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남자와 결혼할까, 다른 사람과 할까?
이 직장으로 할까, 더 기다릴까?
무언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계시를 주실 줄로 생각하고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뜻을 알려주실까요?
"하나님이 이번에 인도하셨어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겠어요. 그분의 뜻을 알아보려고요.'
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그라미 안에 찍혀 있는 자그마한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가 가능한 거대한 강과도 같습니다.
그 가능성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백 혹은 수천 가지의 대안적 선택들이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빨간 색 글은 피터 블룸필드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http://itempage3.auction.co.kr/DetailView.aspx?ItemNo=A553518626&frm3=V2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필독서입니다.
이번 주일에 10권을 가져다 놓을 테니 빌려다가 읽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악순환에 들어가면
정상적인 믿음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하기 바랍니다.
이 책은 너무 좋은 내용을 좋은 예와 함께 잘 가르쳐 줍니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맹목적 신앙이 문제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할 때 일어나는 주된 문제는 주관주의의 문제다. 사람의 지각과 주관적 경험들은 증명할 수 가 없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우리는 입증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것을 반증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냥 경험일 뿐이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나 ‘내가 꿈을 꾸었다’는 말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두 가지 모두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누군가가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빙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 그 말을 믿어야 하는가? 객관적인 사실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맹목적 신앙일 뿐이다.
참 선지자들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입증해 주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 선지자들의 신분증이었다. 하나님이 그 위에다 인증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하셨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모세의 기적, 사도들의 기적,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은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적들이 이제는 멈추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위대한 일들을 하시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의미의 ‘표적’이 아니다.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 전달자임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흔히 오용되는 현상에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맹목적 신앙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잭과 질이라고 하는 두 교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번 상상해 보자.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잭.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멈추었어.
잭 : 내가 직접 들은 말도 모르겠어? 네가 지금 나한테 말한 것처럼 확실하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니까.
질 : 잭, 네가 무언가를 경험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건 잘못 해석한 거야.
잭 : 어떻게 네가 감히 나더러 틀렸다고 말할 수가 있어! 내가 안다니까! 나한테 일어난 일이라고! 어쩜 너는 그렇게 독단적일 수가 있니? 무슨 근거에서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건데?
질 :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과 정통 기독교 신학에 근거해서야.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적이 있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완전하게 다 말씀하셨다고 했어. 역사적인 증거도 보았고, 성경적인 증거, 그리고 신학적인 증거도 다 보았어. 참교회는 언제나 지속되는 계시를 부인해 왔대. 지속되는 계시는 영지주의자나, 몬타누스파나, 신비가들이나 퀘이커들 같은 분파나 이교들이 하는 전형적인 주장이야.
잭 : 그것 참 안 됐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말씀하셨고, 나는 무슨 이교를 믿는 게 아니거든!
질 : 좋아, 그렇다면 개신교 신조들이 어떤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나한테 설명해 봐! 그리고 목사님이 어느 부분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했는지도 보여줘 봐. 왜냐하면 핵심적인 본문들을 예로 들어서 나를 납득시키셨거든. 목사님의 강해를 하나하나 짚어볼 테니까 어디에서 틀렸는지를 말해 봐.
잭 : 그게 바로 너의 문제야, 질. 너는 너무 지적이야. 너는 너무 논리적인 게 탈이라니까. 기독교는 원래 그렇게 교리적으로 정확한 게 아니야. 너는 성경이 마치 모든 행동과 견해의 최종적 판단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을 대해. 마치 칼처럼 그것을 휘두른 다구! 긴장을 좀 풀고 그 책에만 머리를 박고 있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열어봐.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시게 해! 하나님이 네게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게 해드려! 성경과 정통 신학의 역사로 나를 판단하는 일은 이제 그만둬. 모든 위대한 신조들과 신학자들이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상관 안 해. 그건 그 사람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니까.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는 거야.
질 : 그러니까, 잭, 네 말은 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틀렸다는 거니? 그거 좀 걱정되니 않니?
잭 : 내가 걱정되는 건, 질 네가 너무 객관적이어서 하나님의 영을 거절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거야. 너는 객관적이고 문법적인 성경적 사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열려’ 있지가 않아. 네게는 신앙이 파고들 여지가 없어.
질 : 나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고 거기에서 제대로 추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믿어. 참된 신앙은 합리적이지 너처럼 맹목적이지가 않아. 잭, 너는 너의 감정과 경험이 네 신앙을 지배하게 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네가 지속되는 계시 같은 걸 믿는 거야. 잭, 내가 보기에 너는 신비주의자 같아. 네가 이미 논리적 추론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너를 설득 할 수가 없어. 가장 유능한 사상가와 저자들이 네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너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 교회사에서 가장 학식 있는 종교 회의와 위원회가 네 견해가 틀렸다 해도 너는 그걸 대수롭게 여기지를 않아. 너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들여서 그들이 성경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했는지를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아. 너는 하나님이 너한테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확신 때문에 교만해져서 경건을 가장하는 거만한 태도로 식견 있는 교회를 깔보고 있어. 그들이 네 입장이라면, 하나님이 너한테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말씀하셨다면 이해할 거라는 생각으로 너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어. 너는 속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겠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짐작하다시피 대화는 이렇게 끝도 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모든 논쟁을 아주 빨리 끝내 줄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질에게는 있다.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나는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는데, 네가 그 말을 할 거라고 하셨어. 하지만 네 말을 믿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 적이 없다고.
불에는 불로 맞서라! 주관적인 허튼 소리는 더한 허튼 소리로 맞서라.
이제 잭은 자신이 촉발시킨 것과 비슷한 종류의 신비주의적 주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질의 주장을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질은 잭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맹목적 신앙’의 반응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에 잭이 질이 받은 ‘계시’를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잭은 질에게도 그가 받은 ‘계시’를 부인 할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2013-06-05 17:50:12 | 관리자
대신 죽은 윌리 리어(Willie Lear the Substitute)
위틀 소령(Major D. W. Whittle)아무에게도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노라(요한복음 15장 13절).윌리 리어는 미국 미주리 주 팔미라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862년에 그는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때였고, 그는 그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남부를 지지하였습니다. 북부의 세력은 팔미라 도시를 점령하고 그 구역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양쪽 세력 모두 끔찍한 폭동들을 행하였고 도덕적으로 용납 할 수 없는 일들이 역사에 수두룩이 기록되었습니다. 북군들은 총에 맞아 쓰러져 나가곤 했습니다. 또 집에서 쫓겨나 부당한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이런 일들을 복수하고 적들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부의 지휘관은 많은 시민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잡힌 시민들은 군법회의 재판에서 게릴라 부대라는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리어도 그중에 한 명이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린 뒤 장군은 총살형을 받은 사람 중 열 명을 뽑았고, 나머지 시민들은 폭동이 그친 후 사면이나 추후 형벌을 내리기로 했습니다.즉시 사형 받을 이 열 명은 제비뽑기로 뽑혔는데 다행히 리어는 거기에 들지 많았습니다. 하지만 리어의 이웃은 즉시 총살형을 받을 무리의 한명으로 뽑혔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이웃은 대가족의 가난한 가장이었는데 사형된 뒤 두고 떠날 처자식들 걱정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이웃의 상황을 지켜본 리어는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리어는 자기가 그 이웃을 대신하겠다고 장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장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열 명을 뽑으라는 명령이 내려졌기에 열 명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법률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 대신 대리자가 되어 죽겠다는 제의를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삼 자 즉 사형 선고를 내린 자와 선고 받은 자 그리고 선고받은 사람을 대신하는 대리자가 동의함으로 이 상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자신의 이웃 대신 사형장에 나선 리어는 사형 선고를 받은 나머지 아홉 명과 함께 “발사!” 라는 외침과 더불어 소총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리어가 흘린 피, 그리고 찢기고 망가진 그의 몸을 안으며 리어가 대신 죽어 준 그 이웃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내 생명을 빚졌구나. 나를 위해 이 엄청난 일을 해 준 그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할까!” 라고 생각했을까요?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에게 떨어진 사형을 모면하였나요?” 라고 그에게 물어본다면, 과연 그는 대신 죽겠다는 사람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 자기가 행한 멋진 일들이 더 중요했다고 자랑하면서 그 사람이 행한 일을 무시하고자 했을까요? 또는 “아, 나는 나의 믿음과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의지로 인해서 살아남았어요. 이 모든 것이 믿음과 나의 인격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고자 했을까요?
만약에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그 대리자의 값진 희생을 생략한 채 대답을 한다면, 그는 대신 죽어 줄 가치도 없는 배은망덕한,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그 사건은 그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웃은 결코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친구의 희생을 그렇게 무심히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친히 달리심으로 살려 주신 사람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무심히 그리스도를 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를 위해 대신 죽은 것이 자기를 살렸다는 소식을 쉬지 않고 퍼뜨리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독자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고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였으므로 당신의 모든 죄들이 용서된 것을 믿습니까? 그분을 믿으면서 당신은 그분을 시인하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삶으로써 그분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 그리스도의 소유인 우리는 그분의 피로 인한 구속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결코 싫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요, 구속자이신 그분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떼놓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이루신 ‘대신 속죄의 죽음’ 이외의 ‘다른 복음’ 혹은 ‘복음의 다른 형태’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권능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와 그분의 피 즉 ‘죄들의 사면을 위하여 그분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은 분’입니다.
22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24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로 돌아왔느니라(벧전2:22-25).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느니라(요10:11).
Taken from Gospel tract distributed by Pilgrim Tract Society, Randleman, N.C.
By Major D.W. Whittle
초역: 정아현
2013-06-05 14:06:25 | 관리자
아침에 제 아내가 읽으라고 준 글입니다.
도전이 되는 말씀이라 같이 공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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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미로에서 뒤틀린 목회자의 영성
(목회와 신학, 2004년 7월호)- 박영돈(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영성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마 목회자일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영성을 소유하기가 가장 힘든 사람 역시 목회자이다. 이것이 목회자가 처한 영적 딜레마이다.
최근 영성의 붐이 일어나면서 목회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목회자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한 듯하다. 영성 추구에 있어서 목회자만이 갖는 어려움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바로 직시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것이다.
욕망의 위력
러브호텔이 전 국토의 구석구석에 창궐했다. 신도시에까지 무섭게 번져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의 시위가 연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공권력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행정력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해도 러브를 막을 수 없다
종교나 교육의 힘도 러브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종말이 가까워 왔다’고 겁주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고, 욕망에는 회개가 없다.” 이 말은 욕망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 안에 이보다 더 큰 활력은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육신의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자유롭고 고상한 존재인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역작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인간은 이성보다 육적인 욕망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더욱 사실적인 인간 이해라고 분석했다. 니체나 프로이드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성보다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 성적 욕망,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더 은밀히 자극되고 주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이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또는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이성이 욕망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육도 권력과 물질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권력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세속적 욕망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위장되고 합리화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종교이다. 성스러운 명분과 슬로건 아래 속된 욕망이 흉측스럽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감쪽같이 은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종교로 겉포장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은밀히 결합하여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평안, 세상에서의 형통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여실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축복 신학, 번영 신학, 성공주의 메시지가 이를 부추기는 동시에 합리화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열심히 추구하는 성령운동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을 끌어당겨 이기적 자기실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목회자의 세속적 야망이 교인들의 그런 욕심과 하나로 맞물려 대형화와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의 폐단을 불러왔다. 한국사회가 온통 물질과 권력과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있는데, 세상을 헛된 욕심에서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띤 교회마저 그 욕망의 광적 질주에 합세하고 있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성속이 함께 뒤엉켜 품어내는 욕망의 열기로 가득한 정욕의 분화구와 같은 모습을 방불케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는 심층적 분석을 요한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교인들의 ‘욕망의 세속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교묘히 위장된 육신의 소욕 - 힘과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성직을 수행하고 영적인 일을 해온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세속에 오염시켜 혼탁하게 하고 뒤틀리게 하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적 명분으로 가려진 육적 욕망
욕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육적인 욕심은 영안을 멀게 하여 영적 분별력을 둔화시킨다. 그래서 신자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수록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육신의 간교함이 성스러운 명분으로 인해 보강되고 이중적으로 위장되면 그 ‘미혹의 힘’은 배가 되어 영적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이기적 욕망을 따라 목회하는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투철한 명분론에 빠져서 자신이 그런 줄로 착각하며 그러한 구호를 더욱 힘차게 외치곤 한다.
그러나 존 오웬(John Owen)이 지적했듯이, 육신의 세력은 “가장 잘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영적 문제는 자신 안에 얼마나 육신이 강하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힐라리(Hilary)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불경건한 열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열망”을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이 얼마나 자신의 영광과 명성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서 자극될 수 있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고 싶은 갈망은 자신이 경배를 받고 싶은 마귀적 욕망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곧 자기숭배의 열망이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를 숭배하는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곳이다.
목회자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이름 내기, 업적 쌓기와 명성 얻기에 집착하게 될 때 이런 위험은 극대화 된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목회자의 이런 이기적 야망을 부추기고 고조시킨다. 목회자마저 자기도 모르게 성공지향적인 경쟁사회의 논리와 가치관에 젖어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가기 쉽다.
또한 교회 성장은 수적 증가라는 가시적인 증거로 나타나야한다는 인식이 교인들 안에 보편화되면서 목사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스트레스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성장을 추구한다.
‘교인수가 목사의 계급장’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생길 정도로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성공의 척도라는 은연중의 암시가 교계 안에 편만하게 되면서, 이것이 젊은 목회자들 안에 무서운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성공 마니아’를 배태하였다.
사무엘 리마(Samuel Rima)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나는 노골적으로 영적인 스타의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내 모든 사역의 은밀한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완벽하게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수년 동안 나의 사역의 노력은 미묘하게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에 의해 운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천국의 언어로 그러한 의도를 위장했고, 나와 함께 사역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비슷한 성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과 대형화를 위한 열심이 영적 명분으로 포장된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망에서 상당부분 자극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음 전파라는 미명으로 섬긴 우상, 교회성장”이라는 손봉호 교수의 비판은 교회성장을 위한 과도한 열심 속에 감추어진 목회자들의 헛된 욕망을 간파한데서 나온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헛된 욕망의 열매들
이러한 목회자의 육적인 욕망은 그의 인격과 영성, 그리고 모든 사역을 부패하게 한다. 목회자가 개인적인 야망에 이끌려 목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인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은밀히 이용하려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사람들을 “너”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세상에 보편화된 인간관계임을 지적했는데, 목회자가 이런 세속적인 원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질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과 인격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일과 업적 중심의 목회로 치우친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동기를 감추고 교묘한 수법으로 교인들을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쪽같이 위장해 교인들이 그 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은 그들이 내 뜻을 행하여, 내가 영광을 받는데도 말이다.
육신을 따르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에너지와 자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신앙인격 성숙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목회자의 성공적인 업적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거대한 건물 건축과 숫자 늘이기 전도와 프로그램 확장에 그 힘을 소진하게 한다.
또한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은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기도와 영성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의 기도는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겸손과 거룩함을 구하는 기도마저도 경건 자체보다 경건의 유익과 명성에 더 집착하는 육적인 마음에서 촉발된다.
야고보는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는데(약 4:3), 육적인 목회자의 기도가 많은 경우에 이런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미명으로 치장된 ‘목회자의 은밀한 종교적 정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때로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의 기도를 기뻐하셔서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교인들과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거룩한 성령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동력으로 이용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욕망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간절해진다.
기도라는 욕망의 탱크로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적 보화들을 자신의 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육적인 목회자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패한 인간의 육신을 섬기는 ‘색욕거리’로 변질된다.
육적인 소욕을 따르는 목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목회자의 영성이 현저히 퇴화된다는 것이다. 육적인 욕망은 목회자를 영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역기능을 발휘한다. 목회자를 지치고 탈진하게 하며 영적인 고갈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는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공허하며,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마음에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죄에 대한 저항력은 약화되고 유혹에 대한 면역은 저하되어 특별히 자극적인 죄, 음란과 같은 죄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기적 야망과 음란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욕심이 많고 이기적 야심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목회하는 이는 결국 여러 가지 부도덕하고 음란한 죄에 연루되기 십상이다.
슈네이즈(Robert Schnase)가 지적했듯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들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대다수의 비극은 목회자의 타락한 욕망에서 초래한 것들이다.”
참 자아를 잃은 목회자
또 다른 치명적인 결과는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진정한 자아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이다. 목회자가 육적소욕을 따라 사역하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기중심적 추구를 위해 소모된다. 그래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세계는 황폐해진다. 목회자가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자아중심적인 뜻과 욕망을 좇을 때 그의 내면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부여하는 풍성한 영적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필요한 영적자원이 고갈된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는 진행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도 산출되지 않는다. 결국 목회의 은사는 있을지라도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된다. 그래서 뛰어난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탁월함과 위력 때문에 더 고차원적으로 자신을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가장할 수 있는 위험이 커진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감동적이고 은혜롭다. 이렇게 영성과 설교는 함께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목회자의 죄성 때문에 이것이 괴리되는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진정한 영성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설교의 은사가 아니라 인격의 열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격만을 중시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목회자의 참된 영성을 위해서는 인격의 열매와 설교의 은사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은사와 열매의 상호작용과 연합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의 소욕을 따라 겸손히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역을 위해 활용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인격자로 성숙한다.
반면에 설교의 은사를 육신의 소욕, 즉 이기적 야망을 따라 사용하면 그 은사는 영적성숙에 기여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열매로 귀결되지 못하는 은사로 전락한다. 결국 목회자의 육신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자신의 인격개발과 자아성숙에 사용될 수 없게 한다.
육신적 목회자는 성화보다 사역과 업적성취를 위해 성령의 은혜를 더 열심히 구한다. 강단 위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강단 밑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그렇게 원치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밑에서의 그의 모습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진정한 자아 성숙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에게 가식의 무거운 짐이 가중된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자신을 좀 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 상에 자신을 맞추거나, 자신이 가장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아내려고 힘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인격과 욕망을 숨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가 애써 창출해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율성과 창의성이 결여 되었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고 가식적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점차 자신의 외양을 실제로 착각하여 가면을 참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진정한 자아를 상실할 위기에 봉착한다. 그의 열심과 헌신은 그 가면을 보강하여 참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더욱 힘들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가면으로 완고해진 자아는 깨어지기가 가장 힘들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살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개혁주의 목사」에서 목회자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자기성찰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지금은 이 고전적 영성훈련의 부활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목회자들이 외적 성취에 너무 분주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볼만한 여유가 없다. 자신 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흉한 “파충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욕망의 용솟음침을 예민하고 솔직하게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을 최대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주관된다. 자신 안에 측량할 수 없이 간교하고 거짓된 육신의 소욕이 무섭게 역사하며, 이를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이 욕망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자신 안의 욕망의 움직임, 은밀한 동기의 복합성을 판독할 수 있는 예리한 영적 투시력을 갖는 것이 목회자의 영성 계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시편기자와 같이 “나를 살피소서”라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어떤 일에 매진하도록 몰아가는가, 내 마음이 지속적으로 애착하며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할 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 은혜를 구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정규적으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 일을 과연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을 항상 정직하게 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 안에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을 위한 열망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맹렬한 싸움이 계속된다. 목회자의 심령이 가장 격렬한 영적 전쟁터일 것이다.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총동원하여 공격하며, 그의 탁월한 위장술로 목회자를 미혹해 자신의 욕망, 즉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주의 일을 하게 한다.
교회의 영적 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해서 마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는 시작된다. 역으로 목회자가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 때 그의 영혼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온 교회에 풍성한 생명력을 공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우상들, 성공과 명예와 인기라는 우상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칼빈이 강조했듯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목회자가 자아 중심성을 포기할 때 그의 자아는 내면세계에 거하시는 성령께 다시 사로잡힘으로써 좁은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큰 자아, 하나님께 지배받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거짓된 외면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 허비했던 영적 에너지를 성령 안에서 참된 자아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욕망으로의 초대
이기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결코 욕망 자체를 아예 죽이거나 그것을 최소한도로 억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기적 욕심이 많은 것뿐 아니라 욕망이 없거나 적은 것도 영성의 무서운 적이다. 이기적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 냉담함과 나태는 거짓된 육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육신적인 목회자는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 만한 잠재력과 은사가 없거나 그럴만한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하면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고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잘 개발하여 성공과 명성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확률이 높은 반면, 설교의 은사가 그다지 탁월하지 못한 이들은 그런 야망이 없는 대신 말씀사역에 성의와 열정 없이 임하는 적당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이와 같이 육신적인 욕망으로 주의 일을 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직업적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목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큰 문제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마음의 공백을 새로운 욕망, 더 강하고 고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욕망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욕망으로 초대하며, 우리 안에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는 성공을 위한 욕망과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는 열심 자체를 본질적으로 죄악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원대한 꿈과 포부와 비전을 갖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갱신하는 사역은 먼저 우리 마음의 깊은 욕망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본적 지향성, 추구, 애착이 획기적으로 전환되게 하신다. 육신의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생각이 성령의 일에 집중되고 이끌리게 하신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소생시키신다. 이기적인 욕망은 소멸되고 거룩한 열망이 타오르게 하신다. 이런 거룩한 욕망이 없이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마음의 성결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이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만 온전히 집중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영적 성숙이 없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두 방향으로 나누이기 때문이다.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이렇게 분열되어 통합된 욕망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하나로 모아져 하나님의 뜻만을 “전심”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자유함이며, 이러한 자유함 속에서만 성화와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룩한 욕망이 참된 영성의 핵심이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하며, 그 강도가 영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이런 욕망 없이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또한 이런 욕망 없이는 진정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다. 교회사에 길이 빛날 신앙의 본과 자취를 남긴 주의 종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이며 영적인 거장이 되게 하는 원동력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욕망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사랑이 그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욕망은 주님께 최상의 존귀함과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My Utmost for His Highest)다하려는 열정이며, 주님을 본받아 최대한 성결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성공한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은 잊혀 질 때 행복해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전심으로 원하는 것이다.
원본 글은 다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4062?boardType=M®dt=20130604115719&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
2013-06-05 11:50:19 | 관리자
교회에서도 장례를 감당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을 자유롭게 써야하므로 대부분 은퇴하신 분이나 자유업을 하시는 분들이
자원하여 장례팀을 구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김자ㅒ님 가족들에게도 빛이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함께 수고하신 성도들의 수고에 감사합니다.
주께서 기쁨으로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2013-05-30 08:08:22 | 이수영
어제, 성당을 다니시던 고모님이 지병으로 별세하셔서 천주교식(?)으로 행하는 장례식을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도 함께 하게 되었는데 비록 염불처럼 반복한다든가 제사와 흡사했지만 고모님처럼 가족이 얼마되지않는 사람에게는 이일을 감당하고 있는 성당사람들이 참 의지된다는것을 느꼈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해야하는데 안타까운 이 현실을 뒤로 하고요, 우리교회도 연세있으신 분들, 혹은 형제님들께서 함께 해주시면 형제자매들에게 위로도 되고 사랑을 나눌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몇자 적습니다.
2013-05-30 01:22:46 | 이청원
일산에서 오시는 김옥림 자매님은 1년 반 전에 박미선 자매님을 통해 구원을 알기 원한다고 하시며 송내의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구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고백하고 6개월 정도 다니시다 교회가 인천으로 옮겨지면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주 전에 다시 교회를 나오셨습니다. 남편께서 갑자기 백혈병으로 쓰러져서 입원해 있다고 하시면서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중환자 무균실에 있어서 환자 방문이 어려운 가운데 지난 주일에는 자매님이 오시지 않아서 지인을 통해 목사가 방문해서 위로하며 기도하려 한다고 전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워낙 건강하던 분이라 아무도 그렇게 빨리 별세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가운데 갑자기 상을 당했으므로 제가 와서 입관 예식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 흔쾌히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목사가 된 지는 10년이 넘었고 이 교회를 담임한 지 5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장례식을 치른 적이 없어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입관 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요일 저녁 5시에 여러 성도님들이 반포의 장례식장으로 와 주셔서 - 천안에서도 올라오심 - 은혜롭게 잘 마쳤습니다.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자매님을 위로하고 제가 더 도와드릴 것이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다음 날 발인과 하관 예식도 해 달라고 해서 흔쾌히 허락하고 저는 곧바로 인천으로 내려와서 다시 발인과 하관 예식을 공부하고 인쇄물을 만든 뒤 수요일 새벽에 깨서 6시 30분부터 발인 예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아침에 갑자기 이번에는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주면서 화장 예식도 해야 한다고 하기에 양재의 화장터에 가서 예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공부를 안 한 것이라 스마트폰으로 급히 자료를 찾아서 보고 예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마석으로 가서 납골당에 안장하고 모든 절차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제와 오늘은 장례식 공부를 하며 목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사실 장례식 공부를 하면서 찬송가를 모으고 성경 구절을 찾고 간단한 권면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제게 큰 복이 되었고 아내와 함께 시간을 내서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보내게 되어 기뻤습니다.
올해 초에 유준호/김소윤 부부 결혼식을 치렀고 이번에 장례식을 풀코스로 치르면서 이제야 목사가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목사로서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김동구/박미선 자매님 부부께서 장례식 3일 동안 오셔서 유족들을 위로해 주셨고 오늘도 하루 종일 저희 부부와 함께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새벽에는 정명도 형제님이 오셔서 모든 순서지를 나누어주고 도와주셔서 역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 화요일 저녁 5시의 입관 예식, 8시의 저녁 모임에도 30여 명의 형제/자매님들이 오셔서 위로를 전하고 가셨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여건이 안 돼서 오지는 못하셨지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기도로 염려하고 도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앞으로 장례식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여러 성도들이 함께 의논해서 질서 있게 품위 있게 모든 절차를 잘 진행하여 모인 분들에게 덕을 끼치면 좋겠습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롬12:15).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그 가정에 우리 주님의 부활의 위로가 충만히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 예수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지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함께 모여 위로하고 형제의 사랑을 더 많이 나누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한 하루이기도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내가 속히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예수님 안에서 바람은 너희 형편을 알게 되어 나도 좋은 위로를 받으려 함이니 20 같은 마음으로 너희 형편을 자발적으로 돌아볼 자가 내게 아무도 없느니라. 21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일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추구하지 아니하되 22 오직 디모데의 증거를 너희가 아나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듯 그가 나와 함께 복음 안에서 섬겨 왔느니라.
2013-05-30 00:07:0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서덕중형제님, 답변드렸습니다. 샬롬.
2013-05-29 23:30:15 | 관리자
반갑습니다 목사님 유튜브를 통해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개혁개정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처음 바꾸고 나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신앙생활 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목사님께 대적한다는 생각 때문에 말씀도 드려보지도 못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통해 이렇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목사님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저희 목사님께 목사님의 강의 말씀을 제가 구입해서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목사님 말씀을 큰 화면으로 볼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도 구입하고 싶습니다 담당자와 연락 할수있도록 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2013-05-29 23:17:52 | 서덕중
다음의 글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s://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42
중세 카톨릭 교회의 독재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라는, 천주교 교황보다 더 완고하고 무서운 사람의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칼빈은 이 모든 흉악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행하였으며 이런 신정국가 독재주의의 근본 원리를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습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결합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번개와 천둥을 내리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이 시간 한국의 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심지어 국내외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도 칼빈과 같은 독재자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목사들은 모두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우리의 교리가 옳아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욕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일을 미워하셨습니다.
목사들이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라도 성도들을 압제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다음은 칼빈에 대한 그 당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평입니다. 아무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교도 신앙이니 개혁주의니 하는 것을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그대로 지키려는 자들이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보다 더 무서웠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이 국내 성도들에게 자세히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이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줍니다.
샬롬
---------------칼빈은 타고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에 알맞도록 훈련시키려고 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왕국처럼 모든 정신의 왕국도 눈에 보이는 경계선과 법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석 달이 지나자 벌써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원칙들을 21개 조항으로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이 <교리문답서>―어느 정도는 개신교의 십계명으로서―는 시의회로부터 원칙적인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한 동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리를 형식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따를 것인지 하는 자유가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리문제와 생활에서 한 치의 자유도 허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종교적인 문제에서 개인의 내적인 확신을 위해 단 한 줌의 여지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직무가 설교를 마친 뒤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처럼 편안하게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으로 강요해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했다.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열 명씩 ‘장로’(長老)의 안내를 받아 교회에 가서는 오른손을 들고 장관이 낭독하는 맹세를 같이 해야만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명령을 받았다. 이 요구는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만 벗어나도 제네바 성벽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네바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단 하나의 의지 [칼빈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독재는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권력의 수단을 쥘 필요가 있다. 명령하는 사람은 형벌을 줄 권리도 함께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임용조건에 따르면, 그에게는 교회의 위반사례에 대해서 추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시의원들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해석해주는 ‘성서 강사’를 초빙했을 뿐이었다. 즉 설교를 함으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설교자를 초빙한 것이었다.
시의원들은 시민들의 법적․도덕적인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은 자신들의 재판권에 속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다른 어떤 개혁지도자들도 그때까지 시 당국에 이러한 권한이나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권위적인 칼빈은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었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이라는 수단을 도입해서 그런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만찬이라는 종교적 신비를 천재적으로 이용해서 그것을 개인적인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칼빈파 설교자는 평소 도덕적인 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만을 ‘주님의 만찬’에 와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바로 여기에 이 무기의 힘이 실려 있다―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관청이 이용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바로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상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번개를 손에 든 칼빈은 자기에게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 대담하게 움켜쥐는 행동으로 그는 번개와 천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감히 가져보지 못한 무기였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심급 과정을 거쳐야만 교인 한 명의 추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의 파문은 초개인적인 행동으로, 어떤 개인의 독단적 판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대단히 합목적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그러나 이러한 추방권을 일상적인 일처럼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거의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제네바 시 당국은 아주 애를 써서 간신히 칼빈이 요구한 대로 만찬을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 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강력한 무기를 다시는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진 뒤에 그는 비로소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총체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 국민은 독재체제의 일시적인 이점들, 그 엄격한 규율과 강화된 집단적 작용력이 언제나 개인의 권리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새로운 법칙은 예외 없이 과거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네바에서도 이제 서서히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쳐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형리의 감독 아래 있는 포로들처럼 열 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가서 교회에서 칼빈의 21개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단지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래했거나, 아니면 칼빈이나 파렐의 눈에 너무 울긋불긋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 온 설교자로부터 추방의 위협을 받으려고 엄격한 관습개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바 시민인가?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 도시의 위대함과 부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인가? 입증된 애국자인가? 수백 년 전부터 최고 가문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방금 흘러들어온 망명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여서 방과 거처를 제공해주고 좋은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온 관세징수인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형제와 친척들을 이 따뜻한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고용한 이 망명자가 이제 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경정하고 있다니!
독재 초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항이 어느 정도 뿌리를 가지는 법이다.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에서는 맹세를 거부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프랑스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도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칼빈은 자기에게 헌신적인 ‘작은 시의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 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조건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1538년 시의회에서 열세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민주주의 칼빈의 권위적인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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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7:37:29 | 관리자
공감합니다. 집 근처 장로교회에 나가 본 적이 있는데 목사님께서 성경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교회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들을 이야기하며 정말 훌륭한 분들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말씀시간을 마쳤습니다. 안전한 설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기관리를 한다고 느꼈습니다.
2013-05-20 10:46:14 | 장영락
아멘
2013-05-20 10:43:09 | 장영락
안녕하세요?
이것은 아내를 통해 아침에 들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자매(?)는 "이렇게 무서운 글에 은혜가 있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이 글이 무엇이 그리 무서울까요?
지극히 정상적인 글인데 말입니다.
신비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사는 분들에게는 무서운 글일지 모르지만
정상적으로 믿음 생활 하는 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극히 정상적인 글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의 어려움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원 저자가 개역성경을 썼으므로 성경 구절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에센스만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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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
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죄를 부추기는,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계속해서 오랫동안, 그대로 조장 되었던... <비겁한 침묵의 악들.>
침묵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다양한 언어의 색깔과 표현들이 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 함께 해야 할 목표와 방향들을 정해야 될 때
그 의견들이 제시 되 면은, 그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일관 하게 된다.
그 침묵 속에는...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그 뜻을 지지하고 함께 동참한다는 긍정의 의미가 들어가 있고
그와는 정 반대로, 나와는 뜻이 다르기에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으로 그 침묵들을 쓰기도 하며이것도 저것도 그다지 모두 다 관심이 없기에 그대로 그렇게 침묵들을 하기도 한다. 또, 우리의 여러 상황들과 오랜 정서 상조용히 있는 침묵들을, 미덕처럼 여겨왔고 여겨져왔었다. 한 두 번씩은 모두 다 경험들을 해 봤던 일들...
그것은 말하지 말아야 할 때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말해서 생겨났던 어려운 일들
또 굳이 빠르게 행동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그러함에도...그러나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또 분명하게 행동하고 움직여야 할 때 임에도 가만히 있어서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위험한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죄를 부추기는 일들에... 함께 덩달아 수없이 무언의 동조를 해 왔던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불의와 불법들 앞에, 그대로 말하지 않는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그 곳이 바로 이 시대 전혀 부끄러움들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벌거벗은 교회들이 아닐까?
오랫동안 하나님께선 불의와 불법 수많은 악들 앞에서그 악의 근원인 이유와 원인들 뿐 아니라침묵하는 절대 다수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뜻들도 계속해서 보내 오셨다.그 무지함과 안타까운 많은 연약함들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꼭꼭 집어서 다 드러내시고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데...
지금은, 침묵 할 때가 아니고... 절대로 결코, 침묵해서도 안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9,10>
교회들 속... 수많은 불의와 불법들이 일어 날 때마다하나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속에서 수도 없는 무지함 가운데그 안에서 계속 되어지는 무분별함과 무책임들 가운데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의와 불법 속에 타락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버렸고
설령, 불의와 불법들 앞에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뜻들을 알았다 해도서로의 기득권들과 더러운 이권들이 오랜 세월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 켜눈감고, 입을 다물고, 철저하게 침묵함으로...끓어오르는 탐심과 탐욕으로, 오랜 때가 찌들어가는 흉칙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렇게 까지, 이렇게 되도록 망가트려 버렸다.
이제, 이 상황들 속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그 어느 것보다... 불의와 불법들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하고 비참한 무언의 동조이다.이제 곧 이어, 그 책임들을 너무나 선명히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하나 물으실 것이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보라 이 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이사야65:2~7>
이제, 하나님의 그 모든 때가 되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영적 무지함 들과 무관심들로 함께 빚어 만들어 놓은 교만함의 축제들로 높이 쌓아올린 타락한 성들...
그 안에서... 그 속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악한 패역들의 끈질긴 고리들...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 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일에 무언의 동조들을 해 왔던 수많은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랫동안 진실들을 꼭꼭 감추고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이 시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우리들의 벌거벗은 몸,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교회들이 아닐까?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이사야5:12,13>
정녕 눈앞에서 수많은 불의가 행하여지고 도적질한 영적 권력의 남용들이 자행되어도알면서도, 보면서도, 그 권력의 폭력들 앞에서자신들의 이름과 영역, 지위와 위치들을 모두 잃어버릴까
노심초사 아무 말 하지 못하고도리어 그 권력 앞에 아부하고, 아첨하며, 묵인해 버리는 정녕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많은 모습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참 하도록...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아왔던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문제와 비리가 무엇인지는 그 권력의 혜택들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들이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 받는 영향력의 달콤함들 때문에 모두 다 쉬쉬쉬하며 꼬리들을 감추고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탐욕의 방들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은 정녕 아닌지....
"악을 선하다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이사야5:20>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 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어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8:12>
그러나 오래도록, 오랫동안 이 패역 앞에 긴긴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광과 이름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 일어나시리니... 그 때가 되면 불의와 불법들을 알면서도 도와주었던 자와 도움을 받았던 자 모두가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대의 채찍들 앞에 반드시 그대로 두렵게 서게 될 것이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레미야 6;30,31>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3>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3988?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boardType=M®dt=20130514032134
2013-05-15 14:53:5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인을 통해 옥성호 형제의 귀한 글 한 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위력 있는 설교입니다.
바른 것을 선포하는 좋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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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설교
며칠 전 만난 친구에게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더군요.
“그 목사님 설교를 한 마디로 하면 ‘안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지.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안전한 설교....다른 말로 하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없는 설교를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설교는 그 어떤 영혼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듣는 내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교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서 사라지는 설교, 내 속에서 그 어떤 고뇌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설교.....바로 안전한 설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 분의 가르침은 실로 ‘안전한 설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해 그를 죽이려고 하던가 아니면 그의 말씀에 인생 전체가 변화되거나....둘 중 하나였습니다.
안전한 설교를 달리 표현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목회자들 중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설교는 안전한 설교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나의 설교가 과연 ......성도들의 현실과는 동 떨어져 저 멀리 구름 위에서 들리는 월요일 학교 조회 시간의 ‘교장 선생님 훈시’와도 같은 그런 설교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설교로 가득찬 교회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안전한 설교에 물든 목회자와 그런 설교를 듣는데 익숙해진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현상 유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상의 평온함을 깨는 어떠 시도들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해온 것이 비록 ‘거짓과 기만, 위선’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관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참과 거짓이 아닌 일상이 제공하는 기득권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참과 거짓을 놓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소 귀에 경읽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위험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더 큰 위험과 더 많은 적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위험한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33년간 짧은 생이었지만 자신의 ‘위험한 인생’을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사는 것은 피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감당해야 할 내 삶의 몫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외쳤던 ‘위험한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어집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설교는 점점 더 우리의 예배 속에서 사라지고 우리 주변은 ‘동업자 의식’에 젖은 ‘안전한 설교’, ‘믿음의 명문가를 만들자’라는 식의 안전함을 넘어 실로 하나마나한 헛소리 설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합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로 인해 바뀌었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이 메일을 통해 내가 갈급하던 ‘위험한 설교’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다름 아닌 사랑의교회 문제들과 관련해 한 집사님이 내게 보낸 장문의 글었습니다. 그 메일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몇 년전 제 초심과 각오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지쳐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지만...그래선 안되겠지요?”
이 분의 글은, 이 분의 인생은 그 자체로서 내게 하나의 ‘위험한 설교’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강단 위에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가 실종되어가는 만큼 나는 내 주변에서 삶으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들을 더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신앙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사는 일이라는 기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Dxch/60?listURI=%2Fhowsarang%2FDxch%3FboardType%3D
2013-05-15 14:44:56 | 관리자
맞습니다.
대표적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은 사실 문제가 많은 싸이트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정보를 주고 받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팩트자료들도 많고 거짓 자료들도 많습니다. 왜곡된 교리와 베리칩을 파급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3~4년 전에 알게된 싸이트이고 제가 사랑침례교회를 알기전까지만 해도 자주 들어갔던 싸이트였습니다. 그 때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알지요
저는 최근에도 이 싸이트를 자주 방문합니다. 아직 추방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에는 글을 올리면 통보없이 삭제당하는 글들이 좀있었습니다. 그래서 댓글로 반론글들과 오류에 대한 바른이해의 글을 댓글로 수차례 달았는데 최근에는 댓글까지도 삭제당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올린글은 김문수 목사님의 이기는자는 누구인가라는 글이었습니다. 설령 기성교인이라고 해도 읽어보면 수긍하거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도 있겠다 정도라고 보는데 쪽지로 보내온 삭제이유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했다는 이유입니다. ...헐
.
운영진이 문제가 많지만 착각속에 그곳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생각해서 뭐랄까 돌이킬수 있는 이정표들을 세워보려고 했는데 그것을 막네요!
그것이 너무 속상해서 몇일전 모든 데이터를 지우고 털어버렸습니다.
왜? 라는 질문과 함께 하루종일 뒷조사 비슷한 추적을 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저는 좀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러한 사이트에 바로 알리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관련자료는 정리해서 한번 올려보려합니다.)
2013-04-28 01:31:54 | 노영기
싸이의 젠틀맨을 분석한 글을 담은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블로그에는 여러 가지 세상의 변화들을 담은 유익한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이나 회복 교회 그리고 종말론을 다루는 이런 블로그는 대부분 환난 통과를 가르치는 분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들은 열심을 다해 행위로 7년 환난가를 통과하는 것을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는 분들입니다. 스스로에게는 기쁨이 될지 모르지만 이들이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믿음을 가르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대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로서 열심을 다해 행위로 무엇인가 해 보려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통해 정보는 보되 결코 두려워하거나 행위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보여 주는 시대의 추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리 칩이 짐승의 표라고 해서 성도들을 속여 불안 속에 집어넣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평안입니다.
부디 이런 것들을 잘 분별하면서 환난 전 휴거의 복된 소망 가운데 평안히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세상이 다 변해도 안전합니다.
샬롬
2013-04-27 10:39:1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싸이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배후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싸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노영기 형제님이 올려 준 기사가 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109#c_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110
오늘 지인에게서 매우 유용한 정보가 와서 소개합니다.
안의 내용을 살펴보니 거의 다 맞습니다.
특히 싸이와 호루스를 다루는 첫째 링크를 주의 깊게 잘 보기 바랍니다.
물론 싸이가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음악을 통해 바빌론 미스테리를 이루어가는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래서 뉴에이지 세미나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안전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안에 계신 분께서 싸이를 덮은 악령인 마귀보다 훨씬 더 크십니다.
샬롬
(1) 「싸이의 Gentleman과 호루스」
http://blog.naver.com/esedae?Redirect=Log&logNo=90171244147&from=postView
(2) 가수 싸이는 장막성전(신천지의 모태가 되는 이단)의 교주였던 유재열의 사위이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48
유재열은 한국 기독교 이단 중 가장 어린 나이(18세)에 교주가 되었고 과천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신도를 이끌었다고 한다.
70년대 사기사건에 연루된후 잠적하였고, 이후 장막성전은 여러개의 이단종파를 파생시켰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이다.
유재열은 현재 스포츠제품회사와 철강회사를 경영한다고 한다.
가수 싸이는 유재열의 딸인 유혜연과 결혼하였다.
2013-04-23 23:48:48 | 관리자
설교자의 복장의 색깔까지도 단순함과 단정함으로 예수님만 드러내려는 마음의 작정이
귀감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색의 양복을 입으셨는지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구원에서부터 성화에 이르기까지 판단해야만 살 수 있는데 위트 있는 판단의 한 가지 힌트를 주시니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013-04-22 14:22:55 | 김상희
예수님을 믿은 후 생활도 단순해짐을 확연히 느낍니다.
내 것 치장(?)하던 것에서 남을 섬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를 더 이쁘게 가꿔주는, 성경말씀 읽는 시간은 양보할 수 없지만요~
요번주 유난히 사랑침례 식구들께 고맙고 저도 한 식구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2013-04-22 14:15:21 | 목영주
늘 목사님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 참으로 본이되며 은혜가 됩니다.
사랑침례교회 지체인 저희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의 모습이 주님앞에서 바를 때 교회는 저절로 주님께 영광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2013-04-22 14:04:05 | 김상희
안녕하세요?
언제부턴가 제가 항상 네이비(곤색) 양복만 입으니까
아마 목사가 옷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염려해 주시는 분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염려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 아내에게 이야기했듯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는 설교하는 날 꼭 네이비 양복만 입을 것입니다.
신학원 강해의 경우에는 배경이 블루이므로 대개는 그레이를 입을 것입니다.
네이비 양복만 입으려는 것은 제 마음에서 작정한 것입니다.
목사의 양복과 넥타이가 너무 화려하면 자기가 영광을 받게 되고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로서 설교를 하는 한 춘하추동 항상 네이비만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네이비 양복을 입고 오면 그 날은 설교를 하는구나 하고 판단하시면 됩니다(ㅎㅎ).
샬롬
패스터
2013-04-22 11:50:47 | 관리자