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못한데, 세상을 만든 신은 공평한 분이라니!!
지금까지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문제였죠.
누구는 부유하게 태어나 평생 놀고먹고, 누구는 쌀 한 모금이 없어 굶어 죽고,
누구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위대한 인물이 되기도 하는 반면,
누구는 부모 잘못 만나 장애인으로 태어나 평생 고생하다 죽고, 이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나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신은 차라리 공평하다고 하지나 말든지.... 라는 거죠.
뭐.. 엄마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 나는 신의 공정함을 믿어요. 그게 내 신앙의 밑바탕이니까요.
신은 인간을 "자유의지" 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어요.
단순히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 하게 하려면 이런 "인간의 선택권"을 애당초 주지 않았겠죠.
인간이 "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이스라엘은 타락하지 않았겠죠.
인간이 "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세상은 공평한 세상이 되었겠죠.
왜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라는 거죠.
이 세상은 절대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지 않아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 거죠.
공평하지 못한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세상을 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구현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인간이 신의 뜻과 다르게 행동할지라도 자유의지를 빼앗아 가지 않으시고,
"인간" 세상에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들 속에서 예수님을 있게 하셨죠. "전능한" 방법이 아니라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과 달리 어긋나갈 때 , 신은 이스라엘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뺏고 전능하신 힘으로 바로 잡았나요?
아니죠. 오히려 "인간" 인 선지자를 세우시고 "인간" 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신의 뜻을 알려오셨지 않습니까?
누누이 말하지만 신은 로또 당첨이나 시켜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공정성은 신의 것이고, 인간의 모든 것을 미리 마음대로 조종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그의 뜻대로 인간과 이 세상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인 것이고, 그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까지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믿지만, 이 세상은 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이 공정한 이유입니다.
2015-12-11 10:45:15 | 박혜영
"그래, 우리의 모든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말씀하셨지."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셨는데 있는 그대로 살 수가 없지.."
형제님의 글을 읽는 동안 공감하며 이렇게 되뇌었답니다.
참된 살아있는 예수님신앙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5-12-02 14:15:44 | 김상희
안녕하세요?
참으로 진솔하며 의미 있는 글을 접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이런 글들 모아서 조그만 PDF 묵상 집으로 내려고 해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12-02 12:05:20 | 관리자
맞아요! 맞아! 제 경우도 주자매님이 다시 새겨준 문장의 내용과 같아요.
어떤 경우에도 다시 화해 해야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려야 하고 다시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하고 다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신앙인 거 같아요.. 우리의 공통된 믿음이 그렇다면 교회생활도 어렵지 않을 거 같네요.
2015-12-01 22:57:54 | 오혜미
형제님 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면 그안에 진솔함, 삶의 소소한 일들의
깊이 있는 통찰과 표현들이 마치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신것과 같이 진한 향이 우려 나오는것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식들의 학비를 걱정하는 그 쪼들리는 살림걱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사소한 일로 다툰 부부싸움의 생각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랬다가 멋 적게 다시 화해하는 그 멋 적은 화해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부부싸움 한 후 다시 화해하며 살아야 되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살아있는 예수님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제게 부족해서인지 참 와닿네요. 감사합니다~!
2015-12-01 21:44:56 | 주경선
내밀한 일들을 진솔하게 풀어낸 글 잘 읽었습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만 열리듯이
삶이 곧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인데
우리는 말이나 지식이나 그 사람을 둘러싼 경력과 환경 등이
그 사람의 믿음을 말해 준다는 대단한 착각을 곧잘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셨던
인간 특유의 위선과 가식을 극복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좀 더!, 좀 더!"를 외치며
내면의 바닥까지 자신을 성찰하려 노력하시는
형제님의 깨끗하고 맑은 정신에 공감과 응원의 박수를 드립니다.
2015-12-01 19:58:37 | 김대용
Amen amen!!
2015-12-01 12:22:39 | 박혜영
#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가?
교회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나에게 하나의 작은 고민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댓글로 글 잘 읽었다는 인사말과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칭찬을 듣고는
내 마음속에서 야릇하고 요상한 마음의 충동이 일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 하나가
잘못된 환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질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글 잘 읽었다는 칭찬을 계속 듣다 보면
나 스스로가 어느새 당치도 않은 훌륭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가 앞섰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어쩔 수없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요사스러운 마음이 생겼나봅니다.
나는 정확히 2001년 8월부터 내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면서
내 나름대로의 신앙에 대한 명제 하나를 걸어놓고
믿음생활을 하기로 작정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삶에 있어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라는 단어를 넣고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단어는 기독교사상에 배경을 두고 있는 말이기에
이 말을 내 삶의 명제로 삼겠다는 결심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5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 “있는 그대로” 살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으며 그러한 현실에 큰 불만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있는 그대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음에
매번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이 현실에
절망감마저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 나의 고민거리입니다.
그런데 환갑을 한참 넘기게 된 지금까지도 전혀 있는 그대로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엄청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나는 왜 빨가벗고 나돌아 다니지 못하는가?
이렇게 묻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인 것 또한 너무나 잘 압니다.
누가, 사람은 왜 빨가벗고 나다니지 못하는가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 같은 문제는 문제로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엄청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나 개인의 실질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방귀를 힘차게 뀌어댑니다.
그러나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소리가 안 나게 그만 참아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없는 데서 방귀를 뀌는 것도 나 자신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방귀 한번 안 뀌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나는 이러한 나 자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가 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밖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들어온 줄 빤히 알고 다그치는 아내 앞에서
가진 능청을 다 떨어가며 생트집 잡는다고 딱 잡아떼는 이름 없는 가장으로부터
국민의 혈세를 통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하게 떼어놓았다가
들통이 나는 순간까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던
대한민국의 유명한 전직대통령과
코흘리개도 다 알 정도로 들통 날 대로 다 들통나버린 정사사건을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네버, 네버를 연발하던 미국의 유명한 전직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중간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도 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사람이란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알려진 그 만큼만 정말로 훌륭해도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세상에 알려진 그만큼도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훌륭하다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허명을 뽐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학창시절 때부터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을 배워왔습니다.
내가 글을 써 보니 정말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내 속에 내가 쓴 그런 글의 세계가 없다면 글은 한 자도 쓰여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컴퓨터화면위에 한 자, 한 자 들어가 박히는 글들은 모두 다
내 속에서 지금 막 튀어나오는 글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내 속에 있던 것들이 컴퓨터화면위에 나와 박혀야 됩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정신이 담겨진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기독교 이야기란 하늘의 이야기입니다.
그 하늘의 이야기가 지금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하니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내 육체 속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나의 기독교정신은 나의 육체 안에 있고 나의 영과 혼도 내 육체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기독교정신과 영과 혼을 담고 있는 나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그 무엇과 비교가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년 어느 때쯤,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며 보고 느꼈던 그 연못이 생각났습니다.
연못바닥에는 더러운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빠져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나뭇잎은 물론 공원에 산책 나왔다가 코풀어 쓰레기통에 버린 휴지가
바람에 날려 연못 속에 가라앉은 것까지 그 속에는 없는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더러운 연못바닥에서 물위로 고개를 내민 연꽃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실력으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연꽃은 연못바닥의 더러운 잡동사니들을 매달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빚으신 그 빛만을 안고 물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훌륭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훌륭함이란
바로 이 연못에서 고개를 내민 하늘빛 같은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하다는 그 한 사람도 온갖 쓰레기들의 잡동사니 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연꽃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도 함께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따라 다니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모든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하지는 말라“고 말입니다. (마 23장 3절)
나는 청년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엎어지고 자빠졌다 다시 일어나면서 행복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나온 내 삶 동안에 일어났던 “사람의 바람”이야기만 다 하려고해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일 것입니다.
“모모라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느 기도원에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더라."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훌륭한 목사가 왔다더라.”
“유명한 말씀의 종"
“영력이 넘치는 목사”
“굉장한 부흥회목사" 등등 실로 끝도 없는 사람의 바람이야기들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은
어떤 훌륭하다는 사람을 쫓아다녀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기독교신앙은 자기 자신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생생한 생활의 삶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오늘도 살기위하여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그 작업현장에서 나오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삶의 실망과 좌절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
힘차게 전진하는 그 고뇌와 결단 속에서 참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유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바람을 경계해야 됩니다.
특별히 “유명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름을 조심하고
“훌륭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람일수록 더욱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참된 신앙은 어떤 용하다는, 유명하다는, 훌륭하다는 사람을 쫓아
산으로 들로 왁자지껄 쫓아다니는 달콤한 환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식들의 학비를 걱정하는 그 쪼들리는 살림걱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사소한 일로 다툰 부부싸움의 생각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랬다가 멋 적게 다시 화해하는 그 멋 적은 화해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부부싸움 한 후 다시 화해하며 살아야 되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살아있는 예수님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아름답게 피어있는 연꽃을 보고 더러운 연못바닥에 뿌리를 박고 피어난 꽃이라고
침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연못바닥에서 어떻게 이렇게 곱고 순백한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감탄하며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연못 감탕바닥에 손을 처넣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훌륭하다는 사람의 감탕밭에는 또 유명하다는 사람의 감언이설에는
그렇게도 쉽게 손뿐만이 아니라 영과 혼까지 다 디밀어 주며 쫓아다닙니까?
진정으로,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쫓아 다녀야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몸을 입고 태어나 우리처럼 살았지만 죄는 없으신
단 한 사람이며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연꽃 구경하듯 하는 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2015년 11월30일
유 용수
2015-11-30 20:55:55 | 유용수
안녕하세요?
파리테러와 광화문시위와 역사교과서가
엊그제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소천이후 많이 숙연해진 오늘 아침 입니다.
가신분이나 남으신 분이나 예수님안에 계시다면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우리의 시작은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지난날의 감사와 불평,
긍정이든 부정이든 자신도 모르게 둘중 하나의 옷으로 갈아입고 오늘을 시작 하겠지요.
어제를 지나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의 현재는 항상 미완성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방금쓴 왜냐하면의 표현 또한 과거가 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안에 있음으로 이미 구원 받은 한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내 생각과 다르다 하여 동전의 양면은 결국 하나임에도 굳이 둘로 나눔은 시간 손해일것만 같은 생각이들어
이런 글로 칼럼에 올려 봅니다.
동전의 양면성 (두 얼굴 )
밥이 질지도 않고 되지도 않아요,...적당히' 맛 있게 되었을 때 쓰는 말입니다.이 적당하다는 말이,질죽한 밥이나 꼬들꼬들한 밥을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내일까지 납품을 요구받은 업체에서 오늘만큼은 근무 시간을 넘겨서라도 끝내줘야 하는데,사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우리 '적당히' 하고 퇴근하지요!.... 이리되면 적당히 라는말이 오늘만큼은 더 이상 좋은 뜻으로 쓰여질순 없지요. 영어에서 inveterate 란 말이 있습니다.'오래 지속되는' 또는 '끈기 있는'의 뜻을 하고 있지요.적어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그러나 여기."He is an invterate gambler, ins't he?""그는 고질적인 노름꾼이야, 그렇지 않니?끈기있다는 말에 고질적이라는 명패를 걸어놓으니 맑은날에 황사가 됩니다.inveterate 란 말은 veteran (어떤 일의 전문인, 고참군인)과 함께 Latin 어의 vetus (old)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지요.어떤 일에 오래 종사해서,한 분야의 베테란 급이면 얼마나 좋을까.그런데 그 좋은 말에서 '고질적'이라는 말도 나왔으니,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과거에 우리 어르신들(60대이상)께서 이양반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은듯 합니다.제가 듣기로는 비슷한 연배에 사람들에게 존중하는뜻으로 불려진듯합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서 뜻을 헤아려 보니 그다지 나쁜뜻은 아닌것 같은데 대화의 장에서 대화의 상대와 주제에 따라 옵션이 발생 하는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도 좋은말 쓰기를 권면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사전을 찾아 봅니다.
사전적의미에서이 양반의 이 란1. 말하는이에 가까이 있거나 말하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2.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이 양반의 양반 이란1.고려,조선시대에 지배층을 이르던 신분, 원래 관료 체제를 이루는 동반과 서반을 일렀으나 점차 그가족이나 후손 까지 포괄하여 이르게 되었답니다. 2.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을 칭하는말 정리 하면 앞에 계신분은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이라는뜻
그렇더라도 엊그제 싸우다 헤어진 사람이 내게 다시와서 이 양반아~ 엊그제 속편 찍어야지~하면 이양반아가 더이상 개인적으로 양반이 되거나 듣고 싶지않은 상태가 될수도 있는 세상이지요. 반대로 지위 좋은분으로부터의 이양반아 호칭은 여전히 미소를 만들수도 있지요. 혹여 상대방의 지위나 연령에 인기몰이에 편승된 호칭이라면 칼집에서 나온 칼이 될수도 있겠네요. You and I 와 / 당신과 나/ 국민과 나, 같은 말이긴 하지만 듣는이의 일기와 기분에 따라서 무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엊그제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분의 영욕의 지난세월이 방송을 통하여 회자되고 있을때 여야를 떠나서 가신분에게 향하는 부정보다 훨씬 많은 긍정의 평가들이 듣기에 참 편했읍니다. 정치도 살아있기에 각당의 논쟁에서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면 나도 당신도 아닌 우리의 이익에 당연히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데 아침에 잠깐 맞추고 오후엔 다른 얼굴의 양면성에서 우리는 양치기소년을 자주 만나게 되고 정한시간 임박하여 서로의 신뢰를 땡처리 하고 결국 최선이 아닌 차선에 손드는 잘못된 관습에 길들여져 가고 있는건 아닌지요?. 법은 있으나 인내로 기다려야 하니 미리미리 대처못한 법의 미숙으로 민생은 급한불 끄기위해 편법이 등장합니다. 엊그제 해외에서 돌아오신 대통령의 국회의원을 겨냥하신 말씀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이기에 발생될 수 있는 정치적인 굴레이기에 이는 긍정만큼 부정만큼 주어지는 각자의 십자가이며 숙제일것입니다. 지시받은 숙제를 했든 바빠서 못했든 우리 주위에서 되어지는 일들이 당리당약을 벗어나서시종 국민의 안위만을 위하여 모두 좋은 쪽으로 충고하고 해석되고 좋은 쪽으로 결론이 맺어진다면 대한국인의 세계적으로 뛰어난 명석한 머리와 손재주로 얼마나 더 멋지고 좋은 공동체가 될수 있을까. 오늘따라 주변의 형제님 자매님들의 사랑스런 얼굴을 떠올리며 올겨울 좀더 따스하고 싶은 우리의 화평을 위해 동전의 두얼굴을 묵상해 보았읍니다. 샬롬
2015-11-26 10:08:29 | 윤계영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함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됨을 감사드려요.
목사님의 기도에 자주 언급되었던,
생명을 연장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 내용이
생각나네요.
살아있는 것도 내 뜻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는 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2015-11-10 23:25:17 | 김상희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단순해져야하고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는 목사님 말씀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2015-11-09 14:40:24 | 박현숙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말씀 어제 식당에서 외우고계신 두분 자매님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말씀에 아멘 이고 제 생활 가운데서도
늘 실천되어지길 바래봅니다.
2015-11-09 13:32:30 | 김혜순
지체장애 3급인 아들은 아픈 부모님과 동생을 위해 열심히 폐지를 줍습니다.
얼마나 극진히 동생과 부모님을 생각하는지 자기 몸을 아낄 줄 모릅니다.
리어카에 가득 채워 갖고 고물상에 가면 1,000원 짜리 두 세장에 동전 몇 개뿐이지만
언제나 즐거운 얼굴로 하루 온 종일 밤늦게까지 발뒤꿈치에 피가 나도 열심히 일합니다.
퉁퉁 부은 다리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웃음으로 응대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가족을 보면 언제나 얼굴 가득 미소가 넘칩니다.
버려지는 빈 상자 한 개에도 웃음으로 감사하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어요.
재산가인 80세가 넘은 아버지의 돈을 빼앗으려 아버지가 치매라고 속이고 거짓으로 재산을 위탁받아 처분한 사람이 법원으로부터 무효처분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헉! 세상에!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참으로 이 두 가지의 경우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장애를 갖고도 가족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해 하루 종일 몇 푼을 위해 일하면서도 행복해 하고
돈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돈을 위해 가족을 버립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핵가족이고 게다가 요즘은 일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타려고 하는데 모르는 낯선 남자가 있으면 타지 말라고 가르치는 경계심이 필수인 요즘엔 재력이나 권력 등 많이 가진 사람만이 사람대접을 받고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스스로도 소외되고 외면당합니다.
서로서로 오고가고 함께 나누던 그런 정이 참 드물어졌지요.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에 장애가 있지만
부지런히 소량의 폐지를 주우면서도 고마워하고 항상 웃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부턴지 웃음을 잃어버리고 심각한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기 때는 하루에 수 백 번을 웃는 것 같아요.
“까꿍” 한 번 만 해줘도 “까르르” 웃어대던 아기들이 어린아이를 거쳐서 어른이 되면서는
점점 웃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지요?
요즘의 청년들은 어려운 현실에 고민이 많아서 ‘삼포세대’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어요.
오히려 낙후된 아프리카의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국민들이 삶의 만족도가 더
높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어요.
잘 사는 편에 있는 우리나라는 삶의 만족도가 전 연령이 다 낮았고요.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항상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사와 만족하는 것을 잊고 살았구나...... ’
‘기뻐하는 것을 잊고 살고 있었구나.....’
반성이 되었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이니라.
살 전 5:16-18절 말씀을 외우고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참으로 실천에 너무도 더딘 저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사람이 너무나 미련해서 초심을 잃어버리기 쉽고
어려웠을 때를 잊어버리고 살고
더 많이 갖기를 추구하고 원하고 사느라
아주 작지만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하며 살려고 했는데, 나름 감사하며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해 대신 돌아가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잡다한 것에 신경이 가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첫 사랑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2015-11-09 12:55:39 | 이수영
"너는 네 백성 가운데서 소문을 퍼뜨리는 자처럼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또 서서 네 이웃의 피를 대적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속으로 미워하지 말며 어떤 식으로든 네 이웃을 책망하여 죄가 그에게 임하지 못하게 하라.(레위기 19:16-17)"
돌아다니며 남의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은 삼중의 독을 뿜어 내는 행위입니다. 즉 말하는 사람 자신과 그 말을 듣는 사람, 그리고 그 소문의 당사자 이렇게 세 사람을 해치는 행위입니다. 그 소문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이 교훈은 우리에게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엄히 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평판 듣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마귀를 도와 교회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할 것이 아니라 굴레를 씌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다른 형제들을 비방하면 자기가 높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이 나서 남을 비방합니다. 그러나 노아의 지혜로운 두 아들은 그 아버지의 하체를 옷으로 덮어 준 반면 그의 수치를 드러낸 미련한 아들은 무서운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어두운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도 다른 형제들의 관용과 침묵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악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규칙이요 우리 자신의 족쇄가 되게 해야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엄히 책망하는 것에 대해 허락하시고, 어떻게 하라는 방법까지 정해 놓으셨습니다. 잘못을 범한 형제 뒤에서 그를 악담하는 대신 그 형제의 면전에서 그를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답고 형제다우며 그리스도를 닮은 태도로서 유용하게 사용될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하기 싫어합니다. 그래도 형제의 잘못을 묵묵히 참고 견딤으로써 우리 자신도 그 죄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 생각을 새롭게 해서 그 일을 감내해야 합니다. 사실 신실한 사역자나 형제들로부터 적당한 때에 지혜롭고 애정어린 충고를 받음으로써 엄청난 잘못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은혜롭게 다룰 수 있는 본보기를 우리 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해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경고하시되, 그 경고를 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 경고를 받고도 자기는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해 한 베드로를 온유하게 참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한 형제들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스펄전의 365일 묵상"
2015-11-07 21:29:34 | 박진태
연서의 미소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따라서 미소가 지어지네요
베쓰자매의 소식을 통해 엄마가 되기 위한 한국 방문이 여러가지로
의미있고 유익한 경험이었음을 알게되니 마음이 흐뭇하네요.
소식 올려주어 반가웠구요.
연서가 건강하고 예쁘게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원합니다..
.
2015-10-31 13:34:19 | 김상희
무엇엔가 만족한 듯한 연서의 맑은 미소가 참 인상적입니다.^^
반가운 소식과 귀한 소감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2015-10-29 17:09:34 | 김대용
연서가 아래 사진 속에 기가막힌 미소를 지었네요. 너무 이뻐서 깜작 놀랐어요.
멀리 계시지만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멤버로서 더욱 든든히 서가시기를 응원합니다. 샬롬!
2015-10-29 13:27:43 | 장용철
반가운 소식과 반가운 얼굴 보여주니 좋네요 궁금했는데.
연서가 그사이 많이 컷네요.
저희와 함께 할 수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2015-10-29 13:13:07 | 김혜순
연서가 그새 많이 자랐어요^^
월반해서 유아실로 입성^ 하면 유아들이
연서를 중심으로 모이겠죠? ㅎ ㅎ
온식구가 한국에 돌아와 정착하면 좋을텐데~
연서가 건강하게 잘 자라길 모두 응원합니다^^
2015-10-29 11:00:00 | 이수영
안녕하세요?사랑침례교회 성도님들,
피츠버그로 돌아온 지 벌써 2주가 되가네요.
한여름에 한국으로 갔다가 가을에 돌아와서인지 여름이 그립고 한국이 그립습니다.
엄마가 도와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신생아 돌보는 게 익숙지 않아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나날을 보냅니다.꼼지락 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꾸준히 교회에 나오시는 가정들...특히 자모실에 계시는 자매님들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저희 미국 교회는 아직 작아서 유아실이 따로 있지만, 신생아들은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울면 복도로 나가고는 합니다.
몇 주 못 나갔지만, 사랑침례교회의 자모실이 그리워요!
한국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우고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교회에서 형제자매님들이 정말 기뻐하고 시간만 나면 만나기를 원하고 무엇보다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면이 놀라웠습니다. 미국 교회에서도 가족 같은 교회라는 말로 모토를 삼고 강조하지만 그게 실제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더라고요.
또한 오랜만에 부모님이랑 지내면서 가정과의 우애도 쌓고, 이제 엄마가 되었으니 부모님의 사랑의 대해서 조금 알게 된 것 같고요.무엇보다 교회의 삶이 무엇인지 배우고, 신기한 것을 보고 온 것 같아 제 삶에서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합니다.
제가 한국에 지내는 동안 친구처럼 가족처럼 대해주신 성도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제가 보고 배운 사랑침례교회 같은 커뮤니티에서 정착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희망합니다.
멀리서 사랑침례교회를 바라보며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2015-10-29 09:12:3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