ㅎ~~~~~
잘 모르는 박무령형제님에 대한 매너로 읽기는 다 읽었습니다.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얼나마 될까?
안타깝다!
어떻게 생각하냐의 대답으로는 사사로이 해석한 것 같아 보입니다. 라고 견해를 밝힙니다.
그 외에는 아무생각도 안납니다. ^^
박무령 형제님! 성경공부 잘 하시되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시고 사이트안에 있는 여러 자료와 말씀들을 잘 들어서 좋은 결실얻기를 바랍니다.
샬롬!
2013-11-08 01:40:50 | 노영기
박무령 형제님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이런 질문을 하실때는 지금 덧글을 다신 것처럼
질문을 하게된 배경을 먼저 소개 하시고,
질문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런 목적 등을 밝혀 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 공간이다 보니,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글만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
평안하세요^^
2013-11-07 21:05:22 | 오광일
먼저 제가 올린 글을 통해 불쾌감을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동수 목사님께서 강의하신 야고보서 2장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을 무렵 어느날 인터넷에서 이화영 목사님의 해석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 지식이 짧았던 저는 정동수 목사님과 이화영 목사님의 대립되는 해석에 대해 고민해
오다가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서 결론을 내는데 도움을 얻고 싶었습니다. 제가 올린 글에 대해
불편해 하시는 분이 계셔서 삭제를 하려고 했지만 삭제가 불가능 했습니다. 제가 올린 글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07 15:26:28 | 박무령
박무령님..
질문하신 내용에 답글은 달아드렸지만,
이런 작업이 결코 쉬운것은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쑥 이러이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런식의 질문은 ...마음을 많이 어렵게 합니다.(질문내용이 어려운게 아니라)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가 '~~지식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의와 상식을 가지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3-11-07 11:22:53 | 오광일
긴 글을 세세히 읽으시고 다른 분들을 위해 요약정리 해주신 오광일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위 인용된 글을 쓰신 목사님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어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읽는 게시판이니 다른 분들도 참조하시라는 의미에서 교회와 신앙의 기사를
링크해 올립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472
더불어 윗글을 쓰신 목사님께서 교단을 나와 몸을 의탁했다는 예OO 박사님이라는 분은
과거에 제가 하던 일과 관련되어 조금 알던 분입니다.
이 분이 어떤 인물인지도 아래 기사로 충분히 설명될 것입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66
우리 모두에게 바른 분별력이 견고하게 유지되길 소망합니다.
2013-11-07 11:01:13 | 김대용
샬롬!
긴 글에서 핵심 내용을 요약해 보면...
1.본문의 문맥(야고보서1,2장)을 볼 때 본문의 ‘행함’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명백하다. 이런 문맥을 볼 때 야고보 선생이 야고보서 1장에서 말한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약 1:12, 25)을 야고보서 2장에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바꿔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선생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두 말을 줄여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야고보 선생의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야고보서 2장 14절의 구원을 영의 구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2.필자는 즉시 야고보서를 펴서 본문의 문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었다! 필자는 즉시 빌립보서 2장 12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내친김에 히브리서 6장 4-8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크게 놀란 필자는 오랫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은 ‘복과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줌. (창 15:3-6)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서(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일(영혼구원을 받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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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평 ]
1. 성경을 연구하고 올바른 것들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는 칭찬해 드립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이 아닌 개역성경으로 글을 쓰셨네요. 교과서가 올바르지 않으면, 거기에서 나오는 내용도 올바르지 못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복” 과 “상”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본인이 원하는 결론에 맞춰서 해석을 유도하면 안됩니다.
2. 야고보서의 구원을 “복과 상 받는 것”으로 단정지으셨는데, 이런 식의 접근은 대단히 위험한 추론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이단 교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 구절을 들어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입증하려고 하셨지만, {불행히도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필자(이화영 목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라는 식의 겸손하지 못한 말까지 하신걸 보니 많이 염려가 됩니다.
3. “성경에서 몇 천년 동안 몰랐던 것을 본인만 깨달았다.” 이런 말 하는 사람 치고 온전한 사람 본적이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이단 교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통해 볼 때 늘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기독교 신앙의 교과서인 성경 문제가 해결되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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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핵심 요약]- 정동수 목사님께서 “야고보서 오해 풀기” 라는 제목으로 강해해 주신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밝힙니다.
야고보서는 크리스천 삶에 대한 강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책들과는 달리 야고보서에는 신학적, 교리적 내용을 많이는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교리적 오류를 바로 잡거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대로 살 것을 촉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약1:22,3:13)
(1)긍정적인 믿음
a.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약2:18)/ 행위와 함께 일하는 믿음(약2:22)
b. 아브라함의 믿음: 창15장, 창22장. 그가 구원받은 뒤에 그의 행위가 그의 믿음을 확증함
(2)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란?
율법행위가 아니라 선한 행위를 의미함. 즉 구원 이후에 삶속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합당한 행위(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나와야 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올바른 크리스천의 믿음이 아니다. 마땅히 나와야 할 합당한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봐야할 지도 모른다.
(3) 의롭게 됨의 의미
성경의 두 용례
a.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칭의)-롬3:28, 롬4:2
b. 사람이나 하나님이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 정당성을 인정 받는 것, 옳다고
인정 받는 것(딤전3:16, 롬3:4, 마11:19)- 약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은
두 번째 의미의 의롭게 됨을 뜻한다.
감사합니다.
2013-11-07 01:26:43 | 오광일
안녕하세요. 이화영 목사님께서 쓰신 글인데요. 여러분들은 이 분의 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깨달은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구원’이란 단어를 명사는 주로 ‘소테리아(swthriva)’를 사용했고, 동사는 주로 ‘소조(swv/zw)’를 사용했다. 이것이 잘 나타난 구절이 사도행전 12절이다.
(행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소테리아)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소조)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성경 기자들이 ‘소테리아’와 ‘소조’를 다양하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1) 성경 기자들은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행 16: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소조)을 받으리라 하고
본문에 사용된 ‘구원’이란 단어는 ‘영혼구원’을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경 기자들은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신약성경 기자들은 신자의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딤후 4: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소조)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바울 사도의 말이다. 그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생명(영생)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님이 나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볼 때 본문의 구원이 그의 육체가 죽을 때 그의 영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신약성경 기자들은 신자의 육체가 부활해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에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히 9: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소테리아)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중생한 신자들의 육체를 부활시켜서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다.
4) 신약성경 기자들은 ‘땅에서 복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행 27: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소조)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본문은 바울 사도가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서 배를 타고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 때 큰 풍랑으로 인해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로마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죄수들을 모두 죽이자”고 백부장(지휘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살리기 위해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에 상륙하라”고 명령했다. 성경은 이것을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부하들이 죄수들을 살해하려는 뜻을 막았다”고 표현했다. 본문에 사용된 ‘구원’이란 단어가 사람의 영을 구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소조(swv/zw)’다.
바울 사도는 오래 전에 예수님을 믿어서 영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불신자인 백부장에게는 바울 사도의 영을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 사람의 영을 구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따라서 본문의 구원이 바울 사도의 육체를 구원해주는 것(목숨을 구원해주는 것-육체가 복을 받는 것)을 뜻하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소개한 성경말씀에 기록된 ‘구원’도 ‘육체가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행 27: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소조)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행 27:30-31)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소조)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행 27:33-34)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소테리아)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은 성경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원: 하나님의 은혜, 또는 그 긍휼하심에 의해 사단의 세력과 죄로 인한 멸망에서 구해내는 일. 성서 중에도 종교적 의미가 아니고, 재해, 불행, 외적(外敵)등에서의 구원의 용례(用例)를 보게 된다(히 11:7, 시 34:6, 출 14:13, 신 20:4, 눅 1:71, 행 7:25). 또한 신약에는 병에서 ‘고침을 받는다’는 표현을 ‘구원되었다’는 의미의 말로 쓴 경우도 있다(마 9:22, 약 5:15, 막 6:56).”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은 ‘죄에서 영을 건져주는 구원’과 ‘재해와 질병과 외적으로부터 육체를 건져주는 구원’만 소개했다. 하지만 성경 기자들은 ‘구원’이란 단어를 또 다른 경우에도 사용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성경의 구원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5) 신약성경 기자들은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신약성경 기자들이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것을 깨닫는 것이 성경의 구원을 바르게 깨닫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위구원론을 주장했다. 그 결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서신서는 야고보서, 빌립보서, 히브리서, 베드로서 등이다. 하지만 본 장에서는 지면 관계상 야고보서를 통해서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사실만 확인하도록 하겠다.
(약 2: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소조)하겠느냐
지난 2천여 년 동안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본문의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영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까닭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야고보서를 근거로 기세 좋게 “중생한 신자도 큰 죄(혹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은혜구원을 믿는 신자들은 야고보서 때문에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것은 유명하다. 권연경 교수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잘 알려진 대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신약의 일부로 인정하기를 주저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 비교해 볼 때, 복음적 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야고보서의 칭의론이 바울의 칭의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며 그는 ‘어느 누구라도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박사모를 그에게 씌워주고, 그가 나를 바보라 부를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했다.”
개혁파 신학자 켄달 박사는 그의 저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에서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루터는 기껏해야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간주하였고, 그가 죽기 불과 1, 2년 전에는 ‘비텐베르그대학에서 야고보서를 가르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하던 대부분의 은혜구원론자들은 “야고보서는 진짜 신자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도리를 가르친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종합주석은 야고보서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야고보서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있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 외에 인간의 행위가 덧붙여져야 한다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원설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다만 진실된 믿음에는 행함이 수반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야고보서 2장 14절을 바르게 깨닫기 전까지는 야고보서 2장 14절이 말하는 구원이 영혼구원인 줄 알았다. 이 때문에 필자는 본서를 집필하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증언했는데, 어째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증언한 것일까?’
필자는 오랫동안 이 숙제를 풀지 못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나님이 갑자기 야고보서 1장 25절이 생각나게 해 주셨다!
(약 1: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필자는 즉시 야고보서를 펴서 본문의 문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었다! 필자는 즉시 빌립보서 2장 12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내친김에 히브리서 6장 4-8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크게 놀란 필자는 오랫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은 ‘복과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이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소개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과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첫 번째 증거는 야고보서 1장에 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선생은 시험을 당하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율법을 잘 지켜서) 생명의 면류관(상)을 받게 하고, 복을 받게 하려고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약 1: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상-필자 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 1: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본문의 ‘자유롭게’란 단어는 ‘엘류데리아(ejleuqeriva)’다. 디럭스바이블 헬라어사전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엘류데리아: (합법적이거나 방탕한, 주로 도덕적으로 혹은 의례적으로) ‘자유’. <고전 10:29> 여명. liberty; 1)구원과 관계없는 것을 하거나 안 해도 되는 자유. 2)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할 자유, 권리. 3)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사는 자유, 진정한 자유.”
이 해석을 볼 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신자가 영혼구원을 받기 위해서 강제로(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을 의미하지 않고, ‘신자가 복과 상을 받기 위해서 자원해서 지켜야 하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고보 선생은 야고보서 1장에 이어 야고보서 2장에서도 신자가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했다.
(약 2:8-9)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약 2:12-14)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소조)하겠느냐
본문의 문맥을 볼 때 본문의 ‘행함’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명백하다. 이런 문맥을 볼 때 야고보 선생이 야고보서 1장에서 말한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약 1:12, 25)을 야고보서 2장에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바꿔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선생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두 말을 줄여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야고보 선생의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야고보서 2장 14절의 구원을 영의 구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성도들이 지옥의 공포에 시달린 것이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두 번째 증거는 야고보가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서 구원을 설명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부터 보자.
(약 2: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친 사건을 근거로 “신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신자도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거나, “아브라함처럼 사는 신자만 진짜 신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이 명백한 오류인 것은 창세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창 22:16-17)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들을 바쳐서 영혼구원을 받았는가? 전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들을 바쳐서 큰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쳐서 큰 복만 받았겠는가? 당연히 하늘의 상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충성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큰 상을 주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사람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다’는 뜻인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것을 예로 든 후에 라합이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사실을 예로 들었다.
(약 2: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이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어서 큰 복을 받은 것은 여호수아서와 다른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그 일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하는 복과 유다지파의 살몬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는 복과 다윗왕의 고조모가 되는 복을 받았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어서 큰 복만 받았겠는가? 그녀 역시 아브라함처럼 큰 상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들어서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다만 야고보가 “라합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았다”는 말을 줄여서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 당시의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야고보의 표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히브리서 11장에 있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은 사람들의 예를 들어달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께 충성하면 상을 받는 진리를 설명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은 신자들의 대표자는 모세일 것이다.
(히 11:24-26)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는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처럼 큰 고난을 감수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신약시대의 신자들도 모세처럼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아서 방주를 지을 수 있었다”고 했고(히 11:7), “아브라함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고 했다(히 11:8-10). 이렇게 믿음의 위인들이 상 주심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충성한 사실을 소개하던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 11: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 말은 ‘아브라함도 모세처럼 상 주심을 바라보며 외아들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상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충성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와 야고보서 기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복을 받은 사건을 근거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복과 상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다만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복과 상을 받는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한편 야고보서 기자와 히브리서 기자는 동일하게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도 행함으로 상을 받은 신자의 표본으로 소개했다.
(약 2: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히 11: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와 야고보서 기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다만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의롭게 된다)”고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이것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아브라함부터 보자.
(창 15:3-6)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서(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일(영혼구원을 받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롬 4:2-3)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처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동일하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것과 그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증언한다.
라합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여호수아서는 라합이 영혼구원을 받은 시점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수 2: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서 영혼구원을 받았다. 이 때의 라합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다. 이처럼 라합도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았다!
야고보서 2장 22절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창세기 본문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창 22: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기 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했다. 하지만 이삭을 바치기 전에는 하나님이 인정할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큰 복과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을 인정해 주셨다. 야고보는 이것을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성결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성기호 박사는 필자의 야고보서 해석을 읽은 후에 메일로 다음과 같은 평을 보내주었다.
“이화영 목사님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셨군요. 구원이란 의미가 다양함도 잘 지적하셨고요.”
어떤 목회자는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보내주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방금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정말 구원에 관한 독보적인 해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도하시고, 몸부림쳐서 받아낸 명쾌한 말씀입니다. 영혼구원과 복과 상급에 대한 구원을 발견하신 목사님은 행복자십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했던 루터가 목사님을 만나셨다면 아마도 큰 절을 하셨을 것입니다.”
필자의 책을 호평해 준 성기호 박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한다.
성경에 해박한 신자들은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의 구원론 난해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한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잘 모르지만 교단의 교리를 맹신하지 않는 신자들은 베뢰아 사람들처럼 지혜롭게 처신할 것이다.
(행 17:11-12)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부언
야고보서의 본뜻을 깨달은 것으로 판단하는 필자는 오랫동안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마르틴 루터 신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오죽 답답했으면 “나에게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조화시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내 박사모자를 씌워주고 ‘나를 바보라고 부르라’고 하겠다”고 약속했겠는가? 모르긴 해도 마르틴 루터 신부가 필자의 야고보서 해석을 가장 기뻐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 때문에 필자는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뵌 후에 가장 먼저 마르틴 루터 신부를 만나보고 싶다.
*에피소드
필자가 본서의 초판을 출판하자, 필자가 소속한 노회원들 중의 일부가 필자의 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필자가 400년이 넘도록 진리로 믿어져 온 칼빈주의 구원론을 개혁했고, 그 때까지는 필자의 구원론이 충분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들 중의 강경파들이 필자와 함께 진지하게 성경의 구원을 연구하기를 거부하고, 무조건 필자에게 필자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 점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교수님의 평가를 믿는다”고 주장하며 필자의 주장을 무조건 묵살했다.
새로운 사상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는 현상에 관해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마 13:57) 천명하셨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운동은 무엇이든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맨 먼저 반발을 받게 되는 법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은 그들이 소속한 천주교회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고, 예수님의 사상은 주님과 한 민족인 유대인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다. 이처럼 필자의 구원론은 필자가 소속한 노회원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다!
필자는 필자의 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위임받은 노회원들에게 “부실한 초판을 회수하고, 교단신문에 사과광고를 내겠지만 초판을 보완한 증보판은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계속 그런 입장을 고수하자, 연구위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초판을 회수해서 처분하고, 교단신문에 사과광고를 게재했다. 하지만 얼마 못되어서 노회원들은 필자의 증보된 책이 인터넷 서점에 보급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경파들을 또다시 필자에게 그 책의 철회를 요구했다. 반면 온건파들은 필자에게 “양보할 것”을 간청했다.
어느 날 노회가 열렸다. 그러자 필자의 책 문제로 인해서 회의가 몇 시간동안 공전되었다. 필자를 아끼는 목회자들과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장로는 필자에게 양보할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에 부담을 느낀 필자는 마음이 약해져서 “나의 주장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노회원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그렇게 해서 노회가 끝났다. 필자는 매우 섭섭했지만, 그 때 모든 일이 마무리 된 줄 알았다!
하지만 필자가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터졌다. 필자와 함께 오던 어떤 목회자가 휴게소에서 필자에게 음료수를 사 주었는데, 그 음료수를 마신 후에 필자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약 20분 후에 필자의 얼굴은 E. T처럼 변했고, 온몸이 축 늘어졌고, 두 눈이 완전히 실명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필자는 즉시 필자의 죄를 회개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깨닫게 해 주신 진리를 부인한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금방 죽거나, 최소한 불구자가 될 것 같던 필자의 몸이 불과 1-2분 안에 정상이 되었다!
하지만 믿음이 작은 필자는 그 후에 제비뽑기로 한 번 더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다. 아내와 함께 ‘주장철회’, ‘계속주장’을 적은 종이를 봉투에 넣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았다. 한 번 뽑았는데 ‘계속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기드온의 양털 시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제비를 뽑았다. 그래도 ‘계속주장’이 나왔다. 그 때부터 필자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교단에서 쫓겨나는 일을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줄기차게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신 구원론을 전파하고 있다!
필자가 애정을 가지고 섬기던 교단에서 쫓겨날 때 필자에게는 필자를 쫓아낸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가 충만했다. 머리로는 그들을 용서해야 할 것을 아는데도 마음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교단에서 쫓겨난 필자를 양촌치유센터로 인도해 주셨다. 필자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내적치유와 축사사역을 받았다. 그 때 필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고, 필자 속에 들어있던 악한 영들을 추방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필자를 쫓아낸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가 사라져 버렸다.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진정으로 그들을 축복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필자 부부는 양촌치유센터의 치영원에서 내적치유사역과 축사사역을 공부했다. 양촌치유센터의 원장인 김종주 박사는 필자 부부를 양촌치유센터의 전인치유사역자로 세워주었다.
마음의 상처와 악령들 때문에 고생하는 내담자들을 치유하는 일은 필자 부부에게 전에 맞볼 수 없었던 커다란 보람을 안겨주고 있다. 몇 년, 마음의 상처와 악령들 때문에 혹은 몇 십 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던 내담자들이 2박 3일 간의 전인치유를 받은 후에 천국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황송하게도 어떤 내담자들은 필자에게 큰 절을 하기도 하고, 필자를 ‘생명의 은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느 날 필자는 라이프신학교 총장인 예영수 박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때 필자는 예 박사에게 필자의 저서 [이것이 구원이다]를 선물했다. 며칠 후에 예 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책을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며 “목사님이 쓴 다른 책들도 보내 달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필자는 예 박사에게 필자의 다른 저서들을 보냈다.
몇 주 후에 예영수 박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것이 구원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며 “꼭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몇 주 후에 필자는 예영수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또 다시 책에 관한 칭찬을 한 후에 “도대체 어떤 교단에서 그렇게 잘 쓴 책들을 문제 삼아서 목사님을 쫓아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필자가 초판을 부실하게 써서 오해가 발생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설명했다. 예 박사는 “이 책을 학위논문으로 발표하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예영수 박사와 그가 대표회장으로 있는 교단(사단법인 국제교회선교연합회-독립교회연합회)의 임원들은 필자를 그 교단의 목사로 받아주었다. 이에 필자는 지면을 빌어서 필자의 책을 인정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를 목사로 인정해 준 예영수 박사와 교단의 임원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필자는 현재 양촌치유센터에서 전인치유 강의와 전인치유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설교와 강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필자의 기도제목 중의 하나는 본서를 전국의 서점에 보급하는 날이 오는 것과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본서를 강의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본서에 공감하는 독자들의 기도후원을 부탁하는 바이다.
혹시라도 필자를 교단에서 축출한 목회자들 중에서 그 일을 후회하는 이들이 있다면(그런 목회자가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필자는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했던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창 45: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어느 날 필자는 유투브에서 온 몸에 55%이상에 3도 화상을 입어서 몸과 얼굴이 크게 상한 이지선 자매의 간증 동영상을 보았다. 그 때 그 자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만일 당신이 예전의 얼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그 때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수많은 어려운 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필자는 필자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옛날에 목회할 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겠는가?”
예전에 필자가 자립하는 교회에서 훌륭한 성도들과 함께 재미있게 목회를 했기 때문에 그 때로 돌아갈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필자의 절대적인 마음은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때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기쁘고 보람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물론, 지금보다도 훨씬 더 무능한 종으로 일생을 끝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ttbb?Redirect=Log&logNo=110166677667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2013-11-06 21:36:02 | 박무령
외워 두었던 말씀이 떠올라 함께 묵상함이 좋을 것같아 올렸습니다.
샬롬.
2013-11-06 18:39:30 | 이춘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