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홍해 속에서 뒤엎으신 분께 감사하라. 그분의 긍휼을 영원하도다.” (시136:15)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오늘은 나라의 비상사태를 맞아, 성경의 정신을 따라 우리 교회는 자발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한 번만 더 살려주시고, 악한 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대한민국의 통수권자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끝없는 긍휼과 은혜를 잊고, 많은 악한 일들에 동참해왔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본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쁜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 이 나라는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이 가장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올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사회주의 체제 속으로 나라를 밀어 넣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매달려야 할 때입니다. 시편 136편의 말씀처럼, 영원한 긍휼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시어, 마음이 강퍅한 지도자들과 그들의 세력을 3500년 전처럼 홍해 속에서 뒤엎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자매 모임에서는 [여기가 그곳이다] 라는 주제로 함께 나눈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그 자리임을 고백하며, 함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Part 10 여기가 그곳이다 200p 예수님의 대답은 흥미로운 질문을 유발한다. 제일 먼저 예배 장소가 과연 중요한지 묻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성전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예배가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면, 왜 그렇게 특별한 예배 장소를 지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옛 제도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배 장소는 그리심 산에 있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지도 않다. 예전과 같은 예배 의식과 전통은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엘리트 사제, 제단, 희생 미사, 촛불, 분향 등이 필요 없다. :아직도 구약식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을 들 수 있는데요, 의식과 형식을 곧 예배라고 여기며 열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형식적인 예배가 참된 예배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01p 성전은 실체가 아니라 상징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것을 이해해야 했고, 우리 역시 그렇다. (고전 6:19)모든 성도는 살아 숨 쉬는 성전이며,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것은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 전 인류에게 시청각적인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성막(또는 성전)은 유대인들이 각 기구 하나하나를 두려움과 정성으로 준비했던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은혜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 ‘전(殿)’을 유대인들처럼 경외심과 정성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회개하게 됩니다. :모든 성도가 살아 숨 쉬는 성전이라는 말이 실제로는 피부에 와닿지 않아, 쉽게 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말씀과 함께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자연스럽게 예배와 연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3p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사실상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건물을 예배 장소로 특별히 지정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사실 새 언약 아래서도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몸인 성전과 별도로 또 다른 성전을 갖고 계시며, 거기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신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건물이다(엡 2:19-22).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이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장소’의 중요성도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시기에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렸는데, 아무리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려 해도 어느새 흐트러진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육체적인 편안함은 종종 영적 성장과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구원을 받은 지 오래되었어도, 때때로 내 영 메말라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지칠 때도 그렇고, 교회 생활이 길어질수록 기쁨보다는 타성에 젖을 때가 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는 이유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를 통해 다시 치유받고 회복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7p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는 형식이 아니라 성도의 마음 상태다. 우리의 공동 예배가 개개인의 예배하는 삶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평상시에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 아침 교회에 가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고 올바른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라면, 상한 심령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주일 동안 죄 가운데 살고 교회에 나아왔을 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며 하나님 앞에 회개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의롭다’ 하셨다는 말씀이 너무나도 큰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208p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교회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왔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무대에 선 배우이고 자신들은 그를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비평가인 줄 안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으니, 바로 그들이 무대의 배우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단지 그들이 대사를 잊어버렸을 때 상기시켜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관객'이시다! :나도 모르게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비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닌데, 우리의 육신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반응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경건 서적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 자신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배를 본다"는 표현을 흔히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예배의 관객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209-211p 개인적인 예배와 공동의 예배는 서로 양분을 공급해준다. 그래서 한편으로 내게는 성도들 간의 교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의 공동체는 지속적인 예배의 삶을 살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지원과 서로 간의 격려가 없으면 우리의 영적 성장과 안정성은 유지될 수 없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로 교회다. 교회 안에서, 즉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천국의 예배에 가장 가깝다. 누가 그런 예배에 참석하고 싶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책에서 소개된 석탄의 비유가 인상 깊었습니다. 한국 속담 중에도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할 때, 우리의 믿음이 더욱 생명력을 얻고, 유익을 얻는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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