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경상도에서 반나절 이상 걸려 오시고,
또한 자동차로 오랜시간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기쁜맘으로 힘들게 달려와서
매 주일 자리를 꽉 채워주시는 성도님들 각자가 가장 고귀한 교회의 뼈대를 형성하고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관심과 섬김과 사랑과 귀한 교제들이 있어 교회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것이 아닐까요.
바른신약교회로, 바른성경을 전하는 교회에서 예배드림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주님다시오실때까지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하늘의 보상을 넉넉히 받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빌 3:14, 킹흠정)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
(고전 3:8, 킹흠정)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2015-12-15 17:20:39 | 김영익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가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시는 성도님들께 감사드리며
주님으로 부터 받은 은혜와 감사를 마음속에 담지만 말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더욱 성장하리라 생각됩니다.
2015-12-15 16:13:16 | 김영식
다음을 참조하세요.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885
2015-12-15 12:17:34 | 관리자
안녕하세요?
매우 귀한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을 잘 그려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인 것 같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5-12-15 11:31:38 | 관리자
지난주 뉴욕에서 오신 형제님 간증을 들으면서도 느낀것이지만
그렇게 오고싶어하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따금 그 사실을 까먹는다는 것입니다
올려주신 글처럼 늘 감사하는 생활이 중요한것같습니다~^^
2015-12-15 11:15:34 | 조성재
이젠 댓글하나 남기기도 민망한 주변인..교회화장실 청소 한번 못하는 구원투수 입장인 저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생각할때 부끄러움이 없는 걸로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교회안에서 어리광만 피우는 성도분들조차 부럽네요^^
제자리를 지키며 헌신하는 성도분들께 (저의 부끄럼을 감추고) "존경합니다" 소리치고 싶습니다~~
2015-12-14 22:30:16 | 목영주
늘 주일에 일찍 오셔서 성도들을 맞으며 새로오는 성도들을 안내하는 일을 신실하게 섬겨주시며 지체 하나 하나에 애정을 갖고 살펴 주셔서 또한 감사합니다.
올 일년을 보내며 그래도 교회안에 큰 우여곡절없이 건강하게 지냈네요..
2015-12-14 21:58:33 | 오혜미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 감사는 제대로 하고 사는지
갚기는 하면서 사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거창한 계획은 없지만 주어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은 소망 간절합니다.
2015-12-14 19:50:26 | 김혜순
어느새 한 해가 또 저물어 갑니다....
년 초를 맞이한 것이 어제 같은 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고 보니
노쇠해? 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드네요....
기도노트를 정리하면서 기도를 했던 성도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런 일도 있었구나!’
두 줄로 긋고 Tks(감사) 라고 씌여진 지저분한 노트를 보면서 감사하기도 하면서
노트를 정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사실 기도노트엔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기도가 필요했던 일들이 기록이 되었기에
실제로는 여러 부분에서 자원해서 함께 짐을 지며 우리교회 이곳저곳에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 나간 성도들에 대해선 기록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어요.
그래서 핸 폰에 저장된 성도 한 분씩을 떠올리니 자기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준 여러 성도들이 너무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제가 뭐라고 일일이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도.....
우리교회는 자원해서 일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집사들도 형제님이라 부르기에 온 성도들이 동등함을 누린다고나 할지?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500명이 넘는 대가족이 움직이니 그 중에는
교회 안에서의 맏이의 역할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움직이는 성도들도 있고
교회 안에서 막내역할로 교회 사정 어떤지 모르고 살아가는 막둥이들도 있고
교회 안에서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녀들도 있고
교회 안에서 주변의 성도의 어려움을 살피며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주는 자녀들도 있고
교회 안에서 작은 어려움에도 잠수를 타기도 하고 늘 어리광만 피우는 자녀들도 있고
교회 안에서 작은 것 하나에도 다투고 징징대고 편만 들어달라는 자녀들도 있고
교회 안에서라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뺀질이인 들 없겠어요?
교회 안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가며 신실한 자녀들이 대부분이지만
교회 안에 있지만 늘 손님인 채로 있는 자녀들도 있고요.
그러나 그래도 모두모두 한 가족이라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성막을 광야에 지을 때 밑받침과 가로대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든든히 세워져 있어야
성막을 완성할 수 있지만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요.
마치 신실한 성도들이 밑받침과 가로대로 든든히 받쳐 주고 있어서 우리 교회가 지난 세월을
잘 겪어내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래서 너무 감사가 되고요.
물론 올바른 지도자가 있었기에 이런 일들이 서로 씨줄과 날줄로 엮이어 오늘날의 우리교회가
있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볼수록 우리 교회 성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고, 동기는 물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갚아 주실 것을 아니 감사가 되지요.
목사님은 대표자로 온갖 화살과 비방과 구설수를 혼자 다 받는 위치에서,
사모님은 조력자로서, 야당으로서, 자매로서, 성도로서 또 다 말할 수 없는 온갖 구설수 속에
인내를 배우며
집사들과 지역 인도자들과 교사들과 사무원과 주방과 서점과 방송실 등 크고 작은 그룹을 이끌고 나가는 일은
참으로 많은 마음의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이지요.
각자가 생각들도 일하는 방식들도 차이가 있으니 그것을 조율해 나가는 일들이 어렵지요.
주님께선 그러한 어려움들을 통해 서로를 성장시켜 나가시는 것이겠지만
당사자들은 참 어렵지요.
리더가 되어보면 리더의 어려움을 알게 된다고나 할지-
지난 번 소그룹 모임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말이 주님께 감사를 돌리는 것이었어요.
우리 교회에 자의든 타의든 나오게 되면서 변화된 점들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다고
했는데 유-투브를 보게 된 모든 과정이 결국 주님의 은혜였고 우리 교회 와서 교회생활을 통해서 영적인 안정을 얻으니 가족들이 편안해 한다고.
본인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는 기쁨에 교회 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자기 스스로가 지난 믿음 생활의 잘못된 점에 대해 깨닫고 영혼의 자유를 누리니
너무 행복하다고.
온종일 우리 강해 CD를 틀어놓고 듣는 온종일파^^들이 많았지요.
결국은 우리교회 온 식구들이 행복하다는 것이 되네요^^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가 변화의 물결속에 있구나 하는 희망적인 지표도 되어 감사가 되요.
우선은 순수한 젖을 충분히 먹어야 성장도 되는 것이라
내가 먼저 서야 다른 사람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지요?
새해에는 개인적으로 좀 더 천천히 자세하게 성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강해도 함께 들어가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계획도 하게 되네요.
제자리를 지켜내며 헌신하는 많은 성도들이 너무 귀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12월을 보내면서 이런 저런 작은 생각들을 두서없이 적어 보았어요.
바라기는 새로운 해에는 조금씩이나마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2015-12-14 15:00:47 | 이수영
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못한데, 세상을 만든 신은 공평한 분이라니!!
지금까지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문제였죠.
누구는 부유하게 태어나 평생 놀고먹고, 누구는 쌀 한 모금이 없어 굶어 죽고,
누구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위대한 인물이 되기도 하는 반면,
누구는 부모 잘못 만나 장애인으로 태어나 평생 고생하다 죽고, 이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나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신은 차라리 공평하다고 하지나 말든지.... 라는 거죠.
뭐.. 엄마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 나는 신의 공정함을 믿어요. 그게 내 신앙의 밑바탕이니까요.
신은 인간을 "자유의지" 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어요.
단순히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 하게 하려면 이런 "인간의 선택권"을 애당초 주지 않았겠죠.
인간이 "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이스라엘은 타락하지 않았겠죠.
인간이 "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세상은 공평한 세상이 되었겠죠.
왜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라는 거죠.
이 세상은 절대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지 않아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 거죠.
공평하지 못한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세상을 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구현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인간이 신의 뜻과 다르게 행동할지라도 자유의지를 빼앗아 가지 않으시고,
"인간" 세상에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들 속에서 예수님을 있게 하셨죠. "전능한" 방법이 아니라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과 달리 어긋나갈 때 , 신은 이스라엘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뺏고 전능하신 힘으로 바로 잡았나요?
아니죠. 오히려 "인간" 인 선지자를 세우시고 "인간" 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신의 뜻을 알려오셨지 않습니까?
누누이 말하지만 신은 로또 당첨이나 시켜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공정성은 신의 것이고, 인간의 모든 것을 미리 마음대로 조종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그의 뜻대로 인간과 이 세상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인 것이고, 그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까지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믿지만, 이 세상은 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이 공정한 이유입니다.
2015-12-11 10:45:15 | 박혜영
"그래, 우리의 모든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말씀하셨지."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셨는데 있는 그대로 살 수가 없지.."
형제님의 글을 읽는 동안 공감하며 이렇게 되뇌었답니다.
참된 살아있는 예수님신앙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5-12-02 14:15:44 | 김상희
안녕하세요?
참으로 진솔하며 의미 있는 글을 접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이런 글들 모아서 조그만 PDF 묵상 집으로 내려고 해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12-02 12:05:20 | 관리자
맞아요! 맞아! 제 경우도 주자매님이 다시 새겨준 문장의 내용과 같아요.
어떤 경우에도 다시 화해 해야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려야 하고 다시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하고 다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신앙인 거 같아요.. 우리의 공통된 믿음이 그렇다면 교회생활도 어렵지 않을 거 같네요.
2015-12-01 22:57:54 | 오혜미
형제님 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면 그안에 진솔함, 삶의 소소한 일들의
깊이 있는 통찰과 표현들이 마치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신것과 같이 진한 향이 우려 나오는것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식들의 학비를 걱정하는 그 쪼들리는 살림걱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사소한 일로 다툰 부부싸움의 생각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랬다가 멋 적게 다시 화해하는 그 멋 적은 화해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부부싸움 한 후 다시 화해하며 살아야 되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살아있는 예수님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제게 부족해서인지 참 와닿네요. 감사합니다~!
2015-12-01 21:44:56 | 주경선
내밀한 일들을 진솔하게 풀어낸 글 잘 읽었습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만 열리듯이
삶이 곧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인데
우리는 말이나 지식이나 그 사람을 둘러싼 경력과 환경 등이
그 사람의 믿음을 말해 준다는 대단한 착각을 곧잘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셨던
인간 특유의 위선과 가식을 극복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좀 더!, 좀 더!"를 외치며
내면의 바닥까지 자신을 성찰하려 노력하시는
형제님의 깨끗하고 맑은 정신에 공감과 응원의 박수를 드립니다.
2015-12-01 19:58:37 | 김대용
Amen amen!!
2015-12-01 12:22:39 | 박혜영
#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가?
교회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나에게 하나의 작은 고민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댓글로 글 잘 읽었다는 인사말과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칭찬을 듣고는
내 마음속에서 야릇하고 요상한 마음의 충동이 일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 하나가
잘못된 환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질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글 잘 읽었다는 칭찬을 계속 듣다 보면
나 스스로가 어느새 당치도 않은 훌륭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가 앞섰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어쩔 수없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요사스러운 마음이 생겼나봅니다.
나는 정확히 2001년 8월부터 내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면서
내 나름대로의 신앙에 대한 명제 하나를 걸어놓고
믿음생활을 하기로 작정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삶에 있어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라는 단어를 넣고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단어는 기독교사상에 배경을 두고 있는 말이기에
이 말을 내 삶의 명제로 삼겠다는 결심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5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 “있는 그대로” 살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으며 그러한 현실에 큰 불만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있는 그대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음에
매번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이 현실에
절망감마저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 나의 고민거리입니다.
그런데 환갑을 한참 넘기게 된 지금까지도 전혀 있는 그대로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엄청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나는 왜 빨가벗고 나돌아 다니지 못하는가?
이렇게 묻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인 것 또한 너무나 잘 압니다.
누가, 사람은 왜 빨가벗고 나다니지 못하는가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 같은 문제는 문제로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엄청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나 개인의 실질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방귀를 힘차게 뀌어댑니다.
그러나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소리가 안 나게 그만 참아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없는 데서 방귀를 뀌는 것도 나 자신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방귀 한번 안 뀌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나는 이러한 나 자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가 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밖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들어온 줄 빤히 알고 다그치는 아내 앞에서
가진 능청을 다 떨어가며 생트집 잡는다고 딱 잡아떼는 이름 없는 가장으로부터
국민의 혈세를 통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하게 떼어놓았다가
들통이 나는 순간까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던
대한민국의 유명한 전직대통령과
코흘리개도 다 알 정도로 들통 날 대로 다 들통나버린 정사사건을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네버, 네버를 연발하던 미국의 유명한 전직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중간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도 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사람이란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알려진 그 만큼만 정말로 훌륭해도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세상에 알려진 그만큼도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훌륭하다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허명을 뽐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학창시절 때부터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을 배워왔습니다.
내가 글을 써 보니 정말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내 속에 내가 쓴 그런 글의 세계가 없다면 글은 한 자도 쓰여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컴퓨터화면위에 한 자, 한 자 들어가 박히는 글들은 모두 다
내 속에서 지금 막 튀어나오는 글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내 속에 있던 것들이 컴퓨터화면위에 나와 박혀야 됩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정신이 담겨진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기독교 이야기란 하늘의 이야기입니다.
그 하늘의 이야기가 지금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하니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내 육체 속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나의 기독교정신은 나의 육체 안에 있고 나의 영과 혼도 내 육체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기독교정신과 영과 혼을 담고 있는 나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그 무엇과 비교가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년 어느 때쯤,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며 보고 느꼈던 그 연못이 생각났습니다.
연못바닥에는 더러운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빠져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나뭇잎은 물론 공원에 산책 나왔다가 코풀어 쓰레기통에 버린 휴지가
바람에 날려 연못 속에 가라앉은 것까지 그 속에는 없는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더러운 연못바닥에서 물위로 고개를 내민 연꽃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실력으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연꽃은 연못바닥의 더러운 잡동사니들을 매달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빚으신 그 빛만을 안고 물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훌륭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훌륭함이란
바로 이 연못에서 고개를 내민 하늘빛 같은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하다는 그 한 사람도 온갖 쓰레기들의 잡동사니 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연꽃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도 함께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따라 다니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모든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하지는 말라“고 말입니다. (마 23장 3절)
나는 청년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엎어지고 자빠졌다 다시 일어나면서 행복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나온 내 삶 동안에 일어났던 “사람의 바람”이야기만 다 하려고해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일 것입니다.
“모모라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느 기도원에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더라."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훌륭한 목사가 왔다더라.”
“유명한 말씀의 종"
“영력이 넘치는 목사”
“굉장한 부흥회목사" 등등 실로 끝도 없는 사람의 바람이야기들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은
어떤 훌륭하다는 사람을 쫓아다녀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기독교신앙은 자기 자신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생생한 생활의 삶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오늘도 살기위하여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그 작업현장에서 나오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삶의 실망과 좌절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
힘차게 전진하는 그 고뇌와 결단 속에서 참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유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바람을 경계해야 됩니다.
특별히 “유명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름을 조심하고
“훌륭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람일수록 더욱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참된 신앙은 어떤 용하다는, 유명하다는, 훌륭하다는 사람을 쫓아
산으로 들로 왁자지껄 쫓아다니는 달콤한 환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식들의 학비를 걱정하는 그 쪼들리는 살림걱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사소한 일로 다툰 부부싸움의 생각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랬다가 멋 적게 다시 화해하는 그 멋 적은 화해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부부싸움 한 후 다시 화해하며 살아야 되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살아있는 예수님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아름답게 피어있는 연꽃을 보고 더러운 연못바닥에 뿌리를 박고 피어난 꽃이라고
침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연못바닥에서 어떻게 이렇게 곱고 순백한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감탄하며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연못 감탕바닥에 손을 처넣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훌륭하다는 사람의 감탕밭에는 또 유명하다는 사람의 감언이설에는
그렇게도 쉽게 손뿐만이 아니라 영과 혼까지 다 디밀어 주며 쫓아다닙니까?
진정으로,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쫓아 다녀야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몸을 입고 태어나 우리처럼 살았지만 죄는 없으신
단 한 사람이며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연꽃 구경하듯 하는 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2015년 11월30일
유 용수
2015-11-30 20:55:55 | 유용수
안녕하세요?
파리테러와 광화문시위와 역사교과서가
엊그제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소천이후 많이 숙연해진 오늘 아침 입니다.
가신분이나 남으신 분이나 예수님안에 계시다면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우리의 시작은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지난날의 감사와 불평,
긍정이든 부정이든 자신도 모르게 둘중 하나의 옷으로 갈아입고 오늘을 시작 하겠지요.
어제를 지나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의 현재는 항상 미완성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방금쓴 왜냐하면의 표현 또한 과거가 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안에 있음으로 이미 구원 받은 한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내 생각과 다르다 하여 동전의 양면은 결국 하나임에도 굳이 둘로 나눔은 시간 손해일것만 같은 생각이들어
이런 글로 칼럼에 올려 봅니다.
동전의 양면성 (두 얼굴 )
밥이 질지도 않고 되지도 않아요,...적당히' 맛 있게 되었을 때 쓰는 말입니다.이 적당하다는 말이,질죽한 밥이나 꼬들꼬들한 밥을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내일까지 납품을 요구받은 업체에서 오늘만큼은 근무 시간을 넘겨서라도 끝내줘야 하는데,사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우리 '적당히' 하고 퇴근하지요!.... 이리되면 적당히 라는말이 오늘만큼은 더 이상 좋은 뜻으로 쓰여질순 없지요. 영어에서 inveterate 란 말이 있습니다.'오래 지속되는' 또는 '끈기 있는'의 뜻을 하고 있지요.적어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그러나 여기."He is an invterate gambler, ins't he?""그는 고질적인 노름꾼이야, 그렇지 않니?끈기있다는 말에 고질적이라는 명패를 걸어놓으니 맑은날에 황사가 됩니다.inveterate 란 말은 veteran (어떤 일의 전문인, 고참군인)과 함께 Latin 어의 vetus (old)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지요.어떤 일에 오래 종사해서,한 분야의 베테란 급이면 얼마나 좋을까.그런데 그 좋은 말에서 '고질적'이라는 말도 나왔으니,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과거에 우리 어르신들(60대이상)께서 이양반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은듯 합니다.제가 듣기로는 비슷한 연배에 사람들에게 존중하는뜻으로 불려진듯합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서 뜻을 헤아려 보니 그다지 나쁜뜻은 아닌것 같은데 대화의 장에서 대화의 상대와 주제에 따라 옵션이 발생 하는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도 좋은말 쓰기를 권면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사전을 찾아 봅니다.
사전적의미에서이 양반의 이 란1. 말하는이에 가까이 있거나 말하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2.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이 양반의 양반 이란1.고려,조선시대에 지배층을 이르던 신분, 원래 관료 체제를 이루는 동반과 서반을 일렀으나 점차 그가족이나 후손 까지 포괄하여 이르게 되었답니다. 2.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을 칭하는말 정리 하면 앞에 계신분은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이라는뜻
그렇더라도 엊그제 싸우다 헤어진 사람이 내게 다시와서 이 양반아~ 엊그제 속편 찍어야지~하면 이양반아가 더이상 개인적으로 양반이 되거나 듣고 싶지않은 상태가 될수도 있는 세상이지요. 반대로 지위 좋은분으로부터의 이양반아 호칭은 여전히 미소를 만들수도 있지요. 혹여 상대방의 지위나 연령에 인기몰이에 편승된 호칭이라면 칼집에서 나온 칼이 될수도 있겠네요. You and I 와 / 당신과 나/ 국민과 나, 같은 말이긴 하지만 듣는이의 일기와 기분에 따라서 무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엊그제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분의 영욕의 지난세월이 방송을 통하여 회자되고 있을때 여야를 떠나서 가신분에게 향하는 부정보다 훨씬 많은 긍정의 평가들이 듣기에 참 편했읍니다. 정치도 살아있기에 각당의 논쟁에서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면 나도 당신도 아닌 우리의 이익에 당연히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데 아침에 잠깐 맞추고 오후엔 다른 얼굴의 양면성에서 우리는 양치기소년을 자주 만나게 되고 정한시간 임박하여 서로의 신뢰를 땡처리 하고 결국 최선이 아닌 차선에 손드는 잘못된 관습에 길들여져 가고 있는건 아닌지요?. 법은 있으나 인내로 기다려야 하니 미리미리 대처못한 법의 미숙으로 민생은 급한불 끄기위해 편법이 등장합니다. 엊그제 해외에서 돌아오신 대통령의 국회의원을 겨냥하신 말씀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이기에 발생될 수 있는 정치적인 굴레이기에 이는 긍정만큼 부정만큼 주어지는 각자의 십자가이며 숙제일것입니다. 지시받은 숙제를 했든 바빠서 못했든 우리 주위에서 되어지는 일들이 당리당약을 벗어나서시종 국민의 안위만을 위하여 모두 좋은 쪽으로 충고하고 해석되고 좋은 쪽으로 결론이 맺어진다면 대한국인의 세계적으로 뛰어난 명석한 머리와 손재주로 얼마나 더 멋지고 좋은 공동체가 될수 있을까. 오늘따라 주변의 형제님 자매님들의 사랑스런 얼굴을 떠올리며 올겨울 좀더 따스하고 싶은 우리의 화평을 위해 동전의 두얼굴을 묵상해 보았읍니다. 샬롬
2015-11-26 10:08:29 | 윤계영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함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됨을 감사드려요.
목사님의 기도에 자주 언급되었던,
생명을 연장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 내용이
생각나네요.
살아있는 것도 내 뜻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는 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2015-11-10 23:25:17 | 김상희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단순해져야하고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는 목사님 말씀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2015-11-09 14:40:24 | 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